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인물 제5권

상주학. 상주의 인물 제5권. 단지주혈의 효자 염행검(廉行儉)

빛마당 2017. 1. 27. 20:20

단지주혈의 효자 염행검(廉行儉)

                                                                                                              김 재 수

 

 상주시 외서면사무소로 가는 길을 따라 가다보면 외서면 봉강 1리에서 옛 배영초등학교를 만난다. 지금은 ‘상주환경농업학교’이다. 환경농업학교를 막 지나 조그마한 다리를 건너기 위해 좌회전을 하면 아담한 마을이 보인다. 이 마을이 행갈(杏葛) 마을이다. 행갈 마을은 기말개 남쪽과 정철 동쪽에 있는 마을인데 다음과 같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효성이 지극한 염백호 라는 효자가 은행나무 한 그루를 정성들여 가꾸다가 죽었다. 그가 죽은 후 산에서 잎이 없는 흰 칡이 마을의 은행나무까지 내려와 3년간이나 띠를 두르고 흰 꽃이 피었는데 그 후 이 마을 이름을 은행나무 ‘행(杏)’자와 칡 ‘갈(葛)’자를 더해서 행갈이라고 했다. 조희열,『상주지명총람』상주문화원 상주얼찾기회, 2003, 813쪽.
 
  다만 마을 유래에 등장하는 염백호 라는 인물이 염행검 공과 동일 인물임은 알 수 없지만 이러한 마을 유래에 딱 맞게 조선시대에 지극한 효자 한 사람이 행갈 마을에 살고 있었다.
  염행검[(廉行儉, 1628(인조 6)~1703(숙종 29)] 본관은 곡성(曲城)-지금은 파주(坡州)로 조선 후기의 효자였다. 문하시중 제신(悌臣)의 후예이며 생원(生員) 민중(敏中)의 증손인데 그도 생원이다. 뛰어난 효자로 인조, 효종, 현종, 숙종의 4조에 걸쳐 76세를 향수했다.
  파주 염씨의 중시조인 염제신(廉悌臣 시호; 충경공(忠敬公), 1304~1382년) 공은 시조의 13대 후손이며 고려시대 문무(文武)를 겸비한 이름 높은 신하였다. 고려왕(충숙왕,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우왕)을 30년 간 섬기며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 오르고 곡성부원군에 봉해져, 고려 역사에 빛날 뿐만 아니라 염 씨를 부흥시킨 분으로, 후손들은 염제신(廉悌臣) 공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특히 이분은 공민왕께서 친히 그려 하사한 초상화가 있는데, 보물로 지정되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또한 왕명에 의하여 목은 이색이 찬하고, 청성군 한수가 글을 써서 세운 신도비가 경기도 장단군 묘소 앞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파주 염 씨 4세인 염이(廉怡-閉窩公) 선조가 임종 전에 자손들에게 남긴 말씀으로 유명하다.

  충효로 근본을 삼고 경학으로 업을 삼아 문호를 보전하고 과거보는 일을 일삼지 말 것이며 관작과 영달을 구하지 말고 화와 욕을 멀리하라.[忠孝爲本 經學爲業 以保門戶 勿事科第 勿求官達 以遠禍辱(충효위본 경학위업 이보문호 물사과제 물구관달 이원화욕)]
 
 라는 말씀이었다.
  이는 “충효를 대대에 물려주되 맑고 깨끗함을 업을 삼은 것이 그 유래에 있어서이다.(諸昆之世襲 忠孝 淸寒爲業者 有所由來矣)” 라는 말씀을 덧붙여 가문에 이어져 내려온 훈계의 뿌리였다.
http://www.pajuyom.kr/liter/liter.php?main=sijo.html&PageNum=1&sub=1&m=1 파주 염씨 인터넷 족보에서

  이러한 조상의 유훈을 받드는 삶을 실제로 살아오신 분이 바로 염행검(廉行儉) 공이었다.
  공이 7세 때였다.
  소년의 어머니 한씨(韓氏)가 병으로 눕게 되었다.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를 했지만 많은 약이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기력이 떨어져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어머니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는 그에게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사람의 피를 마시면 어떤 병도 낳는다고 했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소년은 장도칼을 꺼내 들었다.

 “어머니가 깨어나신다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소년은 장도칼로 자신의 왼쪽 약지 손가락을 그었다. 손가락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머니, 눈 좀 떠세요. 그리고 이것을 드세요.”

  소년은 흐르는 피를 어머니의 입술을 열고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소년의 정성에 하늘이 감동했는지 어머니는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자신이 아픈 것은 다 잊어버리고 날듯이 기뻤다.
  이렇게 소생한 어머니는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 날 수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12세 때는 어머니가 다시 전염병에 걸렸다. 전염병에 걸리면 어쩔 수 없이 가족과는 떨어져 치료를 해야 했다. 다른 사람에게 병이 옮는 것을 막기 위한 방법이었다. 전염병으로 인해 어머니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자신이 한 없이 밉고 슬펐다. 그는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머니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병환은 내가 치료해 드려야 해.”

  이렇게 굳게 결심한 그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했다. 그리고는 솔잎을 따다가 자신의 코를 찔렀다. 솔잎으로 코를 찌르자 소년은 코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때다’ 하고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아버님, 저도 전염병에 걸렸나 봅니다. 지금 코에서 코피가 자꾸만 흐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보니 정말 아들의 코에서 코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도 전염병에 걸렸으니 어머니 곁으로 당장 갈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전염병에 걸렸다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인데 아들마저 전염병 환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자 망연자실 아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쩌겠느냐. 너마져 전염병에 걸리다니. 이왕 간다면 어머니를 잘 보살펴 주도록 해라.”

  소년은 이렇게 해서 다른 환자들과 함께 계시는 어머니 곁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는 다시 손가락에 피를 내어 어머니께 드리면서 하늘에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천지신명이시여! 어머니의 병을 고쳐 주시옵소서. 어머니의 병환만 낫는 다면 이 몸은 어떤 병에 걸려도 좋사옵니다. 어머니의 병만은 고쳐 주소서.”

  소년의 기도는 하늘을 감동 시켰다. 어머니의 병은 차츰 낫게 되고 마침내 소년과 함께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소년은 자라서 청년이 되었다. 그의 부모님 공경은 여전히 특별하였다. 있는 정성 없는 정성을 다하여 부모님을 받들어 모셨다.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얘야, 오늘은 갑자기 물고기가 먹고 쉽구나. 나도 주책이지. 이 추운 겨울에 물고기가 먹고 싶다니....”

  아버님이 물고기가 드시고 싶다는 말에 아들은 서슴지 않고 강가로 나갔다. 강가에는 매서운 겨울 바람만 얼어붙은 강바닥 위에 불고 있었다.

 ‘어디에 물고기가 있을까?’

  아들은 낚싯대와 망치를 들고 강바닥 이곳 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참을 살피던 아들 눈에 강기슭 한 곳에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발견했다.
 
 ‘꽁꽁 얼어붙은 강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다니……’

  아들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망치로 그 곳의 얼음을 깨기 시작했다. 얼음은 생각보다 쉽게 깨어지고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아들은 얼른 낚싯대를 그 구멍으로 드리웠다. 낚싯대를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퍼드덕” 하며 커다란 물고기가 꼬리를 치며 낚싯대에 걸려들었다.

 ‘하늘이 나를 도와 이런 고기를 보내주셨구나.’

  아들은 하늘에 감사를 드리고 고기를 잡아 아버지를 드시게 했다.
  아들의 정성은 이만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연세가 많아 편찮으셨는데 그는 약을 달이기 전에 반드시 부모님의 대변을 맛보는 일까지 하였다. 예로부터 사람의 대변은 색깔이나 냄새로 병을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약을 달이면서 변을 맛본다는 일은 평범한 사람은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들의 지극한 효성에도 사람의 수명은 언제나 다하기 마련이다. 그는 부친상을 당하여 모든 상례(喪禮)를 정해진 절차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하였고 마침내 부친의 무덤 곁에 여막(廬幕)을 차리고 시묘(侍墓)할 때도 정성을 다하였다. 이런 그의 효행에 밤에는 호랑이가 와서 그를 지켜 주었다고 한다.
  평생토록 말과 행동이 옛 사람은 물론 동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남겨 절친한 효자로서 자신의 삶을 시로 표현하였다.

敬是持身杖(경시지신장) 공경은 몸을 부지(扶持)하는 지팡이 이고
信爲行世車(신위행세차) 신의(信義)는 행세(行世)하는 차(車)와 같다.

  공이 돌아가신 후 형조좌랑(刑曹佐郞)에 추증되었다.『영남 인물지』, 2004년, 보문사, 41쪽.『상산지』⋅『경북향토자료지』⋅『상주시사』(5권)「인물편」, 상주시, 2010, 2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