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경상도 상주의 일본군 병참부와 동학농민군
신 영 우(충북대)
< 차 례 > 머리말 경상도에 설치한 일본군 군용전신선과 병참부 1894년 여름에 봉기한 경상도의 동학농민군 상주 일대 동학농민군의 상주읍성 점령과 일본군의 개입 맺는 말 |
1. 머리말
1894년 초 조선사회는 국내외에서 불어닥친 전례 없는 격동의 한 가운데 위치했다. 서양 열강의 거대한 군함들은 수시로 인천 항구에 들어와서 정박했다. 이 시기에 청국과 일본 군함 여러 척이 인천항을 마치 자국의 해군기지처럼 번갈아 들어와서 상주하고 있었다. 청국이 조선에 미쳤던 정치 경제면의 영향력은 북양함대의 함정에서 시작하였다. 일본 세력의 국내 침투도 사세보진수부에서 오는 해군 전함의 위력에서 출발하였다.
조선왕조는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이후 민씨 척족정권이 20년을 넘는 기간 동안 집권하고 있었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 아래서 지방관의 지나친 조세 수취와 수탈은 농민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고, 전국 각 지역에 세력을 확대한 동학 조직을 연결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지방관아와 병영은 이런 사태를 수습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조선왕조의 지방통치는 여러 지역에서 무너진 상태였다. 경군 장위영을 파견했지만 동학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었다.
고종은 양호초토사인 장위영 영관 홍계훈의 보고를 받고, 정부의 중신들이 차병을 반대했지만, 민영준을 보내 조선에 주재하던 원세개에게 청국군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청국의 직예총독 이홍장은 광서제의 결재를 받고 청국군 파병을 추진하였다. 당시는 청국 정부의 주요 결정을 서태후가 내리던 때였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조선침략을 국가의 최대 현안으로 삼았다. 조선에 침투하던 일본 세력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군사력의 열세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일본정부는 이후 10년 이상 국력을 기울여 근대식 육군과 해군을 양성하고 지휘부를 혁신했다. 육군은 프랑스식 지역방어군 형태에서 외국에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동원사단 체제로 전환했다. 모든 전투는 참모본부에서 관장하여 사전 대비와 함께 정보와 병참 등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방침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과 청국에 정보장교를 밀파해서 각종 정보를 파악하였다.
동학농민군의 봉기 과정을 낱낱이 주시하던 일본군 참모본부는 청국군의 파병 정보를 들은 즉시 청국과 전쟁을 벌일 것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히로시마에 주둔한 제5사단에서 1개여단을 보강해서 조선에 파병하였다. 동학농민군 진압을 목적으로 아산만 백석포에 도착한 청국군과 거의 동시에 일본군 혼성제9여단 병력이 인천에 들어왔다. 그리고 즉각 서울로 진입해서 용산과 만리동에 주둔했다. 언제나 서울 도성을 침범하여 조선정부와 국왕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이 조성되었으나, 조선정부는 일본군에 맞설만한 군사력을 갖지 못했다.
일본군 제5사단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로를 연결하는 군용전신선과 병참기지를 구축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조선정부의 허가 없이 시작한 전신소와 병참부는 낙동강을 따라 올라와서 상주 낙동과 함창 태봉을 거쳐 문경과 충주로 가기로 계획하였다. 청국의 북양함대가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조선 국토를 종단하는 육로의 군사기지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시설로 생각했다.
1894년 7월 23일 새벽 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1850~1926) 소장이 지휘하는 혼성제9여단 보병 4개대대 병력이 서울 4대문을 막고, 경복궁을 기습해서 국왕과 왕비를 인질로 잡았다. 그리고 청국과 전쟁에 조선의 협력을 강요하는 조일동맹을 체결하였다. 청일전쟁은 7월 25일 일본 해군 제1유격대 함정이 청국군을 수송해온 선단과 호위함대를 아산만 풍도 부근에서 기습하여 1,000명을 수장시킨 사건으로 발발했다. 이어 서울에서 남진한 혼성제9여단이 성환에 주둔한 청국군 군영을 공격해서 육전을 시작했다. 일본군이 포격을 가해서 기선을 제압하자 근대전투를 경험하지 못한 청국군은 패산하고 말았다.
바로 이 같은 시기에 대구에서 선산과 상주로 올라가는 일본군 군용전신과 병참부가 설치되었다. 이해 여름에 일본군 제5사단의 잔여 부대가 상주를 거쳐 북상하였다. 수천 또는 수백 명 단위의 부대가 올라갔고, 군량과 무기 등 군수물자를 실은 병참지원대가 북상하였다. 제5사단장 노즈 미치츠라(野津道貫, 1841~1908) 중장이 기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지나갔다.
경상감영을 비롯한 각 군현의 관아는 속수무책이었다. 일본군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막을 힘이 없었고, 개화파 정부에서도 협조하도록 지침을 내려보냈다. 그리하여 일본군 공병부대가전신주를 설치하고 요지에 군용전신소를 운용하거나 병참부대가 민가를 차지하고 창고를 만들어서 북상하는 병력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군수물자를 쌓아두고 있어도 간여하지 못했다.
각 군현에 세거해온 양반들은 임란 의병의 전통을 자랑으로 삼고 있었으나 갑자기 들어온 대규모의 일본군을 목격해도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이때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무장봉기를 준비한 세력이 동학 조직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일본군과 전투를 시작한 지역이 상주 일대였다. 먼저 전신주를 뽑아내거나 전신선을 잘라서 통신망을 단절시켰다. 일본의 운명을 놓고 청국과 일전을 벌이던 일본에게 상주의 동학농민군은 후방을 공격하는 가장 위험한 상대였다. 그리고 일본이 국왕을 인질로 삼아 협조를 강요하여 후방역할을 하던 조선에서 유일하게 적대하던 적군이기도 했다.
일본 히로시마대본영은 낙동병참부와 태봉병참부에 주둔했던 일본군에게 동학농민군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부산에서 병력을 증파해서 상주 예천 문경 일대를 순회해서 초토하도록 했다. 이 글은 경상도 북서부 일대에서 벌어진 당시 상황을 간략하게 소개하려는 것이다. 1894년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약술하고, 경상도 상주의 급박했던 사정을 정리하려고 한다.
2. 경상도에 설치한 일본군 군용전신선과 병참부
일본정부는 1894년 6월 5일 전시체제로 전환하였다.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이 6월 4일 청국군의 조선 출병을 지시한 2일 후인 6월 6일에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에 통고했다. 일본은 통고 하루 전에 육군 참모본부 안에 대본영을 설치한 것이다. 대본영은 육군 참모본부와 해군 군령부를 통합하고, 내각과 의회가 총력 뒷받침하는 체제였다. 청일전쟁을 기획하고 추진한 중심인물은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1848~1999) 중장과 외상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1844~1897)였다.
군정을 담당한 해군대신은 사쓰마 군벌의 중진인 사이고 주도(西鄕從道, 1843~1902)였고, 작전 지휘를 통괄한 군령부장에는 7월 17일 가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 1837~1922) 중장이 임명되었다. 7월 19일 상비함대와 연안 방어 임무의 서해함대를 통합한 천황 직속의 연합함대를 편성했고, 사령장관은 이토 스케유키(伊東祐亨, 1843~1914) 중장이 임명되었다.
청국 육군은 6월 8일부터 25일 증원병까지 약 2,800명이 아산만으로 들어왔다. 전쟁을 결정한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는 6월 7일 히로시마의 제5사단 제9여단에 포병과 기병 등을 추가한 혼성제9여단을 조선에 파견하는 훈령을 내렸다. 여단장은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1850~1926) 소장이었다.
해군도 상비함대 사령장관 이토 스케유키 중장에게 훈령을 내렸다. 6월 24일 해군대신 사이고 주도가 사세보 군항에 집결한 함대에 내린 훈령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인천에 2~3척의 군함을 보내 육군을 지원하고, 사세보를 책원지(策源地)로 대마도 고토 부산 거문도 - 제주도 근해의 항로를 수호한다. 7월 하순으로 정한 대작전에서 적의 근거지를 공격한다.”
조선에 1차로 파병한 일본군 부대는 히로시마에 주둔한 제5사단 예하의 제9여단이었다. 일본군이 1893년 12월에 제정한 전시 사단편제는 정원을 18,492명으로 정했다. 이 편제 안에 2개 연대로 구성된 2개의 여단이 있는데 그 정원이 5,806명이었다. 그 외에 1,267명 정원인 1개 포병여단이 있고, 그리고 3개중대 509명으로 구성된 기병대대가 있었다.
선발대로 파병한 제9여단은 독자전투가 가능하도록 제5사단에서 1개 기병중대와 포병 1개대대 그리고 공병 1개중대를 선발하여 추가했다. 여기에 치중병(輜重兵)과 위생대 그리고 야전병원 및 병참부를 배속시켰다. 선발대 명칭을 혼성여단으로 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일본군 대본영은 1894년 6월 12일 부산에 1개 보병중대를 파견하도록 제5사단장 노즈 미치츠라(野津道貫) 중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노즈 중장은 21연대 제5중대 병력을 파견했는데, 이 중대가 도착한 이후 부산은 내륙 침투의 발판이 되었다. 이미 1883년부터 부산에 설치된 일본영사관이 조선 내부의 정보를 보고하는 거점 역할을 했는데 파병 이후에는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혼성제9여단 선발대는 부산을 거치지 않고 군함을 호송을 받으며 해로를 통해 인천으로 직행했다. 인천 상륙 즉시 서울로 들어간 후 7월 23일 새벽 경복궁과 경군 병영을 기습했다. 국왕 고종은 인질이 되었고, 경군은 무장 해제되었다. 그리고 서울 사대문을 점거하고 도성을 장악하였다. 일본이 근대식 군대를 만든 후 처음 외국 원정을 감행해서 조선을 공격한 것이었다. 이 기습 전쟁에 조선은 일방적으로 패배하고, 국왕까지 인질로 되었다.
7월 25일에는 일본해군 연합함대의 제2유격대가 아산앞바다의 풍도 인근에서 청의 북양함대 전함 치유엔호와 카오쟝호를 공격했다. 해전으로 청일 간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7월 29일 밤에는 서울에서 남하한 혼성제9여단이 성환에 주둔한 청국군 진영을 공격해서 육전이 벌어졌다. 8월 1일에는 청일 양국이 선전포고를 해서 전면전을 시작했다.
일본은 이미 6월 초부터 전쟁을 계획하였다. 6월 1일에 파병 명령을 육군과 해군에 내렸다. 그리고 6월 6일 우선 보명 1개대대를 인천에 선발 투입하라는 명령을 오시마 여단장에게 내렸다. 이날 군용전신과 공병부대 파견을 함께 명령했다. 사전 계획에서 주목되는 것이 치중대와 전선가설대이다.
치중대는 무기와 탄약 그리고 군량 등 병참지원을 맡은 부대로 대규모 수송을 위해서는 육로를 통해 북상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경상도를 가로질러서 가게 되는 것이다. 병차기지를 일정한 거리마다 세우는 것이 필수조건이 되고, 실제로 병참부를 설치해야 한다. 전선가설대도 역시 내륙을 통과해서 서울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경상도가 전신기지와 전신망 연결을 시작하는 지역이 된다.
전쟁 수행에 병참과 전신망은 필수였다. 청국군도 아산에 상륙한 후 천안까지 전신선을 가설하기로 결정하고 전신주를 세울 목재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전신이 통하지 않으면 인편으로 급한 보고와 명령을 전해야 하는데 시간을 다투는 전쟁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위자료. “전신 대신 인편으로 한다고 한다. 위 전신이 중지되었기 때문에 전신을 대신해서 각 읍에 인부를 두어 서로 이어가며 급보를 전할 것이라고 한다. 또는 산 위에서 신호를 보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불분명하다.“
일본군 참모본부가 군대를 파견하면서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이 전신망 가설이었다. 이에 따라 2개조의 가설지대가 파견되었다. 제5사단장이 책임을 지고 가설지대를 지휘해서 설치하도록 하였다. 대본영에서 직접 보낸 제1지대는 부산에서 시작하여 대구를 거쳐 성주 추풍령 옥천을 지나 청주까지 전신가설을 책임지고, 제5사단에서 편성해서 파견하도록 한 제2지대는 서울에서 시작하여 청주까지 가설을 맡도록 했다. 이 노선은 가와카미 참모차장이 상주에서 충주를 거치는 것으로 변경하고 7월 11일에 체신대신에게 통보한다.
제1지대는 긴급성 때문에 대본영에서 직접 요시미 세이(吉見精) 공병소좌를 사령관으로 선발해서 보냈다. 제2지대는 7월 2일 제5사단장이 바바 마사오(馬場正雄) 공병소좌를 임명해서 보냈다. 전선가설대의 인원수는 적지 않았다. 제1가설지대는 장교 5명에 하사와 병 142명 그리고 기수(技手) 9명과 공장운반부 160명 등을 합해 345명이나 되었다. 제2가설지대는 장교 4명에 하사와 병 126명 그리고 기수 10명과 인부 150명을 합해 449명이었다. 그위에 일본에서 전신주의 자재와 부속을 계속해서 수송을 해왔다. 제1가설지대는 부산에 주둔시킨 21연대 제5중대 병력으로 전신선로 주변을 정찰하고 호위하게 하였다.
일본군 참모본부는 자국의 군용전신선을 주권이 미치지 않는 외국에 가설하는 것은 국제법상 불법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처음부터 사전허가 없이 전격적으로 전선 설치를 진행하도록 가설지대에 지시하였다. 단 기공에 앞서 해당 지역의 지방관에게 미리 알려주고 협조를 받도록 하였다. 부산에서 대구로 북상하는 가설 작업에 관한 협의는 부산영사관에서 맡도록 하였다.
군용전신을 가설하겠다고 조선정부에 통지한 날은 7월 16일이었다. 물론 조선정부는 완강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억지로 전쟁을 각오한 일본은 억지로 가설을 해나갔다. 그 상황이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공사가 혼성제9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大鳥義昌)에게 보낸 기밀 자료에서 드러난다.
“경부 간에 군용전신을 가설하는 일은 오늘 조선정부에 통지했으므로 형편이 되는 대로 착수해도 지장이 없겠습니다. 다만 이것은 조선 정부에서 단연 거절한 것을 우리가 억지로 가설하는 것이니, 착수할 때 혹시 그들로부터 방해를 받을지도 모르므로, 다음과 같은 경우가 생기면 될 수 있는 대로 온화한 수단으로 그것을 제지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조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단, 조선 관민이 폭력으로써 방해를 하던가, 또는 청국인 쪽에서 방해하는 등의 경우가 있을 경우에는 때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처치하여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청국과 전쟁이 벌어지기도 전에 군용전선 가설을 방해받으면 조선 관민이든 청국인이든 ‘임기응변으로 처치해도 좋다’는 지침까지 일본공사가 내리고 있다. 이 내용은 처음으로 조선인을 처치해도 좋다고 일본군에게 내린 명령이기도 했다. 이때 조선 내에서 일어나는 군사문제에 관한 최고결정은 히로시마 대본영이 내렸고, 대본영의 실무 책임자는 참모차장으로 대본영 수석참모를 겸하면서 병참총감을 맡고 있었던 가와카미 소로쿠 중장이였다. 청과의 전쟁을 기획해서 사전준비를 하고, 세부 전략을 수립해서 강력하게 추진해나간 인물이 소로쿠였다.
실제로 7월 20일 서울에서 가설공사를 착수한다는 바바 소좌의 보고는 가와카미 참모차장에게 직접 올라갔다. 제1가설지대의 요시미에게는 가와카미 참모차장이 병참총감의 직함으로 직접 명령서를 전달하고 있다. 이런 명령과 지시 아래 경상도 내륙으로 이어지는 요지마다 수백 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이 일본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전신주를 설치하고 전신선을 연결하는 커다란 공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 같은 사태는 조선인에게 큰 변고였다. 고성부사 오횡묵은 그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일본인 천 여명이 미산(眉山)에 주둔해서 소와 말에 군량과 말먹이 그리고 기계를 운반하는데 그 수가 7~8백 필이라고 합니다. 그로 인해 감영 인심이 소란하고 흩어져 피난하는 사람이 서로 이어집니다. 감사는 매일 소를 잡고 술을 장만해서 위로하고 먹이며 침략의 폐해가 이르지 않도록 하고 있는데 그들이 하는 일은 전선을 설치하는 일입니다.”
대본영은 전신선 가설과 함께 병참망을 설치하였다. 병참망은 대규모 부대의 행군에 편리하게 도로와 다리를 수축하는 공사가 뒤따랐다. 송판과 삼나무 판재 등 각종 목재와 쇠못 그리고 많은 석재가 필요하였다. 다양한 작업도구도 필요하였다. 이런 자재와 도구를 일본에서 수송하였다.
혼성제9여단은 성환전투 직후 서울로 가서 용산과 만리동 일대에 주둔하였다. 청국군은 강원도로 우회해서 평양으로 들어갔다. 평양에는 청국이 보낸 증원군까지 13,000명 이상의 병력이 와서 주둔하였다. 혼성제9여단은 임진강 일대를 정찰하면서 평양을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히로시마대본영은 조선에 병력을 증강시키려는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우선 제5사단 잔여병력을 시급히 파견하였다. 이미 6월 말부터 2개연대를 비롯한 나머지 병력을 출동시키는 명령을 내렸다.
이런 병력을 수송할 때에는 군함과 상선을 동원해서 해로로 인천에 가는 것이 제일 쉽고 빠르게 갈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청국의 북양함대는 막강한 위세를 가졌기 때문에 부산과 인천 간 항로가 막힐 때에는 육로로 갈 수밖에 없었다. 육로는 여러 산과 강이 거듭 나오는 험악한 상태이기 때문에 병참선로의 정비가 중요하였다. 가설을 시작한 군용전선망과 병참망은 동일한 노선을 가져야 보호와 유지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병참노선은 대구에서 상주를 거쳐 문경을 지나 안보와 충주로 가는 길이 유리하였다. 충주에서 한강 수로를 이용하면 대규모 수송에 보다 편리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전신선로도 문경과 충주로 거치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 노선을 따라 제5사단장 노쓰 미치츠라 중장 일행이 조선에 들어와서 북상하였다. 이들이 히로시마 우지나항에서 출항하여 12연대와 함께 부산에 도착한 날은 8월 6일이었다. 이틀을 머물며 원산으로 보낼 병력을 나눈 다음에 8월 8일 부산을 출발해서 양산으로 갔다. 다음날부터 하루 일정으로 양산에서 밀양, 밀양에서 청도, 청도에서 대구로 행군했는데 이 하루 행군 거리인 30리마다 병참사령부를 두고 있었다.
부산과 서울까지 연결된 병참망은 중로병참감의 지휘 아래 들어갔다. 각 지역에는 16개의 병참사령부를 두었고, 후비보병제10연대 제1대대를 분산해서 수비병으로 주둔시켰다. 경상도 지역의 병참망은 다음과 같다.
남부병참감 관할 병참부와 수비병
지역 | 병력 | 사령관 | 비고 |
부산 | 대대본부 |
| 제3중대 |
삼랑진 물금 밀양 | 1개소대 1개분대 1개분대 | 가다오카(片岡) 소좌 다케다(武田) 소좌 마쓰무라(松村) 소좌 | 제2중대 |
대구 청도 다부원 | 1개소대 1개분대 1개분대 | 우마야하라(馬屋原) 소좌 소다(曾田) 소좌 와다나베(渡邊) 소좌 | 제2중대 본부 |
낙동 해평 태봉 | 1개소대 1개분대 1개분대 | 이마하시(今橋) 소좌 가가와(香川景俊) 소좌 토키자와(時澤) 소좌 | 제2중대 |
문경 안보 | 반소대 1개분대 | 데와(出羽) 소좌 모리토(森戶) 소좌 | 제1중대
|
충주 가흥 장호원 | 1개소대 반소대 1개분대 |
(하담)다이쿠(大供) 소좌 하타노(波多野) 소좌 | 제1중대 본부
|
곤지암 이천 | 반소대 1개분대 |
우메사키(梅崎) 소좌 |
|
송파진 조현 | 1개소대 1분대 | 야마가타(山顯) 소좌 시바(芝) 소좌 | 제1중대
|
부산은 일본에서 건너오는 병력이 상륙하는 곳이기 때문에 대대본부와 함께 1개중대 병력을 주둔시켰다. 그리고 1개소대나 반개소대를 주둔시킨 삼랑진 대구 낙동 문경이 상하 양쪽 병참부보다 많은 병력을 주둔시켜서 유사시 응원하도록 하였다.
일본군 5사단이 관할하는 중로병참감의 병참노선을 따라 수많은 일본군과 군량 그리고 각종 무기와 장비가 전선이 형성된 평양을 향해 올라갔다. 이뿐이 아니었다. 일본군은 온갖 방법을 다 찾아서 군수물자를 나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경상도 일대의 주민들을 경악시켰다.
“일본병사들이 동래에서 수륙 양쪽으로 진격하여 인천 칠곡 상주 선산 대구 문경 등지에 가득 찼다. 좋은 곳을 엿보아 관사를 지으니 달성과 낙동 같은 곳에 그대로 머물렀다.”
“강가에 이르니 4~5척의 돛단배가 모두 일본인의 군량과 물자를 운반해가는 것이다. 근일에 지나간 바가 쌀과 보리가 몇 만 석이 된다고 하고 비록 작폐하는 일은 없었으나 인심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니 형세가 없을 수 없는 바이다.”
일본군은 낙동강의 돛단배까지 동원해서 군수물자를 나르고 있었다. 평양전투에 대비해서 한창 군사력을 집중시키던 8월 17일자의 기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일본군은 일본에서 군량 등을 가져오면서 또한 경상도 일대에서 곡식을 사들이고 있었다.
곡식 구입은 제값을 주고 매입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경상도는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었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일본군이 마구 들어와도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본군도 약탈로 인한 반감 확대를 막기 위해 불법행위를 억제하였다. 경상감사 조병호가 고성부사 오횡묵에게 밝힌 다음 이야기는 당시의 사정을 잘 보여준다.
“일본인을 말하면 5월부터 동래에서 내지를 따라 상경한 사람이 5~6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지나는 길은 3백 명씩 혹 대를 지어 3일 기한으로 10리를 수리하는데 좁은 곳은 전답을 따지지 않고 높은 곳은 파내고 낮은 곳은 메워서 돌을 뽑고 나무를 잘라 기어이 평탄하게 하였다. 대략 40리에 하나씩 병참을 두어 동래 밀양 청도 대구 독명원 해명 낙동 태봉 문경은 대참(大站)으로 일병이 많으면 2~3천명에 이르고 적어도 천명 이하가 아니다. 그 나머지 소참(小站)에도 1~2백 명이 된다고 한다.
대구에 이르러서는 일병이 공해에 들어오려고 요청했으나 부득이 불허하였다. 단지 작폐가 없는 것만 다행이다. 고인(雇人)에게는 10리마다 2~3량을 주고, 소와 말을 빌리면 4~5량을 준다. 만약 팔고 사면 값을 3배를 올려준다. 이는 해를 끼치거나 걱정되는 일이 아니지만 오랜 태평시기에 해괴하고 당혹스러움이 있다.”
병참부가 설치된 지역의 지방관은 일본군의 협조 요청에 시달렸다. 군량을 조달해주어야 했고, 군수물자를 운반시킬 인부와 말 등을 확보해주어야 했다. 임란 이후 의병항쟁의 전통이 강했던 경상도의 반일 분위기 속에서 인부를 모집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정부의 지시에 따라 협조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일본군은 각 지역에 군량창고를 만들거나 수송비용 등에 필요한 조선 화폐를 교환해주는 협력까지 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기습과 점령 사태를 우려하는 양반유생들의 반일 의병도 시도되고 있었다. 농민항쟁이 벌어진 군현에는 정부가 안핵사를 보내서 수습하였다. 그렇지만 반일 의병은 관료들로서 우려할 문제였다. 국왕이 인질로 된 상태에서 의병봉기는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3. 1894년 여름에 봉기한 경상도의 동학농민군
1894년 봄 상주를 비롯한 충청도와 경상도에 접경한 여러 군현의 동학 세력은 공공연하게 활동을 시작했다. 경상도의 민심도 동학농민군의 1차봉기가 일어난 전라도나 충청도와 다르지 않았다. 경상도에 살던 한 유생이 그런 사실을 전해준다.
“이때 토호들과 탐관오리가 제멋대로 평민을 토색하는 일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초야의 힘없는 백성들은 살아갈 수가 없었다. 비록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서울의 대궐이 높고 멀어서 하소연할 수가 없었으니 팔도의 백성들이 이로 인하여 독기를 품은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경상도 북서부 지역은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9월 말 이후 안동과 의성을 비롯해서 예천 용궁 문경 함창 상주 등 북부 일대와 김산 지례 성주 거창 함양 등 서부 일대에서는 호대한 동학농민군 세력이 관아를 압도하였다. 남부에서도 진주 단성 남해 하동 일대의 동학농민군이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반면에 영해 영덕 경주 울산 동래 등지에서는 정부에 보고한 동학농민군의 활동상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그 원인으로 여러 가지를 찾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동학조직의 존재나 그 세력의 강약을 들어야 할 것이다. 동학농민군이 일찍이 큰 세력으로 결성된 지역은 동학조직이 강력했던 곳이었다. 1871년의 신미년 ‘작변’에 의해 참변을 당한 영해의 동학 조직이 1894년까지 재건되지 않았을 수 있다. 1894년 봄의 상황을 보면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봉기 직후 경상도의 접경 지역에 동학조직이 급속히 세력을 키워갔다.
경상도의 봉기 과정은 다른 지역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전라도에서는 봄과 가을봉기의 전 기간에 걸쳐 독자적으로 활동한 남접의 지도자들이 주도해서 봉기를 시작하고 이끌었다. 반면 경상도의 동학 조직은 전라도에서 전해지는 소식을 들은 이후에 본격적으로 조직을 확대하는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7월 말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 소식이 들려오고 경상도를 거쳐 일본군 5사단 병력이 북상하자 무장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부산에서 대구를 거쳐 상주와 문경으로 이어지는 북상길은 일본군의 주요 통로였다. 군용전신과 병참망을 설치해서 청일전쟁을 수행하는 일본군의 후방 기지 역할을 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막강한 전력을 알면서도 전신선을 차단하거나 무장봉기해서 병참부를 위협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군의 정탐 활동과 무력 개입이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경상도의 동학 조직은 북접 계통에 속한다. 남접과는 직접 연결되지 않았다. 따라서 1차봉기에 경상도의 동학도들은 가세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라도에서 전해진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전주성 점령 소식은 동학 조직을 고무시켰다. 각 군현 관아의 기찰을 몰래 피해오던 동학도들이 공공연히 활동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동학에 입도시켰다.
동학에 들어간 사람들은 떼를 지어 이전에는 감히 할 수 없었던 여러 활동을 해나갔다. 수탈을 자행하던 관리들을 징치하고 불량 양반에게 보복하는 것과 함께 과거의 원한을 풀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한 사정은 동학 조직이 퍼져나갔던 전국에서 유사하였다.
동학의 세상이 되자 관리의 악정과 양반의 압박을 받던 평민들이 관리와 양반들에게 공세를 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여기에 협잡배와 범법자까지 들어와서 가세하였다고 하였다. 더 큰 문제는 여러 군현에서 관아가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겨우 읍내 안에서만 관리들이 머물렀고 면리에는 출입을 하지 못했다.
“6월에서 7월 사이에 그 세력이 매우 커져서 마을을 횡행하며 포덕이라고 속여 꾀어내고 협박하니 여기에 가담하는 자들이 날마다 수천을 헤아렸다. 이에 접소(接所)를 분설하여 각 면 방곡에 접소가 없는 곳이 없었으나 서북의 외지가 특히 심하였다. 대접(大接)은 만여 명이나 되었으며, 소접(小接)은 수십, 수백 명이었다. 시정(市井)의 동혼(童昏)·평민·노비·머슴 등의 무리들은 자신들이 득세한 때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관장(官長)을 능욕하고, 사대부를 욕보이고, 마을을 겁략하고, 재물을 약탈하고, 무기를 훔치고, 남의 나귀와 말을 몰고 가고, 남의 무덤을 파헤쳤다.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하여 묶어놓고 구타하였으며 종종 살인까지 저질렀다. 그러니 인심이 흉흉하여 아침에 저녁 일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경내의 사대부들 중 혹 먼저 욕을 당하였으나 나중에는 물든 자도 있었다. 그리하여 같이 나쁜 짓을 하는 무리들은 서로 끌어당겨서 무리를 믿고 행패를 부렸다. 수백 명이 사는 촌락이더라도 한두 명 동인(東人)이 나타나면 황급히 달아나 숨어버렸다. 그래서 마을이 텅 비어서 저들이 마음대로 분탕질을 하도록 내버려두었으며 금지할 수가 없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기습해서 나라에 위기가 조성되자 동학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졌다. 동학도들의 명분은 일본을 물리친다는 ‘척왜(斥倭)‘였다. 경상도의 동학도들에게는 눈앞에서 횡행하는 일본군이 세력 확장의 명분을 주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농민들은 관아보다 동학 조직을 의지하게 되었다. 관아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소송까지 동학 조직에 가서 할 정도였다.
“사송은 모두 소야의 접소로 몰렸으며 관부는 적막하였다. 또 동도 검찰관(檢察官) 장극원(張克元)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각 읍을 돌아다니며 포악한 자들을 금지한다고 떠들면서 도리어 탐욕스런 행동을 자행하였는데 그 행장과 수행원의 규모가 도백(道伯), 관찰사에 비견되었다. 그가 이르는 곳에서는 그 위세가 호랑이와 같았으며 송사를 처결해 달라고 온 자들이 시장처럼 몰려들었다.”
여러 군현에서 동학 조직이 농민들을 실제로 지배하는 현상이 나타났고, 검찰관이라고 부르는 인물이 수행원들과 함께 순회하였다. 관아에서는 이를 막을 힘이 없었다. 각 군현에서 빈발하는 동학과 관련한 사건에 대해 감영에서도 제어하지 못하였다. 갖가지 보고가 군현에서 올라오면 그 처리에 대해 의견을 말할 뿐이었다.
10월 초에 경상감사 조병호는 경상도의 상황을 언급하면서 60여 곳에서 민요가 있다고 하였다.
“근래 서울소식을 들었더니 시국이 일변하고 상황이 흉흉해서 차라리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한 이 도내에도 민요가 있는 고을이 거의 60여 곳이나 됩니다. --- 그 밖의 다른 고을은 모두가 어긋나고 무너져서 보고를 받으면 답답하고 고민이 됩니다. 거듭 동도가 사방에서 일어나 없는 곳이 없으며 그중 용궁·예천·상주·선산·김산·성주 등의 고을이 더욱 심합니다.”
경상도 71개 군현 중에서 60여 군현에서 민요가 일어났다면 관치질서가 거의 무너진 사실을 보여준다. 동학 조직 활동해서 기포한 지역과 지방관의 학정에 저항한 농민항쟁이 벌어진 지역을 합하면 거의 모든 군현이 격동했던 것이다.
각 군현의 관아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동학도들의 수는 갈수록 늘어나서 소수의 향리들이 제어할 수 없었다. 동학도들이 커다란 깃발을 날리며 말을 타고 마을을 출입하면서 총을 쏘는 것은 곧 무장봉기에 들어간다는 표시였다.
경상도 북서부 군현의 동학도들은 공세 대상이 명확했다. 선산 해평과 상주 낙동, 그리고 함창 태봉과 문경의 일본군 병참부와 군용전신소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 병참노선에는 북상하는 일본군이 끊임없이 행군하고 있었다. 가장 쉬운 공격 방법은 군용전신선을 단절시키는 것이었다. 동학도들은 이제 군사조직을 갖추고 일본군 군용전신을 단절시키는 활동에 들어갔다.
서울과 도쿄·히로시마 간 전신 두절은 전쟁 중인 일본군은 물론 일본 정부에서 가장 꺼려하는 문제였다. 일본 정부와 히로시마 대본영에서 조선 정부를 압박하거나 군사문제를 협의하는 통로가 끊어지기 때문이었다. 무츠 무네미츠 일본 외무대신이 오토리 공사에게 보낸 훈령을 보면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8월 하순 부산의 일본 총영사가 일본공사에게 보낸 기밀전문에 동학농민군의 공격으로 군용전신이 단절된 구체적인 내용이 나온다.
“京釜 間 군용전선은 개통된지 겨우 1개월 반 밖에 안 되었어도 불통이 되는 일이 빈번하여 실로 다음과 같습니다.
8월 23일 長川 以西
同 25일 大邱 以西
同 29일 鳳凰台·陳安 間
9월 1일 大邱 以北
同 2일 同上
同 16일 洛東 以東
同 21일 洛東 以北
同 22일 洛東·長川 間
同 24일 洛東·長川 間
9회나 되는데, 그 중 한두 개는 자연재해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외는 모두 전선 또는 전주를 절단한 것으로 이들 불법의 무리는 대부분 조선인일 것입니다. 그 중에는 내지에 잠복하고 있는 청국 패잔병의 행위에서 나온 혐의도 적지 않습니다. 또 동학도도 각지에서 불온한 거동을 하여 이미 어제 문경병참부가 當港 병참감에게 도달한 정보에는 ‘동학도 1명을 잡았는바 자백은 안했지만 그 휴대품 중에, 조만간 청군 7,000명이 인접지역에 올 것이니 양식준비를 하여 놓으라는 예고 같은 서면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생각하건대 전선 절단도 주로 동학도 및 청국 패잔병의 행위일 것입니다.”
상주 낙동과 선산 해평 주변이 가장 자주 전신선이 단절된 곳이었다. 전신선 단절의 원인을 동학도와 청국군의 활동으로 보고 있으나 청국군에 관한 근거는 나오지 않는다. 일본군이 대책으로 제시한 방안이 “낙동·문경·가흥 3개소에 수명의 순포(巡捕)·순사를 조선 관리에 붙여서 파견하여 우리 병참사령관과 협의하여 우리 군용전신을 보호하는 한편 동학도 등의 폭발을 예방”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일본군이 군용전신선 보호를 둘러싸고 긴장하는 가운데 동학농민군이 관아와 양반·향리들과 충돌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동학농민군이 경상도 북서부 군현에서 봉기를 준비하는 과정은 교주 최시형이 기포령을 내린 9월 하순 이전과 이후가 구분된다. 이전은 동학의 말단 접에서 독자적으로 봉기를 준비하던 시기였고, 이후는 기포령에 따라 보은과 영동에 집결한 대규모 북접농민군이 경상도까지 몰려와서 군수미와 군수전을 거두던 시기였다.
경상도 북서부의 동학 조직은 기포령 이전에 무장봉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양반지주와 향리들의 반격을 받게 된다. 반일 봉기의 명분을 앞세웠지만 당장 돈과 곡식을 빼앗기거나 상민들이 보복하는 행위에 분노했던 것이다. 또 노비들이 스스로 해방하고 나가는 것도 참기 어려웠다.
“어느 곳을 따질 것 없이 사가(私家)의 노예들이 대부분 동학도에 들어가 그 상전인 자들이 값을 받지도 않고 속량하였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망칙한 피해를 당하였기 때문에 우리 세 집안의 노비 역시 시세에 따라 방출하여 수하에 한 명도 없어서 근심스럽고 답답하였다.”
“사가(私家)의 노예들이 상전을 구타하고, 하인이나 하천민이 사대부를 매질하며, 작은 원한이라도 반드시 되갚고 예전의 은혜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들 중에 받아내기 어려운 빚이 있으면 반드시 받아내서 나누어 먹고, 파내기 어려운 무덤이 있으면 반드시 파내어 위세를 보였다.”
8월에는 동학 조직에 농민들이 대거 들어가서 세력이 크게 확대되었다. 많은 마을에 접조직이 설치되고 접주가 나서서 포교를 확대하였다. 지례에서는 경내의 사정을 잘 모르는 신임 현감이 동학도를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었다가 보복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런 사정은 지례만이 아니었다. 성주의 유생이 남긴 기록은 경상도의 여러 군현의 실상을 보여준다.
“이른바 동학 무리가 곳곳에서 들고 일어나니 이런 난리가 없다. 가까운 읍으로 말하자면, 김산·개령·선산·인동·지례 등의 읍이 소요의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 없었다. 8월 23일 성주 경내에 들어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침학하였고, 27일에는 읍에 들어와 소요를 일으켰다.”
그러나 경상도에서 처음으로 예천의 향리들이 동학도들의 활동을 막기 위해 민보군 조직을 결성하였다. 7월 26일 예천 읍내와 읍근 동리의 향리와 유생 70여명이 객관에 모여 만든 집강소는 관아의 무기를 지급받아 부병을 무장시켰다. 그리고 양반지주와 부농, 그리고 향리들에게 돈과 곡식을 탈취하거나 과거의 원한에 대해 보복활동을 하는 동학도들을 체포해서 처벌하였다.
8월 10일 집강소의 민보군이 돈과 곡식을 빼앗으며 다니던 동학도 11명을 체포해서 한천 모래사장에 생매장해서 죽인 후에 동학도들과 대치하는 형국이 벌어졌다. 동학도들은 읍내로 들어가는 사방의 길을 막아 한 달 가까이 읍내로 양곡과 땔감이 들어가는 것을 막자 관아에서도 10여일을 흰죽만 먹는 지경까지 왔다. 경상감영을 비롯한 인근 안동에 구원병 파견을 호소했으나 도움이 없었다.
사실상 이때 경상도 북부에 도회를 열었던 동학도들의 목표는 일본군 병참부와 군용전신소 공격이었다. 상주 산양에 경상도 상주·함창·용궁과 충청도 충주 동학도 ‘수천명’이 취회해서 함창과 문경의 일본군 병참부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예천 화지에 집결한 동학도들도 읍내 민보군에게 11명 생매장에 대한 책임도 물었지만 반왜(反倭)가 목표라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외부 통로가 차단된 민보군은 이를 믿지 않았다. 읍내의 위기를 벗어나는 방법은 일전을 치러 승패를 결정하는 것뿐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동학도들이 집결한 화지에 선제 공세를 취하자 화지 도회에서 관동대접(關東大接)과 상북(商北)·용궁·충경(忠慶)·예천·안동·풍기·영천·상주·함창·문경·단양·청풍 등 13명의 접주가 회합을 하고, 마침내 읍내 공격을 결정하였다.
8월 27일 화지와 금당실에서 동학농민군 4~5천명이 읍내를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오랜 봉쇄로 적개심을 갖게 된 1천500여명의 민보군이 결속해서 완강히 방어를 했기 때문이었다.
예천전투는 매우 큰 사건이었다. 전라도나 충청도에서 재봉기가 결정된 시기는 9월 하순이었다. 한 달 정도나 이전에 대규모 집결과 대치 그리고 충돌과 전투가 벌어졌다. 정부에 보고된 수를 보면 2차에 걸쳐 쌍방 5,500명에서 6천 5백명이 일대 공방전을 벌인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외부의 지원을 받지 않은 민보군이 승리하였다.
이 전투 직전인 8월 25일에 또 다른 커다란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군 태봉병참부의 부관인 다케노우치 모리마사(竹內盛雅) 대위가 동학도들의 집결지에서 정탐을 하던 중 발각되어 죽은 것이다. 산양은 문경에서 예천 방향으로 가면 용궁현 전에 나오는 상주목 경내였다.
여기에 집결한 수천의 동학도가 예천 읍내 공격을 위해 먼저 용궁 관아의 무기를 탈취하였다. 그러한 정보를 알게 된 태봉병참부가 정탐병을 보냈다가 다케노우치 대위가 죽은 것인데 이 보고는 병참망과 군용전신망을 관할하던 일본군이 처음 맞은 큰 사건이었다.
다케노우치 모리마사 대위 사건은 널리 알려져서 일본 충혼 관련 기록에 올라가는데 이 사건 때문에 갑오년 처음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충주에 있던 공병 소대가 파견되어 석문전투가 벌어졌고, 일본신문에 보도되어 널리 알려졌다.
이 사건 때문에 경상감사 조병호는 친군남영병을 파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병방 신태휴(申泰休)가 지휘하는 병력 124명이 8월 28일 대구를 출발해서 9월 14일까지 인동·선산·상주·함창·용궁·예천 등지를 순회하였다. 친군남영병은 동학농민군과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예천에서는 동학농민군이 해산한 상태였고, 문경과 용궁 일대의 동학농민군도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집단행동을 하지 못하였다.
4. 상주 일대 동학농민군의 상주읍성 점령과 일본군의 개입
상주는 동학의 창도 초기부터 동학 세력이 강했던 지역이었다. 양반유생들이 동학의 교리와 동학도들의 성향을 파악해서 경계했던 지역이기도 했다. 여러 대접주들이 정부의 탄압 속에서 수십 년 동안 동학 조직을 유지해왔다. 1894년 봄 이후 상주의 동학 조직은 교주 최시형의 지침에 따라서 전라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1차봉기에 가세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시형이 9월 18일 기포령을 내리자 상주의 동학지도자는 즉각 봉기하였다.
상주와 예천 일대의 대접주들이 이끄는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이 9월 22일 상주 읍성을 점거하였다. 관아의 무기를 탈취하고 객관에 들어가 모여 있었다. 이 시기는 전국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해서 많은 읍내가 점거되었지만 상주와 같은 대읍이 일시라도 점거된 경우는 드문 예였다.
당시 상주목사 윤태원(尹泰元)은 내직인 승지 발령을 받고, 후임에게 인수 인계를 준비하던 때였다. 대규모의 동학농민군이 읍성에 들어오자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향리들과 함께 도피하였다. 인근 군현에서 그 소식을 듣고 문의해오면 동학에 가담한 향리들이 관아에서 정확하지 않은 소문이라고 회답을 하였다. 읍성의 동학농민군은 낙동의 일본군병참부를 공격하겠다고 호언을 하였다. 또 예천읍에서 민보군에게 밀려서 상주로 갔던 예천의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은 예천을 징벌하자는 주장도 하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상주 읍성을 점거한 상황은 낙동병참부의 일본군에게 긴급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군용전신과 병참선이 막히면 전쟁 수행에 차질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을 축출하기 위해 봉기한 사실을 잘 아는 낙동병참부의 일본군은 9월 28일 10시경 읍성을 기습했다. 사다리를 사용해서 성벽을 타고 들어온 일본군은 수많은 동학농민군을 희생시키고 읍성을 점령하였다. 동학농민군이 보유한 무기는 대부분 읍성 안에 있었는데 일본군은 이 무기를 낙동병참부로 가져갔다.
일본군이 철수한 다음 상주 읍성은 피신지에서 돌아온 향리들이 통제하였다. 상주목사 윤태원은 향리인 가평으로 피신해서 관아는 공관상태였다. 상주에는 영장 유인형이 목사의 직무를 대행하고 있었지만 관아는 향리들이 장악하였다. 향리들이 민보군 결성하였다. 이름은 예천의 집강소를 선례로 삼아 상주집강소(尙州執綱所)라고 하였다. 상산 박씨가 중심이 되고 진주 강씨·연안 차씨·달성 서씨·함령 김씨 등이 합세한 조직이었는데 집강 3명도 이들 성씨를 대표하는 인물이 선임되었고 중요 부서의 직임도 공생(貢生)들이 담당하였다.
상주집강소는 성내와 인근 동리의 장정을 동원하여 민보군을 편성했다. 대읍인 상주 읍성은 난리를 피하여 피난한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아 최대한 동원한 수가 5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집강소의 유사들이 각기 책임을 지고 우선 동서남북 4성문을 지켰다. 그리고 동학농민군 근거지를 수색해서 지도자들을 체포해 왔다.
상주 읍성에서 물러나온 동학농민군은 기세가 급격히 떨어져서 많은 사람들은 보은의 북접 농민군 집결지를 찾아갔다. 일부는 상주에 남아서 통문을 전달하며 11월에 재거사를 계획하였다.
상주에서는 충청도 보은으로 대규모로 집결했던 동학농민군의 동정이 전해지고 있었다. 보은에 모였던 사람들은 황간과 영동으로 분산 주둔하였는데 그 행군 과정에서 관아를 점거하고 병기를 탈취하면서 양반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인근 지역에 대규모로 동학농민군이 집결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 상주의 양반들은 다음 행군 목표가 영남 일대로 추측하면서 공포에 휩싸였다. 동학농민군을 체포해서 처벌했던 상주에서는 위기감이 더욱 심하였다.
10월 17일 정부에서 영남소모사(嶺南召募使)에 이 지역 명가인 진주정씨의 종손인 정의묵(鄭宜黙)을 선임했다는 공문서가 상주에 도착했다. 이는 경상도 북부지역에서 민보군을 결성하여 동학농민군의 진압하는 군권을 부여한 것인 동시에 충청도 영동과 황간에 주둔한 대규모 동학농민군을 두려워하던 상주 양반들의 구심점을 정해준 것이었다.
경상도의 동학농민군 봉기 상황을 보면 몇 개의 권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예천 안동 용궁을 중심으로 한 북부 권역이다. 강원도에 뿌리가 있던 동학의 관동포와 충청도 충주 청풍 단양의 조직이 연계되어 일찍부터 커다란 동학농민군 조직이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둘째는 상주 함창 문경 일대의 북서부 권역이다. 일본군 병참노선과 군용전신선이 낙동과 태봉을 통과하는 이 권역은 낙동과 태봉병참부의 일본군을 알면서도 동학농민군은 커다란 군세를 유지해서 읍성을 점거하였다. 이 권역은 새재를 통해 북상하는 길목에 있는 지역으로 당시 경상도의 동학농민군 활동지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곳이다.
셋째는 김산 지례 개령 선산 권역이다. 역시 선산 해평의 일본군 병참부가 있는 지역으로 인근 여러 군현의 동학농민군이 합세해서 선산 읍성을 점거할 때 참여하였다. 김산은 추풍령을 통해서 경상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직접 영동과 황간 세력이 연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전라도의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 계통이 경상도 북부지역으로 들어오는 길목 역할도 한 것으로 보인다.
넷째는 안의 거창 함양 권역이다. 전라도 무주 진안 장수와 연결되어 활동한 지역으로 남원의 김개남 세력이 이 일대까지 조직을 넓히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안의와 거창의 지방관이 민보군을 조직해서 외부 세력을 막아냈기 때문에 1894년 후반에 비교적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다섯째는 지리산 남부 일대인 진주 하동 단성 함양 권역이다. 경상도 동학 조직의 중요한 거점인 이 지역은 전라도 광양 일대에서 활동하던 김인배 세력이 영향을 미쳐 전라도와 다름 없는 활동을 펼치다가 일본군 육전대가 부산에서 들어와 위축된다.
동학농민군에게 일본군 병참부의 수비병은 쉽게 공격할 대상이 아니었다. 신식무기를 가진 일본군을 정면 공격한다면 희생이 클 것이었다. 처음에는 직접 부딪치지 않고 항쟁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다음에는 무장 봉기를 해서 일본군을 축출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동학 교단이 기포령을 내리기 전까지 경상도 북서부의 여러 군현에서 갖가지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첫째, 지방관에게 압박을 가해서 일본군병참부에 협조해주지 않도록 하였다. 8월 27일 태봉병참사령관 토키자와(時澤) 소좌가 가와카미 병참총감에게 직보한 함창현 사태에서 잘 드러난다. 3일 간 연이어 보고한 요지는 “27일 아침 동학당이 함창현에 들이닥쳐서 현감을 포박해갔기 때문에 약속한 인부를 주선하지 못했고, 일본군에게 노무를 제공하지 말라고 교사했으며, 병참노선의 안녕을 위해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학농민군에게 압박을 받은 함창현감은 사직하고 상주로 떠났다는 내용까지 있었다.
둘째, 일본군이 가설한 군용 전신선을 단절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전신주는 길을 따라 세웠거나 논과 밭을 가로질러 가기 때문에 순찰병을 피하면 파괴가 가능하였다. 그래서 여러 차례 전주를 뽑아내거나 전선을 절단해서 통신을 마비시켰다. 이 전신선 공격은 효과적이었다. 한창 청국과 전쟁을 벌이던 시기에 히로시마대본영의 명령 하달은 물론 평양과 의주, 그리고 요동반도에서 보내는 전투 보고를 차단시킬 수 있었다. 일본군은 즉시 복구해서 전신선을 연결시켰지만 이런 공세는 일본군의 전투력에 직접 영향을 미쳤던 유력한 방법이었다.
낙동병참부 사령관 아스카이 소좌는 부산에서 긴급 파견된 후지다(藤田) 대위가 이끄는 1개소대 병력을 용궁과 예천, 그리고 안동 부근을 정찰시켰다. 일본군이 순회하자 동학농민군은 일시 해산하였다.
한편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는 외무대신 김윤식에게 경상감영의 남영병 파견을 강요하였다. 일본군 군용전신선과 병참부를 위협하는 동학농민군을 남영병에게 제압하도록 한 것이다. 외무대신 김윤식은 경상감사 조병호에게 이를 전달해서 결국 남영병이 상주와 선산 일대에 파견되었다.
5. 맺는 말
청일전쟁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청국에 도발해서 벌어진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육군참모차장인 가와카미 소로구(川上操六) 중장이 기획하고 주도하였다. 조선 침공과 전쟁 도발 임무를 부여받은 동원사단은 히로시마에 주둔한 보병제5사단이었다. 1894년 6월 히로시마까지 개통한 산요철도(山陽鐵道)는 각지의 군대와 군수물자를 집결시킨 히로시마를 침략의 통로로 만들었고, 또한 전쟁지휘부인 대본영을 히로시마로 이끌어 들였다.
히로시마에서 출정한 육군이 처음 직행한 조선의 항구는 인천이었다. 혼성제9여단의 1차 파견군과 2차 파견군은 모두 인천항을 통해서 서울로 진공하였다. 하지만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해로 수송은 위험하였다. 북양함대는 군함 톤수나 크기 그리고 무장력에서 일본 함대보다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8월 1일 청일 양국이 선전포고를 한 후 해로보다 육로를 선택해야 하였다. 그런 까닭에 혼성제9여단에 이어서 노즈 미치츠라 사단장이 5사단 잔여부대와 함께 조선에 들어올 때는 부산에 상륙해서 육로로 북상하였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대규모 병력 이동을 할 때 먼저 병참선을 구축해야 했다. 병참선에 관한 자료는 이미 가와카미 참모차장이 정보장교를 파견해서 준비해놓았다. 가와카미는 1889년 육해군 통합 지휘부인 참모본부를 이끌면서 전략 전술뿐 아니라 각 병과와 근위사단을 물론 함대 참모부와 육군대학교 그리고 군용전신대를 통괄하였다. 청일전쟁 시기에 황족 타루히토(有栖川宮 熾仁) 친왕이 참모총장을 맡았으나 대본영 상석참모로 육해군을 지휘한 실세는 가와카미 중장이었다. 그리고 병참총감을 겸하여 병참과 통신분야를 직접 관장하였다.
일본제국은 조선에서 펼친 첫 대규모 원정을 정보전과 병참전이라는 두 방식으로 수행하였다. 정보전은 청국군과 벌인 각 전투에서 승리한 결정적인 수단이었다. 조선에 대한 군사공격의 성격을 가진 인천 상륙과 서울 진주, 그리고 경복궁 기습과 대원군 동원 등도 정보전의 결과였다. 육군 참모본부와 해군 군령부 소속 정보장교들은 장기계획에 따라 조선과 청국의 정국 상황은 물론 군사 기밀과 사회 동향에 걸친 정보를 축적해서 활용하였다.
청일전쟁 평가에서 가장 비판을 많이 받은 분야가 병참이었다. 하지만 육군 7개사단이 동원되고, 모두 174,000 명 규모의 국외 원정은 효과적인 병참전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하였다. 그 중요한 병참선의 하나가 부산에서 서울, 그리고 서울에서 평양을 거쳐 의주로 연결한 병참선이었다.
히로시마대본영에서 제5사단장 노즈 미치츠라 중장을 경부간 병참선을 통해서 서울로 북상시킨 것에는 일정한 의도가 있었다. 파견군 사단장이 현지 정보를 파악하는 기회를 주는 동시에 병참선과 전신선의 시급한 설치를 점검·독려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 계획은 성과를 보았다.
첫째는 경부간 도로 상황이 열악해서 포병 등 중장비 수송이 짧은 기간에 불가능한 것을 알게 된 노즈 사단장이 해로 운송을 명령한 것이다. 그 결과로 원산 상륙 부대가 늘어났으며, 후속부대 일부는 인천으로 목적지를 변경하였다. 둘째는 무더운 여름철 작전의 어려움 때문에 임기응변으로 병사들의 군장을 선편으로 인천에 수송하도록 한 것이다. 셋째는 경상감사 조병호에게 압력을 가해서 조선 관리들의 협조를 강요하고, 이를 실행시킨 것이다. 인부의 강제 동원이나 군량 조달에 필요한 조선돈의 대량 교환은 노즈 사단장이 관철시켰다.
병참선과 전신선은 부산 - 구포 – 물금 - 삼랑진 – 밀양 – 청도 – 대구 – 다부역 – 해평 – 낙동 – 태봉 – 문경 – 안보 – 충주 – 하담 – 가흥 – 장호원 – 이천 – 곤지암 - 조현 – 송파진으로 이어졌다. 각 병참부는 역이나 진과 같은 기관을 차지하거나 낙동강과 남한강의 연안 마을에 선정하거나 대구 충주 이천과 같이 읍내에 두는 형태로 설치하였다. 대병력 수용을 위해 천막 지급 또는 막사 신축이 시급했고, 거점 병참부에는 창고를 지어 사용했다.
선산 경내의 낙동병참부는 전주최씨 저택을 차지하여 병참부로 활용했다. 인근 낙동병참부와 같이 1개소대가 주둔할 정도의 거점은 아니었으나 전신선은 설치 직후 동학농민군의 공세를 받게 된다. 또 경상도 북서부의 해평병참부 낙동병참부 태봉병참부는 이에 공동으로 대응해야 했다. 동학농민군 재봉기 이전에 민보군과 대규모 결전을 벌였던 예천공방전이나 태봉병참부의 부관 다케노우치 대위의 사망사건, 일본군과 최초로 벌인 석문전투는 그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동학농민군은 각 군현의 관리들에게 일본군의 전쟁협력 요청을 거부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리고 직접 전투를 벌이지 않는 대항 방법인 전신선의 단절을 꾀하였다. 경상도를 횡단하는 병참선은 평양과 의주, 그리고 요동반도로 전투가 확대되는 상황에서 병참지원과 함께 통신망을 연결하는 기능을 하였다. 경상도 북서부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의 1차 목표는 일본군 병참부와 통신소였다. 청일전쟁 전 기간 동안 일본군을 배후에서 공격한 유일한 세력이 동학농민군이었다. 그에 대한 격렬한 반응이 가와카미 참모차장이 병참총감 직함으로 ‘동학당 공격을 엄렬(嚴烈)히 실행’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러한 학살령은 경상도 북서부에서 동학농민군이 공세를 시작한 초기에 나온 것이었다.
동학 교단 기포령 직후 동학농민군은 상주 읍성을 점거하였다. 인근 동학 조직이 대규모로 합세해서 이룬 성과였다. 그러나 우세한 무기를 가진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많은 희생자를 내고 읍성에서 철수하였다. 그 이후 경상도 북서부의 동학농민군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고, 병참선과 전신선은 청일전쟁 이후까지 중요한 침략의 길과 정보망으로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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