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박물관 소장 일제강점기 사진에 보이는 몇 가지 문제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상주박물관 학예담당
김 진 형
Ⅰ. 머리말
최근 들어 과거에 읍성이 존재했던 지자체마다 복원사업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안산, 무장(고창), 면천(당진), 광주, 하동, 김해, 밀양, 양산, 언양, 울산, 기장, 경주, 동래, 대구, 안산, 청주, 진도, 나주, 홍주읍성 등이 그것인데 복원을 완료했거나 진행 중인 지역이다. 이는 정부의 문화융성 정책 기조에 발 맞춰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읍성(邑城)이란 단어는 고려 말 이래 등장한 새로운 성격의 성(城)을 담아낼 수 있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읍성은 행정상 중요한 읍이나 해안 가 또는 국경지역에 축성하여 외부의 적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성이다. 외형으로는 산 정상부에 쌓은 산성(山城)과 큰 차이점이 없어 보이나 산성은 외적의 침입 시 피신하여 성을 지키는 군사적인 면이 컸다고 한다면, 읍성은 행정 관아가 있고, 지역 백성들이 거주하고 있어 그 지역의 행정, 국방, 경제, 교육, 문화, 사회의 총체적인 기능을 가진다.
따라서 읍성은 그 지역의 구심점이고 정체성이 묻어있던 곳이었으며, 그 지역 백성들의 삶과 애환이 녹아 있는 곳이기에 읍성이 차지하는 비중과 그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상주지역 역시 조선시대 읍성이 존재했던 곳이나 지금은 성벽이나 4대문, 관아 건물 등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과연 이 지역에 읍성이 존재했던 지역으로 보기에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다행히 일제강점기 당시 지적도라든지 조선 후기 고지도, 각종 지리지 및 역사서 등을 통해 어느 정도의 연구성과는 축적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를 통해 상주읍성의 연혁 및 범위, 내부시설, 건축구조 등 일단이 밝혀져 있다.
하지만 읍성 내의 관아시설의 위치 및 명칭이라든지 4대문의 형태, 성벽의 구조 등에 대해서는 약간의 기록자료와 고지도 상에 표현된 회화식의 자료를 중심으로 추론한 것들이어서 연구자들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상주시에서 추진하려는 읍성 복원사업이 원형에 가까운 복원을 하기 위해서는 더 확실한 기록 또는 실증자료가 필요한 실정이었다.
이러한 시점에 아주 반가운 사진자료가 상주박물관을 찾았다. 상주박물관에서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상주와 관련한 유물 구입 사업을 2012년부터 진행해 오고 있다. 이를 통해 규장각 본, 장서각 본과 함께 1리 방안에 그린 영남지도 34점을 포함하여 경상감영과 관련한 중요한 자료인『영영사례』, 우복 및 창석 집안의 여러 가지 교지 및 간찰 등 상주 지역사에서 꼭 필요한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금년에도『팔도총리교리』,『삼강행실도』등 중요한 자료가 들어왔고, 이와 함께 이 글에서 소개할 상주읍성 4대문과 시가지 풍경의 모습이 그대로 찍힌 사진엽서 7장을 입수하였다. 이 자료들은 실물이 존재하지 않는 상주읍성 4대문의 형태와 규모를 알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2015년 상주박물관이 입수한 7장의 사진에 대해 소개하고, 이 사진들을 통해 알 수 있는 몇 가지 정보를 살펴 보고자 한다.
Ⅱ. 입수 경위 및 사진현황
여기에서 소개할 7장의 사진은 전술한 바와 같이 2015년 유물구입사업 시에 입수한 것으로 매도자는 서울에서 골동품 상을 운영하는 분이다. 매도자가 밝힌 입수 경위는 2014년 도쿄에 방문했다가 동아세아 관련 근대문헌자료 및 고전적, 고문서 교환회에서 구입한 것이라 한다. 입수된 총 7장의 사진은 우편엽서의 표지에 장식된 것으로 상주읍성 4대문 사진 4장, 상주읍성 시가지 전경 1장, 수비대 전경 1장, 상주 재판소 사진 1장이다.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엽서로서 사용되지는 않았다. 크기는 7장 모두 가로 14.1cm, 세로 9.1cm이다.
전면의 각 사진 아래부분과 측면에는 사진 제목과 발행처가 표시되어 있다. 우선 발행처는 7장의 사진 모두 동일하며 하단부에 가로로 “상주육군어용달강진상점발행(尙州陸軍御用達江津商店發行)”이라 적혀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상주에 주둔했던 일본 군인에게 물품을 팔던 강진 상점이 발행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 내용의 표기 형식은 7장의 사진 모두 같은 글자체로 전각 또는 고무인 형태의 것에 글자를 새겨 청색 계통의 잉크로 찍은 것이라 보인다.
사진 제목 표기에 있어서 7장 사진 모두 제목을 표기하였다. 우선 가로 사진인 3장의 사진에는 각각 “慶尙北道尙州守備隊ノ景, 慶尙北道尙州城內市街一部ノ景, 慶尙北道尙州區 裁判所”라 우측 하단부에 표기하였다. 이것 역시 발행처의 표기 형식과 동일하게 전각 또는 고무인에 글자를 새겨 청색 계통 잉크로 찍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로 사진인 상주읍성 4대문 사진의 제목 표기 방식을 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하단부가 아닌 좌측 측면에 표기하고 있다. 이는 아래부분에 발행처와 함께 표기하기에는 공간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다.
또한 표기 방법을 보면 앞서 살펴본 발행처 및 가로 사진에 표현된 제목 표기 방식과는 달리 사진 위에 종이를 덧대어 그 위에 전각 또는 고무인에 글자를 새겨 찍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다른 사진은 발행처 및 사진 제목을 사진 위에 직접 찍어 표현한 반면, 4대문 사진의 제목 표기방식은 종이를 덧대어 찍어 인쇄했다는 것이다. 이는 어두운 부분을 피해서 제목이 잘 보일 수 있게 하려는 의도로 흰색 종이에 덧대어 위치를 조정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동문경 사진의 제목 표기를 보면 좌측에서 한참 떨어져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사진 속의 사람을 가리지 않게 하는 의도인 것 같다.
사진의 후면은 7장 사진 모두 같은 형식으로 가로로 봤을 때 상단중앙에 “UNION POSTALE UNIVERSELLE(만국우편연합)”와 바로 아래에 “CARTE POSTALE(우편엽서)"이라 프랑스어로 표기되어 있다. 그 우측으로 우표를 붙이는 곳을 점선으로 표시하였고, 그 아래에 ”郵便はかき“ 즉 우편 엽서라고 표기하였다.
이하에서는 각 사진에 나타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가. 상주읍성 동문(東門)
사진의 좌측 아래부분에 “慶尙北道尙州城東門景”이라 표기하였다.
이 사진은 성문 안쪽의 기와 건물과 담장을 통해 볼 때, 읍성 바깥에서 성문 정면을 보고 찍은 것으로 보인다. 성문은 홍예식의 문이 아니라 평거식 월단 위에 건립된 1층 문루의 형태이다. 월단의 석축은 남문과 마찬가지로 가공된 장대석으로 전체 7단으로 바른층으로 쌓고 있다. 여장은 좌ㆍ우 많이 무너져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건축양식은 익공건물로 추정되지만 건축양식은 사진상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읍성의 해자로 보이는 것이 확인되는데, 성문 진입부에는 통행을 위해 다리의 형태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성문의 형태를 보면 다른 성문에서는 보기 힘들게 성문의 상부 양쪽에 2단으로 몰딩 처리하여 쌓은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밖에서 안으로 열리는 구조의 성문이다. 기와는 암수기와를 사용하였고, 암수막새를 사용하였다. 용마루ㆍ내림마루ㆍ추녀마루에는 회로 마감되어 있고, 용마루 좌우 끝 부분에는 치미가, 내림마루 끝에는 잡상이 있으며, 용마루 중앙에도 1기의 잡상이 설치되어 있다.
성문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초가가 줄지어 위치하고 초가 마루와 문루에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나. 상주읍성 서문(西門)
사진의 좌측 아래부분에 “慶尙北道尙州城西門景”이라 표기하였다.
서문의 사진은 동문과는 달리 정면이 아닌 약간 측면에서 촬영하였다.
서문은 동문과 비슷한 양식이다. 단지 문의 상부 모서리가 직각 혹은 홍예를 가공하지 않고 6각형으로 가공한 점이 다르다. 성문의 면석은 역시 가공한 장대석으로 전체 8단으로 바른층으로 쌓았으며, 문루 위에는 벽돌의 여장이 설치되었지만 무너진 상태이다. 문루의 건축양식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익공양식은 초익공양식으로 추정한다.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회로 마감하였고, 잡상은 설치하지 않고 망와만으로 장식해 놓았다. 기와는 암수막새를 사용하였다. 성문 앞쪽에는 해자로 이용하다가 매몰한 것으로 보여진다. 성문 앞으로 어린 아이 2명과 그 옆 초가 쪽으로 성인 여성이 보인다.
다. 상주읍성 남문(南門)
사진의 좌측 아래부분에 “慶尙北道尙州城南門景”이라 표기하였다.
남문 안쪽으로 초가와 함께 왕산으로 보이는 숲이 일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남문 바깥 정면에서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남문은 홍예형의 월단 위에 건립된 1층 문루이다. 문루 중앙에는 현판이 있는데 남문의 이름으로 생각되는 3글자를 확인할 수 있지만 사진 상으로 판독할 수는 없다. 지붕은 상주읍성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우진각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월단은 아치형의 홍예로 면석을 조성하였고, 면석은 가공한 장대석으로 전체 13단으로 바른층 쌓기로 쌓았다. 성문 위에는 벽돌로 쌓은 여장이 보인다. 사진이 명확하지 않아 공포양식은 알 수 없으나 2익공이상의 익공건물로 추정된다. 기와는 암수기와를 사용하였으며, 암수막새를 모두 사용하였다. 용마루와 추녀마루는 회로 마감하였고, 추녀마루 상부에는 여러 가지 잡상을 배치하였다.
성문 양측에 문루로 올라가는 계단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성문의 상부 좌우에는 수구가 확인된다.
남문 앞쪽으로 기와 집이 줄지어 위치하고 있으며, 길에는 짧은 바지를 입은 아이들과 성인 남녀가 보인다.
라. 상주읍성 북문(北門)
사진의 좌측 아래부분에 “慶尙北道尙州城北門景”이라 표기하였다.
성문 안쪽으로 왕산과 담장 일부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바깥에서 정면으로 촬영한 사진으로 보인다. 북문은 홍예형의 월단 위에 건립된 1층 문루이다. 월단의 형식은 남문과 유사하고, 여장에는 상주읍성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길상문인 ‘수아자문(壽亞字門)’이 장식된 것이 특징이다. 문루의 형식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기둥은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고, 공포양식은 3익공형식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현무문(玄武門)’이라는 현판이 뚜렷하게 보인다. 이는 각종 문헌에 등장하는 북문의 명칭과 동일한 것을 알 수 있다.
마. 상주성내 시가일부 전경
사진의 우측 아래부분에 “慶尙北道尙州城內市街一部ノ景”이라 표기되어 있다.
이 사진은 남문 문루 위에서 왕산과 북문을 바라보며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남문 안쪽 시가지의 모습과 관아 시설이 한눈에 조망된다. 성내 중앙도로를 연결하는 끝부분에 합작지붕의 북문인 현무문이 보이고, 관아 시설로 진입하는 관문인 태평루의 모습도 보인다. 태평루 앞까지 초가의 상가가 밀집해 있으며, 많은 수의 사람들이 보인다. 태평루 뒤로 보이는 왕산에는 일본 신사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바. 상주 수비대 모습
사진의 우측 아래부분에 “慶尙北道尙州守備隊ノ景”이라 표기되어 있다.
이 사진은 왕산 아래 관아 건물지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으로 초소 앞으로 정복 차림의 일본군 수비대가 도열해 있는 모습이 보인다. 좌측의 기와 건물 출입구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상주분견소(尙州分遣所)’라는 글자가 보이고, 그 옆으로 자보대가 서있고, 옆쪽에 짧은 바지의 성인 남자가 서 있다. 건물 뒤로 보이는 왕산에는 일본 신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사. 상주구 재판소(尙州區裁判所)
사진의 우측 아래부분에 “慶尙北道尙州區裁判所”이라 표기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 5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앞면을 보면 유리창문이 설치되어 있어 근대적 재판소로 사용하기 위해 개조한 것을 알 수 있다. 기와는 암수 막새를 사용하지 않은 간략한 형태이다. 건물 앞쪽으로 분재가 잘 된 소나무 2그루를 조경수로 가꾸고 있고, 그 옆으로 정복의 성인 남성이 보인다.
Ⅲ.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는 몇 가지 정보
이하에서는 상주박물관이 입수한 사진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정보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사진의 촬영시기
상주박물관으로 입수된 사진 7장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동안 우리가 전혀 알 수 없었던 모습들이 담겨 있어 상주읍성 및 시가지 복원에 아주 중요한 자료들이다. 따라서 이들 자료들의 사료적 가치를 위해서는 촬영시기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입수한 사진엽서에는 어디에도 촬영년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결국 사진 속에 표현된 내용을 토대로 추정하는 수 밖에 없다. 입수한 사진 7장은 모두 사진 하단에 도장으로 찍어 표기한 사진 제목, 발행처 그리고 도장면의 글자체 가 같은 것으로 판단되므로 같은 시기에 발행한 사진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 사진 속의 건물들을 통해 촬영년대를 살펴보고자 한다.
<표1> 일제강점기 이전 상주읍내에 있었던 관공서
設置施設 | 設 置 日 | 設置時名稱 | 備考 |
郵便局 | 1905年 6月 9日 | 釜山郵便局尙州出張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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警察署 | 1906年 12月 | 尙州警務分署及顧問分遣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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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通學校 | 1907年 6月 1日 | 尙州公立普通學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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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學校 | 1907年 7月 11日 | 尙州公立尋常小學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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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融組合 | 1907年 10月 | 尙州金融組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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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備隊 | 1907年 12月 | 尙州守備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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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兵分遣所 | 1908年 7月 | 憲兵隊大邱分隊尙州分遣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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裁判所 | 1909年 1月 20日 | 大邱地方裁判所尙州區裁判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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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는 일제강점기 이전 상주읍내에 소재했던 관공서 현황이다. 상주박물관이 입수한 사진 가운데 위 관공서가 나타나는 것은 <사진 6>의 수비대, 헌병분견소 그리고 <사진 7>의 상주구재판소이다. <사진 6>의 상주수비대는 1907년 12월에 설치한 것으로 나오고, 헌병분견소는 1908년 7월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사진 촬영 상한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이 재판소 사진이다. 위의 표에 의하면 재판소의 설치 시기는 1909년 1월 20일 이라 되어있어 일단 관공서 설치 현황 자료만 봐서는 이 시기를 사진촬영의 상한연대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참고로 조선총독부제령의 ‘통감부재판소령’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909년 7월 12일 ‘한국의 사법 및 감옥 사무를 일본 정부에 위탁하는 건에 관한 각서’를 체결하면서, 10월 16일 일본 칙령 제236호로 ‘통감부재판소령’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통감부(統監府)는 10월 21일 통감부령 제28호로 재판소의 명칭과 관할구역을 정하여, 고등법원 1개, 공소원 3개, 지방재판소 8개, 구재판소 103개를 설치하고, 11월 1일 개청하였다. 따라서 상주구재판소는 1909년 11월 1일부터 역할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상주구재판소는 1909년 11월 1일부터 재판소의 모습을 갖추고 이와 함께 그 역할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상주박물관이 입수한 사진의 재판소 사진은 1909년 11월 1일 이후에 찍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부분은 추후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라 하겠다.
그러면 하한연대를 살펴봐야 할 것인데 제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상주읍성의 철거 기록이다. 1929년에 증보된『商山誌』권3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임자년(壬子年, 1912년)에 이르러서 그 성을 부수고, 그 누각을 허물어, 이번에는 시가 통로를 만들었다. 호지(壕池)나 성도 아울러 폐허가 되어 덧없이 미나리꽝이나 왕골밭이던 것이 이제는 전부 흙을 돋우어 가옥을 짓고 말았다. 예전의 성이나 연못이 있던 곳을 이제 다시 기억할 수 없다.
따라서 위의 내용을 볼 때, 상주읍성의 철거 연대는 1912년 경이라 볼 수 있다. 박물관이 입수한 4대문 사진들을 살펴보면 읍성 철거 이전이라 봐도 될 것이기에 1912년을 사진 촬영 하한 연대로 봐도 될 것 같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하한연대를 좀 더 줄여볼 수 있을 것 같다.
1912년 3월 29일에는 부령 제26호로, 공소원을 복심법원(覆審法院), 지방재판소를 지방법원(地方法院)으로 개칭하고, 구재판소 및 지방재판소 지부를 지방법원 지청(地方法院支廳)으로 개편하면서, 지방재판소와 지방재판소지부의 명칭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 내용을 통해 볼 때, 상주구재판소는 1912년 3월 29일 자로 지방법원으로 개편하면서 명칭까지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내용을 통틀어 볼 때, 상주박물관에서 입수한 사진의 촬영시기는 구재판소를 개청한 1909년 11월 1일이 상한이 될 것이고, 하한은 재판소를 지방법원으로 개칭하는 1912년 3월 29일 이전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2. 남문의 편액은 홍치문?
이번에는 남문의 편액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상주읍성 4대문의 편액은 다음과 같다.
| 위 치 | 편액 명칭 |
동문 | 성하동 2-30, 2-29, 2-28일원 | 敦元門, 控洛門 |
서문 | 서문로터리 일원 | 揖露門, 鎭商門 |
남문 | 성하동 5~6 일원 | 弘治舊樓 |
북문 | 인봉동 68-14 및 서성동 81-2 일원 | 玄武門 |
위의 4대문 명칭 가운데 이번에 입수한 사진을 통해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북문의 현무문이다. 동문과 서문의 사진 같은 경우에는 현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남문의 편액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남문의 명칭에 대해서 ‘弘治舊樓’로만 알고 있었다. 우선 남문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椽曺龜鑑』卷3, 觀感錄, 李三億(『國學資料 第二輯 椽曺龜鑑』, 西江大學校人文科學硏究所, 1982, p.166),?此樓 始成於 皇朝孝廟時?
- 南門樓가 처음 이루어진 것은 明의 효종연간(1488~1505)
□ “景廟辛丑 寤齋趙孝貞公正萬莅州 重修南城樓 使三億董役 役卑請額弘治舊樓 其錫名記曰 聖上元年辛丑秋 敢承侯命 董役南樓 陽月望告訖 侯將扁額 列書朱雀門鎭南門撫南樓等號 欲定其一 竊念此樓始成於皇朝孝廟時 其後二百有年更修於今日 而檻外乾坤盡爲陸沈 惟玆樑題遺躅宛然如昨 追古興懹 足可飮泣若使朱先生見之 必興詠栢之思 而抑有登此樓而起文 山不下之心者哉 遂以此白侯曰吁是可因 以弘治舊樓楣之”
(『國學資料 第二輯 椽曺龜鑑』, 西江大學校人文科學硏究所, 1982, p.166)
1721년(경종 1)에 상주목사 趙正萬이 南城樓를 중수하고, 문의 편액을 朱雀門, 鎭南門, 撫南樓 등을 列書하였다. 이 중에서 정하려하다가 당시 향리인 李三億의 건의로 弘治年間에 이루어진 樓이므로 弘治舊樓로 하였다.
□ “壬子重修弘治舊樓”
(『尙州牧先生案』牧使 洪鍾茂)
1852년(철종3)에 상주목사 洪鍾茂가 弘治舊樓를 중수하였다
□ “重建南門弘治樓 重修東門曰敦元門西門曰鎭商門 竣畢南北門虹霓及四面城役”
(『尙州牧先生案』牧使 閔致序)
1870~1871년에 재임한 상주목사 閔致序가 중수하고 虹霓도 수리하였다.
□ “弘治舊樓 邑城南門二層樓 大正十三年移建干尙州面事務所構內 爲會議室”
(『商山誌』新增 舊公署)
1924년 상주면사무소 구내로 이건하고, 문루를 회의실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모든 문헌기록에는 남문의 명칭을 ‘홍치구루’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상주박물관이 입수한 사진 가운데 남문의 사진 편액을 살펴보면 희미하지만 분명 “홍치구루(弘治舊樓)” 4글자가 아닌 세 글자로 된 것은 분명하다. 앞에 두 글자는 판독이 안되지만, 끝의 글자는 ‘門’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었던 남문의 명칭은 홍치구루 외에도 다른 명칭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또는 ‘홍치구루’와 ‘00門’ 명칭이 동시에 사용되었거나 ‘홍치구루’로 명칭이 사용되다가 후에 ‘00문’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 다른 문헌기록이 나와야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
하지만 입수된 사진 상의 남문 편액이 ‘00門’ 이었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참고가 된다.
읍성의 성벽이 허물어진 전후 시기인 1912년 12월 10~11일에, 조선총독부의 고적보존위원이었던 關野貞, 谷井濟一, 栗山俊一의 일행이 상주에 들러 조사를 행하고, 고적으로서의 가치를 갑을병정으로 등급을 매겼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상주지역의 주요 유물 가운데 달천리 삼층석탑(현, 화달리 삼층석탑), 상내리 다층석탑(상오리 칠층석탑)이 을로 평가하였고, 상주의 읍치에 대해서는 객사 상산관, 객사 진남루, 객사 중문, 읍성남문 홍치문, 읍성서문 진상문을 조사하여 각각 병ㆍ병ㆍ정ㆍ병ㆍ정으로 평가했다. 이 일행이 평가한 내용에 중에는 갑으로 평가한 유물은 없었다.
위와 같은 내용을 볼 때, 세키노다다시(關野貞)를 포함한 세 명이 어떠한 식으로 조사를 하고 등급을 매겼는지는 몰라도 일단 남문의 명칭을 홍치문(弘治門)이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조사 시기가 1912년이므로 앞서 살펴 본 촬영년대와도 유사하다. 물론 당시 조사 일행이 홍치구루를 줄여서 홍치문이라 기록하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 일행이 조사한 다른 문화재의 명칭을 정확하게 기록한 점과 당시 현판이 붙어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한다면, 상주박물관이 입수한 남문 사진 상의 편액 명칭은 ‘홍치문’이 아니었겠나 생각된다. 이처럼 남문의 명칭은 ‘홍치구루’로 불리었지만 현판은 ‘홍치문’을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문의 명칭과 관련해서 1831년 상주목사 吳致成이 진상문을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 강주진 소장의 상주읍성도에는 서문을 읍로문이라 기록하고 있다. 결국 1910년 세키노다다시의 조사 보고서에는 서문을 진상문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서문의 명칭은 읍로문에서 진상문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3. 상주구재판소의 위치 및 모습
여기에서는 <사진 7>의 상주구재판소의 위치와 규모와 관련된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상주구재판소에 대해서는 1929년에 증보한『商山誌』권3 공서조에 “옛 戶長廳에다 창고, 검사실, 법정을 증축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고 강주진 소장의 상주읍성도나 기타 읍성관련 지도에는 호장청이 표기되어 있지 않아 재판소의 위치를 찾는 것이 어렵다. 다행히『상주지』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록이 있어 참고가 된다.
“최초의 청사는 구 호장청 자리로서 현재의 상주시 남성동 13의 9 垈 6,585평방미터에 건립되어 1950년의 6ㆍ25사변 때까지 사용하다가 그때 건물이 거의 소실됨에 따라 1951년 구 축산협동조합사무실(상주시 서성동 103-3) 및 세무서의 일부를 빌려 1953년 10월 30일까지 집무한 후 다시 구 청사로 이사하였는데, 소실된 구 청사를 복구하기 위해 청사복구추진위원회가 설립되어 상주지원은 동위원회로부터 건물을 기부체납 받았다. 1965년 7월 7일에는 법정과 부속시설을 새로 증축하였다가 1971년 12월 19일에 현재의 상주시 만산동 652의 2외 7필의 대지 15,173평방미터 지상에 현대식 건물을 새로 건립하고 검찰청 지청과 함께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의『상주지』기록을 통해 보면, 일단 상주구재판소는 상산지의 기록과 함께 옛 호장청 자리가 맞는 것 같고 그 위치는 남성동 13의 9번지인 지금의 그린맨션 자리가 된다. 그렇다면 남성동 13-9번지의 자리는 옛 호장청 자리이고, 그 자리에 상주구재판소를 건립하고 1929년 다시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이 신축한 것이다. 1929년 상주지청 신축과 관련해서는 당시 도면과 사진이 전한다.
사진 10. 상주지청 전경(이창희 소장) 사진
사진 11. 상주지청 신축 설계도(1929년)
<사진 10>은 1950년 경이라 알려진 상주지청의 전경이다. 현재의 ‘만해 횟집’ 자리인 상주읍사무소 옥상에서 촬영한 것이 분명하다. 상주지청의 우측 뒷부분의 기와집은 심토재 건물로 보이고, 그 뒤에 펼쳐진 산은 남산이다.
<사진 11>의 도면은 도면 우측에 소화 4년이라 적혀있는 1929년도 상주지청 신축 설계도이다. 좌측 사진은 2층으로 되어 있는 것에 반해 우측 1929년도 도면에는 1층이다. 아마 후에 증축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 12>는 1929년에 계획한 상주지청의 신축 배치도와 청사 설계도이다. 배치도를 보면, 부지의 중앙에 약간 뒤쪽으로 청사가 놓이고, 그 후면에 통로로 연결된 부속건물이 있으며, 청사의 주변에는 독립된 건물로 창고, 유치장, 공중변소가 계획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청사는 ㅡ자형의 전면부를 몸체로 좌우 단부가 전후로 돌출된 형태의 건물인데, 좌우 양측에 각각 서기과 사무실과 대ㆍ소법정이 계획되어 있으며, 중앙부분에 예심정, 관사실, 응접실, 검사실이 계획되어 있다. 후면의 독립 건물인 부속가에는 숙직실, 탕비소, 변소가 설치되었다. 즉 본채에 설치된 법정, 사무실, 판ㆍ검사실이 사법시설 운영의 가장 핵심적인 공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사진 13>의 1927년도 상주 지형도를 보면 남성동 13의 9 자리로 보이는 부분(동그랗게 표시)의 건물 평면은 <사진 12>의 상주지청 신축계획 도면과 유사하다. 따라서 상주구재판소와 상주지청의 위치는 <사진 13> 지형도의 표시된 부분이 맞는 것 같다.
그리고 국가기록원에서 소장 중인 일제 강점기 건축도면 가운데에는 상주구재판소의 개수도면이 보인다. 상주박물관이 입수한 <사진 7>과 비교해 볼 수 있어서 복원한다면 아주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당시 건물의 계획은 탁지부 산하의 건축소(建築所)에서 담당하였는데, 1909년 간행한『건축소사업개요 제1차(建築所事業槪要 第1次)』에는 지방재판소 계획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우선, 동일 지방에 지방재판소와 구재판소가 병치되는 경우에는 한 건물에 두 재판소를 설치하여 집무에 적절하고 경제적으로 편리하게 계획하였는데, 본관은 丁자형의 목조 2층 건물로 하고, 외부는 영국식 비늘판벽(英吉利下見板張)으로 마감하였는데, 부분적으로 생삽(生澁)을 칠하였다. 본관의 밖에는 부속 건물(附屬屋)로 일반인 대기소(人民控所), 변호사실, 피고인 유치소 등을 설치하였다.
상주구재판소는 전체 평면을 ‘ㄴ’자형으로 계획하였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고, 전면 중앙에 현관을 두었다. 내부에는 민사정(民事廷)과 형사정(刑事廷), 소장실(所長室)과 판사실(判事室,) 검사장실(檢事長室)이 위치한다. 청사의 후면에 연결된 작은 부속 건물에는 온돌을 설치한 공판정과 소사실(小使室), 변소, 탕비소(湯沸所) 등을 계획하였다. 이처럼 이 도면 자료를 통해 상주구재판소의 실제 모습을 알 수 있고, 추후 복원자료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4. 청유당 및 제금당의 위치 문제
동헌(東軒)은 왕산 아래에 있었는데, 여러 차례 화재를 당하였다. 1827년(순조 27)에 목사 홍세주(洪世周)가 중건하고 현판을 청유당(聽猶堂)이라 하였다. 동편에 루(樓)를 세우고, 오호루(五皓樓)라 하였다. 이 청유당은 본래 사무당(使無堂)이었다. 그 구기(舊基)에 청유당을 세운 것이다. 또한「상주읍성도」에는 청유당 동편에 공고(工庫)라는 건물이 있다. 아마 공작 기구 창고였을 것이다. 서헌(西軒)은 청유당의 서편에 있었다. 제금당(製錦堂)이라 했으며, 구 명이 군자헌(君子軒)인데 목사 김상용(金尙容, 1604~1606 재임)이 창건하고,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이름하였다. 목사 김경진(金敬鎭, 1855~1857 재임)이 중수하였다.
위와 같이 상주읍성 내에는 주요 관아 건물인 동헌과 서헌이 위치했다. 이와 관련하여 상주박물관이 입수한 사진 가운데 <사진 6>을 통해 청유당과 제금당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사진 6>을 보면 우측 아래부분에 “慶尙北道尙州守備隊ノ景”이라 표기하고 있다. 이 사진은 왕산 아래 관아 건물지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으로 초소 앞으로 정복 차림의 일본군 수비대가 도열해 있는 모습이 보인다. 좌측의 기와 건물 출입구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상주분견소(尙州分遣所)’라는 글자가 보인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상주 수비대는 1917년 12월에 설치하였다. 수비대는 순수한 군대로서,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후에 조일(朝日)간에 맺은 제물포조약에 따라 일본 공사관(公使館)의 호위를 위해서 파견한 수비대를 그 전사(前史)로 한다. 상주 수비에 대해서는 아래의 문헌기록이 참고가 된다.
군청 옛 동헌 청유당이 왕산 하에 정남향으로 있었는데, 1901년 군수 이한응이 재임하여 와서 실화하니, 그 후부터 군수가 제금당에 거처하였으며, 수년 후 수비대가 되고, 또 세무서가 옮겨 오니....
舊東軒聽猶堂在王山下正南向光武五年辛丑李侯漢膺再任本州時適失火未建自後郡守權處干制錦堂其後乙巳丙午年間因守備隊駐在...
이처럼 문헌 기록만을 놓고 본다면 <사진 6>의 좌측 건물이 원래 청유당 또는 제금당으로 1907년 상주 수비대가 들어오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청유당 뒤쪽의 기와 건물은 죽리관으로 판단된다. 이는 기존의 연구에서도 이미 언급된 바가 있는데 이번에 입수된 사진을 통해서 그 위치는 보다 명확해 진 것 같다.
Ⅳ. 맺음 말
지금까지 금년 상주박물관에서 입수한 일제강점기 사진자료를 소개하였다. 입수 경위와 각 사진 별 현황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각 사진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문제를 고민해 보았다.
상주구재판소 사진을 통해 입수한 사진의 촬영 연대를 1909년 경부터 1912년 3월 29일 이전으로 생각해 보았고, 남문의 명칭에 대해서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홍치구루’ 외에도 실제로 ‘홍치문’이라는 현판을 썼다는 사실도 추정할 수 있었다. 물론 남문의 앞뒤 현판에 각각 홍치구루, 홍치문이라 걸려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상주구재판소의 위치를 국가기록원에 남아있는 도면을 통해서 1923년 지형도에 맞추어 위치를 추적해 보았고, 실제 상주지방법원과 상주구재판소의 도면을 찾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끝으로 상주수비대 전경 사진을 통해 동헌인 청유당의 위치와 건물 모습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 글에서 살펴보지 못한 읍성 4대문의 재원, 구재판소, 지방법원에 대해서는 고건축협회 등에 의뢰, 조사연구하여 정확한 수치와 규모를 알아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의 일제강점기 사진 몇 장을 토대로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부분을 생각할 수 있었던 점은 이 사진들이 가지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지역 상주처럼 읍성과 관련한 소중한 자료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는 이 시점에서 이번에 상주박물관이 입수한 사진은 지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기초사료가 될 수 있었다.
이 글에서 다룬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또 우리 앞에 나타날 이 시대의 사진이라던지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통해서 명확히 밝혀질 것이고, 훨씬 더 많은 부분이 정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무쪼록 이를 계기로 상주읍성에 대한 연구가 한층 더 진일보 발전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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