상주학/상주학 제4권

상주학. 삼백(三白)의 연원과 정체성 확립

빛마당 2016. 3. 29. 19:26

삼백(三白)의 연원과 정체성 확립

곽 희 상(상주향토문화연구소장)

Ⅰ. 들어 가면서

흔히들 주위에서 일컫는 삼백(三白)의 고장의 고장이라 함은 상주 지역을 말함이고, 이는, 쌀곶감누에고치를 말한다. 모두가 흰색을 띠고 있어 백의민족과 가장 어울리는 정겨운 단어이다. 사실 그 이름을 얻은 것은 그리 역사적으로 오래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연원(淵源)은 전국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상주만의 독특한 애칭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상주가 웅주고도(雄州古都)라 하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을 내 놓지 않는다. 하지만, 고문헌에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행히, 지난 2001년에 경상북도 문화재연구원에서 낙동∼상주간 국도 25호선 확포장 공사 구간에 편입된 신상리 토지 224㎡(68평)를 발굴조사 하면서 빙하기의 토층과 약 14∼15만 년 전의 전기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긁개 1점, 찍개 1점, 복합석기 1점, 부스러기 1점이 출토되었다.

또한, 낙동면 신상리 산1-9번지 일대의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쪽과 남쪽 및 서쪽의 경사면에 많은 유적과 유물이 분포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구석기의 유물출토는 이 시기에 상주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것이 입증되고, 따라서 어느 지방보다도 일찍이 농업이 발달할 역사적,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다고 하겠다. 불행히 아직까지 학계에 신석기 유적이 보고되지 아니한 점이 있으나, 상주시 복룡동 유적(국가 사적 제477호. 2007.5.31)의 건너 편에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보고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상주의 별칭(별호)은 고려 성종 순화연간(990∼994)에 상락(上洛)․상산(商山)이라고 불려져 왔지만 최근 들어서는 삼백의 고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누구나 상주를 예부터 삼백의 고장이라 불러 왔다고 한다.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고 당연시 해 온 삼백의 고장 – 그 연원을 살펴 보기로 한다.


Ⅱ. 우리나라의 삼백산업(三白産業)

삼백(三白)이란 용어는 1950년대 한국 산업의 3대 성장 부문인 제분·제당·면방직 공업을 지칭하면서 이 3대 산업을 삼백산업 또는 삼백공업이라 하였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귀속재산을 시설기반으로 하고 그 원료의 대부분을 미국의 경제원조와 융자에 의존하여 국내시장 본위의 기업을 경영했다. 삼백산업의 경영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은 주로 경제원조에 의한 해외로부터의 원료도입에 의하여 그 생산업자들에 의한 원료 카르텔(원료공동구입체)의 형성이다.

이는 원료의 취득과정에서 원료의 경쟁가격 형성을 지양하기 위한 것으로 삼백산업은 각 업종마다 한국제분공업협회·대한방직협회·대한제당협회를 결성, 각 협회가 제조업자를 대표하여 원료도입 자금의 불하를 받아 이를 각 산하기업에 분배했다. 이렇게 삼백산업은 새로운 업체의 신규가입을 제한하고 원료를 독점하는 한편 6·25전쟁 후의 격심한 인플레이션 진행과정에서 발생한 외국환의 공정가격과 실질시장가격 간의 격차를 이용, 막대한 이윤을 거두었다.

이들 업종은 원료의 배분에 있어서 보유시설 규모가 유력한 기준이었기 때문에 경쟁적으로 시설을 확대, 1957~58년경에는 포화상태에 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대한원조정책의 전환에 따라 장기적인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Ⅲ. 삼백의 고장이라고 이름 지은 경위

삼백(三白)이라는 용어는 이미 국가에서 사용해 왔다. 이를 우리 고장에서는 실제적으로 내 고장의 랜드마크화 한 것이 우리 상주인이다. 이에 따라 삼백의 고장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역사적으로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나 상주는 삼백(三白)의 고장으로 불리는데 조금도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음은 상주인 모두가 공감을 하고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충분한 명분이 자리를 잡아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또한 최근의 산업적으로도 볼 때 이에 대한 역사적 배경은 충분하다고 본다.

다시 말하자면, 삼백은 상주이고 상주하면 삼백으로 이름이 났다. 최근에는 삼백 중에서도 곶감이 전국 생산량의 60%를 차지하고 있으니 이제는 상주하면 오히려 곶감이 더욱 유명하리라 느껴진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삼백이라 함은, 흰 빛깔을 상징하는 즉, 쌀 ․ 곶감 ․ 누에고치를 지칭한다. 지난 날, 일제 강점기에는 곶감 대신 목화가 들었다고 기록도 있으나, 조선 시대 이상의 기록에서는 삼백이란 명칭이 없다.

이에 대한 명칭을 사용하게 된 유래를 살펴보면, 처음으로 표상(表象)한 그림이 1957년에 간행한 상주경제자립연구원(尙州經濟自立硏究會) 편찬의『상주대관(尙州大觀)이다. 이는 향토지인데 여기에 상주풍년가 삽화(揷畵)로 그려 놓았다. 화정(禾呈, 본명 미상)이란 사인이 있으나 누구인지 아직 밝혀 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주문화원에는 『상주대관』마저도 안타깝게 분실되었다. 이 책에 상주를 삼백의 고장으로 의식한 그림인 누에고치, 쌀, 곶감을 남겨 놓았다.

이름을 얻게 된 경위를 살펴보면, 1970년대 초 상주군의 자문에 의해 상주문화원(원장 이준호, 제정위원 류시완, 박윤성 등)에서‘삼백향(三白鄕),‘삼백(三白)의 고장이라 명명하였다.

또, 고 류시완(柳時完) 선생의 증언으로(1992. 3. 5),‘삼백(三白)의 고장이라 명명한 것은 이희영(李羲榮) 상주문화원 원장 시절인 1960년대 초반, 당시 국가재건운동이 국민운동으로 정착될 때(새마을운동은 1972년부터 시작되었음) 농촌에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이에, 당시의 향토사학자였던 몇몇 분들이 모여 국가정책에 발맞추어 상주 재건(再建)을 위한 향토 가꾸기의 정신적 고조로서 상주를 '삼백(三白)의 고장'이라 명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 문화원 자문위원을 맡으셨던 강사(江史) 류시완 선생을 비롯하여, 당시 상주문화원 박윤성(朴潤成) 사무국장과 문화위원 몇 분 사이에서 비공식적이나마 협의 하에 인정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 고장을 ‘삼백의 고장이라 부르게 된 경위이다.

이 같이 이름을 짓게 된 배경은, 농본주의와 농경사회에서 상주문화를 집약한 대명으로서는 적절한 것이었다 할 수 있거니와, 한 세대가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는 영남만이 아닌 전국적으로도 상주는 삼백의 고장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제는 타당성이랄까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선행되어 학문적으로도 삼백의 고장하면 바로 상주라는 정착을 기대해 본다.


Ⅳ. 삼백(三白)과 그 연원(淵源)


1. 쌀


가. 재배 역사

쌀은 밀, 보리와 함께 세계 3대 곡물의 하나이다. 벼(Oryza sativa)는 벼과(科) 벼속(屬)에 속하는 1년생초로 전 세계에 널리 분포한다.

벼농사의 기원에 관해서는 인도 기원설, 동남아시아 기원설, 윈남[雲南]-아삼 기원설, 중국 기원설 등이 있는데 6,500~1만 년 전인 청동기시대부터 이들 여러 지역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고 이들 지역에서 세계 여러 곳에 전파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에는 지금부터 3,000~4,000년 전에 중국의 중북부지방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한국과 중국에서 발견된 벼의 유적에 근거한 것이다. 경기도 여주군 흔암리의 탄화미(炭化米)는 약 3,000년전, 김포군은 약 4,000년 전, 평양의 대동강 가는 약 3,000년 전, 충청남도 부여는 약 2,600년 전, 전라북도 부안은 약 2,200년 전, 그리고 경상남도 김해의 탄화미가 약 1,9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어 한강이나 대동강 유역에서 시작된 벼농사가 한반도의 남쪽으로 전파되었음을 보여주는데, 상주에서 탄화미 관련 기록은 없다.

이앙(移秧)재배에 대하여도, 이앙도작법(移秧稻作法)이 중국의 한대(漢代)에 비롯되었다 하니 이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이앙법이 행하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429년에 편찬된 『농사직설의 종도조(種稻條)에 따르면, 직파법으로 담수직파법인 유수경(有水耕)과 건답직파법인 유건경(有乾耕)이 기록되어 있고, 이앙법으로 유삽종(有揷種)이 서술되어 있다. 또한, 1698년(숙종 24)과 1838년(헌종 4)의 기록을 보면 관에서 수리조건이 불비한 곳에는 이앙법을 금지하였으므로 실제적으로는 19세기까지도 부진하였던 것 같다.


나. 쌀의 역사적 농업 환경

우리 지역의 고대 농업환경에 대하여 살펴보면, 상대(上代)에 읍성국가였던 고녕가야국(한자의 원음표기)이나 사벌국이 이미 존재하였고, 논농사 발전의 절대적 요건인 물은, 낙동강을 비롯하여 함창에 이안천과 영강이, 상주에는 남천과 북천이, 서부에는 중모천이, 동부에는 장천과 위천 등으로 골골이 평야를 이루고 있다.

관개시설로는 삼한시대 내지 고녕가야국시대에 축조되었다는 공검지(恭儉池)가 있다. 구전으로 전해오는 민요인 공갈못의 채련요(採蓮謠, 연밥따는 노래)는 노동요(勞動謠)로서 힘든 농작업을 대변해 주고 있다. 초산동의 상주민요(도 무형문화재 제13호, 1987.5.13 지정)도 벼 농사의 힘든 전 과정을 노래로 달래고 있다.

상주에서 벼 농사 관련 최초의 기록으로는, 465년 5월에 사벌주에 황(蟥, 메뚜기)이 극성했다는 기록이 있고, 아자개는 농사로 자수성가하여 장군이 되었다는 삼국사기 열전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상주 사록(司錄) 최정빈(崔正份)이 공검지를 중수하고 1196년 6월에 백운(白雲) 이규보(李圭報)를 상산관(당시는 여사, 旅舍)으로 초청하여 주연을 베풀었다는 기록(동국이상국집)으로 보아도 관개시설을 매우 중요하게 여김은 바로 벼농사를 염두에 두었다고 하겠다. 또한 고려조인 1380년(우왕 6) 8월에 왜구가 손시제(孫時制)를 우두머리로 하여 500여 척의 배를 타고 금강 어귀에 있는 진포(鎭浦, 현, 서천)에 상륙한 후 식량을 구하기 위해 상주까지 침공하였음은 곡창지대로서 이미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리라.

조선시대에는 『만기요람에 전국에서 제언(堤堰, 못)수가 가장 많은 고장이 경상도이고, 전국 제언의 절반을 차지함으로써 수리사업이 일찍부터 활발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니 낙동강 유역에 발달한 평야에서 벼농사의 중심지가 바로 상주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벼 농사를 강조한 선비로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 1553∼1623, 산양면 출신)은 농사학에 일가를 이룬 선비로〈농가월령(農家月令)〉및〈효빈잡기(效嚬雜記)〉등을 지었고, 박천(博泉) 이옥(李沃, 1641∼1698)도〈무본도설(務本圖說)를 지었으며,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 1762∼1834)은〈상농서(上農書), 1798에서는 벼농사의 직파를 지양하는 파종법을 권장하였는 등 당대 상주의 학자들은 실학적 안목에서 농사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배경은 노론세력의 집권으로 영남의 남인계 사류들의 가학 전승과 생계수단의 자구책이라 여겨지는바 이러한 사실들은 상주의 농사가 타 지역에 비해 앞섰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보겠다.

특히, 근세에는 경북의 미곡창고로 불리어, 6.25 동란 때에는 경북 총 생산량의 35%를 차지(상주대관, 1957)한 바도 있다. 또한 1982년에서 1987년까지는 추곡수매에서 3등품이 없는 양질의 쌀을 생산하였고,‘85년에는 강원도 전체 수매량의 두 배에 해당되는 생산을 하였다.


2. 곶감

곶감은 감나무에서 감을 수확하여 껍질을 벗기고 말리면 표면에 하얀 가루(당분)가 생기는데 한자로 시설(柿雪)이다. 이 시설이 생긴 것을 곶감이라 한다. 지금은 건시(乾柿)라고 하여 최근의 주 상품인 반건시와 구별이 된다.

감의 원산지는 한국, 중국, 일본이며, 현재 주된 품종은 “상주둥시이다. 감에 대한 우리나라의 최초 기록은 고려 고종(재위 1213∼1259)때의 한의서인 『향약구급방(가장 오래된 한의서)에 기록이 있어 아마 고려시대에 재배가 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곶감과 관련한 역사적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상주에서의 역사적 기록은, 조선조『예종실록』(권 2)에 즉위 년(1468) 11월 13일(己巳) 조에는 “지금 곶감(乾枾)의 진상을 상주에 나누어 정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곶감을 대궐에 진상했다는 의미이다. 또한, 1530년(중종2)『신증동국여지승람』《상주목》〈토산조에도 감(枾)이 있다.

본격적으로 재배된 것은 조선 초, 곧 15세기 후반으로 짐작된다.『상산지(창석본)에는, 상주에서 장원서(掌苑署)에 바친 공물로 “호도 11두ㆍ모과 10개ㆍ생율 2두ㆍ홍시 30개이고, <토산>조에도 감이 기록되어 있다.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1664∼1732)선생의 문집인 『식산선생별집』(권 1)의 「누항록(陋巷錄)」〈노곡기(魯谷記) 편에,“감에는 7절(七絶)이 있는데, 첫째는 수(壽)요, 둘째는 다음(多陰)이며, 셋째는 무조소(無鳥巢)요, 넷째는 무충두(無虫蠹)요, 다섯째는 상엽가완(霜葉可翫, 단풍이 예쁨)이요, 여섯째는 가실(嘉實)이며, 일곱째는 낙엽비대(落葉肥大, 낙엽도 곱고 큼)이. 그런 까닭에‘우심홍주(牛心紅珠, 붉은 과일)라 불리었다.

옛날에는 주시(朱柿), 홍시(紅柿), 비시(椑柿, 먹감)가 있었는데 오늘날은 품종도 더욱 많아졌고 영제(寧堤, 경기도 화성)의 수시(水柿), 대가야(大伽倻)의 고종시(高種柿)가 가장 드러났고, 상주(上州)의 대홍시(大紅柿)는 실제로 기품(奇品)이다.라 하였다. 이로써 보면 상주의 대홍시(大紅柿)는 18세기까지도 유명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감나무는 그 목재가 단단해서 화살촉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무(武)를 상징하며, 겉과 속이 같으므로 충(忠)이다. 홍시(紅枾)는 이빨이 없는 노인도 먹을 수 있으므로 효(孝)이다. 늦가을 서리를 이기고 오래도록 매달려 있으니 절(節)이 있다고 여겼다

상주는 감나무 재배의 적지로, 외남면 소은리에 10㏊ 규모로 2008년부터 4년간 “상주곶감 테마도시 숲 조성”사업에 1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추진하였다. 외남면 소은리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접목재배 감나무 즉,‘하늘아래 첫 감나무 1그루가 조선시대(약 530년 전)에 식재되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감나무를 유전자 감정기관인 국립산림과학원 식물법의학연구팀에서 전자 감정결과, 이 감나무의 뿌리와 잎의 시료를 채취하여 DNA 분석 결과 게놈이 동일하지 아니하다는 결론으로, 이는 우리나라 접목재배의 기원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DNA 감식결과는, 이 감나무가 종자로 번식된 실생 개체가 아니라, 유전적 배경이 다른 감나무 대목(臺木, 지하부)과 접수(接穗, 지상부)가 인공적으로 붙여져서 자란 나무로 판명됨에 따라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접목재배 나무가 된 셈이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감나무는 경남 의령군 정곡면 백곡리의 당산목(고욤나무)이다. 지금까지 최초의 접목나무는 대구시 평광동에 식재되어 있는 홍옥(사과나무, 수령 81년)으로 등재되었다.


3. 누에고치

상주는 양잠(養蠶)의 고장이었다. 누에는 곤충으로서, 뽕나무 잎을 따서 먹이면 이 누에가 고치를 짓는데, 이 누에고치가 보기에 매우 하얗다. 이 고치에서 명주(明紬)를 생산하여 의복(衣服)을 만들었다.

예로부터 조선은 농본사회로 ‘농상(農桑)’이라는 말에서 전하듯 농사와 함께 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쳐 비단을 짜는 일은 조선시대 나라의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였다. 나라에서는 궁의 후원에 뽕나무를 심어 가꾸며 일반인들에게 양잠을 권장하였는데, 조선조 궁에 뽕나무를 심었다는 최초의 기록은 「태종실록」(태종 9년 3월 1일)으로 창덕궁 건립 후 태종 9년(1409) 중국 주(周)나라 성왕(成王)의 공상제도(公桑制度)를 본 떠 궁원(宮園)에 뽕나무를 심도록 명한 것이 공식적인 최초의 기록이다.

그 후,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1417) 5월 24일 기사에, 《농상집요에 양잠방을 번역·반포하는 등의 방법으로 양잠을 장려하다

“경기 채방 판관(京畿採訪判官) 권심(權審)이 황진사(黃眞絲, 명주)와 누에고치[繭]를 올렸다. 처음에 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이행(李行)이《농상집요(農桑輯要)》내의 양잠방(養蠶方)을 뽑아 내어, 자기 스스로 경험하였더니 수확이 보통 때의 배(倍)나 되므로 드디어 판간(板刊)하여 세상에 행하게 하였다. 국가에서 민간(民間)이 중국어를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정4품) 곽존중(郭存中)에게 명하여, 우리나라 말[리어, 俚語·속된 말]을 가지고 〈양잠방〉귀절에 협주(夾註)를 내게 하고 또 판간하여 광포(廣布)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본래부터 익혀 온 것이 아니라서 모두 양잠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다시 명하여 각도에서 한광(閑曠)하고 뽕나무가 있는 곳을 택하여 채방(採訪)을 나누어 보내고, 전농시(典農寺)에 속한 노비(奴婢)에게 그 잡역(雜役)을 면제하여 주며 그들로 하여금 양잠하여 민간에 보이게 하였다. 또 후궁(後宮)으로 하여금 친히 자양(自養)하게 하여 많은 소득을 얻었다.

또한, 「성종실록」에도 왕이 승정원에 양잠의 중요성을 말하며 후원에 뽕나무를 식재토록 하고, 후원에서 왕비가 친히 누에를 치고 인간에게 처음으로 누에치는 법을 가르쳤다는 양잠의 신(神) 서릉씨(西陵氏)에게 제사를 지내는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양잠은 예로부터 나라의 귀중한 산업으로 왕실에서는 뽕나무를 매우 중요시 여겨왔다. 1911년, 창덕궁 후원 주합루 좌측 서향각에서 조선총독부가 양잠소로 만들고 친잠례를 거행하였으며, 주합루에서도 1925년 6월 17일, 1929년 6월 15일, 1939년 6월 26일 친잠례가 거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상주에서 최초의 기록은, 1379년(고려 우왕 5)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쓴〈육익정(六益亭, 청리 청상 저수지 내, 1987년 축조)의 기문에 나온다. 즉, 청효현의 진사 김직지(金直之, 1324∼?)는 시문에 능했으나 과운(科運)이 없어 고향에 은퇴하여 육익정(六益亭)을 지었는데 정자 주위에다 소나무(松), 대나무(竹), 국화(菊), 뽕나무(桑), 밤나무(栗), 버드나무(柳)를 이로운 벗으로 삼고 주위에 심었다고 한다. 뽕나무를 육익(六益)으로 삼았음은 양잠을 중히 여겼던 사례라 하겠다.

조선조에는, 1535년에 세워진 손중돈(孫仲暾)목사와 권기(權祺)목사의 선정비(상주박물관 소재)에 잠업을 주민들에게 권장한 내용이 있다.

향토의 선비로 태촌 고상안의 〈농가월령(農家月令)과 〈효빈잡기(效嚬雜記)上券에도 양잠의 요결(要訣)에 대한 탁견을 보였다.

최근의 사례로, 『잠업 25년사에는 이안면 문창리에 일대에 250여 년 된 묵은 뽕나무가 42그루나 있었다 하나 현재는 고사(故死)되어 없으며, 은척면 두곡2리 324번지에 도 기념물 제1호(1972.12.29 지정)인 수령 350여 년 된 뽕나무가 높이 12m, 수형 전체의 지름이 20m가 넘는 거목이 있다.

또한, 경북대학교 상주캠퍼스의 전신인 상주농잠학교(尙州農蠶學敎)는 1921년에 설립되어‘농잠으로서 한국 최초의 학교였고, 경상북도 잠종장이 있었으며, 상주산업대학교에 잠사학과와 견섬유공학과가 있었다. 지금은 잠종장이 함창으로 이전되면서 경상북도 잠사곤충사업소로 기구가 개편되고, 이 곳에 잠령비를 세워 놓았다.

음은 이 고장이 양잠의 고장임을 확인시켜 주는 예라 하겠다.

실제로, 지난 1974년에는 누에고치 1,090톤을 공판하여 전국의 생산량(37,178t)의 3.0%, 경북 생산량의 9.2%로 이는, 전국 제 1의 누에고치 생산지이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쌀과 같은 위기에 봉착해 있어 양잠농가는 40여 호에 뽕밭 면적은 19㏊이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누에고치대신 목화를 이야기 하는 것은, 『동방학지신영우(申榮祐) 교수가 쓴 논문 「1894년 영남 상주의 농민군과 소모영에는, 누에고치 대신 목화(棉)를 대신하고 있다. 즉, 상주 함창의 면작(綿作)은 진주, 안동, 의성과 더불어 가장 면(棉) 작업이 가장 성한 지역으로 분류하였기에 간혹 목화가 거명되기도 한다.

누에의 혼을 달래주는 잠령제(蠶靈祭) 즉, 잠녀이야기가 일화로 전해 온다.

“옛날 잠녀(蠶女)란 예쁜 처녀가 살았다. 망나니 아들을 잠녀에게 장가 보낼려는 이웃 마을의 행세께나 하는 집안의 강권에 응하지 않았기에 어느 날 그녀의 아버지를 납치해 갔다. 어머니는 청년들을 불러 놓고 잠녀이 아버지를 구해오는 자에게 잠녀를 시집 보내겠다 했다. 그러나 후환이 두려워 선뜻 나서지 못했는데, 잠녀의 집에 있던 말이 이 말을 듣고는 며칠 후 잔등에 태우고 돌아 왔다. 하도 고마워서 기름진 먹이 등을 주어도 울어 대기만 하였다. 달래도 보았지만 허서였다. 사실 사람과 짐승이 짝이 될수 있겠는가라는 소리를 들은 말은 행패를 부리자 말을 죽여 버렸다. 말의 가죽을 벗겨서 마당에 널었는데, 잠녀가 이곳을 지나자 잽싸게 잠녀를 보쌈하여 어디론지 사라졌다. 수소문 하고 찾았으나 허사하고 보름이 지났다. 잠녀는 이미 누에로 변신하여 뽕나무 위에서 뽕잎만 갉아 먹었다.‘이를 어찌할꼬’하면서 빌고 빌었지만 환생되지 않았다. 다섯 잠을 자고 난 누에는 드디어 실을 뽑으며 하얀 집을 짓고 이곳에서 겨울을 났다. 사람으로 환생이 아니고 나방으로서의 부활을 위함이다.”

잠령제는 영원히 사람으로 환생할 수 없는 잠녀의 애타는 한을 달래주고 이를 풀어주기 위한 기제(忌祭)가 오늘 날 잠령제를 지내는 풍습으로 바뀌었다. 최근들어 경상북도 잠사곤충사업소에서는 잠령제를 지내고 있다.


Ⅴ. 삼백의 정체성 확립 방안


1. 쌀

최근들어 수입개방과 이농현상으로 농촌에는 빈 집과 노인만 남았으며, 농업인구가 약 40%의 농업도시이나, 이제는 미작(米作)만으로는 이중 생활고에 시달리는 정 반대의 생활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생산한 쌀도 다 못 먹는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쌀에 대한 소비문화가 변화되었다. 우리나라 연간 쌀 생산량과 소비량을 보면 다음과 같다.

(표3, 우리나라 연간 쌀 생산량)

(단위: 천톤)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비고

4,407

4,843

4,916

4,295

4,224

4,006

4,230

쌀의 생산량은 기상과 밀접하다. 가뭄⋅장마 ⋅태풍 등의 자연재해가 생산량과 직결되나 최근에는 경지면적의 감소에도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최근 2004년에 5,000,149톤을 생산한 이래 매년 줄고 있는 추세이다. 그래도 쌀이 남아 돈다고 한다. 쌀 소비의 변화 때문이다.

(표4, 1인당 연간 쌀 소비량)

(단위, ㎏/%)

구 분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비고

소 비 량

76.9

75.8

74.0

72.8

71.2

69.8

67.2

전년대비

-1.4

-2.4

-1.6

-2.2

-2.0

-3.7

쌀의 소비량도 국민 1인당 2004년 82.0㎏인을 소비하다가 10년이 지난 2013년에는 67.2㎏을 소비하여 1인 평균 18.0%를 덜 소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인구를 약 5,100만 명 정도라고 보면 2013년의 경우 쌀의 소비량은 3,427,200톤 정도로서 당해년에 802,811톤 가량의 남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에는 지난해 남는 쌀이 또 있다.

최근 쌀 시장 전면 개방 정책이 보도가 됨에 따라 걱정이 된다. 소고기의 경우 배를 타고 온 수입산이 한우보다 가격이 더 싸다. 쌀도 배를 타고 왔는데도 더 싸다면 심각해 질 것이다. 쌀 농사를 한우(韓牛)⋅한돈(韓豚)과 같이 한미(韓米)라고 해야 될는지......

상주시에서는 그동안 미질의 향상과 대표 브랜드 지정에 노력 해 온 결과 명실상주 쌀(상주농협 RPC), 삼백 쌀(함창농협 RPC), 풍년쌀 골드(풍년 RPC), 유풍 청결미(상일 RPC), 명실상주 탑라이스(아자개영농조합법인)가 있다. 그 결과 상주 쌀의 품질부문에서 우수함이 입증되었다. 특히 각종 전국단위 평가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둠은 수상 자체의 의미도 있겠으나 브랜드 가치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철저한 품질관리를 통하여 곡창의 고장으로서 대표적인 쌀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개별적인 브랜드가 너무 남용되어 무엇이 실제적으로 대표브랜드인지 햇갈린다. 이에 이들을 통합하여 상주쌀을 하나의 대표 브랜드화로 마케팅 전략을 세웠으면 하는 바이다.


2. 곶감

최근 5개년 간 우리 지역에서 생산되는 둥시 생감과 곶감 생산량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구분

생산농가(호)

재배면적(ha)

생산량(톤)

비고(20kg당)

평균

6,932

1,809

21,858

25,200원

2011

6,119

1,595

17,837

28,000

2012

6,500

1,710

20,011

28,000

2013

8,100

1,870

15,000

28,000

2014

8,200

1,900

23,000

14,000

2015

5,741

1,974

33,446

24,000

(표1. 년도별 상주둥시 생산량)

상주 둥시감의 생산 농가는 대규모화 됨에 따라 생산 농가는 점차 감소하고 재배면적은 증가하고 있으며, 생산량은 년도별 작황에 따라 격차가 심하게 보이고 있다. 전 농가가 양질의 감을 생산하기 위한 고급의 재배기술 교육 등이 요구된다.

(표2. 년도별 상주곶감 생산량)

구분

생산농가(호)

생산량(톤)

생산액(억원)

비고(호당)백만원

평균

4,026

9,073

2,256

56,036

2011

3,375

8,755

1,506

44,622

2012

3,791

9,284

2,506

66,103

2013

4,600

6,500

2,036

44,260

2014

3,852

9,500

2,235

58,021

2015

4,513

11,298

2,998

66,430

년도별 곶감의 생산현황은 생산농가가 증가하면서 생산량도 점차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호당 농가소득 또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무공해 산업인만큼 앞으로 산업화가 요구된다.

상주시는 전국 최상의 품질과 최대의 생산지로서 감의 재배면적과 소비량이 증가하고 있는 상주곶감에 대하여 기능성 생물소재를 발굴하여 농산물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신활력 사업의 일환으로 곶감의 유효성분 및 생리활성화에 대한 분석을 추진해 왔다. 경북대학교 최용화 교수와 계명대학교 이인선 교수팀에 의뢰한 결과에 따르면, 곶감에는 스코폴리틴(scopoletin) 성분이 함유되어 항혈전 작용과 성인병인 고혈압의 개선 효과 즉, 혈액 순환에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곶감에는 술로 인해 부족해질 수 있는 비타민 B군의 일종인 엽산(葉酸, 프테로일글루탐산)의 함유량이 높고, 에너지 효율이 좋은 과당과 비타민 C도 많다. 저장성이 좋아 언제든지 간단한 술안주로 제격이며, 호두와 함께 먹으면 맛이 좋을 뿐 아니라 콜레스테롤 수치도 낮아진다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효능을 살린 건강보조식품의 개발이 급선무이다. 우선 양질의 곶감을 만드는 방안도 지속적으로 연구되어야 하겠지만 기능성 제품 개발에 대한 용역사업은 더욱 확대되어야 하겠다.

다음으로, 소규모 농가의 대책이다. 각 가정별 소규모 임가 건조시설로는 각종 재해에 취약하고 품질 또한 기대하기 힘든다. 이들을 소규모 작목반으로 구성하여 건조만이라도 공동건조저장시설을 통한 품질관리가 시급하다고 하겠다. 상주시에서 점차적으로 추진한다는 소식에 자못 기대가 크다.

셋째, 상주곶감의 고품질화와 하품 처리의 적정성이다. 고품질에 대해서는‘송해’를 통한 TV 광고에서 효과가 상당하리라 여겨지며 지속적으로 홍보가 요구된다. 하품(파지)에 대하여도 활용방안을 모색하여 품질의 저하를 대비하여야 하겠다. 즉 하품을 이용하여 곧 출시될 곶감 막걸리나 곶감 떡국, 가축 사료에 대하여도 다양한 용역사업으로 해결책을 강구하여야 하겠다. 곶감 떡국은 곶감과 쌀을 소비하는 1석2조이다.

마지막으로, 대도시에 곶감자판 판매기 설치이다. 당장은 어렵겠으나 이것도 개발만 되면 소비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즉, 아이스 홍시나 홍시 주스 또는 곶감을 1회용 커피자판기와 같이 판매되도록 개발하는 것이다.

상주 곶감의 캐릭터는, 곶감과 호랑이를 형상화 한“꼬까미와 호이고, 공동브랜드는 “천년고수(千年固秀)이다. 그동안 품질과 가치향상에 줄곧 노력해 온 결과, 대한민국 브랜드 대상에서 우수상(지식경제부, 2008)을 수상한 바 있고, 대만 등에 곶감 5톤(1억원)의 수출 실적을 올리는 등 소득향상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다만, 앞으로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인하여 재배 한계선이 북상하고 있어 걱정이 되며, 지금부터 대체품종의 육성도 서둘러야 하겠다.


3. 누에고치

최근들어 경상북도의 누에 사육 현황과 오디 재배 농가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표 4, 누에 사육 현황(경북))

구분

1997년

2000년

2005년

2013년

2014년

2015년

비고

사육농가

976

1,010

869

374

366

451

뽕밭면적

370

366

413

266

272

274

호당0.74㏊

누에사육량(상자)

13,610

9,996

9.245

7,632

8,014

8,104

호당 21.8상자

경상북도는 전국 대비 51.2%를 점유하고 있으며, 매년 감소 추세에서 2015년에는 전년대비 다소 증가 추세로 전환하였다. 상주시는 25농가에 30㏊의 뽕빹에 14,100㎏의 고치를 생산하고 있다

(표5, 오디재배 현황(경북))

구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비고

오디재배농가 (호)

399

421

413

384

337

286

오디재배면적 (ha)

132.5

147.9

147.6

162.2

167.0

113.3

호당0.4ha

생 산 량 (톤)

115.6

236.9

377.5

336.9

378.2

340

호당1.2톤

최근들어 오디의 재배에 관심이 높아졌다. 한동안 증가하다가 감소재배 추세이며, 2014년의 경우 현저히 줄었다. 상주시에서는 121농가에 40㏊의 면적에 오니 137.5톤을 생산하고 있다. 단위 생산량의 증가로 총 생산량에는 큰 변화가 없으나 이 또한 노동력 문제로 점차 감소추세이다.

뽕밭이 조성된 지역의 관개수리 시설 지원 등의 대책도 요구된다.

우리 지역에서 현재의 양잠산업은 누에고치의 생산보다는 기능성 양잠산업으로 어린 누에를 급속하게 건조시켜 누에가루로 환(丸)을 만들고, 또한 ‘동충하초를 상품화 하여 당뇨병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인정받음으로써 이제는 농가소득의 한 축을 이루는 추세이다.

양잠업의 진흥을 위해 경상북도 잠사곤충사업장에서는 농촌진흥청과 연계하여 전통 양잠산업 기반유지 및 기능성 양잠산업을 함께 발전시키는 한편, 유용곤충 유전자원 보존·증식 및 기술보급 확대 등을 통해 곤충의 새로운 가치 인식확대와 곤충산업 활성화를 선도한다고 한다.

또한, 최근 경북도는 2017년부터 2020년까지 4년간 상주시 함창읍 일원 등에 총 1700억 원을 투입하는‘명주 융·복합 특화단지 조성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함창읍 함창명주테마파크 일원 70만㎡ 부지에 명주 융·복합 특화단지 거점지구를 조성하야 명주 관련 교육·연구·가공시설 등을 갖추고 이안면 구미리, 안룡리 일원에 국내 최대 규모의 뽕나무 생산단지를 조성하고, 종합지원센터를 건립해 실크펩타이드-누에고치에서 추출한 단백질생산 기업을 유치하며, 입는 실크에서 ‘바르고, 먹고, 치료하는’ 실크로 기능성을 가미한 제품 개발을 추진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과거 1970년대까지만 하여도 우리나라가 세계 4위의 잠업국가로, 또한 상주는 전국 최대의 양잠고장으로서 위상을 떨쳐 왔다. 명주박물관이 건립되었고, 이어서 한복진흥원도 건립이 추진되고 있으며, 또한 대규모의 뽕밭을 조성하여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잠업이나 비단 등 양잠 관련 종합시설이 집중되면 함창 이안지역의 발전은 물론이다.

이에, 어느 한 마을을 양잠마을로 집단화시켜 마을 전체가 양잠업을 하도록 하고 대신 일정 소득액을 보전해 주는 시책의 제도적인 보완이 급선무라 요구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집약적인 각종 시설로 이는 전국적 견학코스가 되고, 이 밖에 관광 활성화를 위해 전통 뽕나무길(비단길) 코스 마련 등의 대책도 검토 요구된다.


Ⅵ. 결론

이상에서 삼백의 고장 - 상주, 즉 쌀⋅곶감⋅누에고치는 상주를 대표하는 농산물로서 이들을 삼백이라 칭하게 된 경위와 각 품목별로 역사적 사료들을 살펴 보았다.

삼백이란 용어는 예부터가 아니고 1970년대부터 사용되어 왔으며, 앞으로 삼백의 연원과 정체성의 확립은 학술용역을 한 후에 당위성을 확보하고 홍보함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특히, 쌀은 많은 브랜드를 통일화 하는 방안을 모색하여 상주쌀 하면‘000’이다 라고 할 수 있으면 좋겠고, 곶감은 소농과 하품의 처리방안을 위한 별도의 용역과 1회용 판매기 즉 자판기 판매도 개발함이 소비 촉진을 위함이라 하겠다. 또한 지구 온난화를 대비한 품종의 개발도 병행해야 되겠다. 누에고치는 기능성 식품의 개발을 위한 연구용역사업을 확대하고 명주박물관 인근지역의 특정마을을 100% 양잠마을로 변모시킴으로서 명실 상부한 양잠고장의 명예를 회복하리라 사료된다.

최근들어서 상주하면 곶감이고, 곶감하면 상주를 상징한다. 전국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는 것도 우연이 아닐 뿐 아니라, 브랜드 가치가 상승하고 있음은 상주시에서의 집중적인 노력을 간과할 수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타 지역의 추월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

상주는 국토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지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삼백의 연원과 정체성을 밝히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면 상주의 농업은 타 지역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