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義)에 삶을 바친 왕사(枉史) 김만원(金萬源)
권세환(문경대학교 초빙교수)
Ⅰ. 왕사(枉史) 김만원(金萬源)의 약사
1. 약사(略史)
김만원(金萬源)은 화벌상산김문낙성군(華閥商山金門洛城君) 휘 선치(先致)의 29세손이고 조선의 청백리 김덕함(金德咸)의 28세 손이다. 자는 복경(福卿)이고 호는 왕사(枉史)이며 상주 외서면 귀호리(龜湖里)에서 1857년(丁巳年 正月 初五日)에 출생하였다.
왕사는 어린 시절에 숙부 국파(菊坡)공에게 가학(家學)을 전수받았으며, 9세에 문해독(文解讀)하였고, 용흥사에서 수학하였다. 1882년 동해사에서 수학하였으며, 1884년 공이 27세에 아버지 홍석(洪錫)공이 별세하였으며 이후 산양(山陽) 존도리(尊道里)에서 살았다. 이때 김룡사와 대승사에서 공부하였으며, 인근의 문사들이 찾아와 강토(講討)하였다.
34세(1981년 辛卯年)에 고향으로 환거하여 남장사에서 공부하였으며, 총계(䕺桂) 조우영(趙佑榮)과 교유하였고, 37세(1894년 甲午年)때 화동면 은계리로 이거하였으며, 시로(是蘆) 황란선(黃蘭善)과 교유하였다. 47세(1904年 甲辰年)때 대재리(大堤里)로 이거하였으며 승지 정하연(鄭夏然)과도 교유하였다. 또한 왕사는 상주에서 거주하던 1907년(당시 50세)에 운강 이강년 의병장의 운강의진에 들어가 좌종사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의병장 이강년이 1908년 6월 4일 청풍의 까치성에서 적탄에 맞아 체포되었으며, 1908년 9월 19일 교수대에서 생을 마쳤다. 따라서 왕사가 의병활동에 참여한 기간은 운강의진(雲岡義陣)이 무너진 1908년까지 약 2년간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리고 62세(1919년 乙未年)에 예천 매포(梅浦)로 이거하였으며, 이곳에서도 왕사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또한 사곡에 서재(書齋)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68세(1925년 乙丑年)에 의성 다인동으로 이거하였다. 왕사는 이곳에서 76세(1932년 壬申年 七月 初八日)로 생을 마감하였다. 묘소를 대흥산(大興山)에 안장하였다가, 1945년(乙酉年)에 화동 은량산(銀良山) 아래로 이장하였다. 이 후 2010년 선생의 독립운동 경력이 인정되어 건국포장을 수여받으면서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하였다.
2. 왕사집(枉史集)
왕사집(枉史集)은 근세의 학자 김만원(金萬源)의 시문집으로 1947년 김만원의 제자들이 편집・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부록에 정창묵(鄭昌黙)의 행장(行狀)과 홍재관(洪在寬)의 묘갈명(墓碣銘)이 있다. 그리고 권말에는 변인규(卞仁圭)의 발문이 있다. 왕사집은 모두 8권 4책으로 석인본이며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
왕사집의 내용은 권1에 시 263수, 권2・3에 서(書) 100편, 권4에 잡저 11편, 권5에 잡저 17편, 서(序) 10편, 기(記) 10편, 권6에 발(跋) 20편, 잠 2편, 제문 19편, 권7에 축문 2편, 상량문 3편, 묘갈명 4편, 행장 3편, 유사 8편, 권8에 부록으로 행장과 묘갈명 각 1편, 만사 63편, 제문 2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는 주로 당대의 유학자들과 서로 안부를 묻거나 시사(時事)를 걱정하며 학문에 정진하도록 격려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별지(別紙)와 문목(問目)에 사서삼경을 비롯한 각 경전의 경문과 주석에 대해 질의·토론한 내용과 선유들의 학설을 분석・비판한 글이 실려 있다.
섬사설(蟾蛇說)에서는 두꺼비가 새끼를 낳기 위해 자신의 몸을 뱀의 먹이로 던지는 이야기를 빌려 부모 은혜의 막중함을 강조하고 효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으며, 수요설(壽夭說)에서는 인간 생명의 참다운 의미에 대해 논한 글로서 인생의 참 의미가 수요(壽夭)의 장단에 있지 않고, 인간의 도리를 지키며 사는 데 있음을 논하였다.
엄광론(嚴光論)에서는 선비로서의 자존감과 왕도정치에 대한 이상을 담으면서, 자신의 이상을 펼 수 없는 정치상황에서는 출세를 위한 출사는 하지 않겠다는 선비의 고절한 기개를 논하였으며, 진축장성(秦築長城) 등의 글에서는 중국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비판을 통해 당시 위정자들에 교훈을 주고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의도를 담아 논술하였다.
Ⅱ. 의(義)롭게 산 왕사 김만원의 삶
1. 문집(枉史集)을 통해 본 왕사의 사상
가. 시
自警(자경)
百事道理修 (백가지 일에 도를 닦아야 하고)
一身言行修 (내 한 몸도 언행을 닦아야 한다.)
莫說人不修 (다른 사람이 수신을 하지 못한 것을 말하지 말고)
假令身不修 (가령 나 자신을 닦지 못한다면)
何者可能修 (무엇을 가히 능히 닦으리오. )
世間許多修 (세상에는 닦을 일이 허다하나)
一是本身修 (하나 같이 자기 본신을 닦아야 한다.)
자경(自警)에는 왕사는 평소 자신이 생각하는 수신(修身)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먼저 하여야 할 일은 자기 자신을 닦는 일이라고 하였다. 시의 제목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내 자신의 수행 덕목 중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哀林子敬(애임자경)
君嘗從我我依君 (그대는 일찍부터 나를 따랐고, 나는 그대를 의지하여)
兩地情如一體分 (두 사람의 정이 한 몸 나눈 것과 같았다.)
我不棄君君棄我 (나는 그대를 버리지 않았는데 그대가 나를 버리니)
殘年此別復何云 (쇠잔한 나이에 이 이별을 다시 어떻게 할까)
애임자경은 서로 돈독히 의지하는 제자이며, 사돈지간인 사람을 잃은 아픔을 노래한 시이다. 임자경은 왕사가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이면서도 사돈지간으로 서로 돈독하게 의지하던 사람을 잃는 다는 것은 천지간에서 가장 큰 아픔일 것이다. 더욱이 두 사람의 두터운 정으로 말하면 몸은 두 개이지만 마음은 하나같은 서로 의지하던 사이였다. 더구나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임자경이 세상을 떠났을 때 왕사의 애통한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나. 서
答卞錫汝榮輔(답변석여영보)
- 상략 -
古人所謂診其子弟知其父兄者眞皆格語幸盆致義敎於旣成之地得以回瀾於旣倒之川秉燭於方晦之衢則窮居事業孰有大於是耶此固非家家人人所可期望千萬諒存焉
[해석]
답변석여영보
- 상략 -
고인이 말하기를 그 자제를 보면 그 부형을 안다고 하니 참으로 모두 격언이다. 다행이 옳고 바른 교육을 이룬 처지에 이미 거슬린 시냇물을 돌이키고 촛불로 어두운 거리를 밝히면 궁벽한 곳에 사는 사업이 누가 이보다 크리오. 진실로 집집마다 사람마다 소망할 수 없는 것이니 천만번 헤아리소서.
答丁孟吉祐鎭別紙(답정맹길우진별지)
- 상략 -
朱子曰四端理發七情氣發云者以其所主而言也四端固理發而發之者氣也然所主則理也蓋理氣不相離而此云理發氣發者各指其所主也
[해석]
답정맹길우진별지
- 상략 -
주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단 이발과 칠정기발이라 한 것은 그 주체가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단은 진실로 이에서 출발하나 그 발동하는 것은 기이다. 그러나 그 주체가 되는 것은 이다. 대게 이와 기는 서로 떠나지 않는다고 하고 이발과 기발을 말한 것은 각각 그 주체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였다.
다. 잡저(雜著)
1) 蟾蛇說(섬사설)
人說蟾不能自子若欲有子則必要於蛇蛇遇蟾必呑之旣呑蛇不堪蟾毒亦入穴而死蛇死而朽壞則寸寸爲蟾此蟾子所以生也
[해석]
섬사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두꺼비가 새끼를 갖고자 하면 반드시 뱀에게 먹히어야 하며, 뱀은 두꺼비를 만나면 반드시 먹게 된다. 그리고 두꺼비를 먹은 뱀은 두꺼비의 독에 의하여 토굴에 들어가 죽게 된다. 뱀이 죽어 썩으면 뱀의 마디마디에서 두꺼비의 새끼가 나온다.
吾雖不能知其然否而造化命物固有不齊或因異類而生則亦不可謂無其理也然不知其毒終至身斃而遇蟾呑之者無乃欲勝而然耶物不足道而世之從欲而殉身者果非是蛇之伍而宇宙間得免乎爲蛇者幾箇人耶
[해석]
내가 비록 능히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하나 조화가 만물을 명하는 것이 진실로 고르지 못하니 혹은 다른 부류로 인하여 생산되는 것을 가히 그 이치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두꺼비의 독으로 인하여 뱀 자신이 죽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두꺼비를 만나면 삼키는 것은 이기고자 하는 것인가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욕심을 쫓아 자기 몸을 죽이는 자가 과연 뱀의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우주 사이에 면할 수 있겠는가? 뱀과 같은 자가 몇 사람이 있겠는가?
蟾之爲子也甘心殺身見呑於蛇而猶要之蟾何忍於其死而若是爲也人於其子用心誠篤無異是蟾而其愛之之切憂之之勤豈蟾之所能化耶然而人子旣長視其父母藐然恝然蠢蠢蚩蚩者今古幾蟾兒耶余於此撫躳感想書爲自戒
[해석]
두꺼비가 자식을 낳기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자신이 뱀에게 잡아먹히어 죽기를 바라는 것은 두꺼비가 죽음의 아픔을 참으며 이같이 한다. 사람들은 그 자식에게 지성으로 마음을 쓰는 돈독함이 두꺼비와 다름이 없이 간절하고 근심하는 마음이 두터우니 어찌 두꺼비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의 자식들은 성장한 후에 그 부모를 업신여기며, 냉대하고, 어리석다하고, 무지하다고 여기는 자가 고금에 두꺼비 새끼같이 간사(奸邪)한 자가 얼마인고! 내가 이에 몸을 어루만지고 마음을 상하여 이 글을 써서 스스로를 경계하노라.
섬사설은 두꺼비가 자신이 희생하여 자식을 생산하는 과정을 그린 내용이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을 뱀에게 잡아먹히는 죽음의 고통을 참으며, 뱀 앞에서 자신이 잡아 막히기를 바라고 뱀을 유혹하는 두꺼비를 보면서, 인간이 자식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은 두꺼비보다도 더하다고 왕사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식은 자라고 나서 과연 부모의 그런 마음을 아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부모의 극진한 사랑과 희생을 바탕으로 자란 자식들은 부모를 업신여기고, 부모가 어리석다 하고, 부모가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인간의 자식들은 자기 어미를 죽이고 태어난 두꺼비 새끼보다 못한 사람들이 있다고 보면서, 어찌 자식들이 부모에게 이렇게 대할 수 있겠는가 하고 개탄하였다. 왕사는 이 글을 자신이 부모에게 효를 실천하고자 하는 경계의 글로 삼았다.
이러한 왕사의 부모에 대한 효심을 정창묵은 왕사의 행장에서
甲申二月竟遭大故哀毁踰制闋制遂廢擧人或勸赴公曰人之求進將以悅親不肖罪重穹壤莫逮爲此之事雖或倖中爲誰之榮哉
[해석]
갑신년 2월 말에 아버지가 돌아가심을 몸이 몹시 슬퍼하며, 장사지내는 법도를 다 겪은 뒤에는 과거도 포기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과거를 보아 출사하기를 권하였을 때 공이 말하기를 도를 구하고자 하는 것은(벼슬길에 나아가고자 하는 것) 장차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자 함인데 불초자식이 죄가 많아 하늘과 땅 사이에서 부모님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는데 다행히 과거에 합격한다 하여도 그것이 누구를 위한 영화이겠는가?
라고 하였다.
왕사가 입신양명(立身揚名)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길이 아니라 부모에 효도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선비들이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과거에 응하였으나 왕사는 자신이 과거에 급제하여도 기뻐해 줄 부모가 계시지 않는데 과거를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면서 과거를 포기하였다. 왕사의 부모님에 대한 효심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증거이다.
이러한 왕사의 효에 대한 사상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황금만능주의 사상과 핵가족제도 등으로 가정이 붕괴되어 중요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인도의 철학자 토인비는 장차 한국의 문화가 인류에 이바지 할 수 있다면 이는 바로 부모를 공경하는 효사상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효는 낡고 고루한 가치가 아니라 21세기의 보편적인 가치로 재조명되고 있다. 이에 우리는 왕사의 부모에 대한 효의 모습을 현대적 의미로 새로이 부각시키고 배워야 할 것이며, 우리 모두의 자계(自戒)로 삼아야 할 것이다.
2) 壽夭說(수요설)
延年之謂壽短期之謂夭一是人也而夭壽不齊者說者衆矣或以氣血之虛實或以世數之昇沈或以骨相而論或以風土而言或以修養之方者不可謂無其理也然同其父母同其世級而異其久速者有之一其疆場一其部位一其保攝而二其修短者有之夫物之不齊理之常也
[해석]
수요설
나이가 많은 것을 수라하고 나이가 적을 것을 요라고 한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지만 오랜 삶을 사는 사람(壽)과 짧은 삶을 사람(夭)이 있는 것처럼 수명이 고르지 않은 것을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러한 까닭을 혹은 기혈의 허실을 말하고, 혹은 세수의 승침을 말하고, 혹은 골상을 말하고, 혹은 풍토를 말하고, 혹은 수양의 방법을 논하나 가히 그 이치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부모도 같고 그 세대도 같으나 오래 사는 삶이나 일찍 가는 삶이 다른 까닭은 하나는 환경이요, 하나는 부위요, 하나는 보습이다. 수(修. 長壽)하는 사람과 단(短 夭折)하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는 것처럼 만물의 이치가 고르지 않는 것이 천리의 상도이다.
氣聚則有物氣散則無物故稟其長遠者壽稟其短促者夭是以達士齊彭殤至人外生死愚則謂壽亦有夭夭亦有壽何者顔淵早世而猶傳聖人之道原壤不死而竟取老賊之誚人類不滅則顔氏之夭終當與宇宙而長存是所謂夭亦壽也原家之壽雖曰視息存而便休乃所謂壽亦夭耳
[해석]
기가 모이면 물체가 있고 기가 흩어지면 물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래 살도록 타고난(稟 稟賦 선천적으로 타고 남) 사람을 수한다고 하고, 짧게 살도록 타고난 사람을 요한다고 한다. 이치에 통달한 사람(達士)이 팽조(彭祖)와 상(殤)이 같다고 한 것은 태어나고 죽는 것을 사람이 결정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나는 수에도 또한 요가 있고 요에도 또한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슨 뜻인가 하면 안연은 일찍 세상을 떠났어도 성인의 도를 전하였고, 원양은 비록 늦도록 죽지 않았으나 마침내 노적이란 꾸지람을 받았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으면 안연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夭) 우주와 더불어 길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요했으나 오래 산 삶(壽)라 할 것이다. 그러나 원양의 수는 보고 숨 쉬는 것뿐이니 수했으나 요했다고 할 수 있다.
人筍惡夭而欲壽不于形氣而求諸德行則壽雖廣成而忽於一朝之蜉蝣夭雖伯奇而久於千歲之龜鶴短期者夭耶延年者壽耶書此爲壽夭說
[해석]
사람이 진실로 요를 싫어하고 수를 하고자 하나 겉으로 보이는 형상이나 기운에서 구한다면 비록 그 덕행이 넓게 이루었다 하더라도 홀연히 하루아침에 하루살이(부유)가 된다. 요는 비록 짧은 삶이지만 백기같이 오래되어 천년을 사는 거북이나 학같은 삶이 되니 짧은 삶을 사는 자가 요인가 오래 사는 삶을 사는 자가 수인가? 이같이 글로서 수요설을 논한다.
수요설은 왕사가 인간의 삶의 가치와 철학에 대하여 논하면서 사람의 참된 삶이 무엇인지를 구하고자 하였다.
왕사는 수요설에서 안자(顔子)를 예로 들어 설명하였지만, 우리나라에도 안자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신라의 화랑 관창, 백제의 장수 계백, 고려의 장군 신숭겸, 임란의 조헌과 700의사, 대한제국 시대의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박열 등 수 많은 의인(義人), 열사(烈士)들이 짧은 생을 살고 갔지만 영원히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는 것은 요(夭)했지만 진정으로 수(壽)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왕사는 수요설에서 사람이 살아가야 할 참된 길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가치로운 삶인지를 말하고자 하였으며, 자신 또한 이러한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였다. 왕사의 행장을 살펴보면 그는 아버지와 숙부 국파공(菊坡公)에게서 수학을 한 후 여러 사찰에서 수학하였고, 또한 여러 고을로 이거하면서 후학들을 정심으로 가르치고 선비들과 교유하면서 곤궁하지만 의(義)롭게 살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왕사는 상주에 거주할 때인 1907년(당시 50세)에 운강의진에 들어가서 좌종사로 활동하면서 1908년 의병장 이강년이 체포될 때까지 2년 정도 독립운동을 하였다. 왕사는 자신의 곤궁한 삶을 걱정하지 않았으며, 국가의 위난 때는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돌보지 않고 의병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왕사의 삶이 진정한 수(壽)한 삶이 아닌가 한다.
3) 嚴光論(엄광론)
嚴光賢者光武明君而不能致賢者於明君之朝者于何一治之此難耶夫士之生也藏器懷寶以順其時己耳幸而遇湯文之聖則出爲伊呂不幸而値春秋之運則去爲襄武出而濟斯民去而潔其身窮山荒野之濱躳耕而沒世者豈士之所願欲也特時有所不可道有所不辱耳 - 中略 -
[해석]
엄광론
엄광은 현자이며 광무는 명군이라고 한다. 그러나 능히 현자를 명군의 조정에 출사하지 못하게 한 것이 어찌 성인의 덕에 의한 정치인가? 선비가 세상에 나서 재주를 저장하고 보배로운 덕을 품어 그 시대에 따름이니 다행히 탕왕과 문왕 같은 성군을 만나면 세상에 나아가 이윤과 여상 같은 착한 신하가 되고, 불행하게 춘추전국시대를 만나면 벼슬을 버리고 양무같이 한다. 벼슬길에 나아가면 백성을 구제하나, 벼슬을 버리면 그 몸을 깨끗하게 하고, 궁벽한 산골이나 황폐한 들판에서 몸소 밭갈이 하며 세상을 마치는 것이 어찌 선비들이 원하고 바라는 것이었겠는가? 특히 시기가 불가함이 있고 도를 욕되게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 중략 -
古今爲人上者未有無輔佐而能致治者故天佑人君莫善於生賢未知子陵之賢何如於伊呂而如使建武之君親行湯文之事則七里灘千文石雖欲爲隱子陵帝豈可得乎 - 中略 -
[해석]
고금을 막론하고 임금이 된 자가 착하게 보좌하는 신하가 없이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가 없는 고로 하늘이 입금을 돕는 것은 어진 인재를 생산하는 것 보다 좋은 것이 없다. 엄자릉의 현명함이 이윤과 여상 같은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만약에 광무 임금이 몸소 탕왕과 문왕 같은 정사를 행했다면 칠리탄 천문석에 은거하고자 하나 엄자릉이 어찌 가히 그럴 기회를 얻으리오. - 중략 -
君臣一體而治道乃成君尊者位也臣尊者道也道位互濟是謂一體故古之聖賢必待盡禮者非欲苟爲尊大也蓋以禮不盡則道不行故耳 - 中略 -
[해석]
임금과 신하가 일체가 되어야 나라 다스리는 도가 이루어지나니 임금을 존중하는 것은 위(자리) 때문이요, 신하를 존중하는 것은 도 때문이다. 도와 위가 서로 성취하도록 도와주는 것을 일체(一體)이라고 한다. 그런 고로 옛날 현성한 선비가 반드시 예를 다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구차하게 벼슬이 높고 귀하게 대우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대게 예를 다하지 아니하면 도가 행해지지 않는 연유이다.
此光武所以可恨而世無子陵則孰知上之所以遇士士之所以自重哉然則子陵雖隱而立名節於萬世者豈可與雲臺買鄧輩之出爲時用者比耶
[해석]
이렇게 한 것이 광무 황제가 정말 한스러운 것이다. 세상에 엄자릉이 없었다면 누가 임금이 선비를 대우하는 예와 선비가 자중하는 바를 알겠는가? 엄자릉은 비록 은거하였으나 이름과 절개를 세상에 세웠으니 어찌 이름이나 팔아서 출세하는 벼슬아치들과 비교하겠는가? - 중략 -
엄광(嚴光)은 동한(東漢, 후한)시대 회계(會稽) 여요(餘姚) 사람이다. 자는 자릉(子陵)이다. 일명 준(遵)이다. 젊어서부터 명성이 높았고, 후한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함께 공부했다. 뒤에 유수가 병사를 일으키자 적극적으로 도왔다. 광무제가 즉위하자 성명을 바꾸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했다. 광무제가 은거한 엄광을 불러 경사(京師)에 왔는데, 옛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지냈다.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제수하려고 했지만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했다. 건무(建武) 17년인 41년에 광무제가 다시 그를 불렀으나, 엄광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광무제는 매우 상심했고, 바로 조서를 내려 돈 1백만과 곡식 1천 섬을 하사했다고 한다. 엄광은 부춘산에 묻혔으며, 부춘산을 엄릉산(嚴陵山)이라고도 부른다.
엄광과 광무제 두 사람의 관계는 막역한 친구이면서도 서로 다른 위치에 있으면서 서로의 이상이 달라 함께 정치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마다 다른 판단을 할 수 있겠지만 왕사는 엄광이 광무제의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 엄광은 본인이 출사할 시기가 아님을 알았다. 왜냐하면 광무제는 왕권을 강화하고자 할 뿐이지, 왕도정치를 할 의지는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둘째, 자신을 광무제가 예로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이윤과 여상(呂尙)같은 배려를 하지 않아 선비로서의 자존심을 버리지 않고 출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광무제가 자신을 이윤과 여상(呂尙)같은 배려를 하지 않을 때는 자신이 조정에 나아가도 왕도의 정치를 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두 사람의 정치에 대한 생각기 다르기 때문에 화합할 수 없다고 판단한 엄광이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왕도정치를 하기 위하여서는 왕권의 절대적인 신임과 지지가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임금과 신하가 가고자 하는 길과 이상이 다르면 신하는 왕도정치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광무와 엄광의 고사를 보면서 왕사는 엄광론을 지어 선비가 도의 정치를 할 수 없다면 출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 하였다. 선비가 벼슬이나 하고자 조정에 출사하는 것은 진정한 선비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왕사는 광무제의 부름에 출사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엄광이 옳 곧은 선비의 표상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광무제가 두 번째 엄광을 찾았을 때는 이미 엄광이 죽고 난 후였다. 이는 광무제가 엄광을 초빙하는 시기를 잃은 것이다. 왕사는 광무제와 엄광의 일들을 참으로 안타까워하면서 엄광의 선비로서의 도를 지키는 마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남명 조식은 엄광론에서 물러나 있는 선비들은 절개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중국의 엄광과 우리나라의 길재를 들어 그 뜻을 기렸던 것이다. 남명은 광무제가 불렀으나 나가지 않은 것은 그의 포부가 컸으며, 또한 때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엄광이 자신의 도를 굽혀가며 세상에 나가지 않은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엄광은 세상에 나아갈 기회를 잃었고, 광무는 엄광을 맞이할 예를 잃었다'고도 하였다.
남명은 엄광이 숨어 산 것은 광무제와 지향한 정치형태가 달랐기 때문이며, 이로 인하여 엄광이 은둔한 것은 광무제가 왕도정치를 시행할 의지가 없음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엄광은 성인의 도를 추구하는 정치를 지향하였으나 광무제는 패도정치(覇道政治)를 추구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선비의 고절한 절개를 지키는 엄광의 도를 칭송하는 것은 왕사와 남명의 생각이 매우 상통하는 것으로 보아 이 시대의 선비들의 대체적인 생각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백문절 같은 사람은 명군인 광무제를 도와 정치를 하지 않은 엄광을 탄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범중엄이 쓴 엄선생 사당기를 살펴보면
先生漢光武之故人也相尙以道及帝握赤符乘六龍得聖人之時臣妾億兆天下孰加焉惟先生以節高之旣而動星象歸江湖得聖人之淸泥塗軒冕天下孰加焉惟光武以禮下之
[해석]
선생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친구로서 도로서 숭상하는 사이였다. 황제가 됨에 이르러 적부(赤符)를 잡고 여섯 마리의 용을 타고서 성인(聖人)의 때를 얻었으며, 억조창생(億兆蒼生)을 신하나 첩(臣妾)으로 삼게 되니, 천하에 더 무엇이 필요 하겠는가? 그러나 선생만은 절개로서 자신을 높였다. 이미 별자리를 움직여 강호로 돌아와 성인(聖人)의 맑은 이름을 얻어 대관의 수레나 면류관을 진흙처럼 여겼으니 천하에 무엇을 더 할 필요가 있겠는가? 오직 광무제는 예(禮)로써 그 자신을 낮추었을 뿐이다.
在蠱之上九衆方有爲而獨不事王侯高尙其事先生以之在屯之初九陽德方亨而能以貴下賤大得民也光武以之蓋先生之心出乎日月之上光武之量包乎天地之外微先生不能成光武之大微光武豈能遂先生之高哉而使貪夫廉懦夫立是大有功於名敎也
[해석]
주역(周易) 고괘(蠱卦)의 상구효(上九爻)에 ‘대중들은 모름지기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홀로 왕과 후를 섬기지 않고 그의 일을 고상히 한다.’고 하였는데 선생이 그러하였다. 주역 둔괘(屯卦)의 초구효(初九爻)에 ‘밝은 덕이 모름지기 형통하여 능히 귀한 것으로서 천한 곳에 몸을 낮춘다면 크게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광무제가 그러하였다. 무릇 선생의 마음은 해와 달과 같이 솟아오르고, 광무제의 도량은 하늘과 땅의 밖을 포용할 수 있으니, 선생이 아니었으면 능히 광무제의 위대함을 이룰 수 없었으며, 광무제가 아니었으면 능히 선생의 고결함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탐욕스러움 사람으로 하여금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일으켰으니 이는 명분과 교화에 있어서 커다란 공이 있는 것이다.
仲淹來守是邦始構堂而奠焉乃復其爲後者四家以奉祠事又從而歌曰雲山蒼蒼江水泱泱先生之風山高水長
[해석]
내가 이 고을에 태수로 와서 비로소 사당을 지어 제사를 올리고, 이에 그 후손인 네 집의 조세를 면제하여 제사를 받들어 섬기게 하였다. 또 따라서 노래를 지어 가로되, 구름 위에 솟은 산은 푸르고 푸르며, 강물은 깊고 넓다. 선생의 유풍은 산보다 높고 물보다 장구하리다.
라고 하였다.
범중연의 사당기를 살펴보면 광무제와 엄광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 주고 성장시켰으며, 또한 서로를 위대하게 만든 상보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본다. 범중연은 그의 사당기에서 ‘선생의 마음은 해와 달의 위로 솟고 광무제의 도량은 천지의 바깥까지 감싸니, 선생이 아니었다면 광무제의 큰 도량을 완성할 수 없었고, 광무제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선생의 고상함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면서 두 사람의 상보적인 관계를 이야기 하였다.
또한 사당기에서 ‘탐욕스러움 사람으로 하여금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일으켰으니 이는 명분과 교화에 있어서 커다란 공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선생의 고절한 품성은 ‘구름 낀 산은 짙푸르고 강물은 깊고 넓고 선생의 풍도(風度)는 산처럼 높고 물처럼 길다.’고 칭송하였다.
2. 독립운동가로서의 왕사
왕사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가학으로 독학정려(篤學精慮)한 유학자로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은 상주뿐만 아니라 의성 다인, 예천 용궁 그리고 화동 등 원근 인사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많은 후학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로 체결하자, 애국지사들의 열화와 같은 의거가 일어나고 상주 곳곳에서도 항거하였다. 이러할 때 왕사는 1907년(당시 50세)에 독립운동 단체인 운강의진(雲岡義陣)에 들어가서 좌종사로 활동하면서 운강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 이 기간이 약 2년간이었다.
의병 활동을 하던 중 1908년 6월 4일 운강 이강년이 청풍의 까치성에서 적탄에 맞아 체포되었으며, 1908년 9월 19일 교수대에서 생을 마쳤다. 왕사는 운강의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운강이 죽고 난 후에도 묘소에 가지 못하였다. 왕사는 이를 한스럽게 생각하여 만사를 지어 곡하였다.
輓李雲岡 康秊(만이운강 강년)
宇宙元無不死人 (우주 간에 원래 죽지 않는 사람이 없으나)
人生死死死非眞 (사람이 태어나서 죽고죽고 또 죽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靑山焉得埋霜日 (청산에 어찌 깨끗한 절개를 묻는 날을 얻으리오.)
未敢爲公哭就窀 (감히 공을 위해 무덤에 나아가 곡하지 못함이여)
또 왕사는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나라를 잃었을 때 다음과 같은 글로서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었다.
自庚戌喪邦以後常懷憤慨未嘗與人閒謾讌集至丁巳弧辰禁不設酌賦近體一律以寓蓼莪之痛桼離之憾
[해석]
경술년에 나라를 잃은 이후로부터 항상 분개한 마음을 품어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한가하게 농담을 하거나 잔치에 가지 않았다. 정사년(1917)에 회갑(弧辰 호신)을 맞아 잔치(회갑연)를 금하였고, 부모의 은덕을 사모하는 슬픔(蓼莪之痛)과 나라가 망하는 것에 대한 원통함과 억울(桼離之憾)한 마음을 한편의 시(賦近體一律)를 지어 나타내었다.
이는 왕사집의 정창묵이 쓴 행장에 기록되어 있다.
왕사는 이와 같이 부모님과 나라에 대한 사랑이 투철하였다. 2010년 왕사의 의병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의 공로가 인정되어 건국포장을 받았으며, 2013년 화동면에 있던 묘소를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하였다.
Ⅲ. 왕사의 삶과 사상
왕사는 국운이 기우는 조선말기(朝鮮末期)에 태어나 조국의 망국의 비운을 겪었으며 일제(日帝)의 폭정을 체험하면서 살았다. 따라서 왕사의 생활은 고난하고 험난한 일생이었지만 언제나 올곧은 선비의 정신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자경(自警)의 시에서
世間許多修 一是本身修
(세상에는 닦을 일이 허다하나, 하나 같이 자기 본신을 닦아야 한다.)
라고 하면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먼저 하여야 할 일은 자기 자신을 닦는 일이라고 하였다. 시의 제목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 것과 같이 자신의 수신을 여러 덕목 중에서도 최우선 과제로 삼았으며, 자신을 닦고 수양하는 것을 으뜸의 가치로 여겼다고 하였다.
이러한 왕사도 哀林子敬(애임자경)의 시에서는
我不棄君君棄我 殘年此別復何云
(나는 그대를 버리지 않았는데 그대가 나를 버리니 쇠잔한 나이에 이 이별을 다시 어떻게 할까.)
라고 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애잔한 정을 꾸밈없이 표현하였다. 이렇게 왕사의 시(詩)는 꾸밈없이 사실을 묘사하였다.
그리고 答卞錫汝榮輔(답변석여영보)에서는
古人所謂診其子弟知其父兄者眞皆格語
(고인이 말하기를 그 자제를 보면 그 부형을 안다고 하니 참으로 모두 격언이다.)
라고 하면서 자녀교육의 잘잘못은 그 부형에게 달렸다고 하여, 가정에서 올곧은 자녀 교육을 강조하였다. 이는 왕사가 가정에서의 교육 즉,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사상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섬사설에서
人子旣長視其父母藐然恝然蠢蠢蚩蚩者今古幾蟾兒耶余於此撫躳感想書爲自戒
(사람의 자식들은 성장한 후에 그 부모를 업신여기며, 냉대하고, 어리석다하고, 무지하다고 여기는 자가 고금에 두꺼비 새끼같이 간사(奸邪)한 자가 얼마인고! 내가 이에 몸을 어루만지고 마음을 상하여 이 글을 써서 스스로를 경계하노라.)
라고 하면서 이를 자계(自戒)로 삼았다. 왕사의 이러한 생각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정말 두꺼비 자식만도 못한 사람의 자식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왕사의 효에 대한 생각과 행동들을 배워 효에 대한 새로운 교육과 실천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왕사의 사상과 철학은 이렇게 앞서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수요설에서는
人類不滅則顔氏之夭終當與宇宙而長存是所謂夭亦壽也
(인류가 멸망하지 않으면 안연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夭) 우주와 더불어 길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요했으나 오래 산 삶이라고 할 것이다.)
또한
夭雖伯奇而久於千歲之龜鶴短期者夭耶延年者壽耶書此爲壽夭說
(요는 비록 짧은 삶이지만 백기같이 오래되어 천년을 사는 거북이나 학 같은 삶이 되니 짧은 삶을 사는 자가 요인가 오래 사는 삶을 사는 자가 수인가? 이같이 글로서 수요설을 논한다.)
라고 하면서 인간이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가치를 지니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함을 이야기하였다. 이는 지금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올곧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제시하여 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왕사의 삶의 방식이며 사상이다.
그리고 엄광론에서는
道位互濟是謂一體故古之聖賢必待盡禮者非欲苟爲尊大也
(도와 위가 서로 성취하는 것을 일체(一體)이라고 하다. 그런 고로 옛날 현성한 선비가 반드시 예를 다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구차하게 벼슬이 높고 귀하게 대우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왕사는 엄광론에서 참으로 선비가 지켜야 할 도(道)가 무엇인지를 이야기 하였다. 즉, 현자는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 나야할 때를 정확하게 알고 실천하여야 하며, 자기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벼슬에 미련 두지 말고 용퇴하여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하였다.
이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와 비추어 보면 너무나 고고한 이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또한 우리가 인간답게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려면 꼭 지녀야 할 계율(戒律)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왕사의 이러한 사상과 철학을 알고 배워야 한다.
또한 왕사는 지극한 조국애를 지니고 살아간 사람이다.
輓李雲岡 康秊(만이운강 강년)에서
未敢爲公哭就窀
(감히 공을 위해 무덤에 나아가 곡하지 못함이여)
라고 하면서 이강년 의병장의 먼저 감을 한탄하는 애닮은 마음을 나타내었다.
왕사는 운강과 함께 의병활동을 하였으며, 운강의진(雲岡義陣)에서 좌종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왕사는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나라를 잃었을 때는 다음과 같은 글로서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었다.
또한 정창묵이 쓴 행장에서 보면
自庚戌喪邦以後常懷憤慨未嘗與人閒謾讌集至丁巳弧辰禁不設酌
(경술년에 나라를 잃은 이후로부터 항상 분개한 마음을 품어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한가하게 농담을 하거나 잔치에 가지 않았다. 정사년 회갑을 맞아 잔치를 금하였다.)
라고 하여 나라 잃은 아픔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우국충정의 마음이 왕사가 운강의진에서 의병활동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왕사의 삶과 사상을 보면 그는 자기 스스로 자계(自戒)하면서 끊임없이 수신 하였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또한 왕사는 효와 충을 몸소 실천한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는 근세(近世)에 보기 드문 선비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1. 김철수, 광복 70주년 상주의 항일독립운동, 상주 : 도서출판 한솔, 2016.
2. 왕사집
3. 정우락, 남명문학의 의미표출과 현실주의적 성격연구, 경북대학교, 1997.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중앙연구원(NAVER. 지식백과, 사전, 왕사집)
'상주학 > 상주학 제9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주학. 금요사랑방. 102강좌 국채보상운동의 횃불 상주 (0) | 2018.11.26 |
---|---|
상주학. 금요사랑방 103강좌 상주의 식민지 경험(2) (0) | 2018.11.26 |
상주학. 금요사랑방. 경상북도 종가음식 문화에 대한 소고 (0) | 2018.11.26 |
금요사랑방 제127강좌 식산 이만부의 지행록 (0) | 2018.11.24 |
난재 채수 선생의 위기 일발 (0) | 2018.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