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4권

상주학.<금요사랑방 제 81강> 임정(臨政) 국무위원(國務委員) 김성숙(金星淑)선생의 생애(生涯)와 사상(思想)

빛마당 2015. 12. 17. 21:27

<금요사랑방 제 81강>

임정(臨政) 국무위원(國務委員)

김성숙(金星淑)선생의 생애(生涯)와 사상(思想)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I. 머리말

김성숙(金星淑, 1898~1969)선생의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그리고 승려의 신분(身分)으로 항일운동을 하였고, 중국으로 건너가서는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민족통일을 위한 좌우합작(左右合作)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5.16 군사혁명 이후에는 혁신계 중진으로 정치활동을 하다가 1969년에 71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선생의 삶은 묘비명(墓碑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조국(祖國)의 광복(匡復)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에 항쟁(抗爭)하고 정의(正義)와 대중복리(大衆福利)를 위해 모든 사회악(社會惡)과 싸우며 한평생 가시밭길에서 오직 이상(理想)과 지조(志操)로써 살고 간 이가 계셨으니 운암(雲巖) 김성숙(金星淑) 선생이시다. … (이하 생략)

그리고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선생은 다음과 같은 추모시(追慕詩)를 남겼다.

하늘에 구름이 간다/ 나도 그 구름같이 간다.

물속에 구름이 간다/ 나도 저 구름같이 간다.

아무리 파도가 쳐도/ 젖지 않고 간다.

산위에 바위가 있다/ 나도 저 바위처럼 섰다.

비바람 뒤흔들어도/ 꿈쩍 않고 섰다.

선생은 평생을 독립(獨立) ・ 통일(統一) ・ 민주화(民主化)를 위해 활동한 애국지사(愛國志士)였다.

그러나 선생의 행적을 따라 선생을,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 ‘무정부주의자(無政府主義者)’, ‘무정부주의 좌파(無政府主義 左派)’,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의 중도파(中途派)’, ‘민족적 공산주의자(民族的 共産主義者)’, ‘진보적 민족주의자(進步的 民族主義者)’ 등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선생의 모습은 붉은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도 아니고, 붉은 좌파(左派)도 아니다. 오로지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통일된 민족을 먼저 생각하는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라고 보아야 한다.

선생은 1969년에 향년 71세를 일기로 돌아가셨고, 비록 사회장(社會葬)으로 장례를 치렀으나, 선생의 마지막 명찰이 ‘혁신계 인사’였기 때문에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도 돌아가신지 13년 뒤에서야 받았고, 국립묘지의 임정구역에 안장된 것은 돌아가신지 35년 뒤에서야 이루어지는 등 한국독립운동사상 그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선생은 젊은 시절에 체험한 불교사상이 항일민족운동과 해방 후의 사상운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또한, 외향적으로 보면,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생의 항일운동은 참으로 복잡하고 모순적인 부분도 있다. 그러나 선생이 봉선사에서 체험한 불교사상을 고려하면 그런 복잡하고 모순적인 사상을 연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강산이 분단된 지도 70년이 지났고, 지금까지 선생을 둘러싼 모순적인 평가들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선생의 사상을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것만으로 평가하기에는 선생이 살아온 삶이 불굴의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현실 참여는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났고, 때로는 모순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 내면에 흐르는 본질은 선생의 유묵인 “위건설자유행복지신국가이분투(爲建設自由幸福之新國家而분투(奮鬪)(자유롭고 행복한 새 국가건설을 위하여 열심히 투장하자)”로 표현되는 사상으로 일관되었다. 따라서 이 유묵에서 선생의 사상에 대한 현대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고(本稿)에서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의 국내활동>,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의 중국내 활동> 그리고 <해방(解放) 후의 국내활동>으로 나누어서,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재조명(再照明)하고자 한다.


II. 선생의 항일운동


1. 유년기(幼年期)

선생은 본관이 상산(商山)이다. 그리고 시조(始祖) 김수(金需)의 32세손이고, 상산군파조(商山君派祖) 김득제(金得霽)의 21세손이며, 단종의 장인인 병조판서 김사우(金師禹)의 19세손이다.

초명(初名)은 규광(奎光), 호는 운암(雲巖), 당호는 태허(太虛), 이명(異名)으로는 충창(忠昌) ․ 창숙(昌淑) ․ 성숙(星淑)이 있다. 여기에서 ‘성숙(星淑)’은 출가하였을 때, 홍월초(洪月初)스님으로부터 받은 법명(法名)이다.

선생은 1898년 4월 29일(음력 3월 10일) 평안북도(平安北道) 철산군(鐵山郡) 서림면(西林面) 강암동(江岩洞)에서 빈농(貧農)이었던 아버지 김문환(金文煥)과 어머니 임천 조씨 사이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10살 되던 1908년에 평안북도(平安北道) 철산(鐵山)에 있는 대한독립학교(大韓獨立學校)에 입학해서 신학문(新學問)과 함께 민족교육(民族敎育)을 받았다. 그러나 12살 되던 해에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학교가 문을 닫자, 선생은 일본인이 새로 설립한 소학교에 가지 않고 대신에 조부(祖父)가 가르치는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소년시절에 선생은 불교를 비롯한 종교에 상당한 호기심을 가졌고, 평소에 만주(滿洲)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삼촌(三寸)으로부터 정신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더 성장하면 독립군(獨立軍)이 되어서 국권(國權) 회복에 나설 것을 다짐하였다.

그러던 1916년 봄. 선생은 아버지가 땅을 팔아 둔 돈을 몰래 가지고, 중국 봉천에 있는 독립군(獨立軍)에 가입하기 위해서 가출(家出)하였다.

그리고 중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만주를 통해서 중국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평양(平壤)을 출발하여 원산(元山)까지 갔으나, 조만(朝滿)국경을 수비하던 일본군 국경수비대의 경계가 워낙 삼엄하여 바로 월경(越境)을 하지 못하고 기회를 엿보던 중에, 경기도(京畿道) 양평(楊平)에 있는 용문사(龍門寺)의 풍곡신원(楓谷信元)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언제 중국으로 넘어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1916년 11월 10일에 신원(信元)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으며, 12월 3일에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봉은사(奉恩寺, 지금의 강남 봉은사)의 라청호(羅晴湖)스님으로부터 도첩(度牒)을 받았다. 그래서 용문사(龍門寺)에서 2년 반쯤 머물다가 1918년 경기도 광릉에 있는 봉선사(奉先寺)로 옮겨서 전문창화강원(專門彰華講院)에서 사미과(沙彌科)를 수료하고 월초거연(月初巨淵) 노(老)스님으로부터 ‘성숙(星淑)’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래서 김성숙 스님은 월초(月初)스님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수학하였다.

선생이 경전공부에 크게 정진(精進)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홍월초(洪月初) 스님이,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선생이 더 불교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선생의 가족들을 봉선사 인근 마을로 이주하도록 하였고, 봉선사(奉先寺)의 말사(末寺)인 수국사(水國寺)의 토지를 경작하도록 배려하였다.

이렇게 봉선사(奉先寺)에서 3년간 머물면서 선생은 불경공부 외에 불교와 철학, 사회과학에 관한 공부에도 열중해서 인식(認識)의 폭을 크게 넓혀 갔다. 학자들은 선생의 사회주의적 사상도 이때에 무르익은 것으로 본다.


2. 국내활동(1916~1923년)

봉선사(奉先寺)의 홍월초(洪月初)스님은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선생 ・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스님 ・ 범산(梵山) 김법린(金法麟)스님들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선생도 자연스럽게 이들과 교류(交流)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것이 인연이 되어, 선생은 1919년 3월 1일에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개최된 독립선언식(獨立宣言式)에 참가하였고, 선생은 경기도 양주와 포천 지역에 파견되어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배포하고 이들의 만세시위를 유도하였다.

그리고 선생을 비롯한 봉선사(奉先寺)의 이순재(李淳載) ・ 강완수(姜完洙)스님과 서울 종로에서 약종상을 하는 김석노(金錫魯)선생은 비밀리에 회합하고, 3월 30일 부평리 주민들을 광릉천 시장에 모아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거사 전날 밤에는 봉선사(奉先寺)에서 유인물 300매를 인쇄하여 밤을 세워 부평리와 진벌리 등 부근 4개 동리에 배포하였다.

그래서 거사 당일인 3월 30일에는 1,000여명의 주민들이 광릉천 시장에 모여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생각 이상의 성과를 얻은 선생과 이순재(李淳載)스님은 만세시위운동이 계속 이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부평리에 있던 이재일(李載日)선생에게 격문(檄文)을 보냈다.

연락을 받은 이재일(李載日) 선생은 다음날인 3월 31일에 광릉천에 있는 자갈마당에서 제2차 만세시위 운동을 벌였다. 전날의 만세시위로 많은 사람들이 일본 헌병대와 경찰서로 연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00여명의 군중이 다시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렇게 시위가 크게 확산되자, 일경(日警)은 헌병까지 출동시켜서 2차 만세시위운동의 주도자인 이재일 ・ 김순만 ・ 최대봉 ・ 양상돌 등 8명을 체포하고, 1차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김성숙 ・ 이순재 ・ 강완수 ・ 김석로 등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하였다.

1919년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 공판에서는 이순재 ・ 김석로에게 각각 징역 1년 6월을, 선생에게 징역 1년 2월을, 강완수에게는 징역 1년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여 그 해 7월 10일에 이순재는 징역 1년 6월에, 김석로는 징역 1년에, 선생과 강완수는 각각 징역 8월에 처해졌다. 그러나 모두가 불복하여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모두 기각되어서 선생은 징역 8월의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만기 한 달을 앞둔 1920년 4월 28일 출옥하였다

출옥 후, 선생은 다시 봉선사로 돌아가서 홍월초 스님 밑에서 불경공부(佛經工夫)에 전념하면서, 한편으로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선생이 서대문형무소에서 8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出獄)할 당시는 사회주의 사상이 크게 퍼져나가고 있었고, 이 사회주의 사상은 불교계 인사들에게도 전파되어 불교계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선생은 출옥 후에 옥중 동지였던 김사국(金思國)과 교류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공감하였으며,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와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에 참여하였고, 이 과정에서 김한(金翰) ・ 조봉암(曺奉巖) ・ 유자명(柳子明) 등과 교류하였다.

그러나 사실 역사학자들의 견해와는 달리, 선생은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해서 두 단체에 참여한 것이 아니고, 단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참여한 것이었다고 스스로 회고하였다.

일제의 감시 때문에 더 이상 국내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한 선생은 1923년 초에 김봉환(金奉煥) ・ 김규하(金奎河) ・ 김정완(金鼎完) ・ 윤종묵(尹宗默) ・ 차응준(車應俊) 등 승려 5명과 함께 금강산 유점사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3. 중국에서의 활동


1) 열혈 활동시기(1923~1927)

선생과 봉선사 승려 6명은 무사히 북경에 도착하였다. 선생은 도착과 동시에, ‘김성숙(金星淑)’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김충창(金忠昌)’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민국대학(民國大學)에 입학하여 정치학(政治學)과 경제학(經濟學) 공부를 시작하였다.

선생이 민국대학(民國大學) 정치경제학과에 재학 중인 1923년 봄. 북경(北京)에 있는 YMCA에서 개최된 ‘한인(韓人) 유학생(留學生)들의 난상토론회’에서 선생은 사회주의(社會主義)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이론으로 청중들을 크게 압도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는, 같이 망명했던 스님들과 함께, <북경불교유학생회(北京佛敎留學生會)>를 조직하여 학생운동을 전개하였는데, 단순한 불교 학술단체가 아닌 사회주의 성향을 띤 단체였다.

또한, <북경불교유학생회>는 1924년 2월부터 기관지『황야(荒野)』를 격월간으로 발간하였는데, 선생을 비롯한 주요 집필자 대부분이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였기 때문에 한봉신 ・ 김봉수 등은 이들과의 사상적 갈등으로 귀국하였다.

또한 사회주의 사상과 무정부주의 사상을 놓고 김봉환(金奉煥)선생과 정화암(鄭華岩)선생이 벌인 사상논쟁은 당시 북경 한인사회에 커다란 관심을 불러 일으켰는데, 선생은 이때 김봉환과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이렇듯 1923년 말부터 1924년 초기에 들어서면서 북경 한인사회는 사상분화가 일어났으며, 북경 유학생 사이에도 ‘민족주의 구파(舊派)’와 ‘사회주의 신파(新派)’로 나뉘어졌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선생은 김봉환 등 <북경불교유학생회>소속 사회주의 계열 학생들과 함께 <북경조선유학생회>에서 탈퇴하고 1924년 2월에 별도의 <학생구락부(學生俱樂部)>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는데 이 조직 역시 사회주의적 성향이 큰 단체였다.

또한 선생은 이때 <반역사(反逆社)>를 조직하였다. 이 <반역사(反逆社)>는 북경 유학생 중에서 <북경고학생회> 등이 주도한 단체였는데, 식민사회의 모순을 자각하고, 아울러 제국주의 모순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한 비밀결사단체였다.

이 무렵, 선생은 장건상(張建相)과 양명 선생과 만나게 되었고, 이들의 영향을 받아서 선생은 공산주의(共産主義) 활동에도 발을 들여 놓았다.

1924년에 접어들면서 북경 한인사회에서는 공산주의 사상이 급속하게 확산되어갔다. 그래서 선생은 지금까지의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와는 결별하고 공산주의(共産主義) 노선에 합류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공산주의 세력을 하나로 결집하기 위해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하였는데, 내적으로는 <창일당(創一黨)>이 <북경고려공산당(北京高麗共産黨)>이었다.

<창일당(創一黨)> 기관지『혁명』은 격월간으로 발행되었는데 창간한지 6개월이 채 못 되어 3천명의 구독자가 생길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선생은 이 기관지를 통해서,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협동전선(協同戰線)’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실제로 1924년 가을에는 <조선유학생회(朝鮮留學生會)>와 <학생구락부(學生俱樂部)>를 통합하여 ‘협동전선’ 이론을 실천에 옮겼다.

그리고 1925년에는 북경대학에서 「3・1 운동 6주년 기념회」가 개최되었는데, 선생은 <고려유학생회(高麗留學生會)> 대표 자격으로 참가하여 이념으로 분리된 북경지역의 한인(韓人)민족운동 진영의 통합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또한 선생은 공산주의(共産主義)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계급혁명(階級革命)보다는 민족혁명(民族革命)을 우선해야 한다.’는 노선(路線)을 추구하였고 목표달성을 위해서라면 볼셰비키운동뿐만 아니라 무정부주의운동(無政府主義運動)도 필요하다.”

는 논지를 폈다.

이는 공산주의운동과 의열단 투쟁을 병행하였던 선생의 민족혁명 방략(方略)으로 볼 수 있다.

한편 1925년 6월에는 중국동북지역과 북경일대를 통치하던 장작림(張作霖)군벌정권과 일제 사이에 삼시협정(三矢協定)이 체결되면서, 한인독립운동(韓人獨立運動)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었다.

그래서 선생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북경(北京)에서 광주(廣州)로 피신하였다.

당시 광주(廣州)에는 600여명의 한인(韓人)이 있었는데, 대부분 의열단 단원들이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황포군관학교의 학생이었다.

그리고 독립운동에는 군사간부 뿐만 아니라 이론가 ・ 조직가 ・ 정치 간부도 필요하였기 때문에 선생은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서 1926년 7월에 중산대학(中山大學) 법학과로 전학하였다.

선생은 이때부터 북경시절과는 달리 의열단 간부 신분으로 공개적으로 혁명운동에 참여하였다.

선생은 먼저 한인 유학생들을 <황포군관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1926년 봄에는 김원봉과 함께 장개석(蔣介石)교장을 면담하고, 한인(韓人)들이 입교(入校)할 때 학비를 면제하겠다는 승낙을 받았다.

선생은 광주(廣州)에서도 한인(韓人) 민족운동 세력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6년에 접어들면서 광주(廣州)에는 만주・시베리아・일본・국내 등지의 한인(韓人)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1927년경에는 그 수가 8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6년 봄. 선생은 의열단을 중심으로 <유월한국혁명청년회(留粤韓國革命靑年會)>를 조직하였는데. 선생은 김원봉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조직은 같은 해 6월에 <유월한국혁명동지회(留粤韓國革命同志會)>로 확대 개편되었으며, 광주지역의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유력단체로 성장하였다.

선생은 기관지『혁명운동(革命運動)』의 주필을 맡아서 이론가(理論家)이자 문장가(文章家)로서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선생은 <유월한국혁명동지회> 내부에 존재하는 파벌 간의 갈등을 타파하기 위해서 장지락(張志樂) 등과 함께 ‘KK(koreaner kommunismus의 약자, 한인공산주의 또는 조선인 공산주의)’를 조직하여, 공산주의자들을 결집시키고자 노력하였으며, 아울러서 ‘정치단체로의 전환’을 내걸고 의열단의 개편을 추진하였는데,


 “이제는 의열단이 지난날처럼 암살과 파괴에만 치중해서는 안 되고 정치단체로 탈바꿈해, 독립투쟁을 이끌 간부를 훈련시키자.”

 

고 주장하여 민족주의 세력의 결집을 시도하였다.

선생은 <유월한국혁명동지회(留粤韓國革命同志會)> 내부의 공산주의 비밀조직인 ‘KK'와 민족주의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을 매개로 하여, 사회주의운동(社會主義運動)과 민족주의운동(民族主義運動)의 접목을 통해서, 항일독립운동의 역량을 강화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선생의 활동은 민족협동전선운동(民族協同戰線運動)으로 이어졌다. 1927년 봄. 선생은 상해(上海)에서 장건상(張建相)을 만나서 ‘대독립당촉성회운동’에 관해 논의하여, 그 해 5월 8일에 <광동대독립당촉성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였다. 이는 선생이 매진해 온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이 하나로 통합하는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였다.

선생이 광주에 있는 한인 민족혁명 세력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동안에, 1925년에는 손문(孫文)이 사망하였고, 국민당(國民黨)은 광동국민정부를 수립하고 1926년 7월부터 장개석(蔣介石)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장작림(張作霖) 등의 군벌을 토벌하는 북벌을 시작하였다.

선생을 비롯한 김원봉(金元鳳)과 유자명(柳子明)은 당시 북벌전쟁에 참가한 의열단 주요단원들이 집결해 있는 무한으로 이동하였다.

중국 국민당 정부와 중국 공산당 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갔고, 선생은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교도단(敎導團) 제2령(營) 제5연(連)의 책임자 임무를 맡았고, 9월 말에는 중국공산당의 지시로 교도단을 이끌고 남하하여 10월에 광주로 돌아왔다.

선생은 광주로 다시 돌아온 후, 중산대학(中山大學)에서 학업을 계속하면서 부인 두군혜(杜君慧)를 만났고, 장지락(張志樂)을 비롯하여 광주에 남아있는 한인(韓人)들과 함께 장개석 쿠데타로 침체상태에 빠진 한인독립운동단체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던 중, 1927년 12월 11일 중국공산당의 주도로 ‘광주봉기(廣州蜂起)’가 일어났다. 그래서 장발규의 제4군에 있던 한인 군관 ․ 장교 및 중산대학 학생 및 교도단(敎導團)에 있는 한인 등을 포함한 200여명이 이 광주봉기에 참여하였는데, 선생은 제5련(連) 중국공산당 조직의 책임자로서, 이들 한인(韓人)들을 인솔하여 포병련과 함께 사하(沙河)를 점령한 후, 사하(沙河)에 남아서 전장(戰場)을 수습하고 경계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12월 12일에 <광주소비에트정부>가 수립되자, 선생은 ‘광주소비에트정부 성립대회’에 참석하고 <소비에트정부 숙반위원회(肅反委員會)>의 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의 광주 점령은 ‘3일 천하’로 막을 내렸고, 선생은 두군혜와 함께 중산대학 학생기숙사에 남아있던 한인학생들의 광주 탈출을 도왔다.

광주를 장악한 이제심(李濟深)군벌 군대는 한인(韓人)들을 ‘적기당(赤旗黨)’으로 지목하고 탄압을 강화하자, 선생은 부인 두군혜의 집에 숨어 있다가 1928년 홍콩을 경유하여 상해로 탈출하였다. 

북벌전에서 ‘남창봉기(南昌蜂起)’를 거쳐 ‘광주봉기(廣州蜂起)’에 이르기까지, 중국혁명에 앞장섰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깊은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꼈다. 이는 중국혁명의 성공이 한국의 독립으로 이어지리라는 기대가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2) 저작활동시기(1929~1934)

선생은 중국 공산당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국민당정부의 감시망에 노출돼 있었다. 그래서 상해(上海)에서 은둔하며 이론정립과 저술활동에 전념하며 때를 기다렸다.

광주봉기 이후 오성륜(吳成崙) 이나 김산(金山)이 중국공산당 활동에 적극 참여했던 것과는 달리, 선생은 중국공산당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한인독립운동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28년 선생은 중산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1930년에 선생은 아내의 고향인 광주(廣州)로 돌아와서 중산대학 일어연구소에서 일본어 교수로 재직하였다.

다시 상해로 돌아온 선생은 1930년 8월 두군혜와 함께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에 가입하여, 창작비평위원회 소속이 되었는데 이때 노신(魯迅) ․모순(茅盾)등과 문학 창작 및 이론비평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32년 1월 일본군이 상해를 침략하였을 때, 노신(魯迅) ․ 모순(茅盾) ․ 정령(丁玲)등 중국좌익작가연맹의 지도자들과 함께 일제의 상해침략과 민중학살을 비난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또『봉화(烽火)』라는 전시 특별간행물과『반일민중신문(反日民衆新聞)』의 편집을 맡았다.

선생은 간행물과 신문을 통해 항일전쟁(抗日戰爭)의 현황을 널리 알리고 중국인들의 항일정서(抗日情緖)를 고취하는 필봉(筆鋒)을 휘둘렀다.

이 과정에서 선생의 혁명이론과 정치사상은 한층 더 심화되어 갔다고 본다.


3) 민족운동시기(1935~1941)

선생이 항일민족운동(抗日民族運動)의 진영으로 되돌아 온 때는 1935년 무렵이었다.

이때 선생의 활동노선에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

1935년 선생은 지금까지 몸담아 왔던 <중국공산당>을 탈당하고, 한인(韓人)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여 <조선공산주의자동맹(朝鮮共産主義者同盟)>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1936년에 접어들면서 중국에서는 제2차 국공합작운동(國共合作運動)이 급속하게 전개되었다. 그래서 선생은 상해에서 공산주의자 20여명과 함께 <조선공산주의자동맹(朝鮮共産主義者同盟)>을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으로 개편하면서,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중국을 위한 혁명이 아닌, 조선을 위한 혁명, 곧 민족혁명(民族革命)을 지향해야 한다.”


고 선언하였다.

<광주봉기>시절에 외쳤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나 ‘중국혁명을 통한 한국독립’이 아니라, 곧바로 ‘한국독립(韓國獨立)’의 기치를 내걸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민족해방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이라야, 사회주의고 공산주의도 존재의 가치가 있다는 ‘민족 우선’의 노선을 지향한 것이다. 민족주의 이념과 ‘반자본주의’이념을 접합하되 전자를 지주로 삼아 후자를 접목시킨다는 논리였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하고, 상해(上海)가 함락의 위기에 처하자, 선생이 주도하던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도 상해(上海)를 떠나 남경(南京)으로 옮겼다.

중일전쟁(中日戰爭) 발발로 인한 국제정세와 중국의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은 <협동전선운동(協同戰線運動)>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우파세력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결성하고, 민족주의 좌파세력은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김원봉)> ․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 김성숙)> ․ <조선혁명자연맹(朝鮮革命者聯盟, 류자명)>의 세 단체를 연합해서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결성하였다.

선생은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의 상임이사 겸 선전부장과 기관지『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의 편집을 맡았다.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장기화되던 1938년 10월 10일.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族戰線聯盟)>에서는 무장조직으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창설하였는데 선생은 지도위원회 위원 및 정치조장에 선임되었으며, 정치조(政治組)는 주로 대원들의 정치와 사상교육을 담당하였다.

1938년 10월 25일. 무한이 일본군에게 점령되자,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와 선생은 광서성 계림으로 이동하였고, 선생은 <조선의용대>의 기관지인『조선의용대통신』을 통해서 한국독립운동을 알리고 중국인의 항전의지(抗戰意志)를 고취하는 글들을 게재하였다.

그러던 1939년 2월 하순에 선생은 중요한 일로 급히 중경(重慶)으로 떠났다.

1939년에 접어들자, 김구와 김원봉이「동지와 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이라는 장문의 선언서를 발표하였는데, 선생은 이 시기에 임정옹호 세력이 집결해 있는 기강(綦江)으로 왔다.

선생은 1939년 8월 말 기강(綦江)에서 개최된 한국혁명운동통일7단체회의(韓國革命運動7團體會議)에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1940년 5월 임정옹호 세력이 <통합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는 시기를 전후하여 선생은 다시 중경으로 이동하였다.


4) 임정참여시기(1941~1945)

선생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참여를 결심한 데에는, 당시의 국제정세와 한인독립운동의 환경변화가 크게 작용하였다.


첫째, 1941년 1월 ‘환남사변(琓南事變)’ 발생으로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이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 탄압을 시작하였다.


둘째,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추축동맹체제(樞軸同盟體制)’와 미・영・소 3국의 ‘연합국체제(聯合國體制)’간의 대결이 전면화 되었다.


셋째, 1941년 여름에 이르기까지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주력(主力)이 중국 공산당의 항일(抗日)근거지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1년 11월 1일자로 발표된「조선민족해방동맹 (朝鮮民族解放同盟)」의 재건선언(再建宣言)은 선생의 독립운동 노선의 변화를 공식화(公式化)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의 재건선언은 당시 국제정세와 한인독립운동 환경변화에 대한 자구책이었고, 대응방안은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것이었다.

또한 선생은 중국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국제주의 공산당이 아닌, 우리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1차 목표로 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의 정체성을 견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울러 이후 중국 국민당정부 관할구역에서의 활동을 위해서는 공산주의 대한 입장과 노선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하에서 임정(臨政)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선생은 1942년 1월 22일에 국무회의에서 선전위원에 선임되었고, 1월 26일에는 임정 국무회의에서 내무부장의 천거로 3・1절 기념 준비위원과 선전조 주임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1943년 1월 5일 국무회의에서는 선생을 외교위원으로 선임하였고, 3월 4일 국무회의에서 선생은 내무차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4월 10일 국무회의에서는 조소앙(趙素昻) ・ 신익희(申翼熙) ・ 엄항섭(嚴恒燮) ・ 김상덕(金尙德) ・ 손두환(孫斗煥) ・ 유림(柳林, 柳華永) ・ 신기언(申基彦) ・ 한지성(韓志成) ・ 이정호(李貞浩) ・ 박건웅(朴建雄) ・ 김인철(金仁喆) ・ 안우생(安偶生) ・ 김재호(金載浩) ・ 김문 등과 함께 선전부 선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1944년 4월 24일에는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重慶)에서 임시의정원 이 개원되었는데, 여기에서 선생은, 이시영(李始榮) ・ 조성환(曺成煥) ・ 황학수(黃鶴秀) ・ 조완구(趙琬九) ・ 차리석(車利錫) ・ 장건상(張建相) ・ 박찬익(朴贊翊) ・ 조소앙(趙素昻) ・ 성주식(成周寔) ・ 김붕준(金朋濬) ・ 유림(柳林) ・ 김원봉(金元鳳) ・ 안훈(安勳) 등과 함게 국무위원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과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임정(臨政) 주도권 경쟁에 나서자, 양당(兩黨)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선거와는 상관없이, 선생을 비롯해서 조완구(趙琬九) ・ 박찬익(朴贊翊) ・ 유동열(柳東說) ・ 김원봉(金元鳳)을 국무위원으로 선출한다는데 합의하였다.

이것은 임정(臨政)의 역학구도 안에서 선생의 정치적 위상이 확고해졌음을 의미한다.

1945년 10월 3일. 국무위원회에서 국내비밀공작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기 위하여 국내공작위원회를 설치하였는데, 선생을 비롯해서 김약산(金若山) ․ 성주식(成周寔) ․ 조성환(曺成煥,후에 사면) ․ 안훈(安勳) 등 5인을 위원으로 하여 공작을 진행하였다.

선생이 임정(臨政)에서 활동하면서 이승만(李承晩)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의 외교활동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1945년 4월 25일부터 6월 26일까지 유엔 창립총회가 열린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이승만의 반소(反蘇) ․ 반공(反共)활동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임정(臨政)의 입지가 좁혀졌고, 더 나아가 국제 반파시즘 통일전선과 대일 연합국 체제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임정(臨政)의 외교활동에 장애가 되었다.”


고 신란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국무회의에서도 이승만(李承晩)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국무위원 사퇴서를 제출하면서까지 <이승만(李承晩) 면직안(免職案)>을 제출하였으나 통과되지 못하였다. 이것은 당시 대미외교(對美外交)에서 이승만(李承晩)을 대체할 인물이 없는 실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독립운동 세력들이 통합하고, 임정(臨政)이 독립운동의 총괄 영도기관이 되고, 또 한편으로는 임정이 한민족(韓民族)을 대표하는 정부(政府)로서의 위상(位相)을 확보해야만, 반(反)파시즘과 반일연합국체제(反日聯合國體制)의 일원(一員)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전후(戰後) 한반도문제 처리 과정에서도 임정(臨政)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선생은 임정(臨政)이 “어느 파에도 편향함이 없이, 초연한 입장을 취하여” 정파 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정하고 해소하는 역할을 할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앞으로 한국이 독립한 이후 나아가야할 진로(進路)와 관련하여 국제 정치 관계의 파트너로서 미국과 소련을 대등하게 평가하고 양측 모두와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거듭해서 주장(主張)하였다.


III. 해방후 국내정치활동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광복을 맞이하였다.

선생은 1945년 12월 1일 임정요인(臨政要人) 2진(陣)으로 상해(上海)에서 미군 수송기를 타고 전라북도 옥구비행장에 도착하여 귀국하였다.

그런데 선생은 상해에 도착해서야 국내의 정세를 상세하게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선생은 임시정부가 귀국해서 조치할 입장, 정치적 견해 등을 미리 준비할 필요성이 있어서,「입국(入國) 전(前) 약법(約法) 3장」을 제출하고, 이에 의거하여 임정이 실행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첫째, 임정은 비록 개인 자격으로 입국, 미군정이 용인하는 범위 안에서 정치활동을 할 것인데, 국내에서 극좌-극우파가 대립하고 항쟁하는 사태에 임하여 임정은 어느 파에도 편향함이 없이 초연한 입장을 취하여 양파의 대립을 해소시키며 다 같이 포섭하도록 노력할 것.


둘째, 입국 즉시로 전국의 각 정당, 사회단체의 대표자들과 각 지방의 반일 민주 인사를 소집, 비상국민대

표회의를 가져서, 임정은 이 대회에서 30여년 지켜 온 임정의 헌법과 국호 및 연호를 채택한다는 조건 하에서 임시 의정원을 확대 개선하는 동시에 명실상부한 한국 민주 정부를 재조직할 것.


셋째, 미-소에 대해서는 평등한 원칙 아래 외교관계를 수립할 것.“

이었으며, 이런 선생의 제안은 수용되어졌다.

선생의 이러한 제안은 추후 귀국 이후의 정치노선의 방향을 가늠하는 측면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선생의 제안 초점은 임시정부의 위상과 성격을 정립하는 것이었고, 그 이면에는 임시정부는 이념, 당파성 등에서 초연한 자세로 국가 재건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생의 이런 취지는 귀국 즉시 가진 기자회견에서의 발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한국의 대중이 기대하는 완전독립을 못 가져온 것은 심히 불안하다. 돌아온 나로서는 도리어 일본제국주의 살인적 압박 밑에서 착취당해 온 인민 대중을 위안하고 싶다. 우리는 모든 외적 힘을 버리고 대중과 힘을 합하여 대중이 옹호하는 전국적 통일정권을 전취(戰取)하려고 한다. 우리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국내의 진보적 대중이 과소(過小) 또는 과대(過大) 평가치 말고 정당히 평가하기를 바란다.

우리의 표방하는 바는 어느 일개의 계급을 대표하는 정강 정책과는 다르다. 오직 새로운 건설을 위하여 진보적 정책 정강을 내세우는 곳에 진실한 사명이 있고 스스로의 살길이 있을 것이다. 우리 임시정부 속엔 진보적인 사람도 많이 있을 뿐 아니라 그 혁명적 성질로 보아 민족 반역자와 친일파의 처단문제는 조금도 용허(容許)되지 않을 것이나 그 구체적 방법은 아직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내가 희망하고 주장하는 우리의 완전 독립을 전취(戰取)하는 노선(路線)은 본질에 있어 계급을 합작(合作)식힌 전민족의 단결이다. 우리 임시정부는 진보적 정강 정책을 내세우는 동시에 친미 반소 친소 반미 그 어느 것도 안인 친미친소로서 모든 모순을 해소시키는데 있으며 우리 임시정부의 국문위원 대다수도 이것을 위하야 엄정히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민족(民族) 전체(全體)의 이익(利益)을 위하여 하루 속(速)히 통일(統一)해야 할 것이다. (중략) 우리에게 야기된 문제는 시야를 항상 역사(歷史)의 진보성(進步性)과 국내 국제관계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를 토대로 국내의 각 계층을 망라한 혁명적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우리에게 약속된 완전 독립을 전취(戰取)하여야 한다.”


해방(解放) 전까지 선생의 목표는 오로지 나라의 ‘독립(獨立)’이었다. 그러나 염원했던 목표가 달성되자, 나라를 생각하는 선생의 목표는 ‘통일(統一)’즉 양대 진영의 통합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해방된 조국 땅에서 ‘좌우합작(左右合作)에 매진했다.

해방 이후 선생의 정치노선(政治路線)은 진보적(進步的) 민족주의(民族主義)였다. 선생은 본래 진보적(進步的) 사회주의(社會主義) 노선을 가고 있었지만, 그것보다 우선적인 것은 민족의 독립이었다. 따라서 선생의 근원적인 정치이념(政治理念)은 민족주의(民族主義)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선생은 민족운동단체(民族運動團體)들의 통합(統合)에 강하게 집착 하였고,모든 민족운동단체들이 임시정부로 통합해야 한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말해 왔다. 선생의 회고에서,


“임정(臨政)은 그동안 이름만 있었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 일본의 패망을 생각해보게 되면서 우리나라가 독립을 하게 될 때에 대비해야 되지 않겠나를 생각하게 되었지.

사실상 무슨 당(黨)이 무엇을 한다고 하지만, 권위로 보든지, 영향으로 보든지, 국내의 대중 일반에 대한 영향으로 보든지, 그래도 임정(臨政)밖에 없거든. 임정(臨政)이 계속해서 일본하고 대립해서 싸웠고, 그러니깐 임정을 중심으로 좌우간 모여야겠다. 그래도 임정(臨政)을 중심해야 모이기가 싶다.

당(黨)을 같이하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정부를 같이 하자는 것이니까 쉽다. 이렇게 생각했지.(중략)


이 과정에서 내가 굉장히 노력했어. 그래서 임정이 사실상 새로 만들어졌지요.“

선생은 임시정부로의 통합, 임시정부의 재정립에 지대한 노력을 하였다고 본인이 직접 회고하였다. 임시정부에 대한 선생의 애정과 함께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중심으로 통합하려는 활동에 공감하였기 때문에 선생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國務委員)에 선출되었던 것이다.


“1943년이 아주 중요한 해였어. 몇 해 동안 대립되어 온 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민족전선연맹은 해체를 하고 임정으로 총 단결을 했지. 나는 이때 임정의 국무위원으로 뽑혔어요.”


그러나 선생은 이처럼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을 주장하고,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였지만, 선생의 정치적 노선은 진보적(進步的) 사회주의적(社會主義的) 성향(性向)을 다분히 갖고 있었다.

이것은 1945년 초에 중경에서 선생을 면담했던 김준엽 선생의 회고에 확연하게 나타나 있다.


“그는 강력히 자기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그가 겪어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일생도 형극의 길이었고, 또한 공산주의자라는 평을 받을 만한 대목도 있었다. (중략)

그는 국내의 절대 다수가 무산대중인데 그들의 지지없이 어떻게 나라를 운영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도 계급투쟁이나 폭력혁명은 반대한다고 하였고, 또 나라의 독립이 까마득한데 언제 건국 후의 일을 생각하겠는가? 우선 모든 사람이 힘을 합쳐 일본제국주의 노예가 되어 있는 동족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열띤 어조로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그는 와관으로 보면 승려와 같은 인상이지만 말문이 열리니까 대단히 열정적이었다.”


따라서 선생의 사상적 노선(路線)은 <민족주의(民族主義)와 사회주의(社會主義)>임이 분명하였다.

한민족(韓民族) 전체가 이념(理念)을 초월해서 염원(念願)했던 조국(祖國)이 해방(解放)되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다가온 해방(解放)은 선생에게도 충격이었다. 선생은 이 순간을 한 언론사에 기고하였다.


“일본이 패망하고 민족해방의 꿈이 실현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그러나 30여 년간 온갖 고난을 겪어 가며 반일독립투쟁에 헌신한 임정의 앞길, 전 민족이 함게 걸어 나가야 할 앞길은 먹구름 같은 외세에 가로막혀 캄캄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 나는 술에 취하여 기쁨과 슬픔을 모두 잊어버리고 다음날 새로운 생활의 전개를 기다리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다음날 조소앙(趙素昻)선생은 친서(親書)와 함께 여러 동지들을 보내어 필자의 즉각 중경(重京) 귀환을 요구하였다.

요지는 속히 들어와서 임정(臨政)의 입국 문제를 의논하자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에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미 해방된 이상 임정의 전도가 아무리 캄캄해졌다 하더라도 나는 조국으로 돌아가야 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30여 년간의 망명 생활을 청산해야 하겠고,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처자를 만나봐야 하겠고, 임정(臨政)의 앞길과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후까지 해봐야 할 것이 아니냐“


하였다. 하여간 선생은 주체할 수 없는 가슴을 안고, 임시정부 요인의 제2진으로 조완구(趙琬九), 조소앙((趙素昻), 김원봉(金元鳳), 장건상(張建相) 등과 함께 상해를 경유하여 1945년 12월 1일에 귀국하였다.

12월 1일 상해를 떠난 주한 미군 수송기는 저녁 무렵에야 옥구비행장에 도착했다. 선생의 마음은 벅차올랐다. 비행기에서 내린 선생은 땅에 엎드려서 흙을 한 움큼 손에 쥐어 흙냄새를 맡았다.

그러나 이들의 환국은 문자 그대로 ‘쓸쓸한 귀향’이었다. 귀국선언도 미리 발표되지 못하였고, 이들의 입국(入國)을 알 턱이 없는 거리엔 당연히 환영인파도 없었다.

또한 임정요인(臨政要人)들의 호송을 맡은 미군(美軍)들의 태도도 거칠었다. 점심을 거른 그들을 군용 지프차에 실어 캄캄한 밤중에 서울행을 재촉할 뿐이었다.

이렇게 서두는 이유는 ‘임정요인(臨政要人)들을 급히 서울로 호송(護送)하라’는 하지 장군(將軍)의 명령 때문이었다.

2진이 서울로 올라온 이튿날인 1945년 12월 3일. 경교장(京稿莊)에서는 김구(金九)선생의 주재 아래 임정(臨政) 국무위원회가 열렸다. 환국(還國) 이후 첫 번째로 열리는 모임이었다. 이 모임에는 이승만이 옵저버 자격으로 참석해서 국내외 정세를 보고하고, 장래의 전망에 관해 한차례 연설을 하였다.

이날 회의에서 선생은 중국 상해에서 이미 결정된 약법(略法)3장의 결행을 다시금 촉구하였다. 그래서 먼저 좌(左) ․ 우(右) 각 정당대표자를 소집해서 <비상정치회의(非常政治會議)>를 조직한 후, 다시 <비상국민대표대회(非常國民代表大會)>를 소집하도록 하자고 결정하였다.

그래서 임정(臨政)측에서는 <특별정치위원회(特別政治委員會)>를 구성하고, 선생을 비롯해서 조소앙(趙素昻) ․ 장건상(張建相) ․ 김원봉(金元鳳) ․ 김봉준(金奉俊) ․ 유림(柳林) ․ 최동오(崔東旿) 등 7명을 중앙위원으로 뽑았다. 그리고 이들 중앙위원들은 안재홍(安在鴻) 위원장을 비롯한 국민당(國民黨) 간부 10여명과 비상정치회의 소집을 위한 예비모임을 가졌고, 좌익(左翼)과도 막후접촉을 벌였다.

선생은 김원봉(金元鳳)과 함께 당시만 해도 전국적으로 세력을 떨치던 인민공화국(人民共和國)측과 통일전선(統一戰線) 구축문제를 논의했다.

해를 넘긴 1946년 1월 4일 임정(臨政)의 김구(金九)주석은 ‘비상정치회의 소집’, ‘임정의 확대 개편’, ‘국민대표대회 소집’ 등 정치스케줄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월 7일에는 ‘4대 정당회의’를 소집해서 당면한 민족문제를 논의하였고,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은 공동 코뮤니케에 담아 발표하였다.


첫째. 모스크바 3상회의의 조선에 관한 결정에 대해서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고 민주주의적 발전을 원조한다는 정신과 의도는 전면적으로 지지 한다.

탁통치문제는 새로 수립되는 정부가 자주 독립의 정신에 입각하여 이를 해결케 한다.


둘째. 정쟁(政爭)의 수단으로서 행해지고 있는 암살과 테러행동을 즉각 중지하 며 모든 테러단은 자발적으로 해산한다.

이렇게 임정(臨政)과 4대 정당(政黨)은 두 가지 사항에 합의를 보긴 했으나, 신탁통치문제에 대한 기본 시각이 엇갈려서 한민당(韓民黨)과 국민당(國民黨)은 이미 발표된 공동 코뮤니케를 파기한다고 나섰다.

며칠 뒤에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을 더한 5당(黨)회의가 다시 열렸지만, 여기서도 탁치문제로 의견이 맞섰다. 1월 16일까지 네 차례나 열렸던 모임은 이렇다 할 성과 없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5당회의> 마저 실패로 끝나자, 임정(臨政)측은 1월 22일에 이승만이 합류해 오자 <비상정치회의(非常政治會議)>를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로 개칭되었다.

한편 좌익(左翼)측에서도 그들만으로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약칭 民戰)을 구성하였다.

그래서 1946년 초에, 이 땅에는 좌(左) ․ 우(右) 대립과 갈등의 서막(序幕)이 올랐다.

선생은 이 같은 현실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극좌(極左) ․ 극우(極右)의 대립을 지양하고 민족통일(民族統一)을 꾀해보려는 평소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겨 보았다.

이승만 계열의 독촉으로 <비상정치회의(非常政治會議)>가 우경화(右傾化)로 기울자, 선생은 1월 23일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의 김원봉(金元鳳) ․ 성주식(成周寔)과 함께 탈퇴하였다. 이들이 탈퇴이유를 밝힌 공동성명서의 핵심 내용은 이렇다.


“우리는 임정(臨政)이 입국 당시에 김구(金九) 주석 명의로 발표한 당면정책 14항 중 제6항에 규정한 통일전선정책(統一戰線政策)을 특히 강조하였으며 제6항 정책(政策)을 실시하기 위하여 모든 성의와 열정을 다하여 투쟁하였다.

임정(臨政)은 당면 정책 제6항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좌우 양 진영의 편향을 극복하면서 단결을 실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노선임에도 불구하고 우익(右翼)으로 편향하는 국세에 처하게 되었다.

금차 비상정치회의(非常政治會議)를 소집할 때에 좌익(左翼)과는 하등 양해 혹은 타협이 없었다. 이로부터 임정(臨政)은 전 민족의 영도적 입장, 특히 좌우 양익에 대한 지도적 지위를 포기하게 된 것은 유감이나마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 두 단체는 먼저 임정(臨政)의 우익(右翼) 편향화(偏向化)를 지적하여 반대한다.”


선생은 국내외 각 계층과 혁명당파를 망라해서 통일전선(統一戰線)을 결성하여 과도적인 임시정권을 조직한다는 ‘당면정책’ 제6항과 환국 직전 상해에서 결의된 ‘입국전 약법3장’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 비상정치회의(非常政治會議)의 편향성(偏向性)이 좌 ․ 우익 대립을 더욱 격화시키는 것으로 판단했었다.

이리하여 선생은 중국에서부터 고락을 같이해 온 김원봉(金元鳳)과 성주식(成周寔)과 더불어 “명실상부한 민족통일전선을 급속히 결성하기 위하여” 국내 각 당파에게 다음과 같은 대책을 마련하자는 주장을 폈다.


1. 명실상부한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을 급속히 결성하기 위하여 좌익(左翼) 편향 (偏向)과 우익(右翼) 편향(偏向)을 동시에 극복하면서 <비상정치회의(非常政治 會議)> 소집 주비회(籌備會)와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결성 준비 회(準備會)를 즉시 통일하여 좌우(左右) 양익(兩翼) 이 공동으로 주비(籌備)할 것이다.


2. 좌우(左右) 양익(兩翼)의 편향으로부터 발생된 친소반미(親蘇反美) 또는 친미 반소(親美反蘇)의 경향을 철저히 극복하고 친미친소(親美親蘇) 중앙의 평형(平 衡)정책을 수립 견지할 것이다.


3. 민족 내부의 투쟁, 좌우 양익 대립의 격화로 인기(因起)된 상호 유혈습격 특 히 파쇼적 테러로 표현되

는 암살 ․ 구타 ․ 파괴행동을 철저히 근절 배격 할 것 이다.


4. 매국적(賣國的) 민족반역자(民族反逆者) 및 친일분자(親日分子)는 통일전선(統 一戰線)결성에 참가시키지 않을 것이다“


극좌(極左) ․ 극우(極右)의 편향성(偏向性)을 비판하면서 4가지 당면대책의 조속한 실시를 주장한 선생은 좌우 양익의 단결이 절실하다는 바탕 아래,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원칙에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강력한 전국 통일적(統一的) 신정권(新政權)을 건립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는 말로서 공동성명서(共同聲明書)를 끝맺었다.

선생을 비롯해서 김원봉(金元鳳) ․ 성주식(成周寔) 등 3명의 임정(臨政) 국무위원(國務委員)이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에서 탈퇴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정계(政界)는 충격이었다.

다음날에는, 임정요인(臨政要人)으로서 <무정부주의총연맹(無政府主義總聯盟)>을 이끌던 유림(柳林)이 탈퇴했고, 역시 임정(臨政) 국무위원(國務委員)인 장건상(張建相)도 뒤를 따라 탈퇴했다.

그러나 이러한 임정계(臨政系) 인사들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비상국민회의 주비회(非常國民會議籌備會)>는 61개에 이르는 정당(政黨)과 사회단체에 초청장을 보내고 1946년 2월 1일에 서울 명동 천주교회당에서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를 정식으로 발족하고, 김구(金九) ․ 이승만(李承晩)의 추천으로 28명의 최고정무위원(最高政務委員)을 뽑았다.

그러나 이 <최고정무위원회>가 보름 뒤인 2월 14일에 하지 미군정(美軍政)의 요청에 따라 <재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在南朝鮮大韓國民代表民主議員, 약칭 민주의원)>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본래의 성격과는 달리 하지 미군정사령관(美軍政司令官)을 보좌하는 자문기관(諮問機關)으로 바뀌었다.

선생은 그 동안 국가민족을 대표해서 국내외에서 활동해 오던 임정(臨政)의 국무위원이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의 최고 정무위원으로 선발되고, 이들이 민주의원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특히 임정의 정 ․ 부주석이 민주의원에 참여한다는 것은, 정치적 위신과 대의명분으로 보더라도 찬성할 수 없으며, 임정(臨政)의 기치 아래 투쟁하다가 숨진 동지들의 영령(英靈)에 대한 “철면피한 배신”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구(金九) ․ 김규식(金奎植) 등 임정(臨政) 측 최고 정무위원 5명은 2월 14일로 예정된 민주의원에 참석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선생이 임시정부(臨時政府)와 결별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수순이 되어버렸다.

그 무렵 박헌영(朴憲永)을 정점(頂點)으로 한 좌익(左翼) 측에서도 우익(右翼)의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에 대항해서 세력 결집을 꾀하였다. 그것이 곧 1946년 2월에 출범한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약칭 民戰)>이다.

가뜩이나 좁은 이 땅에선 좌(左) ․ 우(右)가 각기 다른 길로 멀어져 가는 해방정국(解放政局)의 난기류(亂氣流)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몸담아 왔던 임정(臨政)이라는 둥지에서 이탈한 선생에게 ‘민전(民戰)에 참여해 달라’는 좌익 측 인사의 간곡한 권유가 있자, ‘<민전(民戰)>의 문호를 개방하고 양보와 타협으로 우익(右翼) 각 당파들과의 합작(合作)에 노력한다.’는 조건을 전제로 선생은 <민전(民戰)>에 참여하기로 했다.

<민전(民戰)>은 민주의원(民主議員) 개원 하루 뒤인 1946년 2월 15일 서울 YMCA에서 결성대회를 가졌다. 대회 참가자들과 방청객으로 꽉 들어찬 대회장 정면에는 태극기를 가운데로 4개 연합국 국기가 걸렸고 양쪽 벽에는 ‘주장하자 인민의 권리’ ‘건설하자 민중의 국가’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이여성(李如星)이 등단하고 이렇게 말했다.


“잠깐 보고(報告)할 것이 있다. 임정(臨政)의 김성숙(金星淑) ․ 장건상(張建相) ․ 김원봉(金元鳳) ․ 성주식(成周寔)은 임정(臨政)에 있으면서 임정(臨政)의 반민주주의(反民主主義)와 싸워 많은 공적을 쌓았는데 이번에 우리 민전(民戰)에 참가하기로 결심하고 성명서(聲明書)를 보내왔다. 내가 이를 대독(代讀)하겠다.”

“우리는 <비상정치주비회(非常政治籌備會)>에서 탈퇴할 때 좌우(左右) 양익(兩翼)의 편향(偏向)을 지적하고 단결(團結)과 합작(合作)을 주장했다. (중략) 그러나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에서는 돌연히 비민주적 방식으로 <최고정무위원(最高政務委員)>를 선출한 뒤 그것을 <남조선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南朝鮮大韓民國代表民主議員)>으로 변장하였다.

이는 민주주의(民主主義) 단체를 포괄한 <민전(民戰)>과의 통일을 완전히 거부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절적으로 다수의 민주주의 단체를 포괄한 <민전(民戰)>에 단연히 참가하여 민주단결(民主團結)의 노선을 밝히는 동시에, 우리는 계속하여 민주주의 단체와 협력하여 좌우 양익(兩翼)의 통일, 단결로 자주적 


통일정권(統一政權) 수립을 위하여 끝까지 노력하려 한다.”

이여성(李如星)의 성명서 낭독이 끝나고 임시집행부가 발표되었는데, 선생은 부의장(副議長)으로 뽑혔다.

선생을 비롯한 김원봉(金元鳳) ․ 성주식(成周寔) ․ 장건상(張建相)의 <민전(民戰)>참여는 좌 ․ 우 양쪽에 각기 다른 충격을 주었다. 한때 조선 공산당 서울시당 간부였다가 전향한 양한모(梁漢模)는 이들 네 사람의 <민전(民戰)>참여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공산당(共産黨)은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에서 김원봉(金元鳳) ․ 성주식(成周寔) ․ 김성숙(金星淑) ․ 장건상(張建相) 등을 탈퇴케 하여 민전(民戰)에 참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공산당이 기도하였던 일제의 잔재세력과 민족반역자에 대한 공동의 투쟁이라는 민전(民戰)의 정치적, 조직적 의의는 배가(倍加)되었다.

임정(臨政)을 떠나 <민전(民戰)> 부의장으로 새로운 정치행로(政治行路)에 접어든 선생에게는 하나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은 그 당시 남한(南韓) 각지(各地)를 돌며 민주의원(民主議員)과 미군정(美軍政)을 싸잡아 비판했는데, 1946년 3월 30일에 ‘미군정(美軍政)을 반대했다’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서 6개월가량 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이 정도에서 석방(釋放)된 것은 미군정 사령관인 하지와 신망(信望)이 두터웠던 김규식(金奎植)의 주선 때문이었다.

이후 선생은 ‘좌우합작(左右合作)’에 정열을 기울였다.

선생이 전주형무소를 나와 서울에 올라온 1946년 9월 말은 이미 김규식(金奎植)과 여운형(呂運亨)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가 구성되어 있었고, 선생과 함께 임정(臨政)을 이탈했던 김원봉(金元鳳)과 성주식(成周寔))은 좌측 5인 대표로서 활동하고 있었고, 장건상(張建相)도 직접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좌측 수석대표인 여운형(呂運亨)을 측면에서 지원하고 있었다.

따라서 선생이 ‘좌우합작(左右合作)’에 열중하게 된 것은 이념을 같이 해온 인적 배경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극좌(極左) ․ 극우(極右)의 편향성(偏向性) 지양’이라는 선생의 정치신조(政治信條)와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좌우합작(左右合作)’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선생은 좌익의 집결체인 ‘민전(民戰)’의장단을 사퇴하였고, 박헌영(朴憲永)으로 대표되는 ‘좌익(左翼) 모험주의(모험주의(冒險主義)’와도 결별했다.

선생의 <민전(民戰)> 탈퇴는 극좌(極左)와 극우(極右)를 배제한 ‘온건 좌파’와 ‘온건 우파’의 협상테이블이었던 <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의 성격으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다.

해를 넘긴 1947년 5월. 선생은 여운형(呂運亨) ․ 장건상(張建相) ․ 박건웅(朴建雄)과 함께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 여운형(呂運亨)> 결성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창당 2개월도 채 안된 시점에서 당수(黨首)인 여운형(呂運亨)을 잃은 데다, 1948년에 있었던 남북협상을 전후해서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 내에서 좌파에 속하였던 백남운(白南雲) ․ 이영(李英) ․ 정백(鄭栢) 등이 월북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은 더욱 감시하고 압박하는 바람에 <근로인민당>은 1949년 12월 해체되었다.

1950년의 <5 ․ 30선거>에 선생은 연고지인 경기도 고양군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였으나 패배의 쓴잔을 들었다.

그리고 선생은 <6. 25전쟁>때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게 되었으나, 나중에 <1 ․ 4후퇴>로 부산에 피난 내려왔는데 이승만 정부는 선생에게 ‘부역혐의’를 씌어 체포하고는 한 달 동안 혹독한 조사를 하였으나 혐의가 없자 풀려났다.

<6. 25전쟁>이라는 엄청난 대사건을 겪고 난 선생은 한동안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다. 지난날 ‘진보적(進步的) 우파(右派)’ 혹은 ‘온건(穩健) 좌파(左派)’의 입장에서 활동했던 상당수의 사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들 혁신계 인사들이 본격적으로 정당조직에 나서게 된 시점은 1955년 9월 ‘광릉(光陵)회합’으로 일컬어지는 모임을 기폭제로 삼아서였다. 선생은 그 무렵부터 조봉암(曺奉巖)과 서상일(徐相日)등 혁신계 인사들과 활발한 접촉을 나누었다.

1956년 <5 ․ 15 정부통령 선거>에서 혁신계의 조봉암(曺奉巖)후보가 2백16만 표란 많은 지지를 얻자, 혁신계는 자못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혁신세력의 대동단결을 추진하던 여러 차례의 회합(會合)이 깨어지고 혁신계는 결국 진보당(進步黨, 曺奉巖)과 민주혁신당(民主革新黨, 徐相日)으로 갈라섰다.

이처럼 혁신계(革新系)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5. 15선거>에서 보인 조봉암(曺奉巖)의 득표율은 <자유당>정권에 위협적으로 비쳐졌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은 혁신계에 두 차례의 철퇴를 내렸다.

그 첫 번째가 이른바 <근로인민당 재건사건>이다.

1957년 11월 16일날 각 신문에는,

“전 근로인민당 조직국장 김성숙 외 9명이 근로인민당을 재건하려고 암약했기에 체포되었다.”

는 기사가 실렸다.

이 사건에서 선생은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을 재건하는 총책이라는 혐의로 구속되었고, 뒤이어 장건상도 체포됐다. 이들은 모두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1958년 11월 16일에 있었던 대법원 판결에서 이 사건으로 구속된 21명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정치공작으로 조작된 사건이었던 셈이다.

두 번째 철퇴는 유명한 <진보당(進步黨)사건>이다.

1958년 1월 조봉암(曺奉巖) 등 <진보당(進步黨)> 간부들을 전격 구속함으로써 시작된 이 철퇴는 첫 번째 철퇴와는 달리 매서웠고 결과는 당수 조봉암의 사형으로 끝을 맺었다.

사실 <진보당(進步黨)>과 <민주혁신당(民主革新黨)>은 정강(政綱) ․ 정책(政策)이 거의 같았다. 이동화(李東華)가 작성한 초안을 두 당(黨)에서 같이 채택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두 혁신정당 가운데 <진보당(進步黨)>만 심한 타격을 입었다. 이는 권력 장악을 둘러싼 정치역학, 다시 말해 어느 세력이 현실적으로 정권에 더 위협적인가 하는 측면에서 비롯된 결과로 풀이된다.

이승만(李承晩)정권의 철퇴를 맞고 혁신계가 소생하기까지는 4. 19혁명이라는 격동의 큰 물결을 기다려야 했다.

선생은 4 ․ 19혁명 이후에 조직된 최대의 혁신정당인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 창당(創黨)에 참여하여 정치위원(政治委員)이 되었다.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은 한국정당사상 처음으로 ‘민족 주체성에 입각한 민주사회주의의 실현’을 내걸고 7 ․ 29총선거에 참여했으나 참패했다.

그래서 혁신계는 다시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듭하면서 표류하다가 <통일사회당(統一社會黨)>으로 다시 묶여졌는데, 선생은 정치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스스로 혁신우파(革新右派)임을 밝힌 <통일사회당(統一社會黨)>은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과 마찬가지로 결당 선언(結黨宣言)에서


“민족적 주체성에 입각한 민주사회주의(民主社會主義)를 실현할 역사적 임무를 지닌 국민대중 정당이다.”


라고 밝혔다.

그러나 4개월 후에 <5 ․ 16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모든 정당은 해체되었고 일체의 정치활동도 금지되었다. 그러고 5월 18일부터 검거선풍이 불기 시작해서 혁신계 인사들 대부분이 구속되었는데, 선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생에게 붙여진 죄명은「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6조(反國家行爲)」위반이었다. 결국 집행유예로 풀려나오긴 했으나 선생은 약 9개월 동안 갇힌 몸으로 지내야 했다.

선생은 정치행보(政治行步)와 마찬가지로 말년(末年)에는 가난과 병고(病苦)에 시달려야 했다.

선생은 애초부터 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래서 말년에는 유가족의 말대로 ‘됫박질’을 해야만 되었고 집 한 칸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셋집을 옮겨 다녔다.

세상을 뜨기 3년 전에야 같은 혁신계 인사 구익균(具益均)의 집 모퉁이에다 건평 11평의 집 한 채를 세울 수 있었다. 셋방살이에 허덕이는 선생을 위해 동지와 후배들이 ‘비나 피하도록’ 마련해 준 것이었다. 그래서 집 앞문위엔 ‘피우정(避雨亭)’이란 목각 현판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피우정(避雨亭)으로 옮겨 앉을 무렵, 선생은 기관지염으로 기동을 못한 채 누어있어야 했다. 병원에 갈 엄두도 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선생은 변변한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1969년 4월 12일 오전 10시에 세상을 하직했다. 선생의 유해는 조계사에서 사회장(社會葬)으로 치른 후, 경기도 파주군 묘소에 묻혔다. 선생의 파란 많았던 삶을 마감하던 날 하늘은 그저 푸르렀다고 했다.

임정(臨政)에서 국무위원을 지냈던 선생에게는 생전에 국가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없었다. 오히려 ‘혁신계 인사’라 하여 늘 주목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친지들이


“그토록 독립운동을 했는데 고작 이렇게 식사도 변변히 못하고 약도 제대로 못쓴 채 돌아가셔야 되겠느냐”


고 푸념하면, 선생은


“무슨 상(賞)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 아니야.”


하며 도리어 나무라곤 했다고 한다.

또한 선생에게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주어진 것은 돌아가신지 13년 뒤인 1982년의 일이었다. 그야말로 푸대접이었다.

그러나 2008년 4월에 국가보훈처는 광복회(光復會)와 독립기념관(獨立記念館)은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선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김성숙(金星淑)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는 등, 선생에 대한 조명(照明)의 각도(角度)를 달리하였다. 늦었지만 다행한 일이었다.

선생은 해방 전 중국 땅에서 급진적 혁명 운동가이자 임정 국무위원으로서의 독립운동가, 진보적 이론가이자, 문필가로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해방된 이 땅에서 선생은 민족통일을 위한 좌우합작(左右合作)에 몰두하였다.

1950년대와 60년대 초엔 혁신계의 중진으로, 말년엔 보수야당에 참여했다. 이처럼 그가 보여준 다채로운 행동반경은 그 폭이 꽤나 넓고 굵은 것이었다.

선생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광동꼬뮨에 참가했다거나, 해방 후 좌익의 민전(民戰)에 관계했다는 전력(前歷)만으로는 선생을 공산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그 근거가 빈약하다.

선생이 중국에서 활동한 20세기 전반기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이론과 실제의 양면에서 뚜렷한 획을 그을 수 있는 분화(分化)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주의를 민족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삼는 일은 당시 약소민족의 독립운동과정에서 흔히 있었다. 또한 반일(反日)이라는 공동목표를 놓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자가 제휴해 공동전선을 펴는 일도 많았다.

선생이 좌익의 통일전선인 <민전(民戰)>에 관계할 당시만 해도, 국내 정치 세력이 좌 ․ 우로 뚜렷이 2분법적으로 나뉘지 못한 일종의 교착상태였다.


IV. 선생은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일까?

선생의 전력으로 보면 <공산주의자>라고 단정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대체적으로 선생의 사상적 출발은 <사회주의>라고 보고 있다.

<3・1만세운동>으로 8개월간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선생의 사회주의적 사상은 선생의 뇌리 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 같다. 이것은 출옥 후에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김사국(金思國)과 특별하게 교류했었다는 사실과 사회주의 사상 운동단체인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와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에 참여한 것에서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선생은 그 당시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해서 두 단체에 참여한 것이 아니고, 단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서 참여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1923년 봄. 북경(北京)에 있는 YMCA에서 한인(韓人) 유학생(留學生)들의 난상토론회가 열렸었는데, 당시 민국대학(民國大學) 정치경제학과에 재학 중이었던 선생은 사회주의(社會主義)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이론을 내세워 청중들을 크게 압도하였다.

그리고 1923년 10월에는 <북경불교유학생회>를 조직하여 학생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북경불교유학생회>는 단순한 불교 학술단체가 아니라 사회주의 성향을 띤 단체였다.

그리고 <북경불교유학생회>의 기관지『황야(荒野)』의 주요 집필자들은 선생을 비롯해서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였다.

여기까지가 선생의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행적이다. 그리고 공산주의(共産主義)>에 대한 선생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① 1924년에 <반역사(反逆社)>를 조직해서 고려공산당원인 장건상(張建 相)과 양명(梁明)과 함께 활동한 점.

② 장건상(張建相) ・ 양명(梁明) ・ 장지락(張志樂, 김산) 등과 함께 공산주 의 세력을 하나로 결집하기 위한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한 점.

③ 창일당(創一黨)의 기관지인 혁명』에서 ‘공산주의(共産主義)를 달성하 기 위해서는 계급혁명(階級革命)보다는 민족혁명(民族革命)을 우선해야 한다. 그리고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볼셰비키 운동뿐만 아니라 무정부 주의운동(無政府主義運動)도 필요하다.‘고 강조한 점.

④ 중국공산당 당원으로서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교도단(敎導團) 제5연(連) 의 책임자인 점.

⑤ 1927년 12월 11일 중국공산당이 주도한 ‘광주봉기’에 참여한 점.

⑥ ‘광주봉기’에서 한인들을 인솔하여 사하(沙河)를 점령하고는 사하(沙河) 에 남아서 전장(戰場)을 수습하고 경계임무를 수행한 점.

⑦ 광주에 <소비에트정부>가 수립될 때, ‘광주소비에트정부 성립대회’에 참석하고, <소비에트정부 숙반위원회(肅反委員會)>의 위원에 선임된 점.

⑧ 1930년 부인 두군혜와 함께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에 가입한 점.

⑨ 1935년 <조선공산주의자동맹(朝鮮共産主義者同盟)>을 조직한 점.

⑩ 1936년에 공산주의자 20여명과 함께 <조선공산주의자동맹(朝鮮共産主 義者同盟)>을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으로 개편한 점.

⑪ 선생을 만났던 김준엽 선생이 ‘본인은 강력하게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하였지만, 그의 일생도 형극의 길이었고, 또한 공산주의자라는 평을 받 을 만한 대목도 있었다.’ 라고 회고한 점.

<비상정치회의>의 우경화(右傾化)를 빌미로 탈퇴한 점.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민주주의민족전선(民 主主義民族戰線, 약칭 民戰)>에 가담하고 부의장이 된 점.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 위원이 된 점.

⑮ 여운형(呂運亨)의 서거(逝去)후, 조직부장으로 근로인민당 재건에 앞장 선 점.

대충 열거한 위의 조항을 보면, 선생은 속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붉은 옷을 입었었다’는 세인(世人)들의 평가(評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선생의 행적 중에서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라고 단언해 버리기에는 애매한 부분도 있다.

① <비상정치회의(非常政治會議)>를 탈퇴할 때, “임정(臨政)은 좌우 양 진 영의 편향을 극복하면서 단결을 실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노선”이라 고 강조한 점.

즉, 좌 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겠다는 의도가 분명하기 때문에 이 런 선생을 두고 일방적으로 ‘좌익 공산주의자’로 단정하는 점은 애매하 다고 하겠다.

② 김준엽 선생과 만났을 때,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계급투쟁이나 폭력혁명은 반대한다’, ‘우선 모든 사람이 힘을 합쳐 일본제국주의 노예 가 되어 있는 동족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한 점.

③ 1947년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의 핵심 간부들이 월북했을 때나, 6・ 25사변 통에 선생은 월북하지 않았고, 부역하지 않은 점.

④ <1 ․ 4후퇴>때 부산에 내려온 선생에게 이승만 정부는 <공산주의에 부 역한 죄>로 선생을 체포하고 한 달 동안 조사를 하였으나 무혐의로 풀 려난 점.

⑤ <근로인민당 재건사건>에서 선생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 었으나 1958년에 대법원으로부터 무죄를 선고받은 점.

⑥ 박헌영(朴憲永)의 남로당(南路黨)에 가입하지 않은 점.

등을 보면, 선생은 공산주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고 본다.


V. 선생의 좌우통합정신(左右統合精神)

선생은 이념적으로는 사회주의적 바탕이었지만, 정치적으로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특히 사상적으로는 좌(左) ・ 우(右)로 갈라진 것을 하나로 모으려고 애를 썼으며, 그 구심점을 임정(臨政)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선생의 노력은 광주에서부터 출발하였다.

① 1926년 봄. 선생은 의열단을 중심으로 <유월한국혁명청년회>를 조직하 였고, 6월에는 <유월한국혁명동지회>로 확대 개편하여, 광주지역의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유력단체로 성장하였는데,선생은 <유월한국혁 명동지회> 내부에 있는 공산주의 비밀조직인 ‘KK'와 민족주의단체인 <의열단>을 매개로 하여, 사회주의운동과 민족주의운동의 접목을 통해 서, 항일독립운동의 역량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② 1944년 1월.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정(臨政) 주도권 경쟁이 권력투쟁 양상을 띠게 되자, 양당(兩黨)은 임시의정원(臨時議政 院)의 선거방식과는 상관없이, 조완구(趙琬九) ・ 박찬익(朴贊翊) ・ 유동 열(柳東說) ・ 김원봉(金元鳳) ・ 김성숙(金星淑)을 국무위원으로 선출한 다는데 합의하였다. 이는 불편부당한 선생의 정치적 신념을 높이 평 가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③ 선생은 독립운동 세력들이 통합하여, 임정(臨政)을 중심으로 뭉친다면, 반파시즘 ․ 반일연합국체제의 일원이 될 수 있으며 전후 한반도문제 처 리 과정에서도 임정(臨政)이 제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 었다.

그래서 선생은 임정(臨政)이 “어느 파에도 편향함이 없이, 초연한 입장 을 취하여” 정파 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정하고 해소하는 역할을 수행 하도록 호소하였다.

또한 앞으로 한국이 독립한 이후 나아가야할 진로와 관련하여 국제 정 치 관계의 파트너로서 미국과 소련을 대등하게 평가하고 양측 모두와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주장은 선생의 정치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④ 해방 후 귀국한 선생은 계속해서 민족운동의 통합에 강한 집착을 하였 다.

민족주의와 민족운동 통합은 선생이 임시정부에 대한 애착과 모든 민 족운동단체들이 임시정부로 통합해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말한 것이다.

⑤ 5당회의가 실패로 끝난 사흘 뒤, 이승만이 합류하여 우익측에서 <비상 국민회의>가 태동하자, 좌익(左翼)측에서도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 전)을 결성하였다.

선생은 이 같은 현실이 못마땅해서 그래서 극좌(極左) ․ 극우(極右)의 대립을 지양하고 민족통일(民族統一)을 꾀해보려는 그의 평소의 신념을 행동으로 나타냈다.(<비상정치회의(非常政治會議)>의 탈퇴)

⑥ <비상정치회의>를 탈퇴하면서 낸 성명서 중에서도 선생은 좌우 어느 한쪽으로도 편향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피력하였다.

⑦ 1946년 3월 30일엔 ‘미군정(美軍政)을 반대한다’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서 6개월가량 옥살이를 한 이후, 선생은 ‘좌우합작(左 右合作)’에 정열을 기울였다. 그래서 정치기반이었던 좌익의 집결체인 <민전(民戰)>의장단을 사퇴하였고, 박헌영(朴憲永)으로 대표되는 ‘좌익 (左翼) 모험주의(冒險主義)’와도 결별했다.

선생은 비록 붉은 옷을 입고 붉은 사람들과 함께 했으나 영혼까지 파고든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선생이 중국에서 활동한 20세기 전반기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이론과 실제의 양면에서 뚜렷한 획을 그을 수 있는 분화(分化)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주의를 민족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삼는 일은 당시 았다.

선생이 좌익의 통일전선인 민전(民戰)에 관계할 당시만 해도, 국내 정치 세력이 좌 ․ 우로 뚜렷이 2분법적으로 나뉘지 못한 일종의 교착상태였다.

만일 선생이 공산주의자였다면 박헌영(朴憲永)의 남로당(南路黨)에 반대하지 않았을 테고, 6. 25전쟁 당시 월북(越北)이나 부역(附逆)도 서슴치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선생은 공산주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고 본다.


VI. 맺음말

선생은 민족해방을 우선에 두었고, 해방 이후에는 좌우로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기 위해 애썼다. 3.1운동에 가담해 투옥되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해방되는 날까지 숨 가쁘게 투쟁해왔던 선생에게 “해방된 조국이 준 선물은 미군정반대라는 죄목으로 내려진 6개월 금고형과 좌익인물이라는 낙인과 박해”였다.

그리고 고국에서의 말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1969년 4월15일자 동아일보 기사 표제는 ‘애국지사 고(故) 김성숙 옹, 중태 이르도록 병원 한번 못간 가난, 유산은 단칸집 한 채, 퇴원비 만원 없어 허덕여’였다.

1961년 5.16 군사 쿠테타 이후 이른바 혁신계 인사로 낙인찍힌 선생은 ‘반국가행위’를 저질렀다는 죄로 10개월간 감옥에서 지냈다. 설사 ‘반국가행위’를 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환갑이 넘었고, 임정의 국무위원을 지낸 독립유공자임을 참작하면 얼마던지 석방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선생을 도와주던 손길도 끊어졌다. 유신정권의 눈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그때 운허(耘虛)스님이 가끔 쌀을 보내어서 선생의 생계를 도왔다고 한다.

말년에 선생은 천식으로 고생했지만, 가난 때문에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민족을 밝히던 별이 그렇게 사라졌다.

핍박받는 민중을 위해 독립운동에 나섰고,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사회주의자가 됐던 선생. 되돌아온 것은 가난과 탄압이었지만, 부정과 불의에 굴하지 않고 고집스레 자신의 길을 걸었다. 파란만장하고 고단한 삶 속에서 선생이 꿈꾼 것은 독립 ・통일 ・민주화였다.

이를 위해 자신을 불살랐던 선생에게 정부는 선생이 돌아가신지 10여년 후인 1982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고, 선생의 유해는 2004년에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선생의 묘비명은 1970년 4월 선생의 1l주기를 맞아 세웠다. 선생의 생전에 가까이 지냈던 이은상(李殷相)이 글을 짓고, 혁신계의 원로 정화암(鄭華岩)이 글씨를 새겼다.

“조국 광복을 위해 일본제국주의에 항쟁하고 정의와 대중복리를 위해 모든 사회악과 싸우며 한평생 가시밭길에서 오직 이상과 지조로써 살고 간 이가 계셨으니 운암 김성숙 선생이시다.

1898년 평북 철산(鐵山) 농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강개한 성격을 가졌더니 기미년에 옥고를 치른 뒤 사회운동에 가담했다가 마침내 26세 때 중국으로 망명했었다.

중국 중산대(中山大) 정치학과를 마치고 북경 ・ 광동 ・ 상해 등지에서 혁명단체의 기관지들을 편집했으며 광복운동의 일선에 나서서 혁명동지들을 규합,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하기도 하고 뒤에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여러 혁명단체들을 퉁합하여 조선민족전선동맹을 결성했다가 다시 모든 단체들을 임정으로 총 단결하여 국무위원이 되어 해방을 만나니 48세였다.

귀국한 뒤에도 민족통일을 위해 사상분열을 막기에 애썼으며 최후에 이르기까지 20여년, 정치인으로 사상인으로 온갖 파란을 겪으면서도 부정과 불의에는 추호도 굽힘없이 살다가 1969년 4월 12일에 71세로 별세하자 모든 동지들이 울며 여기 장례 지냈다.“

선생의 묘비명(墓碑銘)에서 우리는 71년간 멀리 중국 땅에서의 항일운동과 해방 후 두동강난 이 땅의 한 모서리에서 거칠게 몰아쉰 선생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선생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선생은 ‘광동꼬뮨’에 참가했다거나, 해방 후 좌익의 민전(民戰)에 관계한 전력이 있지만, 이것만으로 선생을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로 규정하는 것은 그 근거가 빈약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선생이 70평생 일관해서 걸어간 길은 이데올로기의 편향성(偏向性)과는 얼마간 거리를 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선생은 극단적인 좌우익(左右翼)을 함께 배제하고, 오직 민족의 통일된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이 남긴 유묵(遺墨)


“위건설자유행복지신국가이분투(爲建設自由幸福之新國家而奮鬪), 즉 자유롭고 행복한 새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분투하자”


는 구호처럼 선생은 이데올로기의 벽을 뛰어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단결(團結)과 통합(統合)을 부르짖은 진보적(進步的)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였다.

<끝>


<부록>

o.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민족주의(民族主義)란 민족의 구성원들이 자기들만의 민족국가를 형성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투쟁하는 이념을 말한다.

민족주의는 대체로 서구사회에서는 프랑스대혁명을 계기로 하여 표출되기 시작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3·1 운동 이후부터 였다. 그래서 이 시기부터 한국의 민족운동은 전통적인 명망가 중심의 보수적인 계보와 새로이 등장한 청년층의 진보적인 세력이 중심이 된 진보적 민족운동으로 양분되기 시작하였다.

전자는 주로 국내에서 국권을 회복하려는 애국계몽운동에 치중하였으며, 해외에서는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무력투쟁과 외교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만주와 중국 등지에서는 군사활동도 격렬하게 보여주었다.

한편, 후자의 경우, 국내에서는 1930년대부터 노동자·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적인 성격으로 기울어졌으며, 광복 이후의 민족운동은 극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특정 강대국의 지원을 받았던 공산주의자와 자본주의자에 의한 민족분단으로까지 전락되었다.

본질적으로 민족주의는 진보적인 이념이 아니다. 하지만 시대와 장소와 여건에 따라 민족주의는 그 성격을 다르게 규정할 수 있다. 식민 지배를 받는 민족이 내세우는 민족주의는 진보적인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던 시절, 우리는 민족주의와 떼어 놓고 존재할 수 없었다. 당시에도 민족내부에서는 좌우 이념적 갈등이 있기는 했지만, 그 이념들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의 구속을 받았다.

1919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공산당에 의해 조직된 '국제 공산당' 기구인 <코민테른(comintern)>이 민족문제에 관한 테제(강령)를 채택한 후, 한국의 좌파운동은 민족문제를 수용하면서 발전하였다.

우파에서도 민족문제를 외면하고 그들의 이념대로만 나가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모든 우파의 이념이나 운동은 민족주의의 품안에서 해석되고 수용되었다.

<3·1 운동> 이후 민족 운동은 수그러들었을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3·1 운동>을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은 서로의 마음속에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망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좌절 속에서 오히려 희망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독립이 절대절명의 과제이지만, 당장은 일제와 정면으로 맞서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우선은 일제에 맞설 수 있는 민족의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민족 독립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고, 지역과 계층의 차이를 뛰어넘어 단결하자고 주장한 사람들을 민족주의자라 했다.

또한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서로 대립하고 비판하면서도 민족의 장래를 올바른 길로 열기 위해서는 함께 노력하였다.

1925년 무렵. 농민과 노동자들이 조직한 단체 가운데 지주나 자본가 등 힘 있는 자들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단체가 많았다. 이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농민·노동자 등 노동 계급의 해방과 민족의 독립을 동시에 추구하자는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이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대부분 청년 학생이나 지식인이었다.

이들은 사상 단체를 만들어 함께 공부하면서 사회 운동에 참가하였다. 또한 농민이나 노동자 중에도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그래서 이들 사회주의자들은 1925년, '조선 혁명의 지도 기관'이 되겠다고 다짐하며 <조선 공산당>을 설립하였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자들은 일찍부터 민족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1917년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에도 사회주의가 보급되었지만,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민족주의 사상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 등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했었다. 이에 따라 1920년대 초반에 들어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로 분화되었으며 1925년에는 자연스럽게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어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가 균열되기 시작했다.

<조선공산당>과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외연을 확대하면서 노동계급 내부에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확산시켰다.

그래서 <사회주의>는 점차 자본과 권력의 착취와 억압에 저항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면서 민족주의와 구분되는 독자적 영역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은 우익으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용어를 잘 사용하지 않았다. 해방 후 사회주의자들은 ‘왜곡된’민족주의를 비판했지만, 민족주의 그 자체를 비판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일제시기 이래 한국 사회주의가 민족문제와 민족주의라는 원초적 환경과 결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일제강점기때, 사회주의세력이 대중의 지지를 받았던 것도 민족정서와 민족주의가 융합하여 일제에 대한 저항 세력으로 자기정체성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1920년대에 들어 ‘레닌 기념일(1월 21일)’, ‘코민테른 기념일(3월 2일)’ 등 공산주의운동 기념일에는 정기적으로 기념투쟁을 벌였지만, 한편으로 ‘3.1 기념일’, ‘6,10만세 기념일’, ‘국치일(8월 29일)’ 등 한국의 민족기념일에 대해서도 기념의식을 거행했다.

이들 기념일은 대개 한국민족이 일제식민지 지배에 따른 수치와 분노를 되새기는 것, 곧 민족적 기억을 재생하는 의식이었다. 특히 ‘6,10만세 기념일’이 대표적이지만, 사회주의자들도 순종(純宗)의 국장(國葬)을 맞이하여 민중들에게 격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격문에서 ‘국가의 주권을 박탈당하여 왜적놈의 노예가 되었다’는 비분을 기억하고, 왕에 대한 통곡과 충성을 일제를 몰아내는 데 힘쓸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장례식은 사회주의와 관계가 없는 형태이지만, 사회주의를 민족감정과 전통에 결합시켜 대중의 민족주의 정서를 촉발시키는 공간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가 융합하는 과정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더욱 전면화 되었다.

해방 후 사회주의자들은 일제식민지의 붕괴에 따라 민족국가 수립을 최대의 과제로 내 놓았다. 해방과 함께 사회주의자들의 목표는 식민지 해방에서 민족국가 수립으로 전환되어 나갔다.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국가 만들기 과정에서 태극기와 애국가 등이 해방된 현실을 정당화시키는 상징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대중의 원초적 민족감정을 자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방 후 사회주의자들은 일종의 애국자 경쟁을 벌렸다. 사회주의세력의 각종 집회나 의식에는 국기로서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불리었다. 조선공산당도 애국의 당으로 불리었으며, 사회주의자는 스스로 애국자로 자처했다.

조선공산당이나 사회주의자들은 스스로 민족의 미래를 가장 잘 대변하는 집단임을 강조하면서 민족주의 우파세력을 상대할 때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한 용어는 ‘민족’ 또는 ‘친일파 만족반역자’였다. 곧 사회주의 정치의 언어와 담론은 민족주의에 제한되거나 갇혀있었던 셈이다.

사회주의자들에게 민족국가건설은 민족적 정체성을 구현시키는 상징적 효과만이 아니라 해방이라는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정당화시키고 대중의 잡단행동과 동원을 유도하는 구심점이었다. 해방된 상황에서 분열되고 대립된 다양한 계층과 계급의 이해를 뛰어 넘어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는 상상의 공동체가 민족국가였다.

해방 후 남북한 사회주의자들은 이른바 건국과 애국을 내세우며 대중동원(mass mobilization)방식으로 일종의 생산능률 증진운동을 경쟁적으로 벌였다.

남한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全評)은 ‘진정한 애국자는 노동자’라는 구호 아래 ‘불타는 민족애와 국가애’를 강조하는 산업건설운동을 전개하고, 이 운동에 앞장 선 이른바 ‘애국노동영웅’에게 전평상(全評賞)을 수여했다. 북한 사회주의자들도 이러한 애국주의 노동운동을 일찍부터 전개했다. 북한은 이른바 ‘근로 인민의 애국적 창발력’을 북돋우면서 증산경쟁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고, 이를 위해 ‘노동영웅운동’을 조직했다.

이러한 운동에서 근로대중들은 독립과 해방사업을 위해 ‘희생적으로 분투하고 이를 악물고 일할 것’을 주문받았다.

해방 후 남북한에서 전개된 이들 운동은 경제부흥과 민족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해방 후 사회주의 세력의 민족주의가 애국주의와 결합되면서 민족적 정체성이 사회주의 정치의 정체성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민족과 계급의 이해를 하나로 일치시켜 대중의 민족애와 국가애를 사회주의 국가체제에 대한 복종이나 충성으로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사실 해방 후 사회주의자들의 민족주의는 독립국가와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신성한 과제’를 전제함으로써 개량주의 협의를 피할 수 있었고, 대중운동 내부에서 정당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 사회주의자들의 민족주의가 지니는 위험성은 계급정치를 ‘민족의 틀’에 안주시키면서 다른 형태로의 전환을 어렵게 한다는 데 있다. 식민지시기 사회주의자들의 민족주의는 ‘일제의 지배’와 ‘조선의 독립’이라는 이항 대립속에서 저항이데올로기로 기능했지만, 해방과 함께 독립을 구체화하는 민족국가 수립 그리고 애국주의로 급속히 전환되었다.

따라서 다른 나라의 공산당이 사회주의 혁명만을 강조한 데 비해, 조선 공산당은 계급 해방과 민족 해방을 동시에 추구하였다.

■ 일어서는 민중들

농민과 노동자들은 3·1 운동 때 앞장서서 투쟁하였다. 그리고 3·1 운동 이후에는 농민·노동 단체들을 앞 다투어 조직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고, 일제에 반대하는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농민들은 소작인회나 농민 조합을 조직하여 지주에 맞섰다. 전남 신안군의 암태도 농민들의 투쟁(1923)과 황해도 재령군 북률 농민들의 투쟁(1924)은 지주와 이들을 후원하는 일제 당국에 맞서 2년여에 걸쳐 전개된 대표적인 소작 쟁의였다.

노동자들은 직업별 혹은 지역별로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투쟁하였다. 5,000여 명의 부두 노동자들이 하나로 단결하였던 부산 부두 노동자 파업(1921)과 지역의 노동자들이 대거 참가하여 4개월 이상 투쟁을 벌였던 원산 총파업(1928~1929)이 대표적인 노동 쟁의였다.

소작 쟁의와 노동 쟁의는 민중들이 직접 일어나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려는 운동이었으며, 민족적·계급적 차별을 폐지하려는 투쟁이었다. 그리하여 농민·노동자들의 투쟁은 사회주의 운동으로 이어지거나, 일제의 통치 기관이나 민중 수탈 기관에 대한 무력 공격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1931년 당시 한국인 공장 노동자의 노동 시간공업 발전이 지체된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그리고 해고의 위협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출처 :호소가와 가로쿠, 《식민사》, 1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