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楊亭) 마을을 개척한 현사(賢士) 권성(權惺)과 아들 권집(權緝)
금 중 현
‘양정(楊亭)’마을은 공검면 사무소에서 남서쪽으로 3㎞ 정도 떨어진 전형적 촌락으로 예부터 이름난 고촌(古村)이다.
오늘의 양정은 공검면사무소와 그 일대를 행정 리동 명칭으로 하지만 예전의 양정 마을은 오늘의 양정 2리 안에 ‘대밭마’라고 하는 촌락으로 근년에 와서는 ‘원양정’이라고도 한다.
‘양정’이라고 하는 이름을 취한 것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밭마 마을 앞 길나들이 지점에 큰 버드나무가 서 있어서 사람들이 쉬어가는 정자 터가 예부터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와 관련하여 전하는 기록을 살펴보면,
양정리는 검호 서쪽 함창현과는 20리 거리에 있다. 예부터 사람들이 살아 이곳에서 목양(牧羊)을 하던 까닭에 처음 이름은 양장(羊場)이었다. 이제「어린책(魚鱗冊)」의 기록에 의하면 양정의 이름이 된 것은 처사 권성(權惺)이 살게 된 때문이라 하였다. 권성,『양정공일고』(영가세고 권5) 부록의 기사(記事).
라고, 하였으니 조선 중엽 효종 년간에 양정공(養亭公) 권성(權惺)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와 마을을 개척하였다는 것이다.
아울러서 공의 호를 한문으로 기를 ‘양(養)’자 양정(養亭)으로 하였으니, 버드나무 정자 양정(楊亭)을 연원으로 하여 글자를 바꾸어 호로 삼은 것이라고 한다.
양정공 권성(權惺)은 고려 말 조선조 초기에 명신이요 학자였던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10세손이다. 이 가문이 영남 땅 상주에 세거한 연원을 살펴보면, 양촌의 증손자 권변(權忭)은 단종 년간에 호조참판을 역임한 인물로 고려말에 명신(名臣)이었던 용궁(龍宮)의 축산부원군 전원발(全元發)의 현손서(玄孫壻)가 되어 처향(妻鄕)을 따라 용궁에 와서 살게 되었고, 권공의 아들 권긍(權肯)은 용궁현감을 지낸 후 함창에 터를 잡아 오늘의 함창·이안·공검 일대에 양촌 권문(權門)의 일가문호(一家門戶)를 열었던 것이다.
권긍의 5세손 권한(權僩)은 자를 사익(士益)이라 하고 호를 소옹(嘯翁)이라 하니 병자호란에 우담 채득기와 격문(檄文)을 내어 군량을 모집하다가 굴욕적으로 화맹(和盟)을 한 것에 좌절하여 고장에 은거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쓴 학자였다. 권한의 아들이 양정촌에 입향한 양정공 권성(權惺)이요, 손자가 독헌공(獨軒公) 권집(權緝)이다.
양정공 권성(權惺, 1634, 인조 12 ~ 1698, 숙종 24)의 자는 성수(誠叟)요, 양정(養亭)은 그의 호이다. 어려서부터 지기(志氣)가 특출하였고 가학을 이어 17세 전후에는 이미 경서(經書)와 시부(詩賦), 대책문(對策文) 대책문; 글자 그대로 어떤 현안에 대한 해결방안을 서술한 오늘의 논술과 동격이라 할 수 있다.
에 능하였다고 한다. 시류(時流)가 불순한 탓도 있겠으나, 과거(科擧)의 운(運)이 불리하여 53세가 되는 해 부터는 오로지 학문과 향풍쇄신 그리고 흥학육영(興學育英)을 스스로의 책임으로 여겼다. 그에 대하여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무지서재(無知書齋)는 무지산 밑에 있었는데, 현종 갑진년(1664) 간에 상주·함창 양읍의 학자들이 협력하여 창건하였다. 배우는 이를 모아 강습하였는데 소당(素堂) 권황(權愰)과 양정(養亭) 권성(權惺) 형제가 교수를 맡아 경학을 장려하니 이에 힘입어 성취하는 자가 많았다. 앞의 각주 1)과 같음
라고, 하였으니 공의 후학에 대한 학문적 영향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공의 행적 중에 역사적으로 높이 살만한 업적이라고 하면 고도 함창 고을 최초의 서원인 임호서원(臨湖書院) 임호서원; 1691년(숙종17) 공검면 역곡리 봉우재 마을에 창설한 서원으로 연산군의 폭정에 화를 입은 남계(藍溪) 표연말(表沿沫),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 난재(懶齋) 채수(蔡壽), 동계(桐溪) 권달수(權達手)를 주벽으로 하고 난재의 손자 휴암(休巖) 채무일(蔡無逸)을 배향한 서원인데 훼철한 것을 1988년에 함창읍 신흥리 화평 마을로 이건 복원하였다.
을 창건하는데 주역이었다는 점이다.
이 서원에 모시는 선현들은 모두 연산군의 폭정으로 죽임을 당하는 등 크게 화를 입은 국가적으로 추앙하는 절신(節臣)으로서 일찍이 선조 년간부터 서원을 창설하자는 향론이 분분하였으나, 배향할 현사를 확정하지 못하고 미루어 오다가, 근 100여 년이 경과한 숙종 중기(1691, 숙종 17)에서야 마침내 창설을 하였으니 함창 지역 사림의 숙원을 풀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한 고을에 서원을 창설한다는 것은 인적 물적으로 향내의 모든 역량을 모아야 하는 것은 물론, 무엇보다도 분분한 향론을 결집하여야 하는 그야말로 한 지역의 역사를 창조하는 사업이다.
더구나 고도 함창 고을에서 추진하던 오랜 숙원사업을 이루어 낸 가운데 양정공이 그 중심의 인물이었다는 것은 공이 가진 평소의 역량과 인물됨을 알게 한다. 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 임호서원의 유생(儒生) 안후열(安后說)·김태령(金泰齡) 등이 올린 만사(輓詞)로 그 공적을 찬양하니,
臨湖一區 城岳之中 昔塾而小(임호일구 성악지중 석숙이소)
今院而崇 孰經營是 曰惟我公(금원이숭 숙경영시 왈유아공)
‘임호서원은 함창 고을 안에 한 구역으로 예부터 글 배우는 학숙(學塾)이 적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서원을 창설하여 선현을 숭상하니 누구보다 그 경영을 올바르게 한 분은 오직 공이었다고 말합니다.’
라고, 하였다.
양정공 당시에 공검지를 중심으로 한 주변 선비들과의 교유는 일찍이 1678년(숙종 4)에 결성한 금난계(金蘭契) 금난이라고 함은 주역 계사상전(繫辭上傳)에 단금여란(斷金如蘭)이라는 말을 줄여서 칭하는 바, “두 사람이 마음을 향하면 그 예리함이 쇠를 끊고 또한 마음이 같은 그들의 말은 향기롭기가 난초와 같다”라는 뜻이다.
를 통하여 우의를 돈독히 쌓았다고 한다.
여기에 함께 한 선비들은 채헌징(蔡獻徵) 채헌징(1648, 인조 26~1726, 영조 2) ;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문수 호는 우헌(愚軒)으로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의 문인이고 1679(숙종 5)년에 문과에 올라 정언 헌납 영해부사 진주목사를 거쳐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우헌문집』3책이 전한다.
을 비롯한 15인으로 이 지역을 대표하는 현사들로서 취회(聚會)에 서로 시를 수창(酬唱)하였은 즉, 공이 남긴 시 한 수를 여기에 옮겨보면,
유거(幽居)
居山非愛山(거산비애산) 산에 사는 것이 산을 사랑해서가 아니고
只愛避塵寰(지애피진환) 단지 티끌 세상 피하기 좋아서 일세
茅屋數間裏(모옥수간리) 띠집 두어칸 속에 살아도
身閒心亦閒(신한신역한) 몸 한가하니 마음 또한 한가하네
라고, 하여 공의 담백하고 티 없는 삶을 엿 볼 수 있다.
양정공의 아들 권집(權緝, 1656, 효종 7~1704, 숙종 30)은 호를 독헌(獨軒)이라고 하는데,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서 15세에 이미 고을의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1690년(숙종 16)에 생원과 진사 양과에 합격하였고, 1692년(숙종 18)에는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다. 처음에는 성균관 박사와 전적을 거쳐 병조좌랑을 지내고, 이른바 옥당(玉堂)이라고 하여, 청환직으로 선망하는 홍문관(弘文館)에 수찬을 역임한 뒤, 1698년에는 대동찰방(大同察訪)을 지내고 1700년에 한성부서윤(漢城副庶尹)에 이어 1704년에는 하동부사(河東府使)에 이르렀다.
문과라고 하면 현대에 수백 명 또는 천여 명을 뽑는 고등고시와 유사하다 하겠으나 관직의 자리가 지금보다도 적고 귀한 시대에 나라에서 불과 30여 명을 뽑는 어렵고도 어려운 관문이다. 여기에서 일등 장원을 하였다는 것은 그 명성과 고귀함이 이루 말 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가문과 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온 나라에서 선망하는 높은 자리였다.
더구나 독헌공이 장원급제를 하고 벼슬길에 나아가던 시대의 정치 환경은 1694년(숙종 20)에 일어난 갑술환국(甲戌換局) 갑술환국; 1694년(숙종 20) 폐비 민씨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이 화를 입어 실권하고 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 사건. 남인은 1694년 기사환국으로 힘겹게 집권을 하였지만 남인 스스로 정치력을 발휘하여 집권한 것이 아니라 숙종이 서인에 대하여 심한 염증과 혐오 때문에 얻은 것이었다.
으로 영남의 정치세력은 몰락지경에 있었던 때로 독헌과 같은 촉망받는 인물이 나타났다는 것은 상주권 사림의 희망이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바이다.
독헌이 대과에 장원 급제를 하였다는 것을 크게 선망한 이가 있으니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청대일기』제1권 p. 85, 계미년 1703(숙종 39) 1월 8일, 2015, 한국국학진흥원 간행.
권상일(1679, 숙종 5~1759, 영조 35); 상주출신으로(현재는 문경시 산북면 근암리) 자는 태중, 호는 청대, 시호는 희정공이다. 1710년(숙종 36)에 등과하여 울산부사에 이어 대사헌을 역임하여 당시에 영남인물로는 유일하게 높은 관직을 지낸 인물이다. 근암서원에 배향하였다.
이다. 청대 권상일은 독헌공 보다 나이가 22세 적다고 하겠으나 청대가 과거에 급제한 해는 독헌공보다 18년이 지난 1710년(숙종 36)이니 그 당시 과거에 열망하였던 청대로서는 독헌공을 대단히 부러워하였을 뿐 만 아니라 어쩌면 사표로 삼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일설에 의하면 청대가 과거에 급제를 하고 고향 문경의 근암촌에 돌아왔을 때 축하하는 손님이 하도 많아 그 집 앞에 나무 두 그루가 쓰러졌다고 하는 정도였다고 하니 문경시 홈 폐이지, 권준화 지음, 2012.2.7 자유게시판‘ymca와 함께하는 여름캠프’
장원급제를 한 독헌공의 위상과 선망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큰 역사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독헌공의 이와 같은 영광은 윗대로부터 할아버지 소옹(嘯翁)과 아버지 양정공(養亭公)으로 이어온 가학(家學)을 성실히 닦아 왔으며, 독헌공 스스로 학문에 대한 열성과 아망(雅望)이 깊었다는 것을 말함이니, 오늘 이 시대 후학들에게도 귀감이 아닐 수 없다. 독헌공이 하동부사에 재임하면서 탐관들의 비리를 막고 과중한 세금을 경감하는 등 선정을 폈으나 재임 1년 만에 48세를 일기로 관아에서 순직하였으니『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에서 발췌.
, 하늘이 미구에 펼쳐질 공의 빛나는 앞날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비록 영남인이 정계로 진출하여 활기를 찾기는 어려운 정치적 환경이었다 하겠으나, 대과에 장원을 하였고, 내외직(內外職)에서 촉망받는 환로의 길을 닦고 있던 공이야 말로 상주권 영남인으로서 크게 성취하기를 고대하고 있는 차제에 세상을 떠나니 참으로 애석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야촌(野村) 손만웅(孫萬雄) 손만웅(1643, 인조21~1712, 숙종 38); 자는 적만(敵萬), 호는 야촌(野村)으로, 1669년 사마시에 이어 문과에 올라 명성을 떨쳤고, 공주목사 나주목사 경주부윤을 역임하였으며, 당 시대 상주의 장노로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등 당대에 이름있는 현사들이 만사(挽詞)와 제문(祭文)으로 그 애석하고 간절한 마음을 남겼으며 청대 권상일 또한 그가 남긴 일기에 애석함을 적어 놓았다 앞의 각주 8)과 같음.
.
독헌공은 학문이 깊은데다가 문학에도 조예가 있었다고 하나 저술한 작품이 많이 일실되었다고 한다. ‘독헌(獨軒)’이라는 말은 그가 남긴〈독헌설(獨軒說)〉이라는 자성문(自省文)에 따라서 공의 자손들이 호로 취한 것인 즉, 그 한 대목을 살펴보기로 한다.
〈독헌설(獨軒說)〉
임자년(1672, 현종 13) 가을에 내가 함창현 남쪽 양정리 개울가에 터잡아 살다가 병인년(1686, 숙종 12) 개울가로부터 다시 소정(素亭)의 서쪽 낮고 짤막한 산기슭 밑으로 옮겨 살았는데, 전에 살던 곳과는 겨우 수 백보 남짓한 거리이다.
경내가 깨끗하고도 트인 골짜기요, 사방이 네모지고 반듯하여 실로 한가히 살며 소요하기 합당하였다. 이에 초옥 네 채를 얽고 가까이 다섯 칸 집을 지어 이를 양정정사(養亭精舍)라 하였으니, 대개 양(養)과 양(楊)은 음은 같으나 뜻이 다른 까닭에 바꾸어서 취하였다. …… (중략) …… 일찍이 저술하는 여가에 이름을 짓고자 하였으나 미쳐 이루지 못하였다. 금년 봄에 내가 마침 서재의 마루(軒)에 기대어 홀로서서 길게 휘바람을 불다가 개연히 천고에 다함없는 회포가 일어, 이로 인하여 느낀바가 있어 드디어 홀로 독(獨)자로 마루에 현액하였다.
지나던 손이 추고(推考)하여 말하기를,
‘집에 거는 이름은 예부터 혹 산을 따르거나 혹 물에서 빌거나 혹 물건에서 취함은 있었는데, 지금 그대인즉 산에서도 물에서도 물건에서도 취하지 않고 오직 홀로 독(獨)자를 가지고 이름을 삼았으니 무슨 뜻인가?’
라고, 하기에 내가 빙그레 웃기만 하니, 손님이 다시 따져 묻기를
‘그대의 평생은 문장인즉 남들은 다 간략하면서도 어렵게 쓰는데 홀로 쉽게 하고, 말인즉 남들은 다 상냥한 말을 좋아하나 그대는 홀로 바른 말을 좋아하고, 모습인즉 귀하게 여기는 바가 아름다움인데 그대는 홀로 질박하고, 옷인즉 취하는 바가 화려함인데 그대는 홀로 검소하였다. 천지간에 가장 궁벽지고 좁은 땅에 태어났으면서도 마음은 오직 중화(中華)를 사모하였고, 우주간에 말세를 당하여서도 뜻은 유독 속세를 떠난 세상에서 놀았다. 그대가 남과 같은 것은 적고 홀로(獨)하는 것이 많으니, 홀로 독(獨)으로 집(軒)을 이름한 것이 역시 자신의 처지를 드려내려 한 것이 아닌가?’
라고 하였다. 내가 이에 ‘예예’하고 답하였다.
라고, 자문자답(自問自答)하였다.
글에서 나타난 바, 공의 삶은 어렵기 보다는 쉽게 긍정적인 생각으로 화려함 보다는 검소하고 질박하며, 꾸밈이 없는 있는 그대로 현재의 환경에 적응 하면서 살아가는 인생관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어, 각박한 이 시대에 우리 후학들에게 잠시 머물러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가지라는 가르침으로 삼을 만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양정공 권성은 오늘의 ‘양정’이라는 지명과 함께 한 지역의 역사를 창출한 선비로서 길이 상주에서 드러낼 인물이고, 대과 과거에 장원을 한 천재(天才) 독헌공(獨軒公) 권집(權緝)이야 말로 상주를 크게 빛나게 한 인물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일찍이 세상을 떠났으니 후학들의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게 하는 상주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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