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의해 훼손된 상주의 문화유산
상주향토문화연구소장
곽 희 상
목 차
Ⅰ. 들어 가면서 120
Ⅱ. 일제의 문화재정책 121
Ⅲ. 우리 지역의 훼손된 문화유산 124
1. 상주읍성과 4대문의 철거 125
2. 외남 지사리 전탑(塼塔)의 멸실 127
3. 화령 태실(胎室) 등의 훼손 129
4. 경북선 철도의 부설에 의한 민족정기의 말살
131
Ⅳ. 마무리 141
일제에 의해 훼손된 상주의 문화유산
상주향토문화연구소장
곽 희 상
Ⅰ. 들어 가면서
한 나라를 병합(倂合)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인류학자(人類學者)가 들어 와 민족의 뿌리를 조사 한 후에 민속학자(民俗學者)들이 그 민족의 민속문화와 풍속에 대해 완전하게 조사를 하게 된다. 이 조사로 인해 민족성과 민속, 풍습을 종합한 후에야 그 실체를 규명할 고고학자(考古學者)들이 발굴조사를 통한 실체규명으로 병합할 수 있다.
일제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한말에 교묘하게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다. 조선을 총칼로 침탈하고서 다시 영원히 조선을 탈취하기 위하여 광분하였다. 조선의 민족혼 자체를 말살시켜 일본인에 동화될 수 있도록 그들의 역사보다 수천 년이 앞선 조선 역사의 왜곡과 조작을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노골적이고 조직적인 차원으로 추진하였다.
사실 일제가 역사 왜곡에 혈안이 된 이유는 고대 일본의 역사가 동방 한민족 역사의 부속사라는 숙명적인 약점과 역사적 열등감과 이에 수반되는 침략 명분의 부재이며, 이들에 대한 열등감을 숨기기 위한 계획적인 역사 날조였다.
이 과정에서 전국의 방방곡곡에 산재되어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과 문화재를 일제 조사하면서 이들의 보존과 보수대책을 운운하면서, 실제로는 그 원형을 알고자 마구잡이식으로 파헤치며, 급기야 민족의 혼까지 말살시키려는 계략이었다.
그 무도한 일제의 민족혼 말살이 우리 상주에서는 어떠하였는가에 대해 본고에서는 그 중 문화재의 파괴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서술하기로 한다.
Ⅱ. 일제의 문화재정책
일제의 문화재정책은 식민주의 교육정책에 입각한 민족말살 정책이었다. 여기에는 크게 식민주의 교육정책에 따른 우민화 교육과 언론, 종교의 탄압, 식민사관에 입각한 우리나라의 역사 왜곡, 한국어 말살과 창씨개명, 일제의 황민화 정책과 문화재의 파괴와 약탈 등이라 하겠다.
실제로 조선은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주체적으로 뿌리를 내릴 시간을 갖지 못한 채 ‘문명적 근대국가 수립’의 과정 중에 일본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고, 일본의 조선 강점 이후 우리의 문화재가 그들에 의해 대규모로 파괴와 약탈되는 가운데 비로소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김지선, 2008,「조선총독부 문화재정책의 변화와 특성, - 제도적 측면을 중심으로 -」,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9쪽.
반면 일본인들은 식민 통치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재화로서의 가치를 지닌 ‘소유’하고 싶은 ‘자산’으로서 조선의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 문화재는 ‘상징재산’ 문화재가 그것을 소유한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가늠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인식을 뜻한다.
으로서 문화재의 가치를 인지하고 있던 일본인들에 의해 무분별하게 발굴되고 수탈되었다. 1871년 「고기물보존방(古器舊物保存方)」 1871년 5월 발포된 일본 최초의 문화유산에 대한 법령인 태정관포고 제251호인 「고기구물보존방(古器舊物保存方)」은 명치유신(明治維新) 후의 구화(歐化)사상의 파급, 폐불훼석(廢佛毁釋)의 풍조 속에서 일본의 전통문화가 경시되고 사사(社寺)의 많은 문화재가 산일(散逸), 파괴되는 상황 속에서 발포된 것이었다. 각 지방에서 대대로 소장하고 있는 고기구물(古器舊物)의 품목과 소장 인명을 기재하여 관청에 제출하게 했던 것으로, 포고에서는 별지를 첨부하여 고기구물류(古器舊物類)를 미술 공예품을 중심으로 기타 고고유물⋅민속자료 및 생활기구, 동식물의 화석 및 동물의 뼈까지 포함하는 31종류로 분류했다. 이것은 일본에서 처음으로 소장자에 대한 계몽을 행하고, 문화재보호사상의 보급을 도모했던 정책으로써 그 의의를 지닌다(中村賢二郞, 文化財保護制度槪說, ぎょうせい, 1999, 13-14쪽).
과 1897년 「고사사보존법(古社寺保存法)」 일본에서는 1888년 설치된 임시전국보물조사국에 의해 1888년부터 1897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최초의 면밀한 문화재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제정된 것이 1897년 법률 제49호의 「고사사보존법(古社寺保存法)」이다. 이 법은 그 대상이 사사(社寺)에 관한 것으로 한정되었지만, 국가에 의한 중요문화재의 지정(특별보호건조물, 국보)이나 지정문화재에 관한 관리 ․ 보호 공개에 대한 규제 및 중요한 문화재의 보존을 위한 국가의 조성을 처음으로 법률제도로서 정한 것으로, 일본의 문화재 보호제도의 원형이 되는 것으로 평가된다(中村賢二郞, 1999,『文化財保護制度槪說, ぎょうせい』, 15쪽).
의 제정으로 문화재의 가치를 인식했던 일본인들은 1876년(고종 13)에 체결된 강화도 조약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에 들어와서 ‘골동품’ 수집에 몰두했다. 1904년에 발간된『(기업안내) 실리지조선(企業案內)實利之朝鮮』이란 책에 보면, ‘경부철도선로지방의 사업’이란 항목 하에 조선에서의 직업 중 고물상(古物商)을 소개하고 있다. 군사목적에 의해 철도를 부설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묘가 발굴되고 부장품이 출토됨에 따라 고물상은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업으로 부각되었다. 이는 그만큼 조선 문화재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이 컸음을 반증한다. 김지선, 위의 논문, 10쪽.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강탈하여 식민지로 강점하자 한국에 대한 식민지통치기구로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를 설치하고, 그 지휘자로 총독(總督)을 두어 식민지통치를 담당하게 하였다. 조선총독은 행정권뿐만 아니라 입법·사법 및 군대(이른바 ‘조선군’) 통수권까지 가진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는데, 내무부 산하에 '고적조사반(古跡調査班)'을 설치하고 전국의 문화재에 대해 일제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로 나온 책이 『조선고적도보』 조선총독부가 한국의 고적조사사업을 진행하고 그 성과를 사진과 도면으로 모아 도쿄[東京]에서 펴낸 책으로, 전 15권이다. 총 사진수 6,633장으로 발행 당시까지 조사된 고적이 대부분 실려 있다. 편찬경위는 권1의 서문에 의하면, 1909년 9월부터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세키노[관야정(關野貞)]가 조선의 옛 건축물 조사를 시행한 것이 그 계기였다고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러나, 최초의 한국 고적의 사진 자료집으로서 유적의 당시 상태를 알 수 있다.
이다. 편찬위원들이 대부분 조선사편찬사업에 참여했던 인물이 참여하였다.
조선 총독부의 지원 아래 일제는 행정력을 총 동원하여 전국 방방곡곡의 명가(名家)를 찾아 다니면서 가정에서 보관 중인 각종 희귀 고서를 강제로 수집하기도 하였으며, 한편으로 마구잡이식 발굴로 원형보존과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원형을 알 수 없게 훼손시킨 문화재는 상당하다. 특히 고분의 발굴을 보면, 짧게는 몇 개월이 걸리는 발굴을 단 며칠만에 그것도 보고서 한 장없이 발굴을 감행하는 등 문화재 훼손은 극에 달했다.
실제로 1921년 경주시 노서동에서 신라 금관(金冠)이 최초로 발견된 금관총(金冠塚, 128호분) 금관총(金冠塚) : 고신라 최고지배층의 무덤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1921년 우연히 발견되어 그 존재가 알려졌으나 간단한 조사에 그쳐 고분의 구체적인 구조와 유물부장 상태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점이 많다. 고신라 고분 중 최초로 금관이 발견되어 금관총이라 이름했으며, 이후 신라 고분 발굴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금관총이 속해 있는 경주 노서리 고분군은 본래 사적 제39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경주 노서리 고분군을 포함하여 경주 노동리 고분군으로 사적 제38호로 지정되었다.(다음백과)
의 발굴에서 단 4일만에 유물만 수습하고 발굴을 완료하는 사례에서 보듯이 일제의 문화재 훼손은 민족혼의 말살과도 같다고 하겠다.
그 후 서울⋅개성⋅평양⋅부여⋅공주⋅경주 등지의 수많은 고분(古墳)⋅산성(山城)⋅고적(古跡)을 파괴하고 출토 문화재들을 일본으로 실어갔다. 일제가 우리의 전통 문화재를 파괴하고 약탈했던 목적은 우리 민족의 찬란했던 문화와 민족사를 은폐하려는데 있었다.
또한, 일제는 식민지배 정당화를 위해 조선의 많은 문화재가 무분별하게 유출되는 상황이 계속되자 식민 당국은 그것을 통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먼저, 1902년부터 조선의 고건축물에 관한 조사를 시행하여 불교 사찰에 집중된 조선의 문화재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일제는 기본적으로 종교 관련 법령이었던 「사찰령」 속에 사찰 소유 문화재에 관한 규정을 삽입하여 문화재 조사와 문화재 수집 정책을 수립하고도 일제가 약탈해간 문화재는 도자기⋅불화⋅회화⋅서적⋅불상⋅석조물 등 모든 종류에 걸쳐 있었다.
일제가 파손한 문화재는 주로 한일 관계사에서 일본에 불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화재나 문화유산이 표적이 되었다.
우리 상주에서도 상주 읍성과 4대문을 허물고, 외남면 지사리의 모전석탑과 태실(胎室)의 훼손을 비롯하여 경북선 철도 개설을 명분으로 한 지역별 민족의 얼이 심어 있는 곳은 지극히 의도적으로 훼손을 시켰다.
Ⅲ. 우리 지역의 훼손된 문화유산
우리 지역에서 일제에 의해 훼손된 문화유산은 크게 상주읍성과 4대문, 우리 지역에서 유일한 외남면 지사리의 전탑을 비롯하여 조선 왕실의 태실 및 경북선 철도 부설에 의한 지역별 문화유산 및 민족 혼 말살이 이루어진 곳이 여러 곳에 있다.
그 실체를 살펴 보자.
1. 상주읍성과 4대문의 철거
상주에 읍성이 축조된 시기는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상주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으로는,『삼국사기(三國史記)』와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이다.
먼저,『삼국사기』에, 신문왕 7년(687)에 “3월에, 일선주를 없애고 다시 사벌주를 두고 …(중략)…가을에, 사벌주와 삽랑주 두주에 성(城)을 쌓았다.” “三月, 罷一善州復置沙伐州…(중략)…秋 築沙伐 歃良二州城.,”『三國史記』「新羅本紀(8)」, 신문왕 7년 조. “神文王七年 唐垂拱三年 復置 築城 周一千一百九步”『三國史記』「雜志 3, 地理 1」尙州 조.
하고, “신문왕 7년 당 나라 수공 3년에 다시 주를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 둘레가 1,109보(步)였다”가 있다.
다음으로, 1385년(우왕 11)이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 “홍무(洪武) 을축년(乙丑年)에 돌로 쌓았고, 주위 둘레는 3,458척(尺)이고 높이는 9척(尺) 7촌(寸)이며 성안에 군창(軍倉)이 있고 작은 지(池)가 둘이고 샘이 21개소인데 겨울과 여름에 마르지 않는다” “邑城 洪武 乙丑 石築 周回 三千四百五十八尺 高九尺七寸 有軍倉 小池二井二十一 冬夏不渴”?校訂 慶尙道地理志 慶尙道續撰地理誌?, 1938, p.95.
고 하였다. 홍무 을축은 명(明)나라의 연호로서 1385년 고려 우왕(禑王) 11년에 해당한다.
축조이유는 5년 전인 1380년(우왕 6)에, “왜구가 황간(黃澗), 어모(禦侮), 중모(中牟), 화령(化寧), 공성(功城), 청리(靑利) 등 현에 방화하였는데 상주(尙州), 선주(善州) 등 두 고을에 까지 미쳤다.” “倭焚黃澗禦侮中牟化寧功城靑利等縣 遂焚尙善二州.” ?高麗史? 卷134, 列傳47, 辛禑2 庚申 6年 8月 조.
라는 ?고려사? 기록에, 상주 일대가 왜구의 침범으로 관아와 민간의 피해가 컷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 때 “왜구는 상주에 무려 7일간 머물렀다” “又寇中牟化寧功城靑利等縣 焚尙州留七日置酒.” ?高麗史? 卷126, 列傳39, 姦臣2, 邊安烈 조.
고 하였다.
또한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의 풍영루기(風詠樓記)에도, “경오년(庚午年)에 왜구가 침범하여 관옥(官屋)과 민려(民廬)가 병화에 모두 피해를 입었다. 다음해 신유년(辛酉年)에 반자(半刺) 반자(半刺)는, 목사(牧使) 아래의 관직인 판관(判官)을 말한다.
전리(田理) 전리(田理, ?∼?) : 조선 조에 1399년 경력, 1400년 4월 사헌시사, 8월에 김해부사를 역임하였다.
가 비로소 주성(州城)을 쌓고 남은 백성을 초집(招輯)하였다. “庚申之歲 倭寇侵犯 官屋民廬盡罹兵燹 明年辛酉 半刺田君理始築州城 招輯遺民.”「尙州風詠樓記」, ?陽村集? 卷14(?韓國文集叢刊? 7, p.158),
고 하였으니, 상주읍성은 1380년 왜구의 침입 후 1381년부터 읍성을 쌓기 시작해서 1385년에 완성하였다고 하겠다.
상주읍성은 읍치(邑治)로서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 상주읍성(尙州邑城) 상주읍성의 둘레는 1,700m, 남북 길이 440m, 동서 길이 520m, 내부면적 185,400㎡이다. 金相鎬, 2005,「尙州邑城(規模와 施設 位置를 中心으로」,『상주문화연구』(제15집), 상주대학교 상주문화연구소.
의 성벽(城壁)을 허문 것은 일제가 병합 후인 1912년경이다.
1911년에 육군(陸軍) 측량부(測量部)가 임시로 발행한「약측도(略測圖)․목산측도(目算測圖) 등의 집성(輯成)」에 실려 있는 5만분지 1의 지도에 상주읍성(尙州邑城)이 그려져 있으나, 1912년 에 이 성벽(城壁)이 허물어짐에 따라 상주읍성(尙州邑城) 한가운데에 큰 십자로(十字路)가 생겼고 1912년 성첩과 문루를 모두 헐어 시가 통로를 만들고 호지는 미나리논이나 왕골논이 되고 또 웅덩이를 메우고 집을 짓는 등하여 성지가 모두 없어졌다.『商山誌(1929)』城池條.
읍성(邑城)이 시가지(市街地)로 변모해 갔다. 김철수, 2016,「일제 강점기의 상주 모습(Ⅰ)」,『상주문화』(제26호), 126-127쪽.
이타가키 류타(板垣龍太)가 쓴『한국 근대의 역사민족지』의 상주편에, “마침 읍성의 성벽이 허물어진 전후 시기인 1912년 12월 10일~11일에, 조선총독부의 고적보존위원이었던 관야정(關野貞), 곡정제일(谷井濟一), 율산준일(栗山俊一) 일행이 상주에 들러 조사를 했고, 고적으로서의 가치를 갑을병정으로 등급을 매겼다[대정(大正) 원년(元年)『조선고적조사약보고(朝鮮古蹟調査略報告)』]. 상주의 읍치에 대해서는 상산관(商山館), 진남루(鎭南樓), 중문(中門), 남문(南門) 홍치문(弘治門) 상주박물관에서 수집한 남문의 엽서 사진에 남문의 명칭이 ‘00門’으로 판독을 하지 못하였는데(김진형, 2015,『상주문화』25호「상주박물관 소장 일제 강점기 사진에 보이는 몇가지 문제」) 남문을 ‘홍치문’으로 조사 기록하였으니, 홍치문으로 볼 수 있겠다.(필자 주)
, 서문(西門) 진남문(鎭商門)을 조사하여 각각 병·병·정·병·정으로 평가했다. 이타가키 류타(板垣龍太), 2015,『한국 근대의 역사민족지』,「경북 상주의 식민지 경험」
상주읍성의 성벽과 문루는 일제에 의하여 흔적없이 사리지고 말았다. 1922년에 마지막으로 남문(南門)이 헐리면서 상주읍성의 자취는 역사속으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최근들어 읍성의 4대문과 성벽 터를 따라 상주시에서 표지물을 설치해 놓았으며, 북문(현무문)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예산확보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특히 지난 2015년도 상주박물관에서 구입한 우편엽서에는 4대 문의 전경이 가장 잘 나타나는 기록물이다. 이를 터잡아 2015년에 김상호 연구위원(상주시 문화융성담당)이 전국 향토사 논문 투고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복원자료가 충분함에도 미온적임은 매우 안타깝다고 하겠다.
2. 외남 지사리 전탑(塼塔)의 멸실
전탑(塼塔)은 석탑(石塔)과 달리 점토(粘土)를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빚어서 말린 뒤 800∼1,000°C로 가마에서 구워 만든 전(塼)으로 축조한 탑을 말한다. 우리 지역에 유일하게 전탑(塼塔)이 외남면 지사 1리(탑동)에 있었다.
『상산지(1928년 증보)』에, “석심회피탑(石心灰皮塔)은 상주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외남면 탑동 마을 입구에 있으니, 2천년 전 신라 때 세운 것이라 전한다. 1915년 초배(樵輩, 나뭇꾼 무리)들이 탑을 헐고 그 속을 파내려 하니 관에서 철망을 쳐서 금하였다’ ‘在州南二十里 外南面 塔洞洞口 二千年前 新羅所建 大正四年乙卯 樵輩欲毁塔 暗深其裡 郡守聞于 總督府 鐵絲網其塔’『상산지(증보)』 「古蹟編」.
고 하였다.
또 다른 기록에, “조선에는 또 하나의 특수탑파(塔婆)가 있었다. 상주군 외남면 상내리(上內里)의 한 사지(寺址)에 있었던 석심토피탑(石心土皮塔)이라는 것인데, 초층의 넓이 남면(南面) 4척 5촌, 동면 4척 8촌 3분, 높이 약 19척(尺)이며, ‘고적도보(古蹟圖譜)’에 실릴 때는 아직 6층까지 남아 있었다. 고적도보의 해설의 대의를 쓰면, ‘처음에는 7층이었던 듯하며, 기석(基石) 조대(粗大), 탑신(塔身)은 대소의 안산암재(安山岩材)를 쌓고 초층(初層) 남면에 소공감실(小孔龕室)이 있다. 헌(軒)은 석재를 쌓아 옥개받침으로 함이 3, 4층 그 위에 얇은 판석(板石)을 이어 옥개호 라다. 2층 이상 탑신은 얕고 또 차차 그 크기를 감살(減殺)하다. 당초에는 전부 표면에 흙을 바르고 그 위에 저절(苧苆)을 넣은 석회로써 발랐던 것인데 대부분 벗겨 떨어져 겨우 동면 제2층에만 흔적을 남기고 있다”고 하였다. 박찬선, 1999,「상주의 전탑」,『상주문화』(제8호), 68쪽.
이 외의 기록으로,『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263항)의 기록과 1969년 단국대학교 박물관 정영호(鄭永鎬) 박사의『상주지구고적조사보고서(尙州地區古蹟調査報告書)』(116-118쪽)에도 기록이 있다.
이 전탑은 실제로 외남면 지사 1리 655-4번지(지목 : 과수원, 지주 차창식)였다. 아직도 과수원 오른쪽 개울의 축대는 이 탑의 하대석이며, 작은 판석(板石)들은 밭둑과 인근 민가의 담장으로 쓰여지는 등 흔적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 전탑이 허물어진 년도는 1915년으로, 당시 초배들이 이 탑을 허물었다고 하나 진정 우리 민족이 허물었겠는가?
일제는 골짝이는 물론 골골이 뒤져 유산적 가치가 있고 우리의 민족혼이 서려있으면 훼손부터 시켰으니 이 또한 민족혼의 말살정책이라 하겠다.
3. 화령 태실(胎室) 등의 훼손
일제는 조선 왕실의 기운과 조선의 얼을 말살시키기 위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왕자와 공주 등의 태실을 관리의 어려움을 핑계로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서삼릉(西三陵, 사적 제200호) 경내로 총 54기의 태실을 집장(集葬)하였다. 이는 산재한 태실의 관리보다 어쩌면 매장 유물에 관심이 더 컷을 수도 있겠다. 당시 최고의 도공(陶工)들이 태항아리를 제작하였으니 말이다.
태실(胎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으로 태봉(胎封)이라고도 한다. 즉, 태옹(胎甕)이라는 항아리에 안치하는 것이 통례이나 왕세자나 왕세손 등 다음 보위를 이어받을 사람의 태는 태봉(胎峰)으로 가봉될 것을 감안,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상주에는 조선조 왕자들의 태(胎)를 봉안한 곳이 모두 4개소로서, 함창 1, 모동 2, 화서 1기 모두 4기의 태실이 있다.
화서면 신봉리 태봉산(343m) 정상의 태실은 연산군 원자(1남) 금돌이의 태를 봉안한 태실로서, 태항아리와 태지석은 없고 태실(석함)만 남아 있다. 태항아리와 태지석은 일제강점기 때 서삼릉으로 이장하였다. 이 태실의 주인공은 연산군의 원자이고, 이름은 금돌이(金乭伊)이다. 태지석의 명문에는, “「황명홍치 십년 십일월 이십구일 자시생(皇明弘治十年十一月二十九日子時生)」 「원자 금석을이 아지씨태(元子金石乙伊阿只氏胎)」「홍치 십사년 칠월 초이일 미시장(弘治十四年七月初二日未時臟)」”으로 기록되어 홍치 10년(1497) 12월 29일 자시(23:00~01:00) 출생이다. 1501년 7월 2일 미시(13:00~15:00)에 태를 봉안하고 금표비(禁標碑)를 세웠다. 김상호, 2008,「상주지역 태실에 관한 고찰」,『상주문화』제18호, 상주문화원, 296쪽.
금석을이(金石乙伊)는 금돌이(金乭伊)의 음역자(音譯字)식 표기이다
이 금표비는 앞면에는 1501년 7월 2일(弘治十四年 七月 初二日)로, 뒷면에는 왕자태실(王子胎室)이라 새겨 놓았다. 상주지역에서 현재까지 가장 오래된 비석이다.『상주시사』(제3권)「제3장 금석문」, 808쪽.
함창읍 태봉리의 태봉산(105.5m)에도 선조의 12남 인흥군(仁興君, 1604∼1651)의 태실이 있었다. 장태일은 만력 36년(1608) 11월 7일이다. 김상호, 위의 논문 294쪽.(皇明萬曆三十二年二月初七日生王子阿只氏胎」「萬曆三十六年十一月初七日」)
1932년 일제는 도굴을 하면서 태지석과 태항아리는 꺼내가고 태함(胎函)과 비석(금표비)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이 마져도 없어졌다.
모동면 상판리의 태실은 솔보 동남쪽 해발 372m의 산51번지으로 특이하게 산지이다. 여기에는 성종의 3남인 안양군과 완원군 2기의 태실이 안치되었는데, 이 태실의 주인공은 성화(成化) 16년(1480) 1월 5일 출생한 왕자 수담(壽聃)으로, 성화 20년(1484)에 10월 10일 자시에 태실을 조성하였다. 일제는 1928년(소화 3) 9월 11일 서삼릉으로 이건하였다. 김상호, 위의 논문 299-300쪽.(“「皇明成化十六年正月初五日生」「王子壽聃阿只氏胎成化二十年十月初十日子時藏」”)
일제는 민족의 혼을 말살시키는데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4. 경북선 철도의 부설에 의한 민족정기의 말살
조선은 1880년대 이후 서양 문물의 도입과 함께 철도에 관한 지식과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1889년에는 조선 정부에서 철도 부설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1894년 8월 20일에 일본은 한일잠정합동조관(韓日暫定合同條款) 한일잠정합동조관(韓日暫定合同條款) 제2항에, ‘경인철도와 경부철도는 조선정부에 재정적 여유가 없으니 일본 정부 또는 일본의 회사와 약정을 하고 시기를 보아 착공한다‘라고 체결하였다. 이에 한반도에서의 철도는, 일본이 이에 기초해서 철도부설권을 얻고, 서울 노량진과 인천 제물포 간의 철도를 1899년 9월 18일 처음으로 개통시켰다. 이것이 후일 경인선이다.
체결로 조선에서 실질적인 철도 부설권을 확보했다. 조선에서도 민족 자본으로 철도 사업을 할 필요성을 깨닫고 박기종 등이 대한철도회사를 세워 1899년 서울-의주 간 철도 부설 허가를 받기도 했으나, 국내 자금 부족과 일본의 방해 등으로 실현을 하지 못했다. 결국 1899년 일본이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의 제물포-노량진(지금의 영등포) 간 33.2km 구간을 개통했으며, 1905년 일본 제국주의가 대륙 침략의 목적으로 부설하였다. 경부선과 함께 평시에는 원료 공급, 공업 제품의 수송을 맡았으나, 전시에는 일본 군국주의의 대륙 침략 노선으로 이용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북선은 1919년 조선철도주식회사가 경상북도 내륙 지방의 개발을 위해 김천과 안동을 잇는 철도 노선으로서 계획되었다. 1921년에 착공하여 1931년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구간별로는 1924년 10월 1일 김천∼상주 사이 36㎞의 조선철도회사선이 개통된 것을 시작으로 하여, 같은 해 12월 25일에 상주∼점촌 사이 23.8㎞가 개통되었고, 이어 1928년 11월 1일에는 점촌∼예천 사이 25.5㎞가 완공되어 영업을 개시하였다.
3년 뒤인 1931년 10월 15일에는 예천∼안동 사이 32.8㎞가 개통되어 총 연장이 118.1㎞에 이르렀다. 1940년에 조선철도회사로부터 경북선 철도를 매수한 일본은 전쟁 말기의 군수 물자 조달에 쫓겨 1943년에서 1944년까지 점촌∼안동 사이의 58.3㎞를 철거하였다. 1962년 5월 10일 혁명정부에서는 점촌으로부터의 구 노선을 바꾸어 점촌․예천․영주를 이어 중앙선과 연결되는 복구공사를 실시하였다. 한국철도시설공단, 2005,『한국철도건설백년사』, 69-90쪽.
이 경북선의 구간을 확정하면서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반(古跡調査班)'에서 만든『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중요 문화재 및 문화유산을 의도적으로 훼손하여 민족정기를 말살하였다.
상주 구간에서 살펴보면, 김천 경계지 여남재는 백두대간의 산맥이므로 자연히 터널을 뚫어야 했다. 청리(옥산역)를 지나 상주시와 경계에 지천동과 양촌동에 이르면 솔밭이 있다. 이 솔밭은 2개 마을 공히 품종, 수령이 비슷하여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를 훼손시킬려면 신작로 개설과 철도부설이 제일감이다. 경북선은 상주역을 지나 공검면에 이르면 삼한시대내지 삼국시대에 축조되었다는 공검지(일명 공갈못)의 못둑에 부설하였다. 이곳을 지나면 이안면에 이르러 가장리에는 쾌재정 밑으로, 그리고 이안천을 건너 3.1만세운동을 한 소암리 마을 앞을 지나고, 함창(함창역)을 지나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고 주둔하고 있는 당나라군을 물리친 당교(일명 뗏다리)를 지나 문경시(점촌역)로 들어 간다.
이렇듯 일제는 주요 유적지와 문화재를 교묘하게 관통하여 훼손을 시켰다. 이러한 것이 민족혼의 말살정책이라 하겠다.
가) 지천솔밭과 양촌솔밭
상주시 신흥동 관내 지천동과 양촌동의 사이에는 갑장산(甲長山, 일명 연악산․淵嶽山, 805.7m)의 서편 줄기를 따라 내려노면 현재 지천동 입구에 ‘지천솔밭’이 있고 더 내려가면 양촌동의 ‘양촌솔밭’이 있다.
두 지역 소나무로 조성되어 있는데, 수령이나 조성 연대가 거의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지난 날 두 지역이 서로 한 곳으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하며, 일제에 의한 신작로 개설과 경북선 철도의 부설로 솔밭은 양분(兩分)이 되고 말았다. 이에 그 주변에는 서서히 파괴되어 오늘 날에는 농경지나 주택으로 개발되어 별개의 숲으로 있으나 실상은 이러하였다.
지천동의 입구는 1622년의 시기만 하더라도「연악 9곡(淵嶽九曲)」 남계(南溪) 강응철(康應哲)이 명명하였다. 탁영담(濯纓潭), 사군대(使君臺), 풍암(楓巖), 영귀정(詠歸亭), 동암(東巖), 추유암(䆋遊巖), 남암(南巖), 별암(鱉巖), 용추(龍湫) 등이다.[김정찬, 2009,「상주의 연악구곡 고찰」,『상주문화』(제19호)]
의 제1곡인 ‘탁영담(濯纓潭)’의 자리가 아니던가? 갓끈을 씻을 정도로 깨끗한 물이 고여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조선시대에는 소호천(蘇湖川)을 지나서 큰 길을 따라 양산(陽山)에 들어와 지천(智川)을 건너면 양산지원(陽山旨院)이 있었다. 여기서 동쪽방향으로 지천을 거슬러 연악산 방향으로 약 300여미터 정도 올라오면 오른쪽에는 소나무 숲이 있다. 이곳에서 지천을 건너게 되는데 병자년(1937년)과 최근의 매미 태풍 때 수해를 당하여 계곡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김정찬, 위의 글, 173쪽.
『상산지(商山誌)』에도 탁영담은, “연악동에 있다. 좌우에 구곡이 있다. 상류에는 폭포와 용추가 있는데 경치가 뛰어나다. 상주목사 조찬한(趙纘韓, 재임 1621∼1623)과 고을의 여러분들이 찾아 와서 시를 주고 받으며 놀았다.『연악승유록(淵岳勝遊錄)』1책이 있다.” 濯纓潭 在淵嶽洞中 左右有九曲 上流有瀑布龍湫 景致絶勝 牧使趙纘韓與鄕中諸名勝 來遊唱酬 有淵嶽勝遊錄一冊,『상산지』.
이곳 역시 깊은 역사가 이어져 오고 또한 이 곳에는 상산 최초의 문회록인『연악문화록(淵岳文會錄)』 연악문회는, 1622. 5. 25∼29일까지 4박 5일간 남계(南溪) 강응철(康應哲)이 목사 조찬한(趙纘韓, 재임 1621∼1623)과 상산 선비 15명을 연악서원으로 초청하여 개최한 시회(詩會)로, 이 때의 시집이다. 현존하는 상산 최초의 공동시집이다.
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지천동의 지천솔밭에는 아직까지 210주(株)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양촌동의 양촌솔밭에는 40여 주(株)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더 이상의 훼손은 없어야 하겠다.
나) 공갈못 제방
(1913년 지적원도, 신작로와 철도)
경북선은 상주 시가지를 지나 북으로 백원역을 거쳐 공검역이 이르면 지척(咫尺)에 공검지(恭儉池, 일명 공갈못, 지방기념물 제121호, 1997.9.29.)가 있다. 공검지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삼한시대 내지 삼국시대에 축조되었다고 알려져 온 고대 저수지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대저수지는 김제의 벽골제(碧骨堤), 제천의 의림지(義林池)와 더불어 3대 저수지로 일컬어 왔으며, 때로는 여기에 밀양 수산제(守山堤)를 더하여 4대 저수지로 불린다.
일제는 경북선 철도 노선을 공검지의 제방을 이용하여 철도를 부설한다면 축조비용의 절감과 공사기간의 단축은 물론 여기에 고대의 수리시설인 공검지의 역사까지 멸실을 시키려 하였다. 1966년도 지적도를 보면 공검지의 오른쪽 제방은 철도가 통과하고 또한 수구(水口)부분(?)을 관통함으로써 고대저수지로서의 규명이나 연구에 필요한 유적들을 훼손시켜 버렸다.
공검지는『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명종 25년(1195)에 사록(司錄) 최정빈(崔正份)이 구지(舊址)를 따라 제방을 쌓았다’ ‘又有大堤名曰恭儉 明宗二十五年 司錄 崔正份 因舊址而築之’『高麗史』
고 하였으니 그 이전에 축조가 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초축(初築)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수구를 비롯하여 주요 시설지를 훼손시키면 철도 선로를 변경하여 다른 곳에 다시 축조하지 않는 한 제방의 규모와 축조상황에 대한 실체를 규명하는 것은 실로 어렵다고 하겠다.
이렇게 일제는 철저하게 문화유산을 훼손시켜 민족문화를 말살하였다.
다) 쾌재정 밑의 경북선 철도
쾌재정(快哉亭)은 지방문화재자료 제581호(2011.1.3.)로 지정 관리하고 있는 문화재이다. 위치는 이안면 가장리 230-1번지에 있으며, 창건(創建)은 1508년(중종 3)에 난재(懶齋) 채수(蔡壽, 1449∼1515) 채수(蔡壽, 1449∼1515) : 조선 중기의 문신ㆍ중종반정공신.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난재(懶齋). 1469년(예종 1) 식년문과 장원 등 삼장연괴(三場連魁, 갑과⋅會試⋅殿試)하였다. 성균관대사성ㆍ호조참판 역임. 1506년 중종반정 때,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군되었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함창의 임호서원(臨湖書院)에 제향되었다.〈호(號)는 ‘나재(懶齋)’로 쓰고 ‘난재’로 읽음〉
선생이 중종반정 후 낙향하여 지은 정자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와가로 현재의 건물은 18세기 후반에 지어진 산정형(山頂形)의 정자이다.
이 정자는 채수 선생이 1511년(중종 6)『홍길동전』보다 100여 년이나 앞서 창작된 한글번역본 소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상주문화』제18호(2008년)에서 ‘최초의 한글소설’로 발표를 하였으나, 이하는 최초의 한글 번역본 소설로 표기한다.
인『설공찬전(薛公瓚傳)』 설공찬전(薛公瓚傳) :『중종실록』에서는 ‘설공찬전(薛公瓚傳)’, 어숙권(魚叔權)의『패관잡기』에서는 ‘설공찬환혼전(薛公瓚還魂傳)’으로 표기하였고, 국문본에서는 ‘설공찬이’로 표기하고 있다. 한문 원본은 1511년 9월에 그 내용이 불교의 윤회화복설을 담고 있어 백성을 미혹한다 하여 왕명으로 모조리 불태워진 이래 전하지 않는다. 그 국문필사본이 이문건(李文楗)의『묵재일기(默齋日記)』제3책의 이면에 「왕시전」⋅「왕시봉전」⋅「비군전」⋅「주생전」국문본 등 다른 고전소설과 함께 은밀히 적혀 있다가 1997년 서경대 이복규 교수가 일부분인 13쪽만 발견하여, 논문으로 발표하면서 학계에 소개되었다.
의 창작 공간이다. 이 소설은 당시의 훈구 대신들과 신진 사류들의 갈등이 본격화 되는 정치적 상황에서 저승을 다녀온 주인공 설공찬(薛公瓚)이 당시의 정치적 인물에 대한 염라대왕의 평(評)을 소설화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허균(許筠, 1569∼1618)이 지은『홍길동전(洪吉童傳)』보다 무려 100여 년이나 앞서서 창작된 소설이다. 본문은 한문으로 되어 있으나 이를 한글로 번역되어 백성들에게 널리 읽혀 지자 그 내용이 귀신을 다룬 윤회화복(輪迴禍福)으로 조선 최초의 금서(禁書)가 되어 모조리 회수, 소각하였다는 기록이 『중종실록』에 나온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작품 내용의 대부분이 주인공 공찬의 혼령이 전하는 저승 소식인데,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반역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 대목이 있다. 이는 연산군을 축출하고 집권한 중종정권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금서(禁書)가 된 근본 원인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저자는 폭군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보필하여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하는 것이 신하의 바른 도리라는 평소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이 지니는 국문학사적 가치는 지대하다. 이 작품은 김시습이 지은「금오신화」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소설로서,『금오신화』(1465∼1470)와 신광한이 지은『기재기이(企齋記異)』(1553) 사이의 공백을 메꾸어 주는 작품이다. 특히, 그 국문본은 한글로 표기된 최초의 소설(최초의 국문번역소설)로서, 이후 본격적인 국문소설(창작국문소설)이 출현하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이 작품은 조선 최초의 금서로 규정되어 탄압받았을 만큼, 각지 각층의 독자에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인기를 끌어 조정에서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소설로는 유일하게『조선왕조실록』에도 올랐으니, 소설의 대중화를 이룬 첫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쾌재정은 최초의 국문본소설이 창작된 공간이다. 상주는 이것으로도 문학의 고장이라 할 수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상주 문학과 선비 정신의 얼이 담긴 이곳은 그 이후로는 자연적으로 문학과 학문의 장소가 되어 왔다. 실제로 필자도 1960년대 초에 초등학교 1학년 2학기를 이곳에서 배웠으니 강학의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훌륭한 곳을 일제가 그냥 놔 두지 않으리라는 것은 지레 짐작이 가는 일, 쾌재정 밑으로 경북선 철도를 놓아 기차가 지나면서 소음으로 인한 강학이나 수업을 방해하는 아주 지능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겠다.
라) 이안면 소암리 앞의 경북선 철도
국권을 빼앗긴 우리 민족의 슬픔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한독립의 기회를 엿보며 살아온 우리 민족은 때를 맞아「3.1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1919년 3월 1일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여 거족적으로 일으킨 민족해방운동으로,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한다.
서울의 파고다공원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대체로 3월 20일경부터 4월 10일경까지 절정(絶頂)이었고, 이후에는 산발적이긴 하지만 5월말까지 계속되었다.
「3.1운동」이 일사분란하게 전국적으로 파급된 것은, 서울에서 지방의 유지들에게 비밀리에 발송한 선언서(宣言書)가 전달되면서, 지방 유지들이 앞장서서 시위를 일으켰고, 또한 각 지방에서 광무황제의 장례(葬禮)에 봉도단(奉悼團) 봉도단(奉悼團)이란, 임금의 장례 과정에서 대·소 상여를 인도할 조직이다. 여기에는 왕가봉도단, 상민(常民)봉도단 등으로 구성되었다.
으로 참여했다가 서울의 시위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느꼈던 열기(熱氣)가 지방에까지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김철수, 2016,『광복 70주년, 상주의 항일독립운동』, 상주문화원, 30쪽.
서울에는 13회, 해주⋅개성⋅진주⋅함흥 등지에는 각 7회의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김희진, 2006,『영양의 독립운동사』, 영양문화원.(재인용)
상주지역에서는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까지 6차례의 계획이 있었다. 그 중에서 5차례는 성공하였으나, 화서지역에서 준비했던 일은 사전에 기밀이 누설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상주에서 첫 번째 시위는 3월 23일 오후 5시 30분경에 한암회(韓岩回)⋅성해식(成海植) 등이 주도한 상주읍 장터에서 만세시위였고, 두 번째는 이튿날인 3월 24일 석성기(石成基)⋅강용석(姜龍錫) 등이 역시 상주 장터에서 주동이 되어 시위를 한 것이다. 세 번째는 채순만(蔡淳滿)⋅채세현(蔡世鉉) 등이 3월 29일 이안면 소암리(小岩里)에서 일으켰다. 네 번째는 4월 8일에 화북면 문장산에서 장암리 이장 이성범(李聖範)의 주도하에 일으났고, 다섯 번째는 4월 9일 화북면 운흥리에서 전성희(全聖熙)의 주도로 일어났다.
그리고 4월 13일에는 이면우(李冕雨)가 주도하여 화서면 신봉리에서 만세 시위를 준비했으나 사전에 발각도는 바람에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김철수, 2016, 위의 책, 46-47쪽.
이상에서 보듯이 이안면 소암리의 마을 앞으로 일제는 경북선을 부설하였다. 이러한 예는, 안동시 법흥동의 임청각(臨淸閣, 보물 제182호, 1963.1.21.)에 일제는 중앙선의 철길을 부설하여 집안의 정기를 어지럽히고 끊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임청각은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을 비롯하여, 선생의 아들⋅손자 등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하는 등 3대에 걸쳐서 독립운동을 한 산실이다. 원래 99칸이었으나 철도의 부설로 현재는 반토막인 50∼70여 칸만 남아 있다.
마을의 기운과 정기를 흩트리고 뭉개기 위한 고도의 전술이라 할 수 있다. 왜 굳이 소암리 마을의 바로 앞에 철도를 부설했는가 이다. 여기에는 미래에 언젠가 철도 교통사고를 예견하여 마을 주민들에게 영원토록 보복할려는 무서운 속셈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 당교
함창읍 윤직리와 문경시 모전동 사이에는 떼다리(또는 뗏다리)라고 하는 ‘당교(唐橋)’가 있다. 이곳은 신라가 실제적인 삼국통일의 근간을 이룬 곳으로, 조선 임진왜란때에는 군사 전략상 인후지지(咽喉之地)에 속하는 요충지이기도 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고기(新羅古傳)」에는 이러하다.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토벌하고 또 신라마저 치려고 머물러 있었다. 이때 김유신(金庾信)이 그 뜻을 알아채고 당나라 군사를 초대하여 독약을 먹여 죽이고는 모두 쓸어 묻었다. 지금 상주(尙州) 지경에 당교(唐橋)가 있는데 이것이 그들을 묻은 곳이다."(『당사(唐史)』를 상고하건대, 그 죽은 까닭은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만 했으니 무슨 까닭일까? 감추기 위한 것인가. 향전(鄕傳)이 근거가 없는 것인가. 만일 임술(壬戌, 662)년 고구려 싸움에 신라 사람이 정방(定方)의 군사를 죽였다면 그 후일(後日)인 총장(總章) 무진(戊辰, 668년)에 어찌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할 수가 있었겠는가. 이것으로 보면 향전(鄕傳)의 근거 없음을 알 수가 있다. 다만 무진(戊辰)에 고구려를 멸한 후에 당나라에 신하로서 섬기지 않고 만대로 그 땅을 소유(所有)한 일은 있었으나 소정방(蘇定方)·이적(李勣) 두 공(公)을 죽이기까지 한 일은 없었다) “又新羅古傳云 定方旣討麗濟二國 又謀伐新羅而留連 於是庾信知其謀饗唐兵鴆之皆死坑之 今尙州界有唐橋 是其坑地[按唐史不言其所以死 但書云卒何耶 爲復諱之耶 鄕諺之無據耶 若壬戌年 高麗之役 羅人殺定方之師 則後總章戊辰何有請兵滅高麗之事 以此知鄕傳無據 但戊辰滅麗之後有 不臣之事擅有其地 而已非至殺蘇李二公也”.『삼국유사』(제1권)「기이(奇異)」제1, 태종 춘추공조
라고 하였다. 소정방의 죽음에 대하여는 사서(史書)에는 기록이 없다.
그렇다면 왜 당나라 군사가 상주의 당교에 진을 쳤을까하는 것이다. 삼국시대 신라와 당나라와의 교역 통로는 육로로는 당항포였는데, 이 길은 반드시 상주를 거쳐가야 하는 길이다. 백제와 고구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조희열,「당교 전설, 그 진실을 살피다」, 상주문화원 금요사랑방(제98강) 4쪽.
‘당교’라는 이름은 대다수가 ‘다리(橋)’로 이해를 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등 사서(史書)에 ‘교량(橋梁)’ 조에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라 사료된다.
그러나 당교의 순 우리말 이름은 ‘떼다리’로서, 이는 경덕왕 16년(757)에 중국식 지명으로 바뀔 때 한자로 옮겨 적는 과정에서 ‘당교’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한 상론 조희열, 위의 글, 10쪽.
은 생략하기로 한다.
일제는 이러한 유구한 유적을 그냥 놔 둘리 만무하다. 이 유적지를 경북선과 신작로를 통과시켜 자연스럽게 이 지역을 훼손시켜 버렸다.
Ⅳ. 마무리
지금까지 일제가 강제로 조선을 병합하고 우리의 민족혼 말살의 한 단면으로 우리 지역의 문화재 훼손에 대해 살펴 보았다.
일제는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서, 민족혼․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조상과 선인들의 무능함과 악행을 들춰내어, 후손들에게 교육을 시키는데 주력하였다. 또한 신작로와 철도 부설을 교묘하게 노선을 결정함으로써 요즈음 표현으로 ‘아야’ 소리 한번 못하고 처참하게 훼손을 당하였다.
해방과 독립을 맞아 몇 번의 일제청산의 기회가 있었으나 인적청산에 머물렀다. 그렇지만 인적 청산에 대하여도 당사자가 법을 집행하는 처지에 있었으니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이 되었고, 중요한 역사의 청산은 허울 뿐이었다.
내년이면 상주(上州)란 이름을 얻은지 1494년이고, 지금의 상주(尙州)란 이름을 얻은 지도 1261년이 되며, 고려시대 전국의 8목(牧)으로 승격된 지 1000년이 되는 해이다.
이제부터라도 웅주거목(雄州巨牧)이었던 천년의 상주목에 대한 문화유산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겠다. 경북선 철도의 노선 변경은 차치하고라도 철거시킨 읍성과 문루(門樓)는 복원하여야 하겠다.
시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동참으로 지금부터 하나씩 추진하는데 우리 모두가 지혜를 모으자.
선배 제현의 질정을 바란다.
【참고문헌】
1.『상산지』
2.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한국철도시설공단, 2005,『한국철도건설백년사』
4. 이복규 편저, 1997,『최초의 국문본 소설, 설공찬전』. 시인사.
5. 김철수, 2016,『광복 70주년, 상주의 항일독립운동』, 상주문화원.
6. 상주박물관, 2009,『연악문회록』, 한일사.
7. 김지선, 2008,「조선총독부 문화재정책의 변화와 특성, -제도적 측면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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