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尙州’, 韓國兒童文學의 故鄕
상주문화원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재수
Ⅰ. 들어가며
상주를 일러 ‘삼백(三白)의 고장’으로 부른다. 언제부터 이렇게 불렸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우리 고장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하고 자랑으로 여긴다. 하지만 상주가 ‘동시의 마을’이라는 별칭이 있다는데 대해서는 모르는 이들이 많다.
상주는 1950년대부터 일찍이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일선 글짓기 교사들과 아동문학가들에 의해 문예 교육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아직 전국적으로 글짓기 교육이 활성화되기 이전부터 이러한 영향을 받은 우리고장의 어린이들은 전국적으로 이름 있는 대회에서 글재주를 자랑하게 되었고 큼직한 상을 받아 옴으로 마침내 우리나라 아동문학가들에 의해 상주가 ‘동시의 마을’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삼백의 고장’을 우리 스스로 이름 지었다면 ‘동시의 마을’은 상주를 부러워했던 다른 이들이 붙여준 이름이기에 더 소중하다고 하겠다.
Ⅱ. 현대적 상주아동문학의 시작
1. 상주아동문학의 뿌리
가. <상주글짓기회>
상주 어린이들에게 글짓기에 첫 씨앗을 뿌리기 시작 한 것은 아마도 1955년 말부터이다. 우리나라 현대적 아동문학이 꽃 피운지 30년이 지나서 이다. 물론 이 시기는 서울을 제외한 일부 지역에서는 개인적인 아동문학 작품의 창작은 있었지만 의도된 글짓기 운동은 미흡하던 때였다. 그러나 상주는 ‘글짓기 교육’이라는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이곳 어린이들의 꿈 밭을 일구기 시작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할 수 있다.
상주글짓기회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모임을 만들었으며 이끌어 왔는지를 <상주글짓기회>가 발행한 『푸른잔디』를 통해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은 『푸른잔디』 25호에 실린 김종상 선생의 ‘제2회 경향교육상 수상을 받은 <상주글짓기회>’라는 제목의 글을 옮긴 것이다.
“상주 어린이에게 글짓기 씨앗을 뿌린 것은 1955년 말부터 시작된다.
몰론 일제강점기 식민지 교육에서도 글짓기를 시켜 왔기에 그 전에도 글짓기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많았지만 1955년에 김종상(金鍾祥)이 외남학교에 처음 부임한 후 전통적인 정형율에서 벗어난 동시교육을 실시했다. 다음해인 1956년에 김종상의 동기생인 신현득(申鉉得)이 의성에서 이곳 청동학교로 전근을 오자 그는 글짓기교육을 통해 가난으로 굶주린 어린이들에게 정신적 풍요함을 길러 주자는 의식을 강력하게 실천했다.
신현득이 청동으로 온 1956년에 처음으로 열린 상주교육회 주최 제1회 군내학도예술제(1956.10.30)와 경북 교육회 주최 제1회 도내학도예술제1956.11.5)에서 청동의 6년 김청자가 동요를 써서 3등을 한 것을 비롯하여 많은 상주 어린이들이 좋은 글을 써내어 주목을 받았다. 이어서 다음해인 1957년 제1회 계성중․고등 주최 도내 아동문예 현상모집에서 청동의 5년 손길봉과 5년 김진수가 똑같이 동시로 2등을 했고, 같은 해 10월 새싹회 주최 10번째 어린이 글짓기내기에서 외남 4년 장진순의 ‘일기’, 청동 4년 김진구의 산문‘감’, 청동 5년 손길봉의 동요 ‘호박넝쿨’이 특선, 외남 3년 이춘화의 산문‘양말’이 입상했고, 외남 4년 유옥분의 동시 ‘칡덩굴’이 대구일보에 당선, 외남 4년 유을상의 산문 ‘할미꽃’이 중앙방송에 입선, 외남 6년 박정상이 교육시보에 산문 ‘기쁜 날’이 입선, 외남 4년 이정희의 산문 ‘램프’와 외남 5년 김점이의 산문 ‘공부시간’이 똑같이 중앙방송에 뽑힘으로서 청동과 외남의 글짓기교육이 대외적으로 크게 인정을 받게 되었다.
1958년엔 외남 4년 주정님의 동시 ‘내 책받침’이 새싹회에 특선을 했고, 새싹회, 자유신문, 동아출판사, 중앙방송국 작품공모와 계성고교, 성신여고, 경북백일장 등에서 상주 어린이들이 입상을 휩쓸었다.
1958년 12월에 대구일보 문화부장 남 욱(南郁) 기자가 상주글짓기교육을 취재하여 1959년 1월 1일 『꽃 피는 동시의 마을』이라는 제목으로 상주(신현득), 청동(이철하), 외남(김종상)의 글짓기교육을 신년특집으로 보도했다. 이어서 1959년 5월에는 한국일보 장정호 기자의 현장 취재로 <어린문사의 고장> - <여류작가의 묘판> 등의 제목으로 한국일보에 연재 보도했다. 당시 외남 어린이들의 대외 입상작품 93편중에 77편이 여자 어린이의 글이었기에 <여류작가의 묘판>이라 했던 것이다. 그러자 대구일보사가 <상주어린이시화전>을 대구에서 열었다. 이어서 같은 해 10월에는 새싹회 주관으로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상주어린이시화전>이 개최되었다.
나. <동시의 마을> 이란 이름
여기서 잠깐 <동시의 마을>에 대한 신현득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1958년 겨울 대구일보 문화부장 남 욱(南郁)씨가 상주글짓기 현황을 신년특집 취재 할 때는 상주를 <동시 꽃 피는 마을>이라 호칭하였는데 이는 대구의 김성도(어진길)선생이 지은 이름이었다. 대구일보는 이듬해 신년호에 외남, 청동, 상주 세 학교를 <동시 꽃 피는 마을>로 전면 특집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여름방학에 3개 학교 시화전이 열렸다. 그림은 대건고의 정준용(鄭駿溶)화가였으며 글씨도 직접 썼다.(중략)
1959년 겨울이었다. 윤석중 선생이 새싹회 주최로 상주 셋 학교 시화전을 서울에서 다시 연다고 했다. 윤석중 선생은 남 욱 대구일보 문화부장의 부탁을 받고 작품을 인수하여 액자를 바꾸고 서예가에게 부탁하여 작품 글씨를 궁체로 새로 썼다. 정준용 선생의 그림만 살려서 시화를 새로 만든 것이었다. 작품은 60편정도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동시 꽃피는 마을〉이라는 호칭도 <동시의 마을>로 바꾸었다. 장소는 서울중앙공보관이었다.
각 중앙지 문화면이 전국 초유의 어린이 시화전을 큼직하게 다루고 있었다. 상주가 이만치 중앙지 지면을 차지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전시장에는 ‘상주 셋 학교에 학교 종을 사서 보냅시다.’라는 표어를 곁들인 포스터가 있고 그 밑에 모금함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모인 돈이 적어서 종을 사서 보내지는 못하였고 그 뒤, 61년에 윤석중 선생이 3.1문화상을 받고 상금으로 큼직한 종을 사서 셋 학교에 기증하였다.)”
다. <상주글짓기회> 조직
1958년, 영주에서 김동극 선생이 전근을 왔다. 그리고 글짓기 지도 교사들을 <상주문예교육연구회>(1959)라는 이름으로 조직한 후 다시 대구로 전근을 갔다.
1961년 년 말 <상주문예교육연구회>는 <상주글짓기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중심 회원은 신현득, 강세준, 권태문, 최춘매, 이철하, 김종상, 이무일 등이었다.
이들은 글짓기 교육의 보편화와 생활 작문 지도의 길을 개척할 것을 약속하고 다음과 같은 사업을 추진하였다.
1) 1962년 5월 제1회 경북어린이글짓기대회를 1차로 경북 북부지구만 실시 2) 1963년 상주 어린이 당선 작품집 『동시의 마을』양장본으로 출판
3) 1964년 9월에는 회지 『푸른잔디』 20호를 인쇄판으로 출판
회원들의 연구 결과를 <연수 자료집>을 만들어 군내 각 학교에 배부, 군내 글짓기 지도교사 전원에게 글짓기 보급 강습회를 실시
4) 1965년 경북백일장의 범위를 확대하여 경북 전체를 7개 구역(상주, 대구, 김 천, 경주, 포항, 영주, 안동)에 실시
5) 1966년 제6회 경북백일장을 8개 지구(대구․영천지구, 안동․예천지구, 영주․청 송지구, 포항․영일지구, 김천․선산지구, 경주․월성지구, 청도․밀양지구, 상주․문 경지구)에 실시
6) 5월 가정주간에 군내 어린이 시화전을 상주문화원 전시실에서 4일간, 비원, 삼호, 양지, 제일 등 4개의 다방을 옮겨서 4일간 전시
라. <상주글짓기회>가 하는 일
본회는 국민학교 아동 글짓기 지도의 실천연구와 지도교사 상호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교육연수 단체이다. 그러나 이모임이 다른 어느 교육연구 서클과도 다른 특이한 점이 있다면 회원 스스로의 많은 노력과 끈기로서 자발적으로 이끌어 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은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일들을 실천하였다.
첫째, 정기 월례회로 모여 ① 각 회원의 연구 실천 결과 발표 ② 회원들의 지도 수업을 참관, 지도방법의 개선 협의. ③ 아동작품의 합평회를 통한 지도의 새로운 방법을 모색 및 <푸른 잔디>라는 책으로 엮어 아동글짓기 지도의 참고 자료로 삼았으며 ④ 신문지상이나 백일장에서 뽑힌 작품의 경향을 파악하여 글짓기 지도 방향에 대한 연구를 해 왔다.
둘째, 그 동안의 연구 결과를 군내 글짓기 지도교사와 일반 교사들에게 강습을 실시하여 글짓기 교육을 일반화 시키는 일 등을 해 왔다.
셋째, 어린이들에게 글짓기 교육에 대한 새로운 목표와 방향 제시였다. 즉 글짓기 교육은 유행이나 사치가 되어선 안 되며, 잔꾀나 말재주 놀이가 아니며, 세련된 문장가의 양성은 더욱 아니며, 스포츠 같은 선수 훈련은 안 된다는 것이다.
넷째, 글짓기 교육은 참된 생명의 교육으로서 건전한 양심의 배양, 애국적 생활인을 기르는 종합교육으로서의 제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일반화시키는 일이다.
이상은 푸『푸른잔디』25호에 기록된 1955년부터 1966년에 있었던 내용이다.
2. 동시의 마을을 지키는 <상주아동문학회>
가. ‘둥지’ 동인의 탄생
<상주글짓기회>는 어린이들의 글짓기 지도에만 관심을 두게 되어 자칫 회원들의 창작활동에 소홀하지 않을까하는 우려를 했다. 모두 작가이기를 자부하는 둥지동인들은 1971년 12월에 첫 동인지 『둥지』 1집이 출간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1년 11월 10일 화요일 오후 6시에 현대예식장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나. <상주아동문학회>의 시작과 회보 발행
<상주아동문학회>가 1977년 12월 처음으로 조직하고, 1978년 1월 10일 창간회보를 내면서 이렇게 다짐을 하였다.
“프린트 판이나마 매월 회보를 낼 것이다. 문명의 첨단을 걷는 시대에 이런 원시적인(?) 시시한 회보를 내느냐고 누군가가 속으로 욕을 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담기는 내용을 알 차게 하기 위하여 노력을 개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선언했다.
16절 프린트 판, 4면, 그러나 이 회보는 전국에 ‘회보 시대’를 여는 불씨가 되었다.
다. 회보 『상주아동문학』78호로 종간
1978년 1호부터 매월 발간하여 78호까지 내던 회보도 형편에 의해 1986년 회보를 종간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주아동문학회> 회원들의 활동에 대해 회보 78호(종간호)는 다음과 같이 회원들의 활동을 정리하였다.
회보를 통해 발표된 작품
① 동화가 42편, 동시가 305편
② 권태문 동화집 3권, 김상삼 동화집 2권, 최춘해 동시집 2권, 박두순 동시집 2권, 김재수 동시집 1권, 이무일 동시집 1권
③ 권태문 제5회 <한국아동문학상>, 박찬선 제3회 <흙의 문학상>, 최춘해 제6회 <한국아동문학상>과 제17회 <세종아동문학상>, 김재수 제12회 <한정동 아동문학상>, 박두순 제11회 <한국아동문학상>과 <대한민국문학상 아동문학부문 우수상>, 이무일 제17회 <한정동아동문학상>
④ <한국아동문학가협회> 여름 세미나 개최 (1982년 7월 31일 ~ 8월 1일 양일간. 주제 :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와 문학교육)
라. 상주아동문학회의 최근활동
① 제2동인지 『감이 열리는 마을』
1988년 4월 15일 제2 동인지 161쪽을 아동문예사
② 제3동인지를 『푸른잔디』와 함께 2000년 12월 20일『푸른잔디』(상주글짓기회 53호
③ <여름시인교실>개최 : 제1회 <여름시인교실>을 2001년 7월 24일 ~ 26일(2박 3일)동안 상주학생문화체험학습장에서 <상주문인협회>와 <상주글짓기회> 및 <상주아동문학회>가 공동으로 개최하고 이후 4회까지 실시.
④ 제4동인지 『감꽃 피는 마을』을 2001년 12월 20일(푸른잔디 54호) 발간
⑤ 제1회 소곤소곤 <상주삼백이야기축제> 참가
2007년 10월에 문화 축제의 일환으로 시작된 제1회 <소곤소곤 상주삼백이야기축제>가 북천 시민공원에 1960년대부터 발간된 희귀본 상주문학 및 상주아동문학과 관계된 도서 약 60여 권을 축제장에 전시하여 상주가 명실 공히 아동문학의 고장임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일
⑥제2회 동화나라 상주 이야기축제 학술세미나 개최
2008년 10월 8일부터 3일간 상주종합운동장에서 동화나라 상주 이야기축제기간에 10월 8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청소년 수련관 세미나실에서 <상주의 예술과 축제>라는 학술 세미나를 개최
⑦ 제3회 상주동화나라이야기축제 <2009 동화 이어쓰기 대회>로 아동문학회 만 참여하여 2014년까지 시행(2015년 축제는 예산 부족으로 하지 못함)
⑧ 제1회 경상북도 어린이 동화구연대회
2011년 <상주감고을축제> 일환으로 계획된 제1회 경상북도 어린이 동화구연대회회를 개최하여 2014년까지 계속 해 옴
⑨ 2014년『푸른잔디』 60호 복간
⑩ 2015년『푸른잔디』 61호 출간
Ⅲ. 고전적 상주아동문학
1. 읍성국가시대의 상주아동문학
가. 아동문학의 원시성(原始性)과 단순명쾌성(單純明快性)
인간이 있은 후에 민족이 있었고 그 민족이 언어를 가졌다면 그들의 생활과 사상의 표현은 곧 문학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한국현대아동문학 형성의 본질을 전통의 계승적 발전, 곧 고전아동문학의 점진적인 시대적 변모로 보느냐, 전통의 단절, 곧 이질적 전통의 수립으로 보느냐, 아니면 전통적인 바탕에 서구적인 이질의 것을 접합시킨 것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는 비단 아동문학사 뿐만 아니라 일반 양식별 문학사에서도 중요한 관심거리이다.
아동문학의 범주(範疇)와 영역을 전래동요 및 전래동화까지 포함한다면 삼국시대 이전의 민요 및 설화로부터 그 아득한 사적 계보를 들추어내어야 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아동문학의 기원은 멀리 예술의 기원론, 문학의 기원론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므로, 우리의 고전아동문학 역시 원시종합예술(民謠舞踊)의 분화과정에서 그 원류를 찾아 현대로 이어지는 맥락 관계를 구명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대 이전 아동문학의 사적 계보를 더듬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형편에 놓여있다. 문헌 자료의 빈곤과 소멸도 그 중요한 이유가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우리의 고전아동문학이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이라는 양식적 분화(樣式的 分化)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일반문학 속에 거의 섞여있다는 사실, 특히 기록문화 쪽보다는 구비문학적 전통 속에 그 자취와 계보를 온전히 담고 있다는 사실이 한 특성으로서 지적될 수 있다.
사실 구비문학(口碑文學 -특히 說話와 民謠)은 그 본질적 속성이 아동문학의 그것과 상당히 긴밀한 상호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즉 구비문학의 원시성(原形性, 矛盾不合理性, 非倫理性)과 단순성, 소박성이나 인격화 현상(personification)은 곧 아동문학이 가진 본질적 속성의 그것과 일치하며, 구비문학의 설화는 아동문학의 동화와 민요는 동시․동요에 직접 계승된 가장 비슷한 현대기록문학에서의 형태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의 고전아동문학은 멀리 삼국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형식면에서 아동문학은 무엇보다도 원시문학으로서 원시성과 단순 명쾌성을 지녀야 한다. 그것은 아동의 사고와 상상이 미성숙한 단계이므로 그들의 생활에 맞는 표현이나 작법은 단순하고 명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동문학은 본질적으로 주제나 작중 인물의 성격이나 줄거리가 단순명쾌할 뿐만 아니라 이성보다 감각에 호소하고 어린이가 이해 될 수 있는 쉬운 형식을 요구한다.
나. 동요(童謠)와 동시(童詩)문학의 원형(原形) 전래
동요(시)문학은 민요와 섞여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로 구전 또는 정착되어 내려오다가, 전래동요의 모습으로 점차 분화되어 나갔다. 문헌상 최초의 동요 문학적 원형은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金首露王)의 강림신화(降臨神話)에 삽입되어 전하는 구지가(龜旨歌)와 이보다 후대인 삼국시대의 서동요(薯童謠)나 해가사(海歌詞), 풍요(風謠) 등이 있다. 이들 작품으로 보아 초기 동요의 형태는 단순 명쾌한 단형(短型)의 리듬과 즉흥적 유희적(遊戱的) 기능이 중시되어 전개 되었을 것임을 추정할 수 있어 현대 창작동요의 초기 특징과 일치되는 동요문학의 전통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동요의 시작은 이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오를 수도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미 부족국가 시대부터 제천행사를 통해 가무를 즐긴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가무는 노래와 춤을 말하는데 이때 노래는 바로 동요의 시작일 수도 있다. (중국의 古記錄인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부여조(夫餘條)부여의 영고(迎鼓), 동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여기서는 동요 즉 아동문학의 원형이라 부를 <구지가(龜旨歌)>와 <서동요(薯童謠)>를 살펴본다.
구지가(龜旨歌)
龜何龜何(구하구하)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수기현야) 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약불현야) 내어 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번작이끽야) 구워서 먹으리
- 연대 : 신라 유리왕 19년, 가락국 건국 때
특히 우리고장 함창은 6가야의 하나로 고녕가야국이 있었던 지역인 만큼 가락국 탄생 신화와 직결된 구지가(龜旨歌・迎神君歌)가 일찍부터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해 둔다.
서동요(薯童謠)
善化公主主隱(선화공주주은) 선화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타밀지가량치고) 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薯童房乙(서동방을) 맛동(서동) 도련님을
夜矣卯乙抱遣去如(야의묘을포견거여) 밤에 몰래 안고 간다.
- 연대 : 신라 진평왕 때(599년 이전)
다. 산문문학의 원형 설화와 전설
설화란 무엇인가? 어느 민족이나 집단에 예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이야기로 신화(神話), 전설(傳說), 민담(民譚) 등을 말한다.
이러한 설화 곧 이야기는 동화(童話)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전설이나 민담 등으로 전해 내려 온 이야기가 바로 전래동화이고 이 전래동화에서 오늘 같은 현대 동화로 발전해 왔다.
우리 지방 역시 수많은 설화와 전설들이 전하여 왔다. 그 까닭은 이미 이곳에 두 읍성국가가 존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벌면 금흔리를 중심으로 하여 사벌국(沙伐國)이 존재하였다가 신라 점해왕(재위 247~261)이 병합하여 주(州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거니와 함창 지방에는 고녕가야국(古寧伽倻國)이 존재하였다.
지금까지 상주 전설로 가장 오래된 것은 사벌국 관련의 왕활교(王活橋), 고녕가야국 관련의 대가산(大駕山) 전설을 비롯하여 상주 지형과 관련된 행주(行舟)전설, 공갈못(公儉池)과 관련된 매아(埋兒)・용투(龍鬪)・용경(龍耕)전설, 견훤과 관련된 전설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사실만으로 이 시기의 문학을 논하기는 사실상 어려우나 구비문학으로서 설화가 있어온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그리고 이들은 다 구비문학으로서 후대에 상주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었다. 가장 대표적인 전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사벌국 전설
가) 사벌왕 현몽(沙伐王現夢) 설화 및 왕활교(王活橋) 설화
“사벌국의 국도(國都)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벌왕릉이 옛 사벌촌 서쪽 수
백 보의 둔진산 밑에 있어 구릉(丘陵)이 우뚝하고 단장(壇場)이 무너졌으며, 곁에는
석탑(石塔)이 있어 옛 노인들이 왕묘(王墓)라고 전해 왔다. 강희(康熙) 임자년(壬子年・1672)에 목사 이초로(李楚老・재임 1668.2~1669.6)의 꿈에 옥대를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고하기를, ‘나는 사벌왕이다. 능이 사벌에 있는데 소와 양이 침범하니 그대가 금지시켜 주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 목사가 깨어나 기이하게 여겨 고을 사람을 불러 묻고 비로소 능이 있는 것을 알고 크게 봉축을 하였다. 그 촌의 들판에 돌다리(石橋 : 현재는 농토로 변하여 없어짐)가 있는데 민간에서 왕활교(王活橋)라 일컫는다. 이는, 이 다리 밑에서 왕이 적을 피하였기 때문이다.
나) 사벌왕성(沙伐王城) 설화
“병풍산에 옛 성이 있으니 세인이 전하기를 사벌왕이 쌓은 성이라 한다. 그 가운데 하나의 못(池)과 세 개의 우물(井)이 있다. 동쪽 성 밖은 깎아지른 절벽이 백 길이나 되는데 세인이 전하기를 성 안에 물이 부족하면 물수레(水車)로 강물을 끌어서 성으로 넣었다 한다.”
2) 고녕가야 전설
가) 대가산(大駕山) 설화와 정화지(井花池) 설화
함창 지방에는 고녕가야국과 관련된 설화로 대가산(大駕山) 설화가 있으니,“대가산은 군의 서쪽 7 리에 있는데 민간에서 전하기를, 가야왕(伽倻王)이 이곳에 행차하여 놀았기에 대가산이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또, “정화지(井花池)는 군의 북쪽 2리에 있는데 일명 상감지(上監池)라고도 한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가야왕(伽倻王)이 일찍이 이곳에 행차하여 놀았기에 상감지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3) 공갈못 설화
가) 매아설화埋兒說話)
옛날 공갈못을 만들 때, 사방의 물이 하도 많아 둑을 쌓으면 터지고 하여 ‘공갈’이
란 아이를 못 둑에 묻고 쌓아 이루었으므로 ‘공갈못’이란 이름이 되었다고 홍귀달
(1438-1504)은 「명삼정기(名三亭記)」에다 기록해 두었다.
나) 인주설화人柱說話)
다)용갈龍耕)이 전설
음력 정월 14일 겨울밤인데도 못 근처의 소들이 땀을 흘린다. 그것도, 소들이 밤을 새워 공갈못의 얼음을 갈기 때문이라고들 했다.
라) 쌍룡연투설화雙龍戀鬪說話)
마) 공갈못 크기 설화
볶은 콩 한 되를 하나씩 먹으며 지반을 돌아와도 콩이 모자란다.
바) 지형(地形) 설화
백곡(百谷)의 물이 이 못으로 흘러 들어오면 당상(堂上)이 날 텐데 구구속수(九九谷水)가 들어와서 당상이 나지 못했다.
사) 공갈못 구경 설화
죽어서 저승에 가도 “상주・함창 공갈못을 구경하고 왔느냐?”고 물어서 구경치 못한 사람은 이승으로 되돌려 쫓는다고 한다.
4) 은자 설화
“옛날 신라에는 금은(金銀)으로 된 두 개의 자가 있었는데, 이들 자는 목숨을 연장시키는 자들이라 인구가 계속 불어나 살기가 어려워지자 나라에서 이 두 자를 영원히 감추기로 하였다. 그래서 금자(金尺)는 경주에 묻고 은자(銀尺)는 상주(上州)의 은성촌(銀城村・銀尺)에 묻어서 면(面)과 산(山 : 은자산)의 이름이 생겼다 한다.”
5) 견훤 설화
호유설화(虎乳說話), 지룡(地龍)설화. 말바우 설화, 아차동설화
6) 정기룡 장군 설화
정기룡(鄭起龍)과 적렵마(赤鬣馬), 정무수(鄭茂壽)와 호랑이
7) 이상향 우복동 전설
이 외에도 지역별로 무수히 많은 전설과 설화들이 넘쳐나는 고장이다.(상주시사 권4 참조)
Ⅳ. 고려시대의 상주아동문학
1. 임춘(林椿)의 가전체 소설
임춘의 국순전과 공방전을 아동문학이라고 보는 견해는 가전체 소설이 오늘날 현대동화에서도 즐겨 사용하는 사물을 의인화 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전래동화가 전해지는 이야기를 동화한 것이라면 가전체 소설은 전래동화보다 훨씬 창작에 가까운 소설이요, 어린이들에게도 즐겨 읽을 수 있는 동화적 소재이기 때문이다.
가. 서하(西河)임춘(林椿)
임춘(林椿). 고려 인종 때의 문인(?1147-1197~?).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의종, 명종 때의 사람으로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이다. 두 편의 가전체 <국순전(麴醇傳)>, <공방전(孔方傳)>이 전하고 있는데 이 두 작품은 가전체(假傳體) 문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나. <국순전(麴醇傳)>·<공방전(孔方傳)>
가전(假傳)이란 세상을 비판하고 풍자하면서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일깨워 줄 목적으로 사물을 의인화하여 실전(實傳)과 같은 기술 방법으로 써 나가는 국문학의 한 갈래이다. 앞서 생성된 패관문학이 개인의 창작물이 아님에 비하여 가전은 개인의 창작물이어서 소설에 한 발짝 접근된 형태이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가전체 작품으로는 이규보의 국선생전(술의 의인화).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 거북이 의인화). 이곡의 죽부인전(竹夫人傳 대나무 의인화). 이첨의 저생전(楮生傳 종이 의인화). 석식영암의 정시자전(丁侍者傳 지팡이 의인화) 등이 있는데 임춘의 공방전과 국순전은 이들 작품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공방전(孔方傳)의 공방이라 함은 엽전에 뚫린 네모난 구멍을 가리키는 말로서 돈을 의인화시켜서 인간적인 품격을 부여하는 방식은 일종의 우의적인 표현법에 해당된다. 돈의 속성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과 각성을 의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傳)’의 사실성과 ‘우화(寓話)’의 윤리성을 결합시킨 것이 바로 이 작품의 특징이다.
임춘은 이 작품에서 돈이 생겨나게 된 유래와 돈이 인간 생활에 미치는 각종 이득과 폐해를 사람의 행동으로 바꾸어 보여 줌으로써, 사람들이 재물을 탐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국순전(麴醇傳)은 술을 의인화한 것이데, 술은 누룩으로 빚으므로 술의 성은 국이고, 이름은 순이다. 작자는 이 작품을 통해서 인생과 술의 관계를 문제 삼고 있다. 즉, 인간이 술을 좋아하게 된 것과 때로는 술 때문에 타락하고 망신하는 형편을 풍자하고 있다. 당시의 국정의 문란과 병폐, 특히 벼슬아치들이 권세나 세력을 제멋대로 함부로 부림과 또한 권력의 타락상을 증언하고 고발하려는 의도의 산물이다.
Ⅴ. 조선시대의 상주아동문학
1. 조선시대 전기의 아동문학
가. 조선시대 전기의 아동시
여기서는 조선시대에 아동문학 작가의 동시라기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적 재능이 돋보여 어린 나이에 지은 시여서 아동시라고 붙여 본 이름이다.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 1438~1504) 1461년 문과에 올라 좌참찬에 이르렀다. 연산군의 폭정을 직언으로서 만류하려다가 갑자사화(1504)에 화를 입은 직신으로 영남 사림파 형성의 주역이기도 하였다.
5세에,
鳥坐枝 或枝動不動(조좌지 혹지동불동) “새가 나뭇가지에 앉으니, 혹 가지가 흔들리기도 하고 안 흔들리기도 하네.”
하여 많은 선비들이 ‘혹(或)’자에 문장의 기질과 습성이 있다고 놀랐다 한다. 이는 5세 때에 이미 나뭇가지와 새의 동(動)・부동(不動)을 동시에 볼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나. 최초의 한글소설 채수의 <설공찬전(薛公瓚傳)>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이라 할 수 있는 <설공찬전>을 아동문학이라고 하는 까닭은 소설의 배경과 전개가 아동문학의 특징인 공상적 전개에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소설은 어른을 대상으로 창작된 것이기는 하나 당시에 한글본이라면 어린이들도 즐겨 읽었을 터이기에 상주 아동문학의 뿌리라 여겨도 곤란하지는 않을 터이다.
조선 전기 문학사상 상주에서는 특기할 만한 소설문학의 대가가 나타난다. 그 분들은 나재 채수(1449~1515) 부자이다. 나재 채수는(蔡壽, 1449년 ~ 1515년) 는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기지, 호는 나재, 본관은 인천. 1469년 예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에 올라 춘추관에서 일했으며, 《세조실록, 《예종실록》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한문소설 설공찬전(薛公瓚傳)을 남겼는데 이 소설은 화복 윤회설로서 백성을 현혹시킨다 하여, “인천군 채수의 파직을 명하였다.”라고 하였다.
《중종실록》에서는 ‘설공찬전(薛公瓚傳)’, 어숙권(魚叔權)의《패관잡기》에서는 ‘설공찬환혼전(薛公瓚還魂傳)’으로 표기하였고, 국문본에서는 ‘설공찬이’로 표기하고 있다.
한문 원본은 1511년 9월 그 내용이 불교의 ‘윤회화복설’을 담고 있어 백성을 미혹한다 하여 왕명으로 모조리 불태워진 이래 전하지 않으며, 그 국문필사본이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默齋日記) 제3책의 이면에 <왕시전>·<왕시봉전>·<비군전>·<주생전> 국문본 등 다른 고전소설과 함께 은밀히 적혀 있다가 1997년 극적으로 발견되었다. 국문본도 후반부가 낙질된 채 13쪽까지만 남아 있다.
나. 채소권의 화왕전(花王傳)
나재의 아들 졸재 채소권(1480~1547)이 설총의 화왕계(花王戒) 계통의 소설로서는 한국 최초로 화왕전(花王傳)을 창작한 사실도 한국문학사에 특서할 만하다.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효중(孝仲). 호는 졸옹(拙翁). 윤(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남양부사 신보(申保)이고, 아버지는 정국공신(靖國功臣) 지중추부사 수(壽)이다.
1) <화왕전(花王傳)> (번역・전문)
“화왕(花王)의 선조는 적제(赤帝)다. 낙양에서 건국하여 화덕(火德)으로써 법기(法紀)를 삼고 색깔은 붉음(赤)을 숭상하였다. 왕이 나라를 다스림에 부지런하여 덕화가 향기처럼 번지었고, 실로 애써 정사를 돌보아 화반(花班)의 조회를 받으니 이로부터 방명(芳名)이 먼 데까지 퍼지었다.
화왕의 아우 장리(將離・芍藥)를 화현(花縣)에 봉하니 그 풍류와 호탕한 태도가 대
개 왕과 견줄 만했다. 수레를 몰고 무리지어 와서 온갖 꽃핀 곳에서 임금을 가까이모시고 날로 화악루(華萼樓)에서 놀되, 잠시라도 서로 불러 조금이라도 떨어진 적이 없으니, 사람들이 형제 우애가 지극하다 기리었다.(후략)
2. 조선시대 중기의 아동시
가. 남계 강응철의 아동시
남계(南溪) 강응철(康應哲. 1562~1635) 5세에 ‘강산풍월(江山風月)’ 넉자의 큰 글씨를 써서 당대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고(글씨는 현 상주박물관에 보존), 8세 때는 소호(蘇湖)에서 놀며 어느 어른이,
“수양버들 천 가닥 실 늘어지고 (絲楊千線嚲)”
라고 읊자 응대하여,
“꾀꼬리는 북소리도 가볍게 내네(黃鳥一梭輕)이라.”
하여, 꾀꼬리가 버들가지 사이를 오감을 베를 짜는 북이 지나는 것으로 형상하였다. 천부적 시재라 할만하다. 또한, 10세 때는 경상감사 강사상이 남계의 시재를 듣고 관수루(觀水樓)로 불러 땔감나무 실은 배(薪舟)를 읊게 하니,
割盡秋山一半靑 가을 산 푸른 반(半)을 다 베어서
滿船橫載江滄溟 배에 가득 가로 싣고 강물에 떴네.
幾驚驅鷺烟波夢 몇 번이나 해오라기의 연파꿈을 깨웠던가
晩泊東吳落照明 해질녘 동오에 배대니 지는 해가 비추네.
라고 하여 보는 이를 놀라게 하였다.
나. 이재(頤齋) 조우인(曺友仁)의 아동시
이재(頤齋) 조우인(曺友仁. 1561~1625)은 학문・문학에서 명실 공히 상주를 대변할만한 국사(國士)다. 우리 국문학사에 <관동별곡>을 비롯한 가사 네 편을 남기었는데 시(詩)・서(書)・화(畫) 3절로 우수한 시문을 많이 남기었다.
이재는 4세에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아서,
雲囚碧山首(운수벽산수) 구름은 푸른 산머리를 가두고,
煙割暮江頭(연할모강두) 연기는 강 허리를 가르네.
라고 하니, 가히 이재의 시재를 알만하다 하겠다.
다. 가정(柯亭) 신석형(申碩亨)의 아동시
가정(柯亭) 신석형(申碩亨. 1605~1660)도 문명을 남긴 선비인데, 14세에 초학대로 창석과 우복을 뵈러 갔을 때 창석이 시 짓기를 명하자,
山川望裏壯 산천은 바라보는 데서 장하고
風景眼中開 풍경은 눈 가운데서 열리네.
波瀾魚龍勤 물결 이니 고기와 용이 놂을 알겠고
雲深處豹埋 구름 깊으니 표범의 거처는 감춰졌네.
라고, 즉석에서 응대하여 두 분을 놀라게 하였다 한다. 14세 소년의 시안(詩眼)이 특출하니, 원근과 회명(晦明)을 동시에 볼 줄 아는 심경(心境))의 굉활함이 그것이다.
라.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의 아동시
태촌 고상안은 어려서부터 영오하고 독서를 좋아하였으며 7세에는 백석(白石) 강제(姜霽)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하루는 스승과 강변을 거닐다가 스승이 자갈을 가리키며
“白石千年白(백석천년백) 흰 돌은 천년이 가도 흰 돌이요”
라고 읊고는 제자에게 댓구하라 하니
“長江萬古長(장강만고장) 긴 강물은 만고에도 끊임이 없네.”
라고 응대하였다.
3. 조선 중기의 동화
가)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
태촌 고상안(1553년(명종 8)∼1623년(인조 1)은 상주 출신의 실학자요 관리며 문인이었다. 지금까지 태촌은 <농가월령가>의 저자로 학계에 소개된 바는 있으나 실학자 태촌으로서 그의 문학작품 중 백미(百媚)라 일컬을 수 있는 『태촌집』권3․4․5의 <잡저(雜著) 및 <효빈잡기(效嚬雜記 상․하)>에 수록된 <총화(叢話)> 192화 가운데 아동을 독자로 의식한 일화(逸話)와 동화가 50여 화(話)나 된다.
태촌 고상안(1553~1623)이 남긴 <효빈잡기>(상・하)487)는 특기할 만한 기문이다. 상하편의 총화는 모두 192화(話)인데 실사구시적인 실학관을 지닌 태촌의 사상과 철학이 잘 드러났다.
50여 편의 동화 중 다음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1) 두더지의 신랑감
“옛날에 미녀(美女) 딸을 둔 두더지가 딸을 천하의 제일가는 신랑에게 주려고 먼저 해 (日)에게 구혼하였다 해가 달(月)에게 양보하고, 달이 구름(雲)에게, 구름이 바람(風)에게, 바람이 돌부처(石佛)도 거절하여 결국 두더지는 두더지끼리 결혼하였다”
는 내용이다. 이 동화는 오늘날 초등학교 저학년용 필독도서 동화에 포함되어 있다.
2)늙은 쥐와 젊은 쥐(제5권 제1화)
“옛날 물건을 훔치는데 신묘한 늙은 쥐(老鼠)가 살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 하여 몸소 도둑질을 할 수 없게 되자 젊은 쥐들에게 도둑질을 가르쳐 주고 훔친 물건을 나누어 먹었다. 이러기를 오래 하자 젊은 쥐들이 그 늙은 쥐에게 더 배울게 없다고 생각 한 나머지 훔친 물건을 나누어 주지 않게 되었다. 늙은 쥐는 분이 가득하였다. 하루는 마을 부인이 음식을 솥에다 넣고 그 뚜껑에다 돌을 얹어 놓아 훔칠 방도가 없어져 버렸 다. 젊은 쥐들이 꾀를 다 했으나 이루지 못하자 늙은 쥐에게 가서 물었지만 거절하였다. 그러자 저들이 백배 사죄를 하더니 그제야 늙은 쥐는 솥의 발 세 곳 중 한 곳을 파면 솥 뚜껑이 기울어져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 뒤로는 노소 쥐들이 화 목하게 살았다.”
이와 같이, 계몽(啓蒙)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수집(채록)한 동화(童話)가 수십 편(성인이 읽어도 무방한 것도 포함)이나 수록되어, 한국 문학사에서도 태촌의 공은 특기되어야 하리라 믿는다.
3) 사냥꾼의 횡재(권4 제6화)는 사냥꾼에 얽힌 동화 같은 일화도 있다.
“같은 마을에 우씨 성을 가진 사냥꾼이 하루는 사냥을 나갔다. 큰 범이 멧돼지를 잡아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틈을 노리던 표범이 급습하여 큰 범의 목을 물어 죽였다. 그제야 사냥꾼은 표범을 쏘아 잡아 일거삼득하였다.
태촌은 이 사실을 두고 “아, 범과 표범은 적에게 밝지 못하였다. 범은 그 용맹만 믿고 멧돼지 먹는데 정신을 빼앗겨 표범이 졸지에 급습함을 알지 못했으니 죽음을 면치 못함도 마땅치 않는가” 라고 했다. 이는 목전의 이익에 정신이 팔려 지척에 재앙이 있음도 모르는 위인들의 처세를 겨냥한 경계요 비평이다.
4) 두 마리 소의 주인(권4 제40화)
“옛날에 한 노인이 두 소를 매어 밭을 가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주인에게 어느 소가 더 나으냐고 물었다. 주인은 한참 만에 지나가는 사람의 귀에다 대고 왼쪽 놈이 났다고 대 답을 하자 그 사람이 왜 귓속말로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노인이 대답하기를 소는 우리 집의 애양물이라 비록 지각은 없으나 어찌 눈앞에서 우열을 말하겠느냐 라고 했 다.”
이 이야기를 들은 왕도 정곤수의 간하는 말에 탄복을 했다는 이야기다.
5) 막내아들의 재산 상속(권5 제62화)는 성종 때 이야기다.
“막내아들을 사랑하여 온 재산을 그에게 주고 형에게는 주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 그 형 이 형부(刑部)에 소송을 제기하니 형부에서 왕에게 알렸다. 성종이 죄를 논하는 문건에 ‘세상 사람이 단지 국화를 사랑해 탐하는 것이 아니라 이 꽃 핀 뒤엔 다시 필 꽃이 더 없기 때문이다.’라고 쓰고, 명하기를 아버지가 한 일을 고치지 못하게 하였다.”
이 말 속에는 꽃으로서 오상고절(傲霜孤節)로는 국화만한 것이 없듯이 형들보다 막내의 재목됨을 알아 그에게 가문을 의탁한 아버지의 깊은 뜻을 왕으로서도 고칠 수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었다. 백성의 마음을 헤아림이 심히 깊다고 하겠다.
6) 성종의 명 판결(권5 제63화)도 성종의 명 판결
“어떤 백성에게 맏딸과 아들이 있었는데 재산을 모두 사위에게만 주고 아들에게는 아버 지의 초상화 한 폭만 준 일이 있었다. 아들이 장성하여 형부에 소송을 제기하니 성종이 그 초상화를 바치라고 하였다. 초상화를 받아 벽에 걸고 보니 열 손가락이 다 밑으로 내 려져 마치 무엇을 가리키는 모습 같았다. 왕은 초상화를 내려서 그 여백에다 재산을 자녀 공히 나누어 주라는 글을 지었다.”
이 명령을 쫒아 재산을 나누어 준 판결에 대해 저자는 “성명(聖明)의 묵식(黙識)이야 말로 보통사람의 천견으로는 미칠 바가 못 된다.” 라고 왕의 식견과 슬기로움을 포양하였다. 이 표양은 전자는 아버지 되는 사람의 심리를 헤아린 판결이요, 후자는 딸과 사위의 간계를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진실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은 명군(名君)․명 판결이라 할 수 있으니 이 같은 단편적인 일화로서도 성종의 사람됨을 극명하게 부각시켰다고 하겠다. 아울러 두 일화는 아동들에게도 유용한 개안(開眼)의 자료로서 충분하다.
7) 도둑맞은 종이(권5 제 1화)
“한 종이 장수가 밤에 도둑을 맞고 이튿날 고을 원에게 찾아 줄 것을 호소했다. 원은 도 둑 맞을 때 옆에 누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종이 장수는 소나무 한 그루만 있었다고 답하 자 원은 그에게 소나무를 베어 오라고 명령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온 고을 사람들이 관 정으로 몰려들었고, 종이 장수는 소나무를 베어 왔으나 원은 소나무에게 무엇을 물으려 고 호통을 치고는 관문을 닫고 말았다. 그리고는 군중을 향해 무단으로 관정을 침입한 소란 죄를 씌우되 벌 대신 종이로 속죄할 수 있게 하고는 반드시 종이에 성명을 기입하 도록 하였다. 순식간에 온 고을의 종이가 답지하였고, 종이 장수는 그 속에서 자기의 종 이를 발견하여 도둑을 잡았다.”
8) 삼 형제의 송사(권5 제88화) 송기충(宋期忠)목사가 내린 명판결의 내용
“주민 삼형제가 재산으로 인해 송사가 났다. 이유는 아버지가 재산을 막내에게만 주고 두 형제에게는 분급치 않았던 까닭이다. 송 목사는 짐짓 고루 나누어 지지 않는 아버지 의 처사를 나무라며 짚으로 인형을 만들어 ‘송자지부(訟者之父)’라 명명했다. 그런 뒤 맏 이에게 그 짚 인형을 끌고 오라하니 거리낌이 없이 끌고 왔다. 중형 역시 큰형과 같이 했다. 끝으로 막내에게 시키니 “비록 허수아비나 이름을 아버지라 하였은즉 어찌 끌 수 가 있겠습니까? 이는 내 차마 할 수 없습니다.”하고 거절하였다. 그제야 송 목사는 두 형을 심히 꾸짖고 내어 쫒았다.”
퇴촌의 <총화(叢話)>에는 이렇듯 동화나 동화적인 일사(逸事)․일화(逸話)가 50여 편이 되어 저자의 독자 의식이 독특함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차세대 주인공들인 아동(청소년)들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절실했던가를 여실히 보여 줌이며, 경서(經書)외에는 읽을거리가 없었던 조선조 아동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하였으니 이는 태촌이 문학의 효용성을 누구보다 극대화시킨 선구자임도 알려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태촌의 <총화(叢話)>는 지난 이야기가 아니라 앞으로의 이야기란 특징을 지녀 그 문학의 생명력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고 할 만하다.
4. 조선 후기의 아동문학
가. 조선후기의 아동시
1) 이안당(易安堂) 조천경(朝天經. 1695~1776)
검간의 5세손이요 죽천 조자신의 아들로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을 버리고 학문으로 일관하였다. 오륙 세에 시를 지을 줄 알아, 부친이 살쾡이에게 어미를 잃은 병아리를 두고 글을 지어라 하니,
群雛入草啼(군추입초제) 뭇 병아리 풀숲에 들어 울되,
如訴臥薪情(여소와신정) 마치 와신상담의 뜻 호소하듯 하네.”
라 하였다.
2) 임하의 아우 이성유(李誠儒)
몸이 약하여 효경과 18사략 정도만 읽었는데 쫓겨 가는 부인의 원망을 노래한 거부원(去婦怨)(창해시안・중) 시에서,
出門登車去(출문등거거) 문 나서면 수레타고 갈 몸
何言復來歸(하은복래귀) 무슨 말로 돌아오마 하랴.
不惜恩情絶(부석은정절) 은정(恩情) 끊어짐은 아깝지 않으나
但恐去後譏(단공거후기) 단지 돌아간 뒤 나무랄까 두렵네.
라고, 읊었다. 10여 세에 지은 작품으로서는 아주 아름답다 하겠다. 그리고 조춘시(早春詩)(창해시안・중)에서는,
二月春風到(이월춘풍도) 이월에 봄바람 부니,
芳心見樹梢(방심견수초) 꽃 마음을 나뭇가지에서 보겠네.
라고, 읊었다. 시에 천재였음을 알 수 있다.
3) 성재(誠齋) 남한호(南漢皓. 1760~1821)
효자 영(嶸)의 후예요 남필관(南必觀)의 아들로 학자로서 시명(詩名)도 얻은 선비다. 7세에 공중 시(空中詩)를 지었는데,
廣大無所限(광대무소한) 넓고 크서 한계 없으니,
白雲千里萬里(백운천리만리) 흰 구름이 천리만리를 나네.
라 하였고, 10여 세에 우왕(禹王)이 용문(龍門)을 뚫었다는 논문을 지었는데,
“용문을 뚫되 도끼로 판 것이 아니라, 하수(河水)의 물살이 세차고 빨라서 용문(龍門)이 저절로 구멍이 뚫렸다.”
라고 하자, 손재 남한조가 크게 장려하였다.
4) 모구(慕構) 조술립(趙述立. 1791~1870)
검간의 후예로 매은 조승수의 아들이며 성재 남한호의 제자다. 8세 때, 모친 함양박씨<참봉 퇴침헌 한동녀(退寢軒 漢東女)>가 봄눈이 온 산을 덮자 춘설부(春雪賦)로써 시를 짓게 하자 모구의 자씨<남식정(南植正)의 부인>는,
東山厚日出(동산후일출) 동산에 큰 해 오르니
靑松脫白衣(청송탈백의) 청송이 흰 옷을 벗네.
라고 읊자 모구는,
昨夜白雪來(작야백설래) 어젯밤 흰 눈이 오니
萬樹梨花開(만수이화개) 온갖 나무에 배꽃이 피었네.
라 읊으니, 모친이 두 시가 다 모자람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딸의 시를 보고는 ‘청송탈백야(靑松脫白衣)’란 구절은 청개(淸介)한 맛은 있으나 고고(孤苦)한 모습이 있다하였고, 아들의 시에 ‘만수이화개(萬樹梨花開)’라 한 구절은 어떤 의사(意思)가 없는 것은 아니나 온아(穩雅)한 맛은 없다고 하였다 한다. 옛 사대부가의 내훈(內訓)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딸은 당시 11세였다. 모구는 1832년 ≪상산지≫를 증보하고 그 발문을 썼으며, 스승 남한호의 제문과 만사를 남기었다.
Ⅵ. 상주의 민요(民謠)와 전래동요(傳來童謠)
1. 민요란?
민요란 민(民)이 그 생활감정을 비교적 솔직히 표현한 노래로서 오랜 세월동안 전하여 온 것을 가리킨다.
민요(民謠, folk-song)란 말 그대로 민중의 노래란 뜻이다. 따라서 민요는 상층이나 지식인 계층에서 의식적으로 창작한 시가문학이 아니라, 민중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또한 향유되어 온 시가문학이다. 민요는 민중의 노래이면서 비전문적인 대중성을 가진 노래이다. 그러므로 민요는 글이 아닌 말로 된 노래이며, 그것은 민중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가창, 전승되는 구술문학의 한 가지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이루어진 상주 민요는 멀리 삼한시대부터 존재했다는 공갈못을 배경으로 생성된 채련요(採蓮謠)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채련요가 언제부터 불리어 졌는지에 관한 정확한 고증은 없다. 하지만 상주민요 중에서 으뜸이 되는 연밥 따는 노래(採蓮謠)는 공갈못 축조시기가 삼한시대였던 것으로 보아 노래의 형성도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채련요를 원형으로 한 모심기노래가 상주지역 뿐만 아니라 낙동강 연안과 멀리는 전라도 내륙지방에까지 가사의 변형을 거듭하며 전파되기도 하여 상주의 민요가 그 영역을 낙동강연안과 그 주변으로까지 확장되는 가장 중심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2. 대표적인 상주 민요
본고에서는 대표적으로 많이 불리고 있는 상주 민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공갈못연밥따는노래 채련요採蓮謠)>
상주 함창 공갈 못에
연밥 따는 저 처녀야
연밥 줄밥 내 따 주께
이내 품에 잠자 주소
잠자기는 어렵잖소
연밥 따기 늦어가요.
나. 상주 아리랑
우리나라 민요 가운데 아리랑은 가장 상징적인 노래다. 우리나라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를 가더라도 아리랑이 없는 곳이 없다. 또 누구나 한 곡쯤 부를 수 있는 노래도 아리랑이다.
옛날부터 아리랑은 식견 높은 양반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가 아니라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지어 부르고 어깨 너머로 배워 부르고 했던 백성들의 노래, 즉 민요(民謠)인 것이다.
1) 문헌상에 나타 난 상주아리랑
⓵ 아리랑
1. 아리랑 고개다 집은 짓고 동모야 오기만 기다린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씨구 아라리요
2. 여보게 쇠꼴을 밧비 비오 저 건너 저 집에 연기 난다
3. 실실아 동풍에 구진비 오고 동모야 오기만 기다린다.
⓶ <아리랑>(제목 없음, 상주)-1930년 채록
아리아리랑 시리시리시리랑
문경아새재는 언(님)고갠가 구부야구부야 눈물일세
문경아새재야 떡물푸리는 말채쇠채로 다나간다
문경아새재야 물박달은 큰애기 손길로 다나간다
-전집, 39쪽.
위처럼 후렴 아리랑을 달고 나오는 사설인데 상주아리랑의 원형태를 지니고 있다.
제목 없이 상주라 표시한 아리랑이 그것이다. 상주시리랑이라고 명명할 만하고 창곡도 충분히 재현할 수 있다. 상주아리랑의 원형에 가까운 것이다.
⓷ 아리랑 타령
도라지 병풍 연다지 안에 잠든 큰 애기 문 열어라
바람 불면 비 올 줄 알고 내 올밤은 왜 모르나
시집가던 심일 만에 본 가장은 귀양 가고
귀양 가던 일주일에 객사했다 통지 왔네
두자 두치 잣 비게는 어느 낭군 비어주며
오동장농 객개수는 어느 자식 물려줄꼬
가자는 서방도 열셋이요 죽자는 서방도 열셋이요
살자는 서방도 열셋이라
일삼은 삼 삼삼은 구하니 서를 아홉 번 호강하니
여중에 일생은 나뿐일세
⓸ 김소희 작창 상주아리랑
(중모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1. 괴나리 봇짐을 짊어지고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2. 아버지 어머니 어서와요 북간도 벌판이 좋답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3.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 백두산 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엇모리)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4. 문전의 옥토는 어찌되고 쪽박의 신세가 웬일인가.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5. 원수로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총 가진 포수가 원수로다.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6. 말 꽤나 허는 놈 재판소 가고 일 꽤나 허는 놈 공동산 간다.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3. 상주의 동요(童謠)
가. 동요의 개념
동요는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다. 어린이들만의 노래인 동요는 두 종류로 나누어
진다. 언제 누가 지었는지도 모르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전승동요(傳承童謠)가 그 하나요, 어린이를 위해 창작한 노래 즉 창작동요(創作童謠)가 그 하나이다.
한국의 동요는 이 땅의 자연환경과 인문환경(풍토, 사회, 습속)을 바탕으로 하여 오랜 옛적부터 형성되어진 것이다. 어린이의 숨결과 꿈이 담겨 있는가 하면 환상과 동경이 담겨 있기도 하다.
동요는 구비문학의 일종이다. 글과 눈으로써 이루어지는 기록문학과는 달리 말과 귀로서 이루어지고 전해져오는 문학이다. 오랜 세월 이 고장에서 저 고장으로 널리 전파된 노래가 동요이다. 노래로 불리거나 중얼거림으로써 많은 어린이가 함께 지은 공동의 작품이다. 그 시대나 환경에 알맞도록 개작되어져 남은 최후의 결과이다.
그러면 위의 분류에 따라 상주지방의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던 동요를 몇 가지만 살펴보자.
① 앞니 빠진 갈가지
앞니 빠진 갈가지
앞도랑에 가지마라
딧니 빠진 갈가지
딧도랑에 가지마라
앞도랑에 가며는
붕어새끼 놀랜다
딧도랑에 가며는
잉어새끼 놀랜다
② 삐졌네 따졌네
삐졌네 따졌네
호박국 끓이라
삽짝에 말 들온다
삐이 호흥
비오다가 빛났네
호박국 끓여 주까
저 놈 자식 저래도
뱃가죽이 얇아서
콩죽 팥죽 못 먹고
보리죽만 먹는다네
울냄아 삘냄아
아가리 딱딱 벌리라
송편하나 넣어 주께
③ 꿩
껄껄 장서방
잔네 집이 어덴고
이 산 저 산 넘어서
콩밭집이 내집일세
양식 걱정은 없는가
먹기는 괜찮네만
총쟁이 때문에 못살겠네
④ 까치야
까치야 까치야
낼 모래 내생일이다
미역국 끓여 주께
내 눈에 까시 파내도가
⑤ 황새야
황새야 황새야
니 집에 불났다
홍두깨로 불꺼라
줄사발로 물여라
⑥ 달팽이
니 이미는 춤추고
니 애비는 장구치고
목아지 쭉쭉 빼어라
황새같이 빼어라.
Ⅶ. 글을 맺으며
상주가 ‘동시의 마을’이란 별칭(別稱)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 이미 오랜 옛날부터 우리고장이 아동문학을 싹을 틔울 수밖에 없는 토양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토양이 있었기에 1950년대 <상주글짓기회>의 활발한 활동으로 어린 문사들이 배출되었고, 다시 1970년대 <상주아동문학회>가 전국적으로 그 이름을 더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토양은 앞서 언급한 읍성국가 시대부터 생성된 수많은 설화와 전설, 민요 등은 물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통해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아동문학적 작품이 창작되어 왔음으로 생성된 결과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동시의 마을’ 상주가 명실 공히 전국에서 ‘아동문학의 고장’이란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몇 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살펴보았다.
이는 과거 상주의 명예를 드러내기 위함도 있지만 앞으로도 이를 계승하고 발전하여 진실로 우리 고장이 ‘동시의 마을’을 이루고자 함이다. 이를 위해서는 아동문학과 관계되는 보다 많은 역사적 자료를 찾아내는 연구가 필요하며, 아울러 우리고장에 뜻있는 아동문학가들이 많이 배출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활발한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고 협력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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