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사랑방 124강 10월 12일 |
난재(懶齋) 채수(蔡壽)선생의 위기일발(危機一髮)
김철수 (상주문화원장)
1. 채수(蔡壽)선생의 이력
채수 선생은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나서 점필재(佔畢齋)선생이 선생의 저작을 보고 감탄하기를, “후일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릴 자는 틀림없이 이 사람일 것이다.”고 하였다.
1469년(예종 1) 추장문과(秋場文科)의 초시(初試 ) · 복시(覆試) · 전시(殿試)에 장원함으로써 이석형(李石亨)과 함께 조선 개국 이래 삼장(三場)에서 연이어 장원한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부수찬(副修撰)때에《세조실록》과《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서 1475년(성종 6)에 장악원(掌樂院)의 관직을 겸하였으며, 1478년에는 응교(應敎)가 되어 도승지(都承旨)로 권신인 임사홍(任士洪)의 비행을 탄핵하여 좌천시켰다.
그리고 승지를 거쳐 정2품 대사헌(大司憲)으로 있을 때, 1479년(성종 10)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위하는 데 반대하여 파직되었다가, 6년 후인 1485년(성종 16)에 서용(敍用)되어 종2품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과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1506년(중종 1)에는 중종반정에 가담하였다 하여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종1품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졌는데 세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후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상주 함창(咸昌)에 쾌재정(快哉亭)을 짓고 은거하며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선생이 부끄러워했던 반정공신(反正功臣)으로 추대된 데 얽힌 일화(逸話)가 흥미롭다.
반정 전날 밤, 박원종(朴元宗) 등이 상의하기를, '오늘의 일은 비록 반란에서 출발했지만 덕망 높은 선비로 무게 있는 인물이 없어서는 안 될 터이므로 채수를 청해 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누군가가 채수는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박원종은 말하기를 '이같이 큰일은 위력으로 처리해야 하니 무사(武士)를 보내 청하되 오지 않으면 그 목이라도 취해 오라.'고 하였다. 채수의 사위 김감(金勘)이 채수가 화를 입을 것이 염려스러워 그 부인을 시켜 술에 만취하게 하여 집에 모시고 가는 척하고 거사 현장인 대궐문으로 데려다 놓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거사에 참가하게 된 꼴이었고, 잠깐 사이에 반정은 성공하였다. 채수가 깨어나서 연산군이 축출되는 현장을 보고 "이게 어찌 할 짓인가!"를 반복해서 절규했지만 이미 상황은 종결되었고, 그렇게 해서 채수는 반정공신의 일원으로 훈봉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성품으로 미루어 보아 능히 ‘부끄럽다’할 일화이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박람강기하여 천하의 서적과 산경(山經) · 지지(地誌) · 시문(詩文) · 패관소설(稗官小說)에까지 해박하여 1511년(중종 6)에는 <설공찬전(薛公贊傳)>이라는 패관소설을 지었다. 저서로는《난재집(懶齋集)》 2권과《설공찬전(薛公贊傳)》이 있는 당대의 재사였다.
그리고 김종직(金宗直)에게 종유(從遊)하고, 특히 성현(成俔)과 교제가 깊었으며, 사신으로 북경을 내왕하는 길에 요동명사(遼東名士)이던 소규(邵圭)와도 친교를 맺었으나, 당시 새로이 등장하던 사류(士類)와는 잘 화합하지 못하였다.
1703년(숙종 29) 함창의 사림에 의하여 임호서원(臨湖書院)이 건립되고 표연말(表沿沫) · 홍귀달(洪貴達)과 함께 제향되었다.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채수 선생은 1479년(성종 10)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위하는 데 반대하는 바람에 파직되어서 고향인 함창에 와서 다시 서용된 1485년(성종 16)까지 고향에 있었다. 그런데 채수 선생이 낙향한지 5년이 지난 1484년(성종 15) 8월 2일에 대구에서 살고 있는 이성사촌(異姓四寸) 동생 서감원(徐坎元)이 임금에게 봉사(封事)를 올리는 일이 일어났다.
2. 서감원(徐坎元)의 봉사(封事) 내용
조선 제9대왕 성종은 교육과 문화의 진흥에 힘을 기울여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임금이다. 승려들을 엄하게 통제하고 사찰을 폐쇄하는 등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철저히 시행하였으며, 법령의 정비에도 힘써 유교적 통치 질서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1474년(성종 5)에《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하여 반포하였고, 1492년(성종 23)에는《경국대전(經國大典)》을 더욱 보충하여《대전속록(大典續錄)》을 간행하였다.
1491년에는 문신 중에서 덕(德)과 재주가 있는 사람을 뽑아 직무를 쉬면서 학문에만 전념케 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라고 불리는 호당(湖堂) 제도를 실시하였고, 서적의 간행도 활발히 추진하여《여지승람(輿地勝覽)》,《동국통감(東國通鑑)》,《동문선(東文選)》,《오례의(五禮儀)》,《악학궤범(樂學軌範)》 등을 편찬 · 간행하였다.
또한 성종은 집권 초기부터, 시정(時政)의 잘못과 민폐(民弊)에 대한 바른 말을 널리 구하는 ‘구언(求言)제도’를 실시하였다. 그 예(例)의 하나로 성종 1년(1470) 6월 5일에,
"봄부터 여름까지 가물어 비가 내리지 아니하니, 스스로 재앙을 부르는 까닭이 있을까 염려하여 교서(敎書)를 내려서 구언(求言)하였더니, 대간(臺諫)에서 중외(中外)의 관리(官吏) 중에서 탐람(貪婪)하고 용렬(庸劣)하여, 직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를 아뢰었으므로, 여러 대신(大臣)과 의논하여 그 가운데에 가장 심한 자 7인을 내쫓았는데, 이들이 모두 전날에 고과(考課)의 등급에서 상등[最]에 있었던 자들이니, 어찌하여 이와 같이 서로 반대되는가? 그 수령(守令) 가운데에 그 직임을 감당하지 못할 자들을 다 파면하여 내보내고자 하나, 농사철을 맞이하였고, 또 수령을 보내면 폐단이 클 것으로 생각하여, 아직은 이를 정지하는 것이다. <이하 생략>
라는 유시(諭示)를 제도(諸道)의 관찰사에게 내렸다. 이처럼 성종이 구언(求言)한 사례는 <성종실록(成宗實錄)>에서만 109건이었다.
따라서 비록 생원(生員)신분이긴 하였지만, 서감원(徐坎元)이 봉사(封事)를 올리는 일 자체는 위법이 없고, 성종 재임기에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성종 15년 8월 2일에 대구에 사는 생원(生員) 서감원(徐坎元)이란 사람이 성종에게 장문(長文)의 봉사(封事)를 올린 내용을 간추리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근년에 천재(天災)가 유행(流行)하여 겨울에 천둥하고 여름에 우박이 내리며 가뭄이 잇달아서 기근이 거듭하여, 백성이 몸둘 곳을 잃고 아비와 아들이 서로 흩어지고 굶어 죽는 자가 거듭 쌓이며, 염치가 아주 없어지고 분경(奔競)이 풍습을 이루어 간사한 자가 다투어 일어나고 도둑이 흥행(興行)하며, 강직한 신하는 초야에 물러가 있고 소원(疏遠)한 신하는 진용(進用)될 길이 없는데 궁정(弓旌)·옥백(玉帛)의 예(禮)는 행해지지 않으니, 이렇게 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② 천변(天變)은 본래 헛되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니, 임금과 신하가 함께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하늘의 견책에 보답해야 마땅한데, 지금 힘쓰는 것은 비(雨)를 빌고 술을 금하는 몇가지 일 뿐입니다. 국가의 사세(事勢)를 사람마다 말하기를, ‘화기(和氣)를 상할 수 있고 재변(災變)을 부를 수 있다.’ 하는데, 대신(大臣)이 이를 아뢰지 않고 간관(諫官)이 이를 논하지 않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③ 지금은 토목일이 점점 더 많아져서 따로 영선(營繕)을 맡은 수리 도감(修理都監)을 세우니, 나무를 나르고 돌을 옮기느라 외치는 소리가 길에서 끊이지 않고 백성의 집을 헐기까지 하여, 지아비가 그 처자를 보양하기 위하여 떠나려 해도 갈 곳이 없는 한탄이 있으니, 매우 불쌍히 여길 바입니다.
④ 궁궐이 넉넉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원유(園囿)가 넓지 않은 것도 아닌데, 궁실(宮室)을 늘려 짓고 원유를 넓게 차지하니, 이것은 참으로 무슨 마음입니까?
⑤ 지금 중[僧]들이 인과(因果)라는 설(說)로 무지한 사람들을 현혹하며, 하는 일 없이 놀고 먹어, 병졸의 수를 줄이고 농민의 식량을 축내는데도, 장차 어디에 쓰려고 과시(科試)를 베풀어 예조(禮曹)에서 먼저 뽑고 이조(吏曹)에서 뒤에 벼슬시키는지 모르겠습니다.
⑥ 또 도첩(度牒)이 있는 중은 환속(還俗)시키지 말게 하고, 고탑(古塔)이 있는 절은 헐지 않으므로, 중들이 점점 번성하여 절이 날로 흥성하여 금벽(金璧)이 서로 빛나는데,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어찌하여 도첩이 있고 없는 것이나 고탑이 있고 없는 것에 얽매이겠습니까?
⑦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는, 축수(祝壽)하는 재(齋)를 폐지하여 삼사(三寺)에서 천공(薦供)하는 물건을 없애고, 또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역대(歷代)의 부처를 배척한 소(疏)를 쓰게 하여, 온 나라의 신민이 다 오도(吾道)가 날로 융성하고 이단(異端)이 날로 쇠퇴하는 것을 알도록 계도(啓導)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점점 처음과 같지 않아져서, 대간(臺諫)이 그것을 말하여도 듣지 않고, 유사(有司)가 그것을 상소하여도 받아들이지 않으시며, 유생(儒生)이 부처 때문에 갇히고 중 때문에 죄를 받으므로, 중들이 득의(得意)하여 기(氣)를 부려 스스로 뽐내고 학궁(學宮)에 함부로 들어가 생도(生徒)를 묶기까지 하니, 마음 아픔니다.
⑧ 전(傳)에 이르기를, ‘3년 동안 상(喪)을 입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상례(喪禮)이다.’ 하고, ‘부모를 위하여 상을 입는 것은 귀하건 천하건 마찬가지이다.’ 하였는데, 지금은 군졸들이 어버이의 상을 당하면 겨우 1백 일 동안만 상복(喪服)을 입다가, 길복(吉服)으로 갈아 입고 화살을 지고 창을 메고서 항오(行伍) 사이에서 분주하므로, 애통한 마음이 이에 따라 적어지니, 어찌 인정(仁政)의 큰 흠결이 아니겠습니까?
⑨ 전(傳)에 이르기를, ‘간(諫)하는 자는 복(福)이 되고 아첨하는 자는 해가 된다.’ 하였습니다. 대저 낯빛을 바루고 조정(朝廷)에 서서 극진히 말하고 숨기지 않는 자는 자신을 위하여 가 아니라 다 나라를 위하여 생각하는 것이니, 과실을 바로 잡고 어려운 일을 하도록 요구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 애써 용린(龍鱗)을 건드리고 호수(虎鬚)를 만져서 천둥 같은 위엄을 범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성지(聖知)의 임금은 말한 자를 죄주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는 물흐르듯이 간언(諫言)을 따르고 말이 온당하지 못하더라도 죄주지 않으셨는데, 근년에는 대간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말이 알맞지 않은 자도 견책하시며, 조신(朝臣) 중에서 혹 일을 말한 것 때문에 파직된 자가 오래도록 복직되지 않기도 하니, 곧은 말을 하는 신하는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고 교묘하게 말을 잘하는 무리는 때로 진용(進用)될까 신은 염려합니다.
⑩ 신이 듣건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자로는 수령(守令)보다 앞서는 이가 없다 합니다. 수령을 마땅한 사람으로 얻으면 백성이 그 혜택을 받고,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백성이 그 폐해를 받으니, 수령의 직임은 중합니다. 근일 전하께서 수령 중에서 가장 어진 자와 가장 어질지 못한 자를 의정부(議政府)에 물어서 올리기도 하고 내치기도 하셨으니, 우리 백성을 생각하시는 도리가 지극하시나, 전하께서 상주고 벌주신 것이 과연 다 공론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좌우의 말을 어찌 죄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이르기를,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하였으니, 신은 전하께서 먼저 조정을 바루어서 백관(百官)을 바루시기 바랍니다. 백관이 바르면 감사(監司)가 절로 바루어지고 수령이 절로 바루어질 것입니다."
였다. 서감원이 지적한 10가지 내용은 당시의 실정을 잘 살핀 것이었다. 성종도 이 서감원의 봉사(封事)를 다 읽어보고 나서 자신을 꾸짓는 일은 모두 감내하겠다고 하면서, ‘조신(朝臣) 중에서 혹 일을 말한 것 때문에 파직된 자가 오래도록 복직되지 않기도 하니’, 하는 내용과 ‘전하께서 상주고 벌주신 것이 과연 다 공론에서 나온 것인지?’ 하는 문제는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아야 하겠다는 의견을 승정원(承政院)에 전교(傳敎)하였다.
"소(疏)에 나를 꾸짖는 말이 많이 있으나 내가 어찌 그것을 노여워하겠는가? 다만 거기에 ‘일을 말하고 파직되어 오래도록 복직되지 않은 자’라고 말한 것은 내가 반복하여 생각하여도 어느 사람을 가리킨 것인지 모르겠다. 또 ‘근일 수령(守令) 중에서 가장 어진 자와 가장 어질지 못한 자를 의정부(議政府)에 물어서 올리기도 하고 내치기도 하였으나, 상주고 벌준 것이 과연 다 공론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하였는데, 서감원(徐坎元)이 초야의 미천한 선비로서 조정을 멸시하여 그 말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후세에서 묘당(廟堂)에 사람이 있었다고 생각하겠는가? 이른바 공론이 아니라는 것이 어느 사람을 말한 것인지를 내가 추국(推鞫)하려 하는데, 어떠한가?"
이에 승지(承旨)들은,
"후세 사람 누가 한낱 유생(儒生)의 말을 믿고 조정에 사람이 없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일을 말한 자는 혹 알맞지 못하였더라도 죄주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일을 말하고 파직된 자가 어느 사람이며 상주고 벌준 것이 공정하지 않았던 자가 어느 사람인지는 묻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라고 답하였고, 성종은 관찰사(觀察使) 이육(李陸)에게 다음과 같이 하서(下書)하였다.
"도내 대구(大丘) 사람 생원(生員) 서감원(徐坎元)의 상소에, ‘①조신(朝臣) 중에서 혹 일을 말하였기 때문에 파직된 자가 오래도록 복직되지 않았다는 것과 ②근일 수령 중에서 가장 어진 자와 가장 어질지 못한 자를 의정부(議政府)에 물어서 올리기도 하고 내치기도 하였으나, 상주고 벌준 것이 과연 모두 공론에서 나온 것인가? ③좌우의 말을 어찌 죄다 믿을 수 있는가?’ 하였는데, 나는 조신 중에서 일을 말하고 파직되어 오래도록 복직되지 않은 자가 누구이며, 올리고 내친 수령 중에서 의논이 공정하지 않았던 자가 또 누구인지를 모르겠으니, 서감원에게 물어서 아뢰라."
고 하였다. 9월 21일의 야대(夜對)에서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서감원(徐坎元)을 추국(推鞫)한 계본(啓本)이 당도했기 때문에 ‘서감원’의 봉사(封事) 이야기가 다시 이어졌다.
먼저, 우승지(右承旨) 성건(成健)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서감원(徐坎元)을 추국(推鞫)한 계본(啓本) 과 여러 재상들이 의논한 것을 아뢰니, 임금이 문제가 된 2개 문항에 대해서 다시 지시를 하였다.
"서감원이 초야의 미미한 선비로서 국가의 일을 헐뜯어 광패(狂悖)함이 비할 데 없으니, 진실로 마땅히 죄주어야 하나, 내 생각에는 내가 널리 구언(求言)하였기 때문에 죄주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조관(朝官) 중에서 일을 말했다가 파직(罷職)되고 오래 복직(復職)되지 않은 사람이 한갓 정윤정(鄭允貞)만이 아니다. 시종(侍從)이나 대간(臺諫)으로서 일을 말하다가 파직된 것을 사방 사람들이 누군들 알지 못하겠는가? 정윤정은 본래 한미한 사람으로서 지금 상사(喪事)를 만나 경기(京畿)에 있고, 서감원은 대구(大丘)에서 살고 있어 서로 먼길인데, 어떻게 그가 복직하지 못한 것을 알았겠는가? 서감원이 마땅히 채수의 무리를 들어야 할 것인데 유독 정윤정을 들어 말을 했으니, 이는 추문(推問)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서감원이 정부의 소위(所爲)가 공론(公論)에 맞지 않는다고 방자하게 비방하였으니, 이도 또한 불가하다. 당초에는 큰 소리를 치려 하였다가 갑자기 함축(含蓄)하고 누구인지를 지적하여 말하지 않으니, 이 역시 간사(奸詐)한 짓이어서 더욱 추문하지 않을 수 없으니, 감사(監司)로 하여금 다시 추문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경상도관찰사가 서감원을 다시 추국하니 서감원이 ‘조관 중에서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지 않는 자는 ’정윤정(鄭允貞)‘ 이라고 실토했으나, 이미 성종은 그 사람이 ’정윤정‘이가 아니고 ’채수 일당‘이란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이러한 성종의 추측을 뒷받침하는 이야기가 7일 후의 경연자리에서 나왔다. 대사헌(大司憲) 이극균(李克均)이,
“신이 듣건대, 서감원은 채수(蔡壽)의 사촌(四寸)이니, 신의 뜻으로는 서감원이 사촌간이므로 혐의스러워 은휘(隱諱)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성종은,
“경(卿)의 말과 같다면 서감원이 더욱 그르다. 옛사람은 혹 자기 아들을 추천한 자가 있기도 했는데 공론(公論)이기 때문이었다. 채수(蔡壽)는 일찍이 승지(承旨)로 있었는데 내가 정직하다고 여겼기에 발탁하여 대사헌(大司憲)을 삼았다가, 마침 일을 말한 것이 합당하지 못하여 잇달아 파직했었지만 내가 감히 잊었겠는가?
인신(人臣)은 극력 간하여 임금이 감오(感悟)되어 허물을 뉘우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서감원이 비록 채수와 절족(切族)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바른 대로 말하고 은휘하지 않아야 하는데, 간사한 생각을 품고 말하지 않은 것이니, 묻지 않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면서 이극균(李克均)에게 채수(蔡壽)의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함창(咸昌)‘이라고 대답하였다. 따라서 서감원이 아무리 숨겨도 ’조신(朝臣)이 언사(言事)로 파면을 당하여 오랫동안 벼슬을 얻지 못한 사람이 누구인가는 윤곽이 들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성종은 채수 선생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설마 이 사람이 자기 4촌 동생을 시켜서 이런 짓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봉사(封事)한 본인의 입에서 그 이름을 확실하게 밝히기를 바라면서, 다시 그해 10월 3일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육(李陸)에게 ‘서감원을 엄중히 추국하라’고 하서(下書)하였다. 하서 내용은 이렇다.
"대저 바른 말을 구하는 것은 본래 바르고 곧은 의논을 들어서 과실을 돕고자 함이다. 말한 바가 비록 혹시 광망(狂妄)하여 사체(事體)에 합하지 아니할지라도 다른 뜻이 없는 데에서 나왔다면 모두 너그럽게 용서할 것이나, 만약 봉사(封事)를 칭탁하여 간사함을 행하고 바르지 못하면 바른 말을 구하는 본의가 아니다.
따라서 어찌 그대로 두고 그 실정을 묻지 아니하겠는가?
내가 처음에 서감원(徐坎元)의 진술을 들어 보건대, ‘조신(朝臣)이 언사(言事)로 파면을 당하여 오랫동안 벼슬을 얻지 못한 것’과 ‘수령(守令)을 올리고 내치는 데에 공론에 맞지 아니하다’는 것을 범연히 논하였을 뿐, 분명하게 사람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러나 글을 통해서 의도한 것을 찾으면 반드시 지향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그 실상을 알고자 하여 경(卿)에게 자세히 묻게 한 것이다.
그런데 서감원의 초사(招辭)를 보니, 사실은 숨기고 사실대로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언사(言事)로써 쫓겨난 자가 어찌 정윤정(鄭允貞)뿐이겠는가? 이제 듣건대 서감원은 바로 채수(蔡壽)의 사촌(四寸) 친척이다. 채수는 함창(咸昌)에 사는데 함창은 경상도 땅이고, 정윤정은 용인(龍仁)에 사는데, 용인은 경기 땅이다. 서감원은 대구(大丘)에 살면서 함창을 놓아두고 용인을 들어 말하였으니, 그 뜻이 곧은 것인가? 그리고 수령을 올리고 내치는 것은 조정의 공론이다. 묘당(廟堂)을 가리켜 공정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스스로는 곧게 대답하지 아니하고 간교함을 품고 간사함을 행하니, 진실로 이는 소인(小人)이다. 경은 이 뜻을 자세히 살펴서 엄하게 따져서 계달하라."
그리하여 경상도 관찰사가 서감원을 추국한 결과를 보고하였다.
"서감원(徐坎元)의 공사(供辭)에 이르기를, ‘채수(蔡壽)와 권경우(權景祐)는 역시 언사(言事)로써 파직을 당하였는데, 오래 복직되지 아니하였으나, 말한 바가 국가에 관계되었고, 또 채수는 이성사촌(異姓四寸)이기 때문에 처음 추핵(推劾)할 때에는 바로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전 대구부사(大丘府使) 임수창(林壽昌)은 부지런하고 조심스럽게 공무에 몸을 바친 사실이 없고 또 다스린 공이 없는데 지나치게 승진되었으며, 남양부사(南陽府使) 채신보(蔡申保)는 비록 병으로 인하여 게으름이 있었으나 조행(操行)이 있고 학정(虐政)이 없었는데, 홀로 견벌(譴罰)을 받았으므로, 묘당(廟堂)에서 올려 주거나 내치거나 하는 것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임수창은 지주(地主)이고 채신보는 서감원의 삼촌숙(三寸叔)이기 때문에 처음 추핵할 때에 말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치계를 본 성종은 서감원의 봉사(封事)내용 중에서 의문이 가는 일들을 직접 본인의 진술로써 전부 확인하게 되었다. 성종은 서감원의 추안(推案)을 재상(宰相)에게 보이니, 재상들이 하나같이 ‘서감원의 죄는 인정하면서도, 추핵하고 죄를 주면 언로(言路)에 방해로움이 있을까 두렵다’고만 하였다. ‘죄는 인정하지만 처벌은 안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이야기들을 벌이자 성종 임금은 답답하였다.
그래서 성종은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형방승지(刑房承旨) 안침(安琛)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서감원(徐坎元)의 일을 의정부와 재상들이 모두 추핵(推劾)하지 말기를 바라는데 , 지금 서감원의 진술한 말은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간사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서감원이 권경우(權景祐)와 채수(蔡壽)의 말한 바를 국가에 관계된다고 하면서, 처음에는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고, 초사(招辭)에서는, ‘대구부사(大丘府使) 임수창(林壽昌)은 공이 없는데 올려 쓰고, 남양부사(南陽府使) 채신보(蔡申保)는 병으로 인하여 일을 다스리지 아니하였으나 조행(操行)이 있고 학정(虐政)이 없다고 하였으니, 채신보가 만약 병이 없이 일을 다스리지 아니하였다면 죄가 돌아감이 있기 때문에 서감원이 병을 칭탁해 말한 것이다. 이는 진실로 곧지 못함이 심하다.
<중략>
나는 생각하기를, 임수창과 채신보를 올리고 내친 것은 삼공(三公)의 논의가 지공무사(至公無私)에서 나왔으니, 사람들이 이 후로 권계(勸戒)하는 마음이 있을 것인데, 서감원은 삼공이 올리고 내친 처사가 잘못이라고 하여, 이름은 진언(陳言)이라고 하면서 몰래 간사함을 품고 사사로움을 구하는 실로 무상한 소인이다.
이제 서감원의 헐뜸음이 이와 같으면, 삼공은 마땅히 잘못 천거(薦擧)한 것을 사죄할 것인데, 도리어 서감원을 추핵하지 마라 하니, 나는 정승들의 말한 바를 알지 못하겠다. 만약 서감원의 말이 옳다고 하면 삼공은 그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제 정승과 육조(六曹) 당상관(堂上官)이 모두 여기 모였으니, 다시 물어서 계달하라."
형방승지(刑房承旨) 안침(安琛)이 이 일의 전말(顚末)을 정리하여,
"정승들이 모두 ‘이 사람이 참으로 간사하고, 말의 앞뒤가 다르긴 하지만, 구언(求言)한 사람에게 죄를 주면 언로(言路)가 막힐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하고 있고, 우의정(右議政) 홍응(洪應)도 같은 뜻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또한 저 역시 죄주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나 주상께서 구언(求言)하는 전지(傳旨)에 이르시기를, ‘말이 비록 적중하지 아니하더라도 또한 너그럽게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이제 만약 추핵(推劾)하여 죄를 부과하면 이 사람은 애처로울 것이 없으나 언로가 막힐까 두렵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생각이 달랐다.
"경(卿)이 이처럼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경은, ‘말이 비록 맞지 아니하더라도 용서하라.’는 뜻으로 말하지만, 서감원은 언사(言事)를 칭탁하여 자기의 사사로움을 이루기를 구한 것이다. 채수(蔡壽)는 서감원에게 사촌이고, 채신보(蔡申保)는 삼촌인데 처음에는 드러내어 말하지 아니하였다. 만약 마음에 사사롭고 굽음이 없으면 옛사람은 비록 아버지라도 아들을 추천하는데 하물며 삼촌 · 사촌이겠는가?
이제 서감원의 간사함을 알면서 죄주지 아니하면 소인을 물리치는 도리가 어떠하겠는가? 만약 과실을 말하는 자가 또 있으면 또 그 죄를 묻지 않아야 하겠는가?
이번에 죄주려고 하는 것은 언로(言路)를 막고 끊으려는 것이 아니라 간사한 소인을 두고 심문하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형방승지(刑房承旨) 안침이 두세 번 억지하여 아뢰었으나, 임금은 막무가내였기 때문에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나가서 재상들에게 말하니, 한명회(韓明澮)와 윤호(尹壕)는 "서감원의 아뢴 바가 간사하니, 버려 둘 수 없다."는 대답이었고, 손순효(孫舜孝)를 비롯한 나머지 대신들은 ‘서감원을 죄 주어 마땅하지만, 구언(求言)한 뒤에 죄를 묻는다면 언로가 막힐까를 두렵다’는 것이었다.
하였다. 그러자 성종은 삼공을 겨냥해서, "서감원의 말이 옳으면 의정부의 논의가 그르니, 삼공(三公)은 마땅히 견책(譴責)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형방승지(刑房承旨) 안침이 다시 나가서 재상들에게 물으니, 모두들 ‘의정부에서 올리고 내친 것은 옳다. 그러니 서감원이 잘못이라고 했다.’ 역시 대신들은 핵심을 비켜나가는 발언만 하고 있는 셈이다.
성종은 이런 미적지근한 이야기만 하는 대신들이 실망스러웠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죄는 주지마라’고 했는데, 임금이 죄를 내리면 그 결과는 임금의 책임라는 식이라는 생각을 한 듯하다. 그리하여 임금이 결론적으로 ‘서감원을 추핵하겠다’는는 이야기를 했다.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의정부를 옳다고 하고, 서감원을 그르다고 하니, 궁하게 추핵하지 아니할 수 없다. 또 채수가 서감원의 상서(上書)에 부동(符同)함이 없지 아니하니, 그 여럿의 의논을 관찰사(觀察使)에게 치서(馳書)하라."
성종 15년(1484) 11월 10일에 성종은 경연(經筵)에서 강(講)을 마치고, 대신들과 함께 천변과 다시 올라온 서감원을 국문한 내용을 가지고 논의를 하였다.
먼저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어제 천둥과 비는 음양(陰陽)의 절후(節候)를 잃은 것이다. 대저 천변(天變)은 인사(人事)에서 말미암는 것인데, 나는 무슨 일에 잘못이 있고 어떤 정사가 빠뜨림이 있는지 알지 못하니, 그것을 각각 말하라."
하니, 영사(領事) 노사신(盧思愼)이 먼저 말을 꺼내었다.
"바야흐로 이제 성상께서 형벽(刑辟)에 뜻을 두시어 분변하기를 매우 밝게 하시니,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서감원(徐坎元)은 말이 비록 적중함을 잃었으나, 이미 구언(求言)하였는데, 죄를 더하면 언로(言路)가 막힐까 두렵습니다."
하고, 지평 박문간(朴文幹)도,
"구언(求言)하였는데, 도리어 말한 자에게 죄를 주면 사람들이 반드시 서감원의 일로써 경계를 삼을 것이니, 이제 만약 용서하면 성상의 포용(包容)하는 덕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였다. 종전과 똑같은 이야기였다. 그러자 임금이 말하기를,
"서감원이 이른바 언사(言事)로 파직(罷職)되어 오랫동안 복직되지 아니한 자라고 한 것은 뜻이 채수(蔡壽)에게 있는데도 정윤정(鄭允貞)으로 말하였고, 수령을 올리고 내치는 것이 공론(公論)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뜻이 채신보(蔡申保)에게 있는 것인데 처음에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간사함이 막심하다. 이제 만약 죄를 더하지 아니하면 나라에 기강(紀綱)이 없을 것이다."
라는 원칙을 말하였다. 이틀 뒤에도 이야기는 이어졌다. 임금이 야대(夜對)에 나아가 설경 성희안 등과 고금 제왕의 자취와 민생의 고락 및 정치의 득실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먼저 성종이,
"오늘은 마침 매우 춥기에 술을 내리도록 명하였으니, 그대들은 고금(古今) 제왕(帝王)들의 다스려졌다 어지러워졌다 흥했다 망했다 한 자취와, 민생(民生)들의 고락 및 정치의 득실(得失)을 논하고, 또한 생각하고 있는 바를 진달(進達)하라."
하였고, <중략>
성희안(成希顔)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즉위(卽位)하신 처음에는 간하는 말을 들어주기를 마치 물 흐르듯이 하며 오직 여러 아랫사람들이 다 말해주지 않으려 할까 싶어 하시면서 허심탄회(虛心坦懷)한 마음으로 들려주기를 기다리셨는데, 근년에 들어서면서 점차로 처음과 같지 않으시어 정윤정(鄭允貞) · 서감원(徐坎元) 같은 사람들을 모두 일을 말한 것 때문에 형구를 채우고 고신(栲訊)하게 하므로 대소(大小)의 신하들이 말하기를 기휘(忌諱)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처음으로 홍문관(弘文館)에 들어왔을 적에 폐출(廢黜)한 왕후(王后) 윤씨(尹氏)의 일을 언급(言及)하자, 부제학(副提學) 유윤겸(柳允謙)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채수(蔡壽)와 권경우(權景祐)가 파출(罷黜)당하게 된 것은 모두 폐출(廢黜)한 왕후에 관한 일 때문이었다.’ 하며, 몹시 금하여 제지했었습니다. 유윤겸은 문학(文學)이 있어 사체를 아는 사람인데도 오히려 이러하였으니, 그 이하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꺼리어 말하지 않는 것은 셀 수 없을 것입니다. <이하 생략>
여기에서 그동안 경상도 관찰사 이육에게 여러 차례 ‘서감원을 엄중하게 추국하라’고 하명하여 내용의 전말을 밝혀냈지만, 이 과정에서 서감원은 ‘형구를 채우고 심한 고신(栲訊)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종 15년(1484) 8월에 서감원이 봉사(封事)한 후에 조정에서는 ‘서감원’에게 죄를 주어야 하느냐 아니면 구언으로 이루어진 일이니 언로를 막지 않기 위해서는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임금과 대신들의 대립이 심하였고, 채수 선생은 사촌인 서감원이 괜히 구언(求言)에 따른 상소를 하는 바람에 본인이 연루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이런 논의가 4개월이나 이어지자, 지금까지 지켜만 보던 채수 선생이 이러다가는 어쩌면 일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번질까 두려웠다. 그래서 11월 21일에 자신의 억울함과 답답함을 상소하였다.
채수(蔡壽) 선생이 서감원의 상소와 자신과는 무관함을 상소한 내용은 이렇다.
"신은 초모(草茅)의 가난한 선비로서 다행히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친당(親黨)이 없었으나 특별히 천은(天恩)을 입어 외람되게 경연[經幄]에 참여하여 논사(論思)에 참여함을 얻었고 후설(喉舌)에 발탁되었으며 헌장(憲長)으로 뛰어 올려서 장려하여 권장하고, 분수에 맞지 아니한 것을 끌어 비유하여 혹은 강개(慷慨)하다고 일컬으시고 혹은 나라에 몸을 바친다고 일컬으시며, 또 옛사람인 고(皐) ·기(夔) ·요(姚) ·송(宋)을 들어서 힘쓰게 하셨으니, 신이 명령을 듣고 황공하고 부끄러워 몸 둘 곳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면 재주가 가볍고 덕이 적어서 도우고 보탠 것이 없었으나, 홀로 헤아리건대 이미 언책(言責)을 맡았으면 마땅히 숨김이 없이 말을 다하여야 하늘같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을 만나면 바로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혜와 생각이 얕고 부족하여 말한 바가 그릇되고 망령스러워서 위로 천위(天威)를 저촉하였으니 죄가 헤아릴 수 없는데, 성상께서 다른 뜻이 없음을 살피시고 묻지 않으시므로, 신이 이에 대궐 뜰에서 슬피 울면서 재생(再生)의 은혜에 감격하였습니다.
신은 본래 집이 가난하여 돌아갈 곳이 없었는데, 신의 장인[妻父]이 함창(咸昌)에 살고 있었으므로 신이 가서 밥을 먹은 지 3년이 되었습니다. 여러 백성들과 함께 밭을 갈고 우물을 파며 살았는데, 어찌 다른 뜻을 가졌겠습니까?
신의 이성 사촌(異姓四寸) 동생 서감원(徐坎元)이 진언(陳言)을 통하여 국정(國政)을 비방하고 겸하여 신의 부자(父子)의 일을 말하여 비호(庇護)하는 뜻이 있는 것처럼 할 줄이야, 이는 바로 공적인 일에 사심(私心)을 개입시키는 사람이니 국법으로 엄하게 징계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신이 서감원과 가까운 친척이고 한 도(道)에 같이 살았으며, 또 신의 부자(父子)의 일을 말하였기 때문에, 성상께서는 신이 미리 알고 있음을 의심하시어, 신과 부동(符同)한 형상을 장신(杖訊)하게 하셨는데, 신은 가슴을 치고 하늘에 부르짖으며 마음속의 것을 낱낱이 삼가 아래와 같이 진술하니,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천지와 부모 같으시니 애처롭게 여기시어 살펴 주소서.
신이 서감원과 비록 가까운 친척이라고는 하더라도 신은 서울에서 생장하였고 서감원은 대구(大丘)에서 생장하였으며, 또 나이가 같지 아니하기 때문에 본래 친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신이 사는 함창과 서감원이 사는 대구와는 비록 한 도라고 하더라도 거리가 사흘 길인데, 신이 파직되어 돌아간 뒤로 서감원이 한 번도 신의 집에 오지 아니하였고 신도 서감원의 집에 한 번도 가지 아니하였습니다.
서감원이 형장(刑杖)을 이기지 못하여 혹시 거짓 자복하였을지라도 신의 집 문간의 방향이 어느 쪽으로 있는 것과 산천 지형을 서감원이 말하지 못하였고, 서로 모여서 말한 절차를 서감원이 말하지 못하였으며, 신의 진언(陳言)하는 초고(草稿)와 서로 통한 소식을 서감원이 끝내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서감원이 만약 신의 집에 왔었다면 반드시 경유하여 묵은 곳이 있었을 것인데 함창 고을 사람이 누가 알지 못하겠습니까? 또한 신이 만약 서감원의 집에 갔었다면 역시 경유하여 묵은 곳이 있었을 것인데 대구 고을 사람이 누가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이것을 밝혀내면 성상께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언사(言事)의 그릇되고 망령된 것으로 거의 중한 죄를 얻게 되었으나, 외람되게 성은(聖恩)을 입어 전리(田里)에서 편히 사는데, 어찌하여 다시 어리석고 망령된 가까운 친척과 같이 국정을 비방하고 신의 몸을 비호(庇護)하게 하여 희망을 두고자 하겠습니까?
신이 비록 어리석을 지라도 이것은 하지 아니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 가엾이 여겨서 살피소서.
신의 아비는 나이 70으로, 늙어 병이 잇따릅니다. 이제 조정의 공론으로 전원(田園)에 폐(廢)해 있게 하니 분수에 달게 여기는 바인데, 어찌 초모(草茅)의 한 미치광이 선비의 말로써 고쳐 바꿀 수 있겠습니까? 신이 비록 무상(無狀) 할지라도 사세(事勢)를 조금 아는데 어찌 광망(狂妄)한 가까운 친척으로 하여금 글을 올려 영구(營救)하게 하여 희망하는 바가 있겠습니까?
신이 비록 무식할지라도 이것은 하지 아니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가엾이 여겨서 살피소서. 예전 소자첨(蘇子瞻)이 죄를 얻어 쫓겨나자 친구가 상소하여 구(救)하려고 하다가 못하였는데, 소자첨이 뒤에 그 소초(疏草)에 칭찬하고 비호(庇護)하는 말이 있음을 보고는 혀를 빼물고 한참 있다가 거두며 말하기를, ‘이 글을 올렸으면 소식(蘇軾)은 반드시 죽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신하가 죄를 지었는데 밑에서 구(救)하기를 논하는 자가 있으면 다만 임금의 뜻을 격(激)하게 하기 때문에 소자첨이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신이 경사(經史)를 대강 알고 사리(事理)를 조금 아는데 어찌 이런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친구도 오히려 구제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가까운 친척으로 하여금 국정을 비방하고 신의 부자(父子)를 비호(庇護)하게 하여 희망을 가지려고 하겠습니까?
신이 비록 어리석고 망령스러울지라도 이런 짓은 하지 아니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 가엾이 여겨서 살피소서.
세조조(世祖朝)에 송희헌(宋希獻)이란 자가 있어 상서(上書)로 인하여 탁용(擢用)되었기 때문에, 그 후 유생(儒生)이 잇따라 상서하여 망령되게 국정을 논의하는 것은 모두 자기가 벼슬에 오르기를 중개하기 위한 꾀인데, 어찌 국가를 위하는 일이겠습니까?
신이 항상 그것을 미워하여 유자(儒者)가 써야 할 마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상서도 오히려 미워하는데 더구나 가까운 친척에게 권하겠으며, 더구나 신의 부자(父子)에 관계되는 일이겠으며, 더구나 조정 정사를 비방하게 하겠습니까?
신이 비록 어리석고 망령될지라도 이는 하지 아니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가엾이 여겨 살피소서. 옛 신하는 비록 폐해 버림을 당하였을지라도 차마 임금을 잊지 못하기 때문에 굴원(屈原)은 궁궐을 슬프게 바라보았고 두보(杜甫)는 종남산(終南山)을 오히려 그리워하였는데, 신은 10년 동안 시종(侍從)하면서 날마다 천안(天顔)을 뵙다가 하루아침에 서울을 떠나 남쪽 지방에 유락(流落)하여 있으니, 대궐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폐기하여 버려두는 것은 성상께 있고 궁하고 통함은 천명(天命)에 있는데, 어찌 어리석고 망령된 가까운 친척으로 하여금 국정을 비방하고 신의 부자를 비호(庇護)하게 하여 희망을 가지려고 하겠습니까?
신이 비록 무상(無狀) 할지라도 이는 하지 아니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 가엾이 여겨서 살피소서.
신의 마음은 해와 별처럼 밝은데 성명(聖明)한 세상에 밝게 드러내지 못하면 신이 원통함을 머금고 땅에 묻히게 될 것이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신의 이 원통함은 천지신명(天地神明)이 다 알고 조종(祖宗)의 영령(英靈)이 다 아시는데, 신이 만약 서감원(徐坎元)과 부동(符同)하여 감히 간사함을 품고 성상을 기망(欺罔)하였으면 천지신명이 반드시 죽일 것이며 조종의 영령이 반드시 죽일 것인데, 신이 감히 속이겠습니까?
전일에 신정(申瀞)이 친히 간사한 죄를 범하고 또 글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여 거듭 성상을 속이니, 성상께서 더욱 노여워하시어 마침내 중한 법에 처하셨습니다. 신이 일찍이 그 일을 눈으로 보았는데 어찌 감히 부동(符同)하는 일로써 거듭 성상을 속여서 큰 화(禍)를 더 불러일으키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가엾이 여겨서 살피소서.
옛사람이 쇠[鐵]를 잃은 자가 있었는데 그 이웃 사람을 의심하여 아침에 그 사람을 보니 말하는 것이 쇠를 도둑질한 자와 같고 행동과 얼굴이 쇠를 훔친 자와 같았었습니다. 그런데 그 쇠를 다른 곳에서 찾은 뒤에 다시 그 사람을 보니 언어와 용모가 쇠를 훔친 자와 같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마음에 의심스러움이 있으면 일마다 의심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가 그 실정을 알아낸 뒤에야 풀어지는 것입니다. 신의 이 일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 서감원을 나치(拿致)하여 신과 대변(對辨)하게 하고,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여러모로 물어서 그 실정을 끝까지 추궁하게 하면 성상의 의심스러움이 환하게 풀어질 것이며, 외로운 신에게 맺힌 원통함을 펼 수 있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천지나 부모와 같으시니 가엾이 여겨 살피소서. 신은 억울하여 통곡하는 지극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채수 선생은 장문(長文)의 상소(上疏)를 통해서 구구절절하게 ‘본인이 서감원과 부동하지 않았음’을 설명을 하였다. 누가 보더라도 채수 선생이 그런 무도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성종도 상소 끝에 이렇게 어서(御書)를 썼다.
"지금 그대의 글을 보니 나의 의심스러움이 조금 풀린다. 내가 전에 그대를 어떤 선비로 대접하였으며 그대도 나를 어떤 임금으로 섬겼는가? 맡기고 의심하지 아니한 것은 믿기 때문이고 뽑아 쓰기를 차례대로 하지 아니한 것은 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대가 무슨 마음을 가지고 기환(奇患)을 빚어내어 무씨(武氏)의 주(周)나라를 다시 오늘날에 생기게 하는가?그리고 또 그대의 글을 보니, 그대가 소자첨(蘇子瞻)이 되면 나는 어떤 임금이 되며, 그대가 두보(杜甫)나 굴원(屈原)이 되면 나는 어떤 임금이 되겠는가? 대저 선비[儒]로 이름하는 것이 하나만이 아니다. 유협자(游俠者)도 선비이고, 문사자(文史者)도 선비이며, 광달자(曠達者)도 선비이고, 지수자(智數者)도 선비이며, 장구자(章句者)도 선비이고, 사공자(事功者)도 선비이며, 도덕자(道德者)도 선비이다. 그대는 항상 어떤 선비로 자처하느냐?"
그리고 "이 뜻으로써 물어 보라."고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자, 승정원이,
"죄인의 예(例)로 뜰 밑에 잡아다가 국문(鞫問)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불러서 물어야 하겠습니까?"
하자, "불러서 물으라."고 했다. 그래서 죄인 아닌 죄인의 몸으로 채수(蔡壽) 선생은 승정원에 불려와서 다시 한번 본인의 결백을 이야기했다.
"신이 미천한 몸으로서 특별히 발탁하심을 받았으므로, 이미 성상을 만났으니 마땅히 그 포부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무릇 품은 바가 있으면 말을 다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습니다. 지혜와 생각이 얕고 부족하여 그릇 헤아리고 망령되게 아뢰었으니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한데, 성상의 은혜가 하늘과 같아서 오늘날 목숨을 보전함을 얻었습니다.
신이 굴원과 두보를 말한 것은, 다만 신이 대궐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말한 것뿐이니, 어찌 감히 두 신하에게 스스로 비하겠습니까? 신이 소자첨의 일을 말한 것은, 무릇 신하가 죄를 지으면 신하가 영구(營救)할 수 없는 것인데, 서감원의 비호(庇護)는 신이 진실로 무익함을 알기 때문에 신이 서감원과 부동(符同)하지 않았음을 밝히려고 한 것입니다. 어찌 감히 소자첨에게 스스로 비하겠습니까?"
그러자 성종은 어서(御書)로 이르기를,
"내가 물은 바는 이것만이 아닌데, 굴원·소자첨을 가지고 대답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대가 만약 다시 조정에 있게 되면 마땅히 예전 어떤 신하를 본받겠는가?"
하였다. 이미 성종은 채수 선생이 본인의 재기(再起)를 위해서 서감원과 짜고 상소하지 않았음을 확인하였기 때문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채수 선생을 다시 불러서 정사를 함께 논의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채수 선생은 다시 답하기를,
"신은 본래 우유(迂儒)인데 어떤 선비로 자처하겠습니까? 이러므로 감히 지적해 대답하지 못합니다. 다만 평생에 세운 뜻은, 옛 충신을 본받고자 할 뿐입니다. 다만 재주와 덕과 지혜가 없어서 일을 헤아리는 데에 그릇되어 마음과 일이 서로 어긋납니다."
라고 하였고, 성종은 다시 군신관계에 대한 의견을 듣고자 했다. 이는 과거에 같이 정사를 논하다가 6년이 넘게 언로가 막혔었기 때문에 지금의 생각이 궁금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다시,
"이른바 옛 충신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른바 일을 헤아리는 데 그릇되었다고 한 것은 어떤 일이며, 이른바 마음과 일이 어긋난다는 것은 어떤 계책인가?"
하니, 채수 선생은,
"옛 충신은 한 사람만이 아닙니다. 무릇 나라에 뜻을 둔 자는 모두 본받고자 합니다. 그리고 일을 헤아리는 데에 그릇되었다는 것은 신이 전일에 일을 망령되게 헤아리고 잘못 계달하였기 때문에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과 일이 어긋난다고 한 것은, 신의 마음은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였지만 일을 생각하는 데에 그릇되었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하였다. 성종은 또,
"그대가 그릇되고 망령되게 생각했다고 하는 것이 정말인가? 그것이 정말이라면 그릇되고 망령되게 생각한 바의 뜻을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이다. "
하니, 채수는 글로 써서 답을 하였다.
"신이 한갓 옛 일만 알고 대체를 알지 못하여 망령되게 헤아리고 계달하였다가 상교(上敎)를 들은 뒤에 비로소 국가에 장차 화환(禍患)의 일이 있을 것을 알고 신이 황공하여 몸둘 바가 없었고, 중한 죄를 받기를 달게 여겼는데, 그 때에 특별히 천은(天恩)을 입어 불문(不問)에 붙이고 스스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길을 열어 주시었며, 하교 하시기를, ‘무릇 사람이 그 허물을 아는 자가 적은데 그대가 허물을 잘 알기 때문에 놓아둔다.’고 하셨기에, 신이 통곡하며 다시 살리신 은혜를 감격해 하였으며, 이제까지 전일의 잘못을 생각하면서 아프게 스스로 뉘우치고 꾸짖을 뿐입니다."
하였다. 어서가 또 전달되었다.
"만약 옛일을 안다면, 어찌 내 말을 기다린 뒤에야 화환(禍患)의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가?"
하니, 채수 선생은
"신이 망령되게 헤아리고 미욱[迷感]하기 때문에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는데, 상교(上敎)를 들은 뒤에 미쳐서야 알았습니다."
하였다. 이처럼 성종과 채수선생은 서로가 믿는 군신의 관계이면서 옛날 폐비 윤씨의 일로 파직시킨 이후 서로의 연락이 두절되었기 때문에 많은 문답이 이어젔었다. 그리고 전교하기를,
"그대가 서감원과 부동(符同)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알았다. 다만 그대가 옛 일을 안다면 어찌 내 말을 기다린 뒤에야 그것을 알았는가?"
하는 서운함을 드러내며, 음식을 대접하도록 명하니, 채수가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미욱한 소치로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망령되게 생각하여 그릇되었습니다. 신이 만약 이 같은 일이 화환(禍患)의 단서가 될 것을 헤아려 알았으면 신이 어찌 감히 하였겠습니까? 신이 여기에 미치지 못한 것은 그릇 헤아리고 망령되게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라고 아뢰자, 어서(御書)로 이르기를,
"그대가 지금 생각하여 알았다면 그 화환의 얕고 깊음을 말할 수 있겠는가? 크면 어느 지경에 이르고 작으면 어느 지경에 이르겠는가?"
하니, 채수가 글로 써서 아뢰기를,
"신이 지금 생각하면 이 같은 일의 화환이 깊고 큰 것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신이 미욱하여 그 때에 모두 미처 추측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신의 망령되게 헤아린 잘못이었습니다."
하자, 성종은 다시 어서(御書)로 이르기를,
"화(禍)의 큰 것은 이보다 지나친 것이 없고 그릇된 계책은 곧 나라를 어지럽게 만드는데, 그대의 뉘우치고 꾸짖는 것이 앞의 허물을 덮을 수 있겠는가? 충성과 아첨은 둘이 함께 존재할 수 없으며 또 크게 교묘한[巧] 것은 서투른[拙] 것과 같다는 것을 그대가 아느냐?"
하니, 채수가 글로 아뢰기를,
"이 같은 큰일을 신이 그 때 우혹(愚惑)하여 모두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으니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한데, 특별히 천은(天恩)을 입어서 스스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길을 열어 주시어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나라에 보답하려는 마음은 신명(神明)이 아는 바인데, 일을 헤아리면서 이와 같이 잘못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자신을 매우 호되게 꾸짖으며 두고두고 후회합니다."
하니 ‘알았다. 하였다. 성종과 채수 선생이 문답을 계속한 화환(禍患)이란, 후대에 연산군이 즉위했을 때 생모의 폐위와 사사건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대한 걱정이라는 생각이다.
성종은 승정원(承政院)에,
"상소(上疏)와 문답한 글을 의정부(議政府)와 영돈녕(領敦寧) 이상에게 보여서 의논하게 하라."
고 하자, 정창손(鄭昌孫)은,
"이제 채수의 상소의 뜻을 보건대, 서감원(徐坎元)과 부동(符同)하지 아니한 뜻이 매우 명백합니다. 채수는 재상이었는데 어찌 만들고 꾸며서 천총(天聰)을 속이겠습니까?"
하면서 채수 선생의 편이었고, 한명회(韓明澮) · 심회(沈澮) · 서거정(徐居正)은,
"서감원의 추핵(推劾)이 끝난 뒤에 다시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서감원의 추핵이 끝나고 채수 선생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으로 서감원의 추핵이 끝나면 채수 선생에 대한 일은 자동적으로 풀어진다고 본 것이다. 윤필상(尹弼商)은,
"서감원의 상소는 비록 형적(形跡)의 혐의로움이 있더라도, 채수는 이름 있는 문신(文臣)으로서 정대(正大)함을 자처(自處)하는데 어찌 이처럼 부동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고, 홍응(洪應)은,
"이제 채수의 상소와 어서(御書)의 문답을 보건대, 채수는 서감원과 더불어 서로 통하지 아니한 것이 명백할 뿐만 아니라, 채수는 이름이 있는 선비인데 만약 서감원에게 요구하여 살기를 구하였으면 어찌 채수라 하겠습니까?"
하였으며, 이극배(李克培) · 윤호(尹壕) · 한치례(韓致禮) · 노사신(盧思愼)는 앞서 한명회(韓明澮) · 심회(沈澮) · 서거정(徐居正)의 의견을 따랐다.
허종(許琮)은,
"채수가 전일에 아뢴 잘못된 일을 이제 대답한 것으로 보건대, 마음에 진실로 스스로 뉘우치고 꾸짖은 것입니다. 채수와 서감원은 가까운 친척이고 한 도(道)에 같이 살고 있으므로 사정이 의심스러울 만하나, 채수는 오래 성조(聖朝)를 모시어 사체(事體)를 대강 아는 자인데 어찌 이같은 무상(無狀)한 일이 있겠습니까? 벌써 서감원을 추문(推問)하도록 명하셨으니, 추문을 마치고 아뢰는 것을 기다렸다가 처치(處置)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여러 대신의 의견을 모두 듣고서 성종은,
"서감원의 추고(推考)를 마치고 계문(啓聞)한 뒤에 다시 아뢰라."
고 전교하였다.
그런데 지난 8월 달에 장문(長文)의 봉사(封事)로 몇 달동안 조정을 시끄럽게 하고, 죄 없는 채수 선생이 죄인 아닌 죄인의 몸으로 조정에 불려 나오도록 하는 소란을 피웠던 서감원이 득병(得病)하였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 졌다. 그때가 11월 28일의 일이었다. 아마도 자복을 받기 위해 경상도 관찰사 이육이 심하게 다룬 듯 했다. 그래서 경상도 관찰사 이육(李陸)이,
"서감원(徐坎元)을 이미 고신(栲訊)하였으나 불복하고 이제 병을 얻었으니 낫기를 기다려서 형(刑)을 가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성종은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議政府)에게 물었다.
"채수(蔡壽)의 변명과 서감원의 초사(招辭)가 여러 사람의 뜻에 어떻다고 하는가?"
이에 정창손(鄭昌孫)은,
"채수의 변명이 비록 간절하더라도 만약 서감원과 서로 통하였으면 그 죄가 작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으로는, 처음에 전지(傳旨)를 내려서 구언(求言)하였는데 또 끝까지 추궁하여 형벌로 다스리는 것은 적당하지 못할 듯 합니다."
하였고, 한명회(韓明澮)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러나 심회(沈澮)와 윤호(尹壕)는,
"서감원의 초사는 믿기 어렵고 채수의 변명도 믿기 어려우니, 다시 추핵하여 실정을 알아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는 다른 견해를 말하였고, 윤필상(尹弼商)은, 서감원은 잘 모르나, ‘채수는 명예를 구하고 벼슬에 오르기를 꾀하는 사람이 아니다.’ 라 하였다. 홍응(洪應)도 역시,
"채수는 시례(詩禮)의 출신으로 강개(慷慨)한 뜻이 있으며, 성명(聖明)을 만나 쌓은 포부를 펴고자 하다가 불행히 차질(蹉跌)되었는데, 어찌 구차스럽게 서감원에게 의지하여 살기를 구하겠습니까?"
하였고, 이극배(李克培) ․ 노사신(盧思愼) ․ 서거정(徐居正) ․ 허종(許琮)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러나 한치례(韓致禮)는,
"하문(下問)할 때에 서감원이 말하기를, ‘파면을 당하고 오래 복직되지 아니한 자는 채수이고 폄출(貶黜)된 자는 채신보(蔡申保)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가까운 친척이므로 서감원이 반드시 그 속뜻이 있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끝까지 추문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대신들의 의논을 듣고 난 후 성종은 마지막으로 승정원의 승지들의 의논을 듣고자 어서(御書)를 승정원(承政院)에 내렸다.
"물건을 잃고서 도둑을 방지하는 것과 물건을 잃기 전에 도둑을 방지하는 것이 어떤 것이 적당한가? 채수의 일은 이미 헤아리고 있는데 승정원의 마음은 어떠한가? 아첨하지 말고 붙따르지 말라."
하니, 승지들이 모두가,
"서감원의 일로 물으시기 때문에 서감원의 일만 대답하겠습니다. 서감원이 비록 구언(求言)을 통하여 상소하였을지라도 가까운 친척의 일을 말하였으니 벌써 공정하지 못한데, 또 하문(下問)할 때에 숨기고 사실대로 대답하지 아니하였다가 형문(刑問)한 뒤에야 그 실정을 말하였으니, 지극히 간사합니다. 그러나 채수의 상소로써 보면 부동(符同)한 정상(情狀)은 없는 듯합니다."
하였다. 이렇게 여러 대신의 의견을 다 들은 성종은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예전에 중니(仲尼)가 노(魯)나라 사구(司寇)가 되어 소정묘(少正卯)를 베었는데, 이제 서감원의 간사함이 더할 수 없이 심하니 죄가 마땅히 베어야 하나, 구언(求言)하는 즈음에 만약 죄를 더하면 외방 사람들이 어찌 내 뜻을 알겠는가? 반드시 말한 일로써 죄를 입었다고 여길 것이다. 강과 바다는 작은 물도 가리지 아니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큰 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특별히 서감원의 죄를 용서하니, 이 뜻으로써 전지(傳旨)를 내리도록 하라."
그리고 아울러 의정부(議政府)에 서감원의 죄를 용서하여 구언을 중히 여기는 마음을 중외에 알리도록 명하였다.
"대저 위에서 구언(求言)하는 것은 올바른 의논을 들어서 그 허물을 고치려는 것이며, 아래에서 말을 올리는 데에는 실정을 토로하여 임금의 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 귀하다. 만약 정성으로써 말을 구하지 아니하고 올리는 것도 사실대로 하지 아니하면 어찌 상하(上下)가 서로 돕는 도리라고 하겠는가?
내가 서감원(徐坎元)의 아뢴 말을 보건대, ‘언사(言事)로서 파면을 당하여 오래 복직(復職)되지 못하고 수령(守令)을 올리고 내치는 것이 모두 공론(公論)에 맞지 아니한다.’고 하면서도, 아무개가 파면을 당하였고 아무개가 내침을 당하였다고 지적해 말하지 아니하고 인이불발(引而不發)하면서 내 뜻을 시험하였다.
처음 추문(推問)할 때에 또 곧게 말하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정윤정(鄭允貞)을 들어서 대답하였다가 형추(刑推)하도록 명하니 사실을 토로하기를, ‘내침을 당한 자는 채신보(蔡申保)이고 파면을 당한 자는 채수(蔡壽)이다.’ 하였다. 채수와 채신보는 서감원에게 모두 가까운 친척이므로 임금에게 요구하고 위를 속이는 정상(情狀)이 이미 드러났으니, 신하의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있겠는가? 간사한 짓을 반복(反覆)하였으니, 심한 소인(小人)이었다.
예로부터 나라의 임금이 한 사람의 소인을 쓰면 여러 소인이 이르러 그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한 사람의 군자(君子)를 쓰면 여러 군자가 이르러 그 나라가 다스려지는 것인데, 그것을 일찍 분변하여 올리고 물리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예전에 공자(孔子)가 소정묘(少正卯)를 베었는데 노(魯)나라가 크게 다스려졌고, 위왕(威王)이 아대부(阿大夫)를 삶아 죽였는데 제(齊)나라가 또한 크게 다스려졌다. 서감원과 같은 무상(無狀)한 자는 비록 엄중한 법으로 조치하더라도 형벌에 잘못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옥에도 티[瑕]가 있으며 산이나 숲은 더러운 것을 숨기고 있다 하였는데, 왕자(王者)가 신하에게 유독 악한 자를 너그럽게 감싸서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서감원의 죄를 용서하여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내가 구언(求言)하는 것이 정성으로 하고 헛이름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한다. 그대 의정부(議政府)에서는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라."
그리고 이번 일로 가장 큰 정신적 피해를 입은 사람은 채수(蔡壽) 선생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에 ‘서감원과 부동하였다’고 결론이 나면 채수 선생으로서는 형(刑)을 살아야 할 입장이었다. 그 당시로는 사건의 전말이 뒤집혀서 죄없는 사람들이 무수하게 희생되었기 때문에 일의 진전이 조마조마했으나 채수 선생의 진심이 잘 반영되어 그런 위기를 잘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성종이 채수 선생을 명소(命召)하였다.
서로가 믿었고 아꼈던 군신(君臣)이었다. 폐비 윤씨의 일만 아니었다면, 지금쯤은 더 높은 지위에서 성종을 보필하였을 채수 선생을 보자, 성종도 만감이 교차하였다. 그동안 낙향하여 연락이 닿지 않았던 채수 선생을 바라보며 성종은,
"그대가 이제 어떻게 마음을 가지겠는가?"
를 물었고, 채수 선생은,
"신이 이미 허물을 뉘우쳤는데 어찌 옛날 마음이 있겠습니까? 이미 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어 성상의 은혜가 지극히 중하니, 신은 스스로 마음을 새롭게 하기를 원할 뿐입니다."
라고 답하였다. 다시 성종이 어서(御書)를 채수에게 보이기를,
"어진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데에는 모두 요(堯)·순(舜) 같은 임금을 만들기를 뜻하여 요(堯)·순(舜)의 도(道)가 아니면 감히 왕의 앞에 아뢰지 아니하였고, 밝은 임금은 진실로 적임자를 얻으면 그 말을 존중하고 그 계교를 들으며 배워서 스승으로 삼는 것인데, 작상(爵賞)과 총록(寵祿)은 논할 것이 못된다. 만약 은총을 믿고 위에 아첨하면서 자손을 위하는 계책으로 삼으려고 하여, 시속(時俗)에 따르는 것을 좋은 꾀로 여기고 정직한 것은 기회를 잃는 것이라 한다면 보호하고 보호하지 못함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그대가 처음에는 정대(正大)한 것으로써 나를 대우하였는데 지금은 착오(錯誤)된 것으로써 몸을 보호하니, 정대한 때에도 착오됨이 있는가? 허물을 알고 곧 고치는 것은 성인(聖人)이 허락하는 바인데, 내가 비록 사리에 어둡더라도 항상 성인을 사모하기 때문에 이제 또한 그대를 허락하는 것이다."
하니, 채수 선생이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신이 허물을 뉘우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신이 10년을 시종(侍從)하였는데, 비록 착오된 것으로 쫓겨나서 멀리 시골에 들어 앉았을지라도 대궐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밤낮으로 어찌 마음속에 잊었겠습니까? 신의 허물을 뉘우치는 마음은 천지 신명(天地神明)이 밝게 보는 바입니다."
하였다.
이 만남으로 서감원 때문에 오해를 받았던 채수 선생의 멍에도 벗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 채수 선생과 성종은 폐비 윤씨의 일이 있기까지는 서로가 신뢰하는 군신(君臣)이었기 때문에 이런 믿음이 이번 서감원의 일에서도 채수 선생을 좋은 쪽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또 조정의 대신들도 채수 선생의 인성과 처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옳은 방향으로 진언하여 무탈하게 채수 선생은 어두운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오히려 채수 선생에게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일 수 있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성종은 다시 채수 선생을 중용하였다. 1485년에 채수 선생을 종2품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과 종2품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냈으며, 중종 1년에는 종1품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진 이후 함창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3. 맺는 말
채수 선생은 1470년(성종 1)에 예문관 수찬으로 시작해서 1470년 인천군으로 임명되기 까지 37년 중에서 중간에 6년을 빼면 정확하게 31년간 환로에 있었다.
강직한 성격으로 권신 임사홍의 비행을 탄핵하고, 이어서 연산군 생모의 폐비 윤씨을 받들어 휼양할 것을 청하다가 성종의 노여움을 사서 벼슬길에서 물러난 일이 있다. 그러나 이는 부끄럽고 사사로운 일 때문이 아니고 국사(國事)에서 왕과의 의견 차이로 물러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물러나서 고향에 있던 시기에 이복사촌동생 서감원의 봉사사건에 어이없이 연루된 일이 일어났다. 성종이 채수 선생의 관직을 박탈한지 6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의 일들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을 시기였다. 만약에 성종이 괘씸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으면, 이번 일에 연루되어 있는 채수 선생의 처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위기일발의 시건’이었다.
그러나 성종은 채수 선생에 대한 서운한 감정보다는 다시 만난 반가움이 있은 듯 했고, 같이 조정에 있었던 대신들이나 대간들이 모두가 채수 선생을 옹호해 주었기 때문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만약에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는 자신의 재기(再起)를 위해 동생 서감원과 짜고 조정에 봉사를 한 파렴치한 사람으로 낙인(烙印)이 찍히고 또한 나라로부터 큰 벌을 받아서 채수 선생의 일생에서 치욕스러운 오점(汚點)을 남길 수가 있었다.
그래서 서감원의 봉사사건은 채수 선생에게는 ‘위기일발(危機一髮)’의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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