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나라 위해 싸움터에 나선 곽수인 ․ 수지 형제
조 희조 희 열*
임진왜란 때 왜적과 맞서 싸워 큰 공을 세운 사람으로는 청주 곽씨 집안에서 곽수인(郭守仁)·곽수의(郭守義)·곽수예(郭守禮)·곽수지(郭守智)와 곽용흘(郭龍屹)·곽용영(郭龍嶸) 등을 들 수 있다.
1. 곽수인(郭守仁, 1537∼1602)의 의병활동
형 곽수인(郭守仁)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字)는 경택(景宅), 호(號)는 양담(瀼潭)이다. 1537(정유)년 아버지 천문습독관(天文習讀官) 곽림(郭琳)과 어머니 수의부위(修義副尉) 조식(曺軾)의 딸 창녕 조씨(昌寧曺氏)의 맏아들로 태어나 함창에서 살았다.
선생의 고조부 되시는 존중(存中)이 처음 칠곡에 와서 살았고, 아버지 림(琳)이 함창으로 이거하여 살면서 지금 그 후손들이 상주에 살고 있다. 림(琳)의 자(字)는 미옥(美玉)이고 벼슬은 천문습독관(정9품)으로, 슬하에 수인(守仁), 수의(守義), 수예(守禮), 수지(守智), 수신(守信) 등 5형제를 두었다.
선생은 효성이 지극하여 3년간 여묘(廬墓)를 하였고, 1585년(선조 18)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에 아우 호재 곽수지와 함께 응시하여 생원(生員) 2등(二等) 10위로 49세에 합격하여 형제가 나란히 사마(司馬)에 올랐다. 관직은 창녕현감(昌寧縣監)이 되었다.
가. 선비다운 인품
선생은 일찍이 퇴계 문하에 나아가 퇴도(退道)학맥의 적전으로 학문의 길을 열었다. 49세 되던 1585년(선조 18) 을유 식년시에 아우 수지(守智)와 함께 나란히 생원(生員)에 입격하였고, 이어서 성균관의 추천으로 창녕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현감 재임 중에는 학문을 일으키는데 크게 힘을 기울였는데 선생이 그 직을 마친 후 창녕 읍민들이 공의 흥학과 청절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선생이 현감 직을 마치고 돌아올 때 낙동강 월파정(月波亭)에서 잠시 쉬게 되었는데 이때 이삿짐 상자에 채도(菜刀) 한 자루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선생은,
“이 칼 한 자루도 창녕의 재산이니 가져 갈 수 없다.”
라고, 하면서 기꺼이 강가에 던져 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는 바로 공복으로서의 청렴성을 엿보게 하니 뒷날에 이조정랑 홍귀달(洪貴達)이 이곳을 지나다가 그 청렴성에 대하여 시(詩)를 지어 이르기를,
金鶴何年過(김학하년과) 금학이 어느 해에 이곳을 지났는가.
樓臺此地高(누대차지고) 그 누대는 지금도 높이 솟아있는데
舟人猶說古(주인유설고) 뱃사공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는
淸節憶投刀(청절억투도) 칼마저도 던진 청절 새롭게 하네,
라고, 하였다.
나. 형제가 함께 한 의병 활동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왜적(倭敵) 격멸에 공(功)을 세웠는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송만집(松灣集)』‘용사사적략(龍蛇事蹟略)’은 창의군(昌義軍) 대장으로 이봉, 상주 소모관으로 정경세, 용궁 소모관으로 강주, 함창 소모관 권경호, 문경 소모관 신담, 중군 곽수인, 별장 김각, 도청 송량과 채유희, 군기유사 강응철·홍약창·조광벽·이홍도·조극신, 군량 유사로 전식·조정·홍수약·정발·곽수지, 문서유사로 조우인·김광두·정윤해·김혜·기과유사로 최정호·정월, 기고관으로 채유종, 행수군관 김광폭, 병방 봉사(兵房奉事) 김사종, 전봉장 윤식, 돌격장 이축, 척후장 신응윤으로 창의군을 조직하고 있음을 전한다.
창의대장 이봉(李逢)이 초유사 학봉 김성일(金誠一)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에도 선생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데 다음과 같다.
「가칭 창의대장(倡義大將)인 이봉(李逢)이 사람을 놓아 보고하는 사무(事務)입니다.
합하(閤下)의 고유(告諭) 격문(檄文)을 받아보니 아아! 장대하십니다. 합하(閤下)의 위국지성(爲國之誠)에 한 하늘 밑에서 무릇 혈기가 있는 자라면 뉘라서 감격하여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합하께서는 오늘날의 변란을 이미 예언하셨고, 오늘날의 슬픔을 이미 예지하셨는데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봉(逢)은 한낱 소인입니다. 지략과 작은 기량도 하나 없이 산중으로 피난하여 목숨을 연장시키고 있었습니다.
한데 함창에 사는 선비인 봉(逢)의 생질(甥姪) 채유희(蔡有喜)·유종(有終) 형제가 상주·문경·용궁 그리고 같은 현(縣)의 사류(士類) 몇몇 사람들과 뜻을 같이하여 수 백의 의병을 모으고, 봉(逢)에게 왕실(王室)의 후예(後裔)라 하여 재삼 추천하기로 대의소재(大義所在)로 회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금월〔1592년 7월 30일〕초 2일 함창의 황령사에 집합시켜 전 정자 정경세(鄭經世)로 상주 소모관(召募官)을 삼고, 전 찰방 권경호(權景虎)를 함창 소모관을 삼고, 진사 강주(姜霔)를 용궁 소모관을 삼고, 유학 신담(申譚)을 문경 소모관으로 삼았습니다.
또 생원 곽수인(郭守仁)으로 중군(中軍)을 삼고 진사 김각(金覺)으로 별장(別將)을 삼고, 전 참봉 송량(宋亮)·유학 채유희로 도청(都廳)을 삼고, 진사 강응철(康應哲)·홍약창(洪約昌)·유학 조광벽(趙光壁)·이홍도(李弘道)·조극신(趙克新)으로 군기유사(軍器有司)를 삼고, 진사 전식(全湜)·유학 조정(趙靖)·홍수약(洪守約)·정발생(鄭撥生)·곽수지(郭守智)로 군량유사(軍糧有司)를 삼고, 진사 조우인(曺友仁)·유학 김광두(金光斗)·정윤해(鄭允諧)·김헌(金憲)으로 문서유사(文書有司)를 삼고, 진사 최정호(崔挺豪)·유학 정월(鄭樾)로 기과유사(記過有司)를 삼고, 채유종(蔡有終)으로 기고관(旗鼓官)을 삼고, 충순위 김광복(金光輻)으로 행수군관(行首軍官)을 삼고, 사복 김사종(金嗣宗)으로 병방봉사(兵房奉事)를 삼고, 윤식(尹湜)으로 전봉장(前鋒將)을 삼고, 무사(武士) 이축(李軸)으로 돌격장을 삼고, 신응윤(申應允)으로 척후장을 삼고, 그 나머지의 유사(儒士)와 무부(武夫)들도 각각 부별로 분담시켜 적을 토벌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군대라야 근근한 오합지중(烏合之衆)으로 모든 일이 문란하며, 기계(器械)를 갖추지 못하고, 군량을 마련할 수 없으니, 지극히 안타까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와 같이 못난 사람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만 애군(愛君)과 우국(憂國)의 정성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이제 유격(諭檄)을 돌리는 마당에 이러한 조치가 있었으니, 바라옵건데 합하(閤下)께서는 가르쳐 주소서.」
라고, 하였다.
2. 곽수지의 의병활동과 진사록(辰蛇錄)
아우 곽수지(郭守智, 1555~1598)의 관향은 청주, 자는 경함(景含)이고, 호(號)는 호재(浩齋)이다. 부친 천문습독관(天文習讀官) 림(琳)이 칠곡에서 함창으로 이사하였는데, 이 고장에 처음으로 살게 되었다. 모친 창녕조씨(昌寧曺氏)는 수의부위(修義副尉) 조식(曺軾)의 따님으로 1555년 1월 6일 지금의 이안에서 공을 낳아 함창에서 생장했다.〔곽수인의 아우이다.〕
성인이 되어 처가(妻家)가 있는 풍기에서 살았는데, 당시 퇴계선생을 사모해서 지금의 예안에 있는 도산서원까지 매달 찾아가 참배하고, 퇴계의 문인들과 교유했다.
1585년(선조 18) 식년시(式年試)에 형과 함께 응시하여 생원(生員) 2등(二等) 7위로 형 곽수인과 함께 사마(司馬)에 올랐다.
어릴 때『맹자(孟子)』의 ‘호연장(浩然章)’을 읽고 스스로 ‘호재(浩齋)’로 호(號)를 취하여 정자(亭子)나 재실의 이름에도 ‘호(浩)’ 자를 넣어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 뜻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학문과 행실에 힘쓰고, 현인(賢人)을 존경하며, 도(道)를 존재하게 하는 올바르고 곧은 의(義)를 배양하여, 나라를 위하고, 옳은 일에는 용감하고 물러남이 없는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철학적인 높은 뜻을 담은 것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철학적 바탕에서 의지를 굳혀 여러 훌륭한 현사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닦았으며 조국이 어려움을 당할 때 분연히 일어나는 기개(氣槪)를 여지없이 발휘 하였던 것이다.
가. 호재의 의병활동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풍기에서 가까운 소백산으로 피난하여 들어갔는데 임금이 서울을 떠나 피난하셨다는 말을 듣고 통곡했다.
이 당시 풍기군수는 서애 류성룡의 형인 류운용이었는데, 풍기군수는 선생이 충성심과 책략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고 병졸의 훈련과 병장기의 수선, 성첩의 수비, 명나라 장병의 접대, 굶주린 백성의 구휼, 둔전에 관한 일 등 중요한 일들을 모두 맡겼다.
선생은 풍기에서 왜적과의 싸움에 나서 활동하시면서 고향인 함창에도 자주 내왕하였고, 형 양담공(瀼潭公)과 함께 상주에서 일어 난 의병대인 창의군에서 군량유사로 활동을 하였다. 이 사실은 창의대장 이봉(李逢)이 초유사 학봉 김성일(金誠一)에게 보내는 격문(檄文)과『송만집(松灣集)』의「용사사적략(龍蛇事蹟略)」에 기록되어 있다.
창의 당시 그의 일기를 들여다 보면,
「임진년 8월 2일, 서풍이 크게 일었다. 어제 밤부터 왜병의 시끄러운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마을에 왜병이 추격해 온다면 사방에 복병을 배치하고, 공을 세우지 않은 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 주상은 파천하였고 … 우리 집의 사사로운 사정을 말하면 늦게 아들 하나를 얻어서 나이 겨우 5세에 두역으로 자리에 누워 있는지가 오늘로 4일이라, 만약 저 왜적들이 바로 들어와 마구 해친다면 장차 이 아이는 어디에 감추어 둘 것인가. … 평창(平昌)의 노일현(勞逸縣)은 안동의 소천 풍산 등의 현은 적세의 예봉이 등등하여 범하기 어렵고, 사면이 모두 적이면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오늘밤은 구월 시월처럼 춥구나.
임진년 9월 13일, 향병사(鄕兵事)를 의논하기 위해 함창에 들렸는데 여러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아 다시 날을 잡아 모이기로 하였다. 들리기를 왜병이 또 감바우·황령 등 여염(閭閻)에 분탕질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 형제와 조카들은 화산(華山)에서 그 곳으로 옮겼는데 피해는 당하지 않았는지 한스러워 눈물만 늘어난다.
임진년 9월 21일, 전경직(全景直)과 같이〔풍기〕군에 들어왔다. 영천〈지금의 영주〉향병회진(榮川鄕兵會陣)의 통문에 대한 답장이 있었는데 김광엽(金光燁)은 은풍(殷豊, 지금의 풍기)에서 도착하여 들은 소문에 의하면 왜란 초기에 상주 외남 사람이 왜병에게 많이 죽었다고 한다. 정 진사 국성(鄭國成) 장(丈)과 나와 동년배인 김성원(金聲遠)이 다 이 화를 면치 못하였다고 한다.
임진년 10월 10일, 가랑비가 옴. 용흘(龍屹)에서 돌아와 함창을 향하여 바라보면서 중씨를 모셔 오고 싶지만 단지 당교(唐橋)의 적 주둔지에서 혹 해를 입을까 두렵고 우려도 된다.
임진년 10월 16일, 아침에 영천〔지금의 영주〕의 향병(鄕兵)이 죽령을 향하여 구현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상소문(上疏文) 필사(筆寫)를 마치고 여익(汝益)과 선산 형은 송잠(宋潛)의 집으로 가고 나는 날이 저물 무렵에 돌아왔다.
임진년 10월 20일, 작은 형님 가족들이 도착하였다. 17일 나서서 오는데 그 적로(敵路)의 어려움이 용궁 예천으로부터 큰길을 금시에 막고 길옆에는 백골(白骨)이 즐비하다고 한다.
임진년 10월 26일, 박경택(朴景擇)의 집에서 전별을 하고 장계(狀啓)를 보냈다.」
상주 사람으로 임진왜란의 긴 전쟁 기간 동안 일기를 기록하여 남긴 분으로는 보물 1003호로 지정된 검간(黔澗) 조정(趙靖, 1555∼1636)의 일기인「임진란 일기」가 있고, 가규(可畦) 조익(趙翊, 1556∼1613)의「진사(辰巳)일기」, 그리고 호재 선생의「浩齋辰蛇錄(호재 진사록)」이 있다. 비록 선생이 임진란 중 주로 활동하신 장소가 상주가 아닌 풍기 지역이어서 상주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고는 하지만, 나라 위해 싸움터에 나서는 정신이 중요한 것이지 장소가 그 어느 곳인들 어떻겠는가?
나. 호재의 저서『호재 진사록(浩齋辰蛇錄)』
그의 저술『호재 진사록(浩齋辰巳錄)?은 선생이 살고 계시던 풍기에서 부산포가 왜적의 공격으로 함 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1592년(선조 25) 4월 17일 쓰기 시작하여 조선 침략을 명령한 관백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죽은 후인 1598년 9월 3일까지의 기록이다.
날짜별로는 간혹 중간에 빠진 날이 있긴 하지만 1596년 12월 말에서 1597년 6월 1일까지의 것 외에는 매일 전쟁과 관련한 일을 기록하였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화왕산성(火旺山城) 일대에서 향병을 모아 적과 싸웠던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당시 선생은 곽재우의 휘하로 들어가 향병을 모아 문경의 당교(唐橋)와 창녕 화왕산성(火旺山城) 등에서 왜적과 싸워 물리치고, 고을을 지킨 인물이다. 곽수지를 비롯한 향병들이 이 일대를 굳게 지킴으로써 왜군의 경상우도(慶尙右道)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
장서각 소장의 이 일기는 乾·坤으로 나누어진 2권 2책의 석인본(石印本)이다. 표제는 ‘浩齋辰蛇錄(호재 진사록)’으로 되어 있고, 내제한 판심제는 모두 ‘浩齋辰巳日錄(호재 진사일록)’으로 되어 있다.
일기의 구성은 본문 외에 권1 첫머리에 서문 1편과 권2 말에 발문 2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서문은 1면 당 5행 9자씩 초서로 썼고, 본문과 발문은 1면당 10행 20자씩 기록하였다.
서문은 1934년 동지(冬至)에 상산인(商山人) 김직원(金直源)이 썼고, 발문 두 편은 1934년 작성한 것으로, 호재의 11대 후손인 곽봉회(郭鳳會)와 후손 곽윤구(郭潤九)가 썼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는 따로 간행지가 붙어 있어서 1935년 5월 11일에 대구의 진진당(津津堂)에서 인쇄를 하여 5월 14일에 발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기의 기록 방식은 날짜와 기사 순서로 매일 기록하였고, 날짜가 바뀔 때는 ○로 표시하고, 달이 바뀔 때는 줄을 달리 하여 왜군의 침략상황과 명나라의 구원병 파병, 아군의 피해상황 등을 기록하였다.
4월 17일 곽수지는 왜군이 부산포에 침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벗들과 종군할 것을 결의하고, 4월 24일 까지 가족들을 피신할 영주와 예천·상주·문경·산양 등의 상황을 살핀 다음 함창(咸昌)의 본가로 가서 가족과 신주를 모시고 소백산으로 피난시켰다.
그는 부산을 거쳐 대구와 안동으로 진격해오는 일본군의 이동과 가족들의 피난처에 각별한 신경을 쓰면서 수시로 전쟁 중 도망친 군인이나 중들을 통해 들은 전쟁 소식을 기록으로 상세히 남겼는데, 경상도 이 외의 전란 정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5월 6일 기사를 보면, 국왕이 국경을 넘어 피난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하늘이 조선을 돕지 않음을 탄식하였다. 그리고 부산포에서 동래부사(東萊府使)가 왜군에게 해를 입었다는 것과, 임진강에서는 왜군과 접전하여 시체가 강을 메워 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등의 비참한 전투 상황을 기술하였다.
이 외에도 조정에서 무과(武科)를 실시하여 각 도에서 무관(武官)을 선발한 내용과 중국에서 지원병을 보낸 일, 왜군이 왕릉을 파헤치고 만행을 저지른 일, 혹독한 날씨로 인해 고초를 겪고, 타지에서 고향을 그리는 심정 등에 관해 상세히 기술하였다.
1597년 7월의 기사에는 일본군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는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곽재우가 화왕산성 주변의 피난민을 이끌고 산성으로 들어가 일본군의 화를 피한 내용도 기록하였다. 이 당시 곽수지는 군량유사(軍糧有司)로 참여하였다.
일기의 마지막인 1597년 9월 3일에는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과 명나라 장군 류정(劉綎)·진린(陳璘)이 순천(順天) 일대에서 수륙합동작전을 펼쳐 적을 완전히 몰아내었다는 내용과 함께 이순신이 적의 탄환에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애석해 하고 있다.
이 일기는 그 자료적 가치에 비해 아직 학계에 알려지지 않아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약 6년간의 기록이 임진왜란에 관한 다른 어떤 기록보다 충실하고 상세하다.
따라서 이를 통해 당시 사회상과 군대의 배치상황·의병의 활동상 등을 살필 수 있어서 ‘임진왜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1593년 공의 이러한 활동이 공으로 인정되어 천거로 집경전(集慶殿) 참봉이 되었다가 1594년 건원릉(健元陵) 참봉으로 옮겼고, 1598년 송라 찰방(松羅察訪)이 되어 많은 사람을 병마(病魔)에서 구제했으나, 그 해 10월 14일 44세로 별세하셨다.
그의 아들 곽용백(郭龍伯)은 문과를 통해 출사하고, 성균관 학유(1626, 종9품)⋅의정부 사록(1626, 정8품)⋅언양현감(1633)⋅고성현령(1635)⋅봉상시 첨정(1644. 종4품)⋅성균관 사예(정4품) 등을 역임하였다.
다. 전하는 유적(遺蹟)
1682(숙종 8)년 이안면 가장리(佳庄里)의 윗가장에 면진당(勉進堂) 곽기세(郭麒世)가 사묘(祠廟) 가덕사(佳德祠)를 창건하여 퇴천(退川) 곽존중(郭存中)·양담(瀼潭) 곽수인(郭守仁)·호재(浩齋) 곽수지(郭守智)·사오(沙塢) 곽용백(郭龍伯)·양헌(讓軒) 곽이정(郭以楨)을 봉안하여 향사했는데, 갑오년 동학농민운동 때 훼철되었다.
이안면 가장리(佳庄里) 윗가장에 호연정(浩然亭)이 있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창의한 호재(浩齋) 곽수지(郭守智, 1555~1598)가 공갈못 동쪽에 지었다가 병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1978년 후손인 곽윤석(郭潤奭)이 숭덕산 밑으로 옮겨 중건했다.
‘호연정 중건기(浩然亭重建記)’는 이가원(李家源)이 찬했는데 이르기를,
「함창지역 공검 못 동편에 옛적 호연정이 있었다. 호연정은 호재 곽수지 선생께서 평소 기거하던 곳인데 대한민국이라는 호칭을 쓰던 시대에 와서 없어졌고, 정자 뒤의 호수도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밭으로 변하여 지금은 말라죽은 몇 그루의 나무에서 울부짖는 까마귀 소리만 들릴 뿐이다.
…… 중 략 ……
공의 맏형 양담은 하늘이 주는 지기로서 형제가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한 시대에 드러나는 훌륭한 인물이었다. 두 분은 퇴계선생의 학문을 종장으로 여겨 양담은 퇴계의 문도로 직접 가르침을 받았고, 공은 특별히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을 대단히 안타깝게 여겼다.
월천 조목(趙穆)과 서애 류성룡(柳成龍) 선생을 쫓아서 누차 도산서당에 알묘했고, 소수서원에서 유집(遺集)을 교정하였다. 그러므로 퇴계선생의 여러 문하생들과 함께 두루 교제하여 사숙의 관계를 만들었다.
선조시기에 일어난 임진 난에는 형제가 함께 창의하였다. 공은 처음에는 풍기의 ‘참나무지<眞木亭>’에서 의거하다가 〔오늘날의 풍기인〕은풍으로 옮겼는데, 겸암 류운룡을 보좌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 고장의 의병에 관한 일도 겸하였고, 현풍의 화왕산성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공은 의병 진영에 있으면서 직접 상소문을 써서 진달하였는데, 붕당(朋黨)의 폐단과 군기(軍氣)의 해이함이 그 내용이었다.
그리고 다시 진사록(辰蛇錄)을 저술하였는데 그의 나라 위한 일편단심을 하나 가득 손 안에 담아 볼 수가 있다.
공은 어릴 때 맹자의 호연장(浩然章)을 읽으면서 재실과 정자 이름을 모두 ‘호(浩)’자를 넣어서 직접 쓰신 것이다. 나 이가원이 생각하기로 공은 학문과 행실에 힘써서 현인을 존경하고, 도를 존재하게 하는 올바른 곧은 의를 배양하여, 싸움에 임하여 물러남이 없는 용감함은 모두가 호연지기라는 철학적인 높은 뜻을 담은 말에서 나오지 않은 게 없다고 생각한다.」
라고, 하였다.
문집으로,『양담호재사우록(瀼潭浩齋師友錄)』⋅『호재집(浩齋集)』⋅『호재진사록(浩齋辰巳錄)』이 있다.
이 외에, 월봉(月峯) 고인계(高仁繼)의 ‘제 곽호재수지집(題郭浩齋守智集)’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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