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융성을 통한 상주 발전의 토대 마련과 행복 수준 강화 방안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曺 喜 烈
1. 자원이 부족한 현실 극복의 모델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자원이 부족한 나라 중 하나이다. 따라서 현실은 국민의 행복 수준을 높이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수준 높은 인적자원 육성과 함께 문화융성을 꼽고 있다.
그 중 ‘문화융성’은 ‘경제부흥’, ‘국민행복’, ‘평화통일 기반 구축’과 함께 박근혜 정부의 4대 국정기조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문화의 가치가 바로 사회 전반에 확산되어 국가 발전의 토대가 되고, 국민행복 수준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우리 상주는 옛날에 비해 시세(市勢)가 상대적으로 많이 축소되었다. 지금도 상대적으로는 시세(市勢)가 점점 약해지고 있다. 이제 그 반전(反轉)의 기회를 지금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한다.
무엇부터 시작하여 반전의 기회를 잡을 것인가? 농 · 축산(農畜産) 이 외에는 큰 힘이 될 별다른 산업 자원을 가지지 못한 상주의 현실에서 쉽게 반전의 기회로 다가 설 어떤 실마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웃한 과거의 중국과 오늘날의 중국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 상주와 똑 같이 농업을 강조해 왔던 사회주의 국가 중국이었다. 심지어 중국은 국기(國旗)에 농민을 상징하는 디자인을 넣을 만큼 농업을 중시했다. 그럼에도 문화와 국력은 상대적으로 옛날의 위치를 지키지도 못했고, 국제사회에서도 상대적으로 그 영향력이 상당히 줄어 들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G2를 자부하고, G1에 도전하고 있다. 이미 G1 국가로 자칭하고 있다.
중국이 이런 자부심을 가지게 된 시점이 언제부터였을까?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돌아서고, 그 자본 확보를 위해 농사도 짓지 못하는 아무짝에도 쓸 수 없는 불모지라고 생각한 산악 지대를 관광 자원화하고 난 이후부터이다. 홍위병을 내세워 자신들이 파괴했던 옛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인식한 이후부터이다.
중국의 과거는 어쩌면 우리 상주와 많이 닮은 면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중국의 발전 과정을 살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옛 영화를 찾기 위한 상주의 디딤 돌
상주의 자원은 농 · 축산업과 옛 역사 문화 뿐이다. 농업도 1차 산업 상태로는 상주의 경제를 상대적으로 뒤떨어지게 할 수 밖에 없다. 역사 문화 자원도 볼거리를 제공할 많은 유물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다. 전쟁이 날 때마다 전장(戰場)의 중심에 있었던 상주는 모든 문화유산이 전화(戰禍)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농업과 함께 역사문화를 관광자원화 해야 한다.
그것은 살기 좋은 상주로 거듭나기 위한 현실적 대안은 인적자원 육성과, 모든 산업과 문화의 관광자원화 밖에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돈이 있어야 뭐든 해 볼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럼에도 상주의 재정 자립도가 8.3%라는 수치가 보여주듯 상주의 경제력은 밑바닥을 헤매고 있다. 실정이 이러하니 돈을 뿌리고 갈 사람을 끌어 모아야 돈이 생길 것 아니겠는가? 사람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는 유인할 수 있는 거리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낚시를 해도 밑밥부터 먼저 던져주는데, 대형 가게가 장사를 해도 값싼 물건 한두 가지를 유인용 상품으로 내어 놓는 시대이니 말이다.
3. 사람들의 눈을 상주로 주목(注目)시키기 위하여
가. 군중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누구일까?
군중 속에서 눈에 금방 띄는 사람은 대단한 미인(美人)이거나, 엄청나게도 추한 못난이거나, 화려한 또는 별난 치장을 했거나, 언행(言行)이 특이하거나 한 사람이다. 점잖고, 학덕이 높고, 재능이 남다르고, 뛰어난 지도력을 갖추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그렇다면 도시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금방 다른 도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는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아름다운 도시로 계획을 하거나 다른 도시에 비해 별난 볼거리를 장만해야 할 것이다. 그 볼거리를 찾아내야 할 사람이 문화인들이다.
나. 가장 오래도록 친구로 하거나 데이트 할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는가?
어떤 인물에게 눈길을 빼앗겨 첫 눈에 반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오랜 친구나 연인 관계로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그 사람의 인품을 저울질하게 된다. 즉, 재능, 학식, 덕망이 있어야 한다.
그것처럼 도시도 일단 사람을 끌어들였으면 오래도록 머물게 할, 주머니를 열게 할 특징적인 내용이 있어야 한다. 한 번 찾아오고 돌아가서 ‘볼 것 없더라.’라는 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한 번쯤은 가 봐야겠더라.’라는 평이 나오게 해야 한다.
바로 이런 일을 해야 할 사람이 역사학자나 문학인과 예술인 등의 문화인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내어 놓은 연구물이나, 유물 · 유적 · 전래 이야기를 소설 등의 문학작품으로 승화 시키거나, 또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재미있는 만화나, 그림 · 사진 · 동영상 등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일어나도록 여건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자치단체의 역할이다.
상주에도 이런 일을 할 사람들이 있다. 각종 축제 때 이들이 아이디어를 쏟아 낼 수 있도록 하는 축제를 하면 그들을 모을 수 있고, 덤으로 양성할 수도 있고, 또 가장 쉽게 검증된 아이디어를 모을 수가 있다. 이런 축제야 말로 지역을 발전시키는 경제적인 축제가 되는 것이다.
축제를 이용하여 상주에 전해 오는 이야기들을 문학작품으로 표현하게 하는 대회, 상주에 전하는 문화유산이나 산업 현장을 사진으로 촬영하게 하거나 짧은 동영상으로 제작 또는 그림으로 그리게 하는 대회, 상주와 관련한 주제로 작곡을 하게 하는 대회, 이런 것들을 축제 때 할 수가 있다. 상주가 자랑으로 여기는 각종 자전거 관련 경기도 축제 때 열 수 있을 것이다.
「홍길동전」,「심청전」,「춘향전」같은 소설이나,「메밀꽃 필 무렵」같은 단편 소설 하나로, 심지어는『삼국유사』를 쓴 곳이라는 이유 하나로 널리 알려지는 도시가 있는 가하면 ‘안동역에서’처럼 인기가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유행하는 노래 하나로 분위기를 한결 더 살리는 도시도 있다. 유물도 없이 역사적 사실 하나로, 혹은 작은 저수지 하나로, 어떤 곳은 정자나, 정원 하나만 가지고도 대단위 관광객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내로다’ 하는 인물의 삶의 자취를 가지고 사람들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비록 축제 때는 아니지만 지금 상주문화원이 주관하고 있는 ‘상주전국민요경창대회’가 열악한 주위 여건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상으로까지 격상할 수 있도록 운영해 온 것을 보면 자치단체와 지역 주민들의 의욕과 열정이면 가능할 것이다.
다. 데이트로만 끝 낼 것인가?
어떤 인물의 함량이 데이트 한 번으로 끝낼 정도 밖에 안된다면 그건 좀 그렇다. 계속 인연을 이어가려면 상사병(相思病)에 걸리도록 만들어야 한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상주를 한 번 다녀간 사람이 꿈에서라도 다시 오고 싶게 해야 한다. 어쩌다 한 번 상주를 찾은 사람이 조금이라도 불쾌감을 가져서도 안 되지만, 돌아가서 한 번 더 가봤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지게 해야 한다. 인연(人·因緣) · 학연(學緣) · 지연(地緣) 모두를 이용하여 한 번쯤 상주에 인사들을 불러들였다 해도 긍정적 아쉬움을 가지게 하지 못하면 성공할 수가 없다.
과거 유명 인사들의 상주 입향(入鄕) 동기를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상주의 토성(土姓)이 아닌 각 성씨들의 입향조(入鄕祖)가 왜 상주에 반해서 상주로 와서 살게 되었는가? 그들은 세제 혜택이나 정착 지원금을 받지 않았지만 상주를 찾아온 사람들이다.
4. 이렇게 하면 어떨까?
지금부터는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어디까지나 예일 뿐이다. 필요하다면 전문가와 시민들의 의견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한 번쯤 살아 봤으면 하는 곳이 있다. 너무 인공미가 나타나지 않아 자연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마음을 끌게 하는 곳이 있다.
그처럼 우선 상주를 지나는 사람의 눈을 홀려야 한다. 상주는 2개의 국도와 2개의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앞으로는 2개의 고속도로가 더 상주를 거쳐 가게 될 것이다. 상주 출신 정치인이나 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정말 안목이 있다면, 그리고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디에서 일을 하던 여기에 더하여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고속도로를 더 설계하게 할 수도 있다. 상주와 광주를 잇는 고속도로라면 어떨까? 늘 경쟁 대상자로 비치던 두 지역이 공생관계로 관계설정을 하기 위해서라도 두 지역 정치인들이 손을 잡는다면 이것이야 말로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상주를 지나가는 사람은 더 많아질 것이다. 바로 이들의 눈을 홀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 때는 우회도로를 개설하거나 고속도로를 개설하면 장사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한 적도 있었다. 이것이야 말로 변화를 두려워하는 소극적인 자세이다. 반대로 교통이 좋으면 도시 사람들을 쉽게 불러들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새로운 장사 방법을 모색하면 안 될까?
세상은 어떻게든 변하기 때문에 오히려 빨리 적응하는 자만이 도태되지 않는다는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가. 병풍산을 미인산(美人山)으로?
이를 위해 병풍산을 미인산(美人山)으로 만들면 어떨까? 병풍산 부근을 통과하는 45번 중부내륙고속도로와 25번 국도 이용자들은 물론 ‘국립 낙동강생물자원관’을 찾는 사람들이 왠지 한 번쯤 머물다가 가고 싶은 산으로 꾸미는 것이다. 낙동강 동쪽 강안(江岸)에서 여름철이면 캠핑을 하는 사람들과 건지산 활공장을 이륙한 페러글라이더가 눈에 확 띄는 산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산을 사람들이 상주를 찾게 하는 미끼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병풍산을 단장하는 것이다.
⑴ 그러기 위해서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우선 사유지(私有地)인 이 산 일대와 산에 딸린 밭 전체를 어떠한 방법으로든 시민 전체가 합심하여 시유지(市有地)화 하거나, 산주(山主)가 만족하면서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또 이 산의 남쪽 성동리 지역, 서쪽의 헌신리와 검등 지역, 북쪽의 병성리 지역 모두와, 산 정상의 병풍산성까지 함께 문화재로 지정되면 어떨는지 검토도 필요하다.
상주의 밝은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부분이므로 개발 계획과 문화재법이 서로 상충되지 않게 착실한 준비가 필요하다.
⑵ 경상북도 기념물 제125호인 병풍산 고분군〈검등 지역〉이 45번 고속도로에서 잘 보이게 조망권(眺望圈)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나무를 무턱대고 베어 낼 수는 없을 것이므로 소나무 이외의 조망을 해치는 나무를 없애는 대신 누운 향나무 종류나 기타 조경에 필요한, 그리고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단장(丹粧)을 한다면 어떨까?
혹 고분군 전체가 도로에서 보이지 않더라도 일부만 살짝 보이면서도 보는 사람의 애가 타도록 나무와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미 개발을 한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이나 의성의 조문국 고분군 등, 이미 여러 지역이 고분군을 이용하여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으므로 후발 주자가 되는 상주는 차별성 있는 단장 방법을 찾아야만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병성 마을 뒤의 고분군도 경천대와 상주박물관 ·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을 찾는 이들을 위해 조망권을 확보해야 한다.
어찌하던 고분군의 단장은 필수적일 것이므로 외답 삼거리에서 병성 마을로 가는 길 <경천로>에 의해 잘려진 것같은 능선 끝자락의 벼락바위 부분까지 고분군과 병성 마을 뒤 고분군, 고속도로의 동쪽 위에 있는 병풍산 7부 능선에 있는 고분군과 함께 모두 정비하여 산 전체를 공원처럼 단장해야 한다.
병풍산 고분군은 상주 역사 중 사벌국시대의 문화를 보여 주는 한 부분이다. 특히 고분은 능선 아래에서 상부로 가면서 순차적으로 조성되는 특징이 있으므로 지금까지 구급 발굴한 고분보다 오히려 검등의 고분군은 병풍산 전체 고분군 중 이른 시기에 축조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또 ‘검등’이라는 땅이름은 순 우리말로 ‘크고 신성한 능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땅이름에 걸맞는 방법이어야 할 것이다.
⑶ 경북도 지정 제125호 기념물인 검등의 고분군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소쇄원 입구처럼 긴 대나무 숲길로 만들어 고분군에 도착할 수 있게 하면 어떨까? 지금도 잘 자라고 있는 대나무 숲을 그대로 이용하는 것이다.
산 한 쪽 면의 대나무 숲과 그 사이에 몇 포기 있는 녹차나무를 이용하여 ‘죽녹원’이라 이름하고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있는 도시도 있다.
입구에는 대형버스 3∼4대 정도는 주차할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할 것이다.
⑷ 산의 북쪽 병성 마을 뒤에도 고분군이 있고, 병풍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이곳을 통해 들어가는 입구는 검등과는 달리해야 할 것이다. 즉, 병성 마을은 옛 집의 형태를 살리고, 돌담길로 단장하면서 옛 우물과 동제사 터도 그대로 복원하여 주민들의 삶의 편리를 도모하면서도 옛 생활의 모습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 주변의 고분군과 산성, 낙동강과 병성천이 만나는 곳에 자리한 옛 농촌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멋진 탐방마을이 될 것이다.
이 마을을 지나 골마에서 성골을 따라 성안의 산성으로 진입하는 길은 아름다운〔소나무, 단풍이나 이팝나무, 혹은 특정 재래수종으로 꾸민〕역사 탐방로 겸 트레킹 코스로 조성하여, 검등 고분군과 병풍산의 동쪽 단애(斷崖)인 낙동강으로 연결하면 멋진 길이 될 것이다.
산의 동쪽 낙동강안(洛東江岸)에는 소나무 등의 숲이나 기타 숲으로 조성하여 치유(治癒)의 숲으로 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마을 사람들과 탐방객의 편리를 위해 마을 앞에도 주차장을 만들고, 마을 앞에는 아름다운 소나무 숲길을 조성하여 경천대나 상주박물관 또는 국립 낙동강생물자원관을 찾는 사람들이 꼭 들러보고 싶은 고즈넉하면서도 아름다운 마을로 만드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⑸ 고분군은 최소한 일부라도 발굴 조사하여 그 특징의 상세도를 역사탐방로 안내판에 게제한다면 더욱 교육적으로 효과적일 것이다. 대부분의 고분이 이미 도굴된 상태이므로 도굴 갱이 뚜렷이 드러난 고분부터 우선 수습발굴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고속도로가 관통하여 단절된 고분군이 있는 능선을 다리로 이어 고속도로의 아래 위를 서로 연결시키고, 역사 탐방로를 병풍산성이 있는 산 정상까지는 물론 낙동강 가까지 이어 놓아야 할 것이다.
이곳의 다리는 도로교통법과 상충되지 않는 범위에서 이곳만이 가지는 독특한 예술적인 감각이 나타나면서 탐방객과 함께 밤에는 산짐승도 오갈 수 있도록 설계하면 좋을 것 같다.
⑹ 산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특징적으로 조경을 해야 한다.
정읍시는 시가지에서 멀기는 하지만 하나의 조그마한 산 전체를 소나무만 남기고 정리한 다음 들국화〈구절초〉를 심고, 인공폭포를 만들고, 산책로를 내어 꽃이 피는 가을이면 전국의 사진작가와 그 가족들이 벌떼처럼 몰려들고 있다.
병풍산도 북쪽의 검등에서 병성마을 사이, 서쪽의 검등에서 성동 고개 사이, 남쪽의 성동 고개에서 낙동강 사이를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서로 다른 시기에 꽃이 피는 여러해살이 꽃이나 나무로 단장을 하고, 유적이 훼손 되지 않는 방법으로 병풍산성까지 둘러 볼 수 있는 역사 탐방로 겸 트레킹 코스로 만드는 방안을 고민해 볼만하다. 화북 야영장 앞 솔밭의 소나무 아래를 맥문동으로 단장한 것이 그 예가 된다.
그리고 낙동강 안(洛東江岸)인 동쪽 지역은 소나무 등으로 조림하여 치유의 숲으로 만드는 것은 어떨까?
조경수를 심을 때는 4계절 모두 눈길을 끌 수 있는 방안을 채택해야 한다. 장소에 따라 가꿀 수 있는 서로 다른 종류의 화훼나무도 있을 것이고, 산 높이와 지형에 따라 달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⑺ 병풍산성의 복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북쪽 골짜기는 석성(石城)이고, 나머지는 토성(土城)으로 이루어진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이므로 문경의 관문성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 올 수 있는 좋은 교육 자료가 될 것이다. 탐방객의 발이 직접 산성에 닿으면 훼손의 우려가 있으므로 산성 위로 지나야 하는 역사 탐방로는 방부목 등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다.
산성 안의 우물터는 지금도 깨끗하고 풍부한 지하수가 저지대(低地帶)를 습지로 만들만큼 많은 양이 솟아 나오고 있다. 옛 옹달샘처럼 깨끗하고 아름답게 위생적으로 복원하고, 쉼터로 마련한다면 산성을 지키는 옛 군사들의 모습을 떠 올리며, 탐방객들은 목을 축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산성 내부는 발굴조사로 옛 건물터를 찾아 복원하고, 소나무 등으로 아름다운 산성마을을 만들어 탐방객들의 휴식처, 또는 훗날 토성(土城)으로 이루어진 드라마 촬영장으로 사용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토성을 드라마 촬영장으로 조성한 곳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⑻ 병풍산에 남아있는 폐 금광(金鑛)을 이용하는 방법도 찾아봐야 한다. 강원도 정선의 화암동굴이나 문경시의 석탄박물관이 바로 폐광을 이용한 사례들이다.
신라 고분에서 많은 금제 도구가 출토되는데, 경주 인근에는 금이 생산되는 곳이 없다. 학자들은 신라 왕실에서 사용한 금의 주 생산지로 상주를 주목하고 있었는데, 근래에 와서 의성 사람들은 신라가 금을 채취해 간 곳이 의성 금성산 일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긴 금 채취 장소가 어디 한두 곳에 불과하겠는가?
⑼ 병풍산의 동쪽 낙동강 전경이 보이는 곳으로는 풍양조씨 문중에서 세운 옛 정자(亭子)도 있었다. 탐방객들의 편의를 위해 한둘 쯤 복원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물론 멀리서 보는 경관이나 유적지(遺蹟地) 훼손을 최소화하는 복원이어야 할 것이다.
⑽ 병풍산 동쪽에는 번지 점프장이나, 외줄에 도르래를 걸어 타고 강을 건너다닐 수 있는 시설도 생각해 볼 일이다. 위험하다고만 미룰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안전을 고려한 방법을 찾아 다른 곳보다 먼저 시작해야 한다. 병풍산 동쪽 강 건너 강안(江岸)을 야영장(野營場)으로 이용하는 여름철에는 특히 인기 있는 시설이 될 것이다. 야영을 하면서 병풍산을 특이한 방법으로 다녀 올 수 있기 때문이다.
⑾ 병풍산 북동쪽 아래의 승천원〈火葬場〉도 옮길 수 없는 것이라면 시설을 현대화하고, 주변을 공원화하여 이제는 혐오시설이 아니라 오히려 경관상(景觀上) 또는 영성상(靈性上) 한 번쯤 찾아보고 싶은 정겨운 장소로 탈바꿈 시켜야 한다.
요즘 학생들은 고분군을 답사하면서도 무섭다고 한다. 서양 사람들이 묘원(墓園)을 만들어 아이들이 공원으로 느끼게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승천원 북쪽의 병성천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의 양안(兩岸)에는 소나무 숲과 습지를 조성하여 여러 종류의 새 떼를 불러들이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나. 성안산의 이부곡토성
병풍산과 성안산의 이부곡토성은 45번 고속도로 상에서는 불과 2∼3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3번 국도에서도 이 산은 훤히 한눈에 보인다. 고속도로의 위로는 이부곡토성이, 아래로는 옛 영남대로 상의 낙원역이 있던 곳이고, 아깝게도 불과 수년 전 고속도로를 개설하면서 이건(移建)은 커녕 아예 없애버린 마당(馬堂)이 있던 곳이다.
이부곡토성은 학계에는 이미 널리 알려진 성(城)이다. 그러므로 금방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가 있다.
이곳에 삼한시대의 토성(土城)이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조경할 필요가 있다. 병풍산 보다는 산이 작기 때문에 고속도로에서 토성의 모습이 보이게 잡목을 제거하고, 토성 둑은 ‘잔디’나 ‘꽃 무릇’ 등 여러해살이 알뿌리 식물로 표현하거나 누운 향나무 같은 종류로 조치하여 멀리서 금방 토성임을 알아보게 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그러면서 현재 자라고 있는 소나무는 그대로 다듬어 가꾸면서 잡목이 자라던 곳에는 온통 진달래 등의 꽃나무로 뒤덮어도 좋을 것이다. 순수한 토성(土城)을 역사탐방지로 조성을 해 놓은 곳으로 널리 알려진 곳은 아직까지는 서울 외에는 별로 없다.
성곽 내부에도 곳곳에 나있는 가시나무를 제거하여 탐방을 쉽게 해주는 정도라도 배려하거나 탐방로를 만드는 것은 필수적이다.
다. 오봉산과 남산고성 및 봉수대
이부곡토성이 있는 성안산에서 45번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하면 5∼10분정도의 거리에 오봉산이 있다. 병풍산과 마찬가지로 가까이에 북상주 나들목이 있어서 접근성도 좋다.
병풍산성에서 이곳까지 서쪽으로는 계속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서 상주의 농경문화와 맛나는 쌀 생산지로서의 홍보도 좋을 것이다. 즉 상주의 특산미(特産米)의 이름을 논에 다른 색깔의 벼를 심어 나타내는 것 등이다. 구미시가 해마다 25번국도 변 논에 그렇게 장식을 하고 있다.
특히 3번 국도가 이 산을 동쪽으로 두고 감싸 안으며 지나가므로 상주 산야(山野)의 아름다움을 알릴 수 있는 좋은 조건이다.
이 산에는 오봉산 고분군(古墳群)과 함께 남산고성(南山古城)과 봉수대(烽燧臺)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고분군은 물론 토성인 남산고성과 봉수대도 복원하여 길에서 모두 보일 수 있게 해야 한다.
삼한시대 상주 사람들의 수준높은 토목기술의 정수를 볼 수 있는 공갈못도 잠깐 보이는 곳이다.
산의 동쪽 아래에는 임호서원과 함녕사마소가 있고, 양주조씨의 열녀각도 있다. 산에서 동쪽으로는 구국항쟁의 장소이기도 한 태봉도 보이고, 관천(串川)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한 긴 반도가 보인다.
산의 북서쪽에는 동래정씨 열녀비와 조금 떨어진 곳에는 쾌재정도 있으니, 볼거리와 배울 거리를 함께 할 탐방로 개설에는 무리가 없을 듯하다.
오봉산의 면적이 너무 넓다면 우선 산 북쪽 국도의 양쪽 옆이라도 조경을 하여 이 산 아래 도로를 지나가는 모든 차량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 올라 보고 싶도록 단장을 해야 할 것이다.
오봉산은 고속도로 나들목에서 가까운 곳이므로 산의 서쪽이나 남쪽으로 치유의 숲을 조성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참나무 숲길, 소나무 숲길, 편백나무 숲길, 단풍나무 숲길 등 장소의 특징에 따라 조성하되 서로 이어 역사 유적지까지 둘러보게 한다면 탐방자(探訪者)들이 지루할 겨를도 없이 산을 한 바퀴 들러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고분군, 산성, 봉수대, 치유의 숲 등 특징에 따라 화훼(花卉) 종류나 수종(樹種)을 달리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꽃 무릇, 맥문동, 구절초, 철쭉 등을 각종 숲속에 함께 군(群)을 이루어 식재할 수 있을 것이다.
라. 상주보와 낙단보 건지산 일대를 부자들의 놀이터로 만들면?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오래도록 머물다 갈 수 있도록 하는 계획의 필요성은 누구나 다 안다. 상주보와 낙단보, 그리고 중동면 회상리 건지산 일대를 그들이 주목하게 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 수가 있을 것이다.
• 낙동강의 동쪽 상주시 중동면과 예천군 풍양면의 경계지점인 건지산에는 글라이더 활공장이 있다. 풍양면은 활공장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까지 세워 진입도로도 단장하면서까지 예천군 풍양면 활공장으로 이해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상주 관할은 예천지역에 비해 주위 모든 여건이 탐방객의 눈길을 끌기에 훨씬 유리하다. 멀리서도 잘 보이는 이 산도 활공에 방해되지 않는 정도의 조경이 필요하다. 그리고 상주 지역에서 건지산의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차량용 도로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산의 서쪽 사면(斜面)에 활공에 장애가 되지 않는 누운 향나무 등과 같은 수종으로 상주 활공장이라는 글자를 식재(植栽)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활공 후 이들이 경천대 가까이에 착륙을 유도할 수 있도록 잔디 착륙장을 만들어 목표지점에 정확히 착륙하는 자신과의 경쟁을 할 수 있도록 조성하는 방안도 있을 것이다.
• 산악자전거〈MTB〉 도로도 상주 지역인 이 산의 서쪽 기슭에 만드는 것이 경천대 주위의 시설을 이용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요즘 자전거 마니아들은 타 시군을 내 집처럼 몰려다니고 있으니 시내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할 수 있다. 또 낙동강 양안(兩岸)에 자전거 도로가 있고, 자전거 박물관도 이곳에 있는데다가 경관으로 보아도 이곳이 적지이다.
자산(紫山)에 이루어 놓은 산악자전거 코스는 자산산성(紫山山城) 보호와, 충렬사(忠烈祠)에 모신 임진왜란 때 북천 전투에서 목숨 바친 수많은 상주 옛 선조들의 구국정신을 존경하는 의미에서라도 폐쇄하고 옮겨야 한다.
• 상주보에는 무동력선인 조정경기장과 레프팅 장소로 사용할 수 있게 시설을 해 주어야 한다. 활공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병풍산 정상 정자(亭子)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한 번쯤 체험하게 하고 싶은 장소로 만드는 것이다.
낙단보에는 수상 스키장 등으로 조성하는 방안의 검토는 어떨까? 병풍산 동쪽 아래까지 이용하게 하려면 강창의 잠수교를 다시 세우는 방안도 장기적인 계획에 넣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마. 백화산의 경치와 유적을 여름 별장으로 만들면?
호국정신의 교육장으로 꾸며 볼 수 있는 곳이 백화산 일대이다. 상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석성인 신라시대의 금돌성은 삼국통일의 전초기지였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몽골의 군대를 맞은 상주 관민이 중앙 정부의 도움 없이 싸워 이긴 상주인의 호국의 얼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에 대항하여 마음으로 고려에 충성을 다한 고려 악사 임천석이 투신했다는 임천석대도 있다. 임진란 때는 상주의 상의군을 창설한 현장이기도 하고, 창석 선생의 형제급란도가 그려지게 한 현장이다.
경치 또한 문장대와 더불어 상주 제1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지금 구수천을 따라 산책로를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현재의 산책로 반대편에 본래 예부터 있던 길을 따라 자전거 도로도 내는 것이 좋겠고, 최대한 자연이 훼손되지 않도록 내원성이 있는 골짜기를 따라 금돌성의 가장 높은 곳인 한성봉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와 함께 산악자전거 코스도 개설을 고려해 봄직하다.
제주도 곶자왈은 자갈 밭 속에 생겨난 원시림 사이를 20분 간격으로 기차가 통행하고 있어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바. 테마 길 조성은?
생활이 점차 윤택해지면서 사람들은 머리 속에 느림의 미학을 그려나가고 있다. 걷기, 자전거 타기, 행글라이더 등을 하면서 경관이 좋은 곳만 찾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있는 곳을 찾고 있다. 즉 테마 여행이다.
상주를 지나는 옛 의미가 있는 길을 개척하는 것은 어떨까?
○ 이규보 문학의길
한 때 상주를 ‘선비의 고장’이라고 내 세우기도 했다. 그럴 당시에 그들의 정신이 나타난 시비(詩碑)조차 없었다. 그러니 어찌 그 이름을 지킬 수 있었으랴!
대문장가(大文章家)이면서 고려의 명신(名臣)인 이규보가 상주에 머물면서 쓴 글 60여 편이 모두 명문장이라 『동문선』에 올랐다. 이규보가 여행한 상주지역의 길을 따라 ‘이규보 길’로 명명하고, 잠시라도 쉴 수 있는 공간에는 그 지역을 노래한 그의 시(詩)를 새긴 비를 세우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상주시내의 객사와 동방사, 갑장산 남쪽 와목을 넘어 용포로, 장천으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문경의 견탄까지, 또 구미시 도개면의 원흥까지가 그가 다닌 길이었다. 마침 낙동강을 따라 사벌면 퇴강리로 이어지는 길이 있으니 그 길을 이용해도 좋을 것 같다.
○ 공민왕 회한(悔恨)의 길
나라가 위기에 처해 복주까지 피난해야 했던 공민왕이 상주 출신 김득배 등의 활약으로 나라를 지켰다. 그 후 공민왕은 지금의 안동을 거처 옛 덕통역을 지나 상주에 와서 몇 개월 머물렀다.
이때 왕을 모시고 있던 간신배들에 의해 홍건적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난계 김득배가 전승 보고도 미처 올리지 못한 상태에서 모함에 빠져 죽음에 이르렀고, 포은 정몽주가 멀리에서 찾아와 제문을 지어 장사해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상주에 체류하는 동안 간신들의 행패에 상주민의 고통은 실로 대단했다.
그 후 왕이 수도인 개성으로 돌아갔는데, 그 길을 개척하여 곳곳에 당시를 회상하는 고려사가 전하는 내용으로 안내판을 세우고, 당시를 반성하는 교훈의 길로 삼아야 할 것 같다.
○ 신문화 도입한 선교사들의 길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서양의 문화를 전해 준 사람들은 해마다 청나라를 다녀오는 동지사들과 그 후 우리나라에 들어 온 선교사들이었다. 청나라에서 우리 동지사들에게 서양의 신문화를 전해 준 사람 역시 청나라 관아에 머물고 있던 선교사들이었다.
선교사들이 주로 이용했던 길 중 상주를 통과하는 길은 영남대로와 문경의 쌍룡계곡에서 외서면 전의리 갈골을 지나 화서면 하송리 청계 마을을 지나 화령을 거쳐 추풍령이나 황간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중 후자를 택해 산악자전거 길로 개척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일이다.
○ 낙동강 탐사의 길
영남의 젖줄이고, 주요 수상교통로였던 낙동강이 상주로 인해 그 이름을 가지게 되었지만 상주인들 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니까 낙동강이라는 말이 상주의 브랜드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낙동강의 이름을 딴 단체나 공장은 물론 제품의 이름도 없다. 낙동강 전시관도 없다. 그런데 중앙정부가 오히려 ‘국립 낙동강생물자원관’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했고, 낙동강 시발지 퇴강에서 ‘낙동강 700리 음악회’가 기껏 2년 전에 선을 보였을 뿐이다.
상주의 고호(古號)가 상락(上洛)이었고, 상주 중심지에는 낙양동이라는 중국식 이름을 딴 마을이 있고, 상주의 동쪽은 낙동, 서쪽은 낙서, 남쪽은 낙평, 북쪽은 낙원이었다. 낙동강의 길이는 700리이다. 작은 나라 사람의 한이랄까, 가치보다는 크고 긴 것만 부러워 어느 때부터 낙동강은 1,300리라고 하고 있는데, 65세 이상 된 대부분의 사람은 낙동강의 길이를 700리로 기억하고 있다. 다만 ‘강의 길이 + 내의 길이 + 도랑의 길이=1,300리’가 된다.
문경에서 상주 퇴강으로 흐르는 물은 관천(串川, 지금의 영강)이고, 봉화에서 영주를 거처 삼강으로 오는 물은 내성천, 황지에서 봉화 분천을 지나 안동으로 흐르는 물은 분천, 영양과 진보를 거처 오는 물은 반변천이다. 즉, 천(내, 川)이지 강(江)은 아닌 것이다. 상주 북쪽 지경에서 비로소 강이 되는 것이고, 상주 <상락(上洛)>의 동쪽을 흐르므로 낙동강이라 한 것이다.
이제 상주는 속리산과 낙동강을 상주의 것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속리산과 낙동강을 상주의 브랜드로 삼아야 한다. 속리산이 상주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야 하고, 낙동강이 상주인들을 먹여 살리는 밥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주의 낙동강을 홍보하는 차원에서라도 낙동강과 그 주변 유적지를 탐사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 역사 탐방의길
• 효자와 충신 열녀들의 유적을 잇는 ‘충효열의 길’
상주에는 유학 학맥이 퇴계․남명 계열과 함께 남인․노론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어 다양하다. 상주인들의 ‘화합의 정신’을 여기서 찾을 수 있고, 포용력도 여기에서 볼 수가 있다. 당쟁과 관계없이, 학맥과 관계없이, 함께 살아온 상주인이다. 그에 따라 서로 선의적 경쟁이나 하듯 효자와 충신 · 열녀도 많다.
충효열의 길을 개척하여 이들의 유적지를 자전거로 탐방하게 하는 것도 좋은 방안일 듯하다.
• 유교 · 불교 · 그리스도교 문화를 돌아보게 하는 길
유학의 길 : 유학과 관련한 향교 서원을 비롯한 종택 등을 돌아보게 하는 자전거 탐험 코스로 개발.
불교 문화의 길 : 불교와 관련한 절과 탑 등 유적지를 돌아보게 하는 길
그리스도교 문화의 길 : 그리스도교와 관련한 문화 유적지를 돌아 볼 수 있는 길
• 산성과 고분군, 고인돌, 옛 저수지 등을 돌아보는 ‘옛 문화의 길’
상주 지역에는 산성이 많다. 산성들과 함께 고인돌, 옛 저수지 등을 잇는 길을 개척하여 돌아 볼 수 있게 하는 테마 길도 산악자전거 동호인들에게는 괜찮을 것이다.
○ 영남대로 복원
상주가 말로만 영남대로가 지나던 중요한 도시라고 우리끼리만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영남대로 상에서 상주의 중요성은 아무도 말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영남대로를 지나가 보고 싶어도 사실상 길이 없어 어떻게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영남대로를 복원하고 역과 원 터에는 쉬면서 지역민과 유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 실크로드
경주를 출발하여 당나라를 지나 터키로 이어지는 문화교류의 길을 실크로드라 한다. 신라의 수도 경주를 출발하여 당나라로 가는 길은 상주를 거쳐 당항포로 가는 길이다. 상주가 이 길을 복원해야 한다. 그리고 알려야 한다. 그 길을 찾기 위해 연구해야 한다. 늦어지면 흐지부지해지고 말 것이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
사. 찾아 온 사람이 머물게 해야 한다.
상주를 찾아온 사람이 후다닥 지나가기에는 아쉽도록 곳곳에 편의시설과 안내판을 설치해야 한다. 그리고 농산물을 바가지 씌우는 것이 아니라 이건 너무 싸게 구입한다는 인식을 가지도록 체험 코스와 위생문제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숙박하는 장소도 고가(古家) 체험을 비롯한 여러 분야로 하여 더 널리 홍보하고, 장소도 늘려야 할 것이다. 낙동 양진당, 우물리 수암종택, 우산의 우복종택, 소재종택 등등 여러 곳이면 좋겠다. 박물관 옆 의례관도 괜찮을 것이다.
이 시대를 대변하는 가옥이라면 폐가를 옮겨지어 단장하고, 그 곳을 이용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주변 여건으로 보아 도남서원이나 옥동서원에서는 서원체험 프로그램을 시행해도 좋을 것이다.
아. 개인의 통신기기까지 이용하여 상주를 홍보할 수 있어야 한다.
상주를 찾는 이들 스스로가 밴드, 카카오 톡 등을 이용하여 올릴 수 있도록 조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많은 경비를 들여가며 홍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방법이 가장 효율적일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곳곳마다 사진촬영 장소를 마련하여 홍보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5. 이렇게 하려면?
가. 모든 사업은 조금 늦어지더라도 장기 계획과 단기 계획을 수립하여 공청회를 열어 시민의 합의를 거치고, 조례를 제정하여 시의회의 확인을 받은 다음 최고 책임자가 바뀌어도 계속 추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대다수의 주민이 합의한 내용이 반대에 부딪칠 경우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득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도 필요하다.
나. 출향 인사가 고향을 잊지 못하도록, 상주와 인연을 가진 이가 상주를 거부할 수 없게 계속적으로 유대를 강화해야 한다.
출향 인사에게는 상주에서 발간하는 상주를 알리거나 연구한 자료들을 우송하여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하거나, 축제 등의 행사 때 초청장을 보내는 방안, 지연(地緣)관계가 없는 이에게는 사이버 상주 시민으로 등록하게 하는 방안 등이다.
본인이 어떤 사업을 할 때 희망에 따라 상주 시민과 똑같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방법도 있다.
다. 비록 상주 출신이 아니더라도 전국의 인재가 상주관내 고등학교 출신이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장학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상주사람이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김천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듯, 상주 관내 학교를 졸업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도록 해야 한다. 비록 그와 그의 가족이 상주에 들어와 살지 않는다고 해도 후에 모교의 발전에는 관심을 가질 것이고, 정책수립의 위치까지 도달했을 때 동창이나 동기생들까지 외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비록 모교가 위치한 지역은 외면한다고 해도 상주관내 학교 졸업생임을 부인하지 않는 한 상주의 위상은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주 지역 출신이던 타 지역 출신이던 가리지 말고 인재들이 상주로 몰려 올 수 있게 하는 방법으로의 장학제도 운영의 묘가 필요하다. 눈앞의 작은 이익에 연연하여 더 큰 장기적인 이익을 놓쳐서는 안 된다.
독일이 유태인을 학대할 때 네델란드는 그들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전후 네델란드는 세계의 금융산업을 이끌 정도의 강국이 되었다. 미국이 자국에서 태어 난 사람은 모국이 어느 곳이든 미국 시민으로 인정하고 있다. 세계의 인재를 자국민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제 상주가 그리해야 한다. 인재를 끌어들였으면 그들을 도와 주어야 한다. 그것이 상주 관내의 모든 학교가 훌륭한 학교로 거듭 날 수 있는 길이다.
라. 개인적인 사업은 어떻게 하기가 어려울지라도 관에서 집행하는 공사는 공사가 끝난 후 모두 예술적인 가치가 나타나도록 설계하고, 시공해야 할 것이다. 다리를 놓거나, 제방을 쌓는 것 까지도 관광화를 염두에 둔 설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똑 같은 모양의 집을 짓는 것조차도 금하고 있다. 집의 모양, 도시의 모양조차도 관광사업의 한 부분으로 보기 때문이다.
옛날 냇가에 놓은 돌다리〈징검다리〉가 지금 관광 상품화 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지를 않는가? 돌담이나 토담이 관광 상품화 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지 않는가? 우물 하나가 관광 상품화 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지 않는가? 심지어 무덤조차도 관광거리가 되고 있는 시대가 되었음을 명심해야 상주는 생기 있는 도시로 다시 살아나 옛 영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6. 나오며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은 외부인들이 상주를 찾게 하는 가장 원초적인 수단이다. 일단 탐방객이 찾아오면 그들이 상주에 대한 미련을 오래도록 간직하게 하는 2차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60대 연령층의 사람들은 6.25 이후 어려웠던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이고, 오늘 날의 경제 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한 장본인들이다.
다시 한 번 더 우리는 지역 이기심을 버리고 상주의 발전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나설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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