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주거목(雄州巨木)의 근본정신을 찾아서(2)
- 구국정신 -
권세환(문경대학교 초빙교수)
Ⅰ. 상주의 변천
1. 상주 시역 변천사
상주는 표준자오선을 기준으로 대략 북위 36°39'14"에서 36°14'06"의 위도상과 128°20'28"에서 127°47'55"의 경도상에 걸쳐있다.
지형적으로는 소백산맥의 북쪽과 서쪽을 감싸며 이어지는데 산경표에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남쪽과 동족, 낙동정백(洛東正脈)의 서쪽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어서 대체적으로 산세가 서쪽이 높고 동쪽으로 갈수록 점차 낮아진다.
상주 지역이 3C경 사벌국(沙伐國)에 이어 신라에 속한 뒤 신문왕 5년(685) 사벌주 군(郡)・현(縣)의 영역은 7군 25현이었다. 그 당시 상주의 대략의 경계는 낙동강 상류지역인 안동을 비롯해 청송 진보 일부와 영주 일부를 비롯해 예천군 의성, 선산, 김천 일대와 충북의 청원, 보은, 옥천, 영동, 황간 지역이 그 영역권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지방에 12목을 두었으나 성종 때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지방을 10도(道로) 나누고 도 밑에 580개에 달하는 주(州), 부(府), 현(縣)을 두었다. 현종 때 몇 번 변경하여 전국의 행정구역을 1주(州) 10군(郡) 31현(縣)이든 것이 고려대에 37읍(邑)에서 5읍(邑)이 축소되었다.
고려초기의 상주목(尙州牧)은 2부(府)(경산부, 안동부)와 53개 속읍(屬邑)(聞慶郡외 52개)로 편성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지방 관제를 8도 체제로 구성하였다. 도(道) 아래에는 주, 부, 군, 현을 두고 오늘날 면 단위 정도의 행정 구역에는 향, 소, 부곡, 처장을 두었다. 태종 13년에 상주목(尙州牧)의 관할 지역이었던 옥천, 영동, 황간, 청산, 보은 등 5읍을 충청도에 편입하였다.
상주목의 관할 현(縣)은 화령현, 중모현, 산양현, 단밀현, 공성현, 청리현, 화창현, 영순현, 문경의 가은, 예천의 다인, 함창 등이다.
함창(咸昌)은 신라 유리왕 때 6가야(伽倻) 중의 하나인 고녕가야국(高寧伽倻國)이었다. 신라시대에는 고동람군(古冬攬郡)이었다가 경덕왕 때 고녕(古寧)으로 고쳤고, 고려 광종때는 함녕(咸寧)이라 하였고, 현종 9년 개편할 때 군(郡)으로 하여 상주목(尙州牧)에 소속시켜 함창(咸昌)이라고 개칭하였다. 조선 태종 때 진관(鎭管)을 두어 상주목(尙州牧)의 관할에 속하지 않은 별도의 행정을 했다가 고종 때 함창군(咸昌郡)으로 했다가 1914년에 상주군(尙州郡)에 속한 면으로 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12월 9일 총독부령에 의하면 상주지역의 면은 31개면이었고, 1914년 4월 1일시행한 행정구역에는 함창군(咸昌郡)을 상주군(尙州郡)에 편입하여 18개면(상주면 외 17개면) 237동리는 분합(分合)했다.
근대에는 1931년 4월 1일 상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1읍 17면 230동리였다. 1980년 12월 1일 함창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현재는 1읍 17개면 6개동이다.
2. 상주의 유래
경상도의 유래가 경주와 상주의 첫 글자를 따서 경상도라고 하였듯이 신라시대부터 웅주거목(雄州巨木)였던 고장이었다.
삼한시대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말하며 대략 기원 전후부터 300년 무렵까지의 기간이 이에 해당한다. 당시 상주는 진한의 영역인 대구,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낙동강 동쪽의 일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삼한은 각각 소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상주지역의 소국으로 유일하게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이 사벌국(沙伐國)이다. 사벌국(沙伐國)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34 지리지에
상주(尙州)는 첨해왕 때에 사벌국(沙伐國)을 빼앗아 주(州)로 삼은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동 권45, 석우로(昔于老)전에 그 멸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분왕(助賁王) 2년(231) 7월에 이찬으로서 감문국(甘文國)을 토벌하여 군(郡)으로 삼게 하였다. - 중략- 첨해왕 원년(247) 신라의 세력권내에 있던 사량벌국(沙梁伐國)이 배반하여 백제와 결합하려고하자 토벌하여 멸망시켰다.
우로는 조분왕 2년(231) 7월에 감문국을 토벌하고, 또 첨해왕 원년인 247년에는 사량국을 멸하였다. 사벌국은 어느 시점부터 사로의 관할 아래에 들어와 있었는데, 첨해이사금 시대에 갑자기 배반하여 백제에 붙었으므로 석우로가 이를 복속시켰다. 삼국사기 권2의 신라본기에 의하면
유례이사금 9년(292) 6월에 왜의 군사가 사도성(沙道城)을 함락시켰으므로, 일길찬 대곡(大谷)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지키게 하였다. --- 이듬해 2월에는 사도성을 고쳐쌓고 사벌주(沙伐州)의 호민(豪民) 80여 가구를 이주시켰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사량국이 사벌국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금 그 위치는 상주시 사벌면과 그 인근지역이다.
또한 진한시대 상주 일대에는 사벌국 이외에도 소국이 있었어나 그들이 사벌국에 복속되어 있어서 국명이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상주지역에는 가야 제 소국 중의 하나인 고녕가야가 함창지역을 무대로 존재하였다고 믿고 있다. 위치가 함창이라는 학설과 진주라는 학설이 있다.
문헌상으로 고녕가야(古寧伽倻)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34권, 잡지3, 지리1에 상주 관내 고녕군(古寧郡)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고녕군은 본래 고녕가야국(古寧伽耶國)이었는데, 신라가 빼앗아 고동람군(古冬攬郡)으로 삼았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함녕군(咸寧郡)이다. 영현은 셋이었다. 가선현은 본래 가해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가은현(加恩縣)이다. 관산현은 본래 관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문경현(聞慶縣)이다. 호계현은 본래 호측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쓴다.
경덕왕대 고녕군은 본래 고녕가야국이었다고 한다.
상주(尙州)라는 지명의 탄생은 경덕왕 16년(757) 12월에 전국의 주・군・현의 명칭을 한식(漢式)으로 개명하였다.
주지하듯이 상주라는 명칭에는 광역주로서의의 의미와 주치로서의 의미 두 가지를 가지고 있다. 광역주로서의 상주에는 주치 외에, 예천군(오늘날의 예천군), 고창군(오늘날의 안동), 문소군(오늘날의 의성), 숭선군(오늘날의 구미), 개령군(오늘날의 김천), 영동군(오늘날의 충북 영동), 관성군(오늘날의 충북 옥천), 삼년군(오늘날의 충북 보은), 고녕군(오늘날의 상주시 함창읍), 화령군(오늘날의 상주시 화령면) 등이 포함되어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와 고려사 지리지에서 이들 지역에 대한 기사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1) 상주(尙州)는 첨해왕 때에 사벌국(沙伐國)을 빼앗아 주(州)로 삼은 것이었다. (중략) 경덕왕 16년(757)에 이름을 상주(尙州)로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領縣)이 셋이었다. 청효현(靑驍縣)은 본래 음리화현(音里火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청리현(靑理縣)이다. 다인현(多仁縣)은 본래 달이현(達已縣)<혹은 다이(多已)라고도 하였다.>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화창현(化昌縣)은 본래 지내미지현(知乃彌知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2) 고녕군(古寧郡)은 본래 고녕가야국(古寧加耶國)이었는데, 신라가 빼앗아 고동람군(古冬攬郡) <또는 고릉현(古陵縣)이라고도 하였다.>으로 삼았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함녕군(咸寧郡)이다. 영현이 셋이었다. 가선현(嘉善縣)은 본래 가해현(加害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가은현(加恩縣)이다. 관산현(冠山縣)은 본래 관현(冠縣) <또는 관문현(冠文縣)이라고도 하였다.>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문경현(聞慶縣)이다. 호계현(虎溪縣)은 본래 호측현(虎側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3) 화령군(化寧郡)은 본래 답달비군(荅達匕郡) <또는 답달(沓達)이라고도 하였다.>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하나였다. 도안현(道安縣)은 본래 도량현(刀良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중모현(中牟縣)이다. (이상 ?삼국사기? 권34, 지리1)
(4) 공성현(攻城縣)은 신라대병부곡(新羅大幷部曲)이다. 고려초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현종 9年에 상주에 속하였다. (?고려사? 권57, 지리2)
따라서 상주는 이때부터 상주(尙州)라는 지명을 사용하였다.
Ⅱ. 상주정신의 정수 구국운동
1. 삼국통일전쟁의 중심지인 상주
상주의 주치가 일선주에 있던 시기는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기였다. 이 때 상주는 삼국통일전쟁의 전방기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진평왕 46년(624) 10월에 백제가 속함, 앵잠, 기잠, 봉잠, 기현, 혈책 등 여섯 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에 진평왕은 상주(上州), 하주(下州), 귀당(貴幢), 법당(法幢), 서당(誓幢) 등 5군으로 하여금 구원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속함은 함양이고, 기현은 남원시 운봉으로 추정된다. 이 때 동원된 군대에서 상주의 군대는 상주정(上州停)이었다고 본다.
선덕왕 14년(645) 정월에 백제의 대군이 매리포성(오늘의 밀양 삼량진으로 추측)을 공격한다는 급보를 받고, 선덕여왕이 다시 김유신을 상주장군(上州將軍)으로 임명하여 막게 하였다. 상주장군이란 상주정장군(上州停將軍)을 말한다.
상주정은 6정 군단의 하나로 장군-대관대감-대대감-제감-감사지-소감-화척 등의 군관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최고 지휘관인 장군은 진골상당(眞骨上堂)에서 상신(上臣)까지의 인물을 임명하였다.
신라 태종무열왕 7년(660) 6월 신라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를 도와 백제를 치고는 남천정(南川停)에 머물렀다. 왕은 소정방 등이 군사를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는데 병선(兵船)이 천리를 잇달아서 덕물도(德物島)에 진을 쳤다는 것을 듣고는 태자 법민(法敏)과 대장군 김유신과 장군 진주(眞珠)·천존(天存) 등을 보내어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소정방과 회합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법민에게 이르기를
나는 바다를 경유하고 태자는 육로로 좇아7월 10일에 대왕의 군사와 더불어 모이기로 기약하여 곧 의자왕(義慈王)의 도성(都城)을 치게 되면, 뜻한 바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니, 법민이 말하기를
과군(寡君)께서 대군(大軍)을 기대하고 있은 지 오래이니, 명하신 것을 들으시면 반드시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수라를 드시고 이르를 것입니다.
하자, 소정방이 기뻐하여 법민을 보내어 돌아가게 하였다. 법민이 와서 소정방의 군사 기세가 몹시 강성함을 말하니, 왕이 기뻐하여 또 법민과 김유신, 품일(品日), 흠춘(欽春) 등을 보내어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리고 대응하게 하고는, 금돌성(今突城)으로 나아가 머물렀다.금돌성은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백화산에 있는 석성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금돌성은 당시 전세를 보고 받고 왕명을 내리던 총사령부로서 이른바 전위기지였다 하겠다.
태종무열왕 7년(660) 7월 18일 의자왕이 항복하였다. 태종무열왕은 의자왕의 항복 소식을 듣고 29일에 금돌성으로부터 소부리성(所夫里城-부여)에 이르러 제감, 첨복을 당나라에 보내어 이를 알리게 하였다. 금돌성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음을 와이 처음 보고 받은 곳이라는 점에서 신라 삼국통일 전초시지로서의 역사적 의의가 크다.
따라서 삼국시대 말 북방에 위치한 상주는 백제 정벌과 그 후 백제부흥 운동의 진압,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정벌할 때도 전진기지로서 중요시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상주는 삼국통일전쟁의 전진기지로서 큰 역할을 수행한 고장이었다. 상주장군 혹은 상주총관이 출전한 사례가 여럿 있었으며, 주치인 상주의 백성들이 군수물자를 운반한다든가 병마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는 삼국통일전쟁에서 상주의 주치인 일선주가 중요한 거점으로 기능하였음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이러한 상주인의 활동이 신라통일이라는 대업에 큰 기여를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라고 하겠다.
2. 고려시대 항전지역인 상주
가. 몽골침입과 상주지역의 항쟁
몽고의 고려 침입은 1231년(고종 18)에 시작되어 동 46년까지 6차례에 걸쳐 되풀이 되었다. 고려의 이에 대한 항쟁은 1273년(원종 14)까지였으므로 그 전체기간은 40여 년에 이른다. 이것은 우리 역사상 가장 장기적이고 치열했던 항전의 사례이기도 하지만, 노비 혹은 지방의 농민들이 이에 광범하게 참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주목된다.
1231년 몽고군의 침입시 몽고군은 1232년부터 1247년 사이 3차례에 걸쳐 상주를 침입하였으며, 이 때 그 피해가 매우 컷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책의 시문집인 호산록(湖山錄)에 산양의 노거사 신민서(申敏恕)가 천책에게
상주는 옛날 사벌국인데 비록 속군이 많이 있었으나 오로지 이 고을만이 맑고 수려한 골짜기와 산이 있습니다. 두 번이나 병화에 거듭 짓밟혀 남은 것이 없을 정도로 쓸쓸하게 되었다.
고 하여 그 당시 상주의 참상을 말하고 있다.
나. 여몽전쟁과 상주전투(제6차 여몽전쟁)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홍지가 금돌성에서 일제히 성문을 열고 나와 앞과 뒤에서 협공 당한 몽골군은 우왕좌왕하다가 제4의 관인이 화살에 맞아 죽고 군사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백화산 기슭 이 골짜기는 몽골군이 많이 죽었다고 해서 그 후 저승골로 불러 왔다.
구중서의 소설 ‘항몽전쟁 그 상세한 기록, 2. 참혹한 산하’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태풍으로 인하여 충주에서 퇴각한 자랄타이(車羅大)의 몽골군은 충주읍성을 버리고 새재를 넘어서 문경, 점촌을 거쳐 다음 달인 고종 41년(1254년) 10월 상주로 갔다. 몽골군이 침입하자 상주 사람들은 두 개의 성으로 나누어 입보했다.
일반 백성들은 일치감치 떠나 상주 서쪽 70리에 있는 백화산성(일명 상주산성)으로 들어갔지만 관리와 양반들은 막판에 상주 서쪽 십 여리에 있는 병풍산성으로 피난했다.
백화산성에서는 몽골군이 충주를 지나 남진하고 있다는 급보를 듣고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산성은 높고 험할 뿐만 아니라 이중의 성곽으로 되어 있었다. 성채의 길이는 총 20 킬로나 되고 성 안에는 계곡이 흐르고 우물이 다섯이나 있어서 식수도 충분했다. 창고 시설도 있어서 상주산성은 방어에 아주 유리했다.
그때 상주에서 멀지 않은 은척 황령사의 승려 홍지(洪之)가 승군을 이끌고 백화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는 산성에 입보해 있는 상주 사람들을 규합하여 자체 방어를 지휘하고 있었다.
홍지는 요로에 복병을 배치했다.
이 복병들의 임무는 몽골군의 산성 접근을 중도에서 저지하고 유사시에는 배후에서 몽골군을 쳐서 협공하는 일이였다. 몽골군은 자랄타이의 지휘 하에 10월 19일 상주 지역에 들어와 둔영을 치고는 사람을 상주산성에 보내어 투항을 권유했다.
그러나 상주산성은 이를 거부하고 몽골군이 공격해오기를 기다리면서 수성작전(守城作戰)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때 고려는 박인기를 보내 강화교섭을 시도하다 유산되자 다시 화친파의 중심인물 최린(崔璘-문화평장사)를 강화교섭 사절로 다시 자랄타이에게 보낸다. 최린은 충주를 거쳐 자랄타이의 행방을 찾아 나섰다 만나 곳이 바로 상주였다. 최린이 접근했을 때 자랄타이는 몽골군의 백화산성 포위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최린이 자랄타이에게 안내됐다.
‘장군, 수고가 많소이다.’
‘이렇게 한창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 또 강화교섭을 하자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박인기가 일을 끝내지 못해서 내가 이렇게 왔소이다.’
‘참 고려는 끈질긴 사람들이오.’
‘이렇게 고생하지 말고 빨리 회군하시오. 장군
마침 그때였다.
어디선가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서쪽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보일 리가 없었다.
홍지가 배치해놓은 복병들이 숲 속에 몸을 감추고 활을 쏘아대기 때문이었다.
몽골군은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러나 지리에 미숙한 그들은 험한 산속에서 어디로 갈 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홍지가 백화산성에서 이것을 보고 있다가 군사를 거느리고 일제히 성문을 열고 나와 몽골군을 쳤다. 앞과 뒤에서 협공 당한 몽골 군사들은 우왕좌왕하다가 많는 피해를 당했다. 제4의 관인이 화살에 맞아죽고 군사의 절반가량이 이 유격전으로 목숨을 잃었다.
지금의 백화산(白華山) 기슭에 있는 이 골짜기는 몽골군이 많이 죽었다 해서 그 후 ‘저승골’로 불려왔다.
불의에 기습당한 몽골군은 어쩔 줄을 모르고 방황하고 있었다.
당황하고 있는 자랄타이가 최린을 바라보자 최린은 사실대로 알려주었다.
‘이 쪽이 북쪽이고 저쪽은 남쪽이오.’
‘당신 말을 믿어도 되겠소?’
최린이 너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믿으시오. 나는 고려국 대신이오. 더구나 임금이 국왕의 사절로 적장에게 보낸 특사가 아니오?’
자랄타이는 그때서야 방향감각을 찾은 듯이 패잔군을 수습하기 시작하여 했다.
저승골에서의 전투는 저승골에서 저승폭포로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이 몽골군을 유인한 방향이며 간신히 도망친 몽골군이 내를 건너자 건너편 전투갱변에서 매복하여 대첩을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공주사대 교수 윤용혁은 고려대몽항쟁사 연구에서 상주산성 승첩의 의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혔다.
[상주산성의 승리]
1254년(고종41) 고려에 대한 침공을 감행한 차라다이(차라대, 車羅大, Charadai)는 9월 충주에 당도해 산성을 공격했으나 충주인의 맹렬한 반격으로 이를 포기하고 남하를 계속했다. 이후 여몽간의 대대적 공방전은 상주(尙州)에서 벌어진다.
고종41년 10월 19일 차라다이가 상주산성(尙州山城)을 치거늘 황령사(黃嶺寺)의 승(僧) 홍지(洪之)가 제4관인(第四官人)을 사살하였다. 사졸의 죽은 자도 과반수나 되매 드디어 포위를 풀고 퇴거하였다.
차라다이의 충주산성 공격 및 남하에 대한 기록이 9월 14일자였던 데 비추어 10월 19일자의 상주산성 전투 기록은 여몽간의 공방전이 대략 20여 일 이상의 장기전이었음을 말해준다. 전투상황에 대한 다른 자료를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중에서 위의 기록은 당시 전투가 매우 치열했고, 또 고려의 승리로 종결되었다는 사실만을 전하고 있다. 승려 홍지가 속해 있었던 황령사가 자리 잡은 상주시의 북쪽 은척면 황령리는 경상도의 초입부에 해당한다. 몽골군이 충주로부터 대원령을 넘어 남하하자 인근 지역민들은 보다 남쪽의 험한곳에 위치한 상주산성에 입보(入保)해 적을 맞아 싸웠다. 당시 황령사 승려 홍지는 휘하의 승도들을 중심으로 입보(入保)한 상주민을 규합, 자체적인 방어체계를 갖추어 차라다이의 공격에 대항했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차라다이의 지휘에도 불구하고 제4관인(官人)이라는 몽골군의 고급지휘관이 사살됐다. 그리고 몽골군 사졸 가운데 죽은 자가 과반이라 했다. 전투는 고려의 승첩으로 종결지어졌던 것이다.
[승려 홍지와 백화산성의 상주사람들]
당시 상주의 관리들은 관아(官衙)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병풍산성에 입보(入保)하고 승 홍지를 비롯한 인근 주민 다수는 백화산성(白華山城)에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백화산성은 비교적 물이 풍부하고 지리적 측면에서 방어요건이 보다 우월하다. 이를 바탕으로, 입보(入保)한 주인(州人)들이 황령사 승 홍지의 지휘 하에 몽골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던 것이라 여겨진다. 이는 1232년(고종19) 제2차 여몽전쟁 당시 처인성에서 백현원의 승려 김윤후가 입보(入保)민들을 지휘해 몽골 원수 사르타크(살례탑, 撒禮塔, Sartag)를 사살했던 사건과 상통한다. 백화산성이 대몽항전 당시 상주민들의 입보(入保)처로 사용되었던 대표적 성곽이었던 사실은 다음의 자료가 입증한다.
고려 때에 상주의 주리(州吏) 김조(金祚)에게 만궁(萬宮)이라는 일곱 살 난 딸이 있었는데 부모가 단병(丹兵)을 피하여 백화성으로 가다가는 군사가 가까워지자 창황하여 길가에 버리고 도망하였다가 사흘 뒤에 수풀 밑에서 찾았다. … 15세가 된 뒤에 호장(戶長) 김밀(金謐)에게 출가하여 녹(祿)을 낳았고 녹이 세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이 득배(得培)이다. (<세종실록지리지> 상주목 인물편)
공민왕조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상주 사람 김득배의 선계(先系)와 관련한 위의 기록은 상주민들이 난을 피하여 백화산성에 입보(入保)했던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건의 배경이 되고 있는 단병(丹兵)의 침입이라는 것은 대몽항전기(對蒙抗戰期), 몽골군을 지칭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당시 상주산성 승첩의 의의]
당시1254년(고종41) 차라다이 몽골군에 대한 상주산성에서의 전투는 경상도민의 유일한 항전기록이다. 당시 항전에 보다 상세한 내용이 전하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기록의 소략성과 연관된다. 상주산성의 승첩은 몽골군의 고급지휘관을 포함한 다수의 몽골군을 궤멸시킨 큰 전투였다.
상주산성에서의 항전은 중앙정부와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은 채 순수한 지역민들의 자위적 항전이었다는 점이 그 중요한 특징이다. 이들은 백화산의 지형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몽골군을 궤멸시키기까지에 이르렀지만 상주승첩이 지역민들의 순수한 항전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자연히 그 사실적 내용이 간과되고 묻혀버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1254년의 상주승첩은 ‘고려의 대몽항전사’에서 1232년의 처인성 승첩과 여러 가지 점에서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지역민들의 순수한 자위적 항전이었다는 점, 지휘자가 관리가 아닌 현지의 승려였다는 점, 전투의 결과가 매우 큰 승리로 귀착되었다는 점 등이 그렇다. 이러한 점에서 상주산성의 승첩은 처인성 승첩과 함께 대몽항전사의 중요한 전투사례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백화산 최고봉인 한성봉은 몽골군 총사령관 차라대(車羅大)가 물러가면서 한(恨)을 남긴 성과 봉우리에서 유래 되었고 방성재는 몽골군이 방성통곡하면서 물러갔다 하여 구전된 지명이다. 이와 같은 정부 군사의 지원 없이 관민과 승려가 함을 합하여 유래 없는 대승(大勝)을 거두었다. 여기서 상주성은 모동면 백화산(白華山)의 금돌성(今突城)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 홍건적의 침입과 상주인의 정신적 지주 김득배
14세기 중엽 이후부터 격화되는 원 황실 내부의 정권싸움은 그 국력을 크게 소모시켰다. 게다가 북중국 일대에는 큰 흉년이 거듭되고 있었다. 말세(末世)의 징조가 나타난 것이다. 이에 따라 한족(漢族)의 항거가 치열해졌다. 특히 말세에 나타나 중생을 건진다는 미륵불의 강림(降臨)을 믿는 홍건적(紅巾賊)은 크게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홍건적은 1359년(공민왕 8)과 1361년(공민왕 10) 두 차례에 걸쳐 압록강을 넘어와서 노략질을 하였다. 특히 1361년에는 그 피해가 막대하였다. 10만 명에 달하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은 복주(福州-안동)까지 피난하였으며, 수도 개경은 함락 당하였다. 그러나 유능한 무장들의 활약으로 홍건적을 반격하여 물리칠 수는 있었다.
홍건적의 침입시에 공민왕이 상주를 거쳐 안동으로 몽진하였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상주에서 반년이나 머물렀다. 정세운(鄭世雲)은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 이방실(李芳實)과 함께 홍건적을 무찌르고 개경을 수복하고 잔적을 몰아내어 난을 평정하였다. 그러나 간신 김용(金鏞)의 간계에 의하여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가 죽임을 당하여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한 장수를 모두 잃는 비극이 있었다. 특히 김득배는 상주 출신으로 상주에서 죽음을 당하여 애석함이 컸다.
김덕배의 참극은 춘추(春秋)정신의 살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참변을 선생의 문생(門生)인 정몽주(鄭夢周)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어 권간(權奸)들이 험악한 분위기를 무릅쓰고 스승의 시신을 거두어 예장(禮葬)하며 피 눈물로 단장(斷腸)의 제문(祭文)을 지어, 정의가 어디에 있는지 하늘에 묻고, 스승의 순도(殉道)적 죽음을 자신의 사표(師表)로 삼을 것임을 천명하고 나섰다. 그 정신이 더욱 새로워져 김득배-정몽주-길재-사육신-생육신으로 이어지는 정충대절정신(精忠大節精神)을 조선 500년에 까지 세세에 이어졌다.
김덕배는 명리(名利)와 안일이 열려있었음에도 결코 그것을 취하거나 탐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겨누고 있는 시기와 모함의 칼끝도 마다하고 오로지 앞만 보고 구국의 길을 내달렸던 선비였다.
그의 고결한 정신은 학문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상주 벌에 대의문풍(大義文風)을 진작시켜 절의(節義)의 고장으로 거듭나게 했음은 물론, 상주인 들이 대거 중앙관계로 진출할 수 있는 효시(嚆矢)를 열었다. 김덕배의 큰 발자국이 숫한 문사들을 배태케 함이었으니 나라의 유종(儒宗)이라 아니할 수 없고, 그것이 바로 상주인의 얼이요, 정신적 지주였다.
라. 왜구의 침입과 상주 전쟁
공민왕대부터 왜구의 노략질도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왜구들은 해안은 물론 내륙지방에까지 들어와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다. 심지어는 개경 근방에까지 출몰하여 수도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기도 하였다. 고려는 전시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무장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무장들은 전공에 의해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상주는 고려말에 왜구의 피해도 입었다. 1380년(우왕 6)에 중모(中牟), 공성(功城), 청리(淸里) 등의 현에 나타나 집을 불태우고 소란을 피웠다. 또한 상주읍성에 침입하여 관사와 민가에 불을 질렀다. 경상도 제일이라는 풍영루(風詠樓)도 이때 불탔다고 한다.
1380년(우왕 6)에
왜구가 황간(黃澗), 어모(禦侮), 중모(中牟), 화령(化寧), 공성(功城), 청리(靑利) 등 현에 방화하였는데 상주(尙州), 선주(善州) 등 두 고을에 까지 미쳤다.
라는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상주일대가 왜구의 침범으로 관아와 민간의 피해가 컸다. 이때의 왜구는 상주에 무려 7일간 머물렀다는 사실도 전해지므로 피해는 심대하였다고 추측된다.
그런데 이러한 피해 상황에 대해 권근(權近)은 풍영루기(風詠樓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경오년(庚午年)에 왜구가 침범하여 관옥(官屋)과 민려(民廬)가 병화에 모두 피해를 입었다. 다음해 신유년(辛酉年)에 반자(半刺) 전리(田理)가 비로소 주성(州城)을 쌓고 남은 백성을 초집(招輯)하였다.
위에서 권근이 말한 경오년 병화는 바로 ‘고려사’의 기록과 일치한다.
3. 조선시대 양란과 상주지방의 구국활동
가. 임진왜란과 상주북천전투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은 우리나라 역사상 일찍이 찾아 볼 수 없는 크나큰 전란이었다.
일본의 도요토미는 1592년(선조 25) 임진년 4월 14일 왜군 15만 8천 7백명으로 부산을 공격하아여 동래를 함락시킨 후 동로, 중로, 서로 들 세 갈래로 나뉘어 북상하게 되었다. 중순경에, 이에 부산 첨사 정발(鄭撥)과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치열하게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참패하였다.
중로를 맡은 제1군의 지휘 사령관은 강력한 소서행장(小西行長) 즉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을 함락한 이후 상주(尙州)까지 오면서 남부 지방의 수많은 고을을 거쳤지만,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그대로 밀고 올라왔다. 그러나 이곳 상주에서는 북천(北川)을 무대로 왜군에 맞서 강력한 항전을 전개했다. 이 때 상주지역의 방어 대책은 다음과 같다.
왜적의 대부대가 선산으로부터 들어와 상주로 진격하였다. --- 이 날 새벽 안개가 자욱한데 포성이 들려오자, 왜적의 선봉은 이미 죽현에 이르렀음을 알아 차렸다. 그리하여 순변사 이일은 북천에 진을 쳤다.
왜군이 부산 동래를 함락시킨 것이 임진년 4월 14일인데 그로부터 불과 열흘정도 지나서 상주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상주전(尙州戰)이 갖는 역사적인 의의는 매우 크다. 왜군의 주력부대가 상주를 향하여 올라오고 있다는 급박한 정보가 중앙에 전달되자 조선정부는 논의를 거쳐 전란 발생 후 최초로 이름 난 중앙의 장수를 상주로 내려 보내 저항하게 했음을 다음 사료에서 파악할 수 있다.
왜적이 상주에 침입했는데… (순변사) 이일(李鎰)이 비로소 조령을 넘어 문경을 지나 상주에 이르니, 목사 김해(金澥)는 순변사 행차를 맞이한다는 핑계로 나가 산골에 숨었다. 이일이 판관 권길(權吉)을 불러 군대를 모집하게 하니, 밤새도록 촌락을 다니면서 수백 명을 모았다. 또 이일이 창고 곡식을 풀어 흩어진 백성들을 모집하여 부대를 편성하니 군사의 수가 6천여 명이었다.
물론 이 군사에는 순변사 이일이 거느리고 온 중앙의 정예병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때 이일은 경중(京中)에 있는 정병(精兵) 3백 명을 영솔하고자 했으나 이것도 여의치 못하여, 3일이 지난 뒤에야 병사 약간만 데리고 먼저 떠났으며, 나머지는 별장(別將) 유옥(兪沃)이 이끌고 뒤따라가는 형편이었으므로 위의 군사들 대부분은 상주 주민들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이렇게 구성된 상주 저항군은 관군(官軍) 지휘자인 순변사 이일의 영솔아래 상주 북천(北川)가에 모였다. 그리고 군사들에게 진(陳)치는 법과 전투 방법 등을 가르쳤다. 이때 판관 권길과 의병장 김준신(金俊臣) 등은 고니시군의 용맹함을 알고, 북천보다는 읍성(邑城)에 들어가 방어전을 하자고 주장했으나, 순변사는 듣지 않고 북천에서 싸울 것을 지시하였다.
이때 왜군은 상주 저항군을 둘러싸면서 조총을 쏘아대니 활과 창 등을 갖고 상대하기란 사실상 어려웠다. 그리하여 저항군을 이끌던 토착 호장 박걸(朴傑)과 종사관 등 지휘층과 저항군 대부분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렇게 저항한 싸움이 상주북천전투였다. 이에 관한 관변측의 자료를 보면 우리측 저항군의 수가 수백 명, 또는 수천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전개된 북천 전투는 상주지방의 관군민들의 공동 저항에도 불구하고, 병력의 열세와 무기의 부족, 전략의 미숙 등으로 왜군에게 처절하게 패배하였다.
상주 북천전투는 비록 우리 측이 패배한 전투였지만, 당시 강성한 왜군 16만여 명 중에서도 가장 용맹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정예부대에 분연히 항거하여 대결한 전투였다. 군대의 수나 무기의 질에 있어서도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으나 이곳 상주 주민들은 이와 맞서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것이다. 따라서 임진왜란 역사에 있어서 상주북천전투의 위상을 새롭게 평가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1592년 4월 중순 조선에 상륙한 왜군이 부산의 동래성을 공격할 때 동래부사 송상현이 이끄는 군대의 저항 말고는 중로군(中路軍) 고니시 유키나가 왜장이 부산서 상주까지 오면서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무인지경으로 올라 온 셈이었다. 그러므로 상주의 북천 전투는 더욱 빛나고 값진 저항이요 투쟁이었다.
임진왜란 때 상주전투에 있어서 관민합동으로 수행한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린 중심인물은 충의공 정기룡(鄭起龍) 장군이다. 그는 상주 판관으로 있다가 목사로 승진된 사람으로 선조실록 권54, 선조 27년 8월 병인조 기사에 의하면
상주 주민들의 인심을 얻었고 싸움도 잘한다.
고 기록되어 있어 문무를 겸한 유능한 인물로 보인다. 그리하여 임진년 상주 용화동 전투에서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그해 11월 말에는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고을의 치소가 있는 상주 읍성을 탈환하면서 왜군을 몰아냈다. 그 밖에도 당교와 화령・낙동 등 여러 곳에서 왜군과 싸워 크게 이김으로써 임란 상주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간 주역이었다.
나. 상주 함창당교(唐橋)전투
당교는 현재 상주시 함창읍 윤직리 근처에 있는 다리일대를 지칭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타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당교는 이 고을 북쪽에 6리에 있다. 신라고기에 의하면 당나라소정방 장군이 이미 백제와 고구려를 토벌한 다음 또 다시 신라를 정벌하고자, 이 다리 근처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자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이 음모를 알아차리고 당군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술에 취하게 한 뒤, 그들을 모두 이 다리 부근에 구덩이를 파고 뭍어 버렸다. 그리하여 후인들이 이로 인하여 당교라고 불렀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당교는 옛날부터 군사적인 요충지로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고 본다. 당교가 처한 지리적 위치는 전통사회에 있어서 중요한 육로인 영남대로가 지나며, 경상좌도로 갈 수 있는 분기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북으로는 문경, 충주르 거쳐 수도로 갈 수 있으며, 남쪽으로는 상주, 선산, 대구, 부산 등으로 갈 수 있는 곳이다. 또한 동북방향으로는 예천, 영주, 안동 방면의 경상좌도로 가는데 편리한 육상교통상의 요지이기도 하다.
더구나 낙동강 본류와 지류 등이 가까이 흐르고 있어 수운에도 편리할 뿐만 아니라, 인근에 넓은 함창 평야가 있어 군량조달에도 편리한 편이다.
조령은 지난 날 영남에서 도성으로 갈 때 주요한 교통로였을 뿐만 아니라, 동서 양편이 바위 절벽으로 되어 있어서 천연적인 요새지였다.
우리 군사들이 조령을 반드시 지킨 다음에야 충주를 보존할 수 있다. --- 조령을 방어하지 못하면 도성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당교는 이와같이 군사적 및 교통상의 비중이 큰 조령과 비교적 가까운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 존재 가치를 더욱 높일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사실 이외에도 당교의 군사적 측면에서 중요성을 파악할 수 있다.
경상도 좌 순찰사 한효순이 다음과 같이 장계하였다. ‘도내에 주둔한 왜적은 인동・대구・청두・밀양・기장・동래 및 함창으로부터 당교(唐橋) 등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계속 머물고 있습니다. 특히 당교의 왜적은 좌우도의 인후(咽喉)가 되는 곳에 머물고 있어서 그 세력이 매우 성하니 비록 일도(一道)의 힘을 다해서라도 반드시 이곳의 왜적을 먼저 치기로 목표를 삼겠습니다.
왜적들이 무수하게 당교(唐橋)에 도착한 다음, 진을 친 후 목책을 쌓았다고 하였다.
함창에는 지금 왜적의 기세가 극성하여 새로 부임한 방백 한효순은 지금 안동에 머물면서 영해・진보・청하・영덕・장기・영일・청송 등 여러 고을의 병사들을 뽑아 용궁현 경계에 나아가 수비중이라고 한다.
위에서 함창이라고 하는 것은 당교(唐橋)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함창의 왜적이란 대부분이 당교 왜적을 일컫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당교전투의 상황을 관찬사료(官撰史料)와 당시 의병에 참가한 지휘자들의 일기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경상도 함창 당교(唐橋)의 왜적들이 모여서 큰 군진을 이루어 용궁(龍宮) 등지를 횡횡하면서 앞으로 두 번 내지(內地)를 범하고자 하였다. 이에 경상도 좌방백 한효순이 안동에 머물면서 장기 현감 이수일을 대장으로 삼아서 각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용궁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안동부사 오복룡을 도 지휘 대장으로 임명하여 예천 땅에 설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영천 지방과 춘양 지방 의병들도 합세하여 공격하였으나 결국 크게 패하고 돌아왔다.
대장을 모시고 황령사(黃領寺)에 도착하였다. --- 들리는 소문에 남하하는 왜적이 당교(唐橋)의 길가에 진을 치고 있다고 한다. 대장이 야간에 공격하자고 하여 군사를 이끌고 갔어나, 밤이 너무 깊어 작전상 불리하여 되돌아 왔다.
지난달 27일 대장이 이축(李軸) 선봉장에게 명령하여 정병 50명을 이끌고 가서 당교 왜적을 야습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왜적 15명을 사살하고 우마(牛馬) 17태(駄)를 빼앗아 돌아 왔다고 한다.
당교 주둔 왜적들이 밤의 어두움을 틈타 예천의 유천과 용궁의 천덕원을 포위하고, 40여리를 오가면서 분탕질을 하였다. 그들의 기세는 더욱 깊숙하게 쳐들어 올 것이며, 경상좌도 일대는 지탱하기 어려울듯하니 참으로 민망스럽다. 이날 피살된 자는 승병(僧兵)들이 대부분이고 나머지는 피란 온 사람들로서 일백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당교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들이 오래지 않아 바로 영순 지방을 공격할 것 같다. 그런 까닭에 이들을 먼저 습격하여 영강의 상류 지역에서 크게 격파한 뒤, 그들로부터 환도와 철환 그리고 기계 등을 빼앗아 돌아왔다. 이런 전과를 주쉬(主倅)에게 보고하는 한편 관아로부터 군량미 50석을 받았다.
경산에서 전사한 참의 장몽기는 왜병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당교 전투에서 순절한 사람이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당교는 위치상으로 매우 중요한 전략요충지였다. 이러한 전략적 요충지인 당교를 차지하려는 노력은 전쟁의 기본 요체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근거로 당교전투를 요약 정리하면
첫째, 임진왜란 당시 상주 고을이 당시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큰 지방 행정구역인 동시에 군사, 교통, 경제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둘째, 함창 당교는 일찍부터 군사, 교통, 경제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특성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란이나 기타 국가적으로 큰 분쟁이 영남지방에서 발생할 경우 대체로 피아간 이곳을 선점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임진왜란 시 당교왜적들의 분탕을 막기 위한 전투에서 함창 창의군 선봉장이었던 이축(李軸)의 활약이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
다. 임진왜란과 상주의병 활동
상주에 잔류한 왜군들은 주로 읍성(邑城)과 당교를 근거지로 하여 약탈과 학살을 자행함으로써 주민들의 분노를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다수의 사람들이 의병활동에 동참하여 저항했는데, 의병 지도자는 그 성향에 따라 크게 둘로 구분하여 볼 수 있겠다. 하나는 전직 관료(官僚)출신들이 주축이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 민중(民衆)편에 가까운 인사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한다.
전자에 해당되는 의병지도자로는 권종경(權從卿), 정경세(鄭經世), 이홍도, 채유희, 조정, 전식, 이준, 송량, 김홍민, 이천두, 김각 등 다수가 있었다. 우복 정경세는 권종경 등과 같이 임진년 7월 30일 은척면 황령(黃嶺)에 모여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공격하자고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상장(上將)에는 이봉(李逢), 중위장은 함창 출신의 이천두(李天斗)로 삼았다. 여기에 가담한 사족(士族)은 40여 명, 활을 쏘는 궁수는 50여 명이고 일반 병사 등 상당한 의병집단이 되었다.
이들 의병들은 같이 모여 북향재배하면서 임금께 충성을 다짐한 뒤, 삼장법(三章法)이라는 군법도 만들어 군기를 확립하였으며, 이 의병활동에 가담한 사족들이 상당한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상주에 사는 김각(金覺)은 임란초에 기병하여 군공(軍功)으로 6품에 오른 사람이니… 신(臣)들의 생각으로는 용궁 현감 이지(李祉)를 체차하고 김각으로 대신하여 전담시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따랐다.
상주 지방 사족(士族)출신 의병지도자 가운데 우복 정경세가 중심 활동을 하였다. 그는 안령(鞍嶺)전투에서 그의 모친과 동생 흥세(興世)가 왜군에 피살되고 자신도 그들의 독촉(毒鏃)에 어깨가 관통되어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에 왜군에 대하여 보다 적개심을 갖고 복수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는 왜군에게 보복하기 위하여 의병부대 규모를 보다 확대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친구인 이준 형제와 같이 김각을 대장으로 삼아 의병 조직을 늘려 나갔으니, 이것이 상의군(尙義軍)이다.
이들 의병들은 왜군에 비하여 병력이나 무기면에 있어서는 열세이지만 지형지물에 익숙함을 장점으로 기습공격을 가해 일정한 성과를 올리고 있음을 다음 사료는 확인시켜주고 있다.
의병들이 백야원 앞에 복병(伏兵)하고 있다가 왜군과 전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가운데 9급(級)을 목베고, 화살로 사살한 것이 7~8명이다. 또 환도 9자루와 철환통 5개도 빼앗았다. 우리 측도 3명이 그들 총에 맞아 애통tm럽게도 죽었다.
이는 상주 지방 의병들이 왜군들의 허점을 노려 복병을 하거나, 야간 기습 등 게릴라전으로 왜군들에게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정경세는 사족 층을 중심으로 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한 결과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의병활동에 공이 있는 사족들을 추천하여 상을 받도록 노력하였음을 다음 기록은 밝혀주고 있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출신(出身) 송건섭(宋健燮)은 상주・함창 등지에서 유생(儒生)들을 모집하여 향교를 점령한 왜군들과 힘껏 싸우다 죽었으니 그를 위로하여 포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마땅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상주와 함창 일대에서 일반 주민 즉 민중편에 가까운 의병장으로는 함창(咸昌) 출신의 가악재 이축(李軸)이 있다.
가악재 실기에 의하면
7살 때부터 동네 아이들과 장난칠 때는, 거리에서 진을 치고 나무를 세워 깃발을 꽂았다. 그 다음 대열을 나누어 군사 대오를 만들고 그 안에서 호령을 하되 명령을 어기는 자는 매질을 하여 모두가 두려워 복종하였다. 그러므로 나이가 많은 아이들도 감히 명령을 어기지 않고 따랐던 것이다.
라고 서술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이 이러나자 외동아들의 처지에서 고민하다가 가족들의 동의를 얻어 충과 효를 같이 하기로 결심하고 규모가 큰 의병 집단에 가담하였다. 또한 가악재실기에서 의병부대 결성과정을
임진년 7월 상주에 살던 뜻있는 분들과 같이 황령사(黃嶺寺)에서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이때 그는 선봉장(先鋒將)이 되어 의병대장 이봉과 같이 이 절에 설치한 전패(殿牌) 앞에서 충성을 다짐하면서 거의(擧義) 사실을 아뢰고 군약(軍約)을 세웠다.
고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선봉장으로서 부하 병사들을 데리고 왜군을 격퇴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사례를 살펴보면
(1) (임진년) 11월에 정병(精兵)을 데리고 밤에 당교(唐橋)를 습격하여 수많은 왜적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2) 채유희 형제와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 상주에 머무르고 있는 왜적의 형세를 본 뒤 밤을 이용해서 습격하였다. 처음에는 왜적이 상주 만갈산 아래 진을 치고 있다가 그 중의 일부가 황령사로 향하여 진격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황령 아래에 복병(伏兵)하고 있다가 사살하였다.
고 기술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함창 이안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그 부근의 황령과 당교에 있는 왜군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주민들의 고통을 줄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사실 왜란 직전 집권층의 분열과 백성에게 베푼 시정 양상은 때로는 실망을 안겨 주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백성들은 왜적의 잔혹한 야만행위를 목격한 뒤로는 민족적인 의분이 탱천하여 왜군 타도에 나섰다.
이러한 전란 속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상주의 인사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왜병들과 투쟁하였으며, 의병들은 주로 자신의 향촌에서 싸웠으므로 지형지물을 잘 아는 이점이 있어서, 이를 토대로 매복하거나 기습하는 등의 방법을 통하여 적에게 상당한 타격을 안겨 주어 민족의 역사를 빛나게 할 수 있었다.
4. 독립운동과 상주
가. 상주의 3・1 운동
1) 상주장터 만세운동
상주의 3・1 운동은 3월 23일 상주장터 만세운동에서부터 4월 9일 화북면 운흥리 만세운동에 이르기까지 전후 4회에 걸쳐 일어났다.
상주장터 만세운동은 상주공립보통학교 졸업생 강용석(姜龍錫)과 성필환(成必煥),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 학생 한암회(韓岩回), 상주공립보통학교 학생 조월연(趙月衍)과 경성 국어보급학관(國語普及學館)학생 석성기(石盛基) 등 이 지역 학생들을 중심으로 계획되었다. 즉 이들은 상주에서도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3월 중순부터 서로 의논하고 여러 가지 준비를 하였다.
3월 23일 오후 5시 30분경 상주시장에 나타난 이들 중 한암회가 먼저 독립만세를 외치자 수많은 장꾼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그러나 순찰중이던 헌병경찰에 의해 한암회가 체포되자 만세시위는 일시 중단되었다. 30분쯤이 지난 6시경에 상주군 내서면에서 온 성해식(成海植)이 상복(喪服)을 입은 채로 누문계단(樓門階段)에 올라가 외쳤다.
나는 미천한 사람이지만 이번에 조선의 독립을 위해 여러분과 함께 독립 만세를 부르고자 합니다. 여러분 독립만세를 부릅시다.
하고 만세를 외쳤다. 모였던 군중들이 우렁차게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성해식도 역시 순찰 중이던 헌병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 청년이 성성인(成星仁, 海植)인데 그는 부친의 상중에 있었는데 시장에서 만세를 부른다는 소식을 듣고 상복을 입은 체 뛰어 나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동인물(主動人物)로 강용석(姜龍錫), 장재관(張在瓘), 김성덕(金盛德), 한감석(韓邯錫), 성해식(成海植), 석성기(石盛基), 박인옥(朴寅玉), 강봉석(姜鳳錫), 성필환(成必煥), 조월연(趙月衍), 송인수(宋仁洙) 등이 검거되었다.
2) 이안면 소암리 만세운동
이안면(利安面) 소암리(小岩里)에 사는 채순만(蔡淳萬), 채세현(蔡世鉉) 등 채씨(蔡氏) 문중의 청년 20여 명은 3월 29일 밤 10시경 마을 남쪽의 냇가 제방에 올라가 여러 차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경찰은 채순만, 채세현 등 마을 청년 20여 명이 구속되었다.
3) 화북면 장암리 만세운동
화북면(化北面) 장암리(壯岩里)의 이장(里長) 이성범(李聖範)은 마을의 지사들인 김재갑(金在甲), 홍종흠(洪鍾欽), 이용회(李容晦) 등과 의논하여 만세운동 권고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4월 4일부터 이웃 마을 여러 곳에 통고하고, 4월 8일 오후 2시쯤 속리산 문장대 위에 큰 태극기 2개를 세워 놓고 각 마을에서 올라온 7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성범, 김재갑, 홍종흠, 이용회 등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85년 10월 화북면 장암리에 이들의 정신을 기리는 독립운동기념비를 세웠다.
4) 화북면(化北面) 운흥리(雲興里)의 3.1운동
화북면 문장대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던 이튿날 상주에서의 다섯 번째 만세시위가 화북면 운흥리(雲興里)에서 일어났다. 화북면 운흥리의 유지 사는 김성희(金聖熙)와 정양수(鄭良洙)는 의거를 호소하는 통고문을 작성하여 중벌리(中伐里)와 운흥리의 동민에게 전달하고, 4월 9일 정오에 운흥리에서 농민 1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며 시위를 전개 하였다.
5) 상주 3․1운동의 특징
상주 3․1만세운동을 일으킨 주동자(主動者)들은 신분적으로 지도자급 출신이었다.
상주장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한암회와 성석기, 이안면 소암리에서 만세를 주도한 채순만, 채세현은 양반 신분이었다.
또한 화북면 운흥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성범은 마을 이장을 겸하고 있던 유지였고, 문장대 만세운동을 주도한 전성희, 정양수는 마을 유지였다.
그리고 상주지역의 3·1만세운동은 마을 단위로 권고문(勸告文)이나 통고문(通告文)을 발송하여, 마을 주민들에게 독립만세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리고 자발적으로 참여를 유도한 것이 다른 지역과는 차별되는 사례였다.
나. 상주의 독립운동 단체 활동
1) 조선국권회복단중앙총부(朝鮮國權恢復團中央總部) 사건
조선국권회복단중앙총부는 계몽운동가 박상진(朴尙鎭), 천도교 홍주일(洪宙一), 은행원 이영국(李永局), 변호사 김응섭(金應燮), 유생 장석영(張錫英) 등 당시의 각계 지도적 인물이 망라되었던 조직이었다. 대구, 경북 인사 외에도 경남 마산, 충남 아산, 전라도 출신자도 참가하였다.
당시 중요 인물로 지목된 단원으로는 경북 출신 25명, 경남출신 9명, 충남 출신 2명 등 36명에 이르렀으며, 상주 출신 인사로는 조필연(趙弼淵) 지사가 여기서 활동하였다.
2) 광복회(光復會) 사건
1913년 채기중(蔡基仲)이 풍기(豊基)에서 유창순(庾昌淳), 한훈(韓焄), 장두환(張斗煥), 정만교(鄭萬敎), 김상오(金相五), 정운홍(鄭雲洪), 황상규(黃相圭) 이각(李覚), 강병수(姜秉洙), 김병렬(金炳烈), 문봉래(文奉來), 유장열(柳璋烈), 정진화(鄭鎭華), 채경문(蔡敬文) 등과 함께 조국광복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었다.
달성공원 모임에서는 광복단원들이 모두 200여 명이 모였다고 한다.
이 모임에서 단원들은 다음과 같은 맹세를 하였다.
우리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이 한 몸을 바침은 물론 우리의 일생에서 이루지 못하면 자자손손에 이어 받아 불공대천의 원수 일본을 완전히 물리치고 광복하기까지 절대 변치 않고 오직 한 마음으로 싸울 것을 천지신명에게 고한다.
광복회의 조직은 군대식이었으며, 기본방침은 아래와 같았다.
1. 자산가의 현금과 불법 징수한 세금을 몰수하여 자금을 만든다.
2. 남북 만주에 군관학교를 세워 독립 전사를 기른다.
3. 의병들과 해산당한 군인, 만주 거주의 동포들을 무장, 훈련시킨다.
4. 중국, 러시아로부터 무기를 구입한다.
5. 상덕회상회(尙德會商會)를 본부로 하고, 국내외에 1만원 자본의 지점을 100개를 둔다.
6. 행형부(行刑部)를 두어 일본 고관과 친일 반역자는 수시 처단한다.
7. 무력이 충실해지면 일본을 섬멸한다.
광복회는 1916년에 다시 광복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광복단 관계로 일본 경찰에 체포 또는 수배된 인물은 모두 62명이었다. 그 가운데서 경상도 출신이 23명이었고, 상주 출신 인사는 4명이었다. 상주 출신 인사는 아래와 같다.
▪ 강순필(姜順弼) 35세 상주 이안(利安) 소암(素岩)
▪ 강정만(姜正萬) 30세 상주 이안(利安) 소암(素岩)
▪ 권영만(權寧萬) ?
▪ 권영묵(權寧黙) ? 상주 이안(利安)
▪ 채기중(蔡基仲) 53세 상주 이안(利安)
3) 무관학교(武官學校) 생도 모집 사건
무관학교 생도 모집 사건이란 1919년 6월경 선산(善山) 사람 최재화(崔載華)가 주동이 되어 경상북도 일원의 청년들을 모집하여 만주에 있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소속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보낸 사건이다. 이것은 국내의 장정들을 모집하여 만주에 있는 군사학교에 입교시킴으로써 항일투쟁의 군사 지도자를 양성하려는 것이었다.
최재화는 상주의 조성순(趙誠淳), 유우국(柳佑國), 배승환(裵昇煥)은 예천의 권원하, 이재영(李纔榮), 상주의 조태연(趙台衍), 안동의 권재수(權在壽), 동아일보 사무원 김종엽, 천세환(千歲桓) 등을 포섭하여 만주로 보냈다.
무관학교 생도 모집에 호응하여 스스로 독립투사가 되어 만주로 간 사람은 8명이었는데, 이 중 상주출신 인사로는 아래의 3명이었다.
▪ 유우국(柳佑國) 25세 상주 중동(中東) 우천(愚川)
▪ 조성순(趙誠淳) 25세 상주 상주(尙州) 인평(仁坪)
▪ 조태연(趙台衍) 26세 상주 낙동(洛東) 육평(六坪)
무관학교 생도모집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이고 조직적이며 계속적으로 투쟁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길러야 하는데 그 선결 과제가 군사훈련을 위한 군사 지도자 양성이라는 것을 직시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흥무관학교 생도 모집은 독립을 염원하는 애국지사들의 소망이었을 뿐 아니라 시대적 요청이었다.
4) 의용단(義勇團) 활동
상주 화북 출신 김규헌(金奎憲)과 상주 함창 출신 김재명(金在明)은 1922년 1월부터 11월까지 활동한 의용단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조직은 김찬규가 군정서의 김응섭으로부터 무기와 위임장을 받고, 김동진(金東鎭)은 군정서의 노백린이 발급한 자금모집 사령장 등을 받아 국내에 들어와서 이응수와 함께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인맥으로 보면 한말의 의병, 국권회복단, 대동단(大同團), 광복회로 이어온 경상도 항일 인맥이 그대로 망라되어 있다. 중국에서 활동하고 군정서의 활동자금 곧 군자금 마련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 사건의 발각으로 검찰에 송치된 인사는 모두 42명이었는데, 그 중 경북출신 인사가 30명이었고 상주출신 인사로는 상주 화북 상오리(上五里)의 김규헌(金奎憲)과 함창 구향리(舊鄕里)의 김재명(金在明) 등 2명이었다.
5) 의열단(義烈團) 폭탄 반입 사건
의열단의 계획에 따라 단장 김원봉(金元鳳)과 단원 김시현(金始顯), 황옥(黃鈺) 등이 국내로 폭탄 반입을 주도하였다.
상해로부터 동지들이 도착하여 거사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밀고자가 있어 1923년 3월 15일 김시현, 황옥 등 관련자가 체포되고, 폭탄류도 압수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황옥 사건(黃鈺 事件)이라고도 한다. 이에 관련된 상주출신 인사로는 김사용이 있다.
6) 학우단 폭탄 공격 계획
1919년 8월 13일 곡물상을 하는 김사용은 고령출신 문상직(文相直)이 신의주에서 상해 임시정부 비밀 통신원 황대벽(黃大闢)으로부터 선포문과 임시정부 강령 등 인쇄물 50부를 받아 비밀리에 서울로 가져온 것 중 40부를 받아 배포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10부는 대구의 서상일(徐相一)이 받아서 배포하였다. 문상직은 신흥학교 군사과 졸업생들의 비밀 단체인 학우단(學友團)에 가맹하고, 대구와 만주를 왕래하면서 폭탄 반입을 시도하다가 경북 경찰부에 의해 붙잡혀서 징역 4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 사건은 학우단 폭탄 공격 계획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관련된 인사로는 경북 출신 인사가 8명이었고 그 중 상주 출신 인사는 김사용 1명이었다.
7) 밀양(密陽) 폭탄 총기 사건
1920년 3월 8일 경남 밀양군 밀양읍내 이병완(李炳完)의 집 창고에 쌓아 둔 고량미 포대 안에 들어 있던 폭탄 3개가 경기도 경찰부 제3부 형사대에 의해 발각되었다. 폭탄은 상해에서 구입하여 만주의 안동(安東)을 거쳐 국내로 송달된 것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의열단의 폭탄・총기 발각 사건에 관련된 인사는 모두 26명이었다. 그 중 상주 출신 김재수를 포함되었다.
다. 상주의 의병활동
임란의병(壬亂義兵)과 한말의병(韓末義兵)은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여 백성들의 의(義)를 실천하기 위해 전개한 무력투쟁이었다. 대한제국의 비극 책속에서 의병항쟁의 현장을 기록한 영국의 종군기자 매컨지는 한국의 독립운동에서 의병은
정의를 위해 일어난 군대
라고 하였으며,
백암 박은식은
의병이란 민군이다(民軍)이다. 국가가 위급하면 바로 의(義)로서 일어나 조정이 명하는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하여 분연히 대적하는 자
라고 하였다.
의병들은 결국 죽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옳은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싸웠다. 그리고 그 애국심은 성리학(性理學)에서 강조하는 의(義)이며, 충의정신(忠義精神)의 기초라 할 수 있다.
한말의병(韓末義兵)전쟁을 주도한 유생(儒生)들과 병사(兵士)로 참여한 백성들은 결국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며, 그런 생각이 유생이나 병사들에게는 위정척사(衛正斥邪)였고, 충의정신(忠義精神)이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정부가 시키지 않아도 흔연히 일어나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싸우려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이 그 정신이었으며, 이를 통하여 국가의 주권을 지키고, 민족의 위신을 되찾는 것이 그 목표였다. 따라서 한말(韓末)의 의병전쟁은 성공과 실패 이상으로 그 정신과 목표에 큰 의의가 있다.
상주지역에서 창의(倡義)하고 실제로 활동한 의병부대는 노병대의진(盧炳大義陣)이 유일하며, 이는 후기 의병에 속한다.
또한, 활동무대가 상주(尙州)는 아니지만, 이웃 김천(金泉)에서 상주(尙州), 김천(金泉) 선산(善山) 등지의 유생들이 연합으로 창의한 김산의진(金山義陣)이 있었고, 이 김산의진(金山義陣)은 전기 의병에 속하며 의병대장이 상주사람 이기찬(李起燦)이었다.
그리고 이웃 문경에서 창의한 운강의진(雲岡義陣)에도 다수의 상주 사람들이 참여하여 항일투쟁을 하였는데, 이 운강의진(雲岡義陣)은 1896년 1월에 창의하여 1908년까지 활동하였기 때문에 전기의병에서 후기의병 기간까지 활약하였다고 볼 수 있다.
운강의진(雲岡義陣)의 활동은 운강(雲岡) 이강년(李康秊)이 의병활동을 한 것으로, 1896년 1월에 고향 문경(聞慶)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의 앞잡이였던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의 목을 베어 농암(籠岩) 시장에 높이 매달면서 의병진의 기세를 높였다.
그리고 1896년 2월 6일에 운강(雲岡)은 유인석 의진(柳麟錫 義陣)의 유격장(遊擊將)으로 수안보(水安堡) 전투 등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중군장(中軍將) 안승우(安承禹) 등이 제천에서 크게 패배하자, 운강(雲岡)도 그 해 7월에 군사를 해산하고 유인석(柳麟錫)선생과 함께 요동 땅을 방황하며 유학(儒學)공부에 전념하는 한편 내외지사들을 역방하여 천하대사를 논의하였다.
그런 가운데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압적으로 이루어지자, 전국 각지에서 다시 의병이 벌떼같이 일어났고, 운강 선생도 1907년에 김상태(金尙台)와 이만원(李萬源) 등 수십 명의 의병장들과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래서 운강(雲岡)은 정미년 7월 5일에 군사를 거느리고 제천(堤川)에 들어가 사방에 격문(檄文)을 보내었고, 7월 11일에는 고종 황제로부터 이강년(李康秊)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보전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는 밀칙(密勅)을 받았다.
같은 해 8월 3일에는 갈벌 전투에서 대승(大勝)하여 과전(戈田) 등을 죽였고, 10월 1일에는 죽령(竹嶺)에서 수백의 적을 목 베었고, 용소동 전투, 서벽(西壁) 전투, 내성 전투, 재산 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수많은 적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듬해인 1908년 6월 4일에 운강은 청풍의 까치성에서 적탄(敵彈)에 맞아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체포되었다. 불멸의 의병장 운강은 갖은 괴변과 유혹에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적(敵)을 추상 같이 호령하다가 1908년 9월 19일 교수대(絞首臺)의 이슬로 사라졌다.
운강 이강년의 창의일록(倡義日錄) 서문(序文)에는
의리(義理)는 도적을 토벌하는 방패요 나라에 보답하는 근본이다. 그러나 그 의리로써 능히 위태롭고 망해가는 시기에 힘을 다하여, 몸이 죽더라도 뉘우치지 않는 자는 고금을 통하여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명(明)나라 원숭환(袁崇煥)이 5백명의 군사로 만주(滿洲)의 오랑캐와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으니, 그가 어찌 하늘의 운수가 이미 다 된 것을 몰라서 그랬겠는가. 의리로 보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운강 선생은 이씨 왕조(李氏王朝)의 원숭환(袁崇煥)이었다. 그는 단신으로 원수 갚는 군사를 일으켜, 창을 베게 삼고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면서 잠시도 편안할 겨를이 없었으며, 적과 싸워 승전(勝戰)도 많았지만 패(敗)한 일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는 비밀 조서(詔書)를 받게 되었는데, 그 10줄의 조서는 모두 애통(哀痛)히 여기는 말씀뿐이었다.
공(公)은 감격하고 비분하여 하늘을 대신하는 토벌이었으나, 나라의 운(運)이 이미 다하였으니 어찌 한 사람의 지혜와 힘으로 될 수 있는 일이었겠는가. 공(公)은 일찍이 의암 유인석(毅庵柳麟錫) 선생을 사사(師事)하여, 중화(中華)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며, 역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은 의리를 익히 들었기 때문에, 비록 백만 명의 군사가 와서 위협하더라도 두려워할 바 아니었다.
그러므로 공(公)은 빈주먹을 휘두르고 만 번 죽음을 무릅쓰면서도 감히 딴 마음을 갖지 않고, 마침내 감옥에서 화를 당하였다.
라고 서술되어 있다.
라. 각 단체 활동
1) 청년운동
3・1 운동은 민족의 힘을 보다 효과적으로 결집하고 아울러 계속적으로 항일 에너지를 육성하기 위한 조직체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였다. 더욱이 민족의 장래를 책임져야 할 청년들의 수양과 훈련은 물론 이들을 통한 민중의 계몽과 지도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 이러한 시대적인 요망은 3・1 운동 이후 전국 각지에서 활발한 청년 운동을 가져오게 하였고, 나아가서는 소년운동까지도 전개하도록 하였다.
각지 청년들은 청년회 결성을 통하여 유대를 강화하고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부터 조직되기 시작한 상주지역의 청년회는 상주(尙州)청년회, 함창(咸昌)청년회, 상주새모임, 상주용혁단(尙州勇革團), 옥산(玉山)청년회, 상주갑자구락부(尙州甲子俱樂部), 상주청년연맹, 연봉(蓮峰)청년회, 청리(靑里)청년회, 상주노동청년회, 상주노동청년회신풍지회(新風支會), 상주노동청년회남장지회(南長支會), 중모(中牟)청년회, 함창면우조회(友助會), 외남(外南)청년회, 상주기독청년회, 상주신우회(尙州新友會), 상주무산청년회(尙州無産靑年會), 연원(蓮院)청년회, 상주청년동맹, 상주청년동맹옥산지회(玉山支會), 상주청년동맹연봉지회(蓮峰支會), 상주청년동맹내서지회(內西支會), 조선청년총동맹상주군위원회 등 24개 단체였다.
청년회는 주로 강연회, 토론회, 체육활동, 오락활동, 사회활동 등을 실시하였다. 상주청년회, 청리청년회, 중모청년회, 상주청년동맹옥산지회 등에서는 소인극(素人劇) 활동을 주로 하였는데, 그 목적은 단순한 친목이나 오락이 아니라 풍속개량이나 문화선전을 목적으로 하기도 하고, 수해구제나 교육기고, 또는 청년회관 건축을 위한 비용 마련을 위한 경우가 많았다.
2) 여성운동
우리나라가 전통적인 여성관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말 기독교와 동학 등을 통해서, 또는 갑오개혁 이후 해외에서 선진 사상을 배워 온 개화 지식인들의 신문, 잡지 등을 통한 계몽에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일제 침략이라는 상황 속에서 여성들의 사회 참여는 여권 신장과 아울러 구국항일이라는 이중적인 상황을 동시에 극복해야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여권이라는 측면보다는 구국이라는 측면이 강하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상주지역에서는 1926년 10월 15일 김혜향(金惠鄕) 등의 발기로 창립된 상주여자기독청년회(尙州女子基督靑年會)인데 회장은 김나운(金羅雲)이었다.
3) 신간회의 활동
1927년에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공동전선을 펴서 민족단일조직으로서의 신간회를 조직하였다. 이 신간회는 합법적인 기관으로 인정되었다. 1928년 9월 4일 신간회 상주지회가 창립되었다.
신간회 각 지회는 국산품 애용 및 토산품 장려로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였고, 일제의 농민수탈정책에 대한 농민운동으로서 수리조합 반대운동과 소작쟁의 운동도 전개하였다. 나아가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일제와 관련된 직접적인 시위항쟁을 주도하였다.
4) 상주동학교당
1860년대 초기의 상주 동학교도들은 황문규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꾸려갔던 것이다. 상주의 동학은 1862년에 이미 접주가 임명될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어 있었다.
상주 동학의 남접교주가 김주희였다. 그는 1909년대에 은척면 우기리에 터를 잡고, 이름을 경천교(敬天敎)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1915년에 상주 동학본부를 설치하면서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922년 김낙세(金洛世) 부자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우기리에 본당을 새로 짓고 동학본부라 개명하고 간행사업 등으로 교세 확장에 몰두하였다. 교세는 상주, 문경, 예천, 영풍, 안동 등 경북을 중심으로 충북, 강원도까지 미치었다. 우기리는 지리적으로나 지형적으로나 관헌의 눈을 피해 동학을 포교하기에 최적지였다. 최시형도 최제우의 명을 받고 경북북부지방을 거점으로 포덕할 때 여러 번 상주를 거점으로 삼았었다고 한다.
마. 독립 유공자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가(60명)
독립장 : 강순필, 권 준, 노병대, 채기중(4명)
애족장 : 강용석, 강호석, 김길상, 김영이, 김재갑, 김재수, 김진호, 김한석, 민영숙, 박인옥, 박하규
석성기, 성익환, 성장환, 성필환, 성해식, 안만이, 류규년, 류원우, 이성범, 이용희, 이원재
이창재, 이태준, 전성희, 전월순, 정양수, 조동석, 최용억, 한상열(30명)
애국장 : 권상중, 권태휴, 김사용, 김윤황, 류우국, 이기찬, 장학이, 조운식, 홍성무(9명)
건국포장 : 김만원, 김진구, 이원영, 정학진, 채성환. 한규환, 황계주(7명)
대통령표창 : 강동석, 강봉석, 박희봉, 성하식, 이면우, 이병억, 조성돈, 조월연, 조태연, 채세현(10명)
마. 독립 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29명)
3・1운동 : 한암회, 장재관, 김성덕, 송인수, 채순만, 홍종흠, 허 룡, 김혜경, 강신규(9명)
의병 : 김성옥, 홍우형, 오우선, 체충진, 신돌석, 김주범, 김재명, 이시좌, 이용엽, 배선균(10명)
의용단 : 신현식, 김규현(2명)
국내항일 : 조필연, 김 유, 이병세(3명)
해외항일 : 조상연, 정재룡, 김주성(3명)
군자금모집 : 김덕영(1명)
항일언론활동 : 장지연(1명)
Ⅲ. 상주인의 구국정신을 잇자
상주는 삼국통일전쟁의 전진기지로서 큰 역할을 수행한 고장이었다. 상주장군 혹은 상주총관이 출전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으며, 상주의 백성들이 군수물자를 운반한다든가 병마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는 삼국통일전쟁에서 상주가 중요한 거점으로 기능하였으며, 이러한 상주인의 활동이 신라통일이라는 대업에 큰 기여를 하였다고 본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6차 여몽전쟁에서 차라대(車羅大)가 고려를 침입하고 나아가 상주성(尙州城-백화산(白華山)의 금돌성(今突城)으로 추정)을 공격해 왔을 때, 상주의 백성들은 황령사 승 홍지의 지휘로 상주관민이 합심하여 물리쳤다.
1254년의 상주승첩은 지역민들의 순수한 자위적 항전이었으며 지휘자가 관리가 아닌 현지의 승려였다는 점과 전투의 결과가 매우 큰 승리로 귀착되었다는 점 등은 아주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리고 홍건적은 공민왕 10년(1361)년 10만 명에 달하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은 복주(福州:안동)까지 피난했을 때 홍건적을 물리치고 난을 평정한 장수가 정세운(鄭世雲),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 이방실(李芳實) 등이었다. 김득배는 명리(名利)와 안일을 탐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겨누고 있는 시기와 모함의 칼끝도 마다하고 오로지 앞만 보고 구국의 길을 내달렸던 선비였다.
그의 고결한 정신은 학문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상주 벌에 대의문풍(大義文風)을 진작시켜 절의(節義)의 고장으로 거듭나게 했음이 바로 상주인의 얼이요,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임진왜란은 상주가 지리적 요충지로서 가장 참혹한 전쟁의 상처를 남겼으나 이를 극복하고의 구국정신의 정신을 빛낸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 발달한 1592년 4월 중순 조선에 상륙한 왜군이 부산의 동래성을 공격할 때 동래부사 송상현이 이끄는 군대의, 저항 말고는 상주까지 오면서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받지 않고 10여일 만에 상주까지 진격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서 상주까지 오면서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무인지경을 올라 온 셈이었다.
이때 상주 저항군을 이끌던 토착 호장 박걸(朴傑)과 종사관 등 지휘층과 저항군 수백 명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렇게 저항한 싸움이 상주북천전투였다. 비록 전투에서는 패배하였지만 상주는 다른 지방과 달리 왜적에게 분연히 항거하여 투쟁하였다는 사실 자체는 인식과 평가를 높이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상주의 북천 전투는 더욱 빛나고 값진 저항이요 투쟁이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상주에서 왜병과의 전투를 전투에 승리로 이끈 사람이 충의공 정기룡(鄭起龍) 장군이다. 임진년 상주 용화동 전투에서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그해 11월 말에는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고을의 치소가 있는 상주 읍성을 탈환하면서 왜군을 몰아냈다. 그 밖에도 당교와 화령, 낙동 등 여러 곳에서 왜군과 싸워 크게 이김으로써 임란 상주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간 주역이었다. 이 때 상주에서 많은 의병들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상주에 잔류한 왜군들은 주로 읍성(邑城)과 당교를 근거지로 하여 약탈과 학살을 자행함으로써 주민들의 분노를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다수의 사람들이 의병활동에 동참하여 저항했는데, 의병 지도자는 그 성향에 따라 크게 둘로 구분하여 볼 수 있겠다. 하나는 전직 관료(官僚)출신들이 주축이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 민중(民衆)편에 가까운 인사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한다.
전자에 해당되는 의병지도자로는 권종경(權從卿), 정경세(鄭經世), 이홍도, 채유희, 조정, 전식, 이준, 송량, 김홍민, 이천두, 김각 등 다수가 있었다.
이들 의병들은 같이 모여 북향재배하면서 임금께 충성을 다짐한 뒤, 삼장법(三章法)이라는 군법도 만들어 군기를 확립하였다. 이 의병활동에 가담한 사족 중에는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렇게 국가와 민족을 위한 상주의 사족들과 민중들의 구국정신은 상주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끝으로 상주 3․1 만세 운동의 주류들은 신분적으로 지도자급 출신이었다. 상주장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한암회, 성석기, 이안면 소암리에서 만세를 주도한 채순만, 채세현은 양반 신분이었으며, 북면 운흥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성범은 마을 이장을 겸하고 있던 유지였고, 문장대 만세운동을 주도한 전성희・정양수 역시 마을 유지였다.
그리고 상주지역의 3·1만세운동은 마을 단위로 권고문(勸告文)이나 통고문(通告文)을 발송하여, 마을 주민들에게 독립만세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리고 자발적으로 참여를 유도한 것이 다른 지역과는 차별되는 사례였다.
또한 상주지역에서 창의(倡義)하여 의병활동을 한 의병부대는 노병대의진(盧炳大義陣)이 유일하다. 또한 김천(金泉)에서 상주(尙州), 김천(金泉), 선산(善山) 등지의 유생들이 연합으로 창의한 김산의진(金山義陣)의 의병대장은 상주사람 이기찬(李起燦)이었다. 그리고 문경에서 창의한 운강의진(雲岡義陣)에도 다수의 상주 사람들이 참여하여 항일투쟁을 하였다.
그리고 동학혁명은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벗기고 횡포한 외적을 물리침으로써 창생을 도탄에서 구하고 나라를 반석위에 두고자 궐기했던 민중항쟁이다. 또한 동학농민혁명도 구국이념에 불타는 의거이다.
이와 같이 우리 상주의 선열들이 타 민족에 의한 예속의 쇠사슬을 끊어버리고 조국광복의 영광을 쟁취하려 했다는 점에서 삼일운동은 바로 자주독립정신의 발로였으며, 우리의 위대한 자산인 구국정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처럼 위대하고 고결한 정신인 대의문풍(大義文風)과 절의(節義)가 상주 정신이며, 상주인의 얼이요,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훌륭한 상주인의 정신을 다음 세대에게 바르게 가르치고, 심어주어, 앞으로 우리 민족을 이끌 훌륭한 구국정신을 지닌 인재를 양성하여야 한다. 그리고 상주가 대한민국의 구국정신의 중심이었음을 인식하고 이를 이어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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