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4권

충효로 길이 남을 김축(金軸)ㆍ영달(永達) 부자

빛마당 2016. 3. 29. 21:14

충효로 길이 남을 김축(金軸)ㆍ영달(永達) 부자

곽 희 상


 자고로, 남아(男兒)의 도리란,

“세상에 남아로 태어나 싸움터에 나아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

“싸울때는 물러서지 않으며, 싸우다 패(敗)하여 시체가 말 가죽에 쌓여 돌아 오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야 한다.”

“싸움에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진정한 남아(男兒)라면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라고, 항상 남아(男兒)의 도리를 강조하였다.

때는 1592년(선조 24)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왜적은 급기야 4월 25일 상주성을 함락시키고 고향인 상주 함창, 문경이 왜적의 수중에 들어가 매우 위급한 처지가 되었다.

이러한 시국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손가? 공(公)은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켰다.

“나라가 존망(存亡)하는 위험한 이 때를 당하여 내 혼자만의 안전을 바라고 피란이나 다닐 것인가?”

하면서, 향리와 문중을 쫓아 다니면서 장정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우리 모두 저 잔학무도한 왜적을 무찌르자”

“이 길 만이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하고 부모를 구하는 길이니라.”

“우리 조국을 쳐 들어 온 외적은 바로 왜적이라네.”

“저 잔학 무도한 왜적들을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뭐가 그리 어려울 손가?”

“힘이 없어도 남아로 태어났다면 우리 모두 왜적을 무찌르세.”

라고, 외쳤다.

 이 시기만 하여도 태평성대를 누려온 시기라 전쟁을 모르고 살아 온 순박한 백성들인데다가 무기라야 고작 칼과 창 정도이니 아무리 일사보국(一死報國) 충의가 하늘을 찌른 듯하여도 조총(鳥銃)으로 무장한 왜적을 감당하기에는 애시당초 무리였으리라!

그러나, 나라를 생각하고 임금님을 위하고 백성들을 위할 진대, 의병을 부르짖고 힘을 모으자고 외쳤으나 성과가 없었다.

 이에, 공(公)은 홀로 호남지방의 전장으로 달려 갔다. 그 곳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막하에 군관(軍官)이 되었다.

“장군님! 저를 써 주십시오.”

“귀(貴)는 누구신가?”

“저는 상주에 사는 축(軸)이라는 사람입니다.”

“어찌하여 이 곳으로 왔는가?”

“왜적이 영남지방을 집어 삼키고 약탈과 만행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하여 소문에 호남지방은 괜찮다기에 단숨에 달려 왔습니다.”

“장군님! 제발 저를 써 주십시오.”

그리고는, 무릎을 꿇었다.

 이어, 무관들로 하여금 병사로서의 평가가 있고 난 후에, 이순신 장군 휘하의 군관이 되었다.

그 후, 걸망포(乞望浦) 해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걸망포 해전은 1593년 5월 9일 전투이며, 이순신 장군의 제6차 출전 중의 한 전투였다.

6차 출전은 견내량 작전이라고도 하는데, 1593년 5월 7일부터 5월 10일까지 미조항-사량-당포-걸망포-견내량전투로 왜적의 진입을 차단하는 전술이었다.

(公)은 이후로 몇 차례의 해전에 참여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 공(功)으로 용양위(龍驤衛) 호군(護軍, 정2품)으로 승계하였다.

그리고는, 문열공(文烈公) 김천일(金千鎰)장군의 진중으로 옮겨 뛰어난 전략으로 함안ㆍ남원 등지에서 역전 고투(力戰苦鬪) 끝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 진중에서 장열한 전사를 하였다.

시체를 수습할 길이 없어 혼(魂)을 불러 고향인 공검면 중소리 소공산(所孔山)에 장사를 지냈다.

어릴 때부터,

‘남아로 태어나서 나라를 위해 죽는 일이 가장 떳떳한 일이다’

라고, 한 공(公)은, 뜻대로 나라를 위해 죽어 혼(魂)만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렇듯 그가 나라와 임금님과 백성을 위하여 신명을 다 바쳐 충성을 하였다.

(公)은 본관이 함녕김씨(咸寧金氏)이다. 중시조(中始祖)는 덕원군(德原君) 종제(宗悌)의 21세손이다.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2세는 세순(世珣)으로 성균진사시에 장원을 하였으며, 선산군(宣山君)에 봉해졌다. 3세 록(祿)은 문과에 들어 문하시랑 평장사 이부사사 겸 순문사를 역임하였고, 성순군(成順君)에 봉해졌다. 4세 군찬(君璨)도 문과에 들어 문하시랑, 공부시랑을 역임하고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졌다. 5세 지(砥)이고, 둘째 아들 6세 효신(孝信)은 남원부사, 병조판서를, 7세 사조(思祖)는 병부상서를, 8세 인완(麟琓)은 대제학을, 10세 요(饒)는 함녕군(咸寧君)에, 15세 병룡(丙龍)은 진안현감을, 16세(8대조) 세보(世寶)는 사헌부 장령을, 7대조 치(錙)는 사헌부 지평을, 6대조 사(泗)는 은진현감을, 5대조 처성(處誠)은 훈련원 봉사를, 고조 미(徵)는 무과급제, 증조 여생(麗生)은 사헌부 감찰을, 조부 인손(仁孫)은 사온서 직장을, 부(父) 응시(應時)는 통훈대부 행 함안군수 겸 진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通訓大夫 行 咸安郡守 兼 晋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이다.

(公)은 덕원군의 21대 손으로, 정부인 청주이씨(淸州李氏)와 혼인하여 슬하에 4형제를 두었는데, 맏 아들인 영달공(永達公)은 지평파로서 현 세대를 이어 오고 있다.

묘소는 함창 서면 즉, 공검면 중소리 소공산(所孔山)에 초혼장(招魂葬)으로 장례하였다.

사적(事蹟)은,『여지승람』과『창의록』,『충무공 난중일기』에 실려 있다.

<난중일기> 병신년(1596년) 1월 4일자 일기를 보면,

4일(신미) : 맑음

새벽 2시쯤에 첫 나팔을 불고 날이 새어 배를 띄웠다. 이여념이 와서 진중 소식을 물으니 모두 여전하다고 했다. 오후 3시쯤부터 가랑비가 보슬보슬 뿌리기 시작했다. 걸망포(통영군 용남면)에 이르니 경상수사 권준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우후는 먼저 배에 왔으나 취해서 인사불성이었다. 곧 자기의 배로 돌아갔다. 송한련 등이 말하기를, 청어 천여 두름을 잡아서 널었는데, 내가 간 동안 잡은 것이 모두 1천 8백여 두름이나 된다고 했다. 비가 몹시 퍼부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이 어두워지자 떠났는데, 길이 질척거려 넘어진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기효근, 김축이 말미 받아서 돌아갔다.

(公)의 아들 영달(永達, 1591~1636)은 나이 다섯 살 때 아버지의 참변을 당했다.

영달의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청주이씨(淸州李氏)는 왜적을 피해 공검면 지평리의 뒷골 대나무 밭에 숨어서 살았다.

“너의 아버지는 나라를 위하여 참된 죽음을 당하셨다. 다만 유해를 수습하지 못한게 한(恨)이 된다. 너는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이어 받아 뒤를 따르는 것이 충이요, 효이리라.”

어린 아들 영달을 키우면서 아버지의 장한 죽음을 되새겨 주었다.

엄한 어머니의 교훈을 받으며 자란 아들 영달은 나라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마음으로 앉을 때나 누울 때는 왜놈의 나라인 왜국을 향하지 않고 왜놈식의 물건을 쓰지 않을 뿐 아니라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하면서 아버지의 남긴 뜻과 어머니의 엄한 교훈을 받들고 충효를 행할 생각에 사로 잡혔다.

항상 나라의 원수와 아버지의 한을 풀기 위해 밤낮으로 몸과 마음을 닦던 중 소식이 있었다.

다름 아닌 북녘의 오랑캐가 1636년(인조 14)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켰다.

그리고 듣기를,

한양(漢陽)이 오랑캐에게 점령되자 인조(仁祖) 임금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란하였다니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였다. 1636년 12월 16일에 인조는 납서(蠟書)로 각 도(道)의 군사를 부르고, 근왕병(勤王兵)을 소집한다는 전갈이 도착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영달 공(永達公)은 집안 사람들과 작별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드디어 때가 왔도다.”

하고는,

“임금님의 치욕과 아버지의 원수를 왜적에게 갚지 못함이 철천의 한이더니 이제 오랑캐가 또 이 나라를 어지럽히니 어찌 이대로 참고 있겠는가? 이 한 몸 바쳐 나라와 어버이에게 신하와 자식된 도리를 다 하겠노라.”

고, 외쳤다.

그리고는 우선 향리의 장정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임금이 계시는 곳으로 향하였다.

경상도 근왕병은 경상도관찰사 심연(沈演)의 지휘로 조직되었다. 1937년 1월 2일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 허완(許完), 경상우도병마절도사 민영(閔栐)을 선봉으로 삼아 진군하였다. 이들은 1월 2일 남한산성 동남쪽 40리 지점인 무갑산과 등리봉이 마주보는 쌍령(雙嶺)에 도착하였다.

영달 공(永達公)은 우병사 민영(閔栐)의 진영에 합세하였다.

이어 1월 3일 청군과 일대 접전을 벌였다. 포수들에게 소량의 화약(1인당 2냥)이 배분되었다.

이후 화약이 떨어 진 것을 확인한 청군은 순식간에 덥치자 좌병사 진영이 무너지고 말았다.

청군은 곧바로 우병사 진영을 공격하였다. 우병사 군은 다가오는 청군을 향하여 사격을 가하였으나, 우병사 군도 화약을 2냥만을 지급하였으므로 이내 화약이 떨어졌고, 또한 급하게 화약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불붙은 심지가 화약 더미에 떨어져 진중에서 커다란 폭발이 발생하며 사상자가 나 일시에 조선군의 진영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윽고, 이를 놓칠세라 청군이 쇄도하니 우병사 군 역시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붕괴되고 말았다,

영달 공(永達公) 또한, 울분을 삭이면서 전장을 누비고 다니면서 분전하였으나 근왕병으로 출전한 우병사들과 더불어 장열한 최후를 맞았다.

역시 시체를 수습할 길이 없었다.

아! 아! 통탄할 일이로다.

하늘도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에는 시체를 찾지 못하고 혼(魂)을 불러 와 상주시 공검면 지평리 뒷산 기슭에 장사(葬事)를 지냈다.

어버이의 뜻을 따라 나라를 위함이 어찌 이다지도 같을 수 있단 말인가? 부자의 혼(魂)을 불러 같은 날 장사했으니.....

예로부터 충효의 극치는 한 집안에 한 사람 혹은 한 마을에 한 사람도 나기가 어렵거니와 한 가정에서 부자(父子)가 충과 효를 다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거룩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하겠다.

결국, 나라에서는 1881년(고종 18)에 이르러, 두 부자의 충효를 기리어 아버지에게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호조판서(戶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그 아들에게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 당상) 장악원 정(掌樂院 正)을 증직하였다가, 고종 계미년(1883, 고종 20)(贈)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兼)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공검면 지평리 후산에 있으며,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백천조씨(白川趙氏)이다.

고향인 공검면 지평리에 정문(㫌門)을 세우도록 명하여 두 분의 충효를 영원히 기리고 있다.

당초의 건물은 현재의 충효각에서 동쪽 고갯길에 세웠으나 허물어져 결국 옮겨 지었는데 1978년 군비 290만 원과 후손 부담 250만 원으로 정화하였다. 비각에 2기의 비(높이 2m, 폭 45cm)를 세웠다.

오른쪽에는, 증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행 용양위 호군 함녕김공 축지각(贈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行龍驤衛護軍 咸寧金公軸之閣)이,

왼쪽에는, 통정대부 승정원 우승지 겸 경연참찬관 행 장악원정 함녕김공 영달지각(通政大夫承政院右承旨兼經筵參贊官行掌樂院正 咸寧金公永達之閣)의 비가 세워져 있다.

영달 공의 모자(母子)가 피란하여 살던 대나무 밭에는 첨죽재(瞻竹齋)가 세워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흠모와 칭송을 더하게 한다.

【참고문헌】

1.『상주시사(尙州市史)』

2.『상주의 얼, 상주군, 1982.

3.『함창현지(咸昌縣誌)』

4.『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5.『충무공 난중일기(忠武公 亂中日記)』

6.『여지승람(輿地勝覽)』

7.『함녕김씨 세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