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명분에 살다 간 척화충신 채이항(蔡以恒)
강 경 모
‘나랏님께서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하셨대요’.
‘왜? 무슨 일이 났나?’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와서 임금님이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란을 하셨대요.’
한 겨울의 세모에 갑자기 들려온 전쟁과 임금님의 피신 소식은, 살을 애이는 듯한 동지 섣달의 찬바람보다 더 매섭고 차가운 소식으로, 한양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영남 땅 상주까지 전해지자 모두가 놀라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할 때, 상주의 한 선비는 굳은 마음으로 분연히 일어나 집안사람인 몽선(夢善)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장병 수십 인을 데리고 임금이 피신하여 있는 남한산성으로 달려갔다.
충청 이북은 이미 적의 수중에 넘어가 낮에는 청나라 병사를 피하여 숨고, 밤에만 걸어서 임금이 계시는 남한산성에 7일을 걸려서 도착하니 청나라 병사들이 남한산성을 에워싸고 있어 가까이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함께 간 몽선은 적병에 들켜 죽음을 당하였으니 하는 수없이 발길을 돌려 경상우병사 민영(閔泳)의 진중으로 가서, 우병사와 함께 감사 심연(沈演)을 도와 청나라에 항거하였으나 얼마지 않아 인조대왕이 항복하고 화의가 성립되니 할 수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가 인조 14년 12월에 일어난 병자호란이다. 청나라의 용골대와 마부대가 이끄는 12만 대군의 선봉장이 불과 10여 일 만에 한양에 도달하고, 뒤이어 청태조 홍타이시가 10만의 병사를 데리고 내려 와, 인조대왕이 피신한 남한산성을 포위하니 피난한지 40여 일 만에 인조대왕은 성을 나와 항복하였다. 병자호란은 불과 40여 일 만에 전쟁다운 전쟁 한번 해 보지 못하고 너무나 허무하게 패배한 전쟁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임진왜란으로부터 불과 44년 만에 또다시 전란을 만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재산은 불타버려 이 강산은 또다시 도탄에 빠져 버렸다.
오봉선생은 인천채씨 명문가의 후예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인『설공찬전』을 지은 난재 채수(蔡壽)선생의 5세손으로, 부친은 증참의 천서(天瑞)와 어머니 영양남씨의 아들로 이름은 이항(以恒)이다. 자(字)는 여구(汝久)이며, 오봉(五峰)은 선생의 호이다. 임진왜란의 와중인 1596년 지금의 이안면에서 출생하시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행동의 규범이 법도에 맞고 또한 그 계획함이 크고 웅대하여 사람들이 모두 말하길 장차 큰 사람이 될 기질을 타고났다고 하였다.
성년이 된 어느 날 마을 뒷산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고 경치 좋고 공부하기 좋은 장소를 골라 이곳에다 집을 짓고 이름을 『오봉정사(五峰精舍)』라 하였다. 오봉이라는 이름은 이 산의 이름이 오봉산(五峯山)으로 여기에서 그 이름을 따서 정자의 이름을 지었으며, 선생의 호(號) 또한 이를 그대로 하여 오봉(五峰)이라 하였다.
선생은 이곳 오봉정사에서 학문 강마와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병자호란을 맞게 되었으니 이때가 선생 의 나이 40세 때이다. 병자호란은 불과 40여 일 만에 끝난 전쟁이지만 전쟁의 뒤끝은 너무나 참혹 하였다. 인조대왕이 한강나루에 있는 삼전도(서울의 송파)에 나아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땅바닥에 부딪쳐 소리를 내야하는 삼배 구고두배(三拜九叩頭拜)의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아우인 봉림대군(뒷날, 효종대왕이 됨)과 많은 사람들이 청나라의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 이때 또한 청나라와는 함께 할 수 없다고 한 척화신 삼학사(三學士 : 홍익한⋅오달제⋅윤집)와 수많은 사람들이 졸지에 부모 형제 가족과 생이별하고 포로로 끌려갔다.
오봉선생은 고향에서 비참한 이 현실을 슬기롭게 넘기기 위해 임금님에게 청나라에 대비하고, 백성들을 잘 보살필 것을 바라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거기에는 백성으로서 임금을 보필해야 하는 자세와, 잘못된 제도를 혁파하고, 청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걱정하는 10개 조목으로 된 상소문으로, 이는 참으로 나라와 임금을 걱정하는 우국충정에 우러난 상소문으로 사람들은 모두 “10조소(條疎)”라고 하였다.
또한, 인조 18년에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기 위하여 청나라에 복수하여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리었다. 이때 청나라에서는 우리 조정을 협박하여 척화파를 가려내게 하니, 견딜 수가 없어 관직에 있는 김상헌⋅조한영의 두 분과 초야의 선비인 오봉 채이항을 지목하니, 사람들이 모두 두 사람은 관직에 있으니 마땅하다 하나, 오봉선생은 초야에 있는 일개 선비이니 부당하다고 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 때가 서기 1640년(인조 18)으로, 친명의리파인, 김상헌(金尙憲), 그리고 조한영(曺漢英)과 함께 세 사람이 심양(瀋陽)에 잡혀가게 되었다. 오봉선생이 청나라로 출발하기에 앞서 임금님께 하직 인사를 드리니, 임금님께서 노잣돈과 털옷을 손수 내려주시며 조심하여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라고 당부하시었다. 이때 청나라로 함께 잡혀간 청음(淸陰) 김상헌이 심양으로 가면서 남긴 유명한 시가 있으니,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
다시보자 한강수(漢江水)야.
고국산천(古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時節)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동 말동 하여라.”
라고 하여, 당시의 어수선하고 비정상적인 세태를 풍자하였다.
오봉선생은 청나라에서 갖은 고초와 협박, 고문을 당하면서도 조선인의 기개를 조금도 굽히지 않고, 죽어 백골이라도 오랑캐의 땅에 묻힐 수는 없고, 살을 베어 포(脯)를 만들어서라도 내 나라에 돌아가 묻히겠다는 굳은 뜻을 밝혀, 조선 선비의 기상을 보여주어 보는 모든 이들이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에 당시의 사람들은 병자호란에 6명의 척화신(斥和臣)을 이야기 할 때, 청나라에 잡혀가 죽은 홍익한(洪翼漢),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의 세 사람을 삼학사(三學士)라 하며, 김상헌, 조한영, 채이항을 산 삼학사(生三學士)라고 칭송하였다. 청나라에 끌려 간지 4년, 갖은 고생 끝에 풀려나 고향에 돌아오시니 이때가 1643년(인조 21)이다. 고향에 내려와 석자의 칼을 갈아 어루만지며,「내 꼭 오랑캐의 간을 씹고 오랑캐의 가죽을 벗겨 깔고 자리라」하면서 절치부심 오랑캐에 대한 복수의 일념이었다.
이후 나라에서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않고 의리를 지킨 선생의 절의정신(節義精神)을 칭송하여 선생에게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제수하시니 이때가 1648년(인조 26)으로 선생이 청나라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오신지 5년 만이다. 벼슬에 나아가서는 내자시 주부, 목천현감, 활인서별제, 소촌도찰방, 사축서별제, 군자감주부, 석성현감, 통레원인의, 평시서령 등 서울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시면서 언제나 공정한 업무처리로 가는 곳 마다 선정을 베풀었다고 칭송을 받았으며. 특히 현종 임금께서는 선생에게 지방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었다는 칭송과 함께 표리(表裏) 1벌을 상으로 내리시기도 하셨다.
서기 1666년은 조선 현종 임금 7년으로, 선생께서 돌아가시니 수 70이시다. 영조대왕은 선생의 충절이 남다르다 하시어 이조참판을 증직하셨으며, 다시 영조 51년에는 이조판서로 증직하였으며, 선생이 돌아가신지 115년만인 정조 임금님 5년인 1781년에 선생에게 나라에서 경헌(景憲)이란 시호를 내리셨다.
由義而濟曰 景 : 의리라는 대명제를 지켰음은 景이며,
行善可紀曰 憲 : 실천한 선이 가히 표준이 됨을 憲이라 한다.
이렇게 선생의 대의명분에 대한 행동과 실천은 참으로 크나큰 귀감이 되었으며, 나라에서도 이를 칭
송하여 시호로써 그 정신을 보답하였다.
이와 같이 임진왜란에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지킨 선비들을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도 부른다.
선생은 임진왜란이라는 우리 민족 최대의 환란의 시대에 태어나시어 오직 선비로서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할 덕목인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병자호란이라는 오랑캐의 침입에 몸을 던져 항거하였으며, 나라의 부름을 받아 목민관으로서 고을을 다스림에는 오직 백성을 위하고 모든 공무를 공정히 처리하여 선행을 베푼 관리로 칭송받고 죽어서는 나라에서 시호를 내려 선생의 공적을 찬양하였으니 진실로 백성을 위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한 참다운 선비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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