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6권

가촌(嘉村) 류포(柳砲)의 효행(孝行)

빛마당 2019. 3. 30. 22:29

* 이 글은 상주문화원이 발간한 상주의 인물 제6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스크랩을 하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가촌(嘉村) 류포(柳砲)의 효행(孝行)

                                                                금중현 상주향교 전교




고금(古今)을 통하여 효()는 백행(百行)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여기 효로서 크게 알려져 상주의 함창 고을 청암서원(淸巖書院)에 배향(配享)하여 길이 길이 세상의 본보기로 삼고자 하는 현사(賢士)가 있었으니 진주 류씨 가문의 가촌 류포(고려 우왕 원년, 1375 ~ 조선 세종 27, 1445 - 향년 71)이다.

가촌의 가계(家系)는 고려 중기 삼중대광(三重大匡) 대신(大臣)을 역임하고 문정공(文正公) 시호를 받은 진천군(晉川君) 류지정(柳之淀)은 그의 증조부이고, 조부는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낸 류손(柳巽)이며, 아버지는 삼사부사(三司副使) 벼슬을 역임한 류휘생(柳暉生)으로 대대로 현달한 가문의 후예이다.

가촌 공이 살던 곳은 옛 비안현(比安縣)으로 오늘의 의성군 관내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섬김에 항상 화기있는 얼굴로 애도(愛道)와 공경심이 지극 하였다. 평소 생활에 오로지 부모의 눈과 귀를 흐뭇하게 하여주고 부모의 마음과 뜻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이유가 될 만한 일은 힘쓰지 아니한 일이 없었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는 스스로 흙을 등에 지면서 정성을 다하여 묘역을 조성하고 가례(家禮)에 따라 장례의 법도를 다하였으며, 이 후 3년 시묘살이는 법제(法制)를 넘어 몸을 상할 정도로 하루 같이 하여 본성마져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기록에 전하는 바 그가 시묘살이를 하면서 거처하던 여막(廬幕)터가 지금도 완연히 남아 있다고 하나 아마도 공의 특별한 효행으로 어디인가 그 곳의 지명이 전설로 내려온 것으로 짐작한다.

고을 사람들은 공의 그 지성스러움에 감복하였으며 비안현감은 그 사실을 조정에 품신을 하니 세종조에 경산현령(慶山縣令) 벼슬이 내려졌다. 현령 벼슬은 한 고을의 목민관으로서 공의 효행은 마침내 나라에서 백성들을 깨우치는 본보기로 삼았다고 할 수 있으니 가히 영광된 일이었다. 이 후 공이 살았던 마을에는 비를 세워 정려문(旌閭門)을 세우고 복호(復戶)의 특전을 내려 포상하였다고 한다. 뒷날에 이 사실이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되었으며, 고을 사람들은 공이 살았던 마을을 일러 아름다운 동네라는 뜻을 취하여 가촌(嘉村)이라고 하였고 가촌이라는 마을 이름이 자연스럽게 공의 아호로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최지위(崔地緯) 공이 비안현감으로 재직할 때에 조정(朝廷)에서 공에게 내려진 정려문(旌閭文)에 이르기를,

 

몇 집 안되는 조그마한 고을에 네 분의 정려문이 있도다. 표창할 만하다고 칭하는 비옥(比屋)이라는 옛 구호는 그 아름다음이 헛되지 않음이라. 하늘이 정한 질서에 지켜야 할 도리가 있으니 어버이에게 효도함이 제일 큰 일이로다. 효행에 있어 그 누구인가 드러났다고 해도 공이 그 가운데에서 가장 으뜸이다. 살다가 죽어 장사지내고 제사 지냄에 예의가 없으면 옳지 못하니라. 어머니 장례에는 까마귀가 반포지효(反哺之孝)의 효를 행하듯이 직접 흙을 짊어지고 봉분을 지었으며 자고(子羔)와 같이 피눈물의 3년 시묘살이에 한 점 흐트러지지 않았네. 지방 고을의 칭송이 조정에 알려졌으며 성군의 치세에 바야흐로 새로운 효자 마을이로다. 정문을 드러나게 세우고 세금과 부역을 면해 주었으니 칭찬하는 은전(恩典)을 특별히 거행할 것이다. 이 나라가 오래도록 이어질 때까지 더욱 선행을 가르쳐 실행하도록 할 것이다. 아내가 된 자는 정절을 지키게 하고 아들은 어버이에게 효도하도록 할 것이다. 한 선비의 효행이 앞으로 영구히 사표가 될 것이다. 다만 이 선비의 효행 정신이 점점 멀어져 그 자취가 잃어버릴 때가 있을 것이니 대저 오늘의 사람들아 공의 그 존귀한 효행을 알만한가? 나는 보잘 것 없는 자질(資質)이지만 분수에 넘치게 이 경지를 지킬 것이다. 돈독히 실행한다고 말함이 아니라 삼가 스스로 사모하여 우러러 볼 뿐이로다. 정문을 정밀하게 더욱 기리는 마음으로 부족하나마 간소한 음식을 올리오니 바라건대 말세의 풍속으로 하여금 지나간 일을 사모하여 성실히 이행한다면 공의 유풍을 길이 계승할 것이고 고을의 명승을 실천할 것이다. 공의 영령이 있다면 이 정성을 흠향하기 바라오.”

 

라고 하여 공의 지극한 효성을 찬양하였다.

뒷날에 고을 사람들은 공의 위패를 비안의 백천사(白川祠)와 상주 함창의 청암서원(淸巖書院)에 모시고 길이길이 천양(闡揚)하고 있다.

가촌 공이 상주 함창과의 인연을 가지게 된 것은 잠시 함창에 머물렀을 때 공의 아들에게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거니와 당시에 함창 고을에서 유력가문으로 이름났던 함녕 김씨 가문의 함령군(咸寧君) 김요(金饒)의 아들인 김희도(金希道)의 딸을 공의 아들인 대암(臺巖) 류달존(柳達尊)의 아내로 맞이한 것이 그 연원이다. 류달존은 처향(妻鄕)을 따라 함창 고을 도계촌(陶溪村) 마을을 거쳐 오늘의 은척면 두곡리를 중심으로 하는 은자골에 터를 잡은 이후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문벌을 이루어 오늘에까지 살고 있다.

가촌의 아들인 류달존(태조 4, 1395~세조 11, 1466) 또한 세간에 존경을 받은 현달한 인물이었다. 그의 자는 백삼(伯三)이요 대암은 그의 호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듣고 인식하는 재능이 보통사람보다 출중하여 나이가 겨우 열 살 때에 경사(經史)를 익혀 날로 진취하고 달마다 더 나아가 마침내 문장이 크게 통달하여 한때 그의 동요들 가운데에서 앞설 사람이 없었으며 행실이 마치 노성(老成)한 사람과 같았다고 한다. 그는 태종 11(1411) 17세의 어린 나이에 성균관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에 응시하는 것을 그만 두고 거실 공간 좌우에 도서(圖書)를 쌓아 놓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오로지 인간의 덕성으로서 주변의 본보기가 되었던 현사였다.

공은 천성이 인효(仁孝)하여 부모를 섬기고 친족과 화목함에 마음을 돈독히 하여 아들이 없는 홀로된 종고모(從姑母) 이씨 부인을 어머니처럼 섬기고 봉양하여 온 집안과 고을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와 같은 공의 아름다운 행실은 아버지 가촌의 슬하에 가정적인 교육환경에서 비롯하였다고 하겠으나 꾸준히 학문에 전념하면서 스스로 길러진 덕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를 이어 공의 아들 철산공(鐵山公) 또한 효행으로 여러번 천거되어 벼슬이 음성 현감에 이르러 세상에서 공의 가문을 일러 효도하는 가문으로 칭송하여 널리 알려졌다. 뒷날 함창의 사림에서는 공의 위패를 청암서원에 배향하여 길이 길이 세상에 본보기로 삼고 있다.

 

참고문헌

 

1.淸巖書院11先生行錄, 2008, 청암서원 11선생 행록 발행위원회.

2.雄州典故, 1998, 박약회 상주지회

3.尙州市史(5)인물편, 2010, 상주시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