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인물 제5권

상주학. 상주의 인물 제5권. 향촌에 묻혀 산 고절(孤節)한 선비-학행과 문장으로 이름난 김해(金楷)-

빛마당 2017. 1. 27. 20:23

향촌에 묻혀 산 고절(孤節)한 선비-학행과 문장으로 이름난 김해(金楷)-


                                                                                                               박 찬 선

 

 해(金楷, 1633~1716)의 호는 부훤당(負暄堂), 자는 정칙(正則)이며 관향은 안동이다. 대광태사(大匡太師) 김선평의 후손으로 고조부 시좌(時佐)는 효행으로 정려 되고 참봉을 제수 받았으며, 증조부 집(緝)은 문과에 급제하여 양산군수를 지냈다. 조부 사득(士得)은 성균 생원이었고, 아버지 광호(光澔)는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이 났다. 어머니는 청주 정씨로 지헌(芝軒) 사성(士誠)의 손녀이며, 생원 신(伸)의 딸이다. 숭정 계유 1633년 11월 29일 풍산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지조가 있었으며, 어른이 밖에서 급히 불러도 반드시 옷을 입고 버선을 신은 뒤에 달려 나갔고, 말은 깊이 생각을 한 뒤에 했다. 언젠가 동네 아이들이 남의 밭 오이를 훔쳐서 함께 먹자고 했는데 공은 의리가 옳지 않다고 여겨 ‘이것은 장물이다.’라고 하면서 즉시 물리쳤다. 나이 스무 살이 못 되어 학행과 문장이 고루 뛰어나 거유(巨儒)가 되어 향리의 문형(文衡) 文衡: 홍문관, 집현전, 예문관 3관의 최고 책임자로서 관과 학계를 대표하는 직임이므로 더 할 수 없는 영예로 여겼음. 품계는 정2품에 해당하며 대제학의 다른 이름이다. 저울로 물건을 달 듯 글을 평가하는 자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공에게 돌아갔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거친 밥을 먹고 혹 굶을 때도 있었으나 경서와 사서를 읽으며 스스로 즐거워했다. 경자년 1660년(현종 1) 스물여덟 되던 해에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가문과 그 주변으로부터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혼자 눕지도 못하는 부친의 병환이 여러 달이 계속되어도 허리띠도 풀지 않고 눈을 붙이지 않으며 게을리 하지 않고 한결같이 잘 모시는 지극한 효성을 실천했다. 천성이 순후하고 어진 성품을 지녔다.
  부친상을 당해서는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몸이 쇠약해지기도 했다. 장례와 제사는 정중하게 예제(禮制)에 따랐다. 모친상을 당해서도 나이가 이미 노쇠했지만 집상(執喪)은 정중하게 했으며, 부친 묘에 합폄을 하고 여묘(廬墓)살이 삼년을 마쳤다. 묘가 깊은 산속에 있어서 산짐승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언제나 예서를 읽으면서 산소를 지켰다. 섬돌위에 앉아 말하기를 “부모의 영혼은 위대하시다. 능히 나로 하여금 큰 위험이나 두려움에 이르지 않도록 한다.” 父母之靈大矣(부모지령대의) 能使我不至大危怖(능사아불지대위포) (行狀 晉陽 鄭宗魯 撰)
라고 하였다.
  상례와 대하여 당시 이치에 맞지 않거나 억지로 끌어다 맞춘 것들의 폐단과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다. 농암 김창협과 함께 예복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평소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수불석권 手不釋卷) 두문불출하며 글의 뜻을 깊이 생각하면서 나이 팔십이 되도록 하락도서(河洛圖書) 하락도서(河洛圖書): 하도(河圖)는 복희 때 황하에서 나왔다는 용마의 등에 나타난 도형으로 주역의 원리가 되었다. 낙서(洛書)는 하(夏)의 우왕이 홍수를 다스릴 때 낙수에서 나온 신구(神龜)의 등에 쓰여 있었다는 글로서 홍범(洪範)의 원본이 된 것이다.
의 심오한 뜻을 궁구하여『계몽복역(啓蒙覆繹』)을 짓고 일상생활에서의 의식 절차(의문, 儀文)의 변화를 강론하며『예의변(禮疑辨)』을 지었다. 천문(天文), 지리(地理), 전부(田賦), 병법(兵法), 율려(律呂, 음악), 산수(算數) 같은 부류에 까지 미치어 그 학설을 모두 연구하고 그 묘미를 터득하였으니 공의 깊고 넓은 학식은 또한 세속에서 말하는 글을 잘 쓰는 선비인 능언지사(能言之士)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公平居 手不釋卷 杜門潛琓 垂八十年 窮河洛圖書之蘊 而爲覆繹書 講日用儀文之辨 而有禮疑辨 以及天文 地法 田賦 兵家 律呂 算數之類 亦皆究其說 而臻其妙 其博學深識 又非世俗所謂能言之士 所可幾及也.(負喧先生文集序. 通訓大夫前行安邊府使 柳範休 謹書)


  공은 문재가 빼어난 유학자였으나 중앙에 나아가 활동하여 사초(史草)에 이름을 크게 남긴 인물은 아니었다. 명리에 담백하여 끝내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늘그막에 풀이하여 발간을 위한 이백과 두보의 시 주해를 유생들 앞에서 자주 발표했다. 팔순이 되어서도 오히려 당송 시대의 시를 스스로 베껴 잘못된 옛날의 풀이를 고쳐 문장을 변화시키고, 시의 격을 높여 빛나게 했다. 만년에 오래된『영중사론(嶺中士論)』을 발행함에 공의 문장이 많이 사용케 되어 이로 인해 남들로부터 질투도 받았으나 명성이 더욱 세상에 드러났다.
  입재 정종로 鄭宗魯: 1738(영조 14)∼1816(순조 16) 영·정조 때의 성리학자. 호는 입재(立齋), 자는 사앙(士仰), 본관 진주로 정경세의 7세손이며 이상정의 문인이다. 과거를 포기하였으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장령, 지평을 지냈다. 그의 학통은 이황의 문하 중 김성일이 계통을 받아 이현일, 이재를 거쳐 이상정에게 이어진 것이다.
는 그에 대한 행장을 적은 글에서 “문장의 어휘력이 풍부하고 표현이 자유로웠으며 크고 작은 유림 문자 대부분을 공에게 부탁하여 지었다. 대개 글의 기세가 굳세고 바르며 지향하는 의도가 명백하였기 때문이다.” 文章閎肆雱霈 凡有儒林大小應酬 動多倚公屬草 蓋取其辭氣勁正 旨意明白 而其見姪於世…(行狀 晉陽 鄭宗魯 撰)
라고 하였다.
  중년에 안동 풍산에서 상주의 대도촌(大道村, 현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으로 이주해 옴으로써 향토문단의 큰 변화를 가져왔다. 1693년 61세에 겹친 슬픔을 겪고 근암(近嵒, 현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으로 다시 이주를 했는데 이때 오랜 벗인 권이칭(청대 권상일 선생의 조부)의 도움을 받아 마을 북쪽을 개척하여 동명을 ‘보가리(保家里)’라고 이름 지었다. 그곳에 작은 집을 짓고 ‘부훤당’이란 편액을 걸고 야인이 임금을 섬기는 정성에 붙였다.
  교육에는 독서과농(讀書課農)의 4자를 주제로 하여 후생(後生)들에게 열심히 하라고 권하며 이르기를 “나태는 천하에 악덕이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又嘗以讀書課農(우상이독서과농) 四字勉後生(사자면후생) 曰懶者天下之惡德(왈라자천하지악덕) 可不戒乎(가불계호) 此言雖淺(차언수천) 其平日勤勵不息(기평일근려불식) 不可見於此(부가견어차)……(行狀 晉陽 鄭宗魯 撰)
 라고 하였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으로서 어찌 용심(用心)함이 없을 것인가? 평소 공이 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해 왔음을 여기서 볼 수 있다. 공평과세 방안으로서 ‘전지의 과세를 교활한 이속(吏屬)에게 전담시켜 그 부과가 부정할 뿐 아니라 농민을 농락함이 허다하니 농지의 등급작황(等級作況)에 따라 비율을 정하면 농민의 경지와 작황에 의하여 세율이 공정하게 부과될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공은 역학(易學)을 읽어 사리에 밝았으며 음양에도 조예가 깊어 유평보(劉平甫)가 수혈(壽穴)을 잡은 것처럼 사곡의 운달산에 가족의 묘지를 잡았다. 1693년 봄 부인 이 씨를 먼저 그곳에 장례를 하고, 뒤에 1716년 병신년 시월 80을 일기로 생을 마치자 그도 같은 사곡 운달산 묘향의 언덕 혈(穴)에 장사지냈다. 부훤당의 묘갈명은 청대 권상일이 지었다.
  공은 천지의 대법(洪範)인 오복 중의 4가지로 장수하는 수고(壽考)와 우환이 없는 강녕(康寧), 덕을 좋아하고 즐겨 행하는 유호덕(攸好德), 제 명을 다하고 죽는 고종명(考終命)을 겸비했다. 이런 속에 씨 뿌리고 길쌈하는 일인 종적지공(種績之工) 즉 학문 연마에 몰두하였다.
  공은 선비인 이한미(李漢美)의 딸 연안 이씨에게 장가들었다. 부인의 증조부 보(輔)는 생원으로 관직이 부사에 이르렀고, 판서 오봉(五峰) 이호민(李好敏)이 그의 당숙이다. 부인 이씨는 향년 61세로 만지(萬祉), 만정(萬禎) 2남 1녀를 두었다.
  부훤당이라는 이름은 그가 살았던 당호(堂號)를 말한다. 집의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이다. 부훤(負暄) 이라는 의미는 “옛날 송나라에 한 농부가 살았는데 헤어진 삼베옷으로 추운 겨울을 겨우 지내고 봄이 되어 밭을 갈다가 따뜻한 햇볕을 쪼이고는 세상에 추위를 모르는 큰 집과 따뜻한 털옷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 아내를 돌아보고 하는 말이 햇볕을 쪼이는 따뜻함을 사람들이 모르니 이것을 우리 임금님께 알리면 후한 상을 받으리라”하였다.『열자(列子)』의 양주(楊朱)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는 자신을 송나라의 농부와 견주어서 농부는 태고의 순진함일 뿐 어리석지 않았는데 자신은 물정을 알면서도 이렇듯 가난하게 지내니 진실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열자의 해학적인 부훤과는 달리 그는 충군애민(忠君愛民)의 정서가 강하게 들어 있다. 이러한 정서가 자연스럽게 발휘되지 못할 때 울분과 자학이 나타났다. 그의 자술(自述)에는 “내가 욕심의 감정은 어지간히 삭여 없앴으나 분을 참는 한가지만은 참으로 어렵더라.” 嘗曰(상왈) 吾於欲字上消磨幾盡(오어욕자상소마기진) 惟忿懥一節最難(유분치일절최난) (行狀 晉陽 鄭宗魯 撰)
고 했다.
  그는 근암에 살며「부훤당에 부쳐」(題負暄堂)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 시에 이름의 의미가 담겨 있다.

晩起開牕負朝暾(만기개창부조돈)  늦은 아침 창문 열고 햇살 쪼이니
寒膚漸覺爛生溫(한부점각란생온)  춥던 몸이 점점 따뜻해지네.
野人得此誠踰分(야인득차성유분)  이 몸이 한가함은 참으로 분에 넘치니
安得持之獻至尊(안득지지헌지존)  이것을 가져다 임금께 드릴 수 있다면

  어떤 이는 이 시에 대하여 따스한 햇볕 외엔 아무런 계책조차 갖지 못하는 작가의 처지를 안타깝게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임금을 향한 선비의 따뜻하면서도 섬세한 정성을 느끼게 한다.
  그는 부훤당(負暄堂)을 짓고 그곳에서 학문의 여가에 문학을 하였다.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은 그의 묘갈명에서 “문장에 변화가 있으며 광채가 나게 하였고 시의 품격은 늙을수록 더욱 고건하였다” 爲文有變化有精彩(위문유변화유정채)  詩格老來尤古健(시격노래우고건)(墓碣銘. 權相一 撰)
고 평하였다. 문장이 빛이 나고 시의 품격이 나이 들어 더욱 굳세었다니 문장과 학행이 남달랐음을 알겠다.
  부훤당이 당대 어떤 분들과 시가를 불러 서로 주고 받았는가를(수창, 酬唱) 알게 한 시로서 정해 중추 팔월(丁亥仲秋八月) 범주 자천대 여 이 천여 성 주서 연구(泛舟自天臺與李天與成周瑞聯句)를 들 수 있는데 1707년 8월 도남서원에서 자천대까지 정칙(正則) 김해, 천여(天與) 이증록(李增祿, 1658∼1727), 무하당(無何堂) 주서(周瑞) 성세황(成世璜), 지국(持國) 이만유(李萬維), 성기인(成起寅), 강신경(姜信卿) 강재(姜梓) 등이 낙동강에서 뱃놀이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酒後聯裾辦勝遊(주후연거판승유) 술 마신 뒤 나란히 놀이 즐기는데
片舟泛泛宛中流(正則)(편주범범완중류) 조각배는 두둥실 강물 가운데로 떠가네.
名區若躡淸都界(명구약섭청도계) 명구는 마치 천자가 사는 청도에 오른 듯한데
時序纔經赤壁秋(天與)(시서재경적벽추) 시절은 이제 적벽의 가을(7월16일)을 지나네.
爲愛風流供玩賞(위애풍류공완상) 풍류를 사랑해 다 같이 완상하고
共酬談詠故遲留(周瑞)(공수담영고지유) 함께 취해 담소하고 시 읊으며 늦도록 머무네.
龍吟翠壁雲高下(용음취벽운고하) 피리소리 들리는 푸른 절벽에 구름 오르내리고
鷗浴滄波影沒浮(正則)(구곡창파영몰부) 갈매기는 푸른 물에 목욕하며 잠겼다 떠오르네.
半日閑情忘世慮(반일한정망세려) 반나절 한가한 정취에 세상 걱정 다 잊고
夕陽歸興付漁漚(周瑞)(석양귀흥부어구) 석양에 돌아오는 흥은 어부의 노래 소리에 부쳤네.
剩看勝地兼佳會(잉간승지겸가회) 빼어난 경치 구경 겸한 즐거운 모임 가지고
滌蕩胸中萬古愁(天與)(척탕흉중만고수) 가슴 속 오랜 근심 깨끗이 씻어 버리네.

  낙동강에서 제일 아름다운 경천대, 강물 위에서 뱃놀이 하면서 번갈아 가며 공동으로 지은 작품이다. 한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라 세 사람이 순서를 바꾸어 가며 화답하여 완성했으니 앞 사람의 시심과 정서를 이해하지 않고는 이을 수가 없다. 시심의 공유와 나아가 인간적 유대로 이상적인 화(和)와 자연과 인간이 하나되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도도하게 넘치는 시흥과 낭만, 호방한 풍류가 넘쳐서 함께하는 신뢰가 돋보인다.

天如江水水如天(천여강수수여천)  하늘이 강물 같고 강물이 하늘같은
一色江天泛小船(일색강천범소선)  한 빛 강천에 작은 배 띄우네.
漁畏櫂歌潛聚藻(어외도가잠취조)  고기는 뱃노래에 놀라 물풀 속에 숨는데
鷗知人意故尋烟(구지인의고심연)  백구는 사람 마음 알아 숨을 곳(연기)을 찾네.
靑蘋爽氣閑吟外(청빈상기한음외)  푸른 마름 상쾌한 향기는 한가로이 읊는 밖에 있고
丹壁晴光醉眼前(단벽청광취안전)  단풍 벼랑 맑은 빛은 취한 눈앞에 있네.
好事須臾仍遠隔(호사수유잉원격)  좋은 일은 잠간이라 곧 멀어지겠지만
時時幽夢到洲邊(시시유몽도주변)  때때로 그윽한 꿈은 이 강가에 이르겠지

  팔월 선유 우 차전운(八月船遊又次前韻) 홍판관운(洪判官韻) 시 3수 중 제2수다. 하늘과 강물이 하나같은 강천에 배 띄우면 고기와 백구는 몸을 감추는데 향기로운 마름과 벼랑의 붉은 단풍은 눈앞에 펼쳐져 있다. 좋은 일은 잠간뿐 곧 멀어지겠지만 그윽한 꿈은 때때로 이 강가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는 뱃놀이의 멋진 광경이 잘 그려져 있다. 미련에서 그윽한 꿈이 강가에 이른다는 낙관적 희망이 건강한 삶을 보여준다. 낙강 뱃놀이를 통한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운 조화와 시정이 넘치는 낭만과 멋을 느끼게 한다.
  그는 시를 즐겼다. 부훤당문집의 상당 부분이 시가 차지해 있다. 집 뜰에 화단을 만들어 봉선화, 해바라기, 매화와 국화 등을 심었는데 한여름 어느 날 해바라기가 웃음을 터뜨렸다.
  반가워서 지은「해바라기꽃(영규화咏葵花)」

堂上負暄老(당상부훤노)   마루 위 햇볕 등진 노인네
階前向日葵(계전향일규)   섬돌 앞 해바라기
偶然相會得(우연상회득)   우연히도 서로 만나
暗許托心期(암허탁심기)   그윽이 의탁하는 벗이 되었네.

  간결하고 산뜻하다. 군더더기기 없이 깔끔하다. 특히 결구는 노인네와 해바라기가 하나가 되는 합일의 경지를 이루었다. ‘햇볕 등진 노인네’의 소외와 ‘섬돌 앞 해바라기’의 만남은 외로움을 극복한 상호 이해로 도타운 세계를 열었다. 이 시는 부훤당의 친구인 전오륜의 문집에도 실려 있는데 앞의 두 구가 부훤당의 것이고, 뒤의 두 구는 자신이 지은 것이라고 적었다. 앞의 주중연구(舟中聯句)와 같은 시 짓기이다. 그만큼 두 사람의 뜻이 맞았다고 보아진다. 운(韻)을 내어 주고받은 시의 경지가 놀랍다.
  그는 시를 일상화 했다. 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 봄날 산에 놀러가는 모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 꽃과 나무를 심어 이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흥이 일면 시를 지었다. 그만큼 시를 생활화한 것이다.

徐步沿江數里餘(서보연강수리여)  느린 걸음 강을 따라 걷기를 수 리 남짓
俯看澄淥靜涵虛(부간징록정함허)  맑은 물결 굽어보니 고요히 허공이 잠겨있네.
人遊濠上魚游水(인유호상어유수)  사람들은 물가에 놀고 물고기들은 물에서 노는데
眞樂悠然孰我魚(진락유연숙아어)  어느 것인가? 느긋이 노니는 나의 물고기는,

  위의「합강관어(合江貫魚)」는 차 백석정 십경 운(次白石亭十景韻) 속의 한 편으로 백석정의 풍광을 읊은 서정적인 시에 정감이 솟는다. 위의 시에서 나의 물고기는 어느 것인가? 라고 물음은 무엇을 뜻할까? 내가 정해 놓은 물고기가 있단 말인가? 아니다. 나의 물고기는 함께 살고 있는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 속의 나일 것이다. 주체적인 나의 탐색, 나의 존재 규명이 큰 과제였을 것이다. 본연의 나,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를 성찰하고 자문한 것이다. 더구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재야의 선비로서 자신의 정체성 확립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아니었을까? 향촌에 묻혀 살았던 고절(孤節)한 선비가 바로 부훤당이다.
  넓게 보아 그의 성품의 일단은 시로서 뿐만 아니라 상소문, 제문, 축문 등에서 확연하게 나타났다.「근암서원 추향 때 목백에게 올린 글」이나 영남 유림을 대표하여 조정에 상소한「태사묘작헌리정소」가 그것이다. 전자는 매년 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상례로 바치는 축문이 되었다. 당시 중앙에는 김상헌과 같은 쟁쟁한 안동 김씨 후손들이 있었음에도 궁중에서 멀리 떨어진 외지에서 상소를 한 것은 굳세고 강건한 그의 성품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주목할 일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을 깊이 쌓았도다! 궁구(窮究)하지 않았던들 어찌 가슴속의 숨은 재주를 발휘하였겠는가! 수(壽)를 하지 못했던들 어찌 오래도록 노력하여 공적을 쌓을 수 있었겠는가! 오직 공의 저서가 상자를 넘쳐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공이 궁구하고 또 수를 많이 하였기 때문에 후세에 전할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銘曰(명왈) 維孝之篤(유효지독) 維文之績(유문지적) 匪窮則曷以潛心(비궁칙갈이잠심) 而發微(이발미) 匪壽(비수) 則曷以力久(칙갈이력구) 而功積(이공적) 惟其著書(유기저서) 而盈溢巾箱兮(이영일건상혜) 所以使窮且壽(소이사궁차수) 而成垂後之業(이성수후지업) (墓碣銘. 崇禎甲申後再庚午通政大夫前行吏曹參議 權相一 撰)


  묘갈명에 새긴 권상일 권상일[1679(숙종 5)∼1759년(영조 35)]: 본관 안동. 자 태중(台中) 호 청대(淸臺) 조선 후기 문신, 학자로 경북 상주(문경) 근암리(近嵒里) 출생. 숙종 36(1710) 증광문과 병과로 급제. 영조 3년(1727) 만경현령이 되어 이듬해 일어난 이인좌의 난을 토벌함. 1733년『퇴계언행록』을 교열하여 간행. 홍문관 부제학, 한성부 좌윤, 지중추부사, 대사헌 등 역임.
의 명사(銘辭)다.

참고 문헌

1. 김의묵 번역,先祖 負暄堂先生文集, 성문인쇄사, 2012.

2. 권태을,尙州漢文學, 상주문화원, 2001.

3. 문경문화원,聞慶誌, 2002.

4. 상주문화원,尙州史料集嶺南人物考,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