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 전쟁에 의병으로 나선 조광벽(趙光璧)
조 희 열
조광벽(趙光璧, 1566, 명종 21∼1642, 인조 20)의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여완(汝完), 호는 상주읍의 북쪽에 있는 북계 위에서 사셨기 때문에 북계(北溪)라 했다. 부친은 조수복(趙壽福), 모친은 서흥군(瑞興君) 전주(全州) 이춘억(李春億)의 딸인데 그 사이에 4남 중 장남으로 상주 왕산리의 자택에서 태어났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에게 배웠고, 사서(沙西) 전식(全湜)과는 시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려 살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상종했다. 어떤 때 냇물이 불어나 건널 수가 없으면 각각 평상을 하나씩 갖다 놓고 앉아서 시내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눌 정도였고, 사서 선생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서 그 처자(妻子)를 공에게 부탁할 만큼 신의가 있어 절친한 관계였는데, 정 우복(鄭愚伏) ‧ 이 창석(李蒼石)과 강론(講論)하며 교유했다.
북계 선생이 27세 되던 해 임진란이 일어났다. 이때 상주지역에서는 1592년 7월 26일 채유희(蔡有喜)가 아우 유종(有終)과 이홍도(李弘道)와 함께 그의 외숙인 청주 사람 이봉(李逢)을 모셔와 그가 데려 온 산척(山尺)들과 함께 은척의 황령사에서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상주에 온 이봉은 7월 30일 황령사에서 산척 17, 8명과 함창과 문경 등지의 사족(士族) 40여 명, 궁수(弓手) 30여 명으로 창의군을 조직했다.
이 창의군에 북계 선생이 참여했는데『송만집(松灣集)』‘용사사적략(龍蛇事蹟略)’은 이 당시의 일을 잘 전해주고 있다. 즉, ‘대장으로 이봉, 상주 소모관으로 정경세, 용궁 소모관으로 강주, 함창 소모관 권경호, 문경 소모관 신담, 중군 곽수인, 별장 김각, 도청 송량과 채유희, 군기유사 강응철·홍약창·조광벽·이홍도·조극신, 군량 유사로 전식·조정·홍수약·정발·곽수지, 문서유사로 조우인·김광두·정윤해·김혜·기과유사로 최정호·정월, 기고관으로 채유종, 행수군관 김광폭, 병방봉사 김사종, 전봉장 윤식, 돌격장 이축, 척후장 신응윤으로 창의군을 조직’하고 있음을 전한다.
창의군은 임진왜란 중 70여 회 싸우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는데, 이 사실은 임진년에 황령사의 창의대장 이봉(李逢)이 초유사 학봉 김성일(金誠一)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가칭 창의대장(倡義大將)인 이봉(李逢)이 사람을 놓아 보고하는 사무(事務)입니다.
합하의 고유(告諭) 격문(檄文)을 받아보니 아아! 장대하십니다. 합하(閤下)의 위국지성(爲國之誠)이시어 한 하늘 밑에서 무릇 혈기가 있는 자라면 뉘라서 감격하여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의 변란을 합하께서 이미 예언하셨고 오늘날의 슬픔을 합하께서 이미 예지하셨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봉(逢)은 한낱 소인입니다. 지략과 작은 기량도 하나 없이 산중으로 피난하여 목숨을 연장시키고 있었습니다. 한데 함창에 사는 선비인 봉(逢)의 생질(甥姪) 채유희(蔡有喜)·유종(有終) 형제가 상주·문경·용궁 그리고 같은 현(縣)의 사류(士類) 몇몇 사람들과 뜻을 같이하여 수백의 의병을 모으고 봉(逢)에게 왕실(王室)의 후예(後裔)라 하여 재삼 추천하기로 대의소재(大義所在)로 회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금월〔1592년 7월 30일〕초2일 함창의 황령사에 집합시켜 전 정자 정경세(鄭經世)로 상주 소모관(召募官)을 삼고, 전 찰방 권경호(權景虎)를 함창 소모관을 삼고, 진사 강주(姜霔)를 용궁 소모관을 삼고, 유학 신담(申譚)을 문경 소모관으로 삼았습니다. 또 생원 곽수인(郭守仁)으로 중군(中軍)을 삼고 진사 김각(金覺)으로 별장(別將)을 삼고, 전 참봉 송량(宋亮)·유학 채유희로 도청(都廳)을 삼고, 진사 강응철(康應哲)·홍약창(洪約昌)·유학 조광벽(趙光壁)·이홍도(李弘道)·조극신(趙克新)으로 군기유사(軍器有司)를 삼고, 진사 전식(全湜)·유학 조정(趙靖)·홍수약(洪守約)·정발생(鄭撥生)·곽수지(郭守智)로 군량유사(軍糧有司)를 삼고, 진사 조우인(曺友仁)·유학 김광두(金光斗)·정윤해(鄭允諧)·김헌(金憲)으로 문서유사(文書有司)를 삼고, 진사 최정호(崔挺豪)·유학 정월(鄭樾)로 기과유사(記過有司)를 삼고, 채유종(蔡有終)으로 기고관(旗鼓官)을 삼고, 충순위 김광복(金光輻)으로 행수군관(行首軍官)을 삼고, 사복 김사종(金嗣宗)으로 병방봉사(兵房奉事)를 삼고, 윤식(尹湜)으로 전봉장(前鋒將)을 삼고, 무사(武士) 이축(李軸)으로 돌격장을 삼고, 신응윤(申應允)으로 척후장을 삼고, 그 나머지의 유사(儒士)와 무부(武夫)들도 각각 부별로 분담시켜 적을 토벌할 계획을 세웠으나 군대라야 근근한 오합지중(烏合之衆)으로 모든 일이 문란하며 기계(器械)를 갖추지 못하고 군량을 마련할 수 없으니 지극히 안타까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와 같이 못난 사람으로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만 애군(愛君)과 우국(憂國)의 정성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것이기로 이제 유격(諭檄)을 돌리는 마당에 이러한 조치가 있었으니 바라옵건데 합하께서는 가르쳐 주소서.」
라고, 했다.
조정(趙靖)의『임란일기』 1592년 5월 20일 기록에도 나타나는데,
「… 듣자하니 전일 군사들이 모여 왜적 몇 놈을 사살하고, 외남면 사람들도 대여섯 놈을 사살했는데 그들 거개가 우리나라 사람으로 도리어 왜적의 무리에 들어가 왜놈 복장으로 변복을 하고 우리 백성을 침해하는 것이 왜놈보다 더 혹심했다고 한다. 고을 안에 남아있는 잔당은 수십 명도 되지 않건만 아직도 격멸하지 못했으니 탄식할 일이다. 낮에 뒷산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니 함창·옥산·은척·우곡·음곡 등 여러 곳이 왜놈들의 분탕으로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덮었다. …」
라고,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왜놈 행세를 하는 사람들과 왜놈들의 분탕질에 대해 5월 초부터 정자(正字) 이준(李俊), 한림 정경세, 유학 송량 등 10여 명이 안령에서 상주의 사인(士人)들을 중심으로 향병을 모아, 이들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비록 소수의 적이라고는 하지만 오랜 전투 경험과 조직 및 우수한 병기를 가진 왜적의 조직적인 분탕질에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조정은『임란일기』1592년 6월 15일 일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듣자니 공성·외남·청리에 사는 김사종(金嗣宗)·권서(權署)·노함(盧椷) 등이 각기 군인들을 모아 그 수가 거의 천사오 백인데 그들이 왜적에게 강력히 항전하여 적을 살상한 것이 수백 여 명이나 되어 끝내 그 마을에 들어가 노략질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자 군인들이 제멋대로 각각 흩어져 굳게 지키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왜놈들은 그 틈을 타 졸지에 밀려들었다. 김사종은 말을 달리며 왜놈 7, 8명을 사살한 뒤 화살이 떨어진데다가 적의 철환까지 맞고 뛰어나왔다. 앙심을 품은 왜놈들은 흉악한 짓을 멋대로 자행하여 사족들이 많이 살해되었다. 진사 김유성(金有聲), 그의 아우 유진(有振)ㆍ유문(有聞) 및 그의 부친과 진사 신봉서(辛鳳瑞), 진사 정국성(鄭國成), 황유원(黃裕元), 이서평(李叙平)의 부모도 모두 살해되고, 부인ㆍ처자 등 20여 인이 사로 잡혔다. 내한 정경임(鄭景任)은 적탄에 맞고 겨우 죽음만은 면할 수 있었지만 거의 모두 해를 당했고, 언룡(彦龍), 정인서(鄭璘瑞)와 그의 아들 정건(鄭建)도 살해되었다고 한다. …」
이런 일이 있고 난 뒤부터는 상주에서 가까운 이곳에서 살면서 왜적에게 항전하기란 더 이상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이 조직을 계승하여 9월 13일 경 고모담(鈷鉧潭)에서 김각(金覺)을 대장으로 하여 상의진(尙義陣)을 조직했는데 소모관으로 정경세, 이전, 이준, 송량이 맡고, 장서를 이준이 겸임하고, 영병으로 김사종, 노함, 김광복, 좌막으로 26분을 배당했는데 이때 좌막(佐幕)으로 참여하여 왜적의 후방보급선을 끊어 임진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한 몫을 했다.
40세인 1606년(선조 39) 병오(丙午) 11월 6일 북계 선생은 식년시(式年試)에 진사(進士) 1등 5위로 합격하고, 1626년(인조 4)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제수되었고, 후에 감찰(監察)로 제수되었다.
1612년(임자 광해 4년) 1월 28일 진위 현령(振威縣令), 1626년(인조 4)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제수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소모(召募) 담당이 되어 창석(蒼石) 이준(李埈)과 월봉(月峯) 고인계(高仁繼), 현감(縣監) 남진휘(南振輝), 우연(愚淵) 김지복(金知復), 묵계(黙溪) 조희인(曺希仁), 국원(菊園) 김정견(金廷堅), 백담(白潭) 조우신(趙又新), 자신의 아우 세 분과 자식과 함께 창의(倡義)했는데, 벌써 이괄의 난이 평정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해산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선생은 평생을 임진란과 병자호란 등 국내외의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마다 나라를 위해 솔선하여 전장에 나섰다.
1637년(인조 15) 4월 12일 학행(學行)으로 전라도 나주에 있는 청암도 찰방(淸巖道察訪)으로 제수받고, 윤 4월 2일 임지로 출발하기 위해 서울로 출발했다. 왕에게 사은숙배(謝恩肅拜)를 하기 위함이었다. 이때부터 다음 해 2월 27일 벼슬을 그만 둘 때까지 간략하게 상황만 쓴 일기가『청암일기(靑巖日記)』이다.
『청암일기(靑巖日記)』의 내용을 보면 청암도 찰방으로 제수받고, 검호<儉湖, 공갈못>를 지나고, 새재<梨峴>와 쌍령(雙嶺)을 거쳐 서울<都城>로 들어가 임금에게 인사드린 다음 나주 임지로 향하고 있다. 매일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벼슬을 그만 둘 때까지 거의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의 일들이 연속적으로 수록되어 있어서 그간의 상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역(驛)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나 찰방이 만날 수 있는 상황들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라 할 수가 있어 자료적 가치를 짐작할 수가 있다.
병자호란 당시 경상도 병사(兵使) 민영(閔栐)과 허완(許完)이 패전했던 쌍령(雙嶺)을 지나면서 심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637년 윤 4월 7일〕… 이현(梨峴)을 넘어 도성(都城)으로 들어가다 쌍령을 거쳤는데 두 병사(兵使)가 패전한 곳은 비참하여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애석하구나, 우리나라의 장교(將校)는 어찌 이다지도 병법(兵法)을 몰랐던가!
오목한 골짜기에 포진했다가 마침내 병졸을 적에게 죽게 했으니 허 모(許某)는 비록 만 번 목을 베어도 결단코 죄를 응징할 수가 없을 것이다.
슬프다, 민 장수(閔將帥)는 거의 첩보(捷報)를 올릴 뻔 했는데 도가(都哥)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협조하지 않아 먼저 붕괴하자 적은 그 틈을 타 허점을 찔러 돌진해 왔는데 하늘도 돕지를 않아 불길이 화약에 이르러 군병(軍兵)을 덮치니 4만 여 사람이 순식간에 썩은 생선 꼴이 되고 말았다. 오직 저 역적 놈 도상전(都尙全)이란 놈은 군정(軍政)을 사정(私情)에 따랐으므로 나라의 기강(紀綱)이 해이(解弛)하여 공론이 준행(遵行)되지 않으므로 인심이 울분을 터뜨렸으니 애석한 일이다.」
라고, 회고했다.
이렇듯 나라를 전란에서 구하고자 애를 썼지만 벼슬살이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던지 청암도 찰방 자리도 1년도 되지 않아 사임을 했는데, 그의 마음을 옥과현감 민선계(閔善繼)에게 보내는 시「기설산수민(寄雪山倅閔)」을 통해 헤아려 볼 수가 있다.
그대 생각 하룻밤만이 아니지만
이 밤 따라 갑절이나 생각이 나네.
고을살이로 함께 떠돌다가
또 동서(東西)로 헤어졌네.
놀랜 새는 일정한 둥지 없고
서리 닢은 때 없이 지노라네
언제나 다 함께 돌아가
상주(尙州)에서 신선 생활하려나.
상주에서 일찍이 함께 살았더니
강남에서 백발이 새로워지네.
그대는 고을의 원님이 되고
나는야 갈길 남은 나그네여라
세상에 공헌하기엔 힘이 없으니
늙어 감만 놀래져 한숨짓노라
그대 설산(雪山) 나의 단역(丹驛) 가까운 거리
소식 자주 전하길 아끼지 마세
중국 요동(遼東)의 정영위(丁令威)가 신선(神仙)이 되기 위해 술법(術法)을 배우기 시작한 천 년 만에 학(鶴)으로 화하여 화표주(華表柱)에 날아와 앉았다는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지은 시(詩)「관학영회(觀鶴詠懷)」는,
청암(靑巖)에 사는 이 늙은이의 탄식은
하얀 머리카락 검은 머리 없도다.
길에 가득한 여러 사람 쳐다보고
나란히 서 있는 뭇 아전 맞는 도다.
비로소 듣자니 현학(玄鶴)이 찾아옴은
저 요동(遼東)의 백암(白巖)에서 이니
하늘이 선금(仙禽)을 보내 타이르심은
나에게 숨어사는 정(情)을 깨우침이리라.
청암도 찰방으로 부임한 지 3개월 경「기궁(棄宮)」을 지었는데
꽃은 피고지고 봄 일이 많은데
사람은 오가느라 세상길 바쁘구나
가소롭다, 이 몸 죽을 날도 멀잖은데
어찌 구구하게 고향가지 않으리
라고 하여, 벼슬에 뜻이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1640년(인조 18)에는 종묘서 직장(宗廟署直長)으로 옮겼다.
남겨진 글들이 화재로 모두 타버렸는데 후손 규진(奎鎭)이 나머지 글들을 모아 엮고 정종로가 서문을 쓴『북계선생문집(北溪先生文集)』이 있다.
여러 편의 전하는 시(詩) 중에는 연악(淵嶽)에서 상주목사 현주(玄州) 조찬한(趙纘韓)이 주최한 모임에서 창석(蒼石), 우복(愚伏), 월간(月澗), 송만(松灣), 남계(南溪), 지연(止淵), 북계(北溪), 우연(愚淵), 도천(道川), 낙애(洛涯), 낙연(洛淵)이 지은 연구(聯句)가 있다.
서(書)는 주로 사우(師友)와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로 대부분이 병자호란 때 쓴 것이어서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된다.
잡저의「책(策)」은 인재 등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실을 예로 설명한 글이다.「청암일기(靑巖日記)」는 1637년 청암도 찰방으로 있을 때의 일기로 거듭된 전쟁으로 인한 국토의 피폐함과 백성의 참담한 생활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부록의「사우록(師友錄)」은 유성룡 문도들의 명단으로 당시 영남학자들의 계통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1642년 상주 남쪽 봉두리(鳳頭里) 자택에서 77세로 돌아가시고, 1786년(정조 10) 상주(尙州)의 연악 서원(淵嶽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연악서원은 1702년(숙종 28)에 창건하였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 1820∼1898)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毁撤)되었으며, 1900년 3월에 단소(壇所)를 설립하였고, 1987년 서원을 복원하고 2005년 강당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 단소, 4칸의 강당, 3칸의 고직사(庫直舍)가 있고,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유허(遺墟)만 남아 있다.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된다.
고직사는 향사 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며, 고자(庫子)들의 거처이기도 하다.
이 서원에서는 박언성(朴彦誠), 김언건(金彦健), 강응철(康應哲), 조광벽(趙光璧), 강용량(康用良)의 덕행과 업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4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상주의 인물 > 상주의 인물 제4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를 이은 충성 규천(虯川) 전극항(全克恒) (0) | 2016.03.29 |
---|---|
우천학맥의 으뜸인 수암(修巖) 류진(柳袗)선생 (0) | 2016.03.29 |
경서(經書)와 예학(禮學), 음률(音律)과 문학(文學)에 통달한 송만(松灣) 김혜(金寭) (0) | 2016.03.29 |
시문(詩文)과 함께한 청절지사(淸節之士) 월봉(月峯) 고인계(高仁繼) (0) | 2016.03.29 |
소학을 실천한 선비 일묵재 김광두(金光斗) (0) | 2016.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