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4권

경서(經書)와 예학(禮學), 음률(音律)과 문학(文學)에 통달한 송만(松灣) 김혜(金寭)

빛마당 2016. 3. 29. 21:36

경서(經書)와 예학(禮學), 음률(音律)과 문학(文學)에 통달한 송만(松灣) 김혜(金)

김 재 수

 둘러보면 울창한 솔숲에서 푸른 정기가 솟구치는 연악산 자락. 그 그윽한 산자락 안에 숨은 듯 드러난 듯 굽이굽이에 눈길을 끄는 아홉 구비에 빼어난 경치가 있으니 흔히들 이를 두고 상주 사람들은 연악구곡(淵岳九谷)이라 부른다.

 임술년 5월 25일.

 상주목사 조찬한(趙纘韓)이 말을 달려 이곳에 행차하였다. 상주 고을의 여러 어른들이 모여 빼어난 연악구곡의 아름다움을 시로 읊으며 한동안 상주목사와 더불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참으로 좋은 시간입니다만 저는 이만 공무때문에 물러나야 할 것 같습니다.”

상주목사는 공무를 처리해야 한다며 아쉬운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비가 내리려고 하는데 조금만 더 지체하심이 어떠하신지요?”

좌중의 선비들이 목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섬을 못내 아쉬워하였지만 목사는 총총히 그 자리를 뜨고 있었다.

목사가 자리를 뜨자 갑자기 계곡 저편으로부터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더니 이윽고 비가 마구 뿌리기 시작했다.

“허허, 이 비가 오늘 연악 고을을 걸어 잠그고 행차를 머무르게 하는 구려.”

“그렇소이다. 이런 기회가 어디 자주 있습니까? 이왕 모였으니 우리 모두 마음을 열고 격식이 없이 어울려 시회를 여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함께 모인 15명의 상주 어른들은 연악서당에 앉아서 주고받는 이야기가 끝이 없이 이어졌다. 그것은 비록 격식이 없이 어울리는 뜻에서 나왔으나 서로가 권면하는 것은 서로 경계하고 바로잡아 주는 뜻이 아닌 게 없었다.

 그리고 이들은 옛 사람들이 모여 이어가며 쓴 시를 본떠서 서로가 시를 이어짓기(聯句)로 하였다.

 이렇게 연악서당에 모여 시로 화답하며 글을 지은 15명의 선비 가운데 경서와 예학은 물론 음률과 문학에도 능했으며, 나라가 위급할 때는 의연하게 창의하여 의병활동으로 나라를 지킨 선비 한 분이 계셨으니, 이 분이 바로 송만(松灣) 김혜(金寭) 선생이시다.

 선생은 1566(明宗 21 丙寅)년에 태어나 59세 되던 1624(仁祖 2. 甲子)년 1월 29일, 풍기군수로 계실 때 돌아가셨다.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회중(晦中), 호는 송만(松灣) 또는 송계(松溪)이며 아버지는 공조좌랑(工曹佐郞) 수길(綏吉)이시다.

 선생은 서애 류성룡의 제자로, 1590(선조 23)년 증광 진사시에 2등으로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 상의군 의병 좌막과 창의군 의병의 문서유사로 활약하였다. 임진란 후에 진위사(鎭慰使)가 되었고, 1604년 선무원종 2등 공신에 올랐다.

 1605년(선조 38)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한(典翰)을 지내고, 도감낭청(都監郞廳), 호조좌랑(戶曹佐郞), 대구판관(大邱判官), 군수(郡守)가 되었다. 풍기 군수 및 함경도 도사(都事)를 비롯한 7곳의 도사를 지냈는데 군수가 되어 가는 곳마다 훌륭한 정치를 하여 많은 치적이 있었다.

 선생은 경서(經書)와 예학(禮學)에 통달하였으며, 음률(音律)과 문학(文學)에도 능통하였고, 교육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선생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상주시 외서면 관동리(깃골)에 송암서당(松巖書堂)을 영천자 신잠 목사가 상주에 18서당을 세울 때 이 서당을 세웠으며, 더욱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우곡 송량 ․ 창석 이준 ․ 우복 정경세와 더불어 건립하여 교학의 기풍을 진작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선생의 후진 양성에 대한 관심은 교육 발전 방향이란 내용으로 임금께 올린 상소문이 송만유고(松灣遺稿)에 기록되어 있고, 그 원본이 현재 상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송만일기(松灣日記), 송만유고(松灣遺稿), 용사일기(龍蛇日記), 송만문집(松灣文集), 용학구해(庸學 句解)를 남겼으며 묘소는 상주시 외서면 가곡리 일명 오가실에 있다.

 현재 상주 귀호사(龜湖祠)에 받들어 모시고 제향 되고 있다.

 선생은 많은 글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앞서 소개한『연악문회록(淵嶽文會錄)』에 실린 글과 같은 해 낙동강을 중심으로 지은『임술낙강범월시(壬戌洛江泛月詩)』에 들어있는 두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연악문회록(淵嶽文會錄)』이란 지금의 상주시 지천동 용흥사와 갑장사가 자리한 연악산(淵嶽山) 자락 정상에서 서쪽 방향으로 계곡물이 흘러 내려오는 곳에 아주 빼어난 경치가 있는데 남계 강응철은 이곳의 십리 계곡을 연악구곡(淵嶽九谷)이라 이름하였다. 이 연악구곡(淵嶽九谷) 가운데 2곡에 해당되는 사군대 옆에 연악서원(淵嶽書院)이 있다. 이 연악서원(淵嶽書院)에서는 16세기부터 상주지역 문회(文會)가 성대하게 이루어 진 곳으로 유명한데 이곳을 찾던 분들은 바로 후계(后溪) 김범(金範) 선생을 비롯한 상산사노(商山四老)로 이들에 의해 본격적인 문회가 이루어 졌고, 그 후에도 월간 이전 ․ 창석 이준 ․ 남계 강응철 ․ 우복 정경세 등의 상산사호(商山四皓)가 주축이 되어 문회가 더 활성화 되었다. 특히 이『연악문회록(淵嶽文會錄)』은 상산사호(商山四皓) 가운데 남계 강응철 선생이 주도하여 강연과 시를 짓는 모임을 가졌는데 그 당시에 지은 시는 모두 친필로 기록하고, 창석 이준이 서문을 써서 만든 시모음집을 말한다. 이는 현재 전하는 상주 선비들의 최초의 공동 시집이라고 볼 수 있다.

『연악문회록(淵嶽文會錄)』은『임술낙강범월시(壬戌洛江泛月詩)』처럼 선생이 돌아가시기 2년 전인 임술년(1622년)에 이루어 진 것으로『연악문회록(淵嶽文會錄)』은 그해 5월 25일에 모두 15명이 참여하여 만든 시 모음집이다. 연악연구(淵嶽聯句)는 이준 ․ 정경세 ․ 이전과 선생을 비롯하여 여러 명이 참석하여 서로 이어가면서 시를 지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두 행 한 연씩을 돌아가면서 이어 지은 시를 말한다.

 모두 5언 40구의 시를 지었는데, 선생도 이 연악연구(淵嶽聯句)에 두 회에 걸쳐 앞 사람의 글에 이어 지었다.

 이와 같이 연악연구(淵嶽聯句)를 지은 후 다시 서로가 운을 받아 시를 짓기로 하였는데 마침 비가 내렸다. 그래서 모인 회중은 이곳에서 이틀을 머물면서 여러 친구들이 행차하여 무리지어 다닐 때 나이도 잊고 친구들 사귐에 격식을 버린다. 라는 뜻으로 군행망후선붕식기구검(群行忘後先朋息棄拘撿)이라는 글자로 운을 나누어 각자 한 수를 지었다. 선생이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勝界曾留約(승계증유약) 절경인 이곳은 일찍이 약속을 남긴지라

吟鞭着我先(음편착아선) 말을 몰고 와 보니 내가 먼저 도착했다네.

壺觴連日話(호상연일화) 술 마시며 계속해서 정담을 나누고

風雨對床眠(풍우대상면) 비바람에 상을 마주하여 잠을 잤다네.

生世皆同地(생세개동지) 세상에 태어나 같은 지역에 살면서

持心不愧天(지심불괴천) 마음가짐은 하늘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지.

相期各努力(상기각노력) 각자가 노력하기를 서로 기약해서

莫遺愧前賢(막유괴전현) 선현께 부끄럽지 않도록 하세나.


 이 시에는 선비들과의 아름다운 사귐을 중요시 하면서도 당시 어지러운 현실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꼿꼿하게 정진해야 할 선비의 위상을 은연중에 표현하기도 하였다.

 다음은『낙강범월시(洛江泛月詩)』(일명『임술범월록(壬戌泛月錄)』이라고도 함)에 나타난 선생의 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낙강범월시(洛江泛月詩)』란 임술년(壬戌年, 1662, 광해군 14) 7월 16일, 낙강(洛東江)에서 가진 낙강범월시회(洛江泛月詩會)에서 얻은 시를 책으로 모은 것을 말한다. 이 시회에 참석한 선비는 모두 상주(尙州) 사람으로서 모두 23명이었다.

이때 시를 짓기를 전적벽부(前赤壁賦)의 머리글자인 임술지추(壬戌之秋) 칠월기망(七月旣望) 소자여객(蘇子與客) 범주유어적벽하(泛舟遊於赤壁下) 청서래수(淸徐來水)라는 23자를 운자(韻字)로 하여 5․7언 배율로 모인 이들이 운에 맞추어 지었는데 선생의 운자(韻字)(月)자였다.

선생이 지은 5언 40구의 시는 다음과 같다.


월(月)자를 얻어서

東坡百世士(동파백세사) 동파는 백세의 선비

逸氣橫海鶻(일기횡해골) 빼어난 기상은 해골선을 채웠네.

昔在壬戌歲(석재임술세) 옛 임술년(1082년) 해에

赤壁泛秋月(적벽범추월) 적벽 강에 가을 달을 띄웠네.

一片聳氷輪(일편용빙륜) 한 조각 얼음 같은 달이 솟으니

萬里分毫髮(만리분호발) 만 리의 터럭조차 분명히 보이네.

扁舟凌萬頃(편주능만경) 일엽편주 만경창파에 넘실거리니

怳入瓊瑤窟(황입경요굴) 황홀하기 신선굴로 드는 듯하였네.

而今安在哉(이금안재재) 오늘은 어디에 있는가

江水流不歇(강수유불헐) 강물은 흘러 그치지 않네

千載誦遺詞(천재송유사) 천년에 남긴 글을 외우니

勝遊猶恍惚(승유유황홀) 좋은 놀이 오히려 황홀하네.

良辰屬闀荗(양진속항술) 좋은 때는 임술년에 속해

行樂不可闕(행락불가궐) 즐김이 없을 수 없었네.

白頭會耆英(백두회기영) 백발의 기영들이 모였는데

翠壁拼突兀(취벽병돌올) 푸른 절벽은 날개 치듯 우뚝하네.

風景尙如舊(풍경상여구) 풍경은 여전히 옛날과 같은데

昔人奈己歿(석인나기몰) 옛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 어이하리.

入夜泝流光(입야소유광) 밤들어 달빛 받은 물결 거슬러 오르니

酒蘭興起發(주란흥기발) 술은 거나하고 흥은 절로 이네.

有如御風翰(유여어풍한) 마치 바람 탄 날개라도 단 듯하니

何羨凌波襪(하선능파말) 어찌 물 위를 걷던 버선을 부러워하랴.

是時雨初霽(시시우초제) 이 때 비가 처음 개이니

蟾光出復沒(섬광출복몰) 달빛이 났다가 숨었다 하네.

寥亮數聲笛(요량수성적) 높고도 맑은 몇 가락 피리 소리

高情更發越(고정갱발월) 높은 정취 더욱 솟구치게 하네.

醉興政陶陶(취흥정도도) 취흥이 정년 도도하니

世事堪咄咄(세사감돌돌) 세상일 쯧쯧 혀 찰 만하네.

餘日付盃酒(여일부배주) 남은 날 술잔에 부쳐

名塗謝簪笏(명도사잠홀) 명예의 길 벼슬을 사양하리.

堪笑宦遊子(감소환유자) 벼슬길에 노는 이 비웃나니

風塵長汨汨(풍진장골골) 풍진에 늘 파묻혀 버림을

泊舟步汀沙(박주보정사) 배를 정박하고 물가 모래 밟으니

宿鳥驚林樾(숙조경림월) 자던 새가 숲속에서 놀라네.

相携咏而歸(상휴영이귀) 서로 잡고 읊조리며 돌아오니

風露淸澈骨(풍로청철골) 바람과 서리가 뼈 속까지 맑게 하네.

高談雜今古(고담잡금고) 높은 담론은 고금에 미치고

歸酒尙不渴(귀주상불갈) 술독 술은 아직도 다하지 않았네.

此間無一吟(차간무일음) 이 사이에서 한 번 읊지 못한다면

數依金谷罰(수의금곡벌) 도리 없이 금곡주로 벌하리.


 이 시를 읽으면 당시의 낙동강 밤 풍경이 더 넓게 펼쳐진 파노라마 그림처럼 다가온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은 누구나 다 볼 수 있지만 시인은 그 보름달을 한 조각 얼음 같은 달 이라 묘사함으로 시각과 촉각적 이미지를 통해 세상의 혼돈스러운 일이야 혀를 차면 그만이라는 마음 비움과, 명예의 길인 벼슬길마저 한갓 풍진으로 여기는 초연함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달의 밝음을 만 리의 터럭조차 분명히 보이네. 라는 과장법을 사용하여 달을 통하여 자신의 정신세계를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

 위의 시 외에도 이미 선생은 선조 40년 1607년(丁未年) 9월에 상주목사 김이경(金而慶) ․ 장령 조비중(趙비仲) ․ 수찬 이숙평(李叔平) ․ 도사 전정원(全淨遠) ․ 군수 조득화(趙得和) ․ 진사 황공직(黃公直) 등과 함께 도남서원에 모여 낙강에 배를 띄우고 지은 낙강연구시(洛江聯句詩) 60구 가운데 선생이 모두 25구를 지은 기록도 있다.

 선생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솔선하여 상의군 의병 좌막과 창의군 의병의 문서유사로 활약하면서 충성스럽게 나라를 지키는 선비의 역할을 다 하였으며, 나라가 평안할 때는 지역 선비들과 함께 학문적으로 또는 좋은 작품으로 교유하면서 후학(後學)들의 학문 증진을 위해 헌신하였음을 찾아 볼 수 있다. 앞으로 선생의 문집을 국역하여 널리 편다면, 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나라 사랑 정신과 시 정신, 그리고 학문적 사상, 교육자로서의 선구적 삶을 보다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