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선정(善人善政) 김홍민(金弘敏)
김 정 찬*
김홍민(金弘敏, 1540~1594)은 자가 중원(重遠)인데 임부(任父)로 고쳤고 상주사람이다. 6대조는 김상직인데 세종 대에 관직이 집현전 부제학에 이르렀다. 고조는 김극충으로 통예문 통찬을 지냈다. 증조는 김예강으로 건공장군 충무공 부사직을 지냈다. 조부는 김윤겸으로 장사랑을 지냈고 부친은 김범(金範)인데 유고경전에 밝고 행실이 뛰어나 옥과현감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창녕조씨 계공랑 조한신의 딸이다.
1540년 10월 1일 해시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미려한 기질이 있어 겨우 6세 때인데 어머니께서 열병을 앓자, 함께 병을 앓듯이 하시고 한 숟가락의 밥과 한 줌의 음식이라도 반드시 어머니께 나아가 대접하였다. 점차 나아지자 어머니께서 병고 때문에 밥을 드실 생각이 없자, 공이 억지로 드시게 하였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배우기를 좋아하였지만 아버님께서는 기운이 약하고 나이가 어리다며 비록 배우려는 의지가 간절하였지만 가르침을 주지 않았는데 눈물을 흘리며 배우려 그 몸에 찬 패물을 풀지 않고 동년 배들 가운데 먼저 학업에 뛰어든 친구들과 공부하여 날로 진전이 있어 10여 세에 벌써 여러 사람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내었고 과시에 연이어 장원을 차지하여 명망이 날로 퍼져 나갔다.
병인년 겨울, 아버님 상을 당하여 지극히 슬퍼하여 거의 정신을 잃게 되었고 기사년에 상복을 벗었다. 추시(秋試)에 1등으로 뽑혔고, 경오년 봄 회시(會試)에 또 1등이 되었으며, 전시(殿試) 김대명방(金大鳴榜) 가운데 병과 3인에 올라 성균관 학유와 성주교관의 벼슬을 받았다.
계유년에 만기를 채우고 청주교관의 벼슬을 받았지만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을유년에 학유에 올라 호송관으로 사신을 이었고 병자년에 학록과 학정에 오르고 무인년에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을 받고 성균관 전적에 올랐다.
기묘년에 천거로 옥당에 선록되어 예조좌랑의 벼슬을 받았고 여름에 제천현감에 나아가 신사년 8월 돌아와 홍문관 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 기사관의 벼슬을 받고 수찬에 올랐으며 사간원 정언의 벼슬을 받고 다시 수찬의 벼슬을 받았으며 병조좌랑으로 옮겼다가 다시 옥당으로 돌아왔다.
계미년 봄에 천거되어 이조좌랑의 벼슬을 받았으나 어머니를 보살피려고 고향으로 돌아와 만기를 채우고 수찬의 벼슬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겨울에 부교리에 올랐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갑신년 봄에 부교리의 벼슬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겨울에 부교리 벼슬을 받고 자주 교리와 부응교에 올랐으며 을유년에 응교에 오르고 가을에 옥당으로 들어가 전한에 올랐으니 이것은 주상께서 특별히 여러 신하를 포한 것과는 다르게 특별한 것이다.
병술년에 사헌부로 옮겨 집의, 지제교 겸 교서관 교리의 벼슬을 지내다가 잠시 의정부 사인의 벼슬을 받았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전한의 벼슬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종부사 첨정의 벼슬을 받았다. 또 집의의 벼슬을 받고 응교를 받았으며 기축년 여름에 전한을 받았고 가을에 청주목사 겸 춘추관 수찬관으로 나아가 보임하다가 임진년 봄, 적의 변고가 일어났을 때, 병고의 몸으로 보은 지방에서 충보군(忠報軍)이라는 명칭으로 왜적을 토벌할 600여 명을 규합하여 상주에 주둔하는 적을 막아 호서지방에서 노략질을 할 수 없게 하였으니 많은 사람들이 공의 공적을 치하하였다.
계사년 5월에 어머니께서 병환으로 청주 주안현에서 돌아가시자, 윤달 11월에 동생 김홍미와 함께 흩날리는 영기(靈旗)를 붙들고 사여를 반환하여 아버님 자리 옆에 장례를 지내고 보은 종곡리에 영전을 설치해 놓고 봉헌하다가 다음 해 갑신년 6월 돌림병으로 위중하더니 29일에 돌아가시게 되니 향년 55세였다.
공은 순박하여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웠으며 맑고 대범하면서도 소탈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겉으로 꾸미지 않았고 사람을 대할 때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으며 환한 모습은 따뜻한 봄 햇살 같았고 밝은 광택은 얼음에 비친 것 같았다.
재산이 있지 않아 적은 음식이라도 오직 어머님의 명을 따랐고 관리생활 20여 년동안 기뻐하며 즐겁게 어머님을 모셨다. 매년 길일이나 좋은 일이 있는 날이면 꼭 연세 드신 친척들을 모셔 큰 잔치를 베풀어 함께 모여 음악을 연주하니 잔치를 보러 모인 사람들이 문을 꽉 메웠다. 동생을 사랑으로 대하여 혹시라도 다칠까 염려하였고 성장하여도 형제가 한 이불에서 잠을 자고 큰 누이를 마치 어머님 같이 섬기니 형제자매 간에 정성과 성의가 넘쳤다.
집안의 재산은 종과 노비들에게 많이 주었고 친족에 화목하여 급히 구원할 일이 있으면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님께서는 “우리 아들이 매사에 모두 나의 마음을 본받았으니 참으로 효자구나.”라 하였다.
처음 한림원 6품에 오르고 또 천거되어 옥당에 선록되었으나 지극 정성으로 외직을 생각하여 제천현감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 맑기가 물과 같아 조금도 욕심이 없었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머니가 자식을 보호하는 것 같이 하였으며 관리를 대할 때는 은혜로써 대하여 관리와 백성들에게 매질을 하지 않으니 모두 그 덕을 사모하고 그 정성에 감복하였다.
고을은 본래 배운 사람이 적은 탓으로 공께서 고을 사람들 가운데 배우려는 사람을 뽑아 직접 가르치고 관리에게 지급하는 녹봉을 주었으며 현 사옥에 글을 써서 새기고 그들을 다스렸다.
남쪽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그 앞을 남당(南塘)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당나라의 재상인 진무의 숙흥야매(夙興夜寐)의 가르침을 따온 것이니 이것으로 생도들에게 가르침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공은 매번 공휴일에도 홀로 말을 타고 나아가 배우려는 선비들과 함께 강론하시고 교육에 힘쓰는 모습이 퍼져 나가니 이것은 공의 힘으로부터 문학을 숭상하는 기풍이 생겨난 것이고 공께서 임기를 마치고 떠난 뒤 고을 사람들은 선정비를 세워 칭송하게 되었다.
공께서 떠난 뒤 고을의 크고 작은 사람들이 모두 놀라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으니 친척을 대하는 듯 하였고 제삿날 초하루에 제수를 갖추어 선정비 아래에서 제사 지내는 사람이 많았다.
또, 부고를 하니 수백 리 밖에서 이르고 청주 사람들 역시 모두 쌀과 콩을 가지고 장례를 치를 수 있는 제수품으로 도우니 사람들의 정성을 얻은 경우에 있어서 옛날에는 드문 사실이었다.
임금을 섬길 때는 아첨하지 않고 거짓으로 속이지 않으며 강론할 때에는 그 언론에 힘썼는데 모두 경서에 의거한 것이고 사기를 증명하여 토론할 때에 지식을 말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임금께서 그 참되고 터놓고 얘기할 만 하다고 하였다.
공의 성품은 지혜롭고 어질었으며 시비와 사정(邪正) 사이에 이르면 분명하고 의연하게 경계를 범하 지 않았다. 임오년에 재상 소재 노수신이 아버님 상을 당했을 때 장사를 지낸 후 서울로 돌아왔을 때, 병으로 몸이 쇠약하니 초상에 고기 먹는 것을 권하였는데 공은 홀로 “상사에 관한 일은 큰 뜻이므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니, 어떤 사람들은 임시의 조치도 알지 못한다고 비방하였으나 지식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이 옳다고 하였다.
공은 어머님 연세가 많아 항상 돌아가실까봐 염려하여 병술년 봄 집의(執義)로서 임금을 모시는 자리에서 상주제독으로 근무하면서 월급으로 노모를 모시고자 한다고 하니, 임금께서 가상한 생각이지만 상주제독으로 삼을 수 없어 인근 수령으로 발령을 내었다. 그러다가 얼마 되지 않아 전조(銓曹)로 돌아왔다. 그 해 겨울에 상소를 올려 군으로 나갈 것을 요청하고 무인년 겨울에 또 소를 올리자 인근 수령으로 발령을 내니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님을 살피게 되었고 전한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공의 덕성과 행실은 조정과 재야에서 모두 칭송받고 있었으나 60살을 넘기지도 못하고 돌아가시고 지위는 시강에 그쳤으니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공이 돌아가시자 사람들이 ‘선인(善人)이 죽었다.’라 하였고, 임금께서는 경연에서 “아무개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시어 “이미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하자 지난 날을 돌이키며 추모하였다고 한다. 공은 다방면의 책을 읽었고 한번 보면 저절로 기억하였다.
계유년 이후에는 심경, 근사록, 소학 등의 책을 좋아하였고 역학에 심취하여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꼿꼿이 앉아 공부하였다.
글을 좋아하여 바른 것과 진심됨에 힘을 쏟았고 벼슬을 탐내지 않고 본래의 뜻에 공부를 두어 편안히 산수를 사랑하여 승려의 산을 빌려 백화산 기슭에 고요히 정자를 만들고 매일 그 곳을 오가며 사담(沙潭)이라 이름을 짓고 산택(山澤)을 당호로 삼았다. 이것은 주역의 손상(損象) 괘에서 취하였는데 분함을 징계하고 욕심을 막는다는 의미이다.
공이 돌아가신 뒤, 공을 칭송함이 그치지 않았으니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도 흉보지 않았고 모두가 “아무개는 선인(善人)이다.”고 말하였다. 공은 별제 이천의 딸에게 장가를 가 2남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일찍 죽었고 둘째 아들은 유학을 업으로 삼았는데 익위사 부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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