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문(詩文)과 함께한 청절지사(淸節之士) 월봉(月峯) 고인계(高仁繼)
이 종 섭*
고인계(高仁繼, 1564~1647)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字)는 선승(善承)이고, 호(號)는 월봉(月峯)이며, 본관(本貫)은 개성(開城)이다. 예문관 직제학 거(距)의 6세손으로 조부(祖父)는 주부(主簿) 윤종(胤宗)이고, 부(父)는 전력부위(展力副尉) 경운(慶雲)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큰아버지인 흥운(興雲)에게 입양(入養)되었는데 입양모(入養母)인 박씨(朴氏)를 모시고 임진왜란을 치르는 중 피난의 어려움 속에서도 양모를 극진히 봉양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160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 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의 학유(學諭) 및 박사(博士)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 동인으로서 북인에 가담하지 않자 이 때문에 연서찰방(延曙察訪)으로 좌천되어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성균관전적(典籍)·형조좌랑(刑曹佐郞)·형조정랑(刑曹正郞)·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예안현감(禮安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공조정랑(工曹正郞)·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관직을 그만두고 상주(尙州)·영순(永順)·김용리(金龍里)·죽곡(竹谷)에 월봉정(月峯亭)을 짖고, 많은 시작(詩作)을 하여 상주문화에 한 몫을 담당한 선비이다.
1645년(인조 23) 왕이 80세가 넘은 신하들에게 주어지는 가자(加資)가 있어 이때 공의 나이 81세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 되었다.
1724년(경종 4) 상주 효곡서원(孝谷書院)에 추배되었다.
봉암(鳳巖) 홍상민(洪相民, 1654~1727)이 선조의 인연으로 고한상(高漢翔)의 부탁을 받고『월봉선생문집(月峯先生文集)』서문을 지었는데, 내용에 의하면 “권간(權奸 : 권력으로 세력을 가진 간사한 신하)의 청탁을 거부하고 인조 정권에 벼슬하지 않은 고인계에 대하여 ‘청절지사(淸節之師)’라고 평하였다. 또한 시문(詩文)에 대하여 “말은 원만하고 뜻은 원숙하며, 시어(詩語)는 아름답고 의미는 담박하다(語圓而意熟 詞婉而味澹 어원이의숙 사완이미담)”라고 하였으며, “공은 관직에서 물러나 우아한 뜻으로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품행과 도의와 문장이 뛰어 나서 우리 지역의 모범이 되었다(公雅志林泉 晩益好學 行誼文章 卓然 爲吾黨師範 공아지임천 만익호학 행의문장 탁연 위오당사범)”라고 하였다.
금주(錦洲) 고몽찬(高夢贊)이 쓴 발문에는, “행실은 효성과 우애를 벗어나지 않았고, 강론 한 것은 모두 성명(性命)과 이기(理氣)에 관한 것이었으며, 말한 바는 전인들이 발명하지 못한 것들이다” 라고 하였다. 또 “문을 닫고 70여 년 책을 읽어 저술한 것이 매우 많다(杜門讀書七十年 所著述甚多 두문독서칠십년 소저술심다)”라고 한 것을 볼 때 공(公)의 성품은 깨끗하고 절재가 있으며, 많은 시문을 저술하여 여러 인사들과 교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주(東洲) 이민구(李敏求, 1589~1670)가 공의 묘지명에 “입을 열면 문장을 이뤘으나 자랑하기를 좋 아하지 않았고, 오로지 이치가 빼어난 문장에 힘썼다(矢口成章 亦不喜矜語 專務理勝 시구성장 역불희긍어 전무리승)”라고 하였다.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 1643~1719)은 발문에, 公을 “월봉 공은 타고 난 천성이 편안하고 고요하며, 취향은 높고 고상하여, 명예와 이익에는 급급해 하지 않았다(月峯高公 天姿恬靖 趣尙高雅 於名利 不數數然 월봉고공 천자염정 취상고아 어명리 불수수연)”라 하고, 또 “사람에게 어긋났지만 하늘에는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다(徜所謂畸於人 而不畸於天者非耶 상소위기어인 이불기어천자비야)”라고 하여, 인품과 학식을 높이 평가하였다.
채헌징(蔡獻徵, 1648~1726)은 발문에서, 홍여하(洪汝河)의 부친 홍호(洪鎬)와 평생지기였고, 평소 산림을 좋아하여 광해군 난정(亂政)과 정묘(丁卯)⋅병자호란(丙子胡亂) 시에 고충(孤忠)과 정절(貞節)을 드러냈으며, 깊은 학문과 독실한 행위로 영남의 뛰어난 학자였다고 평하였다.
이증엽(李增曄)이『효곡서원 봉안문(孝谷書院奉案文)』을 지으면서 상향축문(常享祝文)에 “성품의 바탕이 후덕하고 자질이 아름다우며, 행실은 높고 학문에 전념하여 훌륭한 덕의 빛은 천년토록 우러러 사모하네(質厚資美 行高學專 令德之光 欽仰千年 질후자미 행고학전 영덕지광 흠앙천년)”라고 하였다.
특히 고인계(高仁繼)는 시문(詩文)으로서 지역의 많은 인사와 교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월봉선생 문집을 통해 보면 시가 많은데, 벼슬길에 환멸을 느끼고 임천에 덕을 감추려는 심회를 읊거나 흘러 가는 세태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시가 많음이 눈에 띈다. 먼저 <남귀도중(南歸道中)> 3首 중 첫째 수를 보면,
世事翻雲覆雨間(새사번운복우간) 세상 일은 구름 날리고 비 쏟아지는 사이인데
名韁能有幾人間(명강능유기인간) 명리에 고삐 잡혀 몇 사람이나 한가한가.
長腰恥向權門折(장요치향권문석) 늘 허리 권문 향해 꺾기를 수치로 여기고
堪笑淵明晩賦還(감소연명만부환) 도연명 늦게사 귀거래사 읊조렸음을 비웃네.
라고, 읊었다. 권문(權門)에 아첨없이는 환로가 열리지 않는 세상, 월봉은 도리어 그리 함을 수치로 여기고 환향해 버렸다.
<강둔팔경(江遯八景)> 중 <노음행우(露陰行雨)> 詩에서는,
半空銀竹暎雲衢(반공은죽영운구) 반공에 은죽(銀竹:소나무)은 구름 거리에 비치는데,
山色朦朧乍有無(산색몽롱사유무) 산 빛이 몽롱하여 있다가도 없어지네.
近日三農霓望苦(근일삼농예망고) 근일에 삼농(三農:平地農.山農. 澤農)은 무지개 바라기도 괴로니,
願將時雨遍寰區(원장시우편환구) 원컨대 때 맞춘 비 온 천지에 내렸으면.
이라고 읊어, 농시를 잃을까 봐 걱정하고 있으며,
우음(偶吟) 詩에서도
浮生役役百年間(부생역역백년간) 부생이야 고생 고생 백년 간 인걸
幾許時忙幾許閒(기허시망기허한) 몇 때나 바빴으며 몇 번이나 한가했던가.
不是身兼家國責(불시신겸가국책) 몸은 비록 가국(家國)에 책임 진것 아니나,
自然人事日相關(자연인사일상관) 자연히 사람의 일이 날로 상관되네.
라고 읊어 隱居(은거)에도 絶俗(절속)할 수 없는 선비의 심회를 토로하였다.
사담(沙潭)을 그리며 지은 詩에,
沙潭翁去已多年(사담옹거이다년) 사담 떠난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
蘿月松風寂寞邊(나월송풍적막변) 담쟁이 덩굴 사이로 비친 달과 솔바람은 더욱 쓸쓸하구나.
惆悵哲人今不在(추창철인금부재) 어진 사람 지금 이 자리에 없음을 슬퍼한들
爲誰重訪舊林泉(위수중방구임천) 누구를 위하여 옛날에 은거하던 이곳을 자주 찾아 오겠는가?
라고 하여, 사담(沙潭)이 떠난 뒤에 그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였다.
우연히 떠 오른 생각을 읊은 詩에는,
求榮爭利醉眼昏(구영쟁리취안혼) 영화를 찾고 이익을 다툼은 눈을 흐리게 하니
福地誰知是禍門(복지수지시화문) 복 받은 땅 누가 재앙의 문이 될 것을 알았겠는가?
顔巷一瓢眞樂在(안항일표진락재) 안자는 시골에서 한 바가지의 물에도 진정한 즐거움을 알았는데,
軒裳奚啻等浮雲(헌상해시등부운) 벼슬이 어찌 뜬 구름과
같을 뿐이겠는가?
라고, 벼슬을 버리고 시골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심정을 노래하였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떠날 때 월봉(月峯)의 송별시(送別詩)에는,
年前送客此江濱(연전송객차강빈) 전년에도 이 강변에서 송별을 하였는데
今日江頭又送人(금일강두우송인) 오늘 또 다시 이곳에서 송별을 하니,
送盡情親身獨滯(송진정친신독체) 깊은 정 다 보냈는데도 나만 유독 정이 남아 있어
春風陡覺鬢絲新(춘풍두각빈사신) 봄바람은 귀밑머리 세어짐을 문득 깨닫게 하네.
이 詩의 내용으로 보아 두 사람 사이에는 우정이 매우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석(蒼石) 이준(李埈)에게 화답한 詩에는,
人生何別不關心(인생하별불관심) 사람이 어찌 이별에 관심이 없겠는가 마는
此路山高海又深(차로산고해우심) 이 길은 산 높고 물 또 한 깊어서
宇內親朋多契闊(우내친붕다계활) 같은 하늘 아래 친구들 서로 멀리 있어 끊기니
西風揮淚大江潯(서풍휘루대강심) 서풍은 큰 강 가에 눈물을 뿌리네.
故人盃酒日沈西(고인배주일심서) 친구와 술을 나누는데 해는 이미 서산으로 기울고
去住情懷兩絶悽(거주정회양절처) 가고 머무는 정은 두 사람 모두 처량하게 하는데.
宣室召還應不遠(선실소환응불원) 궁궐에서 부를 것이 멀지 않았는데
驛梅花發待歸蹄(역매화발대귀제) 역에 핀 매화는 돌아 올 것을 기다리네.
라고, 이별의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月峯은 봄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詩로 읊었는데,
苔深窮巷客來稀(태심궁항객래희) 이끼 낀 한적한 마을에 오는 사람 드물고
山鳥聲中晝景遲(산조성중주경지) 지저귀는 산 새 울음소리가 한 낮의 해를 더디게 하네.
昨夜東風吹雨過(작야동풍취우과) 어제 밤 동풍에 비 한줄기 지나 가니
杏花初發向南枝(행화초발향남지) 처음으로 남쪽 가지에 살구꽃이 피었네.
또, 江 가의 봄 날 풍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三春抱病掩松扉(삼춘포병엄송비) 온 봄내 병이 들어 소나무 삽짝닫아 걸고
春去春來總不知(춘거춘래총부지) 봄이 가고 오는 것을 온통 알지 못하네,
今日偶然騎馬出(금일우연기마출) 오늘에야 우연히 말을 타고 밖에 나가 보니
梨花如雪柳如絲(이화여설유여사) 배꽃은 눈과 같고 버들은 비단처름 늘어졌네.
라고 읊었다.
말년(末年)에는 몸은 늙고 쇠(衰)하여 세월의 무상(無常)함을 「낙화(落花)」라는 제목으로 심경을 토로 하였다.
景物悤悤眼底催(경물총총안저최) 경치는 바쁘게도 눈을 최촉하니
梅花已謝杏花開(매화이사행화개) 매화는 이미 지고 살구꽃이 피었네,
東風似識衰翁意(동풍사직쇠옹의) 동풍은 늙은이의 마음을 알것같아
時送飛紅泛盞來(시송비홍범잔래) 때로 붉은 꽃잎 날려 술잔 위에 띄우네.
이 외에도 많은 詩文을 남겼는데,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소상(小祥) 때에 근암서원(近嵒書院) 사림(士林)을 대신하여 제문(祭文)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泰山一頹(태산일퇴) 태산이 한번 무너지니
東國其空(동국기공) 온 나라가 텅 비었네
無地承誨(무지승회) 가르침 이어 갈 곳 없으니
士林尤恫(사림우통) 선비들은 더욱 상심하였네
羹墻之慕(갱장지모) 우르러 사모하는 마음은
愈久彌深(유구미심) 오랠수록 더욱 깊으니
流光不住(유광부주) 흐르는 세월 머무르지 않고
朞月遽臨(기월급림) 기월이 급작스레 닥아오니
節物如故(절물여고) 철따라 나는 물건 옛날과 같은데
音容莫覿(음용막적) 목소리 들을 수없고 얼굴 또한 볼 수가 없어
聊薦輿誠(요천여성) 부족하나마 정성으로 주과를 다 해 올리니
敢希冥格(감희명격) 감히 흠향하기를 바라옵나이다
이 밖에도 많은 시문(詩文)을 남겼는데,『월봉선생문집(月峯先生文集)』에 의하면 정경세(鄭經世), 전식(全湜), 조우인(曺友仁), 홍호(洪鎬), 김상헌(金尙憲), 이전(李㙉), 이준(李埈), 정윤해(鄭允諧), 신집(申楫), 이희(李憘), 홍사고(洪思古), 황시간(黃時榦), 김성원(金聲遠), 이담(李憺), 전명용(全命龍)에게 화답한 詩와, 정경세(鄭經世), 고상안(高尙顔), 이준(李埈), 조정(趙靖), 류진(柳珍), 홍호(洪鎬), 정언굉(鄭彦宏), 강복성(康復誠), 정심(鄭杺), 신즙(申楫), 황시간(黃時榦)을 애도하는 만시(挽詩)와, 이이첨(李爾瞻)의 제의를 거부하고 귀향하면서 지은『남귀도중(南歸道中)』과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다가 심양(瀋陽)에 끌려간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개 삼학사피화감이유작(開三學士被禍感而有作)』을 지어 울분을 토로하였다.
이와 같이 많은 詩와 글로서 월봉(月峯) 고인계(高仁繼)의 청절한 마음을 볼 수 있었으며, 또한 여러 인사들과 교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1. 한국고전번역원(종합DB)
2. 한국국학진흥원(Ugyonet)
3.『月峯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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