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4권

일평생 무명지를 펴지 아니한 숭정처사 - 수묵재 박성민

빛마당 2016. 3. 29. 22:08

일평생 무명지를 펴지 아니한 숭정처사- 수묵재 박성민

곽 희 상


인간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기쁘고, 즐겁고, 좋고, 나쁜 여정을 걸어 간다.

어! 저기 손가락을 굽히고 사는 양반이 걸어간다.

어디? 어디? 누굴까?

정말, 손가락을 굽히고 있네?

이때 한 어린 아이가 이 양반과 부딪쳤다.

양반은,

허허, 이 놈 조심을 해야지......

하고는,

이내 어린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무명지(無名指)를 펴지 아니한 채로......

아이를 일으켜 세우고 흙먼지를 털어주는 모습이 매우 어색하였다. 요즈음 말로 쇼(show)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일부러 구부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을의 아낙들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고는 샌님에게 무슨 곡절이 깊이 쌓여 멀쩡한 손가락을 굽히고 있을까?

모두 의문점을 안고 헤어졌다.

왜 그렇게 생활하고 있을까?

하지만, 아무도 섣불리 여쭈어 볼 엄두를 못 내었다. 근엄한 인물에 갓을 쓴 모습이 지체높은 양반네라 모두 수군거리기만 하였다.

그리고는,

다음 날 우물가에서는 샌님의 손가락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때 마침 샌님이 지나간다.

모두 두레박질을 하다가 동작을 일제히 멈추고 손가락을 관찰하였다.

무명지를 굽히고 걸어 가신다.

쯧쯧, 얼마나 불편하실꼬......

얼굴에는 나라의 큰 걱정을 다 짊어지고 있는 모습이니.......

조선조 인조(仁祖, 재위 1623∼1649, 26년)는 명나라를 섬기고 후금을 멸시한다는 친명배금(親明背金) 정책을 써 왔다. 이 때는 명나라는 망하기 직전이었고, 후금(後金)은 중국 대부분의 영토를 차치하고 세력을 키워나가는 막강한 나라였다. 조선은 서인들이 집권세력이었는데 서인들은 끝까지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쳤다.

이후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했다. 1636년(인조 14) 12월 28일(음 12.2)부터 1637년 1월 7일(음 12월 14)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청나라 홍타이지가 조선에 제2차로 침입함으로써 발발하였다. 인조는 급기야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으나 남한산성은 청군에 포위되었다. 식량이 떨어지고 전의를 상실하자 인조는 59일만에 항복하고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한 삼전도굴욕을 당하면서 오랑캐에 군신(君臣)관계에 이르렀다.

당시 조정에서는 주화론자(主和論者)와 척화론자(斥和論者)가 대립할 즈음 선생은 척화론자에 들었다.

이에 향토에서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면서 급기야 과업(科業)을 단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라가 이같이 혼란스러운데 급제를 하여 벼슬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대저, 오랑캐를 위한 벼슬을 한단 말이던가

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선생은 상주 청암(淸巖, 지금의 공검면 예주리)에 집을 짓고 수묵재(守默齋)라 편액을 걸고 은거하면서 시사(時事)에 관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는 이 때부터 평생동안 무명지(無名指) 하나를 굽혀서 펴지 아니하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 까닭을 아는 사람은 없다. 수하(手下)는 조심스러워서 묻지 못하였고, 동배(同輩) 중에서도 묻는 사람이 있어도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은, 척화(斥和)의 굳은 뜻으로 병자호란의 치욕(恥辱)을 씻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자처한 것은 아닐는지?

아! 아! 선생은,

저 오랑캐가 우리 조선을 짓밟고 급기야 인조 임금을 남한산성에서 굴복을 시키니 장차 이 나라는 어떻게 되어 갈 것인가?

내가 장수(將帥)로서 기질이 있었으면 당장이라도 오랑캐들을 쳐 부수겠건만.......

시절은 암담하도다.

동방의 예의지국(禮儀之國)이라 자처하던 조선이 오랑캐의 신하의 나라가 되었으니 이 무슨 변고이런가?

몸이 언론(言論)을 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아니하고 이름이 사가(史家)의 붓에 들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한단 말이던가?

라고, 하였다.

선생의 문손(門孫)인 산천공(山泉公) 주종(周鍾)은 손가락을 굽힌 뜻을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고 한다.

그 손가락을 펴지 못하는 것도 때가 있고, 펼 수 있는 것도 이치이다. 공이 이제 뜻은 나타내지 않고 이렇게 굽혔지만 그 가히 굽힐 수 없는 지조(志操)는 이미 초연하게 만물의 표면에 펴졌으며 만세(萬世)에 미치고 우주에 두루하여 멸(滅)하지 않으리라

고, 하였다.

이는 일생동안 분개한 마음을 참고 견딘다는 뜻으로, 세상에 살면서 절의(節義)를 지키기 위한 자신과의 약속이라 하겠다.

선생의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휘(諱)는 성민(成敏, 1603~1666)이요, 자(字)는 성수(聖叟), 호(號)는 수묵재(守默齋)로, 상주 함창(咸昌)에 거주하였다.

박씨는 본래 신라의 종성(宗姓)인데 여러 공자(公子) 중에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진 사람이 있어 그 후손이 함양을 관향(貫鄕)으로 하였으나, 세대가 멀어 중간에 실계(失系)하였다.

고려 때에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휘(諱)(善)이 있고, 고려사에 빛나는 치암(恥菴) 충좌(忠佐, 1287∼1349)는 유학(儒學)으로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 판삼사사(判三司事)이고 함양부원군으로서 시호(諡號)는 문제공(文齊公)이 있다. 조선조에 들어 공조판서(工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규(規)는 8대조이다. 그 아들 7대조 이경(而敬)은 부정(副正)이고, 그 아들 6대조 소종(紹宗)은 사직(司直)을 지내고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이 분의 아들이 행정(杏亭)(訥, 1448∼1528)이니 성주군 선남면 오도종에서 태어나 13세에 상주 이안면 이안리로 이거한 입향조(入鄕祖)이다. 음사(蔭仕)로 창락도(昌樂道) 찰방(察訪, 종6품)을 지내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선생의 5대조로서, 이안에 행정(杏亭)을 지어 남다른 교육열을 가지고 자식들에게 독특한 교육방식이 있었다. 즉 원두막에 올려 놓고 사다리를 치워 못 내려오게 하여 공부를 계속하도록 하는 지극 정성으로 아들 5형제를 모두 사마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시켰다. 대과 급제자가 한 사람만 나와도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던 점을 감안하면 실로 대단한 일로서, 우리지역에서는 고금을 통틀어 유일한 일이라 하겠다.

고조의 휘는 행정의 셋째 아들로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낸 홍린(洪麟)이고, 증조는 강(薑)으로 장사랑(將仕郞)이다. 조부는 선승(善承)이고, 아버지는 선승의 3자(子)인 영선(榮先)이고, 선생은 영선의 차자(次子)이다.

선생의 어머니는 진주 강씨로 전력부위(展力副尉)를 지낸 재(縡)의 딸로서, 선생은 1603년(선조 30) 6월 16일에 태어 났다. 선생의 배위는 삼척박씨(三陟朴氏)로 지평(持平)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증직된 여량(汝樑)의 딸이다.

선생은 천성이 절특(絶特)하여 독서를 할 때부터 옛 사람들의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문사를 함에 있어서는 의리(義理)가 청경(淸警)함을 스스로 선생으로 삼았다.

일찍이 관로에 나아 갔으나 곧 유사(有司)에게 물리침을 당하여 그 때 사람들이 그의 불우(不遇)함을 아까워 했으나 그것을 개의(介意)치 않고 오직 문을 닫고 고요히 살면서 학문연구에 잠심(潛心)하고 힘으로 실천했다.

1637년(인조 15) 삼전도 굴욕 소식을 들은 선생은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과거공부를 버리고 드디어 가솔을 데리고 청암동(淸巖洞)으로 들어가 집을 짓고 편액을 수묵재(守默齋)라 하며, 일찍이 한마디도 시사(時事)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

명나라 태조 고황제(高皇帝)의 어필(御筆)인『충효절의(忠孝節義)』네 글자를 크게 베껴서 병풍과 족자를 만들어 벽에 걸어 놓고 날마다 존모(尊慕)하면서 강화의 굴욕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병자년과 정묘년의 호란으로 세상을 피하여 뜻을 지켰으니 천하의 선비들에게 부끄럽지 아니하며 하물며 선생의 집에서 기르던 닭과 개도 감화(感化)되어 서로 먹여주고 지켜주는 수고를 하였으니 어찌 그 교화를 모른다 할 수 있단 말인가?

일명 계구사(鷄狗辭) 이야기다.

선생의 집에서 기르던 닭과 개에게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즉, 같은 어미에게서 자란 두 마리의 암탉이 각기 새끼를 기르다가, 그 중 한 어미 닭이 고양이에게 물려 죽자 남은 어미 닭이 죽은 어미 닭의 새끼까지 거두어 길렀다고 한다. 또한 선생의 집에서 기르던 개에게도 이와 똑 같은 일이 있었다.

이를 두고 신첨(申詹)이 지은 계구사(鷄狗辭)에서,


鷄兮狗兮所感者誰(계혜구혜소감자수)

닭이여! 개여! 감동된 바가 누구인가?

嗟嗟行議人不識兮(차차행의인불식혜)

아! 그의 행의(行義)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生祥下瑞獨有天翁知(생상하서독유천옹지)

상서로움을 나게 하고 내려 주시는 하늘만이 알고 있다.

不暇論古今人同不同如何兮(불가론고금인동부동여하혜)

고금(古今) 사람들이 같고 같지 않음의 여하(如何)를 논(論)할 겨를 없음이여!

嗟哉無儔(차재무주) 슬프도다. 짝이 없도다.


 라고, 하였다.

초야에 묻힌 포의(布衣)의 선비로서 명리(名利)의 길에 뜻을 끊고 사람으로서 떳떳한 도리를 지켰으니 만약, 선생이 조정에 설 수 있었다면 당연히 제현들과 더불어 항론(抗論)하여 열열(烈烈)한 자취가 역사의 기록에 빛났을 것이다. 결국 스스로를 닫고 삼갔지만 그 의로운 충의(忠義)와 숨겨진 절조(節操)는 안타까울 뿐이라 하겠다.

유감스럽게 선생의 시(詩)는 많이 전하지 아니한다.『수묵재시집(守默齋詩集)』이 실전(失傳)되어 전해오는 2수를 모두 소개한다. 먼저, 영련(詠蓮, 연꽃을 읊다)을 소개하면,


청연출어니(靑蓮出於泥) 푸른 연(蓮)은 진흙탕에서 나와도

수색거조식(秀色去雕飾) 빼어난 그 빛엔 꾸밈새가 없네.

어니불능오(淤泥不能汚) 진흙탕에서도 더럽히지 아니하고

탁탁정여식(濯濯淨如拭) 밝게 빛나는 그 잎은 닦은 듯이깨끗하네.

연사우공대(連絲又共帶) 이어진 실에는 또 꽃받침을 함께하고

단단포한옥(團團抱寒玉) 둥글둥글한 찬 구슬을 받들고 있네.

서방유미인(西方有美人) 서방(西方)에 아름다운 사람 있는데

욕기운천격(欲寄雲天隔) 붙이고 싶어도 구름 하늘이 가려있네.


 라고, 읊었다.

항상 무명지(無名指)를 굽히고 있다가 죽었으니 대체로 일생동안 분개한 마음을 참고 견딘다는 뜻을 머무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성품이 엄격하여 비록 집사람과 자제(子弟)들일지라도 감히 그 까닭을 묻지 못했으며, 혹시 사람들이 억지로 물어도 또한 응답하지 않았으니, 그가 본시 사람들에게 표시하여 나타내는 일들이 이와 같았다.

다음으로, 유감(有感, 느낌이 있어서)을 소개하면,


天下豺狼滿(천하시랑만) 세상에는 승냥이와 이리가 가득한데

干戈幾日休(간과기일휴) 전쟁은 어느 때나 끔이 나려나

窮廬元帥老(궁려원수노) 궁한 집에는 원수(元帥)가 늙고

遙塞敗軍愁(요색패군수) 먼 변방에는 패전(敗戰)한 군사가근심스럽네.

白骨黃沙暮(백골황사모) 백골이 널린 누런 모래에 해는 저물고

烟雲海水秋(연운해수추) 연기와 구름끼인 바닷물은 가을인데

無人斬月氏(무인참월씨) 월씨(月氏)를 벨 사람 아무도 없으니

誰飮左賢頭(수음좌현두) 누가 좌현(左賢)의 두개골(頭蓋骨)로 술잔을 삼을꼬.


 라고, 읊었다.

 여기서 월씨(月氏)와 좌현(左賢)은 모두 청(淸, 오랑캐)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들이 병자년에 조선을 침공한 것을 한(恨)스러워 함을 읊었다.

선생은 몇 간의 초가를 지어 사릿문을 양지를 향하게 하고 좌우에 도서(圖書)를 쌓아 놓고 마음을 가라앉혀 외우고 읽으면서 밖의 일은 간섭하지 않고 구름이 어둡고 안개에 막힌 세상 60여 년을 그 마음은 곧 삼학사(三學士) 제공과 같은 충의심(忠義心)이었지만 그 처신하는 위치가 달랐을 뿐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초야에 은거하여도 그 문장과 덕망은 향당의 추종(追從)을 받았다. 1666년(현종 7)에 64세를 일기로 하였으나 선생의 우국 충정은 남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공검면 예주리 청암서원(淸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선생을 기리는 다음의 시를 보자.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는 그의 뜻을 슬프게 생각하여 제숭정처사박공산거시(題崇禎處士朴公山居詩)를 지어 말하기를,


곡수의무로(谷邃疑無路) 골짜기가 깊어 길이 없나 의심했더니

운개별유천(雲開別有天) 구름이 열리니 별천지가 있네.

숭정일월재(崇禎日月在) 숭정의 해와 달이 있는데

하사감중연(何事坎中連) 무슨 일로 산중(山中)생활을 이어가는가?

 

 라고, 하였다.

선생의 10대손 관식(觀植)이 지은『수묵재(守默齋)선생 실기』에는, 책머리에 1929년 김세락(金世洛)이 지은 서문과 말미에 김소락(金紹洛)ㆍ권상규(權相圭)ㆍ박면진(朴冕鎭)ㆍ박관식(朴觀植) 등이 붙인 후지(後識)가 있다. 본문 처음에는 영련(詠蓮) 등 6편의 시(詩)가 있다. 부록으로 채형락(蔡亨洛)이 지은 행록(行錄)과 문손 주종(周鍾)이 쓴 행장(行狀)과 박화진(朴華鎭)이 지은 묘지(墓誌), 청암서원의 향축문 등이 있다. 또한 선생의 묘소 청룡자리에 투장(偸葬)을 하자 즉각 굴장(掘葬)을 하도록 지시할 것을 청하는 정문(呈文) 3편을 비롯하여 입암산송시사적(立巖山訟時事蹟)이 실려 있다. 유증(遺贈)으로는, 양헌(讓軒) 곽이정(郭以禎),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등 시문 8편과 추감제편(追感諸篇)에는 우헌(愚軒) 채헌징(蔡獻徵)이 지은 계구사(鷄狗辭)외 1편이 실려 있다.

일찍부터 우리나라는 오랜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많은 외세의 침입을 받아 왔다. 그러나 그 침략속에서도 나라는 굳건하게 지켜왔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굳건한 나라사랑 정신이 바로 진정한 애국자요, 선비정신이라 하겠다.

선생은 오로지 입신(立身)의 뜻을 버리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충실하였다. 항상 자신은 국가에 이익이나 도움을 주지 못함을 자책하여 자학(自虐)한 흔적이 아니겠는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 물든 요즈음 한 번 되새겨 보자.

【참고문헌】

1.『수묵재선생실기(守默齋先生實記)』

2. 채광식, 계구사(鷄狗辭),『상주문화』(제12호), 2002.

3.『상주지(尙州誌)』

4.『상주시사(尙州市史)』

5.『상주의 얼, 상주군, 1982.

6.『함창현지(咸昌縣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