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4권

우천학맥의 으뜸인 수암(修巖) 류진(柳袗)선생

빛마당 2016. 3. 29. 21:47

우천학맥의 으뜸인 수암(修巖) 류진(柳袗)선생

김 철 수

  상주 <우천학맥>의 시초인 선생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기는 벼슬하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서 자랐다. 자질이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겸손 단정하였다. 효성도 지극해서,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는 슬픔을 겪었으나, 어른같이 상기(喪期)를 마친 후에 다시 상경해서는 아버지 류성룡의 이종조카(姨從姪)인 김치중(金致中)에게 글을 배웠다.

 그리고 16세 때 현감 권채(權菜)의 딸(權正禮)과 혼인하였다. 아버지 서애(西厓) 선생은 이 셋째 아들의 남다른 학문적 자질을 보고,

“너같은 자질을 얻기 어려운데 퇴계의 문하에서 배우지 못함이 한스럽구나.[如爾美質難得 恨未及退陶(여이미질난득 한미급퇴도)]”

라고, 탄식했다.

 선생이 24세 되던 해에 맏형 여(袽)가 28세로 요절하고, 26세 때는 아버지 서애(西厓) 선생이 별세하셨으며, 1612년에는 중형(仲兄)마저 요절하는 바람에 집안의 어려운 살림살이를 혼자 돌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선생은 면학(勉學)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늘 책상 앞에는,

“온종일 가만히 앉아 있기는 쉬워도 잠시 동안이라도 마음을 붙잡아 두는 것은 어렵다.[靜坐終日易 操存一刻難(정좌종일역 조존일각난)]”

라는, 글을 써 붙이고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았다.

22세에 선생은 향시(鄕試), 29세에는 증광진사시(增廣進士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31세 되던 해인 1612년 2월에 김직재(金直哉) 등이 모반한 소위 해서무옥(海西誣獄)에 연루되었다는 날조된 혐의로 하회에서 체포되어 경옥(京獄)으로 압송되었다.

허무맹랑한 무고 때문에 서울까지 압송된 선생은 목에 칼을 쓰고 포박을 당한 채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중죄인의 신세가 되었으나 평소의 강직한 성품대로 언동(言動)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런 선생을 두고 광해군(光海君)은 대신들과 의논하였는데, 대사헌 이이첨(李爾瞻)과 사간 유인길(柳寅吉)이,

“류진(柳袗)은 바로 류성룡(柳成龍)의 아들인데, 또한 영남의 유명한 집안의 선비입니다. 그가 잡혀 올 때 이미 여역(癘疫)에 걸려 있었고 중도에서 병이 가중되었는데도, 그대로 구류하였으므로 증세가 매우 위중하여 목숨이 오늘 내일 한다고 합니다. 만일 죄가 사죄(死罪)에 이르지 않는다면 일찍 처치하여 옥중에서 원통하게 죽는 것을 면하게 하는 것이 의당할 것 같습니다.”

라고 아뢰자, 광해군은,

“류진(柳袗)을 보방(保放)하였다가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 추문하게 하라.”

고 전교하였다.,

광해 4년(1612) 6월 22일에 선생은 원정(原情)을 냈는데,

“신의 아비 류성룡(柳成龍)이 항상 저를 훈계하실 적마다 충효(忠孝) 두 글자를 벗어나지 않았고, 임종 때에 시를 지어 아들을 경계하기를 너희들을 권면하고 또 권면하노니, 충효 밖에 다른 사업은 없다.고 하므로, 제가 항상 그 말을 가슴에 새겨 맹세코 돌아가신 아비의 경계를 잊지 않았습니다.

반역의 대변이야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감히 염두에 두었겠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죽어서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신 아비를 지하에서 뵙겠습니까.

김직재 부자는 저와 먼 친척이 되는데, 아비가 생존하였을 때 역적의 괴수를 개, 돼지처럼 보아 집에 들어오면 온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고, 밖에 나가면 남들에게 말하였으니, 역적의 집에서는 이로 인하여 필시 신의 아비를 원망하였을 것입니다. 저는 역적 괴수의 얼굴도 성명도 모르는데, 제가 진사방(進士榜)에 장원으로 올라 성명이 민간에 퍼졌으므로 역적의 괴수도 필시 알고 무고하였을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류진은 곧 성룡(成龍)의 아들이요, 성룡은 선조(先朝)의 훈구(勳舊)이니 내가 진(袗)에게는 차마 못하겠다. 놓아 보내 그 아비의 영혼을 위로하게 하라.”

하였다.

당시 사관(史官)들은, 류진은 명문가의 자제인데다가 이름이 나 있었고, 또 대신 가운데 변명해 주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왕이 특별히 용서하였다고 했다.

이 일 때문에 서울까지 따라온 중형(仲兄) 단의 옥바라지와 특히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의 도움으로 억울함을 벗어나서 하회로 돌아온 선생은 옥연정사(玉淵精舍)에 거쳐하면서 학문을 닦는 한편 임자년(壬子年)의 옥고(獄苦)를 일록(日錄)으로 정리한『임자록(壬子錄)』을 초하고, 유년기와 장년기에 겪었던 전란의 참화와 옥고를 정리한『임진록(壬辰錄)』과『임자록(壬子錄)』을 합편하였다.

『임진록(壬辰錄)』은 선생이 열한 살 되던 1592년(선조 25)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류성룡은 왕을 호종해 서행(西行) 길에 올랐고, 선생은 종매부인 이문영(李文英)을 따라 황해도 수안을 거쳐 서울로 되돌아오기까지의 열한 달 동안에 겪은 피난 생활을 소상히 적은 것이다.

이『임진록』의 끝에는,

“병이 들어 누워 있으니 어느 때 죽을는지도 모를 일이니 후손들에게 임진란의 아픔을 되새기게 하고, 내가 그렇듯 신고(辛苦)하여 죽다가 살아났음을 전하기 위하여, 일가 사람이라도 이야기삼아 보도록 하기 위하여 이를 기록하여 둔다.”

라고, 지은 뜻을 밝혔다.

이『임진록(壬辰錄)』은 국문학 사상 자조적(自照的) 수기문학의 백미(白眉)로서 높이 평가될 만큼 귀중한 국문학 유산으로 꼽히고 있다.

인조(仁祖)가 즉위하던 해인 1623년 4월 22일의 조강(朝講)에서 인조(仁祖)가 정경세(鄭經世) 선생에게,

“경은 이번에 새로 영남에서 왔는데, 민간에 무슨 병폐가 있던가? 그리고 영남은 평소 인재의 부고(府庫)라고 일컬어져 왔으니 필시 덕행을 갖춘 인물이 있을 것이다. 누구인지 듣고 싶다.”

하니, 정경세 선생이 아뢰기를,

“과거에 있었던 병폐는 이루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이제 새로 교화를 펴는 때를 맞아서 이미 모두 제거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말씀드릴 일이 없습니다.

인재에 대해서는 신이 본도에 있었으면서도 견문이 넓지 못해서 갑자기 하나하나 꼽아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현저하게 드러난 자로는 장현광(張顯光)을 첫손에 꼽을 수 있는데 이미 거두어 기용하셨고, 그 다음으로 문위(文渭)란 이가 있는데, 정인홍(鄭仁弘)의 득세시 두문불출하고 독서만 하며 전혀 왕래하지 않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류진(柳袗)이 재주와 덕행이 있는 아름다운 선비인데 어제 정사에서 수령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류진은 바로 고(故) 정승 류성룡(柳成龍)의 아들입니다.”

하였다.

이러한 정경세 선생의 추천으로 선생은 인조 2년(1624)에 형조정랑을 제수 받았는데 이런 파격적인 등용은 고상(故相) 류성룡(柳成龍)의 아들이고, 반정 초에 학행으로 뽑혀 고을 원이 되었으며, 치적이 도내에서 최고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뒤 선생은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과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다.

선생은 공적인 일에는 늘 강직하고 시시비비가 분명했으며, 정론을 굽히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인조 12년 선생이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때 장령(掌令) 강학년(姜鶴年)의 상소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이 터지자,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조정대신들이 벌떼같이 주장했으나, 선생은 혼자 강학년(姜鶴年)이 언관으로서 군왕에게 직언하여 직책에 따르는 책임을 다한 점을 들어 극구 옹호했다.

그리고 그 해 11월 10일에는 강학년(姜鶴年)을 옹호하는 글을 올리고 선생은 파직을 청했다.

“신이 강학년(姜鶴年)의 상소에 대해 양사(兩司)가 논한 것을 보니, 임금을 무시하고 부도(不道)하다는 말까지 하였습니다. 학년의 사람됨에 대해 신이 아직 보지 못해서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는 못하나, 그의 소장만을 가지고 살펴보면 경솔하게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나, 자상하며 온순한 태도는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산골에 사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사체를 모른다 하더라도 임금에게 고한 말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백이와 엄연년의 일은 더욱 인용해서는 안 될 것을 인용한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상께서는 선모후(先母后)의 명을 받고 난을 바로잡아 인륜이 다시 밝아졌고 종사가 다시 편안해져 해가 중천에 뜬 것과 같이 대의(大義)가 밝게 드러났습니다. 무왕(武王)과 곽광(霍光)은 처했던 시대가 각각 달라 오늘날에 빗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지경에 이르도록 멋대로 지껄여댔으니, 물의(物議)가 준엄하게 배척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의 본뜻을 헤아려 볼 것 같으면 어찌 딴 뜻이 있었겠습니까. 상의 은혜를 받은 것에 감격해서 말을 다 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을 뿐 재량할 줄 몰라서 이러한 데에까지 이른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의 본의가 아닐 듯 싶으며, 더구나 신하에게 있어서 극도의 죄목인 임금을 무시하고 부도(不道)하다는 것으로 죄안(罪案)을 삼는 것은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옛날의 밝은 임금들은 말 때문에 죄를 주지는 않았습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임어하신 이래로 초야의 선비가 한 말이 혹 지나치더라도 으레 너그럽게 용서했으므로, 한 사람도 말 때문에 죄를 받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금번 학년의 상소에 대해 너그럽게 포용하셔서 도타운 비답을 내리셨고, 또 ‘반드시 다른 뜻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교하셨습니다.

학년의 망령된 행동이 저와 같은데도 성덕(聖德)은 이와 같으시므로, 보고 듣는 자들이 모두 감복하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신하의 도리란 지극하게 아름다운 것을 받들어 따르고 큰 덕을 찬양하여 온 세상 사람들과 후대인들로 하여금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대성인의 넓은 도량을 우러르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만약 그의 실제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따지지 않고 일체 법만 가지고 논한다면 일개 학년이야 애석할 것이 없겠지만 성세(聖世)에 있어서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의 소견이 동료들과 달라 구차하므로, 신을 파직시키소서.”

하였다. 인조는 선생의 사직을 말렸으나, 선생은 번복하지 않고 우천으로 돌아왔다.

고향 우천에 돌아온 선생은 1635년 정월에 하회를 돌아보고 수동의 선산을 참배하고 도산서원을 거쳐 돌아오는 길에 영주의 구학정(龜鶴亭)에 이르러 급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날이 1635년 정월 13일이고 선생의 나이 54세였다. 그 후 1662년에 사림이 받들어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종향(從享)하였다.

선생은 지조가 높고 맑으며 심성이 깨끗하였으며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올 때면 끼니를 잇지 못 할 때도 많았으나 늘 안빈자락(安貧自樂)하였다. 그리고 벼슬길에 오르거나 물러나 집에 거처할 때도 항상 말을 아꼈고, 고요한 가운데 옛 선비의 본보기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생활에는 항상 법도가 엄했다.

또한 선생은 대나무와 연꽃을 사랑했다. 그래서 선생은 정전고죽기(庭前枯竹記)와 분지연기(盆地蓮記)를 지어서 풍우(風雨)에 굴하지 않고 곧음을 자랑하는 그 절조를 높이 찬양했다. 이것이 바로 선생의 정신세계의 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저술로는『상례제설(喪禮諸說)』,『사례집략(四禮輯略)』,『격치설(格致說)』,『자경설(自警說)』등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