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한 야옹(野翁) 이영갑(李英甲)
곽 희 상
강진 고을에서 타 지방으로 이사(移徙)를 가는 주민을 보았다.
‘여보시오! 수레에 이삿짐인가 본데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이오?’
라고, 여쭈어 보았다.
그러자 수레를 끌던 주민은 이마의 땀을 훔치드니,
‘전주(全州) 고을로 이사를 가는 길입니다요. 모두 나의 가족들입지요’
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또 물었다.
‘도대체 지금은 이사를 하는 시기가 아닌데 왜 가는 것이오?’
하고 물으니,
‘강진 고을은 이제는 살기가 매우 어려워졌습니다요. 지난 번 사또가 부임하면서 처음에는 백성들에게 잘 살게 해 준다기에 그 말씀만 믿고 그럭저럭 살아 왔습니다마는 이번에 또 신관사또가 부임한다기에 또 속을까봐 미리 이사를 가고 있는 것입니다요’
하였으나, 왠지 처절한 목소리로 들렸다.
이에, 나는 근엄하게 한 마디 하였다.
‘지난 번 사또의 횡포가 그렇게 심하였다? 그러면 생활은 어찌 하였소?’
라고 하자,
그 주민은 거침없이 답하였다.
‘김진사 나리는 부유하고 글께나 한답시고 그 앞에서는 가만있다가 우리같이 불쌍한 백성들 앞에서는 개나 돼지 취급을 하였습니다요.
일전에 왜구가 침범하여 약탈 방화를 하고 있는데에도 토벌은커녕 먼 산 불구경하듯이 하여 죽은 자들도 많았습니다요.
이제는 이 고을이 싫어졌으니 어디가면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습니까요?’
하였다. 하지만 기운이 없어 보였다.
이에 나는,
‘내가 이번에 부임하는 강진현감이요. 여러 사정을 잘 들었으니 나를 믿어 보시고 고향으로 되 돌아가시오. 내가 백성들 사랑하기를 나의 가족과 같이 사랑할 것이오’
하고, 만류하였다.
그래도 주민은 고개만 갸우뚱 거릴 뿐 반응이 없자,
‘내가 이번에 부임하는 강진현감이니, 내 그대와 그대 가족들 뿐만 아니라 살던 마을까지 직접 방문하여 어려움을 해결하고 고통을 함께 나눌 것이오.’
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자 주민은 이윽고 고향으로 귀향하였다.
주민을 뒤로 하고 고을 수령으로 해야 할 수령 칠사(수령칠사) 수령칠사(守令七事) : 수령으로서 관찰사에게 평가받을 항목으로, 농상성(農桑盛)·호구증(戶口增)·학교흥(學校興)·군정수(軍政修)·부역균(賦役均)·사송간(私訟簡)·간활식(奸猾息)이다.『경국대전』〈이전(吏典)〉고과조(考課條).
를 되새겨 보았다. 어전에서 주상전하께서 하문을 하셨으니 나는 기필코 진정한 착한 목민관이 되어야겠다고......
드디어 강진 관아에 도착하였다.
고을의 여러 진사(進士) 선비들과 아전들이 도열해 있었다.
나는 기침을 크게 한번 하고는 관아로 향했다.
그리고는 곧 바로 조회를 열었다.
가장 근엄한 목소리로 부임 훈시를 하였다.
‘농업과 양잠을 일으킬 것이며, 인구를 늘리고, 무엇보다 학문을 크게 장려할 것이오, 또한 부역과 세금 부과를 균등히 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없앨 것이며, 고향을 떠 났던 사람들이 되 돌아오도록 할 것이오.’
라고 하고는,
‘이 모두 본관의 방침이 이러하니 한 치의 착오도 없어야 할 것이오’
하고, 힘주어 말했다.
가장 시급한 일부터 문제점을 파악하여 개선해 나기기를 여러 날이 지났다.
강진의 염전과 어시장을 둘러보고 또한 지난번 이사를 가던 그 주민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찾았다.
‘그래, 그동안 어찌 살았는고?’
‘네네, 사또. 무엇보다 부역(賦役)이 공평하여 살 맛이 납니다요.’
‘그렇더냐? 그렇다면 내가 어찌하면 백성들이 더 잘 살 수 있겠느냐?’
‘네네, 사또. 원칙과 명분을 앞세우신다면 모든 백성들은 사또편일낍니다요.’
그 말을 듣고 바닷가 어부들의 시찰을 마치고 관아로 돌아왔다.
바닷가의 어부들은 살림이 매우 궁핍하였다. 어장(漁場)이 황폐화되었으니 어찌 공상(供上)을 한단 말인가? 그러니 다른 고을에서 전무(轉貿)하는 폐단(弊端)이 심하였을 것이라 직감하였다.
즉시 바닷가 어부들을 보호하면서 어장을 경영토록 회유하고 외부로부터의 침범을 막아 주었다. 그리고 전대의 가혹했던 정치를 혁신, 제거하여 몇 해 동안의 관례를 비추어 보고, 봉진(封進)하는 물건은 등재된 법식에 맞추어 완전히 따르게 하여 공상(供上) 품목에 대하여 본전(本錢)을 갚아 주니 흩어져 유랑한 백성들이 모여들고, 급기야 이웃 고을에서도 이 어진 정치에 귀의하게 되었으니……
그 장본인이 누구이던가?
경주 이씨(慶州李氏) 청호공파(淸湖公派)의 후손인 야옹(野翁) 이영갑(李永甲, 1622〜1676) 公이다. 아버지인 종사랑(從仕郞) 초(超)와 어머니인 평산 신씨(平山申氏) 봉사(奉事) 지(志)의 여식 사이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행(行)은, 계고비직(階高卑職)일 때 사용한다. 즉 품계는 통훈대부로 정3품(당하관)이나 벼슬은 평안도 도사(都事, 종5품)이니 행(行)이다. 반대의 경우는 수(守)를 쓰는데, 행수법(行守法)이라 한다.
평안도사(平安都事)이다.
가계를 보면, 신라시대 사량부(沙梁部)에 대인(大人) 알평(謁平, ?〜?) 알평(謁平, ?〜?) :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시조로서 초기 사로육촌(斯盧六村) 중의 하나인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이었다. 하늘에서 강림하여 표암봉(瓢嵓峯)에 내려왔다고 한다. 6부(部)에 이(李)·정(鄭)·손(孫)·최(崔)·배(裴)·설(薛)이라는 성의 비정은 중국식 성을 후세에 붙인 것으로, 알평이 경주이씨의 시조라는 것은 후세에 붙인 것이다.(백과사전)
이 신라 태조를 익찬(翊贊)하여 종신(宗臣)이 되었다. 고려조에는 더욱 번성하였는데, 문충공(文忠公)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이제현(李齊賢, 1287〜1367) :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문인.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명문장가로 정주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묘비에는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라고 새겨져 있다. 저서로《효행록》, 《익재집》, 《역옹패설》등이 있다.(백과사전)
이 났는데 시조로부터 17세손이다. 조선조에 들면서 익재공(益齋公)의 증손인 우대언(右代言) 우대언(右代言) : 조선초기 승정원의 정3품 벼슬.
담(憺)이 관찰사 청호공(淸湖公) 희(暿)를 낳았다. 청호는 公의 호로, 1423년(세종 5, 계묘)에 문과에 들어 경상도관찰사로 재직 중 초도 순시차 안동에 왔다가 45세에 별세하였다. 이 청호공은 좌승지 문환(文煥)을, 좌승지는 진사 겸(謙)을 낳았는데 경주 이씨 23세손이다. 겸(謙)의 자는 위광(木爲光)이고, 호는 취수헌(醉睡軒)이며, 성균진사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청호공의 손자로 오봉산 앞에 조부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취수대(醉睡臺)를 중건하여 꽃을 가꾸고 학문에 정진하였는데,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이 취수헌기(醉睡軒記)를, 난재(懶齋) 채수(蔡壽) 선생이 양화헌기(養花軒記)를 지어 주었다.(야옹선생 행장·웅주전고·상주의 누정대)
이 분이 함창에서 장가들어 신흥리 일원에 터를 잡아 함창 세거 현조(顯祖)이다. 박약회 상주지회,『웅주전고』, 1998, 726쪽.
고조(高祖)는 봉사(奉事, 종8품) 우덕(友德)이고, 증조(曾祖)는 참봉(參奉, 종9품) 서(恕)이며, 조(祖)는 자가 계술(季述)이며 직장(直長, 종7품) 윤충(允忠, 1543 〜1593)이다.
부(父)는 종사랑(從仕郞) 초(超, 1586〜1660)이고 모(母)는 평산신씨(平山申氏) 봉사(奉事) 지(志)의 여식으로 장절공(狀節公) 태사(太師) 신숭겸(申崇謙) 신숭겸(申崇謙,?∼927) : 고려 전기의 무장(武將).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능산(能山). 평산(平山) 신씨(申氏)의 시조이다. 고려 태조는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해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였다. 994년(성종 13) 4월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태묘(太廟)의 태조 사당에 배향(配享)되었다.(백과사전)
의 후손이다.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원갑(元甲)은 자(字)가 선장(善長)으로 조졸(早卒)하였다. 둘째 아들은 형갑(亨甲)으로 자는 영장(榮長)인데 선비로서 문예(文藝)에 이름이 있었으나 역시 일찍이 세상을 떠났으며, 셋째 아들은 임진년(1652, 효종 3)에 소과(小科)에 합격한 진갑(震甲) 이진갑(李震甲, 1620〜?) : 자는 동언(東彦)으로, 1652년(효종 3) 임진(壬辰) 생원 증광시에 생원] 1등 3위(3/100명)로 합격하였다.
으로 자는 동언(東彦)이다.
公은 취수헌(醉睡軒)의 5대손으로, 4형제 중 막내 아들로서 1622년(광해 14) 12월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바탕이 있었다. 公은 돌잔치 상에서 온갖 장난거리를 널어 두어도 거들떠보지도 아니하고 홀로 돌 잔치상을 잡고 엎드려 앞에 있던 책을 잡았는데, 마치 책을 펴서 완상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 광경을 본 가족들은 ‘이 아이가 커서 장차 반드시 문학(文學)으로 가문을 크게 빛낼 것이다’라고 하였다.
6세에 처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여 10세에는 대의(大義)를 알게 되면서 날로 성취(成就)해 나아감이 있었다. 비로소 소학을 통달하고 사서(四書)에서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미치게 되었고 다시 사장공부(詞章工夫)를 시도하였는데 글이 전중온아(典重溫雅)하였으며, 문리(文理)가 모두 경지에 이르러 한때는 견줄 사람이 없었다.
소당(素堂) 권황(權惶, 1543〜1641) 권황(權惶, 1543〜1641)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영(思瑩), 호는 치암(恥庵). 1576년(선조 9)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의금부도사가 되었다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효도와 청백리로 이름이 있었으며, 백성을 사랑하고, 특히 종사의 판결에 신중하였다.
은 일찍이 公의 글을 평하기를,
‘글이 민첩(敏捷)한 것은 나도 가능한 일이지만 간고(簡苦)한데 이르러서는 나는 미치지 못한다.’ ‘민첩오유가능간고불급(敏捷吾猶可能簡苦不及)’(『청암서원 11선생 행록』, 337쪽)
라고 하였다.
公은 32세인 1654년(효종 5)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에 진사 2등(二等) 9위(14/100명)로 입격하고, 그 후 38세인 1660년(현종 1)에 문과 식년시(式年試)에 병과(丙科) 12위(22/35명)로 합격하였다.『사마방목』및『국조문과방목』
관력으로는, 1663년(현종 4) 4월 1일에 성균관 학유(學諭, 정9품)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이 해의 겨울에 부친상을 당하여 예제(禮祭)를 다하여 3년상을 마쳤다. 1665년(현종 6) 11월 18일에는 성균관 박사(博士, 정7품)로 승진하였는데, 이 해의 겨울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1668년(현종 9) 6월 24일에는 성균관의 전적(典籍, 정6품)으로 승진하였다. 51세인 1673년(현종 14) 6월 9일에는 예조정랑(정5품)에 제수되었고, 이어 7월 11일에는 공조정랑으로 있다가, 같은 해 8월 14일에는 춘추관(春秋館)의 기주관(記注官)으로 제수되었다.『승정원일기』(9,10,11책) 참조. 묘갈명과 행장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춘추관에 재직 시에는 자신이 셋방살이 하는 집과 춘추관이 담장 하나를 두고 있었는데, 하루는 동료가 당직을 서지 않고 대직(代職)을 부탁해 왔다. 이 동료의 아버지는 당시 고관으로서 公을 원망하였으나 公은 정상적인 당직 명(命)이 없으므로 대신함이 옳지 못함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 동료는 끝내 당직을 서지 않음이 발각되어 파직이 되자 고관인 그 부친은 원망을 하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이태일(李泰一) 찬,「야옹공 묘갈명(野翁公墓碣銘)」
그 후, 1674년(현종 15)에는 강진현감(康津縣監)에 제수되었다.『승정원일기』(9,10,11,12책) 참조.
강진(康津)은 지금의 전라남도 강진군이다. 당시에는 큰 현(縣)으로서 물산이 많고 땅이 커서 본래부터 다스리기 어려운 지역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관찰사 권대재(權大載, 1620∼1689) 권대재(權大載, 1620∼1689)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거(仲車), 호는 소천(蘇川). 문과. 전라도 감사 ·홍문관 제학·호조판서 역임.
가 본도를 안찰(按察)하였는데 관하의 여러 군수와 현감들의 치정(治政)이 그의 뜻에 맞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공은 부임하면서 강한 사람에게는 강하게 하여 제압하고 약한 사람에게는 관대하여 백성들을 구휼(救恤)하고 폐단을 보완하여 베풀면서 매사에 정성을 다하여 처리하였다. 그간의 과정을 낱낱이 적은 보고서가 정백(精白)하였으니 권공(權公)이 자주 칭송을 하였다. 급기야 도내의 모든 송사(訟事)를 이곳에서 처리하게 되었다.
또한 현감으로 재직하는 동안 관리들을 엄하게 단속하면서 농사(農事)를 권장하였다. 농번기에는 번거로운 부역(賦役)을 피하는 등 목민관으로서 해야 할 수칙인 ‘수령 7사(守令七事)’를 적극 실천하였다. 더욱이 학교에 유의하여 퇴락한 제사(齊舍)는 수리 정비하고 학교의 살림이 궁핍한 곳은 재정을 지원해 주었다. 매달 초하루 보름에는 문묘에 배알(拜謁)하고 여러 서생들과 함께 명륜당에서 강학(講學)을 하면서 의문이 나는 내용들을 시정해 주었다. 또 학업을 장려하기 위하여 고시(考試)제도를 두어 고하(高下)를 점고(點考)하고 등급을 매겨 상벌을 내렸으며 재능별로 맞춤형 지도를 하니 이를 성취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강진현에 소속된 관원 중 공장(工匠)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상할 물건 이외에도 의례적으로 관납(官納)을 하는 관례가 있었으나 公은 명분이 없는 일이라 해서 이를 모두 감해주었다.
한편 바닷가 백성들은 어장(漁場)이 침범당하여 고기잡이가 어려웠지만 공상(供上)은 해야 하였다. 그러나 해당 어물을 못 잡았으니 다른 고을에서 새로 사 와야 하는 폐단이 있었으나 公은 마음을 다하여 그들을 보호하고 전대의 가혹한 정치를 혁신시켰다. 그래서 몇 해 동안의 관례를 비추어 보고 봉진(封進)하는 물건은 등재된 법식에 맞추되 이에 준하여 본전을 갚아주니 급기야 유랑민들이 다시 모여들고 이에 소문이 이웃고을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였던가?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순무사(巡撫使) 순무사(巡撫使) :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와 전시(戰時)의 군무(軍務)를 맡아보는 한편, 백성들을 위무, 민심을 수습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의정부에서 상주하여 왕의 결재를 받는 것이 상례였다.
가 전선(戰船)의 용기(用器)가 색깔이 바래졌다는 상계(上啓)로 그 자리에서 파면(罷免)되었다.
돌아가는 날에는 올 때 가지고 온 치자(梔子) 화분 하나만 들고 가니 고을 백성들은 모두가 애석하게 여기고 추모하였다.
1676년(숙종 2) 6월 21일에는 공조좌랑(정6품)에 제수되었다. 그리고는 다시 평안도사(平安都事)로 이배(移拜)되었다.그동안 지방관으로서 청백한 명성이 있었으므로 당연하였으나 이곳 역시 외지(外地)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내직을 중시하고 외직을 경시하였다. 公으로서는 문간(文幹)의 여망이 높았었기에 외직은 마땅하지 아니하였으나 이때는 바야흐로 고시(考試)가 중요하지 않은 시기였다. 결국 公은 궁중(宮中)을 하직하고 부임지로 떠났다.
이때 公에게는 몸속에 병(病)이 있었는바,
‘말 안장 위에 타고 가는 것은 무리입니다’
라고, 주변에서 만류하였으나 공은,
‘과장(科場)을 여는 날이 가까워졌고 또 검전(檢田)하는 일도 급하다. 이때 어찌 신하로서 병(病)을 알리는 때인가?’
라고, 하였다.
가마를 타고 휘장을 쳐서 호위하는 행차가 있다고 주위에서 권유하였더니 公은 그것도 법이 아니라고 사절하였다. 많은 관원들이 길 양쪽 옆으로 서서 모두가 公이 떠나는 것은 굴(屈)하는 것이고 公이 돌아 오는 것은 펴는(신, 伸) 것이라 하면서 안타까워하였다.
公은 떠나면서 말하기를,
‘여러분은 나를 위해서 관직(官職)을 선택해서 가게 하려는가? 두 번의 쇄원(鎖院) 쇄원(鎖院)은, 조선시대 과거 시험장에서 거자(擧者)들의 입장이 끝나면 출입문에 자물쇠를 채워 외부와 격리시키던 제도로, 부정을 예방하고자 취한 조처였음.
의 역무를 겼었고 이어 시골 땅으로 가는 것이다’
라고, 아픈 몸을 이끌고 말을 타고 임지로 향하였다.
평양에 도착하여서는 갑자기 병환이 악화되어 선정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이 소식이 조정에 도착하자 듣는 이 모두는 가슴아파하였다. 부조로 관(棺)과 염의가 내려지고 관청에서 장례를 주관하였다. 진사 김기백 등 100여 명과 이웃 고을에서 수백 리 떨어진 종문의 사람 70여 명도 조곡(弔哭) 부상(扶喪)하였다.
公의 어진 명성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애도를 하였겠는가? 그리하여 자질(子姪)들이 상여를 받들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676년(숙종 2) 12월 8일, 향년 55세를 일기로 사벌면 목가리 산21번지 구룡등에 건좌(乾坐)로 장사하였다.
公의 배위는 개성고씨(開城高氏) 통사랑 용우(用雨)의 따님으로,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公은 평생을 드러내어 표시하지 않고 매사에 차별을 두지 않았으며 천품(天稟)의 품성을 지녔다. 가난하였지만 상도(常道)를 잃지 않았고 궁핍하였으나 후회(後悔)함이 없었다.
특히, 일찍이 두 형(원갑, 형갑)이 세상을 떠난 것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여기에 홀로된 누이동생까지 있었으니 가슴이 더욱 미어졌다. 조카들을 자식같이 돌보고 교회(敎誨)하여 이들이 학업에 성취하여 둘째 조카인 헌은 성균관 진사로 합격을 시키고, 그 집안 일들을 경리(經理)하고 무양(撫養)하며 주휼(賙恤)하기를 오로지 한결 같아서 주위에서는 ‘상체(常棣) 상체(常棣) : 형제간의 우애가 변함이 없음을 이르는 말.
의 도’를 다 한 선비라고 칭송하였다.
公은 늘,
‘군자의 행기(行己)는 마땅히 금옥(金玉)과 같아야 한다. 사람들로부터 오점이 찍히는 일을 받아 들여서는 안 된다’ ‘사군자행기당여금옥불가수인점오매어고인(士君子行己當如金玉不可受人點汚每於古人)’(『청암서원 11선생 행록』, 338쪽)
라고 하여, 옛 사람의 도리와 의리를 지킴에 일시적인 요행을 바라지 말라고 하니 뭇 사람들이 존모(尊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와 같은 公의 지조가 개석(介石) 개석(介石)은, 절개가 돌같이 단단하다는 뜻이다. 곧 굳게 절의를 지킴을 이르는 말임.
같이 곧았음을 알 수 있다. 청암서원(淸巖書院) 청암서원(淸巖書院) : 상주시 공검면 예주리에 있는 서원으로, 지방유림의 공의로 류포(柳砲)·류달존(柳達尊)·박눌(朴訥)·이겸(李謙)·유종인(柳宗仁)·홍약창(洪約昌)·남영(南嶸)·정윤해(鄭允諧)·박성민(朴成敏)·이영갑(李英甲)·남근명(南近明)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752년(영조 28)에 창건하였다.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따라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81년에 복원하였다. 매년 3월 중정(中丁, 두 번째 丁日)에 향사한다.
에 제향되었는데 상향 축문에도,
‘고상한 자질(姿質)로 빙벽(氷檗)같이 지키니 위(位)가 낮은들 무슨 혐의리요. 덕은 가히 후인들이 존중하리라’ 상향축문(常享祝文) : ‘규장지질(珪璋之質) 빙얼지수(氷蘖之守) 위색하겸(位嗇何歉) 덕가긍후(德可矜後)’(『청암서원 11선생 행록』, 340쪽)
라고, 향사하고 있다.
한편,『청암서원 11선생 행록』의「배향선현」조에는,
‘……문과급제로 정랑(正郞)과 도사(都事)를 역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모부인(모친)의 와병에 단지주혈(斷指注血)하는 효성을 가졌으며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위의 책, 90쪽.
라고 기록되어, 公은 지조가 곧은 선비이면서 한편으로는 효행이 극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모친(개성 고씨)의 와병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를 모친의 입에 넣어 주었음은 진실된 군자(君子)나 효자(孝子)가 아니고는 어려운 일이다. 자식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인륜의 근본이려니 그러나 단지주혈(斷指注血)을 행함은 쉽지가 않다. 아무리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외우고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외쳐 보아도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기란 쉽지가 않은 법이다. 열 손가락을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는가?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효행을 근본으로 살다 간 公이야 말로 오늘에 큰 귀감과 사표가 될 것이리라.
《참고문헌》
1.『승정원일기』
2.『국조문과방목』
3.『사마방목』
4.『청암서원 11선생 행록』
5. 박약회상주지회,『웅주전고(雄州典故)』
6. 상주문화원,『상주의 누정대(樓亭臺)』
7. 채헌징(蔡獻徵) 찬(撰),「야옹 이선생 행장(野翁李先生行狀)」
8. 이태일(李泰一) 찬(撰),「야옹공 묘갈명(野翁公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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