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사휘찬(洛史彙纂) 해제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경상북도 문화재 전문위원
상주고등학교 교사
김 정 찬
1. 상산지
상주지역의 역사서 가운데 가장 빨리 편찬된 것은『상산지』이다. 상주의 또 다른 이름이 상산이기 때문에 상산지는 바로 상주의 역사서를 의미한다. 지금까지 연구된 바에 의하면, 상산지는 1617년에 창석 이준이 편찬한 상산지를 필두로 1895년에 편찬된 작자 미상의 상주목읍지까지 총 6종류이고 현대에 이르러 편찬한 상주지와 상주시사를 포함하면 총 8종류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 표와 같다.
책명 | 간행년도 | 편저자 |
상산지 | 1617(광해9) | 이준 |
상산지 | 1749(영조25) | 권상일 |
상산지 | 1786(정조10) | 조목수 |
상산지(상주목읍지) | 1832(순조32) | 조술립, 채주욱 등 |
상주읍지 | 1871(고종8) | 미상 |
상주목읍지 | 1895(고종32) | 미상 |
상주지 | 1989 | 공동 |
상주시사 | 2010 | 공동 |
최초의 상산지인 창석본 상산지 후지(後識)에 ‘상산은 영남 중에 상유(上遊)이니 산수의 수려함과 인재가 많음이 옛적부터 있어왔으나, 읍지가 없어 그 내용을 상세히 알지 못하였다.’고 하여 상산지 편찬의 배경을 설명하였다. 편찬하게 된 경위는 당시의 강복성(康復誠) 목사의 권유에 따라 착수하게 되었고, 그 근거는 때마침 자기의 친구인 구희급(丘希岌)이 공관에서 등사한 것이 있어서 이에 그 기본을 두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상산지 편찬 이전에 이미 작성되었던 사록 자료가 있었음을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신동국여지승람과 잡지(雜誌)의 기록을 유취(類聚)하여 강목(綱目)을 정비하였다고 하였고, 편찬 도중에 정호선(丁好善) 목사의 독촉이 있어 10개 목의 조목을 정하고 자문과 순방을 거쳐 편집의 가닥을 잡았다고 하였다. 창석본이 간행되고 난 뒤 그의 손자 이재관(李在寬)이 속록을 내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책 본의 형태는 간결한 필사본으로 번호를 붙여 목록을 먼저 수록하고 뒤 이어 차례 차례 서술하였다. 상산지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지리서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목차는 여지(輿地), 공부(貢賦), 학교(學校), 질단(秩壇), 관제(官制), 공서(公署), 명환(名宦), 인물(人物), 고적(古蹟), 문한(文翰) 등의 순으로 편찬되어 있다. 목차의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다.
대분류 | 소분류 |
여지 | 沿革, 屬縣, 疆域, 山川, 城池, 驛院, 橋梁, 姓氏, 風俗, 烽燧, 津渡 |
공부 | 田賦, 土貢, 土産, 戶口, 軍兵, 徭役 |
학교 | 鄕校, 書院, 書堂, 學制, 學田 |
질단 | 壇壝, 廟制 |
관제 | 牧使, 判官, 文提督, 武提督 |
공서 | 客館, 州衙, 附留鄕所, 醫局 |
명환 | 有名官僚 |
인물 | 文官, 武擧, 蔭敍, 恩錫, 孝烈 |
고적 | 古都, 古縣, 山城, 部曲, 亭觀, 寺刹 |
문한 | 題詠, 記, 序, 碑文, 上樑文, 雜著 |
구당본 상산지는 구당 조목수가 지은 것이다. 구당 조목수는 1736(영조 12)에 출생하여 1887년(고종 24)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친 조선 후기 상주의 큰 선비요 교육자이다. 조선 중기 상주의 큰 선비였던 검간(黔澗) 조정(趙靖)은 그의 7세조이고, 고조(高祖)는 입재(立齋) 조대윤(趙大胤)이다. 구당본은 50세가 되던 1786년 정조 10년 병오년(丙午年)에 찬술하였다. 이 책의 간행은 구당본이 간행된 후 46년이 경과된 1832년(순조 32)에 간행된 <상주목읍지[임진본]>의 발문(跋文)과 <상산지> 전말(顚末)에 ‘본주의 전지(前誌)로 창석본과 청대본 그리고 구당본이 있다’는 기록이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본지(本誌)는 전해지지 않고, 그 초책(草冊)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 초책이 알려진 것은 2011년 겨울이다. 구당의 주손(冑孫) 조정희(趙正熙)씨로부터 그 초책(草冊)이 집안의 모모 집에 보관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져 세상에 공개되게 되었다. 금중현 상주문화원 부원장은 이 책을 창석본과 청대본을 가지고 비교한 다음 상세하게 해제하였다. 해제한 후 지역의 향토 사학계에서 주목을 받게 되자, 상주박물관에서 2014년에 상주문화총서로 발간하게 되었다.
2. 낙사휘찬
이와같은 상주 지역 역사서 외에 낙사휘찬(洛史彙纂)이라는 역사성을 담은 책이 있다. 이 책은 1956년에 이종린(李鍾麟)이 편찬하였다. 지리지는 아니지만 상주지역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낙사휘찬’의 뜻을 살펴보면, 제목의 ‘낙사(洛史)’는 ‘낙양의 역사’라는 뜻인데 ‘낙양’은 ‘상주’를 말하므로 ‘상주의 역사’라는 뜻이다. ‘휘찬(彙纂)’은 ‘휘찬여사(彙纂麗史), 언행휘찬(言行彙纂), 간례휘찬(簡禮彙纂)’ 등의 용례에서 보다시피 ‘모아서 편찬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낙사휘찬’은 ‘상주의 역사를 모아서 편찬한 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역사서이지만 일반 지리서처럼 분류가 다양하지 않다. 다만 특정한 지역을 묶어서 그곳의 역사적 가치가 있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즉, 상주향교, 도남서원, 옥성서원, 향사당, 존애원, 수선서당 등이 그 대상이다. 향교에 대한 사적은 향교중수기, 대성전 중건상량문, 향당에 보내는 편지, 폐흥전말, 봉안문 2부, 향내 각 소에 보내는 통문, 상주 향중에 보내는 통문 등 8건이고, 도남서원 사적은 방백에게 올리는 장계, 도남서원 상량문 등 2건이며, 옥성서원 사적은 5선생 약력, 창석 선생 약력, 우복 선생 언행록, 양 선생사기, 봉안학사 김선생문, 양정축문, 봉안 영천 신선생문, 양정축문, 봉안 후계 김 선생문, 양정축문, 봉안 월간 이 선생문, 상향축문, 봉안 창석 이 선생문, 상향축문, 검간 조정에게 보내는 편지, 전 사서에게 보내는 편지, 변의, 사우 상량문, 서원 이건 상량문, 옥성사적에 대해 쓴 글 등 20건이다.
향사당 사적은 상주 향언록 본원 사적, 상주 향사당 제명서, 상주 향안록서, 향사당 중건기 등 4건이고, 존애원 사적은 존애원기, 낙사합계서 본안서, 일묵재 선생 연보에서 뽑은 글, 존애원 수정안 좌목 등 4건이며, 수선서당 사적은 수선서당 본원사적, 수선서당기, 수선서당원록, 좌목, 수선서당속록, 수선서당 부록 심원록, 수선서당록 수정 시 임원록, 수선서당록후지, 수선서당 중수기, 수선서당 중건 상량문 등 10건이다. 추록은 월간선생 년보에서 도남사적을 뽑아 보강한 글, 존애원 사적 보강자료 등이다.
대상 | 내용 | 건수 |
향교 | 향교중수기, 대성전중건상량문, 향당에 보내는 편지, 폐흥전말, 봉안문 2부, 향내 각소에 보내는 통문, 상주향중에 보내는 통문 | 8 |
도남서원 | 방백에게 올리는 장계, 도남서원상량문2 | 3 |
옥성서원 | 5선생 약력, 창석 선생 약력, 우복 선생 언행록, 양 선생사기, 봉안학사 김선생문, 양정축문, 봉안 영천 신선생문, 양정축문, 봉안 후계 김선생문, 양정축문, 봉안 월간 이선생문, 상향축문, 봉안 창석 이선생문, 상향축문, 검간 조정에게 보내는 편지, 전 사서에게 보내는 편지, 변의, 사우상량문, 서원이건상량문, 옥성사적후지 | 20 |
향사당 | 상주향언록 본원 사적, 상주향사당 제명서, 상주향안록서, 향사당중건기 | 4 |
존애원 | 존애원기, 낙사합계서 본안서, 일묵재 선생 연보에서 뽑은 글, 존애원수정안 좌목 | 4 |
수선서당 | 수선서당 본원사적, 수선서당기, 수선서당원록, 좌목, 수선서당속록, 수선서당 부록 심원록, 수선서당록 수정 시 임원록, 수선서당록후지, 수선서당중수기, 수선서당 중건상량문 | 10 |
추록 | 추록은 월간선생 년보에서 도남서적을 뽑아 보강한 글, 목록 | 2 |
존애원 사적보유 | 병인계, 무인계, 낙사합계, 추록속 | 4 |
사실상 본 내용은 향교 사적부터 수선서당 사적까지의 기록이다. 추록과 존애원 사적보유는 추가로 기록한 내용이다. 기록 대상을 살펴보면, 크게 교육기관과 예악기관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예악기관인 향사당의 경우는 기타 교육기관이 훼철되었을 때 각종 문서를 일시 보관한 역할을 한 사실이 있으므로, 이 점에서 본다면 아마도 모두 교육기관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종린은 낙사휘찬의 추록에서 ‘향교사적, 도남사적, 옥성사적, 향사당 사적, 존애원 사적, 수선서당 사적’ 등에 대해서만 기록하는 의의를 밝혔다.
즉, ‘옛날부터 우리 고을은 인물이 번성하고 문헌(文獻)이 많아, 모든 일의 흥폐존망 그리고 성쇠, 소멸, 신장 등의 반 천년 동안의 역사를 기록하여 전할 만한 사적을 모두 기록하지 못할 정도인데, 일은 크고 힘은 모자라 모은 것은 이 정도에 그치니 나를 알아주든 나를 몰라주든 오직 훗날 이 기록을 이어 기록하는 사람들의 선택여부에 달렸을 뿐이다. 병신년 단오절 날 고을 사람 이모모씨가 삼가 달성여관에서 쓰다.’라고 하여, 많은 사적의 사실을 모두 모아 기록해야 하지만 분량이 방대하여 힘이 미치지 못한다는 말로 이 6개 대상에 그친 것에 대해 밝히고 있다.
그러나 총 55건의 글 가운데 옥성서원 관련 글이 20개이고 수선서당 관련 글이 10개이다. 이 두 곳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점은 참으로 흥미롭다. 그 이유는 옥성서원과 수선서당은 청리와 외남에 있으면서 흥양이씨 집안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옥성서원은 신잠 목사가 세웠는데 나중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는데, 그 당시 흥양 이씨인 월간 이전과 창석 이준이 큰 역할을 하였고, 또 나중에는 이 두 분이 배향된 곳이다.
수선서당의 경우도 신잠 목사가 세운 서당이지만 임진왜란을 거치고 난 후 불에 타게 되어 나중에 월간 이전이 주도하여 중수한 곳이다. 따라서 월간 이전의 후손인 이종린이 낙사휘찬을 편찬하면서 이 두 곳을 중요하게 다룬 것으로 생각된다. 존애원의 경우도 낙사계원이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 빈민을 구제하고 설립할 때, 흥양이씨 또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사적을 많이 기록하였어야 하지만 중간에 존애원 관련 무고사건으로 기록물이 많이 유실된 점이 있어서 많이 언급하지는 않은듯 하다. 그러나 낙사휘찬을 편찬한 이종린은 남촌[양촌, 청리, 외남, 공성 지역] 지역에 있었던 존애원과 옥성서원 그리고 수선서당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는 ‘낙사휘찬속’이라는 책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 낙사휘찬속은 낙사휘찬의 후속편이라 할 수 있는데 또 다른 제목은 ‘삼적휘찬(三蹟彙纂)’이다. 그 서문에 ‘사람들은 늘 새로운 것을 이루기는 쉬워도, 이루어 놓은 업적을 지키는 것은 어렵다고 하는데 이 말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우리 고을은 인물이 번성하고 문헌이 많기로 나라 안에서는 최고인 고을이다. 무릇 그 흥망성쇠와 소멸성장 등의 자취는 모두 기록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삼적(三蹟)은 바로 존애원 사적, 옥성지, 수선서당록을 말하는데 고증할 만한 것은 모아서 실록을 만드는데 손은 떨리고 눈은 침침하여 그 역할을 할 수가 없어 종군(宗君)인 이주성에게 정갈하게 베껴 쓰게하고 난잡한 것은 빼고 복잡한 것은 없앤 다음 하나로 묶어서 삼적휘찬이라 하고 훗날 역사가들이 보고 연구할 수 있게 한다.’라 하였다.
이 정도로 이종린은 1956년도에 사라져 가는 기록을 한 곳에 모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인데, 중요하게 생각했던 역사 사적을 향교, 도남서원, 옥성서원, 향사당, 존애원, 수선서당 정도로 여겨 이곳의 사적관련 기록물을 모아 낙사휘찬이라 하였고, 여기서 더 압축하여 존애원, 옥성서원, 수선서당 등 사적관련 기록물을 모아 삼사휘찬이라 하였던 것이다.
3. 저자 이종린의 행장
공의 휘는 종린(鍾麟)이고, 자는 사원(四元)이며, 호는 수당(修堂)이다. 일찍이 종조이신 부제학 창석공께서 정리하여 전한 가장을 살펴보면 흥양 이씨는 고려조 국자생원 휘 언림공을 시조로 하고, 이후 벼슬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온 우리나라의 유명한 집안으로, 몇 대를 지나 조선 선묘조에 서애 선생의 적전으로 향리인 유천에 강화당을 건립하고 이곳에서 가학을 시행한 월간공이 있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민풍을 순화하고 의료와 구휼을 시행한 존애원의 건립, 상주 도남서원의 창건 등 학문과 사회교육으로 일가를 이루신 월간 선생은 공의 12대 조이다. 월간 선생의 셋째 아들인 휘 신규, 호 유천공은 10대 조이다. 몇 대를 지나 5대 조는 휘 효창이고 자는 도희이며, 고조의 휘는 상부이고 자는 흥언이다. 증조는 휘 규정이고 자는 대응이며, 조의 휘는 행교이고 자는 성칠이며 호는 석당으로 옥성서원이 훼철된 지 23년 후인 계사년(1893년)에 옛 자리에 설단할 때 이를 주관하였는데, 이때 지은 시가 오늘에 전한다. 부친의 휘는 주광이고 자는 려노이다. 모친은 장수황씨로 1남 1녀를 두었다.
공은 고종 14년 정축(1877)에 유천리 집에서 출생하니 유학 총액으로 일찍이 가학을 전습하여 시례지가[가학 전승 집안]로서 효제충신의 모범이 되었다. 타고난 성품은 고아하고 단정하며 마음에 품은 뜻은 높았으나 혼란한 시운을 만나 청빈한 것을 스스로 즐기며 은인자중으로 지냈으나, 강화당을 건립한 선조의 유훈을 이어지게 하여, 1922년에 향언과 함께 청신강습소를 설립하고 뒷날 청리공립보통학교로의 승격 등 교육사업에 매진하였으며, 또한 6.25전란으로 폐허화한 상주향교 대성전의 복원과 흔적만 남은 존애원․도남서원․옥성서원 등 향내유소의 유지관리를 선도하여 오늘에 전하게 하였으며, 상산향언록과 경상도선생안 등 중요 기록 문화재를 상주향교로 이안․보존하였다. 저서로서 병신년(1956년)에 향내 사적을 집성하여 전찬한『낙사휘찬』은 후학들의 향토사 연구의 지침이 되고 있다. 또한 상주향교 문묘복주시통문들을 수습한 삼적휘찬의 초고가 전하며, 황고의 유문을 정리하여『석당유집』을 찬집하였으나 발간치 못하고, 30년이 지난 1984(기사)에 발간하였다. 공은 서기 1959년 기해 11월 5일 돌아가시니, 향년 82세로 청룡 강좌원에 예장하였다. 배위는 풍산류씨 습규의 여로 묘는 고비 합장이다.
공은 국난의 시대를 관조하면서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흥학육영에 전심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신학문을 펼쳤으니, 그 유지는 청리중학교 개교에 전력한 큰 아드님이신 나의 선고와 손자이신 나의 백씨가 학교장으로 교육계에 헌신하여, 향당에 그 명을 전하는 등 내외손들이 모두 그 직분에 함께 하여 사회의 모범이 되었으니, 이는 선조의 협조와 수당공의 유훈이 백세토록 이어지리라. 지금 학문이 얕은 이 몸이 평소 가정에서 듣고 본 것과 문자로 저술한 것을 약간 뽑아내어 행록을 만들었으니, 어찌 이것을 행장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 또한 옥고에게 죄를 더하는구나.
4. 낙사휘찬 내용
향교 사적은 홍귀달이 지은 향교 중수기, 이준이 지은 대성전 중건 상량문, 이준이 쓴 향당에 보내는 편지, 이준이 지은 흥폐 전말, 정동면이 지은 봉안문, 이종구가 지은 봉안문, 이종구가 지은 향내 각소에 보내는 통문, 이동구가 지은 상주 향중 통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향교 중수기를 보면, 주상께서 '상주 고을은 영남의 요충이니 훌륭한 사람이 아니면 고을을 잘 다스릴 수가 없을 것'이라 하였다. 이에 이조에서 특별히 엄선하여 강용휴에게 상주목사 직을 맡겼는데, 그가 부임하여 위엄과 덕치를 병행하여, 하급 관리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편안하게 지내는 정치를 실천하였다 한다. 이 당시 상주 향교의 유생인 김보형(金寶荊) 등이 연명으로 서울에 있는 홍귀달에게 서찰을 보내, "우리 강귀손 목사의 고을 다스리는 효과가 참 크고 넓습니다. 세밀한 부분까지 일일이 다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만 우리 유자(儒者)들을 위해 배려한 공을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상주 고을의 향교는 건축한 지 오래되어 대성전 세 칸과 누 다섯 칸의 기둥이 흔들려 기울어졌으며 서까래는 부러져 비가 줄줄 샙니다.
그리고 바람이 몰아쳐서 단청이 모두 벗겨지고 그림도 뭉개졌습니다. 동재(東齋) 다섯 칸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창과 벽이 허물어지거나 파괴되었습니다. 담장 또한 부서지고 무너져 가슴이 아픈 상태에서 앞으로는 선성(先聖)을 편히 모시고 교사와 서생이 거처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강귀손 목사는 부임하자마자 선성(先聖)과 선사(先師)를 배알하고 강당에 앉아 서생들에게 예를 받은 후에 전당(殿堂)과 재사(齋舍)를 돌아보고는 '아, 슬프다! 어찌 이렇게 방치할 수 있단 말인가? 향교를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주상께서 소신小臣을 믿고 이 고을을 돌보라는 성의에 어떻게 보답하며 후일 전하의 앞에 나아가 직분을 수행했다고 아뢸 수 있겠는가!'라 하며, 재목을 모으고 기와를 구해 향교 수축의 역사(役事)를 시작하였습니다.
목사께서는 백성들의 부역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일을 상주 관아에서 직접 관장하였습니다. 목사께서 직접 감독하여 일을 시키니 오랜 시일이 지나지 않아 기둥이 흔들리는 것은 바로 일으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부러진 서까래는 새로 갈아 넣고 재사의 허술한 곳에 창과 벽을 하여 정비하고 담장이 허물어진 곳까지 모두 개축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유생들이 편안히 거처하고 잠자며 그 안에서 경전을 외우고 익히게 된 것은 모두 목사의 공력 덕분입니다. 이제 강 목사께서 조만간 조정으로 영전될 것이니 원하옵건대 이 사실을 기록하여 강 목사의 공적을 이곳에 남기도록 해 주십시오"라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대성전 중건 상량문에는 ‘삼가 생각하니 상주에서 묘우를 세운 것은 지난날 지방에서 군병이 철수한 때부터이다. 제기를 차리고 이정(二丁. 봄가을에 있는 정일 丁日)에 제사를 거행하였으나 여러 기둥과 첩공(疊栱) 등 다섯 기둥의 묘우의 형체는 넓지 못하다. 궁벽은 둘러보아도 칭송을 듣지 못하였고 환륜(奐輪)은 진동하여 고쳐야 한다. 이에 옛날 모습을 고치고 광대한 규모는 옛 것을 새롭게 하였다.’라 하고 있다.
흥폐전말에 대한 내용에는 ‘아, 오직 상주는 백육(百六)의 액운과 임진년의 병란을 당하였고 300여 년 전, 정해년(丁亥年)에 화재를 만났으니 옛날의 규범을 회복하기는 아득하다. 그리고 또 경인년 병란을 만나 대성전 내부와 탁상과 여러 가지 물품이 한꺼번에 없어졌다. 하늘이 유림을 망하게 하지않고 도는 영원히 추락하지 않는 법이니 도남 단소의 전 단장(壇長)인 정재철이 임진년 5월 5일에 지역 사람들을 크게 모아 논의를 확정하였는데 먼저 오성(五聖)을 주벽으로 복설하여 갑오년 성탄일에 위판을 봉안하기로 하였다.’하고 있고, 향당에 보내는 편지에는 ‘족형 송이회가 임진왜란을 당했을 때 사람들이 몸을 떨면서 놀라 정신없이 피란하여 달아날 때 분개하고 선도하여 선성(先聖)의 위판을 받들어 임시로 구덩이를 파서 묻어 전쟁으로 인해 없어지는 폐단을 막았다고 합니다.’라 하고 있다.
도남서원사적에는 이준이 쓴 방백에게 올리는 장계와 이준이 지은 도남서원상량문과 정경세가 지은 도남서원상량문이 있다. 방백에게 올리는 장계에서는 ‘존경하는 오현(五賢)의 출생이 모두 고개 남쪽이라 백성의 성품은 하늘에서 태어나,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고 우리 고을의 탄생이 가까운 곳이니 유풍(遺風)을 더욱 받게 되었습니다.’라 하여 5현에 모시는 배경을 설명하고 있는데, 서원을 건립할 때 목사가 도와줄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도남서원 상량문은 이준이 지은 것과 정경세가 지은 것 2개로 기록되어 있다. 최근 발행한 도남서원지와 도남서원속지에도 2개가 나란히 실려 있다. 내용은 상량문 본래의 양식과 크게 다른 점이 없지만, 이준이 지은 상량문의 경우, 창석 이준의 문집인 <창석집>에도 실려 있지 않은 점이 의아하다. 이 정도 비중이 있는 곳에 관한 글인데 어떻게 <창석집>을 편찬하면서 제외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옥성서원 사적은 5선생 약력, 월간 선생 약력, 창석 선생 약력, 우복 선생 언행록, 양 선생사기, 봉안학사 김선생문, 양정축문, 봉안 영천 신선생문, 양정축문, 봉안 후계 김선생문, 양정축문, 봉안 월간 이선생문, 상향축문, 봉안 창석 이선생문, 상향축문, 검간 조정에게 보내는 편지, 전 사서에게 보내는 편지, 변의, 사우상량문, 서원이건상량문, 옥성사적후지 등이 있다. 내용이 가장 방대하고 자세하다. 옥성서원에 배향된 인물이 난계 김득배, 영천 신잠, 후계 김범, 월간 이전, 창석 이준이다. 그래서 다섯 분의 약력을 기록하였다.
우복선생의 언행록에는 ‘옛날 영천 신잠이 이 고을에 부임하여 학문을 일으키는 것을 정치적 이념으로 삼아 서당을 설치하여 학교를 세운 공이 있고 또 유애비가 있으므로 어른들이 서원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자는 논의가 있었다.
사서 전식이 경주에 있을 때 편지를 보내어 이 일에 대해 문의하자 선생 또한 좋다고 하였으나 그 때가 아닌 듯 하다고 답을 하였다. 그때 신잠의 외손인 이명이 남수(南帥)로 있었기 때문에 선생의 뜻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하게 처리하자는 뜻이다.’라 하여, 건립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두 선생에 대한 실기는 ‘아, 학사 김 선생은 큰 어려움을 물리치고 백성들의 목숨을 구제하였고, 영천 신선생의 교육을 일으킨 정책과 문풍(文風)을 천명한 그 공로는 위대하니,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는 것이 당연한데 우리 고을과 우리 군읍은 아직까지 제사지내는 곳이 없으니 옛 어른들이 탄식한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숭정(崇禎) 신미년 가을에 목사 이명 공이 편지를 보내서 우복 및 여러 분에게 말하기를 “본 고을의 여러 어른들이 선현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자 하는데 재력이 부족한 것을 염려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제가 감히 약간의 재물로 경비를 감당하고 또 일하는데 노비를 보내 일꾼으로 삼으려 합니다.”라 하였으니 이것은 공이 영천 신 선생에게 외손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우복 및 여러 분들이 편지를 보내 한숨지으며 “서원을 세우는 것은 우리 고장의 뜻입니다. 두 선현의 도가 잊혀지고 드러나지 못한 지가, 한 분은 수 백 년이나 되었고 또 한 분은 80년이나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 고을 사람들의 좋아하고 싫어함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일은 그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오래되어 충직한 마음이 더욱 드러나고 몸은 죽었으나 그 도는 더욱 빛이 나니 비록 잠깐 동안은 드러나지 못했다고 해도 끝내 영원한 시간 동안 빛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어찌 타고난 천성과 덕을 좋아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는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이 옥성서원의 강당 뒤에 제사공간을 마련하고 고을의 여러 선비들에게 그 일을 책임져 시행하게 하니 강당은 바로 영천 신잠 선생이 본 고을에 오셔서 창건한 건물입니다”라 하여 서당에서 서원으로 승격하는 과정에서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다섯 분에 대한 봉안문과 축문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 이준이 검간 조정에게 보낸 편지에는, “태산 같이 큰 공덕이 있었으나 오히려 간신배들에게 피를 흘리게 되었으니 충직하고 장엄한 영혼이 지금 구천 아래에서 흐느끼고 있는 지 300여 년이나 되어도 아직 누명을 씻지 못하고 있는데 더구나 우리같이 같은 고향에서 태어난 뜻 있는 선비들이 수 백 대에 걸친 충열(忠烈)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비록 쓰러져 갈 당시 안용의 적을 줄일 수는 없었어도 어찌 한 고을에서 의풍(義風)을 일으켜 평소 제사 지내는 정성을 마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당을 세우는 도는 한결같지 않지만 어떤 곳은 효행으로, 어떤 곳은 충직으로, 어떤 곳은 절의로, 어떤 곳은 도학으로, 또 어떤 곳은 국가에 공이 있는 것으로, 또 어떤 곳은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푼 것이 있는 경우로 지었는데, 옛 일을 고려해 보면 그 종류는 모두 다르지만 그것은 한 세대에 표창이 될 뿐 아니라 또한 후배들에게도 긍지가 되니, 여러 문헌을 고려해 보면 지금까지 묘우를 전국에 펼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비단 선현을 표창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후세 사람들을 장려하고 권장하는 것입니다.’라 하여 고려말 충신인 김득배를 봉안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특히 ‘근래에 강응철이 사당에 입향하는 것이 타당하지 못하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혹 선생의 큰 충성과, 공적, 그리고 원한을 모르는 것 같으니 또한 이런 나의 견해를 붙여 형께서 이런 의논을 잘 설득해 주길 바랍니다.’라고 하여, 김득배를 봉안하는 문제에 대해 이견이 있지만 잘 설득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전이 전식에게 보낸 편지에는 ‘어떤 사람들이 김학사는 무인이니 후계 선생을 그 아래에 함께 모신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크게 보아도 꼭 들어맞지 않습니다. 이른바 학사라는 말은 유학자의 관료 중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뽑은 것이므로 무인으로서는 얻을 수 있는 칭호가 아닙니다.
그리고 또 포은 선생은 그의 문하생인데 그가 지은 시에 ‘서생으로서 글을 읽은 것에 합당하였다.’라는 문구가 있어 사적이 이처럼 명백하니 당초에 우복 등 여러 분들이 사당을 세워 봉향하자는 논의를 한 것이므로 그 사업의 충절을 볼 수가 있는데 어찌 허황된 말이 함부로 나와 우리 고을의 성대한 행사를 그르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시한번 원하건대 잘 생각하시어 타일러서 지당하다는 뜻에 합치될 수 있도록 힘써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 하여, 난계 김득배가 무인이므로 후계 김범을 함께 배향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서 전식이 지은 변의는 ‘난계 김득배를 서원에 모신 후에 일반 유림들이 간혹 무인이라고 빈정거리고 위차도 영천 신잠보다 위라고 못 마땅해 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의 관직은 정당문학이니 무인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포은 정몽주가 지은 시에 ‘공은 본래 서생으로 글을 토론하기가 적합한데 어찌 칼을 잡고 삼군을 관장하겠는가? 충직하고 강직한 혼백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머리 돌려 청산을 보니 흰 구름만 보인다네.’라고 하고 있느니 유학자로 생각하여 도원수로 삼은 것이다. 충직하고 강직한 혼백이라는 글자를 보면 또한 아주 공력이 있다는 것이다. 년대 또한 영천 신잠보다 앞서니 위차에 있어서 위에 가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단 말인가?’라 하여 당시 의견이 분분한 점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이종린이 지은 옥성서원후지에는 ‘인조대왕 8년(1630)인 경오년 여름에 옥성서당에 모여 신잠(申潛) 목사를 모시는 사당 건립을 논의 하였다.
옥성서원이란 예전에는 서산의 북쪽 기슭에 있는 옥봉(玉峰) 아래에 있었으며 신목사가 서당을 창건하는 날에 손수 옥성서원이라는 네 글자를 손수 크게 쓰시고, 이것으로 현액을 한 곳이다. 4년이 지난 계유년 가을에 신 선생에 대한 제사를 지냈으며 아울러 난계(蘭溪) 김득배(金得培)도 함께 모셨다. 다시 4년이 지난 병오년 가을에 향교에서 후계(后溪) 김범(金範)을 옥성서원에 추배하는 일을 논의하였다.
이로부터 11년 지난 정해년에 김 선생을 배향하는 제사를 지냈는데 이와 함께 나의 작은 선조이신 창석(蒼石) 선생도 함께 배향하였다. 이듬 해에 월간 선조께서 돌아가시자, 상례도 다하지 못한 상황에서 옥봉이 산사태로 무너져 내려 근근이 위판을 보존하여 합당한 장소를 찾아 청효서당(靑驍書堂, 지금의 수선서당)에 이안하였다. 그런데 청효서당 또한 신목사가 세운 서당으로 옥성서원과 같으며 임진왜란 때에 불타버린 것을 선조께서 다시 일으킨 서당이다. 그 후 1710년(숙종 36)에 새로이 진등마루 아래에 서원의 건물을 완성하고 나의 선조이신 월간(月澗) 이전(李㙉)을 함께 배향하였다.’ 라 하여 다섯 분을 모시게 된 배경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향사당 사적에는 향언록 본원 사적, 향사당 제명 서문, 향안록 서문, 향사당 중건기 등이 있다. 향언록 본원 사적에서는 월간 선생 년보를 인용하였는데 ‘본 고을에는 예로부터 이 기록이 있었으니 국초이래 상주 향내의 높은 벼슬을 한 분들의 성명을 한 책에 모두 기록하여 함에 담아 벽에 감추었던 것은 세족을 분별하고 향내의 기강을 잡으며 민속을 바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임진년의 난리에 그 기록물이 불에 타버리고 을미년에 어른들이 서로 모여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지금까지 전해오고 듣고 있던 것을 추가로 기록하여 한 부를 모아 옮겨 베끼니 겨우 십 분의 일 이 정도이다.’라 하고 있다. 정경세가 지은 상주 향안록 서에는 ‘고을에 향안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족(世族)을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세족을 구별하는 것은 어디에 쓰기 위해서인가? 장차 그로 하여금 한 고을의 기강을 세워서 백성들의 풍속을 바로잡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어진 사람을 뽑아서 하면 충분할 터인데 반드시 세족 가운데에서 구하는 것은 왜 그런가? 고을 사람들이 존경하고 어려워하는 바이므로, 능히 아전과 백성들을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을 뽑기 위해서는 명망가의 집안에서 뽑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향안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고, ‘임진년(1592, 선조 25)의 난리 때 향안이 병화(兵火)에 불탔다. 그 뒤 을미년(1595, 선조 28)에 고을의 부로(父老)인 김련(金鍊)ㆍ김체신(金體信)ㆍ김각(金覺)ㆍ강익경(康益敬)ㆍ박여형(朴汝珩) 등 제공들이 서로 개탄스럽게 여겨 뒤늦게 기억해 내어 기록하였는데, 겨우 십 분의 이 삼 정도만 기록할 수가 있었고, 전해들은 앞 세대의 기록은 대부분 누락되었다. 그리고 날짜의 선후 역시 징험할 길이 없었다. 드디어 이를 한 책자에 차례 차례 쓰고《상주향안구적(尙州鄕案舊籍)》이라 이름을 붙였다.’라고 하여, 기존에 있던 향안록을 다시 완성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준이 지은 향사당 중건기에는 ‘향사당은 돌아가신 지현(知縣) 한순이 창건하고 몸소 그 일을 감독하여 편액을 새겨 벽에 걸었는데 임진왜란 때 강당과 편액이 모두 불에 탔는데 19년이 지난 경술년에 한순의 손자인 한중영이 향정(鄕正)이 되어 옛날 터에 그대로 복원하여 수백 년 문물이 모두 사라져 없어진 그 뒤에 터를 열고 건물을 세운 그 모습은 특별나서 고을 사람들이 기쁘게 볼 수 있도록 하였으니 한중영은 이 향사당에 있어서 비록 선조의 업을 이른 경우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라 하여, 향사당의 내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존애원 사적은 존애원기, 낙사 합계 본안서, 일묵재 선생 연보에서 뽑은 글, 존애원 수정안 좌목 등이 있다. 낙사합계 본안서에는 병인년 계와 무인년 계를 합하여 낙사계라 명명한 내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또 ‘우리 계원은 모두 24인으로, 그중에는 부형(父兄)도 있고 자제도 있다. 옛사람들은 부형과 더불어 말을 나눌 적에는 자제를 부리는 일에 대해서 말하였고, 자제와 더불어 말할 적에는 부형을 섬기는 일에 대해서 말하였다. 이는 대개 각자 자신들의 도리를 다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라 하여 낙사계원은 24명임을 밝히고 있다.
존애원 수정 안 좌목에는 존애원 안을 수정할 때 쓴 좌목인데 기해년에 계를 합칠 때는 24명인데 추가로 2명을 더 넣고, 4명은 수행한다고 하여 모두 30명을 기록하고 있다. 각 명단은 자를 먼저 기록하고 출생년도를 그 다음에 기록하며 본관은 제일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동그라미 표시를 하여 기록한 것은 수정할 때 첨기한 내용이다.
수선서당 사적은 수선서당 본원사적, 수선서당기, 수선서당원록 좌목, 수선서당 속록, 수선서당 부록 심원록, 수선서당록 수정시 임원록, 수선서당록 후지, 수선서당 중수기, 수선서당 중건 상량문 등이다. 수선서당에 대해 가장 빠른 기록은 수선서당기이다. 여기에는 ‘마을에 학문하는 사람이 옛날에는 없었지만 지방의 유궁(儒宮, 서원ㆍ書院)을 세우고자 계획하여 옛날의 가숙(家塾) 제도를 본떠 지으려고 했지만 역량이 부족하고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52년(가정 임자년, 명종 7)에 영천 신잠 선생이 선비의 정신을 이 고을에 진작시키며 학문을 흥기시켜 도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게 하고자 마음을 먹었는데, 어느 날 청리의 시냇가 버드나무 그늘에 와서 산이 마을을 빙 둘러 있고 개울이 수려한 것을 보고 선비들이 수도할 만한 곳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마을 어른들과 서당을 세우기를 상의하여 초석과 기둥을 세웠으나 지붕을 이을 기와가 없어 걱정했다. 마침 근처에 황폐한 절이 있기에 이것을 헐고 지붕을 이어 건물을 완성했다. 이로써 이단을 억제하고 유교의 도를 넓히게 되었으니 두 가지 면에서 보아 모두 잘된 일이다. 신 선생이 또 수선서원이라는 네 글자를 손수 써서 액자를 거니 글자가 무지개처럼 빛나고 눈부시게 아름다웠으며 밝은 달이 밤에 빛나는 것 같았다.
이후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 서당은 잡목이 우거진 빈터로 변했다. 사대부나 선비가 여기에 거처한 역사가 이미 40여 년이나 되었는데 애당초 이 집은 크기가 넉넉하지 못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항상 집이 좁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는데 마침내 시냇물 서쪽에 옮겨 세우게 되었다. 서당이 완공될 무렵에 임진왜란을 당해 서당은 잿더미가 된 채 흔적조차 없어지게 되었다.
계묘년(선조 36, 1603) 봄에 다시 철암산(鐵巖山) 아래에 집터를 결정하려고 의논하니 예전의 서숙과 거리가 크게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강당 세 칸과 양쪽으로 협실을 세워 방 두 칸으로 만들고, 주방, 창고, 담장 등을 모두 갖추니 참으로 내 백형의 야무진 경영의 결과라 하겠다.’하여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승배가 쓴 수선서당 중수기에는 ‘수선서당은 영천 신잠 선생이 창시하였는데 중간에 임진왜란 때 불에 타게 되었다. 우리 선조인 월간과 선조의 동생되는 창석 두 선생이 동료들과 상의 하여 터를 옮겨 다시 세우고 확장하여 크게 하였다. 강당은 세 번 옮겨 지금의 자리에 왔는데 산천이 두 손을 마주잡고 읍을 하고 있는 모습과 같다.’라 하여 중건의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추록에는 월간 선생 년보에서 뽑은 도남서원 사적에 대한 보강 내용이다. ‘선생과 우곡 송량, 석천 김각,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 등이 소호에 있는 송정에서 함께 모여 옛날부터 우리 고을만 서원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마침내 포은 정몽주, 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등을 함께 모시기로 하고 오현사를 건립하기로 하였다.’라 하여 도남서원 창설의 주인공과 논의한 장소, 배향할 인물, 묘우 명칭 등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존애원사적을 보강한 글은 병인계원 명단, 무인계원 명단, 그리고 존애원 참원록에 있는 13개 문중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5. 낙사휘찬의 의의
상주 지역의 역사서는 상산지 8종이 있다. 근래에 편찬한 상주지와 상주시사는 현 시대에 맞게 한글로 편찬되었고, 나머지 6종은 한문으로 편찬되었다. 그 6종 가운데 창석본 상산지에 1832년 편찬 상산지의 내용을 합하여 번역한 상산지와 최근 번역한 구당본 상산지가 있다. 이렇게 상산지를 현대어로 풀어 번역한 기록물은 그 지역사를 연구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최근들어 또 주목받고 있는 상주지역 역사관련 서적이 바로 낙사휘찬이다. 낙사휘찬은 본집과 속집이 있는데 이번에 번역한 것은 낙사휘찬 본집이다. 낙사휘찬은 기록의 대상을 향교, 도남서원, 옥성서원, 향사당, 존애원, 수선서당으로 하였고, 낙사휘찬 속은 그 기록의 대상을 존애원, 옥성서원, 수선서당으로 하였다.
이번에 번역본이 나오게 되면, 이 부분에 대하여 활발하게 연구할 수 있는 초석을 놓는 셈이 되고 또 이들 유적에 대한 새로운 평가의 계기가 된다. 또 존애원 관련 기록의 경우, 무고사건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좌목에는 낙사계원의 명단이 있으며, 또 13개 문중에 관한 기록도 있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 자세한 연구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런 점을 높이 평가하여 상주박물관에서 상주문화총서 발간의 일환으로 번역본을 내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상주지역 향토문화계에서는 상주지역에 전해져 오고 있는 여러 사적(史蹟)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그에 맞춰 연구 또한 활발해 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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