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6권

출처대절(出處大節) 노덕기(盧德基)

빛마당 2019. 4. 2. 20:18

* 이 글은 상주문화원이 발간한 상주의 인물 제6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스크랩을 하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출처대절(出處大節) 노덕기(盧德基)

 *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상주문화원 이사, 전)이안면장
김 광 희*

 
  고향! 상주 화령(化寜)에 팔십이 넘은 어머니를 봉양(奉養)하기 위하여, 지방 군부(郡部)로 보내줄 것을 주청(奏請)하여, 보은현감(報恩縣監)으로 내려와 선정(善政)을 베풀든 선비가 있었으니, 바로 출처대절(出處大節) 출처대절(出處大節) : 벼슬에 나갈 때와 나가지 않을 때 지켜야 할 큰 절개.
이라 일컬어지는 노덕기(盧德基, 1414~1479) 공(公)이시다. 공의 자는 공지(恭之)요, 관향은 광산(光山)이다.
  우리나라에서 노씨 성(姓)을 가진 이들은 대부분 한림(翰林) 노수(盧穗) 노수(盧穗) : 당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으며, 당나라 말년에 아들 9형제를 거느리고 신라에 왔으며, 9형제 모두가 신라에 등과하여 고려 초기에 봉읍(封邑)됨으로서 광산(光山), 교하(交河), 풍천(豊川), 장연(長淵), 안동(安東), 안강(安康), 연일(延日), 평양(平壤), 곡산(谷山) 등 9개 관향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음.
을 시조(始祖)로 한다. 노수는 중국 조정(朝廷)에서 한림을 지낸 인물로, 신라 말에 9형제를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공(功)을 세워 구백(九伯)에 봉해졌다. 이후 현관(顯官)들이 일어나 삼한(三韓)의 대성(大姓)이 되었으며, 중시조(中始祖) 노서(盧恕)는 고려 조정에서 감문위 대호군사(監門衛大護軍事)를 지내면서 조정에 공헌 바가 컸다.

  공의 고조는 노준경(盧俊卿)으로 자는 당임(當任)이고, 호는 괴정(槐亭)이며 감찰 지평(監察持平)을 지냈고, 증조는 노숭(盧嵩) 노숭(盧嵩, 1337~1414) : 고려 공민왕(恭愍王) ~ 조선 태종(太宗) 때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조선 개국 후 개국원종공신에 녹훈되었고,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거쳐 검교 우의정(檢校右議政)에 이르렀음. 상주 옥연사(玉淵祠)에 배향.
으로 자는 중보(中甫)이고, 호(號)는 상촌(桑村)이며,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거쳐 검교(檢校) 검교(檢校) : 명예직 벼슬.
로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오르고, 시호는 경평공(敬平公)이며, 증조모는 낙성군부인(洛城君夫人) 김씨(金氏)로 낙성군(洛城君) 김선치(金先致) 김선치(金先致, 1318~1398) : 고려 충혜왕(忠惠王) ~ 우왕(禑王) 때의 무신. 본관은 상산(商山). 홍건적(紅巾賊)을 평정시켜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되어 그 형상이 벽상(壁上)에 그려짐. 시호는 문충(文忠).
의 딸이며 관향은 상산(商山)이다. 할아버지는 노상인(盧尙仁)으로 양근 군사(楊根郡事)를 지냈고, 할머니는 숙인(淑人) 화령 고씨(化寜高氏)이다. 아버지는 노처화(盧處和)로 청주 판관(淸州判官)을 지내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으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贈貞夫人) 함창 김씨(咸昌金氏)로 검교 한성 부윤(檢校漢城府尹) 김선(金瑄)의 딸이다.

  공은 대대로 벼슬하는 집의 아들로 태어나 가정에서 문예를 닦고 학업에 정진하면서 일찍이 조정에 출사할 뜻을 두지 않았었다. 그러나 주위의 권유로 1444년(세종 26) 31세의 늦은 나이에 조정에 출사하여 부 좌군사용(副左軍司勇)에 제수되고, 여러 번 자리가 올라 좌군섭사정(左軍攝司正)에 이르렀다.
  1455년(세조 1) 12월에 세조 즉위에 기여한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錄勳) 되었다. ?세조실록(世祖實錄)? 2권, 세조  1년 12월 27일.“의정부에 전지(傳旨)하기를, …… 사정(司正) 노덕기(盧德基) …… 2등에 녹(錄)한다.(傳旨議政府曰 …… 司正盧德基 …… 錄二等)”
 공은 사적으로는 세조와 동서(同壻)간 이었다. 1457년(세조 3) 사선시 주부(司膳寺主簿)로 승진하고, 사선시 주부(司膳寺主簿) : 음식담당 부서로 1466년 1월 도관서(䆃官署)를 없애고 사선시(司膳寺)로 고쳐서 정(正)·부정·첨정·주부·직장 각각 하나씩을 두었다. 이때 주부(主簿)는 관서의 문서와 부적(符籍)을 주관하던 종6품 관직이다.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배명(拜命)을 받았으며, 이듬해 장흥고 부사(長興庫副使)로 옮겼다가 다시 내섬시 주부(內贍寺主簿)가 되었다.

  공은 1449년(세종 31)에 아버지의 상을 당한 이후로 어머니에 대해 효성이 아주 남달랐다. 관리 생활을 하는 동안 어머니께서 80이 넘는 연세로 상주 화령현(化寜縣)에 계신 것에 대해 항상 마음 아파하였다. 그래서 군부(郡部)에‘고향 가까운 곳에서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여, 보은현감(報恩縣監)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보은을 다스리면서 7년간 노모 봉양과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1463년(세조 9) 7월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올랐다. ?세조실록(世祖實錄)? 30권, 세조 9년 7월 6일.“ …… 노덕기(盧德基)를 사헌 장령(司憲掌令)으로 삼았다(盧德基司憲掌令)”
 하지만 노모의 연세가 더욱 높아져 봉양을 게을리 할 수 없게 되자, 그해 관직에서 물러나 화령으로 돌아와 봉양을 이어갔다. 얼마 뒤 밀양부사(密陽府使)에 임명되었는데, 밀양은 화령과의 거리가 400여 리나 떨어진 곳이라 노모의 안부를 들을 수 없음을 근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공의 효심을 깊이 사서 선산부사(善山府使) 이사계(李師季)  이사계(李師季) : 본관은 덕산(德山), 관찰사 이유(李愉)의 아들이며 병조 참판 이사맹(李師孟)의 아우이다. 생원으로 1432년(세종 14)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밀양부사로 있을 때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472년(성종 3)에 예조참판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팔거현]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와 자리를 바꾸어 주었다.
  이듬해 경상감사(慶尙監司)로 처질(妻姪) 윤흠(尹欽) 윤흠(尹欽, ?~1485)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경지(敬之). 戶曹判書, 知敦寧府使역임. 시호는 공간(恭簡). 정희왕후 오빠의 아들이다.
이 부임해오자, 상피법(相避法) 상피법(相避法) : 친척 관계에 있는 사람끼리는 같은 관청에 재임하거나 업무상 서로 혐의(嫌疑)가 있는 자리에 재직하는 것을 피하는 일.
을 내세우는 이들이 있어 공을 괴산군수(槐山郡守)에 임명하였다. 공은 다시‘괴산은 노모가 계시는 곳과 멀다’고 아뢰어, 옥천(沃川)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얼마 뒤 노모의 상(喪)을 당하였다.
  상을 마치고 1466년(세조 12)에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에 제수되고, 그 이듬해 1467년(세조 13) 12월에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올랐으며, ?세조실록(世祖實錄)? 44권, 세조 13년 12월 27일.“ …… 노덕기(盧德基)를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삼았다.(盧德基工曹參議)”
 1469년(예종 1)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1470년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그해 5월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 조선시대 중추부(中樞府)에 두었던 종2품(從二品) 관직인 동지사(同知事)로 정원은 8명이다.
에 임명되고, 10월에 사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성종이‘공에게는 녹(祿)을 계속 지급하라’고 하여 녹이 끊이지 않았고, 이듬해 한거(閒居)하도록 허락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는 58세였다.

  낙향한 이후로 마음을 편안히 갖고 고향 산천을 유람하면서 8여 년간 지내다가 1479년(성종 10) 6월 16일에 66세로 생을 마쳤다.
  부음이 조정에 알려지자, 성종은 슬퍼하며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문하고 치제(致祭) 치제(致祭) : 국가에서 왕족(王族)이나 대신(大臣), 국가를 위하여 죽은 사람에게 제문(祭文)과 제물(祭物)을 갖추어 지내주는 제사(祭祀).
하게 하였으며, 그 유제문(諭祭文) 유제문(諭祭文) : 천자나 왕이 사신을 보내어 제사지낼 때의 제문.
에,

年甫知命(연보지명)  나이 겨우 오십 ?논어(論語)?·「위정(爲政)」에“나는 나이 오십에 천명을 알았다.〔五十而知天命〕”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丐疾還笏(개질환홀)  병을 핑계로 사직했네.
恬於營利(염어영리)  영리에 사욕이 없음이
如卿者誰(여경자수)  경과 같은 이 있겠는가.

라고 애도하였다.
  공은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번(尹璠) 윤번(尹璠 1384~1448) : 자 온지(溫之), 본관은 파평(坡平). 이조참의, 공조참판, 경기도 관찰사, 대사헌, 공조판서, 중추원 판사를 역임. 영의정에 추증되고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세조(世祖)와 노덕기(盧德基) 공(公)의 장인이다. 시호 정정(貞靖)이다.
의 다섯째 따님을 아내로 맞아,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 희선(熙善)은 합천군수(陜川郡守)를, 다음 희숙(熙淑)은 금산군수(金山郡守)를 지냈다. 장녀는 용궁현감(龍宮縣監) 상산인(商山人) 김경문(金慶門)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직장(直長) 허수(許壽)에게 출가하였다.
  부인(夫人)은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성종(成宗)이 지관(地官)을 보내어 묏자리를 선정하게 했다. 공의 유택(幽宅)은 상주시 모동면 덕곡2리 창주산(倉主山) 자락에 아내와 같이 합장되어 있으며, ?상산지(商山誌)?·「총묘(塚墓)」.“盧德基 中牟 塔洞 北峰山 西麓”
 묘비에는“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노공 지묘 정부인 윤씨(嘉善大夫同知中樞府使盧公之墓貞夫人尹氏)”라 새겨져 있다. 묘비명(墓碑銘)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김종직(金宗直, 1431~1492) :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계온(季昷)·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아버지는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낸 김숙자(金叔滋)이다. 전주부윤, 병조참판, 공조참판·형조판서를 거쳐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고 고향 밀양에 돌아가 후학들에게 경전을 가르쳤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편차(編次). 영의정에 추증, 예림서원(藝林書院), 금오서원(金烏書院), 백연서원(柏淵書院), 경렴서원(景濂書院),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
이 지었는데, 공에 대해서,

“사선시 주부(司膳寺主簿)부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어찌 보면 특별한 은총(恩寵)을 입었으나 더욱 겸손(謙遜)하였고, 높은 직분에 오르자, 병(病)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쉽지 않은 일을 실천한 선비이다.”
 
라고 하였고, 그 명(銘)에는

海陽之盧(해양지노)  해양 해양(海陽) : 광주광역시 지역의 옛 지명으로 995년 해양현(海陽縣)으로 바꾸었으며, 1259년(고종 46)에 광주목(光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의 노씨는
赫世簪纓(혁세잠영)  대대로 벼슬이 빛나네.
公其紹之(공기소지)  공께서 뒤를 이어서
綽有典形(작유전형)  모범이 됨이 많았다네.
斷斷其孝(단단기효)  효도엔 정성을 다했고
謙謙其榮(겸겸기영)  영리엔 매우 겸손했네.
於古無傀(어고무괴)  고인께도 부끄럽지 않으니
足爲世程(족위세정)  세상의 표준이 될 만하네.
謂余不信(위여불신)  내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綸音甚明(윤음심명)  분명한 윤음 윤음(綸音) : 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
을 보게나.
公宜有後(공의유후)  공은 마땅히 후손이 있어
于永厥聲(우영궐성)  그 성명이 오래 전해지리.

라고 하였다.

  공은 노모에 대한 자식 된 도리를 다하기 위하여, 좋은 관직에도 나아갈 수 있었지만, 고향 가까이에서 실천궁행(實踐躬行) 실천궁행(實踐躬行) : 자기 자신이 실제로 몸소 행함을 이르는 말.
을 다한 관리(官吏)였다.
  효(孝)라는 것은 부모를 섬김을 말하는 것이니, 오상(五常) 오상(五常) :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
의 근본이고 온갖 행동의 근원이다. 효도를 행하고서 예(禮)가 없고 지혜롭지 않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없다. 이 효를 가지고 임금을 섬기면 충(忠)이 되고, 형을 섬기면 제(悌)가 되며, 아래 사람을 다스리면 애(愛)가 되고, 어린이를 어루만지면 자(慈)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의 효(孝)가 성립되면 온갖 선(善)이 따라 행해지는 것이다.
  노덕기 공께서는 이러한 효를 근본으로 하여 생을 살아간 분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언의 가르침을 남겨주신 분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1. ?광산(광주)노씨 대동보(光山(光州)盧氏大同譜)?
2. ?상산지(商山誌)?, 金子相 譯, 2003, 상주문화원
3. ?한국성씨총람(韓國姓氏總攬)?, 2005, 한국성씨총감 편찬위원회
4. ?웅주전고(雄州典故)?, 1998, 박약회 상주지회
5. ?옥연지(玉淵誌)?, 1998, 노서구(盧瑞九)
6.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노공 비명(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盧公碑銘)」, 김종직(金宗直) 찬(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