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23일 금요사랑방 127강좌
- 국토산하(國土山河)의 대서사시(大敍事詩)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의 『지행록(地行錄)』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재수
1. 들머리
우연한 기회에 『남인 사림의 거장 식산 이만부』라는 책을 읽었다. 그 책에서 그동안 지극히 단편적으로 알았던 식산 선생에 대해 보다 가까이 다가 설 수 있었고, 이 책 한가운데 기록된 「국토산하의 대서사시 『지행록(地行錄)』을 읽으며 지행록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 국역된 『지행록』을 접하고, 다시 『상주한문학연구(尙州漢文學硏究)』 첫 자리에 기록된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의 지행록연구(地行錄硏究」를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중국에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의 산수유기(山水遊記)가 있었다면 이 땅에는 식산 이만부의 『지행록(地行錄)』이 있다. 조선 최대의 국내 산수유기, 단군을 비롯한 우리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 전국의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두루 유람한 백의민족(白衣民族) 국토산하의 대서사시, 식산 이만부의 『지행록(地行錄)』은 그 문체가 유려하고 내용이 철학적·문학적·역사적·민족적이며 예술적이어서 인문 지리서(人文地理書)라 할 수 있다.
누가 조국의 국토산하에 대하여 이렇게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유람했고, 누가 우리의 산하를 이렇게 아름답게 묘사했으며, 누가 우리 산하에 대하여 이렇게 민족적이었나? 이토록 가슴이 벅차고 혈맥이 동탕하는, 그러면서도 독자를 아름다움의 연못에 빠뜨려 놓는 조선 산수유기의 걸작 『지행록(地行錄)』은 식산선생 별집 권 2·3·4권에 수록되어 있으며, 본격적 산수기행문은 「지행원록(地行元錄)」 총 11록, 「지행부록」이 총 50제(題), 그리고 「총서(總序)」로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 져 총 267면(1면 200자) 5만 3천여 자로 이루어져 있다.
2.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의 생애(生涯)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1664 현종 5~1732 영조8) 선생은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중서(仲舒), 호는 식산(息山).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이관징(李觀徵), 아버지는 예조참판 이옥(李沃)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승지 이동규(李同揆)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가학으로 학문을 전수받았고, 뜻과 취향이 고상하였으며, 정주학(程朱學)에 심취하였다.
1678년(숙종 4) 15세 때 송시열(宋時烈)의 극형을 주장하다가 탁남(濁南)에게 몰려 북청(北靑)에 유배된 아버지를 따라가 그곳에서 여러 해 동안 시봉(侍奉)하며 학문을 닦았다. 그 뒤 아버지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왔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오직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선생은 누대(累代)를 서울에서 살았으나 영남의 학자들과 친분이 있는 관계로 상주로 이거(移居)하여 후진 양성과 풍속교화에 힘쓰며 저술활동을 하였다. 1729년(영조 5) 학행(學行)으로 장릉참봉(長陵參奉)과 빙고별제(氷庫別提)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선생은 평소에 주염계(周濂溪)·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장횡거(張橫渠)·주자(朱子) 등 5현(賢)의 진상(眞像)을 벽에 걸고 받들어 존경하였으며, 이황(李滉)을 정주학의 적전(嫡傳)으로 존숭하였다. 따라서 성리학적인 견해도 주리적(主理的)인 경향을 보인다.
선생의 넓은 학식은 그 저술의 많은 양(量)과 그 내용의 다양함에도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문집 38권 이외에도 수사본(手寫本)을 합치면 140여권을 넘는다고 하며, 그 내용도 성리학(性理學)을 위주로 실학(實學), 문학(文學), 어학(語學), 서화론(書畵論), 악률론(樂律論), 지리학(地理學), 역사(歷史) 등 실로 다방면에 이르는 선생의 관심과 탐구를 과시(誇示)하고 있다.
만년에는 역학(易學)에 관해서도 깊이 연구하였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저서로 문집인 『식산문집(息山文集)』 20책 외에 『역통(易統)』 3권, 『대상편람(大象便覽)』 1권, 『사서강목(四書講目)』 4권, 『도동편(道東編)』 9권, 『노여론(魯餘論)』 1권 등이 있다.
당시 조선조 후기의 학문적 풍토는 주자학(朱子學)이 진리탐구에 진솔(眞率)하고 순수하던 기백(氣魄)과 정열은 찾을 수 없고, 그 전통은 점차 교조화(敎條化), 화석화(化石化) 되면서 한쪽으로는 각 지방화 된 정치세력의 이해와 유착(癒着)되는 양상(樣相)을 두드러지게 드러나게 되었다. 각 학파(學派)의 승계자들은 그 파조(派祖)들의 편언척구(片言隻句: 한쪽 말의 몇 구절)만 굳게 지킬 뿐 그 자유무애(自由無碍: 자유로워 막히거나 거칠 것이 없음)하던 연학정신(硏學精神: 학문을 갈고 닦는 정신)은 아랑 곳 없이 오로지 당동벌이(黨同伐異: 하는 일의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고 뜻이 같은 사람끼리는 한패가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배척 함)만 일삼는 거세개취(擧世皆醉)의 와중에 선생은 처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광란(狂瀾)에 휩쓸리지 않는 방법은 소극적으로는 투쟁의 무대인 벼슬자리를 가급적 멀리하는 것이요, 둘째는 당파에 열중하지 않고 학문을 좋아하는 이들과 교유(交遊)하는 일이요, 셋째, 학문의 넓은 분야를 섭렵(涉獵)하여 자신의 학문을 편견과 독선으로부터 구해야 하며, 넷째는 학문이 한갓 관념의 유희(遊戱)에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항상 현실상(現實狀)을 알아보며 그 진리성(眞理性)을 다듬어야 하는 일이다.
이에 선생은 오직 처사 신분으로 충족하였고, 당색을 가리지 않고 널리 교우를 가짐으로 인해 오히려 속 좁은 당파들에게는 빈축을 산바 있다. 그러면서도 도탄(塗炭)에 빠진 민생을 외면한 채 사사로운 명분과 이익을 위하여 허약한 논리(論理)에 몰두하는 당시 세파에 반발(反撥)하여 고고(孤高: 홀로 깨끗하고 우뚝하다)하게 학문의 실천적 연구에 침잠(沈潛)하였던 것이니 선생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에 바탕을 두어 진리를 탐구함)의 정신이 가장 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문집 별집 속에 있는 『지행록(地行錄)』이다.
그의 집안은 가까운 친척만하더라도 대과 급제자가 19명, 그 외 급제자가 50여명에 달했다. 그의 가계는 근기남인(近畿南人)의 명문이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지봉芝峰) 이수광(李睟光)의 증손녀였으니 식산은 이수광의 외손(外孫)이 되는 셈이다.
그는 성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피부가 빙설같이 희고 눈은 별처럼 초롱초롱하였다. 성장하면서도 뜻과 진취적 기상이 굳건하고 정결하였고, 행동거지는 단아하여 사람들은 그가 비범한 인물이 될 줄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식산이 7~8세쯤 되었을 때 집안 어른들이 장래의 뜻을 묻자 선생은 정주의 학문, 즉 성리학을 배우기 원한다고 하였다. 벼슬을 이야기 하지 않고 성리학을 이야기한 것은 특별한 대답으로 이것은 식산이 정주의 학문에 정통하여 큰 학자가 될 것을 예고하는 언급이다.
또 일설에는 식산이 열 살 때쯤 조부를 따라 경상도에 왔다가 하양(河陽) 향교 대성전(大成殿)의 현판을 썼다고 전하여 어릴 때부터 서예에 능했으며 타고난 재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식산의 가문은 당파싸움에 연루되고 그의 부친 이옥(李沃)은 청남파(淸南派)에 속하여 송시열의 극형을 주장하다가 숙종의 외척이었던 김석주의 모함을 받아 평안북도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이때가 숙종 5년 (1678년), 그의 나이 15세 때이다. 이로부터 12년간을 북청·회령·곡성·정주·가산 등으로 옮겨가면서 유배생활을 했다.
식산은 부친의 귀양지를 직접 따라가 아버지를 모시면서 학문에 몰두하였으며, 이때부터 산행이 시작되어 국토의 서북지방을 모두 답보하였다.
숙종시대에 치열하게 전개되는 당파싸움, 그 이후 남인에게 불어 닥친 잔인한 상황을 직접 목도한 그는 누구보다도 당쟁의 아픔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 시기 가학을 통해 주자학의 기초를 갖추었으며 인생의 가치관이 성립된 시기였다.
숙종 15년(1690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탈환하자 선생에게도 새로운 삶과 희망이 싹텄다. 부친도 유배지에서 돌아온 후 조정에 복직되었으나 식산은 과거를 통한 관료의 길을 포기하였다. 식산은 25세 되던 해에 부친에게 과거를 포기하는 글을 직접 올려 집안으로부터 허락받은 후, 관계의 진출을 단념한 채 어릴 때부터 꿈꿔온 성리학과 저술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의 나이 34세 때에 상주에 있는 외답 노곡(논실)의 식산(息山) 아래 터를 잡고 이거하였다. 식산(息山)이란 호는 바로 이 산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리고 상주에 거주한 지 일 년 후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36세에 다시 상주 노곡으로 돌아와 천운재(天雲齋)를 짓고 제생들과 강학하고 부로들과 여씨향약을 행하였다. 그의 나이 43세에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학술로 벼슬에 천거하였지만 사퇴하였고, 45세에 우리 도학의 전 과정을 서술한 회심의 문제작 『도동록(道東錄)』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영남의 사림들과 갈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49세에 천운재가 화마(火魔)로 소실되자 그 북쪽에 다시 천운당을 짓고 유람을 떠난다. 식산은 괴로운 심정을 해소하고 학문의 새로운 전환을 위하여 지리산·가야산·청량산·금강산·속리산 등을 유람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이것이 『지행록(地行錄)』이라는 조선 최고의 기행문을 쓰기시작한 계기가 된 것이다.
3. 『지행록(地行錄)』 저술(著述) 년도와 목적(目的)
식산(息山)은 어려서는 부친 이옥(李沃)의 유배지를 따라 부친을 모시기 위해 먼 곳까지 유람할 수 있었는데, 만년에는 더욱 산수를 좋아하여 64세까지도 산수를 유람함으로 국내는 거의 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행록(地行錄)』은 식산선생 별집 권 2·3·4권에 수록되었는데 저자가 평생 답사한 명승고적에서 견문(見聞)한 바를 267면(1면 200자) 5만 3천여 자에 담았다.
『지행록(地行錄)』(1)에는
“식산(息山) 늙은이는 젊어서나 나이 들어서 멀리 서남북의 절역(絶域)을 남김없이 유람하 였다. 그러나 부질없이 그곳 산천과 도읍(都邑)의 크고 작음과 멀고 가까운 길목을 어디로 해서 가야하는가 하는 것만 기억하고 있으니 그것이 무슨 이야깃거리가 되겠는가. 만년에 와서 더욱 산과 물가에 노닒을 즐겨 전에 청량산(淸凉山)과 두류산(頭流山)을 유람한데 이 어 그 전에는 봉래산(蓬萊山)에 들어갔고 또 다음 해에는 덕유산(德裕山)을 유람하였고, 또 다음 해에는 속리산(俗離山)을 유람하였다. 스스로 생각해 보니 가슴 속에 남아있던 것이 텅 비어 오는 것 같아 나는 참으로 즐거웠다. 지금은 더욱 늙어서 베개에 엎드려 내가 유 람하며 완상(玩賞)한 곳과 내가 읊고 기술(記述)한 바를 찾아보니 혹은 남아 있기도 하고 혹은 없어지기도 하였으니 이것 역시 많은 시일(時日) 탓이리라. 이에 그 가운데 하나 둘 을 취해서 적어 보존(保存)하고 때때로 끄집어내어 이를 즐기며 스스로 위안(慰安)으로 삼 고자 한다.
고 하였고.
『지행부록(地行附錄)』은
“6년(1730년 67세) 가을 병으로 누워 생각하니 몸이 쇠약하여 다시는 먼 곳을 다닐 수 없 을 것 같아 소일(少日)에 겪고 지내온 것을 대략 차례지어 『지행록』 뒤에다 붙인다.”(地行 附錄小序)
라고 저술의 동기(動機)와 목적(目的)을 밝혔는데, 유상(遊賞)하며 우영(寓詠) 기술한 것을 잃은 것도 있어 지지(地誌)를 보며 기억을 되살려 썼기에 원록(元錄)보다는 훨씬 간략하다. 그러나 견문한 내용은 삼각산봉에서 백두산까지 총 50제로 이들 명산에 대해 산의 위치, 이정(里程), 명칭, 산천형세, 물산, 사찰, 서원, 누정, 관련인물, 전설, 유물, 고적 등을 채록하여 산의 특징을 부각시켰으며 지지(地誌)를 작성한다는 의도가 두드러진다.
『지행록(地行錄)』 완성은 별세 2년 전인 1730년(식산 67세) 가을이며,
“때로 꺼내어 스스로 힘입으려 한다.”(지행록 소서(小序)라고 밝혀 놓았다.
4. 『지행록(地行錄)』의 체제(體制)
『지행록地行錄』은 별집(別集) 권2·3·4에 수록되었는데 지행원록·지행부록·총서로 3대분하였고, 원록은 지행록 11 ‘속리산기’ 등 총 11錄으로 기문(記文) 24제(題), 시(詩) 173수, 설(說)2제, 錄(古事 포함) 2제 등 국내는 거의 편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附錄은 ‘소일경력견문(少日經歷見聞)한 8도의 명승고적을 삼각산에서 백두산까지 총 49제로 약기(略記)하고, 끝으로 『지행록 총서』를 두었다. 이로보아 조선 8도의 전역에 걸친 명승고적을 집대성하여 놓은 국내 기행록으로는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선생의 국토기행을 총결한 총서(總序)를 보면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나는 젊었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따라 서쪽으로는 왕씨(王氏)들의 예전 도읍지인 개성 과 기자의 옛터인 평양을 지나 살수(薩水)를 건너 비류(沸流)가에 서서 멀리 태백산(太白山 -묘향산(妙香山)의 높고 거룩한 모습을 바라보았고 저수(沮水)를 사이에 두고 그 전편의 요 동(遼東)의 들판과 고구려, 발해의 옛 영역(領域)을 바라보았다.···중략···이상에서 이미 우리 나라의 지세의 험이(險易)와 산청의 풍기(風氣)·물산·풍속들을 보았다. 참으로 “천리에 바람 이 같지 아니하고, 백리에 민속(民俗)이 같지 않다”는 옛말이 거짓이 아니다.
그동안 내가 산마루 끝까지 오른 산으로는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가야산(伽倻山)· 덕유산(德裕山)·속리산(俗離山)·청량산(淸凉山)·태백산(太白山)·소백산(小白山)·사불산(四佛 山)·주흘산(主屹山)·희양산(曦暘山)·청화산(靑華山)·백화산(白華山)·삼각산(三角山)·도봉산(道 峰山)·오관산(五冠山) 등의 여러 산이고 그동안 내가 유영(遊泳)한 곳으로는 귀도(龜島)의 이담(二潭)과 소양강(昭陽江)·용진(龍津)·한강의 동족 한강의 서쪽 양화진(楊花津)·조강(組 江)·적벽강(赤璧江)·임진강(臨津江)·징파담(澄波潭)·대동강(大同江)·청천강(淸川江)·비류수(沸 流水)·대정강(大定江)·금강(錦江)·낙동강(洛東江)·성천강(成川江)·비류강(沸留江)·허천강(虛川 江)·압록강(鴨綠江)·두만강(豆滿江) 등의 여러 물가였다. 그동안 내가 지나 온 험한 고개로 는 조령(鳥嶺)·죽령(竹嶺)의 두 고개와 추풍령(秋風嶺)· 육십령(六十嶺)·차령(車嶺)·주파령(注 波嶺)·단발령(單發嶺)·철령(鐵嶺)·관령(關嶺)·추지령(鰍池嶺)·분수령(分水嶺)·함관령(咸關嶺)·이 마령(二磨嶺)·후치령(厚峙嶺)·응덕령(鷹德嶺)·마본령(馬本嶺) 등의 여러 고개였다.
그간 내가 기대고 의지하며 시를 지은 명소로는 동호루(東湖樓)·서호루(西湖樓)·청심루(淸 心樓)·한벽루(寒碧樓)·문소루(聞韶樓)·소양루(昭陽樓)·영호루(映湖樓)·촉석루(矗石樓)·영남루 (嶺南樓)·광한루(廣寒樓)·공북루(拱北樓)·월파정(月波亭)·연광정(練光亭)·부벽루(浮碧樓)·백상 루(百祥樓)·강선루(降仙樓)·통군정(統軍亭)·낙민씨정(樂民氏亭)·관북정(冠北亭)·수강루(受降樓) 등의 여러 누각(樓閣)이다.
또 그동안 내가 찾은 그윽한 산곡(山谷)에서 본 사찰로는 통도사(通度寺)·대둔사(大屯寺)· 기재사(祇材寺)·불국사(佛國寺)·해인사(海印寺)·삼장사(三藏寺)·영각사(靈覺寺)·송광사(松廣 寺)·대흥사(大興寺)·부석사(浮石寺)·양산사(陽山寺)·법주사(法住寺)·장안사(長安寺)·표훈사(表 訓寺)·정양사(正陽寺)·유점사(楡岾寺)·석왕사(釋王寺)·화장사(華藏寺) 등 여러 사찰이다.
또 그동안 내가 본 바다로는 남쪽으로 모라영주(毛羅瀛州 제주도)·의 바다와 일본의 대마 도를 바라보았고, 동쪽으로는 이견대(利見臺)·시중대(侍中臺)에 가 보았으며 또 울릉도와 우산(于山)을 바라보았으며 서쪽으로는 산에 올라 북해(北海)의 파도를 바라 보았는데 그 밖은 전횡(田橫)의 섬이었다.
또한 그 경내를 지나면서도 높은 산의 지맥(支脈)에 올라 그 푸르름을 휘어잡아 보며 그 정상을 다 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마침내 지행록(地行錄)의 원록(元錄 )과 부록(附錄), 총서(總叙) 등을 지어 누워서 유람할 수 있는 자료로 삼는 바이다.
라고 밝혀 그의 국토 순례가 어디에서 어디까지 미치었는지를 밝혀 놓았다.
다음은 『지행록(地行錄)』의 체제를 살피기 위해 그 내역을 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문집권수 | 지행록 목차 | 지행 내역 |
息山先生文集別集卷 2 | 지행록 1 | *小序 *四郡山水記(淸風,丹陽,永春,堤川) *詩放舟早遁江和韻及五首 |
지행록 2 | *가야산기, 청량산기 *詩辭巡相舅氏及十首 | |
지행록 3 | *疎野洞記,多樂洞記,龍遊洞記,白雲洞記, 仙遊洞記 *시疎野洞及六首 | |
지행록 4 | *東遊(안동-청량산) *淸凉山記 *詩東遊及二十六首 | |
지행록 5 | *南遊(금릉-지리산) *詩將遠遊大雨雪述感及八首 | |
息山先生文集別集卷 3 | 지행록 6 | *關東 *金剛山記, 金剛山總記 *又金剛山記後 *跋(李萬維書) *詩離家及四十九首 |
지행록 7 | *智異古事附小序, 三藏洞記, 月影臺記, 黃溪瀑布記, 北歸記 *詩德川轉上矗石樓及三首 | |
지행록 8 | *德裕山記, 猿鶴洞記, 花林洞記, 尋眞洞記 *詩偶吟及十八首 | |
지행록 9 | *盤龜記附跋 *詩遊盤龜及二十首 | |
息山先生文集別集卷 4 | 지행록 10 | *東都雜錄附小序 *詩利見臺及十首 |
| 지행록 11 | *秋蘇說, 仙飛花說, *冷泉記, 白華山記, 俗離山記, 少遊記 *詩吾道峙口占及二十三首 |
지행 附錄 | *小序 *三角道峰, 冠嶽, 彌智, 天摩聖居, 五冠, 紺岳, 寶蓋, 雉嶽, 淸平, 寒溪, 太陰, 雪嶽, 五臺 東界, 太白, 小白, 日月, 氷山, 四佛, 主屹, 內迎 公山, 金烏, 琵瑟, 雲門, 神魚, 七點, 金井, 錦山 無等, 曺溪, 天冠, 月出, 錦城, 邊山, 裳山, 秋月 高德, 漢拏, 鷄龍, 扶蘇, 摩尼, 葾秀, 九月, 首陽 錦繡, 妙香, 紇骨, 七寶, 白頭 | |
총서(總序) | 지행록총결(東國史·與中國異俗·王城·地勢險易·山川風氣·物産·謠俗·江·山·嶺·樓亭·寺刹·島서 등) | |
계(計) | 267면 200자 5만3천여자 | *序跋 7편, 記 24편, 說 2편, 錄 55편, 詩 178수 |
* 錄은 詩·序跋·說을 제외한 나머지를 總稱함.
5. 『지행록(地行錄)』의 특징
『지행록(地行錄)』은 크게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가. 『지행록(地行錄)』은 인문지리서(人文地理書)이다.
『지행록(地行錄)』을 읽노라면 매 편마다 마치 오늘날 네비게이션을 켜고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듯 착각을 느끼게 할 만큼 지리적 위치, 장소의 이동장면이 눈에 선하게 들어온다. 그리고 매 편마다 그 문체가 유려하고 내용이 철학적·문학적·역사적·민족적·예술적인 인문 지리서(人文地理書)임을 알 수 있다.
인문지리(人文地理)란 인간이 역사 속에서 자연이라는 대상을 이용한 결과의 총체이며, 인문 지리학(人文地理學)이란 인구, 민족, 도시, 농업, 공업, 상업, 취락, 국가, 경제, 풍속, 교통 등 인간 활동에 의한 모든 현상을 이들의 지리적 분포, 지리적 구조, 환경과 관련시켜 연구하는 지리학의 한 분야이고 인문지리서(人文地理書)란 이러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책을 말하다.
식산이 살던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은 자연환경이 인간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중요시하고 환경의 차이가 가져온 사회발전의 선후 관계를 이해하려는 입장에서 지리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였다.
식산의 「지행원록(地行元錄)」은 국내의 명승고적을 답사하며 강계(彊界)·도리(道里)·경관(景觀)·지세(地勢)·지명유래(地名由來)·물산(物産)·풍속(風俗)·관련인물(關聯人物)·원사(院寺)·누정(樓亭)·고적(古蹟)·전설(傳說) 등 견문한 바를 녹(錄)·기(記)·설(設)·시(詩) 등의 문체를 원용해 기행문으로 작성하였다.
선생은 국토를 역사·문화의 현장으로 보고 실사구시적 사물관(實事求是的事物觀)으로 실증적 고증(實證的考證)을 하거나 이성적 비판(理性的批判)을 가해 동국사관(東國史觀)에 입각(立脚)한 지리지(地理誌)를 만든 점이다. 한 예로 지리고사(智異古事)를 작성하면서
“지지(地誌) 및 옛 사람의 기사를 읽거나 방인(邦人: 자기나라 사람)의 말을 채집(採集)하여 지리고사(智異古事)를 짓는다.”(지행록 7)
라 하고, 산명유래(山名由來)·산천형세(山川形勢)·유물(遺物)·등산(登山)을 문화유산의 현장으로 부각시켰다.
이 지행록이 인문지리서(人文地理書)로 각광받는 택리지(擇里志)보다 21년 전에 제작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나. 역사적(歷史的) 사실에 대한 실증적(實證的) 고증(考證)의 자료이다.
실증적 고증태도가 두드러진 예를 보면 지행록에는 명칭(名稱)에 대한 고증이나 사찰의 건립연대 고증 등이 많으며, 우리 것에 대한 자부와 애호정신을 피력한 대문이 많다.
“중국 사신 정동(鄭同)이 이곳에 이르러 유람하였는데 한 두목이(頭目)이 있어 맹세하여, ‘이곳은 진짜 불경(佛境)이다. 원컨대, 죽어 조선인이 되어 오래 불세계(佛世界)를 보련다’ 하고 드디어 물에 빠져 죽었다. 근년에도 어느 재상 이모(李某)가 이곳에 이르러 미끄러져 못에 빠졌는데 시종자와 여러 중이 구했다고 한다.”
이는 금강산기 중 벽하담(碧霞潭)의 절경을 고기(古記)의 견문으로 고증한 것이다. 이모(李某)가 경치에 넋을 잃고 못에 빠졌다는 얘기는 벽하담(碧霞潭) 부근의 절승(絶勝)함을 말 밖의 말로 확신시키고 있다.
또 「소야동기(疎冶洞記)」에서도
“이 골짜기를 속칭 쇠약(衰弱)이라고도 하는데, 내 생각에는 골짜기 위에 철야(鐵冶 쇠붙 이를 녹이는 곳)가 있어 쇠(衰)는 우리 음이며, 약(弱)이라 칭하는 것은 야(冶)의 잘못 이리 라.”
고하여 음운(音韻)에 대한 인식이 남다름을 보여주는 예가된다. 이는 식산이 각 국어에 대한 음운지식이 박식했고, 한글에 대해서는 관심이 높았음을 알게 한다.
식산은 「동도잡록(東道雜錄)」을 엮으면서
“문헌으로 신라의 역사를 고증(考證)할 길이 없고 사가(史家)가 기록한 것도 민간에 떠돌 아 다니는 속화(俗話)들이 많아 있는데 기괴(奇怪)하고 허망(虛妄)하며 환상적(幻想的)인 거 짓이 많아 그것으로는 역사를 짐작할 수 없다. ....(중략)... 내가 직접 견문한 한두 가지를 기록해 후세에 고사(古史)에 해박한 사람을 만나 고증을 기다리고자 한다.”
라고 하여 혁거세 출신(赫居世出身)·국호 변천(國號變遷)·육부 오가야 위치(六部五伽倻位置)·도성(都城)·사악(四嶽)·산천(山川)·감여설(堪輿說)·능묘(陵墓)·망부석(望夫石)·불교전래급사찰(佛敎傳來及寺刹)·성곽(城郭)·유적보존(遺跡保存)·변정전설(辯井田說)·조제(鳥祭)·범종(梵鐘)·만파식저(萬波息저)·금보(琴譜)·처용무(處容舞)·최고운사(崔孤雲事) 등을 채록했다. 이 또한 경주를 역사의 현장으로 보고 동국사관(東國史觀)을 지닌 저자가 실증적(實證的) 고증(考證)을 하거나 이성적 비판도 함으로서 내 것에 대한 바른 인식과 보존·발굴·계승을 꾀하였다. 또한 사기(史記)의 기록과 민간전설에 대하여 그 시비를 분별하려고 애쓰고 있다. 예를 들면
“경주부(慶州府) 성(城) 남문 밖에 흙산(土阜) 수십여 개가 있는데 설명하는 사람이 말하기 를 “월성의 지형국세가 비봉형(飛鳳形 )이라 이 흙언덕을 만들어 봉(鳳)의 알 형상을 만들 어 지기(地氣)를 눌러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거의 신빙성 (信憑性)이 없는 말인 것 같다. 신라의 왕릉 가운데 기록할 만한 것은 모두가 평야에 있고, 또 바다에 장사한 것도 있으니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 신라 때는 아직 동방에 미치지 못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어떻게 지기(地氣)를 누른다는 말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물 며 죽엽릉(竹葉陵)이란 능이 그 사이에 섞여 있어 다른 흙 언덕과 다를 바 없으니 이 흙 언덕들은 아마도 여러 왕과 왕비의 무덤임이 틀림없다.
고 하여 현 경주 황남동 고분군(古墳群)이 풍수설(風水說)과는 무관한 것임을 실증적으로 고증하고 있다. 이런 기록 자세는 근거 없는 판단이나 미루어 판단하는 잘못을 배제(排除)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알리려는 그의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 실심사상(實心思想)의 발로라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식산은 어느 특정된 사실에 대한 비판·고증이 아니라 그냥 넘기기 쉬운 시정(市井)의 일상사에도 관심을 보여 명쾌히 그 허실(虛實)을 분변(分辨)하고 오류를 실증적으로 교정하려 한 것은 바른 역사의식의 정립을 위한 것이기도 하며, 독자에게 주는 명석한 논리성·고증성은 식산의 작가적 태도에 개성적인 점을 높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전통의식은 이닉(李溺)·류득공(柳得恭)·정약용(丁若鏞)·안정복(安鼎福) 등을 비롯한 후대의 역사지리학자나 김정희(金正喜)와 같은 고증학자들에게 계승되어 갔음도 특기할 만하다.
다. 나라사랑을 토로한 국토 기행록(國土紀行錄)이다.
선생은 총서(總序)에도 밝힌바와 같이
“내가 소년 시에 선대부(先代夫)를 따라 서(西)로 나아가 왕씨 구도(王氏舊都 개성(開城) 와 단군 기자(檀君箕子)의 옛터(平壤)를 지나 살수(薩水 청천강(淸川江)을 건넜고 비류강 (沸流江)에 임해서는 태백(太白 妙香山)의 숭고함을 바라보았으며 패수(浿水 대동강(大同 江)를 사이하고는 요동(遼東) 벌과 고구려 발해(渤海)의 옛 땅을 보았다. 북으로 나아가 겹 겹한 산맥을 밟아 불함(不咸 백두산(白頭山)의 밑에 이르러 숙신(肅愼) 읍루(挹婁 둘 다 고 조선 시대 만주지방에 있었던 부족)의 땅을 보고 야인(野人) 여진(女眞)의 경계에서 그치었 으며, 또 남으로 유람하여서는 마한(馬韓) 백제(百濟)의 땅을 지나 남명(南溟)에 임해 영주 (瀛洲 제주(濟州)를 바라보았다. 다시 동남으로 이가(移家)해서는 가야산(伽倻山)을 찾고 방 장산(方丈山 지리산(智異山)에 들어 호남과 영남의 경계를 다 살폈으며 또 동유(東遊)하여 서는 봉래산(蓬萊山 금강산(金剛山)을 찾고 예맥(穢貊)의 땅을 순력하여 해 돋는 바다의 괴 이함을 보았고, 태백(太白) 소백산맥(小白山脈)을 달려 청량산(淸凉山) 밑에서는 선민(先民) 의 예악(禮樂)이 끼친 교화지(敎化地)를 찾았으며, 신라 고도에서 이적(異蹟)을 보고 해안에 서 일본의 섬을 바라보아 역내(域內)는 두루 미치었다.(總序)”
총서(總序)는 지행록을 총결하였는데 특기할 사항은 우리 국맥(國脈)의 정통성을 기자조선(箕子朝鮮)·위만조선(衛滿朝鮮)·삼한(三韓)·삼국(三國) 등에서 찾으려 한 것을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부정하고 단군조선(檀君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삼한(三韓)·삼국(三國)·고려(高麗)·조선(朝鮮)에서 찾으려 한 점과 우리의 말소리(聲音)·언어(言語)·백성들이 즐겨 입는 의복(衣服)·기호·욕망(慾望)등은 중국과 다름을 분명히 밝힌 점이다. 이 같은 사관(史觀)이나 민족관(民族觀)은 본 지행록 저술의 궁극적 목적이 어디 있었던가를 단적으로 알려준 것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조국강산에 대한 절절한 국토애와 그 무대 위에 전개하였던 민족의 활동상 즉, 국사(國史)에 대한 사랑이 스며있다. 선생의 이러한 업적은 아마도 선생과 교분이 있던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도 선구적 영향을 끼쳤을 것이거니와 그러한 민족주의 의식의 발로(發露)는 이 밖에도 선생의 저술의 도처에 발견되며, 특히 노론파(老論派)들과의 만동사의(萬東祠議)에서는 생각하면 이와 같은 민족 자각의식(自覺意識)의 표출(表出)은 널리 보아서 걸핏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치우는 사대주의적(事大主義的) 정신풍토 아래서는 자못 결연하고 용기있는 자세였던 것이다.
한갓 현실도피의 도학적 의식구조로서는 흉내 낼 수 없는 구국제세(救國濟世)의 사명감(使命感)에 의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술회로 보아도 식산의 국토순력은 그의 선배로서 300년 전 옛날(1660년대) 남원 구례 이서와 금강산 이북을 제외한 전국을 편력한 사례는 유무후무(有無後無)한 일(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이라고 본 정시한이나, 후배로서 “전라도와 평안도는 내가 보지 못하였다.”라고 한 이중환(李重煥)보다도 훨씬 전국적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지행록(地行錄)』은 단순한 유상록(遊賞錄)이 아니며 제목 자체도 어느 특정 지역만 기행(紀行)한 기록이 아니라 국내의 전역을 답사한 국토기행록(國土紀行錄)이란 함축성을 내포하고 있다.
라. 한국 기행문학(紀行文學)의 영역(領域)을 넓힌 걸작(傑作)이다.
『지행록(地行錄)』은 하나의 인문지리서(人文地理書)인 동시에 시(詩)와 기행문학(紀行文學)집대성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가사(歌辭)라는 형식을 빌려 쓴 관동별곡(關東別曲)이 기행문학(紀行文學)의 별미라 한다면 인문지리서(人文地理書)의 형식을 빌려 쓴 기행문학(紀行文學)의 백미(百味)는 가히 『지행록(地行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행록(地行錄)』을 읽노라면 문장(文章)의 곳곳에 나타나는 문학적 표현은 읽는 이의 마음을 극히 자연스럽게 자연 속으로 몰입하게 한다.
“절의 서쪽을 나서면 골짜기로 들어서게 되는데 어지럽게 흩어진 바위들이 어떤 것은 파 리 하게 여위었고, 어떤 것은 우람하게 큰 것들이 기울어지고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위험 을 무릅쓰고 엇갈리는 아득한 산길을 피해가려고 산에 업히기도 하고 또 안기기도 하면서 개울을 벗어났다간 또 개울로 들어오기를 활의 사정거리(射程距離)로 쳐서 몇 번을 이어 쏘아야 할 거리를 가면 백운대(白雲臺)에 이르게 된다.(白雲臺記)
이처럼 『지행록(地行錄)』은 현상과 본체를 동시에 파악하려는 사물관(事物觀)을 지니고 국토의 아름다움을 주로 기(記)의 특성을 원용해 산수를 조물주의 생명 자체로 부각시킨 점이다. 시(詩)로 응축되고 극히 사실적인 묘사로 재현된 금강산·용유동·청량산 같은 명승의 미는 조물주의 의지가 숨 쉬고 있는 한 생명체의 빛깔이었다. 그 중에서도 금강산의 기문(記文)은 걸출한데 아우 이만유(李萬維)는 발(跋)에서
“옛 사람이 금강산을 기록한 자가 많으나 그 산수를 곡실(曲悉)하게 그 형태를 모상(摸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떠서 나타낸 것) 한 것이 읽는 이로 하여금 기쁘게도, 놀라게도, 근 심케도, 즐겁게도 하여 신귀(神鬼)의 변화나 음양(陰陽)의 여닫힘으로 만 이천 봉을 홀연 우리 곁으로 실어오듯 한 것은 옹(翁)의 이 록(錄)만한 것이 없으니 기이코 장할 진저.”(지 행록 6)
라 평하였다. 이 평이 과언이 아님을 알 수 있거니와 특히 금강산총기(金剛山總記)는 노정(路程: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거쳐 지나가는 길이나 과정)에 따른 미(美)의 발견기록이 아니라 현상과 본체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금강산(金剛山)이란 생명체와 만남으로 물(物)과 아(我)를 다 잊은 상태에서의 조감도(鳥瞰圖)이다.
종합하면 「지행원록(地行元錄」에 수록된 제 작품(諸作品)은 18세기 초엽 유례가 드문 전 국토 순력의 기행문으로 저자가 실심실학과 동국사관을 지니고 국토를 역사·문화·미의 현장으로 파악한 지리지적(地理誌的) 성격과 순 문예적(純文藝的) 성격을 띤 점에서 후대의 역사·인문지리학 내지 고증학의 문호를 열었다는 점과 특히 기(記)의 특성을 원용해 금강산기(金剛山記)·금강산총기(金剛山總記)·용유동기(龍遊洞記)·청량산기(淸凉山記) 등의 수작(秀作)들을 남겨 한국 기행문학의 영역을 넓힌 점을 들 수 있겠다.
마. 맑고 고아한 정감을 시로 표현한 기행문이다.
식산선생의 시는 약 700수나 된다.(『지행록(地行錄)』에 기록된 시는 모두178 수가 된다.) 그 시의 성격으로 보면 리듬으로 돋보이는 악부시(樂府詩: 漢詩의 한 형식)를 비롯한 고시가의 풍격, 단표누항의 유유자적하는 한가로운 생활을 읊은 자연의 풍격(風格) 우국애민의 선비의식을 볼 수 있는 시회고발, 그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읊은 일상의 미의식, 경치를 읊은 영롱한 정감, 농촌의 생활을 소재로 쓴 목가적인 전원 정취, 기행을 하면서 쓴 국토산하에 대한 애정, 학문과 관련된 깊은 철리, 민족의 역사를 노래한 자주적인 영사시(詠史詩), 그리고 경전시(經典詩) 등 식산 선생은 생애의 굽이굽이마다 천기가 자발한 다양한 시편을 남기고 있다.
선생의 시문(詩文)은 그 시어의 세련미와 고아하고 평담한 품격으로 조선의 문단을 감동시켰으며, 식산의 문장에는 글자마다 고담(高談)하고 청아한 음향이 영롱하게 매달려 있다. 식산은 실로 당대의 대 문호(文豪)였다.
식산은 남숙거(南叔擧)의 편지에 답장하면서
“문사로서 말하면 좌구명의 국어(國語)로부터 『전국책』의 장단서(長短書), 태사공의 『사기』, 반고의 한서(漢書)를 두루 읽었고, 굴원의 「이소」로부터 송옥의 ‘초사’를 두 루 셥렵 하였으며, 사마상여· 양웅·반악 등의 여러 걸작들을 다 읽었다. 한유나 유종원·구 양수·소식·소순·소철 등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글은 더욱 좋아하였다. 시에 있어서는 도연명(陶淵明)의 고시, 두보(杜甫)의 여러 시체들을 비롯하여 건안제자들, 그리고 당송의 이름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씹어서 그 아름다운 맛을 다 보고 스스로 유쾌하게 여긴 적은 있으나 모두다 외도일 뿐이었다.”
라고 하고 있다.
식산은 젊은 시절 중국의 유명 서적이나 문예작품들을 거의 섭렵(涉獵)하여 문학적 소양이 탄탄하였다.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가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 졌다. 식산은 훌륭한 문학가 인 것이 여기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그의 제자 노계원은 가장에서
“선생은 처음부터 문장을 하려는 뜻은 없었으나, 축적된 지식이 많아 박식하게 표현하여, 자연스럽게 ‘오~’, ‘아~’하는 소리가 우아하고 굳세며 심후하여 알맞게 한정하고 정도에 맞게 처리함이 연습치 아니 하였는데도 저절로 전칙을 이루었다. 더욱 사실적인 묘사를 잘 했고, 시 또한 성정에 근본 한 것이 많아, 왕왕 천기가 잘발하여, 세인의 부드럽고ㅗ 익숙 한 시구를 인용한 진부한 말은 없었다.”
라고 그의 시문에 대하여 평가하였다.
서악사(西岳寺)
안동의 서악사는 그 어느 해 지어졌나
반걸음 속세는 안개 속에 잠겼는데
선명한 들판 끝에는 외로운 새 한 마리
차가운 강 끝에는 저녁 구름이 붉에 물든다.
별채의 진흙상은 부처보다 높고
들 건너 영호루는 배처럼 떠있다.
멀리서 불어오는 시원한 강바람은
속세의 번거로움을 씻어가고
강을 가르는 한 곡조 피리소리
동쪽 언덕에 부서진다.
안동의 서악사를 답사하고 시를 지었다. 서악사의 뒤채에는 흙으로 만든 관왕상이 모셔져 있으며 그 상이 부처보다 높다고 했다. 식산은 서악사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의 시에는 한 편의 그림을 그린 듯한 아름다운 회화가 있으며 빛과 소리가 있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한 곡조 피리소리는 독자의 심금을 울려 시속에 빠뜨려 놓는다.안동의 서악사가 식산에 의해 다시 그려지고 있다.
물결 위로 배가 가로지른다(渡頭橫舟)
흰 물결 위로 가을이 맑게 건넌다.
사공은 배 젖는 일에 게으르다.
노를 거두어 쓸쓸한 물가에 놓으니
가을 풍경은 저절로 빈 배에 가득하도다.
하회의 가을 풍경을 시로 읊었다. 강촌의 가을 전경에 여백의 미가 드러난다. 번역을 하면서 원문으로 읽는 감동이 좀 감해질까 두려운 감이 있었다. 여기에 평을 붙이면 시가 더 오히려 손상될까 두렵다.
‘흰 물결 위로 가을이 맑게 건넌다.’에서 맑게라는 단어와 흰 물결이 주는 깨끗하고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가 물결 위를 건넌다는 의인법과 어울리며. ‘가을 풍경은 저절로 빈 배에 가득하도다.’ 에서 ‘빈 배’와 ‘가득하다’는 서로 대비되는 단어를 연결시키면서 시인의 내면으로 들어온 가을 풍경을 한 층 더 선명하게 함으로 시인의 눈이 아니면 담을 수 없는 절구이다.
도중에서 높은 산을 바라봄(途中望嶽)
이틀 동안 몰아닥친 눈보라
노새 걸음이 어렵더니
마침내 보이는구나 하늘 가운데
하늘나라 구슬바다 아득한 곳에
신선이 탄 새는 멀고도 먼데
하늘에 남은 운물(雲物)
산을 단장 했구나.
시는 어느 특정한 장소에서만 쓰는 것이 아니다. 여정의 도중에서 감흥이 일면 언제나 탄생한다. 식산의 시가 대부분 대상을 두고 쓴 시들이 많지만 이 시는 특정한 대상이 아닌 유람하는 도중에 바라본 산봉을 보며 쓴 시이다. 날씨가 좋이 못함을 노새의 걸음걸이가 느린 것으로 비유하고 높이 솟은 산봉(山峰)을 하늘 가운데 보인다하여 산의 위치가 무척 높고 험함을 은유하고 있다. 아울러 하늘의 구름을 구슬바다라는 이름으로 선명하게 다가오게 하면서 높은 산 봉 어딘가에 신선이 새를 타고 아득히 있을 거라는 상상과 그 구름사이 보이는 산들을 구름이 단장함으로 산을 더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자필암(자筆巖)
이끼 깊은 늙은 돌에
긴 숲은 그늘지고
한낮의 온 하늘이
묵은 노을에 깔렸구나
영액(靈液)에 붓 적셔도
다 쓰지 못한 일
구름뿌리 서린 곳에
늙은 용 읊조리네
자연의 이치를 따라 자리 지키고 선 자필암의 모습을 ‘이끼 깊은’, ‘늙은 돌’, ‘긴 숲’, 묵은 노을‘이라는 표현으로 깊고 그윽한 주변의 환경과 늠름한 바위의 모습을 시각적 심상을 살려 표현하면서, ‘긴 숲은 그늘지고’라는 말과 ‘한낮의 온 하늘이 묵은 노을에 깔렸구나.’로 선경(仙境)에 들어온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자필암의 진면목을 진실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은 바람과 같은 자연 뿐임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위의 두 작품은 필자가 지행록(2)에 실린 작품을 뽑은 것이다. 필자가 아둔하고 특히나 옛 시인이 쓴 한문의 시를 바르게 읽는 눈이 없어 그냥 느낌으로 설명하였거니와 선생은 맑고 고아한 정감을 시로 약 700수나 표현하였고 『지행록(地行錄)』에만 해도 178 수의 시를 곳곳에 기록함으로 가히 당대의 대 문호(文豪)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6. 『지행록(地行錄)』 표현(表現)의 특징(特徵)
우리 옛 선비들은 사물을 보고 글을 쓰는 일을 관물(觀物)이라 했는데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관물찰리(觀物察理)이다. 이는 사물을 통해 이치를 살피는 일이다.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에 푸르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에 긏지 아니는고
우리도 그치지 마라 만고상청(萬苦常靑)하리라“
(李滉)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11)‘청산(靑山)은 어찌하여’)
이를 통해 인생의 흔들리지 않는 지조와 끈기를 배워야 한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둘째는 관물찰세(觀物察世)의 방법으로 사물을 통해 세상을 살피는 일인데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와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가 그 대표적인 예이고,
셋째는 관물찰형(觀物察形)으로 사물의 실제의 모습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그 사물의 미적 요소를 표현의 방법을 말한다. 식산의 지행록은 주로 관물찰형(觀物察形)의 방법으로 우리 국도의 모습을 지극히 구체화 하고 있다.
가. 구체적(具體的)이고 사실적(寫實的) 표현(表現)
식산의 『지행록(地行錄)』은 실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는 사실적 표현의욕이 두드러짐을 볼 수 있다. 이런 의욕은 대상을 통한 작가 자신의 재 투영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인생관과 관련된 보다 철학적 태도이기도 하였지만 식산의 사실적 표현은 단순히 글을 아름답게 꾸밈을 위한 수사(修辭)로서가 아니라 그의 실심사상(實心思想)에 기인된 것이기 때문이다.
식산이 산수를 곡실히 표현하고 형상을 그리는 것처럼 표현한 것은 ‘천지 만물에는 호흡이 있으니 춘추(春秋)·주야(晝夜)·토운납무(吐雲納霧: 구름을 토하고 안개를 호흡함)·초목영고(草木榮枯 초목의 성함과 쇠함)가 다 자연의 호흡’이라고 본 까닭이다. 즉 삼라만상을 유기체(有機體)·생명체(生命體)로 봄으로 자연 곡실한 표현, 적확한 모상(摸狀)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사실을 사실대로 표현하고 실상을 재현해 보이려 한 점은 식산의 실심사상이 빚은 태도이기도 하다.
식산이 금강산 유람을 통해 명편(名篇)을 남기고 있는 것은 다른 분들의 경우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다른 금강산기행문(주로 東文選 소제)과 비교해보면 식산의 기행문은 다른 기행문에서 볼 수 없는 사실적 표현의 특성을 볼 수 있다.
특히 「금강산총기(金剛山總記」는 여정을 따라 쓴 기행록이 아니라 금강산이란 실체를 놓고 한 편의 기문을 작성해 놓았다. 본 기문은 구성이 기(起 지세 및 위치)·서(叙 水·石·峰의 형상)·결(結 山水觀)으로 되었는데 먼저 석(石)과 봉(峰)을 어떻게 사실적으로 묘사했는지 살펴보자
“선 놈, 기댄 놈, 세로로 된 놈, 가로된 놈, 둥근 놈, 모난 놈, 길쭉한 놈, 얼굴을 맞대 선 놈, 우뚝 솟아 울쑥불쑥한 놈, 무더기로 된 놈, 끊어 깎아지른 놈, 굽어보고 우러르는 듯한 놈, 누워 살피는 듯한 놈, 뛰어 찰 듯 솟구친 놈, 엎대어 호소하는 것 같은 놈, 일어나 다 투는 듯 한 놈, 춤추듯, 웃듯, 노하 듯 한 놈들이 돌의 사상(事象: 관찰할 수 있는 형태를 취하여 나타나는 여러 가지 사물과 현상)이다.
이 문장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이 낳은 효과를 그리시오,”라고 충고한 Mallarm’e의 말보다 일찍이 제작되었다. 활유·의인·직유·직서법의 다양한 구사나 문장 호흡의 장단에서 독자는 생동하는 실체의 몸짓, 마음 짓까지를 보고 느낄 수 있다. 또한 산봉(山峰)을 그리기를
“봉우리는 앞선 놈, 뒤선 놈, 나아가는 놈, 물러서는 놈, 쪽 곧은 것과 비스듬히 기운 것, 교묘한 놈, 중후한 놈, 쪼그리고 앉은 놈, 우뚝 선 놈, 장엄한 놈, 빛나게 드러나 밝은 놈, 아름답고 유순한 놈, 순하고 아름다운 놈, 얌전하고 아담한 놈, 기이하면서도 온화한 놈, 수양하여 사물에 오만 한 놈, 뛰어 솟아 마치 가듯 하는 놈, 분신하여 마치 나는 것 같은 놈, 총총걸음으로 마치 가듯 하는 놈, 사납게 홀기며 마치 겁주듯 하는 놈, 고생에 마치 근 심에 찬 듯 한 놈, 강개하여 마치 탄식하듯 하는 놈들이 있다. 찬란하기 금과 같고, 희기는 은과 같고, 단단하기는 쇠와 같고, 깨끗하기는 옥과 같고, 밝기는 수정(水晶), 파려(玻瓈: 칠보의 하나)와 같고 무겁기는 구정대려(九鼎大呂) )나 천구적도(天球赤刀)와 같고, 보배 롭기는 규벽연찬(圭壁瓀瓚), 현여(懸黎), 화박(和璞), 수극야광주(垂棘夜光珠)와 같고, 베풀 어 진 것은 이존(彛尊)의 로0(鹵0), 고치(觚觶) , 돈와격(敦齀鬲)...중략...과 같고 머 리에 이고 있는 것은 면류(冕旒), 한변모(哻弁帽: 고깔모자), 촬립(撮笠: 꼭지달린 사갓), 건 책(巾幘: 복두 두건)과 같고, 허리에 찬 것은 전섭(鐫韘), 잡패(雜佩), 창복(韔服), 환쇄(環 鎖)와 같고, 세워진 것은 과모(戈旄), 척양(戚揚: 弔旗), 모연(矛鋋: 끝이 세모난 창), 적보(翟葆), 술협(銊鋏: 작도와 칼), 간우(干羽)와 같고 아로새긴 것은 기양(岐陽)의 석 고(石鼓)나 천태산(天台山)의 경당(經幢), 화옥(華獄), 석산(釋山)의 비석(碑石), 형산 (荊山)의 영단(靈壇)의 문채나 은상연라(銀床煙蘿)의 송(頌)과 같았다.
날카롭게 삐쭉삐쭉 무더기로 솟아선 봉우리들은 마치 태산의 꼭대기 일관봉(日觀峰)이나 신선이 산다는 현도봉(玄都峰)처럼 우뚝 높았고, 달나라의 광한궁(廣漢宮)이 파란 구름 속 에 맑은 듯 또는 진시황(秦始皇)의 아방궁(阿房宮)과 미앙궁(未央宮), 광무제(光武帝)의 건 장궁(建章宮)의 웅자함과 같았고 또는 한(漢)나라의 비렴관(飛廉舘), 주관(柱觀)이나 구리기 둥으로 세워진 조조의 동작대(銅雀臺)처럼 높았고 진(陳)나라의 임춘각(臨春閣)에 비단을 두른 듯 수(隨)나라 낙양궁(洛陽宮)의 서원(西苑)의 어구(御溝 궁중의 개울)처럼 화려하였 다.
도대체 강록산(江鹿山)에 안개가 걷혔으니 황제(皇帝)가 철액(鐵額) 치우(蚩尤)를 사로잡은 것이라 할까? 문왕(文王)이 사악(四岳)을 순수(巡狩)하니 여러 제후들이 옥백(玉帛)을 잡고 시립(侍立)한 것이라 할까? 삼왕(三王)이 목야(牧野)에 관병(觀兵)할 제 제후(諸侯)의 서약 (誓約)하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이라 할까? 춘추전국(春秋戰國) 때 제 환공(齊桓公)이 모든 제후를 모아 회맹(會盟)하면서 피 쟁반의 피를 미시고 있는 것이라 할까? 공자(孔子)가 행 단(杏亶: 공자가 글을 가르친 곳)에서 제자들에게 예를 익힐 제 삼천제자(三千弟子)가 읍 (揖)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라 할까···
고 하였으니 위의 표현은 산의 형상을 직유(直喩)로 묘사하였다. 수사(修辭)의 바탕을 이룬 활유(活喩)나 의인법(擬人法)은 산 하나를 유기체로 본 그의 산수관과 필연의 관계에 있으며 직서(直敍: 상상이나 감상을 덧붙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가 직유(直喩法)로 교차됨에 문장 호흡의 변화는 물론 회화적(繪畵的) 효과를 가미하였고, 나아가 직유(直喩)와 인유(引喩): 다른 예를 끌어다 비유함)와 설의(設疑), 전 후구(前後句)의 앙양반복(抰揚反復)은 천강(千江)이 대해(大海)로 모여 출렁이듯 문장 사채(文章詞彩)가 환연걸연(煥然桀然)하여 “사(詞)가 고아(古雅)할 뿐 아니라 음조(音調)가 맑고 밝아 마치 신회(神會)가 천출(天出)한 것 같음이 있다.”고 한 평이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이같이 적확(的確)하고 사실적(寫實的)인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부지불식간에 그 대상에 몰입하게 하는 문학적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본다.
나. 식산(息山)의 표현과 다른 이의 표현의 차이
1) 이곡(李穀), 남효온(南孝溫)의 금강산기(金剛山記) 비교(比較)
같은 금강산 기행문이라도 식산과 이곡, 남효온의 글을 비교해 보면 서로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내가 본 이 산은 실로 들은 바 보다 나으니 비록 화사(畵師)의 재주와 시인의 기교로써도 도저히 이를 비슷하게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이곡은 하였고,
“임오일에 비가 개어 개심대에 올라 여러 봉을 바라보니 망고대와 더불어 대략 같고 조금 다를 뿐이다. 비로봉 중향성은 동쪽에 있고, 선암 뒷봉은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으니, 곧 비 로봉의 서쪽 가지이다. 마하여 뒷봉은 바로 선암봉 앞에 있고 영랑현은 선암봉 뒤에 있고 서수정봉은 영향현 서쪽에 있고···중략···진경성봉은 또 안문봉의 남쪽에 있다. 망고대는 또 그 남쪽에 있고 시왕봉은 망고대 위에 두각만 나타내고 천등·관음·지장·달마 여러 봉은 그 동남에 벌였는데 이는 그 대략이다.
라고 남효온(南孝溫)은 전개한 반면 식산(息山)은 아래와 같이 표현하였다.
“천일대(天逸臺)는 그 높이가 불과 열 길이 못 되는데도 대는 이미 우뚝이 높아져 혼자 빼 어나 앞에는 일만 이천 봉을 마주하고 구불텅구불텅 멀리까지 이어졌는데, 높고 험하고 달 리고 돌출한 것이 가히 경이롭고 놀랍고 기쁘고 사랑스럽고 두려워 상쾌함이 비폐(脾肺 비 위와 폐)를 적신다. 그 분벽(粉壁)은 동북을 에워싸 하늘로 퍼졌는데, 들쑥날쑥 깎아지른 위에는 뭇 작은 돌을 더해 자질구레하면서도 교묘히 사물을 형상한 것이 중향성(衆香城)이 다. 동쪽 위로 웅장한 언덕이 특히 빼어난 것이 있는데 엄숙하고 신이하며 생색(生色)을 뽐내는 것이 비로봉이다. 동쪽 몇 발치에 양 가닥이 났는데 깎아 끝이 뾰족하게 나란히 선 것이 일출(日出)·월출봉(月出峰)이며, 남족으로 달려 빼어나게 솟고 단직(端直 바르고 곧음) 하며 뜻이 심히 교만한 것이 혈망봉(穴望峰)이요, 앞쪽에 버티어 두 나래를 펼쳐 날아갈 듯한 것이 망고대(望高臺) 이다.
위 세 기행문을 비교해 보면, 이곡(李穀)은 일정을 따라 쓴 기행록으로 유상사(遊賞事)에 치중하여 ‘금강산 절경은 글과 말로는 다 할 수 없다’는 말로 대신하여 극히 피상적인 묘사로 그쳤으며, 남효온(南孝溫)은 뭇 봉우리의 위치만 나열하여 독자에게 사실적으로 그려내 주지는 못하였다. 이에 비해 식산은 눈앞에 펼쳐진 금강산을 한 생체(生體)로 보아 활유(活喩)·의인법(擬人法)의 구사와 문장호흡의 장단 배치, 사방 상하로 시점을 이동하며 그 형상을 대비시킴으로 회화적 효과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산수(山水)의 맥을 짚듯 그 특성을 적절하게 묘사해 놓았다. 이곡이나 남효온의 기행문이 일정을 쫓아 쓴 녹문(錄問)으로 작자와 대상이 개별성을 느끼게 하는데 반하여 식산의 기행문은 ‘내가 곧 산수격(山水格)’인 물아일체감(物我一體感)을 느끼게 하였다고 보겠다.
또한 식산의 「용유동기(龍遊洞記)」에서도
“골(洞)의 위와 아래는 돌로 덮였는데 색깔은 희어 윤기가 나고 깨끗하여 침조차 뱉을 수 없다. 물은 돌을 안고 그 틈 사이로 꺾어지며 흘러내려 종종종하는 음향이 더욱 맑아 마치 거문고 생우(笙竽 생황과 피리)를 연주하듯 한다. 바위 위에는 때에 돌확이 있었는데, 큰 것은 마치 가마솥 같고 작은 것은 동이 같기도 하고 바리때 같기도 한데, 전하는 말에는 용의 발톱의 흔적이라 한다. 그 옆에는 기이한 바위와 괴상한 나무, 이상한 풀이 많은데 날짐승이 나돌며 공중에서 우는 게 마치 사람을 놀리듯 혹은 머물기를 권하며 그 가는 것 을 애석해 하는 것도 같다.”
흰 돌, 종종거리는 물, 용이 노니 던 현장, 같이 놀자고 보채는 산새, 용유동의 청정하고 유정(幽靜)한 분위기를 시각과 청각, 전설에 의한 상상력에 호소하면서 적실하게 묘출해 놓았다. 서경(敍景-자연의 경치를 글로 나타냄)에 빠지기 쉬운 과장이나 정서의 충일을 억제한 가운데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정의(情意)를 천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식산 자신의 산수관이 물역(物役)에까지 이르지 않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다음은 같은 실학자인 이익(李瀷)의 「청량산기(淸凉山記)」와 같은 대목을 비교해 보기로 한다.
“내가 순흥부(順興府)에서 진구 전택경(田澤卿)과 청량산 유람을 약속하고 간단한 행장으로 떠난 것은 을축년 11월 초하루였다. 석양녘에 안동 경계에 이르렀는데 청암정(靑巖亭)은 곧 충재(冲齋) 권충정공 휘벌(權忠定公諱橃)이 거처하던 곳이다. 도랑을 당기고 둑을 쌓아 물이 용용(溶溶 질펀하게 흘러)히 한 개 거북 모습의 바위를 둘러싸고 있는데, 바위 위에 정자를 세워 심히 절묘하고 가히 즐길 만 하였다. 이내 삼계(三溪)를 지나니 곧 충재공이 살던 곳(芬苾)이었다.”
위의 문장은 이익의 기문이며, 식산(息山)은
“청량산 골 입구 개울 옆에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어 놓은 석이 있는데 이곳을 반학대 (伴鶴臺)라고 하며 늙은 솔이 덮고 있다. 이 누대(樓臺) 앞은 이끼가 낀 푸른 절벽을 마주 했고, 그 밑을 물이 세차게 뿜어 올라 바위들이 은은한 우레 소리를 내며 골짜기에 가득 찼다. 이미 골에 들어 어려운 관문(關門이 울펑둘펑 십 여리를 이어졌고 봉우리의 기세가 정중하고 위엄이 있어 다투어 나서며 서로 맞이하니 말에 몸을 맡긴 채 우러러 보는 사이 몸은 이미 첩첩한 푸른 산(山)가운데 든 줄도 깨닫지 못했다.”
전자 이익의 것은 물(物 경관)과 내가 병립(竝立 나란함)된 데 비해 후자는 물아일체(物我一體)를 보이고 있다. 또한 축융봉(祝融峰)을 그린 대목에서도
“절 뒤의 최고봉은 자수봉(紫秀峰)·자란봉(紫鸞峰)인데 나란히 섰고, 오른 쪽에는 필봉(筆 鋒·연적봉(硯滴峰)이 있는데 대개 그 형상으로 이름 한 것이다. 서쪽으로 한 가지가 연화 (蓮花)·향로(香爐) 여러 봉을 짓고 향로봉 밖에 곧 장인(丈人) 등 여러 봉이다. 동족으로 한 가지가 제일봉으로 금탑봉(金塔峰)까지 이르렀고 금탑봉 밖에 따로 한 줄기가 있어 두루 앞을 에워쌌는데 그 위의 봉을 축융봉(祝融峰)이라 한다.”
고 이익은 서술한 것에 반해,
“두타산(頭陀山) 서남쪽이 청량산이다. 태백(太白) 밑에서는 최고로 신이 많아 첩첩한 봉우 리와 층층한 봉우리가 수 백 리, 청량이 가장 빼어나고 기이하며, 하늘로 날 듯이 치솟아 하늘과 부딪히며 당을 떠받고 항거(抗拒)하는 듯 높고 험준하게 튀어나온 봉우리들이 영롱 하게 아릅답다. 그 북으로 빼어나 가장 존엄한 것이 자란봉(紫鸞峰)이며, 서로 우뚝한 언덕 이 연적봉(硯滴峰)이며, 또 서로 험하게 솟은 것이 탁필봉(卓筆峰)이며 또 조금 남에 가파 르게 빽빽한 것이 선학봉(僊鶴峰)이며 또 조금 서로 이를 드러내 웃는 것이 연화봉(蓮花峰) 이다. 자란봉의 동남에 우뚝 솟아 대적코자 한 것이 자소봉(紫霄峰)이다. 자소봉 남쪽 바로 웅장히 솟은 것이 경일봉(擎日峰)이며, 경일봉 동은 향로봉(香爐峰)이요 향로봉 서남은 돌 을 묶어 삼층의 시렁을 이룬 것이 금탑(金塔)이며, 또 자소봉부터 동으로 비스듬히 뻗어 남으로 둘러 볼록하고 펑퍼짐히 퍼져 멀리 자란봉과 서로 바라보는 것이 축융봉이다.”
라고 서술하여 전자는 경치의 묘사가 간단함에 비해 후자는 매우 자상하고 세밀하다. 그러나 곡실(曲悉 상세함)하면서도 과장이 없고 산만한 데서 벗어났으며, 팔방(八方)의 원근(遠近)을 한 눈에 조망시킨 묘사력은 가히 특기할 만하니
“선생의 시문(詩文)은 세상에 쓰이기를 뜻한 것은 아니나, 난초의 향기·옥의 깨끗 함 같이 문채(文彩)가 절로 드러나 문장(文章)을 한다는 선비가 완연히 자리를 양 보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한 말이 칭찬만은 아닌 상 싶으며 식산의 기문은 문을 위한 문이 아니라 식산의 실심사상에 바탕을 한 성실성에서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는 의욕에서 나온 만큼 류량(瀏湸)한 음조(音調)와 번뜩이는 문채만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무게 있는 산수관, 나아가 인생관·사회관까지를 엿볼 수 있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7. 마무리
지금까지 식산(息山)의 대작 인문지리지(人文地理誌)이자 문학적 기행문(文學的紀行文)인 『지행록(地行錄)』을 통해 저자인 식산의 생애와 저술의 년도, 목적, 체제, 특징, 표현의 특징, 다른 기행문 작가와의 비교 관계를 살펴보았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우리 고장 상주에 이렇게 훌륭한 선비가 계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제야 가까이 다가감에 대해 심히 부끄러움을 느꼈다. 짧은 시간을 통해 선생의 심오한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 실심사상(實心思想)과 철학 등에 대해서는 워낙 식견이 짧고 아둔하여 충분한 이해를 할 수 없어 안타까웠지만 지행록을 통해 조금이나마 선생에 대해 깨우칠 수 있었음이 퍽 다행이라 여겼다.
이 글을 통해 지역사회가 보다 선생의 사상과 업적을 기리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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