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4권

상주학. 금요사랑방 제83강.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상주의 재해 현황

빛마당 2016. 1. 8. 21:09


朝鮮王朝實錄에 記錄된 尙州의 災害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재수

Ⅰ. 들어가는 말

2002년 8월, 강원도 지역을 중심으로 태풍 ‘루사(Rusa)’가 강타하여 강릉에는 870mm 이상의 기록적인 강수를 내리게 하였다. 이로 인해 246여 명의 사망ㆍ실종자와 5조 1천억 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하였다(소방방재청, 2003). 또한 1998년과 1999년에는 경기 북부 지역에 집중 호우가 발생하여 수많은 이재민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으며 이와 같은 호우의 빈도는 점차 증가하고 있다. 2005년 8월, 엄청난 호우를 동반한 허리케인 ‘카트리나(Katrina)’는 미국 남부 지방을 강타하여 커다란 피해를 입혔다. 2007년 초, 호주에는 사상 최악의 가뭄이 발생하여 그 피해가 확산되고 있다.

이처럼 현재 전 세계적으로 호우나 가뭄과 같은 극한 기후 사상(extreme climate events)의 빈도와 강도가 증가함에 따라 인명과 재산 피해도 증가하게 되어 기후 변화에 대한 관심도 점차 커지고 있다. 인간 생활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후는 변동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과거의 기후 환경을 고찰하고 현재의 기후를 이해하며 변화 과정 속에서 미래의 기후를 예측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올해만 해도 2015년 서해안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지독한 가뭄 현상과 지난 2015년 12월 22일 전북 익산에서 일어난 3.9의 지진 발생과 그 다음날인 23일 일어난 여진을 우리는 주목해 봐야 할 일이다.


Ⅱ. 재해(災害)란?

재해란 이상적인 자연현상 또는 인위적인 사고가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사회적, 경제적 피해를 말한다.

재해에는 자연재해(自然災害)와 인재(人災)로 크게 나누는데 자연재해는 천재지변(天災地變)으로 기상·지변·생물 등에 급격히 나타난 자연 현상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피해를 끼치는 것으로 가뭄, 홍수, 태풍, 지진, 화산 폭발, 해일, 폭설, 산사태 등을 말한다.


Ⅲ. 조선시대 재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조선시대의 자연재해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뭄

‘수한(水旱)은 하늘이 하는 일이고, 갈고 씨 뿌리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니 인사(人事)를 닦고 천시(天時)를 기다리는 것이 옳은 일이다.(水旱, 天也; 耕播, 人也。 修人事以待天時可矣。’ -『태종실록』 11/06/17(병오)


가. 가뭄기록

『조선왕조실록』중 태조부터 순종(1392∼1910)까지 가뭄에 대해 검색한 결과, △가뭄 3천173건 △한발(旱魃) 93건 △한해(旱害) 63건 △기아 118건 △흉년 5천948건 △한재(旱災) 1천766건 △기근 1천657건 등 총 1만2천800여 건의 자료가 검색되었다.

검색기록을 보면 세종·성종·중종·효종·현종·영조·정조 시기에는 기록이 많이 있으며(이들 왕들의 제위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지만), 조선후기인 순조·헌종·철종 시기에는 비교적 기록 수가 그 이전에 못 미친다.

『국역증보문헌비고(누리미디어, 2000)』의 기록을 보면, 490년 동안 총 100회의 가뭄이 발생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평균적으로 5년에 한번 꼴로 가뭄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으며, 2년 연속 가뭄은 15회, 3년 연속 가뭄 4회, 4년 연속 가뭄 1회, 6년 연속 가뭄 2회 등 해를 거듭해 가뭄이 발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효종 8년(1657)부터 현종 3년(1662)까지, 현종 7년(1666)부터 현종 12년(1671)까지는 6년 동안이나 연속해 가뭄이 지속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증보문헌비고를 토대로 해서 살펴본 자료에는 역시 수해 못지않게 가뭄과 기근에 시달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뭄은 한(7회), 대한(28회)으로 구별되어 있고, 기근은 기(55회)와 대기(25회)로 나누어져 있다. 또 황해(1회)와 메뚜기 외의 충해(3회)도 있었고 풍년도 3회나 기록되어 있다.


나. 가뭄피해

○ 세종 5년(1423년) 4월 16일의 기록에 가뭄이 극심해 남한강의 물이 얕아져 경상도의 세금을 남한강의 조운을 통해 서울로 옮기기가 어렵게 되자 여흥·음죽·이천·천령·지평·양근·광주 등지의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각기 물가에 사는 백성들을 동원하여 하상 준설공사를 경기감사가 보고 건의한 것이다.

○ 선조 36년(1603)에는 평안도의 청천강을 사람들이 걸어서 건널 수 있었고, ○ 인조 3년(1625)에는 북도에 가뭄이 들어 두만강이 얕은 여울이 됐으며,

○ 인조19년(1641) 에는 경상도의 가뭄으로 낙동강의 물줄기가 끊겼다고 했다.

○ 또한 현종 4년(1663)에는 경상도에 가뭄이 극심해 낙동강의 뱃길이 끊겼고,

○ 숙종 35년(1709)에는 청주 청천강 물이 끊어졌는데, 청천강은 속리산의 하류이자 달천의 상류로서 근원이 가장 멀어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지만 이날은 5리(약 2㎞) 가량이나 물이 끊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 성종 13년(1482년) 7월 16일에는 경자년부터 농사를 실패했는데 ‘지난해에는 더욱 심하였고 지금도 가뭄이 심하니 장차 올해에도 흉년이 들 것’이라고 했고,

○ 성종 16년(1485)에도 ‘전번 달에 비가 오지 않았고 이번 달에도 비가 오지 않았다’고 하여 두 달 이상 비가 오지 않은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 중종 24년(1529)에는 한발로 인해 세금을 매길 때 하지하(下之下)로 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 고종 때에도 해를 이어 가뭄이 자주 발생했는데, 왕실의 사금고인 내탕고와 선혜청, 사청 등에서 기근 대책비용과 식량을 긴급 조달했다. 조선 말기 이러한 장기간의 가뭄은 외세의 침략과 함께 재정파탄과 국력쇠퇴를 초래하게 되었다.


다. 가뭄 대책

○ 소극적 대처

조선지배층의 가뭄에 대한 시각은 ‘사람의 도리를 다 못했을 경우나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에 발생한다.’는 성리학적 유교사상에 기반을 두고 가뭄이 발생했을 때 임금은 임금대로, 관리들은 관리대로 자기의 소임을 다 했는지, 사치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고 원한이 맺힌 사람들이 있나 살펴봤으며, 기우제를 지냄으로써 하늘의 노여움을 풀고자 했다.

○ 적극적 대처

① 수리사업을 일으키고 수리시설에 대한 지방의 수령들을 감찰했다.

② 농서(農書)와 농정(農政)에 대한 신기술 및 정책을 수립

③ 중국과 일본에서 농사에 이용하고 있는 수차(水車)를 도입

④ 측우기로 우량을 기록

⑤ 수표를 만들어 홍수에 대한 자료도 수집 및 한강의 홍수위를 측정

○ 흉농에 대한 대책

① 의창제, 사창제, 진휼청 같은 저곡(貯穀)제도와 진대(賑貸)제

② 흉년의 대용식 조리방법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구황벽곡방 등의 언해본을 간행

③ 중앙과 지방에 금주령

④ 곡물의 씨앗이 부족한 경우에 다른 지방에서 변통

⑤ 긴요한 공물을 제외하고는 감해주기

⑥ 8도에 진휼사 및 종사관을 파견 창고 곡식의 수량을 조사하여 보고

⑦ 각 도의 군사를 풀어 도토리를 줍기와 미역과 같은 것을 비축하여 구제에 힘씀

아울러 아래와 같은 정책을 사용하기도 했다.

첫째, 각 고을 향교의 생도들 중에서 지원하여 공부하는 사람 이외에는 모두 방학을 하게 했다.

둘째, 흉년구제에는 소금과 장(醬)이 가장 중요하므로 소금 구입하는 수군을 48명에서 100명으로 늘리게 했다.

셋째, 각 포구의 수군으로 하여금 흉년구제 물자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넷째, 내수사에서 장리(長利)로 모아둔 메밀을 민간에 나누어주어 종자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2. 홍수

‘여러 날 동안 큰비가 내리니 수재(水災)가 있을 것이다. 수문(水門)의 전방(箭防)을 속히 걷어치워 수도(水道)를 통하게 하고, 순찰하는 관원과 병조에서는 밤새도록 순시하여 사람을 죽는데 이르게 하지 말라’ -『세종실록』 03/06/16(정미)


가. 홍수기록

조선시대 태조부터 철종까지 조사된 기록들을 보면 △큰비(大雨) 283건 △큰물(大水) 177건 △홍수 16건 등이 조사되었다.

시대적으로 보면, 명종부터 현종까지 132년간에 기록된 내용이 전체기간에 기록된 내용의 절반을 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그 시대에 발생한 모든 중요한 사건을 동일한 중요성을 가지고 기록을 했다면, 이 시기(명종∼현종)에는 다른 기간보다 더 특별하게 홍수가 자주 발생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시기의 홍수피해는 전국규모로 발생 했는데, 1990년대 경기북부지역에 연이어 발생한 홍수처럼 수년에 걸쳐 연속적으로 발생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서울 부근의 홍수에 관해서는 승정원일기 및 조선왕조실록 등에 의해 정종 이후(1400년 이후) 약 450년간의 기록이 있다. 또 조선시대에 실시한 기우(祈雨) 기청(祈晴) 제사의 기록에도 한강 및 서울 시내 수표의 척도를 게재한 것이 있다. 이들 자료를 정리해 보면 서울을 중심으로 한 홍수는 총 176회에 달했다.

그 중 수위가 높았던 해는

〇 태종 7월 무오(1404년 9월 2일)로 서울 시내에 물이 넘쳐 수심이 10여 척에 달했으며,

〇 영조 무인 갑자(1758년 9월 12일)에 19척,

〇 영조 계미 6월 병신(1758년 7월 20일)에 한강 수위가 20척에 달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나. 홍수피해

세종 9년(1427) 6월 23일에 경상도 상주에 큰비가 내려 산사태로 7명이 죽고 43호의 가옥이 떠내려갔으며, 선산·의성·함창·군위 등 고을에서도 민가와 사찰들이 떠내려가거나 파묻혔다는 경상감사의 보고가 있었다.

세조 13년(1467) 5월 27일 ‘큰비로 한강이 넘쳐서 평지에서 물의 깊이가 30척(약 6.2m)이 되었고, 병조에 전하여 백성들을 옮기게 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현재 한강대교를 기준으로 지정홍수위는 4.5m, 경계홍수위는 8.5m, 위험홍수위는 10.5m로 정해져 있다. 한강이 넘쳐 평지의 깊이가 6.2m나 되었다는 것은 대홍수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명종 2년(1547)에 전국적으로 홍수가 발생했다. 7월 3일 경상도 감사의 보고를 시작으로 전라도·황해도·강원도·평안도·함경도에 홍수가 발생했음을 보고하고 있다.

○ 선조 38년(1605)에 전국적으로 큰비가 내렸는데, 8월 1일 홍수피해에 대한 종합보고가 있었다.

○ 숙종 43년(1717) 7월 12일에는 영남과 관동지역에 대수재로 ‘팔도에 큰물이 졌으며 영남과 관동이 더욱 혹심하였고, 낙동강 일대가 모두 큰 바다를 이루었고 사람이 빠져 죽은 것이 그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명 및 재산 피해가 컸던 것은 순조 때다. 순조 임진 6월 계미(1823년 7월 5일)에는 낙동강의 대홍수로 인해 떠내려간 호수가 3,800여 호나 되었고, 64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그 해는 전국적으로 7,671호나 떠내려갔고 압사자가 293명에 달해 그 참상을 짐작할 수 있다.

역대 왕 중 가장 홍수를 빈번히 겪었던 순조 때는 거의 매년 홍수가 있었으며 그 피해액도 매우 컸다. 특히 순조 15, 16, 17, 19, 20, 21, 22, 23, 24년은 홍수가 매년 계속 발생했다. 피해가 컸던 고종 22년(1885년) 8월의 홍수 때는 전국에 8,600여 호의 재산피해가 있었다.

순조 17년(1817년) 6월의 피해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장마 비가 여러 달 동안 내려 호남지방에서의 피해는 민가 2,453호가 물에 떠내려갔거나 무너졌으며 사망자는 84명이었다. 그리고 영남에서는 민가파손 2,025호, 사망 45명이었으며 호서지방에서는 민가파손 1,605호, 사망 48명이었다. 또한 평안도에서는 민가파손 145호, 사망 29명이었고 수도 안의 5부에서도 민가가 파손된 것이 778호였다.

헌종 5년(1839년) 8월의 대홍수로 인한 기록을 보면 황해도에서는 평산 등 13개 고을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49명, 떠내려가거나 무너진 민가가 1,835호 였으며, 토산현에서는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50명, 떠내려가거나 무너진 민가가 20여 호였다. 평안도에서는 물에 떠내려갔거나 무너진 민가가 1,563호, 사망자는 2명이었으며 경상도에서는 이러한 피해를 입은 민가가 3,108호였고, 사망자는 54명, 함경도에서는 완전히 무너진 민가가 335호, 충청도에서는 피해가구수가 489호, 사망자는 10명이었다.

철종 5년(1854년) 7월의 기록을 보면 네 성문에서 비가 개는 제사를 지냈으며 수원, 김해, 밀양, 양산 등의 고을에서 물에 떠내려갔거나 사태에 깔린 집들을 돌봐 주는 은전(恩典)을 베풀었다.


3. 지진


가. 지진의 기록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서인 『삼국사기』는 물론이고, 『조선왕조실록』에 1,900여 건이나 등장하는 지진 관련 기록은 한반도 역시 지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곳임을 입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중종대인 16세기 초반 큰 지진이 일어났다. 조광조가 신진 사림파의 핵심으로 등장하여 개혁정치가 적극 추진되던 1518년(중종 13) 5월 15일의 일이었다. 실록에서는 당시 지진 발생이 매우 심각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유시(酉時:오후 6시경)에 세 차례 크게 지진이 있었다. 그 소리가 마치 성난 우레 소리 처럼 커서 인마(人馬)가 모두 피하고, 담장과 집들이 무너지고, 성첩(城堞)이 떨어져서, 도성 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당황하여 안색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밤새도록 노숙 하며 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고로(故老)들이 모두 옛날에는 없던 일이라 하였다. 팔 도가 다 마찬가지였다.」

라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대책회의가 열렸다. 중종은 즉각 대신들을 소집하여 대책회의를 하였는데 지진 발생 원인을 정치에서 찾으려 한 점이 주목된다. 남곤의 보고에 대해 중종이

“오늘의 변괴는 더욱 놀랍고 두렵다. 항상 사람을 쓰는 데 잘못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친정(親政)이 겨우 끝나자 곧 큰 변이 일어났고 또 오늘의 친정은 보통 때의 친정과는 다른데도 재변이 이와 같으니 이 때문에 더욱 두려운 것이다.”

「上曰今日之變 尤爲惕懼 常恐用人失當 而親政纔畢 仍致大變 且今日之親政 又非如尋常 之親政 而致變如此尤爲惕懼者此也]」

라고 한 부분이 대표적이다. 훗날 임진왜란 중인 1594년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자 당시 임금인 선조도 왕세자인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뜻을 비친 적이 있었다. 선조 또한 지진의 원인을 자신의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하고 하늘의 꾸짖음으로 받아들이려 했던 것이다. 지진을 과학적인 기준보다 도덕적인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지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1392년(태조 1)부터 1863년(철종15)까지 472년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지진 건수는 무려 1,900여 건에 이른다. 대략 1년에 4회 꼴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보다는 지진의 빈도가 훨씬 높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지진 발생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기보다는 지진에 대한 관측이 정밀해지고 보고 체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에 천문 현상과 지변을 관측하는 관상감이라는 관청을 두었고, 관상감에는 천재지변에 관한 사항을 정리하여 『관상감일기』를 남겼다. 실록을 편찬할 때는 사관들이 쓴 사초(史草)와 함께 각 관청의 업무 일지인 시정기를 참고하였는데, 시정기인 『관상감일기』에 기록된 지진 관련 내용이 실록에 포함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나. 지진의 추이

사료에 전해지는 `역사지진'은 얼마나 일어났을까, 거기엔 일정한 패턴이 있을까.

한반도 지진은 조선시대 이래 100년 내지 150년 주기로 활성과 잠복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이에 따르면 현재 한반도는 지진의 활성기에 들어서 있다.

경희대 지리학과 윤순옥 교수와 석사과정 전재범(28)씨, 황상일 경북대 교수가 최근 이런 사실을 밝혀 낸 연구보고서(조선시대 이래 한반도 지진 발생의 시공간적 분포 특성)를 실었다. 전씨와 윤 교수 등은 한국학 데이터베이스연구소가 시디롬에 옮긴 『조선왕조실록』의 500년간 지진 관련 기록을 분석해 이런 결론을 얻어냈다.

연구팀은 먼저 모든 지진 기록을 지진의 범위와 규모별로 유형화하고 이를 다시 지역과 시기별로 나눴다. 예컨대 지진이 감지된 범위가 7개 고을이라면 A급, 4~6개 고을이라면 B급, 3개 고을 이하는 C급으로 나누고, 지진 규모가 인명·재산피해를 낼 정도는 a급, 문과 창문이 심하게 흔들릴 정도는 b급, 그 외엔 c급으로 구분했다.

이렇게 나누자 조선시대 지진은 A급 41건, B급 51건, C급 349건으로 나타났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넓은 지역에 큰 피해를 낸 Aa급은 3건인 데 비해 가벼운 Cc급은 337건으로 76%를 차지했다. 한반도 지진은 대체로 좁은 지역에 작은 규모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대(1392~1863)를 5년 단위로 쪼개 각 시기별로 지진기록을 정리하자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전씨는 “지진 데이터를 컴퓨터 프로그램에 넣어 돌렸더니, 지진은 오랫동안 활발하다가 급격히 줄어 잠복하는 패턴이 되풀이되는 게 뚜렷하게 나타났다”고 말했다.

연구팀이 나눈 시기별 지진빈도를 보면, 1단계(1392~1535)의 140년 동안엔 조선시대 전체 지진의 46%인 203차례의 지진이 기록됐으나, 2단계(1536~1665)의 130년 동안엔 단 44차례만 지진이 기록될 정도로 급격히 줄었다. 다시 3단계(1666~1765)엔 모두 189차례(43%)의 지진이 감지됐다가, 4단계(1766~1863)엔 단 5차례로 거의 없었다.

연구팀은 이어 이후의 지진기록을 같은 방식으로 분석했다. 이랬더니 1904년까지는 지진의 잠복기인 4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1905년 이후는 다시 지진이 급격히 잦아지는 5단계의 활성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윤 교수는 “분석기간이 600년의 짧은 시간이어서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순 없지만 너무나도 뚜렷해 무시할 수 없는 주기성”이라며 “주기적으로 큰 지진을 겪는 유라시아판 경계부의 일본과 달리 한반도는 유라시아판 안에 있기 때문에 그동안 주기성이 있을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는데 이번 발견은 이에 도전하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했다.

지역별로 조선시대 지진은 경북(21%)과 충남(13.1%), 경남(11.4%), 전북(10%) 등에서 활발했으며 영남지역이 전체의 32.3%를 차지해, 요즘 활성단층 논란이 일고 있는 경상분지에서 지진활동이 활발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윤 교수는 “위의 지진기록은 최근 관측 데이터와 비슷한 지역 분포를 나타냈는데, 이는 조선시대 선조의 지진 관측·기록이 상당히 상세하고도 정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역사적으로 조선시대까지 총 1,965회의 지진이 발생하였으며, 이중 규모 5.0 이상이 1,200여 회, 6.0 이상이 141회, 7.0 이상이 23회였다. 특히 조선시대에 1,600회 발생하였으며, 이중 13∼18세기에 1,518회 발생하여 이 기간 동안 지진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다. 그러나 이후 지진활동이 급격히 감소하여 지진정지기에 접어들었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 점차 지진이 활성화되고 있다.


4. 황충


가. 황충의 피해와 방제

1437년 (세종(世宗) 19년) 2월. 작년에 중남부 지역 4개 도(道)가 모두 흉년이 들어 거의 대부분 지역이 농사를 짓지 못했는데, 특히 경기도의 안성과 충청도의 공주(公州)·신창(新昌)·아산(牙山)·회덕(懷德)·직산(稷山),전라도의 전주(全州)·함열(咸悅)·임피(臨陂) 등의 고을은 모두 누리의 피해를 입었다고 전하고 있다.

1536년(중종(中宗) 31년)에는 3도(道)에 누리(飛蝗)가 날아들어 들을 뒤덮어 남아난 곡식이 없을 정도였다.

1604년(선조(宣祖) 37년) 6월 강원도 간성(杆城-고성군) 지역에는 황흑색 누리(飛蝗)가 날아들어 전답에 두루 깔려 곡식을 남김없이 다 갉아먹었으므로, 며칠 사이에 들판이 불타버린 땅과 같이 변하고 백성들은 하늘을 쳐다보며 울부짖고 있다고 하였다.

누리는 가뭄이나 역병, 홍수 등 다른 재앙과 겹쳐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피해가 더욱 심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누리의 피해는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충청도, 영남과 호남 등 전국에 걸쳐 발생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261건의 황충 발생기사 가운데는 곡식을 해치는 벌레뿐만 아니라, 소나무 등 산림을 해치는 해충들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황충이 모두 누리는 아니었고, 일부는 나방이나, 벼멸구, 송충이도 황충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〇 송충이 제거에 대한 기록

소나무는 고려와 조선에서 관리되고 보호되는 나무였다. 송충이 주로 먹는 소나무 껍질은 백성들에게 최후의 구황(救荒)식품이기도 했던 만큼, 국가에서 송충이를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1403년 태종 임금은 송충이를 잡을 것을 명령했다. 이에 승추부(承樞府), 순위부(巡衛府) 등 여러 관청의 장인과 관리가 사람을 내어 1만 명이 참여하였고, 한 사람이 석 되(升) 정도를 잡아 땅에 묻었다.

송충이를 잡아도 다시 발생하자, 태종, 세종 등은 여러 관청의 관원들 과 노비 등을 징발하여 수시로 송충이를 잡게 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송충이는 숙종(肅宗, (1674~1720) 때 큰 피해를 입혀 1685년 숙종은 한성부로 하여금 오부의 군졸들을 다 동원해 경계를 나누어 송충이를 잡고, 1702년에는 한양 인근 산에서 송충이가 번식하자, 3일 동안 사람들을 뽑아 잡은 송충이의 양이 3,972석이나 될 정도로 많았다. 숙종은 송충이를 제거하기 위해 특별히 재앙을 쫓고 복을 빌기 위해 지내는 제사인 기양제(祈禳祭 - 재앙을 쫓기 위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5.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기우제(祈雨祭)와 기청제(祈請祭)


가. 기우제(祈雨祭)

태조 3년(1394) 5월 6일(갑진)

가뭄으로 종묘와 사직에 기우제를 지내다

한재(旱災) 때문에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비 오기를 빌었다.

태조 3년(1394) 5월 8일(병오)

가뭄으로 절과 신사에 기우제를 지내고, 시장을 옮기다

한재(旱災) 때문에 불우(佛宇)와 신사(神祠)에 두루 빌고, 저자[市]를 옮기었다.


나. 역대 기우제 현황

태종 38회, 세종 199회, 문종 6회, 단종 13회, 세조 23회, 예종 2회, 성종 47회, 연산군 4회, 중종 113회, 인종 1회, 명종 51회, 선조 45회, 광해군 42회, 인조 48회, 효종 31회, 현종 개수 80회, 숙종 177회, 경종 14회, 영조 174회, 정조 92회, 순조 128회, 헌종 16회, 철종 34회, 고종 186회 계 1,567회(광해중초, 정초 등 포함 1,661)


다. 기청제(祈請祭)

태종 5년(1405) 12월 17일(기묘)

동북면·풍해도에 사람을 보내 홍수와 가뭄을 막는 제사를 지내다

동북면(東北面)과 풍해도(豐海道)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미리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를 막기 위해 산천(山川)에 빌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예조(禮曹)에 명하기를,

“근년(近年)에 계속하여 수재와 한재가 있었는데, 동북면과 풍해도가 더욱 심하니, 마땅히 사신을 보내서 미리 빌어야 한다.”

하니, 예조에서 청하였다.

“명년 2월 외산제(外山祭) 때에, 옛날 산천(山川)에다 영제(禜祭)593) 를 지내던 예(例)를 써서 빌으소서.”

영제(禜祭) : 기청제를 말함

태종 8년(1408) 7월 23일(기사)

경성의 네 문에 기청제를 지내다

오랜 비[雨]로 인하여 경성(京城) 사문(四門)에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


라. 역대 기청제 현황

태종 13회, 세종 19회, 문종 1회, 세조 4회, 예종 1회, 성종 2회, 연산 1회, 중종 5회, 명종 9회, 선조 9회, 광해군일기(중초본) 11회, 광해군일기(정초본) 10회, 인조 6회, 효종 1회, 현종개수 8회, 숙종 22회, 영조 24회, 정조 15회, 순조 14회, 헌종 3회, 철종 6회 계 191회


Ⅳ.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상주의 재해


1. 상주 재해의 기록

태종 3년(1403 계미) 4월 12일(무오)

경상도 안동·상주 등지에 5일 동안 서리가 내리고 가물다

○慶尙道安東、尙州、榮川等九邑, 隕霜凡五日, 且旱, 草木枯。

경상도 안동(安東)·상주(尙州)·영천(榮川) 등 아홉 고을에 5일 동안 서리가 내리고, 또 가물어서 초목(草木)이 말랐다.

태종 3년(1403) 7월 1일(병자)

경상도 관찰사 정부에게 서울의 병든 노모를 뵙게 하고, 가뭄의 정도를 묻다

○命慶尙道觀察使鄭符來京省親。 以符之母病也。 符詣闕肅拜, 上使人問曰: “其道旱甚, 何久不報也?” 符對曰: “大抵農事, 雖有早旱, 苗得雨則興, 不敢報者, 待雨也。 慶尙道今年農事, 三分之一, 可得而穫, 唯安東、尙州等州郡, 自四月至六月晦不雨, 故全失農業。”

<전략>

“대저 농사는 비록 이른 가뭄[早旱]이 있다 하더라도, 곡식의 싹이 비만 맞으면 일어나기 때문에, 감히 보고하지 못한 것은 비를 기다린 것입니다. 경상도의 금년 농사는 3분의 1은 수확할 가망이 있사온데, 오직 안동(安東)·상주(尙州) 등의 고을은 4월부터 6월 그믐까지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농사를 실패하였습니다.”

태종 5년(1405) 7월 11일(갑진)

상주·선주·영주·대구 등지에 벌레가 성하여 곡식을 해치다

○甲辰/尙州、善州、永州、大丘、星州任內, 花園蟲害穀。

상주(尙州)·선주(善州)·영주(永州)·대구(大丘)·성주(星州) 임내(任內)의 화원(花園)에 벌레가 일어 곡식을 해(害)하였다.

태종 5년(1405) 7월 29일(임술)

강풍과 폭우로 전라·경상·충청·제주 등지에 재해 발생

○壬戌/大風以雨。 全羅道古阜、牟平、光州、仁義、馬令、靈光、長興、南平、順天、金溝、益州, 蝗蟲遇風雨盡死。 濟州大木拔, 早穀木實損傷, 漂民戶十八, 漂牛馬多死, 東西浦兵船二十餘艘傷破。 慶尙道雞林、蔚州、梁州、金海、義昌、會原、咸安、晋州、珍城、陜州、草溪、星州、昌寧、靈山、大丘、慶山、永州、仁同、善州、尙州、甫州、安東、寧海, 水漲傷禾, 大木拔。 忠淸道忠州, 大風雨雹損穀。

크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었는데, 전라도(全羅道)의 고부(古阜)·모평(牟平)·광주(光州)·인의(仁義)·마령(馬令)·영광(靈光)·장흥(長興)·남평(南平)·순천(順天)·금구(金溝)·익주(益州)에 황충(蝗蟲)이 바람과 비를 만나 모조리 죽었고, 제주(濟州)에 큰 나무가 뽑히고, 밭곡식과 나무 열매가 손실되었으며, 표몰(漂沒)된 민호(民戶)가 18호(戶)요, 우마(牛馬)가 표류(漂流)되어 많이 죽었고, 동·서포(東西浦)의 병선(兵船) 20여 척이 파괴되었으며, 경상도(慶尙道)의 계림(鷄林)·울주(蔚州)·양주(梁州)·김해(金海)·의창(義昌)·회원(會原)·함안(咸安)·진주(晉州)·진성(珍城)·합주(陜州)·초계(草溪)·성주(星州)·창녕(昌寧)·영산(靈山)·대구(大邱)·경산(慶山)·영주(永州)·인동(仁同)·선주(善州)·상주(尙州)·보주(甫州)·안동(安東)·영해(寧海)에 물이 범람하여 화곡(禾穀)을 상하고, 큰 나무가 뽑히었다. 충청도(忠淸道) 충주(忠州)에 크게 바람이 불고, 우박이 내리어 곡식을 손상시키었다.

태종 8년(1408) 5월 17일(을축)

상주 임내 사람 김철이 벼락을 맞다

○乙丑/震尙州任內丹密縣人金哲。

상주(尙州)의 임내(任內) 단밀현(丹密縣) 사람 김철(金哲)이 벼락을 맞았다.

태종 9년(1409) 7월 23일(계사)

상주에서 우박이 내리다

○癸巳/尙州雨雹。

상주(尙州)에 우박이 내렸다.

태종 12년(1412 ) 5월 2일(을유)

경상 상주·의성 등지에 우박이 내려 삼과 보리가 상하다

○乙酉/慶尙道雨雹, 損麻麥。 尙州、義城、興海、淸河、義興、缶溪、減陰、大丘、河濱、新寧也。

경상도에 우박(雨雹)이 내려 삼과 보리를 손상시켰는데, 상주(尙州)·의성(義城)·흥해(興海)·청하(淸河)·의흥(義興)·부계(缶溪)·감음(減陰)·대구(大邱)·하빈(河濱)·신녕(新寧) 등이었다.

태종 12년(1412) 8월 29일(신사)

경상도 상주·선주 등 7주에서 황충(蝗蟲)이 일어나다

○慶尙道尙州、善州等七州蟲。

경상도 상주(尙州)·선주(善州) 등 7주(州)에 황충(蝗蟲)이 일었다.

태종14년(1414) 4월 13일(병진)

상주에서 사람과 소가 벼락을 맞다

○丙辰/震尙州人一牛一。

상주(尙州) 사람 1인과 소 1마리가 벼락을 맞았다.

태종 17년(1417) 윤5월 28일(계미)

충청도에서는 말이, 경상도에서는 소가 벼락을 맞다

○震忠淸道鎭川私奴都致馬、慶尙道尙州百姓波忠牛。 波忠觸氣身燋, 然竟不至死。

충청도 진천(鎭川)의 사노(私奴) 도치(都致)의 말[馬]과 경상도 상주(尙州) 백성(百姓) 파충(波忠)의 소[牛]가 벼락을 맞았는데, 파충은 번개에 닿아 몸은 탔으나 필경 죽지는 아니하였다.

세종 7년(1425) 2월 17일(정사)

경상도 상주·선산·지례·개령·의성 등지에 지진이 일어나다

○慶尙道尙州、善山、知禮、開寧、義城地震。

경상도 상주(尙州)·선산(善山)·지례(知禮)·개령(開寧)·의성(義城) 등지에 지진이 일었다.

세종 9년(1427) 4월 3일(신유)

경상도 예천·상주에 우박이 내리다

○慶尙道醴泉ㆍ尙州雨雹。

경상도 예천(醴泉)·상주(尙州)에 우박이 내리었다.

세종 9년(1427) 6월 22일(기묘)

경상도 선산·의성·함창·군위 등에 홍수가 나다

○慶尙道善山、義城、咸昌、軍威、尙州、化令等邑大水。

경상도 선산(善山)·의성(義城)·함창(咸昌)·군위(軍威)·상주(尙州)·화령(化令) 등의 고을에 홍수가 났다.

세종 9년(1427) 6월 23일(경진)

경상도 지방에 큰비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나다

○慶尙道自己卯至是日大雨, 尙州四面山皆頹, 壓死者七人, 漂流城內外人家共四十三戶, 禾稼覆沒。 善山、義城、咸昌、軍威等邑人家寺社, 亦多漂沒, 流死者摠二十三人, 山頹摠六千七百七十八所。

경상도에서는 22일부터 이날까지 큰 비가 내리어서 상주(尙州)에는 사방의 산이 모두 사태가 나 묻혀 죽은 사람이 7명이요, 성 안팎의 떠내려간 집이 모두 43호요, 논곡식이 흙에 덮이고 물에 잠기며, 선산(善山)·의성(義城)·함창(咸昌)·군위(軍威) 등 고을에도 민가와 사찰들이 또한 많이 떠내려가고 파묻히기도 하고, 떠내려가 죽은 사람이 모두 23명이요, 산의 사태 난 곳이 모두 6천 7백 78군데나 되었다.

세종 10년(1428) 4월 22일(갑술)

경상도의 금산·개령 등 고을에 지진이 일다

○慶尙道金山開寧知禮尙州等官, 地震。

경상도의 금산(金山)·개령(開寧)·지례(知禮)·상주(尙州) 등 고을에 지진(地震)이 일었다.

세종 10년(1428) 12월 15일(임진)

경상도의 여러 고을에서 지진이 일다

○慶尙道龍宮ㆍ尙州ㆍ善山ㆍ聞慶ㆍ開寧ㆍ咸昌等官地震。

경상도의 용궁(龍宮)·상주(尙州)·선산(善山)·문경(聞慶)·개령(開寧)·함창(咸昌) 등 각 고을에 지진이 일었다.

세종 12년(1430) 1월 1일(임인)

경상도와 전라도에 지진이 일어나다

○慶尙道比安ㆍ善山ㆍ尙州ㆍ仁同ㆍ咸昌ㆍ金山ㆍ開寧ㆍ居昌ㆍ知禮ㆍ安陰、全羅道茂朱ㆍ高山地震。

경상도의 비안(比安)·선산(善山)·상주(尙州)·인동(仁同)·함창(咸昌)·금산(金山)·개령(開寧)·거창(居昌)·지례(知禮)·안음(安陰)과 전라도의 무주(茂朱)·고산(高山)에 지진이 일었다.

세종 12년(1430) 4월 18일(정해)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지진이 발생하다

○慶尙道靈山ㆍ咸安ㆍ玄風ㆍ陜川ㆍ金海ㆍ宜寧ㆍ山陰ㆍ三嘉ㆍ機張ㆍ固城ㆍ蔚山ㆍ慶州ㆍ大丘ㆍ興海ㆍ長鬐ㆍ安東ㆍ延日ㆍ義城ㆍ寧海ㆍ盈德ㆍ榮川ㆍ淸河ㆍ義興ㆍ眞寶ㆍ泗川ㆍ奉化ㆍ靑松ㆍ咸陽ㆍ晋州ㆍ昆南ㆍ新寧ㆍ高靈ㆍ密陽ㆍ安陰ㆍ昌原ㆍ漆原ㆍ永川ㆍ淸道ㆍ金山ㆍ星州ㆍ仁同ㆍ開寧ㆍ梁山ㆍ珍城ㆍ鎭海ㆍ居昌ㆍ東萊ㆍ善山ㆍ彦陽ㆍ尙州ㆍ醴泉ㆍ知禮ㆍ慶山ㆍ河東ㆍ巨濟ㆍ河陽ㆍ軍威ㆍ昌寧、全羅道南原ㆍ益山ㆍ南平ㆍ潭陽ㆍ寶城ㆍ同福ㆍ綾城ㆍ興德ㆍ高興ㆍ康津ㆍ順天ㆍ長城ㆍ靈巖ㆍ高敞ㆍ茂長ㆍ羅州ㆍ井邑ㆍ高山ㆍ泰仁ㆍ和順ㆍ樂安ㆍ珍原ㆍ茂朱ㆍ昌平ㆍ金溝ㆍ全州ㆍ任實ㆍ龍安ㆍ古阜ㆍ淳昌ㆍ求禮ㆍ谷城ㆍ玉果ㆍ龍潭ㆍ茂珍ㆍ光陽ㆍ雲峯ㆍ抶安ㆍ長水ㆍ咸悅ㆍ鎭安ㆍ礪山ㆍ海珍等官地震。

경상도 영산(靈山)·함안(咸安)·현풍(玄風)·합천(陜川)·김해·의령(宜寧)·산음(山陰)·삼가(三嘉)·기장(機張)·고성(固城)·울산·경주·대구·흥해(興海)·장기(長鬐)·안동·연일(延日)·의성(義城)·영해(寧海)·영덕(盈德)·영천(榮川)·청하(淸河)·의흥(義興)·진보(眞寶)·사천(泗川)·봉화(奉化)·청송(靑松)·함양(咸陽)·진주(晉州)·곤남(昆南)·신령(新寧)·고령(高靈)·밀양(密陽)·안음(安陰)·창원(昌原)·칠원(漆原)·영천(永川)·청도(淸道)·김산(金山)·성주(星州)·인동(仁同)·개령(開寧)·양산(梁山)·진성(珍城)·진해(鎭海)·거창(居昌)·동래(東萊)·선산(善山)·언양(彦陽)·상주(尙州)·예천(醴泉)·지례(知禮)·경산(慶山)·하동(河東)·거제(巨濟)·하양(河陽)·군위(軍威)·창녕(昌寧), 전라도 남원(南原)·익산(益山)·남평(南平)·담양(潭陽)·보성(寶城)·동복(同福)·능성(綾城)·흥덕(興德)·고흥(高興)·강진(康津)·순천(順天)·장성(長城)·영암(靈巖)·고창(高敞)·무장(茂長)·나주(羅州)·정읍(井邑)·고산(高山)·태인(泰仁)·화순(和順)·낙안(樂安)·진원(珍原)·무주(茂朱)·창평(昌平)·금구(金溝)·전주(全州)·임실(任實)·용안(龍安)·고부(古阜)·순창(淳昌)·구례(求禮)·곡성(谷城)·옥과(玉果)·용담(龍潭)·무진(茂珍)·광양(光陽)·운봉(雲峯)·부안(扶安)·장수(長水)·함열(咸悅)·진안(鎭安)·여산(礪山)·해진(海珍) 등 고을에 지진(地震)이 일었다.

세종 15년(1433) 5월 11일(계해)

상주와 함창에 지진이 일다

○尙州、咸昌地震。

상주와 함창(咸昌)에 지진이 일었다.

세종 16년(1434) 5월 19일(을미)

상주 관내 단밀현에서 남자 3인이 벼락에 맞아 죽다

○尙州任內丹蜜縣男子三人震死。

상주(尙州) 관내 단밀현(丹蜜縣)에서 남자 3인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

세종 19년(1437) 1월 24일(갑인)

전국적으로 지진이 일다

○京中及京畿、慶尙道安東ㆍ尙州等二十五官、江原道襄陽等十一官、忠淸道忠州等四十三官、全羅道全州等二十六官地震。

서울 안과 경기도, 경상도의 안동(安東)·상주(尙州) 등 25고을, 강원도의 양양(襄陽) 등 11고을, 충청도의 충주(忠州) 등 43고을, 전라도의 전주(全州) 등 26고을에 지진이 일었다.

세종 20년(1438) 7월 27일(기유)

상주 남자 1명이 벼락 맞아 죽다.

○己酉/尙州男一人震死。

상주(尙州) 남자 1명이 벼락 맞아 죽었다.

세종 21년(1439) 6월 19일(을미)

용궁 등 지역에 큰물이 지고 기장 등 지역에 누른 안개가 일다

○慶尙道觀察使啓: “龍宮、軍威、仁同、大丘、靈山、尙州、昌寧、昆陽、金海、漆原大水, 機張、善山、星州、盈德、興海、南海、蔚山、寧海、大丘、軍威、昌寧、長鬐黃霧。”

경상도 관찰사가 아뢰기를,

“용궁(龍宮)·군위(軍威)·인동(仁同)·대구(大丘)·영산(靈山)·상주(尙州)·창녕(昌寧)·곤양(昆陽)·김해(金海)·칠원(漆原)에서 큰물이 지고, 기장(機張)·선산(善山)·성주(星州)·영덕(盈德)·흥해(興海)·남해(南海)·울산(蔚山)·영해(寧海)·대구·군위·창녕·장기(長鬐)에서 누른 안개[黃霧]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세종 24년(1442) 2월 3일(갑오)

경상도 관찰사에게 상주 용화리에 온정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전지하다

○傳旨慶尙道觀察使:

今有金長壽者告云: ‘尙州龍化里有溫井, 其令尋之。

경상도 관찰사에게 전지(傳旨)하기를,

“지금 김장수(金長壽)라고 하는 자가 고하기를, ‘상주(尙州) 용화리(龍化里)에 온정(溫井)이 있다.’고 하니, 이를 찾아보도록 하라.” 하였다.

세종 24년(1442) 2월 20일(신해)

충청도와 경상도의 군현에 지진이 일다

○忠淸道懷仁ㆍ文義ㆍ連山ㆍ鎭岑ㆍ燕歧ㆍ恩津ㆍ扶餘ㆍ尼山ㆍ公州ㆍ懷德ㆍ鴻山、慶尙道尙州ㆍ大丘ㆍ知禮等郡縣地震。

충청도회인(懷仁)·문의(文義)·연산(連山)·진잠(鎭岑)·연기(燕岐)·은진(恩津)·부여(扶餘)·이산(尼山)·공주(公州)·회덕(懷德)·홍산(鴻山)과 경상도

상주(尙州)·대구(大丘)·지례(知禮) 등 군현(郡縣)에 지진이 일었다.

세종 27년(1445) 7월 25일(정유)

병조에 전지하여 실농한 37읍의 시위패는 번상을 면제하게 하다

○丁酉/傳旨兵曹:

慶尙道尙州等失農三十七邑侍衛牌, 其除番上。

병조에 전지하기를, “경상도 상주(尙州) 등 실농한 37읍(邑)의 시위패(侍衛牌)는 번상(番上)을 면제하라.” 하였다.

세종 27년(1445) 10월 12일(계축)

경상도 도관찰사 이계린이 한재를 이유로 세금을 감할 것을 상서하다

○癸丑/慶尙道都觀察使李季疄上書曰:

臣於七月, 受命而來, 巡視田野, 道內久旱不雨。 若慶州、安東、河陽、慶山、大丘、淸河、尙州、善山、星州、榮川、醴泉、永川、義興、金山、開寧、比安、寧海、盈德、迎日、長鬐、義城、興海、禮安、眞寶、龍宮、奉化、新寧、軍威、靑松、昌寧、玄風、仁同、居昌等州縣, 災傷尤甚, 水田高地則全不立種, 雖或立種, 皆苗而不秀, 卑地則七月雨後, 苗勃興而反朽, 亦秀而不實者, 十居八九。 旱田雖不似水田, 然或種疎不盛, 或遭霜不實, 其實而收穫者, 才半矣。 災傷之處, 已有免稅之規, 其不實之田, 若從舊例收稅, 則雖盡收其田之所出, 臣恐不足取盈之數矣。 況今連年失農, 民生窘迫, 比屋皆然, 雖欲稱貸而益之, 不可得也。 臣竊謂癸亥之災, 未若今年之甚, 特施仁恩, 用減稅糧。 伏望量減失農州郡租稅, 以厚民生。

不報。

경상도 도관찰사(都觀察使) 이계린(李季疄)이 상서(上書)하기를,

“신이 7월에 명(命)을 받고 와서 전야(田野)를 순시(巡視)하였사온데, 도내(道內)가 오래 가물고 비가 오지 않아서, 경주(慶州)·안동(安東)·하양(河陽)·경산(慶山)·대구(大丘)·청하(淸河)·상주(尙州)·선산(善山)·성주(星州)·영천(榮川)·예천(醴泉)·영천(永川)·의흥(義興)·김산(金山)·개령(開寧)·비안(比安)·영해(寧海)·영덕(盈德)·영일(迎日)·장기(長鬐)·의성(義城)·흥해(興海)·예안(禮安)·진보(眞寶)·용궁(龍宮)·봉화(奉化)·신령(新寧)·군위(軍威)·청송(靑松)·창령(昌寧)·현풍(玄風)·인동(仁同)·거창(居昌) 등의 주현(州縣)은 재해(災害)로 상(傷)한 것이 더욱 심하여, 논[水田]으로서 높은 땅은 전연 씨를 뿌리지[立種] 못하고, 비록 혹시 씨를 뿌렸다 하더라도 모두 싹[苗]만 있고 패지 않았으며, 낮은 땅은 7월 비 뒤[雨後]에 싹이 성하게 일어나다가 도로 썩고, 역시 패고도 여물지 않은 것이 10분의 8, 9는 되오며, 밭[旱田]은 논과 같지는 않으나, 혹 씨가 드물어서 성하지 못하고, 혹은 서리를 맞아서 여물지 못하고, 여물어서 수확한 것도 겨우 반밖에 안 됩니다. 재해로 상한 곳은 이미 면세(免稅)의 규정이 있사온데, 그 부실(不實)한 전지를 만일 구례(舊例)에 의하여 세(稅)를 거둔다면, 그 밭의 소출을 다 거두어도 수를 채우기에 부족할까 합니다. 하물며, 지금 해마다 실농(失農)하여 민생(民生)이 군색하고 궁박하여, 집집이 모두 그러하오니, 비록 빌려서 보태려고 하여도 할 수 없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계해년의 재앙이 금년과 같이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특별히 어진 은혜를 베푸시어 세량(稅糧)를 감(減)하소서. 엎드려 바라옵건대, 실농(失農)한 주군(州郡)의 조세(租稅)를 감면하여 민생을 두텁게 하소서.”

하였으나, 회보하지 아니하였다.

문종 즉위년(1450) 5월 17일(경신)

경상도 상주의 땅속 흙에서 저절로 불이 나다

○慶尙道尙州地中土自火, 雖經大雨, 久不息。

경상도(慶尙道) 상주(尙州)의 땅속 흙에서 저절로 불이 일어나 비록 큰 비를 만나더라도 오래도록 꺼지지 아니하였다.

단종 1년(1453) 12월 29일(신해)

전라도·충청도·경상도 지방에 지진이 발생하니 해괴제를 지내다.

○地震于全羅道全州ㆍ樂安等八邑、忠淸道淸州ㆍ忠州ㆍ洪州ㆍ公州等二十二邑、慶尙道安東ㆍ星州ㆍ尙州ㆍ金海等二十七邑, 降香祝, 行解怪祭。

전라도의 전주(全州)·낙안(樂安) 등 8읍과 충청도의 청주(淸州)·충주(忠州)·홍주(洪州)·공주(公州) 등 22읍과 경상도 안동(安東)·성주(星州)·상주(尙州)·김해(金海) 등 27읍에 지진(地震)이 일었으므로,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서 해괴제(解怪祭)를 지냈다.

세조 7년(1461) 7월 19일(정사)

예조에서 경상도 여러 고을에 비가 오지 않음을 아뢰다

○禮曹據慶尙道觀察使關啓: “道內盈德、淸河、尙州、善山、仁同、星州、大丘、慶山等邑, 今當禾穀發穗之時, 連月不雨, 漸至憔枯, 民生可慮。 請降香、祝、幣, 令本道觀察使禱于祀典所載名山、大川。” 從之。

예조(禮曹)에서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의 관문(關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도내의 영덕(盈德)·청하(淸河)·상주(尙州)·선산(善山)·인동(仁同)·성주(星州)·대구(大丘)·경산(慶山) 등 고을은 지금 화곡(禾穀)이 이삭이 팰 때를 당하여 여러 달을 계속하여 비가 내리지 않아서 점점 타고 마르는 데 이르니, 백성의 생활이 염려스럽습니다. 청컨대 향축(香祝)과 폐백(幣帛)을 내려서 본도 관찰사로 하여금 사전(祀典)에 실린 명산대천(名山大川)5182) 에 빌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성종 2년(1471) 1월 7일(경진)

경상도가 실농하였으므로 군자창의 곡식으로 구휼할 것을 호조에서 아뢰다

○戶曹啓: “慶尙道失農, 尙州等十六官尤甚。 請以軍資穀六萬碩, 賑給。 且令備草食、鹽醬, 曲盡救恤。 然守令或有誤施有食之戶, 而不及飢民者, 甚非國家發倉賑窮之意。 請申諭觀察使, 出入村巷, 盡心救恤, 其飢民數及用穀數, 每月季詳錄以啓。” 從之。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경상도가 실농(失農)하였는데, 상주(尙州) 등 16고을이 더욱 심하니, 청컨대 군자창(軍資倉)의 곡식 6만 석(碩)을 가지고 진휼(賑恤)하여 주게 하고, 또 초식(草食)과 염장(鹽醬)을 준비하여 곡진하게 구휼(救恤)하게 하소서. 그러나 수령(守令) 가운데 혹시라도 식량(食糧)이 있는 가호(家戶)에 진휼을 잘못 베풀고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는 자가 있다면, 국가에서 창고를 열어서 궁민(窮民)을 진휼하는 뜻이 심히 못되니, 청컨대 거듭 관찰사(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여 촌항(村巷)에 출입하면서 구휼(救恤)에 마음을 다하게 하고, 그 굶주리는 백성들의 숫자와 사용한 곡식의 숫자를 매 월말에 상세히 기록하여 아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성종 2년(1471) 1월 9일(임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게 상주 등지의 호랑이를 잡도록 명하다

○諭慶尙右道兵馬節度使曰: “今聞尙州、善山、金山等處, 惡虎多害人物, 卿其抄率善射者, 往捕之。 今方年饑, 民生甚困, 務要簡易, 勿擾官、煩民。”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지금 듣건대 상주(尙州)·선산(善山)·금산(金山) 등지에 사나운 호랑이가 많아서 사람들을 해친다고 하니, 경(卿)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뽑아 거느리고 가서 이를 잡도록 하라. 지금 바야흐로 흉년으로 굶주리니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매우 곤궁할 터인데, 간편하고 쉽게 하기에 힘써서 관가를 소란스럽게 하고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성종 9년(1478) 2월 22일(을묘)

충청도 충주 등 9고을과 경상도 상주 등 18고을에서 지진이 일어나다

○忠淸道忠州等九邑、慶尙道尙州等十八邑, 地震。 禮曹請行解怪祭, 從之。

충청도(忠淸道) 충주(忠州) 등 9고을과 경상도(慶尙道) 상주(尙州) 등 18고을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예조(禮曹)에서 해괴제(解怪祭)8205) 를 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성종 9년(1478) 6월 10일(경자)

경상도의 청송·영천·예천·용궁·문경 등지에서 지진이 발생하다

○慶尙道靑松、榮川、醴泉、龍宮、聞慶、咸昌、尙州、永川、河陽地震。 禮曹請降香祝, 令其道都事行解怪祭, 從之。

경상도(慶尙道)의 청송(靑松)·영천(榮川)·예천(醴泉)·용궁(龍宮)·문경(聞慶)·함창(咸昌)·상주(尙州)·영천(永川)·하양(河陽)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예조(禮曹)에서 청하기를,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그 도(道)의 도사(都事)로 하여금 해괴제(解怪祭)를 지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연산 3년(1497) 4월 16일(정해)

경상도 일원에 우박이 내린 일로 승정원에 묻다

○雨雹于慶尙道安東府、尙州、醴泉郡、榮川郡、禮安縣, 大者如雞卵, 小者如彈丸。 禽鳥擊死, 禾麥損傷。 王問于政院曰: “雨雹無乃有應行事乎?” 承旨宋軼啓: “如地震則有辟怪祭, 雨雹則無矣。 然此亦災變, 當恐懼修省。” 傳曰: “如有災變, 則予當恐懼修省矣。”

경상도의 안동부(安東府), 상주군(尙州郡), 예천군(醴泉郡), 영천군(榮川郡), 예안현(禮安縣)에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달걀 같고 작은 것은 탄환 같아서, 새들이 맞아 죽고 곡물[禾麥]이 많이 손상되었다. 왕이 정원(政院)에 묻기를,

“우박에 대하여 응당 행할 일이 없는가?”

하매, 승지 송질(宋軼)이 아뢰기를,

“지진이라면 벽괴제(辟怪祭)가 있으나 우박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재변이오니, 공구 수성(恐懼修省)하여야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재변이 있으면 내 마땅히 공구 수성하여야 한다.”

하였다.

연산 8년(1502) 12월 7일(을사)

충청도와 경상도에 지진이 일어나다

○忠淸道淸州、沃川、文義、懷仁、報恩、淸安、延豐、陰城、鎭川、全義、燕岐, 慶尙道咸昌、聞慶、龍宮地震。

충청도 청주(淸州)·옥천(沃川)·문의(文義)·회인(懷仁)·보은(報恩)·청안(淸安)·연풍(延豐)·음성(陰城)·진천(鎭川)·전의(全義)·연기(燕岐)와 경상도 함창(咸昌)·문경(聞慶)·용궁(龍宮) 등지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중종 6년(1511) 10월 13일(경인)

상주에 지진이 나다

○慶尙道尙州地震。

경상도 상주(尙州)에 지진이 있었다.

중종 9년(1514 ) 1월 29일(계사)

경상도 상주·함창 등과 충청도 청주에 지진이 일다

○慶尙道尙州、咸昌、開寧, 忠淸道淸州地震。

경상도 상주(尙州)·함창(咸昌)·개령(開寧)과 충청도 청주(淸州) 땅에 지진이 있었다.

중종 9년(1514) 2월 22일(병진)

경상도 함창·개령에 지진이 일다

○慶尙道咸昌、開寧地震。

경상도 함창(咸昌)·개령(開寧)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중종 11년(1516) 5월 12일(임진)

경상도 성주·대구·함창·용궁에 우박이 내리다

○慶尙道星州、大丘、咸昌、龍宮雨雹。

경상도 성주(星州)·대구(大邱)·함창(咸昌)·용궁(龍宮)에 우박이 내렸다.

중종 11년(1516) 9월 7일(을유)

경상도 문폐사 한효원이 문경·거제 등에 풍재가 심하다고 아뢰다

○乙酉/慶尙道問弊使韓效元來復命, 仍啓曰: “聞慶、巨濟、咸昌、固城、密陽、迎日等邑, 風災尤甚; 洛東江邊, 禾稼水沈; 尙州以下密陽以上, 皆有旱災; 安東傍近山郡, 早稻因霜損害。”

경상도문폐사(慶尙道問弊使) 한효원(韓效元)이 돌아와 복명하고, 이어 아뢰기를,

“문경(聞慶)·거제(巨濟)·함창(咸昌)·고성(固城)·밀양(密陽)·영일(迎日) 등의 읍은 풍재(風災)가 매우 심하고, 낙동강(洛東江) 연변은 곡식이 물에 잠겼으며, 상주(尙州) 이하 밀양(密陽) 이상의 지방은 모두 한재가 있고, 안동(安東) 근방의 산군(山郡)에서는 올벼가 서리 때문에 해를 입었습니다.”

하였다.

중종, 12년(1517) 4월 10일(을묘)

경상도 함창·용궁에 지진이 있다

○慶尙道咸昌、龍宮地震。

경상도 함창(咸昌)·용궁(龍宮)에 지진이 있었다.

중종 15년(1520) 5월 18일(을사)

경상도 예천·영덕 등에 우박이 내려 벼가 많이 상하다

○慶尙道醴泉、盈德、龍宮雨雹, 禾穀多損傷; 尙州、山陰、南海雨雹; 榮川雨雹大風, 禾穀偃, 大木拔。

경상도 예천(醴泉)·영덕(盈德)·용궁(龍宮)에 우박이 내려 벼가 많이 상하고, 상주(尙州)·산음(山陰)·남해(南海)에 우박이 내리고, 영천(榮川)에 우박이 내리고 큰 바람이 불어 벼가 쓰러지고 큰 나무가 뽑혔다.

중종 15년(1520) 6월 3일(기미)

경상도 상주·고성·진해에 지진이 있다

○慶尙道尙州, 固城、鎭海地震。

경상도 상주(尙州)·고성(固城)·진해(鎭海)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중종 15년(1520) 6월 4일(경신)

전라도 낙안 등에 국화가 피고 곳곳에 우박이 내려 폐해가 발생하다

○全羅道樂安、順天、務安, 菊有華, 龍潭雨雹; 慶尙道尙州雨雹, 大如拳, 積地尺許, 草木摧折, 禽島多死, 禾麥損傷, 醴泉雨雹, 大如雞卵, 飛鳥或死, 大木拔根, 義城雨雹, 大如彈丸, 暴風交作; 忠淸道文義雨雹

전라도 낙안(樂安)·순천(順天)·무안(務安)에서 국화(菊花)가 피고 용담(龍潭)에 우박이 내렸으며, 경상도 상주(尙州)에 주먹만한 우박이 내려 한 자쯤 땅에 쌓여서 초목이 꺾이고 새가 많이 죽고 벼·보리가 상하였으며, 예천(禮泉)에 달걀만한 우박이 내려서 날던 새가 혹 죽고 큰 나무의 뿌리가 뽑혔으며, 의성(義城)에 탄환(彈丸)만한 우박이 내리면서 폭풍이 쳤으며, 충청도 문의(文義)에 우박이 내렸다.

중종 16년(1521) 3월 21일(계유)

전라도 익산·여산 등과 충청도 청주·옥천 등지 그리고 경상도·강원도 등에 우박이 내리다

○全羅道益山、礪山、茂朱, 忠淸道淸州、沃川、黃澗、靑山、鎭川、丹陽, 慶尙道龍宮、咸昌、眞寶、靑松、豐基、尙州、三嘉、山陰、居昌, 江原道原州、江陵、平昌、橫城、洪川雨雹。 京畿果川、陽城、廣州雨雹。

전라도의 익산(益山)·여산(礪山)·무주(茂朱)와, 충청도의 청주(淸州)·옥천(沃川)·황간(黃澗)·청산(靑山)·진천(鎭川)·단양(丹陽)과, 경상도의 용궁(龍宮)·함창(咸昌)·진보(眞寶)·청송(靑松)·풍기(豊基)·상주(尙州)·삼가(三嘉)·산음(山陰)·거창(居昌)과, 강원도의 원주(原州)·강릉(江陵)·평창(平昌)·횡성(橫城)·홍천(洪川)에 우박이 내렸다. 경기도의 과천(果川)·양성(陽城)·광주(廣州)에도 우박이 내렸다.

중종 18년(1523) 1번째 기사

경상도 상주에 우박이 내리다

○己未/慶尙道尙州雨雹。

경상도 상주(尙州)에 우박(雨雹)이 내렸다.

중종 20년(1525) 4월 25일(갑인)

전라도·경상도 일대에 우박이 내리다.

○全羅道古阜、寶城、鎭安、興陽、咸平、興德、珍原、任實, 忠淸道靑山, 慶尙道尙州、陜川、龍宮、草溪、仁同、醴泉 雨雹。

전라도고부(古阜)·보성(寶城)·진안(鎭安)·흥양(興陽)·함평(咸平)·흥덕(興德)·진원(珍原)·임실(任實), 충청도 청산(靑山), 경상도 상주(尙州)·합천(陜川)·용궁(龍宮)·초계(草溪)·인동(仁同)·예천(醴泉)에 우박이 내렸다.

중종 20년(1525) 8월 6일(계사)

경상도 상주·금산·고령 등지에 지진이 일어나다

○慶尙道尙州、金山、高靈、善山、大丘, 忠淸道黃澗縣, 地震。

경상도 상주(尙州)·금산(金山)·고령(高靈)·선산(善山)·대구(大邱)와 충청도 황간현(黃澗縣)에 지진이 일어나다.

중종 20년(1525) 8월 25일(임자)

경상도 상주·함창·풍기 등지에서 지진이 일어나다

○慶尙道尙州、咸昌、豐基、龍宮、聞慶地震, 聞慶則屋宇震動。

경상도 상주(尙州)·함창(咸昌)·풍기(豐基)·용궁(龍宮)·문경(聞慶)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문경에서는 집이 진동했다.

중종 21년(1526) 4월 18일(경오)

경상도 거창·함창에 우박이 내리다

○慶尙道居昌、咸昌雨雹。

경상도 거창(居昌)·함창(咸昌)에 우박이 내렸다.

중종 26년(1531) 3월 6일(신묘)

경상도 함창현에 눈이 내리다

○慶尙道咸昌縣下雪。

경상도 함창현(咸昌縣)에 눈이 내렸다.

중종 26년(1531) 3월 7일(임진)

경상도의 함양·예천·문경 등 고을에 눈이 내리다

○慶尙道咸陽、醴泉、聞慶、長鬐、咸昌、淸河、靑松等邑下雪。

경상도의함양(咸陽)·예천(醴泉)·문경(聞慶)·장기(長鬐)·함창(咸昌)·청하(淸河)·청송(靑松) 등 고을에 눈이 내렸다.

중종 26년(1531) 3월 29일(갑인)

경상도 상주에 눈이 오다

○甲寅/慶尙道尙州雨雪。

경상도 상주(尙州)에 눈이 왔다.

중종 26년(1531) 7월 5일(병진)

경상도 함창과 상주 등에 지진이 일어나다

○慶尙道咸昌、尙州等邑地震。

경상도 함창(咸昌)과 상주(尙州) 등지에 지진이 일어났다.

중종 27년(1532) 4월 16일(갑오)

함창·해주·문화·장연·옹진·원주·횡성에 우박이 내리다

○慶尙道咸昌, 黃海道海州、文化、長淵、瓮津, 江原道原州、橫城等邑, 雨雹。

경상도 함창(咸昌), 황해도 해주(海州)·문화(文化)·장연(長淵)·옹진(甕津), 강원도 원주(原州)와 횡성(橫城) 등에 우박이 왔다.

중종 37년(1542) 2월 9일(경신)

경상도 용궁·함창 등지에 지진이 있다

○庚申/慶尙道龍宮、咸昌等縣地震。

경상도 용궁(龍宮)·함창(咸昌) 고을 등지에 지진이 있었다.

중종 39년(1544) 2월 3일(임신)

경기·전라도·충청도·황해도 등지의 고을에 같은 날 지진이 일어나다

○京畿竹山、江原道淮陽ㆍ通川ㆍ歙谷、全羅道南原ㆍ長水ㆍ鎭安ㆍ錦山ㆍ珍山ㆍ高山、慶尙道尙州ㆍ義城ㆍ體泉ㆍ星州ㆍ開寧ㆍ聞慶ㆍ咸陽ㆍ安陰ㆍ居昌ㆍ豐基ㆍ義興ㆍ龍宮ㆍ咸昌、忠淸道石城ㆍ鎭岑ㆍ沃川ㆍ文義ㆍ公州ㆍ鎭川ㆍ全義ㆍ淸安ㆍ靑山ㆍ淸州ㆍ燕歧ㆍ連山ㆍ永同ㆍ報恩ㆍ懷仁ㆍ槐山ㆍ懷德ㆍ木川ㆍ淸風ㆍ丹陽ㆍ延豐ㆍ陰城、黃海道瑞興等官, 同日地震。

경기 죽산(竹山), 강원도 회양(淮陽)·통천(通川)·흡곡(歙谷), 전라도 남원(南原)·장수(長水)·진안(鎭安)·금산(錦山)·진산(珍山)·고산(高山), 경상도 상주(尙州)·의성(義城)·예천(醴泉)·성주(星州)·개령(開寧)·문경(聞慶)·함양(咸陽)·안음(安陰)·거창(居昌)·풍기(豐基)·의흥(義興)·용궁(龍宮)·함창(咸昌), 충청도 석성(石城)·진잠(鎭岑)·옥천(沃川)·문의(文義)·공주(公州)·진천(鎭川)·전의(全義)·청안(淸安)·청산(靑山)·청주(淸州)·연기(燕岐)·연산(連山)·영동(永同)·보은(報恩)·회인(懷仁)·괴산(槐山)·회덕(懷德)·목천(木川)·청풍(淸風)·단양(丹陽)·연풍(延豐)·음성(陰城), 황해도 서흥(瑞興) 등 고을에 같은 날 지진이 일어났다.

명종 2년(1547) 7월 3일(임자)

경상도 감사 임호신이 도내의 수재에 대해 보고하다

○壬子/傳曰: “今見慶尙道監司任虎臣水災書狀。【五月大雨, 安東川渠漲溢, 暎湖樓漂沒, (恭王愍)〔恭愍王〕所書樓額, 亦不知去處。 尙州、大丘、金海、晋州、靈山、高靈、義興、宜寧等官, 皆大水漲溢。】 前日公州水災, 已極驚愕, 而今此水患若是, 予不知何事而致此陰沴, 尤爲罔措。”

전교하였다.

“지금 경상도 감사(慶尙道監司) 임호신(任虎臣)의 수재에 관한 서장(書狀)【*】을 보았다. 전날에 공주(公州)의 수재에 대해서도 이미 매우 놀라왔었는데, 이제 물난리가 이와 같다니, 나는 무슨 일이 그러한 장마를 불러왔는지 알 수가 없어 더욱 어쩔 줄을 모르겠다.”

【*서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5월에 안동(安東)에 큰비가 내려 냇물이 넘쳐서 영호루(暎湖樓)가 침몰되어 공민왕(恭愍王)이 쓴 영호루의 편액(扁額)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으며, 상주(尙州)·대구(大丘)·김해(金海)·진주(晉州)·영산(靈山)·고령(高靈)·의흥(義興)·의령(宜寧) 등의 고을에도 모두 큰물이 넘쳤다.”】

명종 2년(1547) 7월 16일(을축)

경상 감사 임호신이 도내의 수재에 대해 보고하다

○乙丑/傳曰: “今見慶尙監司【任虎臣。】狀啓,【咸昌大雨, 宰岳山土石崩頹, 覆壓者五家, 居民三十四名, 牛九頭, 馬二匹壓死, 水邊人家十九區漂流。 眞寶大雨, 山底人一名壓死, 水邊人家七區漂流, 五區頹壓。 星州大雨, 洛東江邊東村及八莒、花園、加利等處, 田畓泥沙塡積, 花園二十七家, 加利十五家漂流。 聞慶大雨水漲, 民家二十一區, 覆壓死者十二名, 溺死者二名。 昌寧大雨, 民家八區沈墊, 二十一區漂流。 草溪大水漲溢, 人家四十餘區漂流; 靑松水漲, 人家覆壓, 人物致死; 密陽民家一百九區漂流, 八十五家頹落。】此前古所無之災也。 慶尙於國家爲巨道, 而災變若此, 罔知攸措。”

전교하였다.

“이번에 경상 감사【임호신(任虎臣).】의 장계【*】를 보니, 이는 전에 없던 재변이다. 경상도는 이 나라에서 큰 도인데 이같은 재변이 생겼으니 어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장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함창(咸昌)에 큰 비가 와서 재악산(宰岳山)의 흙과 바위가 무너져 집 다섯 채가 파묻혀 주민 34명과 소 9마리, 말 2필이 압사하였고, 물가의 인가 19채가 떠내려갔으며, 진보(眞寶)에 큰비가 와서 산 밑에 사는 사람 1명이 압사하고 물가의 인가 7채가 떠내려갔고 5채는 파묻혔으며, 성주(星州)에 큰비가 와서 낙동강(洛東江) 가의 동촌(東村)과 팔거(八莒)·화원(花園)·가리(加利) 등지의 전답(田畓)에 진흙과 모래가 밀려와 쌓였고, 화원에 27가구(家口)와 가리의 15가구가 떠내려갔습니다. 문경(聞慶)에 큰비가 와서 물이 불어나 민가(民家) 21채가 파묻히고 압사한 자가 12명, 익사한 자가 2명이며, 창녕(昌寧)에 큰비가 와서 민가 8채가 물에 잠기고 21채가 떠내려갔습니다. 초계(草溪)에 물이 불어나서 인가 40여 채가 떠내려갔으며, 청송(靑松)에 물이 불어나 인가가 파묻히고 사람이 죽었으며, 밀양(密陽)에도 민가 1백 9채가 떠내려가고 85채가 무너졌습니다.”】

명종 4년(1549) 6월 29일(정묘)

청홍도에 여역이 성하고, 강원도 고성 등에 큰 비가 내리다

○淸洪道癘疫熾發, 男女物故者一百五十餘人。 江原道高城、歙谷、通川, 大雨暴風, 樹木折拔, 山水漲溢, 丘陵沙汰, 死者二十餘人, 田畓沈沒, 禾穀損傷。 慶尙道尙州, 行路人雷震死。

청홍도(淸洪道)에 여역(厲疫)이 치성하여 남녀 1백 50여 명이 죽었다. 강원도 고성(高城)·흡곡(歙谷)·통천(通川)에 큰비가 내리고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고, 산골짜기 물이 불어 넘쳐 구릉(丘陵)에 사태가 나서 20여 명이 죽고 논밭이 매몰되었으며 곡식이 손상되었다. 경상도 상주(尙州)에서는 길 가던 사람이 벼락 맞아 죽었다.

명종 8년(1553) 11월 27일(기사)

서울 등지에 지진이 일어나다

○己巳/夜, 京城地震, 聲如微雷。 京畿楊根、永平、加平, 江原道原州、橫城, 慶尙道聞慶、龍宮、咸昌、安東、玄風、高靈, 地震。

밤에 서울에 지진이 있었는데 소리가 은은한 우레와 같았다. 경기 양근(楊根)·영평(永平)·가평(加平), 강원도 원주(原州)·횡성(橫城), 경상도 문경(聞慶)·용궁(龍宮)·함창(咸昌)·안동(安東)·현풍(玄風)·고령(高靈)에 지진이 일어났다.

명종 10년(1555) 2월 11일(병자)

경상도 상주·성주·개령 등지에 지진이 일어나다

○慶尙道尙州、星州、開寧、善山、玄風、河陽地震, 大丘地震。 自西北間向東, 屋宇振動, 暫時而止。 慶山、昌寧、山陰、高靈、淸道地震。 自西向東北, 其聲如雷, 屋宇掀動, 暫時而止。 仁同地震、自北向南, 屋宇搖動。

경상도 상주(尙州)·성주(星州)·개령(開寧)·선산(善山)·현풍(玄風)·하양(河陽)에 지진이 있었고 대구(大丘)에도 지진이 있었는데, 서북쪽에서 동쪽으로 가며 진동하였고 집들이 흔들리다가 잠시 후에 그쳤다. 경상(慶山)·창녕(昌寧)·산음(山陰)·고령(高寧)·청도(淸道)에도 지진이 있었는데, 서쪽에서 동북쪽으로 가며 진동하였고 소리가 뇌성과 같았으며 집이 흔들리다가 잠시 후에 그쳤다. 인동(仁同)에도 지진이 있었는데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며 진동하였고 집이 흔들렸다.

명종 12년(1557) 5월 3일(을묘)

경기와 경상도에 지진이 일어나다

○京畿地震, 屋宇振動。 慶尙道尙州、善山、昌原、東萊、彦陽、軍威、比安、安東、星州、密陽、永川、義城、開寧、淸河、金山、知禮、大丘、陜川、咸陽、醴川、草溪、慶山、新寧、仁同、慶州、河陽, 地震。

경기에 지진이 일어나 집이 진동했다. 경상도 상주(尙州)·선산(善山)·창원(昌原)·동래(東萊)·언양(彦陽)·군위(軍威)·비안(比安)·안동(安東)·성주(星州)·밀양(密陽)·영천(永川)·의성(義城)·개령(開寧)·청하(淸河)·금산(金山)·지례(知禮)·대구(大丘)·합천(陜川)·함양(咸陽)·예천(醴泉)·초계(草溪)·경산(慶山)·신령(新寧)·인동(仁同)·경주(慶州)·하양(河陽) 등지에 지진이 일어났다.

명종 14년(1559) 12월 14일(신해)

햇무리가 지고, 경상도 상주와 초계에 지진이 일어나다

○辛亥/日微暈。 慶尙道尙州、草溪, 地震。

햇무리가 희미하게 졌다. 경상도 상주(尙州)와 초계(草溪)에 지진이 일어났다.

명종 19년(1564) 5월 6일(정미)

경상도 상주 등지에 커다란 우박이 내리다

○慶尙道尙州, 夜, 雨雹交下, 大如鳥卵, 林中宿鳥觸死, 墮地者無算。 比安, 雨雹, 或如鳥卵, 或如大豆。

경상도 상주(尙州)에 밤에 비와 우박이 섞여 내렸는데, 크기가 새알만하여 숲 속에서 잠자던 새가 맞아 죽어 땅에 떨어진 것이 무수하였다. 비안(比安)에 우박이 내렸는데, 새알만하기도 하고 콩 만하기도 하였다.

명종 21년(1566) 10월 16일(계유)

경기 광주와 청홍도 서천, 전라도 담양, 경상도 예천 등지에 천둥

○京幾廣州, 雷動。 淸洪道舒川、扶餘, 雷電, 無異夏月。 庇仁、藍浦、禮山、淸安、天安、靑陽、淸州、保寧、海美、全義, 驟雨, 大雷電。 全羅道潭陽、錦山、珍島、古阜、益山、靈巖、金堤、臨陂、綾城、南平、興德、井邑、戊長、務安、高敞、泰仁、金溝、鎭安、珍原、長城、和順、高山、沃溝, 雷電, 有同夏月。 慶尙道醴泉, 雷電大作。 咸昌大風, 以雨雹雷交下, 一境四塞, 良久乃止。

경기 광주(廣州)에 천둥이 쳤다. 청홍도(淸洪道) 서천(舒川)과 부여(扶餘)에 천둥 번개가 여름이나 다름없이 쳤다. 비인(庇仁)·예산(禮山)·남포(藍浦)·청안(淸安)·천안(天安)·청양(靑陽)·청주(淸州)·보령(保寧)·해미(海美)·전의(全義)에도 소나기가 쏟아지며 크게 천둥 번개가 쳤다. 전라도 담양(潭陽)·금산(錦山)·진도(珍島)·고부(古阜)·익산(益山)·영암(靈巖)·김제(金堤)·임피(臨陂)·능성(綾城)·남평(南平)·흥덕(興德)·정읍(井邑)·무장(茂長)·무안(務安)·고창(高敞)·태인(泰仁)·금구(金溝)·진안(鎭安)·진원(珍原)·장성(長城)·화순(和順)·고산(高山)·옥구(沃溝)에 천둥 번개가 여름처럼 쳤다. 경상도 예천(禮泉)에서도 천둥 번개가 크게 쳤다. 함창(咸昌)에는 바람이 크게 불고 비와 우박이 섞여 내리면서 천둥이 쳤는데, 온 경내가 캄캄했으며 한참만에야 그쳤다.

선조 38년(1605) 1월 25일(경자)

경상 감사 이시언이 상주, 영천의 지진과 경주의 흰 꿩 포획을 아뢰다

○慶尙監司李時彦狀啓:

正月初一日, 尙州、榮川地震, 【自西向北有聲如雷, 禽鳥驚呼, 屋柱盡搖。】慶州獲白雌雉。

경상 감사 이시언(李時彦)이 장계하였다.

“정월 1일 상주(尙州)와 영천(永川)에 지진이 있었고【서쪽으로부터 북쪽으로 향하여 우레같은 소리가 있었고 새들이 놀라 울며 가옥의 기둥이 모두 흔들렸다.】경주(慶州)에서는 흰 암꿩을 포획하였습니다.”

선조 38년(1605) 7월 23일(을미)

강원도·경상도의 수재 상황을 열거하다

경상도 안동부(安東府)는 이달 20일 강물이 크게 범람해서 끝없이 아득한 물바다를 이루더니 부성(府城)에 밀려 들어와 남문의 객사와 대청·관사가 모두 침몰되었다. 동남쪽 근교에 거주하는 관인(官人)과 백성들의 가옥이 모두 산산이 부서져 떠내려갔는데, 가재도구를 전혀 건져내지 못하여 비로 쓴 듯이 되었고 삼면의 자성(子城)도 붕괴되었다. 영호루(映湖樓)는 흔적도 없이 떠내려갔고, 여강서원(廬江書院)도 완전히 떠내려갔으며, 대가 세족(大家世族)의 백 년 된 가옥들이 남김없이 떠내려갔으니, 이번 수재는 개벽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경주는 부내가 큰 바다로 변하여 민가가 완전히 침수되었고, 선산(善山)은 들이 온통 물바다로 변했으며 인동(仁同)·영산(靈山)·군위(軍威)·창원(昌原)·예천(醴泉)·영일(迎日)·의흥(義興)·용궁(龍宮)·고령(高靈)·상주(尙州) 등도 첩보한 내용이 한결같았다. 예안(禮安)·안동(安東)·영산·초계(草溪)·의령(宜寧)·김해(金海)·창원(昌原)·함안(咸安) 등은 피해가 더욱 참혹하였다. 강변의 공해(公廨)와 민가는 부서져서 강을 뒤덮고 떠내려가고 둥둥 떠다니는 시체가 부지기수였으며 통곡하는 소리가 하늘까지 닿았다.

선수 38년(1605) 7월 1일(계유)

영남과 관동에 유래에 없던 홍수가 지다

○朔癸酉/嶺南、關東大水。 嶺南仁同、靈山、安東、軍威、昌原、義興、龍宮、高靈、尙州、禮安、草溪、宜寧、金海、咸安, 關東淮陽、襄陽、金城、杆城、平康、洪川、楊口、鐵原、春川、橫城、寧越、 旌善、平昌、麟蹄等, 被災尤酷。 山冢崩頹, 人畜死者不知其數, 公廨、民家漂沒殆盡, 深山喬木顚拔, 浮下於漢、洛二江, 皆稱古未有之災云。

영남(嶺南)과 관동(關東)에 홍수가 졌다. 영남의 인동(仁同)·영산(靈山)·안동(安東)·군위(軍威)·창원(昌原)·의흥(義興)·용궁(龍宮)·고령(高靈)·상주(尙州)·예안(禮安)·초계(草溪)·의령(宜寧)·김해(金海)·함안(咸安)과 관동의 회양(淮陽)·양양(襄陽)·금성(金城)·간성(杆城)·평강(平康)·홍천(洪川)·양구(楊口)·철원(鐵原)·춘천(春川)·횡성(橫城)·영월(寧越)·정선(旌善)·평창(平昌)·인제(麟蹄) 등의 재해가 더욱 혹심하였다. 산사태가 나고 죽은 사람과 가축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으며 관청과 민가가 거의 떠내려가고 깊은 산의 큰 나무들도 뿌리째 뽑혀 한강과 낙동강으로 떠내려 왔다. 모두 예전에 일찍이 없었던 재해라고들 하였다.

인조 5년(1627 ) 7월 16일(경진)

경상도 함창·상주·용궁에 비가 많이 내리다

○慶尙道咸昌、尙州、龍宮諸邑, 大雨如注, 平陸成川。 尙州一境, 渰死者十餘人。 聞慶縣雷雨大作, 樹木皆被拔去, 山家崩頹, 人有壓死者。

경상도 함창(咸昌)·상주(尙州)·용궁(龍宮)의 여러 고을에 퍼붓듯이 비가 내려 평지가 내를 이루었는데, 상주 한 고을에 익사자가 10여 명이고, 문경현(聞慶縣)에는 천둥이 크게 치고 비가 내려 수목이 모두 뽑히고 산이 무너져서 압사자가 있었다.

인조 6년(1628) 9월 19일(병자)

경상감사 김시양이 곡식의 흉년으로 감세해 줄 것을 치계하다

○慶尙監司金時讓馳啓曰: “臣之請以安東等十一邑稅米, 分半作木, 而晋州等十邑外, 計其水路遠近, 推移充數者, 非以從前作米之邑, 豐稔米賤也。 臣從星州以北, 迤至仁同、善山、比安、義城、安東之境, 豆菽盡枯, 粟稻則全無所收者, 居五之二, 而尙州、醴泉等邑尤甚。

경상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치계하기를,

“신은, 안동(安東) 등 11개 읍의 세미(稅米)는 절반을 작목(作木)해 줄 것과 진주(晋州) 등 10개 읍을 제외하고는 수로(水路)의 원근을 따져 추이(推移)하여 그 모자라는 수량을 보충시키는 조치에 대해서 예전처럼 풍년이 들어 쌀이 흔해졌을 때 작미하는 고을에 적용했던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요청 드리고자 합니다.

신은 성주(星州)에서부터 북쪽으로 올라가 인동(仁同)·선산(善山)·비안(比安)·의성(義城)·안동 경내까지 두루 살펴보았는데, 두숙(豆菽)이 모두 말라 죽고 벼 곡식을 완전히 수확하지 못한 곳이 5분의 2나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상주(尙州)와 예천(醴泉) 등 읍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새 곡식이 나올 때를 당하였는데도 민간에서는 나물죽으로도 배를 채우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먹을 것을 몽땅 긁어내어 삼세(三稅)를 전부 받아내게 한다면 길거리마다 굶어 죽은 시체가 필시 즐비할 것이니, 이러한 시기에 장차 그들을 어떻게 구제해야 할지 그 방도를 모르겠습니다. 나라에 남은 저축이 없으니 조세를 감면하는 정사를 행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진실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 고을의 조적(糶糴)도 필시 제대로 시행되지 않을 것이고 민간 역시 개인적으로 저축한 것이 없으니 아무리 이속(移粟)하려 해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인조 9년(1631) 5월 4일(정축)

경상도 상주에 지진이 있다

○丁丑/慶尙道尙州地震。

경상도 상주(尙州)에 지진이 있었다.

인조 9년(1631) 11월 15일(갑신)

경상도 안동과 함창에 지진이 일어나다

○甲申/慶尙道安東、咸昌地震。

경상도 안동(安東)과 함창(咸昌)에 지진이 일어났다.

인조 18년(1640) 6월 28일(무인)

경상도에 우레와 바람이 있었다

○慶尙道尙州地大雷風。

경상도 상주(尙州)에 크게 우레와 바람이 있었다.

효종 1년(1650) 2월 14일(정유)

경상도 상주에 많은 오리 떼가 날라 오다

○丁酉/慶尙道尙州有鳧鴨群飛蔽天, 集于大野, 爲進退搏戰之狀, 其聲如雷。

경상도 상주(尙州)에 하늘을 덮을 정도로 오리 떼가 날아와 큰 들에 모여 진퇴(進退)하면서 전투하는 형세를 취하였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현종 4년(1663) 5월 28일(을미)

경상도 상주에 지진이 일어나다

○慶尙道尙州, 地震如雷

경상도 상주(尙州)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마치 천둥소리 같았다.

숙종 1년(1675) 9월 13일(무술)

경상도 선산·개령·상주·예천에서 지진이 일어나다

○戊戌/慶尙道啓: “八月卄七日, 善山、開寧、尙州、醴泉地震。”

경상도에서 8월 27일에 선산(善山)·개령(開寧)·상주(尙州)·예천(醴泉)에서 지진이 일어났다고 아뢰었다.

숙종 3년(1677) 11월 8일(신사)

상주에 우박이 내리고 천둥하며 번개치다

○尙州大雨雹、震電。

상주(尙州)에 큰 우박이 떨어지고 천둥치며 번개가 치다.

숙종 5년(1679) 2월 12일(정축)

상주 단밀천 여울물이 마르다

○尙州丹密川灘水斷流。

상주(尙州) 단밀천(丹密川) 여울물이 말랐다.

숙종 9년(1683) 윤6월 4일(갑진)

경상도 상주·김해·풍기·남해 등의 고을이 수해가 혹심하였다

○甲辰/慶尙道尙州、金海等十六邑, 六月初九日後大雨連注。 豐基、南海等十餘邑, 平陸成川。 大旱之餘, 水害又酷。

경상도(慶尙道) 상주(尙州)·김해(金海) 등 16 고을에 6월 9일 뒤로 큰 비가 잇달아 쏟아지고, 풍기(豊基)·남해(南海) 등 10여 고을은 평지가 하천(河川)이 되었다. 크게 가물던 끝에 수해(水害)가 또 혹심하였던 것이다.

숙종 13년(1687) 12월 17일(신유)

경상도 상주 등의 고을에 지진이 나다

○慶尙道尙州等邑地震。

경상도(慶尙道) 상주(尙州) 등의 고을에 지진이 일어났다.

숙종 19년(1693) 1월 4일(무신)

경상도 상주 등의 고을에 지진이 발생하다

○慶尙道尙州等邑, 地震。

경상도 상주(尙州) 등의 고을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숙종 38년(1712) 6월 14일(병인)

강화 및 경상도 일대에 우박이 쏟아지다

○丙寅/江華及慶尙道尙州等邑, 雨雹。

강화(江華) 및 경상도(慶尙道) 상주(尙州) 등 고을에 우박이 쏟아졌다.

경종 4년(1724) 6월 2일(계유)

경상도 안동 등지에 큰물이 지고 황충이 발생하다

○慶尙道安東、尙州等邑, 大水, 蝗出。

경상도 안동(安東)·상주(尙州) 등의 고을에 큰물이 지고 황충(蝗虫)이 발생하였다.

영조 5년(1729) 4월 23일(정유)

경상도 의성·함창 등에 서리가 내리다

○慶尙道義城ㆍ咸昌等邑, 霜降。

경상도 의성(義城)·함창(咸昌) 등 고을에 서리가 내렸다.

영조 7년(1731) 1월 20일(갑신)

경상도 영양·상주 등 고을에 지진이 있었다

○甲申/慶尙道英陽、尙州等邑, 地震。

경상도 영양(英陽)·상주(尙州) 등 고을에 지진이 일어났다.

영조 9년(1733) 4월 27일(무인)

경상도 상주 등 고을에 우박이 내리다

○戊寅/慶尙道尙州等邑雨雹。

경상도 상주(尙州) 등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영조 13년(1737) 2월 1일(기미)

경상도의 성산·대구·풍기 등에 지진이 일어나다

○慶尙道星山、大丘、豐基、咸昌、金山、醴泉、開寧、龍宮、尙州、聞慶、順興等邑地震。

경상도의 성산(星山)·대구(大丘)·풍기(豐基)·함창(咸昌)·금산(金山)·예천(醴泉)·개령(開寧)·용궁(龍宮)·상주(尙州)·문경(聞慶)·순흥(順興) 등의 고을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순조 14년(1814) 7월 28일(병진)

경상감사 이존수가 영하와 상주 등의 32읍의 수재에 대해서 아뢰다

○慶尙監司李存秀啓言: “今月十六七日之兩營下及尙州等三十二邑, 平陸皆成巨浸, 田畓之潰決沙覆, 各穀之沈墊披靡不可勝計。 外此各邑, 姑未報來, 本道水災之㝡甚, 每稱壬子, 而今番之水, 殆過於壬子云。”

경상 감사 이존수가 아뢰기를,

“이달 16, 17일의 비로 영하(營下)와 상주(尙州) 등 32읍의 평지가 모두 물바다가 되고, 무너져 터지고 모래가 덮은 전답(田畓)과 물에 잠기고 쓰러진 각종 곡식은 셀 수도 없었습니다. 이 외의 다른 고을들도 아직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지만, 본도의 수재는 늘 임자년이 가장 심하였다고 하는데, 이번의 수해는 임자년 보다도 더하다고들 합니다.”

하였다.

순조 28년(1828) 7월 13일(신해)

경상 감사 정기선이 도내 수재와 병충해 상황을 보고하다

○慶尙監司鄭基善, 以尙州等十九邑蟲災, 轉益熾盛, 去月二十四五日之雨, 安東等五邑民家漂頹, 一百十六戶達。 令旨回諭曰: “今觀此狀, 蟲災水患, 俱極哀。 彼南民, 何爲而酷被此災乎? 蟲災香祝, 已爲下送, 虔誠禱禳, 頹壓民家, 卿其各別申飭於該邑倅, 結搆奠接之方, 着意優助, 俾無一民失所棲遑之境。 見今西成斷望, 民心安得不洶懼? 卿其各別慰撫鎭安, 余則玉樓丙枕, 寢食靡安。 分憂之責, 全寄於卿, 卿其體余之意, 夙夜匪懈, 一心對揚。”

경상 감사 정기선(鄭基善)이 상주(尙州) 등 19읍에 충재가 점점 더 성하여지고, 지난달 24, 5일에 내린 비에 안동(安東) 등 5읍의 파괴된 민가가 1백 16호라고 계달하였다. 영지(令旨)를 내려 회유(回諭)하기를,

“지금 이 장달을 보니, 충재와 수환(水患)이 모두 극단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불쌍한 저 남쪽 지방 백성들이 무엇 때문에 이러한 재앙을 혹심하게 입었단 말인가? 충재에 쓸 향·축은 이미 하송하였으니 정성을 다하여 하늘에 빌도록 하고, 무너지고 쓰러진 민가는 경이 해당 읍의 수령에게 각별히 신칙하여 집을 다시 짓고 용접(容接)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講究)하고 넉넉히 도와주어, 한 사람도 살 곳을 잃고 방황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라. 지금 추수를 할 희망이 없으니 민심이 어찌 흉흉하지 않겠는가? 경은 각별히 그들을 무마하고 위안하도록 하라. 나는 궁궐 안에서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여 침식도 편하지 못하다. 나의 근심스런 책무를 나누어 모두 경에게 맡기니, 경은 나의 뜻을 본받아 밤낮 게으름 없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양(對揚)하게 하라.”

하였다.

헌종 5년(1839) 5월 18일(임자)

경상 감사 이도희가 4월 27일 내린 우박의 피해를 아뢰다

○慶尙監司金道喜, 以比安縣定北面, 四月二十七日, 暴風急雨, 飛雹大者如瓢, 小者如拳, 民家漂頹, 人畜渰死。 十里大坪, 便成赤地, 牟麥有根而無莖, 秧坂田種, 園菜無孑遺, 山上雜木, 枝葉盡落。 邱壑間堆積之雹, 三日不消。 龍宮東南五面, 醴泉縣內縣東兩面, 咸昌西北兩面, 義城北部等六面, 亦被雹, 各穀擧被打傷, 殆無餘存, 啓。

경상 감사(慶尙監司) 김도희(金道喜)가 아뢰기를,

“비안현(比安縣) 정북면(定北面)에 4월 27일 폭풍(暴風)이 불고 소나기가 쏟아질 때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표주박만하고 작은 것은 주먹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민가(民家)가 표몰(漂沒)하여 무너지고 사람과 가축(家畜)이 엄몰(渰沒)하여 죽었습니다. 그리고 10리의 큰 들이 문득 적지(赤地) 가 되었는데, 모맥(牟麥)은 뿌리는 있어도 줄기가 없고, 못자리의 볏모와 밭의 채소가 남은 것이 없으며, 산 위의 잡목(雜木)은 가지와 잎이 죄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골짜기에 쌓인 우박이 3일 동안 녹지 않았습니다. 용궁현(龍宮縣)의 동면(東面)·남면(南面) 등 5면과, 예천현(醴泉縣)의 현내(縣內)·현동(縣東) 2면과, 함창현(咸昌縣)의 서면·북면 2면과, 의성현(義城縣)의 북부(北部) 등 6면에도 우박이 내려서 각종 곡물(穀物)이 손상(損傷)을 입어 거의 남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철종 2년(1851) 7월 4일(무자)

수해를 입은 경상도 함창에 휼전을 시행하고 환상을 정지해 주게 하다

○敎曰: “觀此嶺伯狀本, ‘咸昌倉卒一雨, 人命之壓死, 民戶之漂頹, 數甚夥多。’ 聞甚矜慘。 而屍身之未搜, 尙爲折半之多, 期於掘覓之意, 爲先申飭。 而豈可無別般慰恤之擧? 頹壓民戶, 別施恤典, 新舊遷停退, 俾有奠接, 壓沒人等身布遷上, 幷蕩減之意, 廟堂措辭分付。”

하교하기를,

“이 영백(嶺伯)의 장본(狀本)을 보건대 ‘함창(咸昌)은 갑자기 한 번 온 비에 사람이 압사(壓死)하고 민호(民戶)가 떠내려가고 무너짐이 매우 많다.’ 하니 듣기에 매우 불쌍하고 비참하다. 시신(屍身)을 찾지 못한 것이 아직도 절반이나 되도록 많다고 하니, 기필코 파내도록 우선 신칙하라. 그리고 별도로 위휼(慰恤)하는 일이 어찌 없어서야 되겠는가? 집이 무너진 민호(民戶)에는 특별히 휼전(恤典)을 시행하고, 신구(新舊)의 환상(還上)을 정지하거나 물려주어 머물러 살도록 하라. 압사하거나 익사(溺死)한 자들의 신포(身布)·환상(還上)을 아울러 탕감하라는 뜻을 묘당에서 말을 만들어 분부하라.”

하였다.

고종 2년(1865) 8월 16일(무신)

경상감사 이삼현이 비바람에 손실을 입은 정황을 보고하니, 전라·경상도에 위유사를 파견하다

○慶尙監司李參鉉以“去月二十一日風雨, 昌原、尙州、金海、密陽、河東、居昌、淸道、咸陽、昆陽、梁山、陜川、慶山、鎭海、高靈、山淸、泗川、機張、熊川、安義等邑, 漂頹二千四十戶, 渰死二百五十七名, 舟船敗傷二百六十五隻, 鹽田壞敗八十五處”啓。 大王大妃敎曰: “嶺、湖風災以後, 丙枕靡安矣。 及見兩道所啓, 則漂戶渰死之數, 若是夥多, 一倍驚慘, 無以爲心。 哀我生靈, 蕩析流離之狀, 姑置之, 彼渰沒之命, 厥有何辜? 前後判付, 雖悉惻傷之意, 不可無別般撫恤之擧。 嶺南則以慶州府尹洪翼燮慰諭使差下, 馳往被災列邑, 招集人民, 以各安其業, 愼勿離散事, 面面曉諭; 別恤典, 以公錢中, 爲先分等派給。 湖南則以順天府使黃鍾顯慰諭使差下, 使之一體擧行。 別諭綸音, 令文任撰出。 而渰沒人, 無論已拯未拯, 其幽明之冤, 當何如也? 別設一壇於沿海水口, 大招而酹之, 以寓國厲之義。”

경상감사(慶尙監司) 이삼현(李參鉉)이, ‘지난달 21일의 비바람에 창원(昌原)·상주(尙州)·김해(金海)·밀양(密陽)·하동(河東)·거창(居昌)·청도(淸道)·함양(咸陽)·곤양(昆陽)·양산(梁山)·합천(陜川)·경산(慶山)·진해(鎭海)·고령(高靈)·산청(山淸)·사천(泗川)·기장(機張)·웅천(熊川)·안의(安義)등 고을의 표호(漂戶)와 퇴호(頹戶) 2,040호(戶), 수재를 당하여 죽은 사람이 257명(名), 배가 깨지거나 상한 것이 265척(隻), 염전(鹽田)이 무너진 곳이 85처(處)입니다.’라고 아뢰었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영남(嶺南)과 호남(湖南)에 풍재(風災)가 있은 이후로 한밤중에 잠 못 들고 편안치 못하고 있다. 지금 양도(兩道)의 소계(所啓)를 보건대 표호와 수재로 죽은 사람의 수가 이렇게 많으니 곱절이나 놀랍고 떨려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다.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살림살이를 다 잃고 헤매는 정상(情狀)은 우선 두고라도 물에 빠져 죽은 저 생명들에게 그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전후의 판부(判付)에서 비록 측은히 여기는 뜻을 다 하였지만 특별히 위로하고 구휼하는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영남은 경주 부윤(慶州府尹) 홍익섭(洪翼燮)을 위유사(慰諭使)로 차하(差下)하여 재해(災害)를 입은 열읍(列邑)에 달려가서 백성들을 모아놓고 제각기 생업에 안착하고 절대로 흩어지지 말도록 사람마다 직접 효유(曉諭)하게 하고 특별히 휼전(恤典)은 공전(公錢) 중에서 우선 분등(分等)하여 나누어 주게 하라. 호남은 순천 부사(順天府使) 황종현(黃鍾顯)을 위유사로 차하하여 그로 하여금 일체로 거행하게 하라.

특별히 하유할 윤음(綸音)을 문임(文任)에게 짓게 하라. 물에 빠져죽은 사람들은 건지고 못 건지고를 논할 것 없이 유명(幽明)을 달리한 원통함을 어떻게 하겠는가? 특별히 연해(沿海)의 수구(水口)에 제단을 설치하고 넋을 부르는 제사를 크게 지냄으로써 나라에서 여제(厲祭)를 지내는 뜻을 보여 주어라.”

하였다.

고종 11년(1874) 7월 18일(무오)

경상 전 감사 유치선이 성주, 상주, 김해 등의 재해면적을 보고하다

○慶尙前監司兪致善以“今月十六日之雨, 星州、尙州、金海、密陽、榮川、開寧、知禮等邑, 民家漂頹一千七百五十五戶, 人物渰壓七名, 田畓被災一千三百八結三十八負八束”馳啓。 敎曰: “水災之報, 又此踵至矣。 七名之渰死, 數千戶之漂頹, 又何如是甚多也? 向日判下之諸般措處, 前道臣似必姑未就緖, 而今當遞易之時, 有此巨創之災, 非無守宰之撫綏懷戢。 念其民情, 尤當茫蒼。 予心憂悶, 亦安得不倍蓰乎? 玆以內帑錢五千兩, 更爲劃下, 災戶之均俵, 身還布之蕩減。 自營助給之方, 一依前判下擧行, 已下綸音, 亦一體慰諭, 咸使知悉, 而災結之精實執報, 已有筵奏, 行會之意, 廟堂措辭, 分付于道臣。”

경상 전 감사(慶尙前監司) 유치선(兪致善)이, ‘이달 16일 비로 성주(星州)·상주(尙州)·김해(金海)·밀양(密陽)·영천(榮川)·개령(開寧)·지례(知禮) 등의 고을에서 물에 떠내려갔거나 무너진 민가가 1,755호(戶)이고, 익사하거나 압사한 사람이 7명이며, 수해를 입은 전답이 1,308결(結) 38부(負) 8속(束)입니다.’라고 치계(馳啓)하니, 전교하기를,

“수재에 대한 보고가 또 이렇게 뒤를 잇고 있다. 7명이 익사하고 수천 호가 떠내려갔거나 무너졌으니, 또한 어찌 이렇게 많은가? 전날 판하(判下)한 제반 조치를 전 도신(道臣)이 아직까지 베풀지 않은 것 같다. 지금 체역(遞易)할 때를 맞아 이런 큰 재해를 당했으니 수령이 돌보고 관심을 돌린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민정(民情)을 생각하면 더욱 막연하다. 내가 속으로 걱정되고 답답한 것도 어찌 곱절이나 심하지 않겠는가? 이에 내탕전(內帑錢) 5,000냥을 다시 떼어주어서 내려 보내는 만큼 재해를 입은 집에 골고루 나누어 주고 본인의 환곡(還穀)과 군포(軍布)를 탕감하도록 하라. 감영(監營)에서 도와주는 방도는 전부 전번에 판하한 대로 거행하고 이미 내려 보낸 윤음(綸音)으로 함께 타일러서 다 알도록 하라. 그리고 재결(災結)에 대하여 정확하게 보고하도록 이미 연석(筵席)에서 상주한 것이 있으니, 행회(行會)하라는 뜻으로 묘당(廟堂)에서 글을 만들어 도신에게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고종 21년(1884) 6월 29일(신축)

상주 등 고을의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에게 휼전을 베풀다

二十九日。 給尙州等邑渰死人恤典。

상주(尙州) 등 고을의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2. 상주지역의 자연 재해 현황(년도별)

년도

재해 구분

간략내용

비고

1403. 4.12

태종 3년

서리와 가뭄

5일간 서리 내림

1403. 7.1

태종 3년

가뭄

4월~ 6월 그믐까지 가뭄

1405. 7.11

태종 5년

해충

1405. 7.29

태종 5년

강풍과 폭우

1408. 5.17

태종 8년

벼락

벼락을 맞아 사람이 죽다

1409. 7.23

태종 9년

우박

1412. 5.2

태종 12년

우박

삼과 보리가 상함

1412. 8.29

태종 12년

황충

1414. 4.13

태종 14년

벼락

소와 사람이 죽다

1417.5.28

태종 17년

벼락

사람은 죽지 않다

1425. 2.17

세종 7년

지진

1427. 4.3

세종 9년

우박

1427. 6.22

세종 9년

홍수

1427.6. 23

세종 9년

홍수

산사태로 7명이 사망

1428. 4.22

세종 10년

지진

1428.12.15

세종 10년

지진

1430. 1.1

세종 12년

지진

1430. 4.18

세종 12년

지진

경상도와 전라도 전역

1433. 5.11

세종 15년

지진

1434. 5.19

세종 16년

벼락

단밀현에서 3명이 죽다

1437. 1.24

세종 19년

지진

전국적으로 일어남

1438. 7.27

세종 20년

벼락

남자 1명이 사망

1439. 6.19

세종 21년

홍수와 안개

황무가 끼다

1442. 2.3

세종 24년

용화리 온정

온천을 찾아보라고 함

1442. 2.20

세종 24년

지진

충청도와 경상도 군현

1445. 7.25

세종 27년

농사 폐농

1445.10.12

세종 27년

가뭄으로 폐농

세금 감면을 상소

1450. 5.17

문종 즉위

땅속에서 불이 남

비가 와도 꺼지지 않음

1453.12.29

단종 1년

지진

전라, 충청, 경상도

1461. 7.19

세조 7년

가뭄

기우제를 지내기를 간청

1471. 1.7

성종 2년

실농

구휼해 줄것을 요청

1471. 1.9

성종 2년

호환

호랑이 잡을 것을 요청

1478. 2.22

성종 9년

지진

충청도와 경상도

1478. 6.10

성종 9년

지진

해괴제(解怪祭)를 지내다

1497. 4.16

연산 3년

우박

1502. 12.7

연산 8년

지진

1511.10.13

중종 6년

지진

1514. 1.29

중종 9년

지진

경상도 충청도에 지진

1514. 2.22

중종 9년

지진

1516. 5.12

중종 11년

우박

1516. 9.7

중종 11년

풍재와 한재

1517. 4.10

중종 12년

지진

1520. 5.18

중종 15년

우박

1520. 6.3

중종 15년

지진

1520. 6.4

중종 15년

우박

전라도, 경상도

1521. 3.21

중종 16년

우박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1523.

중종 18년

우박

1525. 4.25

중종 20년

우박

전라도, 경상도

1525. 8.6

중종 20년

지진

1525. 8.25

중종 20년

지진

1526. 4.18

중종 21년

우박

1531. 3.6

중종 26년

1531. 3.7

중종 26년

1531. 3.29

중종 26년

1531. 7.5

중종 26년

지진

1532. 4.16

중종 27년

우박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

1542. 2.9

중종 37년

지진

1544. 2.3

중종 39년

지진

전국적

1547. 7.3

명종 2년

수해

1547. 7.16

명종 2년

수해

1549. 6.29

명종 4년

벼락

1553.11.27

명종 8년

지진

1555. 2.11

명종 10년

지진

1557. 5.3

명종 12년

지진

경기도, 경상도

1559.12.14

명종 14년

햇무리와 지진

1564. 5.6

명종 19년

큰 우박

1566.10.16

명종 21년

천둥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

1605. 1.25

선조 38년

지진

흰 꿩도 포획

1605. 7.23

선조 38년

수재

강원도, 경상도

1605. 7.1

선조 38년

홍수

관동, 영남

1627. 7.26

인조 5년

큰비

1628. 9.19

인조 6년

흉년

감세조치

1631. 5.4

인조 9년

지진

1631.11.15

인조 9년

지진

1640. 6.28

인조 18년

우뢰와 바람

1650. 2.14

효종 1년

오리 떼가 날다

1663. 5.28

현종 4년

지진

1675. 9.13

숙종 1년

지진

1677. 11.8

숙종 3년

우박, 천둥, 번개

1679. 2.12

숙종 5년

가뭄

1683. 윤6.4

숙종 9년

수해

1687.12.17

숙종 13년

지진

1693. 1.4

숙종 19년

지진

1712. 6.14

숙종 38년

우박

1724. 6.2

경종 4년

큰물, 황충

1729. 4.23

영조 5년

서리

1731. 1.20

영조 7년

지진

1733. 4.27

영조 9년

우박

1737. 2.1

영조 13년

지진

1814. 7.28

순조 14년

수해

1828. 7.13

순조 23년

충해

1839. 5.18

헌종 5년

우박

1851. 7.4

철종 2년

수해

휼전

1865. 8.16

고종 2년

풍수해

휼전

1874. 7.18

고종 11년

수해

재해 면적 보고

1884. 6.29

고종 21년

수재민

수재민에게 휼전


3. 상주지역의 자연 재해 현황(재해별)


가. 서리

년도

재해 구분

간략내용

비고

1403. 4.12

태종 3년

서리와 가뭄

5일간 서리 내림

1729. 4.23

영조 5년

서리


나. 가뭄

년도

재해 구분

간략내용

비고

1403. 4.12

태종 3년

서리와 가뭄

1445. 10.12

세종 27년

가뭄

가뭄으로 인한 폐농

1461. 7.19

세조 7년

가뭄

기우제 지내기를 간청함

1516. 9.7

중종 11년

풍재와 한재

1679. 2.12

숙종 5년

가뭄


다. 해충

년도

재해 구분

간략내용

비고

1405. 7.11

태종 5년

해충

1412. 8.29

태종 12년

황충

1724. 6.2

경종 4년

큰물과 황충

1828. 7.13

순조 23년

충해


라. 태풍

년도

재해 구분

간략내용

비고

1405. 7.29

태종 5년

강풍과 폭우

1516. 9.7

중종 11년

풍재와 한재

1640. 6.28

인조 18년

우레와 바람

1865. 8.16

고종 2년

풍수해


마. 벼락

년도

재해 구분

간략내용

비고

1408. 5.17

태종 8년

벼락

벼락을 맞아 사람이 죽다

1414. 4.13

태종 14년

벼락

소와 사람이 죽다

1417. 5.28

태종 17년

벼락

사람은 죽지 않다

1434. 5.19

세종 16년

벼락

단밀현에 3명이 죽다

1438. 7.27

세종 20년

벼락

남자 1명이 사망하다

1549. 6.29

명종 4년

벼락

1566. 10.16

명종 21년

천둥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

1640. 6.28

인조 18년

우뢰와 바람

1677.11.8

숙종 3년

우박 천둥 번개


마. 우박

년도

재해 구분

간략내용

비고

1409. 7.23

태종 9년

우박

1412. 5.2

태종 12년

우박

1427. 4.3

세종 9년

우박

1497. 4.16

연산 3년

우박

1516. 5.12

중종 11년

우박

1520. 5.18

중종 15년

우박

1520. 6.4

중종 15년

우박

전라도, 경상도

1521. 3.23

중종 16년

우박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1523.

중종 18년

우박

1525. 4.25

중종 20년

우박

전라도, 경상도

1526. 4.18

중종 21년

우박

1532. 4.16

중종 27년

우박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

1564. 5.6

명종 19년

큰 우박

1677. 11.8

숙종 3년

우박, 번개

1712. 6.14

숙종 38년

우박

1733. 4.27

영조 9년

우박

1839. 5.18

헌종 5년

우박


바. 홍수

년도

재해 구분

간략내용

비고

1427. 6.22

세종 9년

홍수

1427. 6.23

세종 9년

홍수

산사태로 7명이 사망

1439. 6.19

세종 21년

홍수와 안개

황무가 끼다

1547. 7.3

명종 2년

수해

1547. 7.16

명종 2년

수해

1605. 7.23

선조 38년

수해

강원도, 경상도

1605. 7.1

선조 38년

수해

관동, 영남

1627. 7.26

인조 5년

수해(큰비)

1683. 6.4

숙종 9년

수해

1814. 7.28

순조 14년

수해

1851. 7.4

철종 2년

수해

휼전을 배풀다

1865. 8.16

고종 2년

풍수해

휼전을 배풀다

1874. 7.18

고종 11년

수해

재해 면적 보고

1884. 6.29

고종 21년

수재민 발생

휼전을 배풀다


사. 눈

년도

재해 구분

간략내용

비고

1531. 3.6

중종 26년

1531. 3.7

중종 26년

1531. 3.29

중종 26년


아. 지진

년도

재해 구분

간략내용

비고

1425. 2.27

세종 7년

지진

1428. 4.22

세종 10년

지진

1428. 12.15

세종 10년

지진

1430. 1.1

세종 12년

지진

1430. 4.18

세종 12년

지진

경상도, 전라도 전역

1433. 5.11

세종 15년

지진

1437. 1.24

세종 19년

지진

전국적으로 일어남

1442. 2.20

세종 24년

지진

충청도와 경상도

1453. 12.29

단종 1년

지진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1478. 2.22

성종 9년

지진

충청도, 경상도

1478. 6.10

성종 9년

지진

해괴제를 지내다

1502. 12.7

연산 8년

지진

1511. 10.13

중종 6년

지진

1514. 1.29

중종 9년

지진

경상도, 충청도

1514. 2.22

중종 9년

지진

1517. 4.10

중종 12년

지진

1520. 6.3

중종 15년

지진

1525. 8.6

중종 20년

지진

1525. 8.25

중종 20년

지진

1531. 7.5

중종 26년

지진

1542. 2.9

중종 37년

지진

1544. 2.3

중종 39년

지진

전국적

1553. 11.27

명종 8년

지진

1555. 2.11

명종 10년

지진

1557. 5.3

명종 12년

지진

경기도, 경상도

1559. 12.14

명종 14년

햇무리와 지진

1605. 1.25

선조 38년

지진

흰 꿩도 포획

1631. 5.4

인조 9년

지진

1631. 11.15

인조 9년

지진

1663. 5.28

현종 4년

지진

1675. 9.13

숙종 1년

지진

1687. 12.17

숙종 13년

지진

1693. 1.4

숙종 19년

지진

1731. 1.20

영조 7년

지진

1737. 2.1

영조 13년

지진


자. 기타

년도

재해 구분

간략내용

비고

1442. 2.3

세종 24년

용화리 온정

온천을 찾을 것을 명함

1450. 5.17

문종 즉위

땅속에 불이남

비가와도 꺼지지 않음

1471. 1.7

성종 2년

실농

구휼해 줄 것을 요청

원인불명

1471. 1.9

성종 2년

호환

호랑이 잡을 것을 요청

1559. 12.14

명종 14년

햇무리와 지진

1628. 9.19

인조 6년

흉년

감세 조치

원인 불명

1650. 2.24

효종 1년

오리 떼가 남

3

. 상주지역 자연재해 종류별 회수

△ 전국 대비


수해 476회(0.03%), 황충 261회(0.02%), 지진 1,900회(0.02%),

가뭄 100회(0.06%)

재 해

회 수

재 해

회 수

서리

2

해충

5

가뭄

6

강풍

4

우박

17(17.3%)

홍수(폭우)

15(15.3%)

벼락

10

4

지진

35(35.7%)

재해 계

98회


4. 지진이 가장 많이 일어 난 년도

중종 1511년 ~ 1544년(33년간) 10회(28%)

세종 1425년 ~ 1445년(20년간) 8회(22%)


5. 지진이 연속으로 일어 난 해

세종 10년(1428) 2회 세종 12년(1430) 2회

성종 9년(1478) 2회 중종 20년(1525) 2회

인조 9년(1631) 2회


Ⅴ. 상주시 재해대책

(태풍 ․ 호우재난 위기대응 현장조치 행동매뉴얼)

이 매뉴얼은 『국가위기관리기본지침(대통령훈령 제318호)을 근거로 ‘풍수해 재난’에 대한 위기관리 표준매뉴얼 및 실무 매뉴얼 근거에 의거 ‘풍수해 재난(태풍, 호우)으로 인한 위기상황 발생 시 소방방재청 및 안전행정부가 적용한 세부 대응 절차 및 제반 조치사항과 관련기관과의 협의 하에 작성된 토대로 위기대응 현장조치 매뉴얼을 상주시 자체 실정에 맞추어 작성한 내용이다.

1. 위기경보 수준별 조치사항

가. 관심(Blue)

태풍 ․ 호우 빈발시기(여름철 자연재해대책기간 : 5.15~10.15)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태풍 ․ 호우가 발생한 상태

1) 조치사항

〇 징후 감시활동(기상관측 및 예보 모니터링)

〇 여름철 재난대책기간 운영 준비

* 사전대비조치 지시 및 확인

* 방재물자 확보실태 확인

* 태풍 위기경보 “관심” 단계 지속 유지

〇 상주시재난안전대책본부의 운영 준비

〇 유관기관 협조체계 및 대비상황 점검 ․ 확인

나. 주의(Yellow)

태풍 예비특보 또는 태풍주의보가 발령되고 태풍에 의한 대규모 재난이 발생할 가능성이 나타날 때

호우 예비특보 또는 호우주의보가 발령되고 호우에 의한 대규모 재난이 발생할 가능성이 나타날 때

1) 조치사항

〇 재난상황 모니터링 및 전파

〇 재난위기상황판단 및 위기경보전파

〇 상주시재난안전대책본부의 운영

〇 읍․면․동 및 유관기관 대처상황 확인

〇 유관기관 협조체계 점검․확인

〇 피해우려지역 및 위험시설 응급조치 지시 및 확인

다. 경계(Orange)

태풍경보가 발령되고 태풍에 의한 대규모 재난이 발생할 가능성이 농후할 때

호우경보가 발령되고 호우에 의한 대규모 재난이 발생할 가능성이 농후할 때

1) 조치사항

〇 재난상황 정보수집 및 전파

〇 재난위기상황판단 및 위기경보발령

〇 상주시재난안전대책본부의 운영 강화

〇 읍 ․ 면 ․ 동 및 유관기관 비상근무 강화지시/요청

〇 읍 ․ 면 ․ 동 및 유관기관 대처상황 확인

〇 실과 및 유관기관 협조체계 점검 ․ 확인

〇 피해우려지역 및 위험시설 응급조치 지시 및 확인

라. 심각(Red)

태풍경보가 발령되고 태풍에 의한 대규모 재난이 발생할 가능성이 확실 할 때

후우경보가 발령되고 호우에 의한 대규모 재난이 발생할 가능성이 확실 할 때

1) 조치사항

〇 재난상황 정보수집 및 전파

〇 재난위기상황판단 및 위기경보발령전파

〇 상주시재난안전대책본부 비상 3단계 운영

〇 읍 ․ 면 ․ 동 및 유관기관 비상근무 강화지시/요청

〇 읍 ․ 면 ․ 동 및 유관기관 대처상황 확인

〇 실시간 기상․교통도로통제 상황 및 국민행동요령 대주민 홍보

〇 유관기관별 조치할 사항 이행요청 및 확인

〇 피해우려지역 및 위험시설 응급조치 지시 및 확인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살펴본 조선왕조실록

1. 조선왕조실록 국보 제151호

총 888책 / 5,400만자

* 한자 5,400만자면 한글로 환산하면 1억 1,000만자

조선왕조실록 편찬을 위해 참고한 사료

2. 일성록 국보 153호

총 2,329책 / 약 6,000만자

3. 승정원일기 국보 303호

총 3,243책 / 2억 4천 300만자 - 4억 8천 600만자

∎우리나라 세계기록문화유산 목록

1. 훈민정음 해례본 1997년

2. 조선왕조실록 1997년

3. 직지심체요절 2001년

4. 승정원일기 2001년

5. 고려대장경 및 제 경판 2007년

6. 조선왕조의궤 2007년

7. 동의보감 동양의학의 이론과 실제 2009년

8. 5.18 기록물 2011년

9. 일성록 2011년

10. 새마을운동 기록물 2013년

11. 난중일기 2013년

12. 유교 책판 2015

13.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