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6권

청주 한씨 명가를 빛낸 한겸, 한가구, 한가견 3부자

빛마당 2019. 3. 30. 22:27

* 이 글은 상주문화원이 발간한 상주의 인물 제6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스크랩을 하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청주 한씨 명가를 빛낸 한겸, 한가구, 한가견 3부자

                                                     박찬선 향토문화연구소 고문


청주 한씨의 시조는 위양공(威襄公) 한란(韓蘭)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 되고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는 마한의 마지막 왕이었던 원왕의 셋째 아들 우량의 31대 손으로 한지원(韓知原)이다. 그는 충북 영동 황간에서 태어났는데 중년에 청주 방정리로 이주한 뒤 무농정(務農亭)에서 향학을 일으키고 용개평야(龍開平野)의 농토를 개척하여 부호가 되고 왕건을 도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성씨의 하나로 여기고 있다.

한씨 가문을 처음 개척한 원조는 고조선 때 기자(箕子)의 후예 우자량자 한우량(韓友諒)이다.(한씨 세보) 요동사람 위만(衛滿)이 조선으로 망명해 오자 고조선의 준왕(準王)은 그를 박사로 삼고 서쪽지방을 방비하는 임무를 주었다.(기원 전 195) 위만의 세력이 커지고 마침내 준왕이 위만에게 쫓기는 형편이 되었다. 남쪽(지금의 전북 익산)으로 피신한 준왕은 마한(馬韓)이란 부족국가를 세우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마한이 창업한 지 177(기원전 17)만에 백제에게 넘어가게 되자 8대 원왕의 세 아들 우평, 우성, 우량은 각각 고구려와 백제, 신라로 귀화했다. 맏이 우평(友平)은 선우(鮮于), 둘째 우성(友誠)은 행주 기(), 셋째 우량(友諒)은 신라 탈해 왕조 때 벼슬길에 올라 상당(上黨 지금의 청주)을 본관으로 세계를 이었다. 따라서 선우, , 한 세 성씨는 한 핏줄이므로 지금도 통혼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

청주 한씨는 한란 어른 이후 삼십여 파로 문중이 번창했는데 그중에서도 조선 세조때 좌의정을 지낸 한확의 양절공파(襄節公派)를 비롯해서 세조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한명희는 충성공파(忠成公派), 덕종의 스승이었던 한계희는 문정공파(文靖公派), 한리는 충간공파(忠簡公派), 한연은 관북파(關北派), 두문동 청한거사 한철중은 몽계공파(夢溪公派) 이렇게 여섯 파가 대표적인데 한씨 6파라고 부른다.

 

입향유래(入鄕由來)- 한철충(韓哲沖), 1321(고려 충숙왕 8-?)

 

몽계공파는 다른 말로 보안 한씨(保安韓氏)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려 말에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낸 몽계공 한철충(韓哲冲, 1321?)을 파조로 한다. 몽계 공은 이름은 철충, 자는 홍도(弘道) 호는 몽계(夢溪)로 중현대부예의판서(中顯大夫禮儀判書)를 지낸 희적(希迪)의 아들이며,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낸 연()의 손자이다.

고려 말엽 충숙왕 신유년(1321, 충숙왕 8)에 출생하니 총명 영특함이 뛰어나고 품행이 돈독하였으며 성인의 도를 밟아 경학(經學)에 조예가 깊고 문장이 빼어났다. 기자(箕子)의 홍범(洪範)을 항상 송독하였다.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목은 이색, 초은 이인복, 운곡 원천석 등 명현들과 도의로 사귀었다. 1341(충혜왕 복위 2) 생원시에 장원하고 1353(공민왕 2)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역임하고 전법판서에 이르렀다. 학문이 순심(純深)하고 기예(技藝)가 고명하여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을 가장 우선(友善)하고 유학의 진흥에 힘썼다.

일찍이 목은 이색과는 소·대과를 동기에 급제한 사이로서 목은이 공을 칭찬하여 이르기를문장은 내가 따를 수 없고 지조를 삼가서 지킴은 곧 승상(丞相)이나 봉후(封侯)라도 역시 걱정될 바 없다고 하였다. 양광도안렴사로 특배되어 부임길에 오를 때 초은이 증여한 十六韻 시에경학에 있어서는 유가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이고 결백한 정사는 세상이 다 현인으로 받드는 바이라. 판사(判詞)에 기재된 문사는 국론에 간여되는 바 많고 특명으로 받은 간책(簡策)은 조정 관료계를 숙연케 하오. 시험삼아 등용된 벼슬길에도 그 명성이 더욱 현저하였고 결백한 선치(善治)에 의지가 더욱 견고하였도다. 명성과 위광(威光)이 형벌보다 앞서 갔고 도임하는 행차 모습은 바람결에 나부끼는 깃발에 빛나도다. 왕실의 모든 일이 급하다한들 국민의 일이 또한 가련하지 않는가…… 바라건대 그대는 반드시 힘을 써서 기울어진 우리의 유도를 다시 붙들어 일으키게나.라고 읊었다.

또 후계(后溪) 김범(金範) 선생이 지은 한 납언 갈문(韓納言 碣文)에 몽계 한공이 고려의 국운이 종말을 고하는 시기를 당하여 신하의 절의를 더럽히지 않고 종적을 감추고 일생을 마치었다 일컬었으니 나는 여기서 공은 한갓 문학뿐만 아니라 그 지조를 스스로 지킨 것이 야은(冶隱)이나 운곡(耘谷)과 더불어 꼭 같으신 분임을 알게 되었다.

최맹산(崔孟山)이 서술한 문사중에는 몽계공이 절조를 굽히지 않은 것은 그 탁월한 경술과 심오한 도덕에 유래한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고려의 운세가 다하여 도저히 구할 수 없음을 알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와 의리로 두문동(杜門洞)으로 은신하였다. 마침내 나라가 망함에 상주의 백원산(白原山, 현 낙동면 화산리) 골짜기에 토막을 짓고 홀로 기거하면서 낮에는 고기를 낚고 밤에는 글을 읽으며 대자연을 벗 삼아 세월을 보냈다. 태조가 공의 인재를 아깝게 여겨 나라의 큰 기둥(동량재, 棟樑材)으로 삼고 그 마음을 희유하기 위하여 삼징칠벽(三徵七辟), 여러 차례 조정에서 불렀으나 끝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태조가 공의 둘째 아들 염()으로 상주목사를 삼아 봉양하도록 하고 공을 예우하여 불렀으나 불쾌하게 여기고 고령 석절촌(石節村)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태종 원년 1401년에 태종이 예를 갖추어 초빙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마침내 협천 조동(釣洞)으로 행적을 감추고 은거했다.

 

저녁노을이 곱게 물드는 시냇가에 한가히 누었으니 전조(前朝) 때의 겪어온 일들이 꿈속에 되새겨오네

 

라는, 회한의 시를 쓰고 그에 따른 자호(自號)로 몽계라 하였다. 몽선생실기(夢先生實紀)라는 문집이 전해오는데 유작 시와 그 당시 교우하던 정몽주, 이색, 원천석 등의 글에서 선조와 연관된 글을 뽑아 엮은 시문집이다.

몽계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할 때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미수(眉叟) 이인노(李仁老) 목은(牧隱) 이색(李穡) 등이 송시를 지었는데 이들은 다 당대의 석학들이며 문장가였다. 몽계를 위해 지은 시로서 초은의 송한장령안렴양광도(送韓掌令按廉楊廣道) 시와 미수의 제몽계서재(題夢溪書齋) 시는 동문선()에 수록되었다.평양지(平陽志)한철충이 대성산 밑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시를 지었는데 그 시는 표일하여 세속을 벗어났다. 고 한평양대성산하복축운을 보자.

 

晩築龍山下(만축용산하) 만년에 용산 밑에 집을 지어

無心管白雲(무심관백운) 무심히 흰 구름을 거느리네.

遠聲灘下石(원성탄하석) 먼 소리는 여울의 돌에서 들리고

寒色雪中村(한색설중촌) 찬 빛은 눈 속 촌락에 찼네.

洞月閒葵戶(동월한규호) 골 안의 달이 한가히 집을 엿보고

林風自動門(임풍자동문) 숲 바람이 절로 사립문을 흔드네.

人歸一犬吠(인귀일견폐) 사람 돌아가니 개 한 마리 짖는데

松火隔籬昏(송화격리혼) 관솔불은 울타리 밖 어둠과 사이했네.

 

동양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산수화 한 폭을 연상케 한다. 시의 묘사가 자연스러우며 달이 집을 엿보고, 바람이 사립문을 흔드는 의인화가 된 동적 이미지가 빼어났다. 고요한 산속의 풍정, 옛 이야기 속 전경같은 탈속의 경지에서 맑고 깨끗한 시심이 솟구친다. 몽계의 정신세계를 엿보게 한다.

몽계 공은 나이 들어 숨을 거두기 전에 가인에게

나라가 망하면 신하는 죽고 이름까지 없어져야 한다고 하여 저서를 불태우고 묘소를 높이지 말며, 비석을 세우지 말고, 자손들은 각지에 헤어져 살라

 

라고 이르고, 어느 해 유월 이십 오일에 사망하였다. 묘소는 협천군 서쪽 중산 분토동 북쪽에 자좌(子坐)로 모셨다.

한 몽계 철충, 이초은 인복, 금단구제(金丹邱齊) (), 세 현인을 협천 면암서원(冕巖書院)에 함께 향사하며 경현사에도 배향되었다.

그는 아들 넷 딸 둘을 두었는데 첫째 진()은 군수, ()은 문과 급제하여 상주목사, ()은 헌납(獻納)으로 그의 덕행이 기성원류(箕聖源流)에 기재되었다. 넷째 양()은 여절교위(勵節校尉)였다. 맏이 진은 일찍 작고하였고, 둘째 염은 천안 목천에 뿌리를 내렸으며, 셋째 겸은 상주 땅에 터를 잡았고, 넷째 양은 말년에 춘천 신북면 지내리로 낙향하여 일생을 마쳤다. 큰딸은 평해군수 류백통에게 출가하고, 둘째 딸은 대사헌 이은에게 출가하였다.

신도비문(神道碑文)은 은진 송병순(宋秉珣)이 지었다.

 

 

한겸(韓兼) 공민왕 14(1365)태종 14(1414)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낸 철충의 셋째 아들이다. 세조 조에 상주목사를 지낸 석촌(石村) ()의 아우이다. 상산 김씨 전서 김거도(金居道)의 사위이다. 조선 초기 문신이다.

조선 태조 21393년에 생원, 동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헌납(獻納)이 되었으며 통훈대부 행 사간원 좌헌납 지제교(通訓大夫行司諫院左獻納知製敎, 正五品)에 이르렀다. 재임 중에 태종 14년 정월 초하루에 분부를 받고 평시에 사랑하던 제주 말을 타고 대궐에 들어가서(예랑(禮郎)과 함께) 용무를 마치고 돌아 나오는 길이었다. 말이 달려서 수표교(水標橋) 위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말이 놀라서 날뛰는 바람에 불행히 말에서 떨어져 상처가 심하여 위급한 상태였다. 슬픈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임금의 명령으로 의원을 보내어 치료토록 하였으나 쾌유치 못하고 다음날 12일 졸하니 향년 50이었다.

공은 문학이 출중하고 총민하였으며 재능을 인정받아 좋은 대우를 받았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는 직접 국사의 길지로 정하기를 구만산(九灣山, 상주시 내서면 서만리), 능암(陵岩, 내서면), 삼봉산(三峰山, 낙동) 많을 다자지형(多字地形) 세 곳 명당 중에서 산도(山圖)를 살펴본 임금께서 구만산이 좋다고 하여 그곳을 점찍어 묘지로 정하였다. 공을 구호봉파동가마암하(九狐峰派洞駕馬岩下)에 안장하기로 하고 성대하게 국장(國葬)으로 치러 주었다. 뒤에 구만산을 국사봉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산소를 중심으로 삼십 리 주위를 경계하여 물금봉(物禁捧)을 내려 다른 사람의 침입을 엄히 막기로 하였다. 묘갈문은 후계 김범이 썼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가구, 차남은 가견이다.

 

 

한가구(韓可久, 성종조)

한 겸의 맏아들이다. 강릉부사를 지냈고 청백리이다. 부사가 되어 강릉에 출사(出仕)하였다가 떠나올 때 부인(府人)이 보내온 시에,

 

鏡浦臺前秋月白(경포대전추월백) 경포대 앞에 가을달이 밝고

寒松亭畔秋氣淸(한송정반추기청) 한송정 가에 가을 바람이 맑다.

盡將淸白朝天去(진장청백조천거) 이제 청백을 다 가지고 조정으로 들어가니

風減精神月減明(풍감정신월감명) 바람은 정신을 감하고 달은 밝음을 감하누나

 

밝은 달, 맑은 바람 청백의 정신으로 선정을 베풀다가 조정으로 들어가는 부사의 자리가 참으로 명징했음을 보여준다. 달과 바람이 정신과 밝음을 감한다고 하나 바람과 달은 마냥 그 바람이요, 그 달일진대 정작 감하고 감하지 않는 것은 생각하는 마음 아닌가. 가전청백(家傳淸白)을 실천한 수암 선생의 우천세가(愚川世家)내 집에는 보물이 없는데 있다면 청백(吾家無寶物 寶物有淸白)이라는 보백당 김계행의 가을 하늘 같은 정신이 다르지 않음에랴. 가구는 청백리로 강릉에 생사거사비(生祠去思碑)가 섰다.

청백록(淸白錄)은 청렴결백한 관리를 엄선하여 후세에 길이 이도(吏道)의 귀감으로 삼고 관기(官紀)를 바로잡기 위한 제도이다. 청백리가 되기까지는 엄격한 심사를 거쳐 왕의 재가가 있어야하며 또 록선(錄選)이 되면 그 자손들도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

교하 노씨 따님에게 장가들어 사남 삼녀를 두었는데 장남 예()는 현감, 이남 현()도 현감을 지냈다. 삼남 극선(克善)은 참봉이며 사남은 계선(啓善)이다. 큰딸은 목사 권수(權壽)한테 시집가고, 둘째 딸은 병사 박형무(朴衡武)에게 시집가고, 셋째 딸은 부사 윤백연(尹伯演)에게 시집갔다.

 

 

한가견(韓可堅) 1409(태종 9)1483(성종 14)

입향 겸의 둘째 아들이자 한가구의 아우이다. 자는 자고(子固) 태종 기사생으로 문과에 올라 현감 참선무원종공신대호군(參宣武原從功臣大護軍) 증 병조판서 행 북평사(贈兵曹判書行北評事)가 되었다.조선왕조실록세조 6년 경진(1460) 525일 이조에 졸한 이천, 민심언, 고득종 등을 원종 3등 공신에 기록할 것을 명하다.

자고는 선조 때에 원종공신으로 공훈록(功勳錄)에 올랐다. 공신은 왕조의 창업, 신왕의 즉위, 전란의 평정 등 새 질서가 들어서거나 국란에 처했을 때 왕실과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이다. 조선시대에는 총 28종의 공신이 있었다. 이들 공신은 황과 회맹(會盟)함으로써 국가최대의 특권을 누렸으며 영작(榮爵), 토지, 노비 등을 받고 그 자손들은 벼슬(음보, 蔭補)에 올랐다. 청주 한씨는 고려 조선에 많은 공신을 배출했다.

파평 윤씨 좌랑 환조(煥祖)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사남 이녀를 두었다. 맏아들 순()은 자 낙천(樂天) 단종(端宗) 계유(癸酉)에 사마를 거쳐 통훈대부 현감을 지냈으며 향사당(鄕射堂)을 시건(始建) 창건하였다.

 

이 향당은 옛적 읍인(邑人) 한지현(韓知縣) ()의 창건으로 몸소 동사(董事 일을 감독하여 바로잡음)에 수고하였으며 누방(鏤榜 문자(과거 급제자)를 아로새겨 만든 패)을 벽에 걸었는데 임진왜란에 당과 방이 모두 불타고 다음해 19년 경술(1610년 광해군 2)에 한후(韓候)의 손 중형(仲瑩)이 향정(鄕正)이 되어 구지(舊址)에다 다시 세웠다. 백년문물이 회진(灰塵)되었든 나머지에 탕연(蕩然)하여 간가(間架)가 전척(展拓)되니 풍채가 다시 변하여서 온 향중 사람으로 하여금 개관(改觀)하게 되니 중형이 이 당에 대하여 비록 완전하게는 못하였다 하나 어찌 허물이 되리오. 중형의 이름은 진()이요 언명(彦明)의 명은 광국(光國)이니 모두 상사(上舍)로 향당의 기강을 바로 이끄는데 뜻이 있고 향속을 바르게 하는 자 들이다.”

 

라고, 향사당중수기에 기록하고 있다.

한 건물을 할아버지와 손자 대를 이은 조손(祖孫)이 짓고 다시 고쳐 짓는 일이 드물진대 여기에 집착하게 된 연유를 살피면 한 문중의 가풍이 드러날 터이다.“()을 향사(鄕射)라 이름 지은 것은 예에 향사가 합당하고예악을 다하고 덕행을 세우는 일에 사()만한 것이 없으므로 옛적 성왕이 치민하는 데에 이를 중히 하였으며이준의 중수기에 잘 나와 있다. 이로 볼 때 청주 한씨는 고려조와 조선조에 권문거족(權門巨族)으로 크게 위세를 떨쳤으나 몽계공의 가르침대로 사람 사는 도리를 중시하고, 후학들에게 글 가르치는 일에 열중하라는 뜻이 전승되어 나타났다고 하겠다.

둘째 아들 욱()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장연현감(長連縣監)을 지냈다. 삼남 호()는 문과에 급제하여 도사이며 사남 정()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다. 큰딸은 사정 이경화(李景華)한테 시집가고 둘째딸은 사직령 김보경(金寶輕)에게 시집갔다.

 

 

참고 도서

 

1. 淸州韓氏濟州門中會 刊,淸州韓氏淵源歷史, 1984.

2. 권태을,尙州漢文學, 상주문화원, 2001.

3. 박약회상주지회,雄州典故, 1998.

4. 상주시사편찬위원회,尙州市史,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