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금요사랑방 제9권

상주학. 금요사랑방. 尙州 愚川 豊山柳氏 간찰에 드러난

빛마당 2019. 6. 18. 21:18

尙州 愚川 豊山柳氏 간찰에 드러 난 19세기 후반의 현실세계

 

韓 碩 洙(文學博士, 忠北大 名譽敎授)

 

1. 상주 우천 풍산유씨 간찰 개요

 

尙州 愚川 豊山柳氏 간찰은 아직 전모를 알 수가 없다.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원본 중에서 일부인 800여 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만해도 그 간찰을 통해서 당대의 이모저모를 어느 정도 미루어 알기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여겨진다. 19세기 상주 우천 풍산유씨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柳尋春 1762-1834

柳厚祚 1798-1876

柳疇睦 1813-1872

柳道奭 1828-1908

柳萬植 1860-1926

 

본고에서 논의의 대상으로 한 것은 이 종통 인사를 중심으로 일가, 친지 사이에 오고 간 800여 통의 간찰이다. 이들 간찰에 드러난 당시의 현실적 문제를 몇 가지 사항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2. 간찰을 통해서 드러난 당시의 현실.

 

. 가정의 경제 사정

·살림을 꾸려서 지내는 도리가 어느 때나 그렇지 않겠습니까마는 녹봉(祿俸)이 있는 집에서 풍년에 양식을 꾸는 것이 실로 걱정입니다. (有祿之家 豊年之乞 實爲伏悶 然勢之所致 奈何奈何. 柳疇睦)

·過行時祀 則計不過來月有餘而已 歲前必落糧 開春以後 其將何以爲之耶. (柳疇睦)

·이곳의 양식이 이미 다 떨어졌으나 사방에서 구하여도 구할 수가 없다. 살려고 해도 돈이 없으니 굶어서 죽을 곳이 바로 이곳이로구나. 이는 모두 인심이 일변한 까닭이다. 이것이 어찌 인력으로 궁구할 것이겠는가. 한탄스럽고 걱정되나 어찌하겠느냐. 봄여름 옷은 달주가 작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모두 입고 없어서 아직도 솜옷을 입고 있으니 더욱 [그놈이] 매우 밉구나. 이 벗[이한유 종형제]이 세 꿰미의 돈을 도와주어서 이 때를 당하여 매우 고맙다. (此處糧已罄盡 而四求不得 其買有錢 飢死之處 乃此地也 此莫非人心之一變故也 此豈人力可究者耶 可歎可悶 奈何 春夏衣達周昨年夏秋間 盡着而無 尙着綿衣 尤可痛惡痛惡 此友以三緡銅助給 際此甚感. 柳道奭)

·사랑채는 만약 해가 지나도록 덮지 못하면 썩어서 버리게 될 것이 걱정입니다. 우선 이엉으로 대신 덮어서 비바람의 걱정을 면하게 하기를 바라고 바랍니다. 빈객의 번거로움은 한 혀로 다 말할 수가 없으며 비록 귀한 관원이라도 귀한 줄을 모릅니다. 그가 스스로 왔다가 스스로 가는대로 맡기고 지나치게 만류하지 말기를 바라고 바랍니다. 일과 힘이 이어 가기가 어려움은 그만두고라도 제일은 인력을 버틸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廊舍若過歲不覆 則朽棄可慮 爲先以草代覆 俾免風雨之患 伏望伏望 賓客之煩 不可以一舌盡言. 柳道奭)

·장례 뒤에 남은 부채는 호조의 상수전(喪需錢) 1500냥이 내려와서 미봉을 했으나 수 백냥 갚지 못한 돈이 남아 있습니다. (襄後餘債 以戶曹喪需錢千五百兩下來爲彌縫 而零餘亦有數百重未報耳. 柳道奭)

 

. 本宅寓居

·슬하 본집과 우거의 여러 가족이 모두 건강하다. (膝下本寓諸節 俱爲免恙)

·본집과 우거하는 집 세 곳은 모두 한결같이 전과 같으니 매우 다행합니다. (本寓三處諸眷 皆一樣依遣甚幸.)

·저는 전과 같이 지내며 본집과 두 우거의 대소제절이 모두 평안하니 다행으로 여깁니다. (子一如前狀 而本所及兩寓大小都安 私幸) (柳疇睦)

·茅山洛鄕僉節 竝依平安. (權世淵) 愚川·茅山·洛鄕

 

. 疾病

·저는 부모님의 병환이 자주 더쳐서 마음 졸이는 것을 이루 다 말씀드릴 수가 없고 저도 추위 때문에 감기가 걸려 여러 날 고생하고 있어 딱하나 어쩌겠습니까? (生 親癠種種添症 焦熬難狀 身亦有觸寒之祟 感苦彌日 悶憐奈何. 柳尋春)

·다만 전하여 듣기로 그쪽에 돌림병이 크게 기세를 부려 전염이 서로 이어진다니 비록 제가 거처하시는 곳을 가보지는 못하나 조심되고 걱정됨이 지극합니다. (但轉聞那邊時氣大肆 染痛相繼 雖杖屨不至搬寓 於戒慮極矣. 柳尋春)

·너의 공부는 과연 전처럼 함부로 그만 두지는 않았느냐? 이른바 체한 것이 다시 재발하여 공부에 크게 지장이 있다고 하니 너에게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기 때문에 문의(文醫)에게 다시 나가서 화제(和劑, 藥和劑) 두 제를 지어 보냈다. 소제 20첩과 대제 40첩이다. 도착하는 즉시 숯을 사서 다려 먹되 전처럼 버리지를 말아라. 복용 후에 동정을 보아서 만약 드러난 효과가 있으면 내년 봄에 마땅히 다시 지어서 뿌리를 뽑을 작정이다. 소홀하게 하지 말아라. (汝之做讀 果無如前浪廢耶 所謂滯祟 又爲闖作 而大有妨於工課云 汝之此非不啻細慮故 文宜許更出和劑兩劑製送 而小劑卄帖大劑四十帖矣 到卽貿炭煎服 無爲如前棄之也 服後觀動靜 如有顯効 明春當更劑拔源計 勿爲小忽也. 柳疇睦)

·아버님의 기력은 늘 매우 건강하시어 내 마음에 기쁘기 한량이 없다. 그러나 나는 지난 달 학질을 앓고 난 뒤에 감기가 더하여져서 기침으로 헐떡거리며 밤낮으로 누워 있으니 내가 어떻게 하여 이렇게 심하게 쇠약해 졌는가! (父主氣力一向萬康 下情不任伏喜 以吾於去月重經瘧症後 因添寒感之疾 咳嗽喘喘 晝宵伏枕 吾衰之甚 何其至此也 柳疇睦)

 

. 科擧

<당색과 지방의 차별>

·과거에 대한 소문이 말씀과 같다면 서울 사람들이 또 장차 [급제를] 하게 될 것입니다. 최봉구로부터 강문형, 조제빈, 한기동, 조종익 이래의 이른바 영남인은 모두 거론을 하지 않고 이번에 또 이와 같다고 하니 영남이 진정 서북(西北)이 된 것입니다. 어찌하겠습니까? 어찌하겠습니까? 되는대로 맡길 뿐입니다. (科聞若如之 京人又張爲之矣 自崔鳳九姜文馨趙濟彩韓耆東趙鍾益 以來所謂嶺人 都不擧論 今番又復如此云 嶺南其眞爲西北矣 奈何奈何 任之而已. 柳疇睦)

·공당(公堂: 官衙)의 성시(省試: 文科試驗)는 시관을 바꾸어 임명하였으니 누대(樓臺)의 다리를 바꾼 것과 같습니다. 조씨 이름으로 한 번 바꾼 뒤에 또 2차로 바뀌어 조씨가 이심재가 되었더니 어제 또 윤성진이 낙점(落點)되었는데 바깥의 여론은 이면광이 필경 맡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또한 옛날에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시관의 생각은 영외(嶺外)의 세도가가 영백(嶺伯: 경상감사)의 폐를 다 잘 아는 까닭으로 이처럼 번복하여 거자(擧子: 응시자)가 감히 착수를 못하게 하는 것이라 합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경상도 사람을 사류에 두지 않으려는 것임을 알만한데 이는 모두 제 뺨치기이니 다시 무엇을 탓하며 원망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른바 거자가 좌우로 다투어 달려서 안 가는 데가 없어 점차 혼잡의 습속을 이루는 것은 진실로 탄식되고 서글픈 일입니다. (公堂省試則試官改差已 可爲如臺脚之許遞 而趙名一遞改後 又二次遞改 趙代李心宰爲之 昨又尹成鎭落点 而外論則李冕光畢竟當之云云 此亦古所未聞未見者也 試官之意慮 畏嶺外世道 良備悉嶺伯之弊故 如此飜覆 使擧子 不敢着手 推此以往 可知其嶺人之不置士類 是皆自擊其頰 復何怨尤. 柳道鉉)

·四十年擧業從事 只足一空拳而已 雖恨奈何. (柳祈睦)

 

. 政治

·安東城主 赴任二日 又見遞改 莫非邑運之未泰 而凶荒餘民情 亦將不知至於何境矣 其新延果以何間南下云耶. 辛丑 (1841 헌종 7) 七月 十四日 族姪 柳章睦

·신민이 복이 없어 세자께서 돌아가시어 달려와 슬피 통곡함은 조야가 같으리니 하물며 좋은 일 궂은일을 같이하면서 총애를 특별하게 받은 자이겠습니까? 슬피 통곡하고 숨이 끊어지는 듯한 슬픔이 그지없습니다. (臣民無祿 鶴馭賓天 奔走悲號 朝野惟均 況休戚之所同 寵眷之特蒙者耶. 柳尋春)

·서쪽에서 사적이며 역변이며 사주며 행전의 소문을 들었습니까? 큰 옥사(獄事)와 엄살하는 날을 이루 다 적을 겨를이 없으니 이것이 무슨 운수입니까? 밀고하는 것이 날로 성하니 마침내 벗어날 곳을 모를 뿐입니다. 지붕을 우두커니 쳐다본들 어쩌겠습니까? (西聞邪賊也 逆變也 私鑄也 行錢也 大獄與掩殺日 不暇記云 此何運氣耶 告密日盛 畢竟不知稅駕之所耳 仰屋奈何. 柳疇睦)

·양추에게 일전에 통진 문수산성에서 대포를 쏘았는데 오륙십 명이 죽었다고 하나 그 사실은 정확하게 몇 명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우선 통쾌합니다. (洋醜日前 以通津文殊山城放丸 斃五六十名云 而其實的未知幾名 然爲先快豁耳. 柳道奭)

 

. 午人(南人)

·죄인을 어제 비로소 탕척 반포했는데 남인은 효상 이은봉과 오판서, 한효순, 홍익구씨, 황침씨 여설이며, 서인은 죄의 경중을 논하지 않고 모두 죄를 지우고 복관을 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충신과 역신이 뒤섞이고 옥석이 함께 타는 효과에 이르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罪人昨始蕩滌頒布 而午人則曉相李隱峰 吳判書 韓孝純 洪翼龜氏 黃忱氏與雪 而西人則毋論罪之輕重 盡爲爻周復官 自今以後則忠逆混淆 至有玉石俱焚之效 更何言哉. 柳道鉉)

*興宣大院君(大院位) 갑자(1864) 고종즉위와 대원군의 인재등용 정책.

柳厚祚에게 보낸 대원군의 서신.

*고종 12년 을해(1875)李中振疏首로 한 상주를 중심으로 영남유생들이 대원군 복권을 탄원한 만인소. 우천 풍산유씨가 주도.

·이곳의 소유[疏儒: 상소에 동참한 유생] 중에는 도운·도헌과 하촌의 기영이 길을 떠날 계획이며 이미 안보에 도착했습니다...[중동면] 안에서는 미동과 기곡에서 각 한 명씩 올려 보내고 김노[김씨 老儒]도 갑니다. 풍산에서는 시종 문을 닫고 또 괴이한 말로 그것을 막는다고 하나 통탄스럽습니다. (鄙中疏儒 道運道獻及下村蓍榮發去計 已到安保矣 ...面中則美洞枝谷各一員式上送 金老亦去 豊山終始閉門又從以怪說阻止之 可痛可痛 甲戌(1864)十二月 初八日 族從孫 道性上書)

·疏事疏儒入城後 自直洞抵書疏廳 期於挽止 而疏廳則以崔賊事及科弊事 期於上訴之意....此機甚密 下覽後卽丙 勿使人知伏望耳. (不明)

*嶺南萬人疏: 상주·안동 유생이 중심이 된 집단상소. 1881(고종 18) 325(음력 226)에 경상도 예안(禮安)의 유생인 이만손(李晩孫)疏首로 강진규(姜晉奎)황재현(黃載顯) 1만여 명의 영남 지방의 유생들이 연명을 해서 올린 집단상소이다.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척사만인소(斥邪萬人疏)'라고 부르기도 한다.

 

. 陶南書院

·상주유생의 명첩은 지난번에 도남서원에 두려고 했는데 서원이 비어서 만들어 보내지를 못했습니다. (尙州儒生名帖 頃値道院 空曠未及修送矣. 柳尋春)

·도남서원이 빈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사단(事端)이 진정되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내가 병산서원의 동주(洞主)를 데리고 가게 하였기에 서찰로 고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대개 도남서원의 일이 지극히 딱한 때문입니다. (道南空院已久 而事端未已聞定 吾令方帶屛院洞主故 有所書告 盖道院事極可悶故耳. 柳尋春)

·額院撤享事 在京時得見 傳敎爲道院 只切悚惶矣 自河上昨見禮曺文字 則從祀配食 忠節以外先輩 雖其院賜額處 皆入其慟泣之外 夫復何言. (辛未 1871 鄭敦默)

 

. 親族關係

·柳相祚(1763-1838): 柳成龍의 직계 8세손. 알성문과급제. 병조판서,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 柳尋春(1762-1834)과 잦은 서신왕래.

·省式 孤露餘生 又遭傾剝之禍 季父主奄忽棄背 催痛酸苦 去益無涯....族從服人 俯仰穹壤 遽失替事之地 追慕疇昔 夙宵哀隕 自憐奈何. (柳祈睦)

·그러나 그 사이 중부의 종상[大祥]을 지내어 애통함을 비할 데 없었고 호천망극의 슬픔을 미칠 수가 없으나 어찌하겠습니까? (間經仲父終喪 寓慟無所廓矣 穹壤痛霣 無及奈何. 柳疇睦)

·저는 전과 같이 지내며 계부님께서 기력이 평안하시니 기쁘나, (子如昨狀 而季父主氣力平安伏喜. 柳疇睦)

 

. 請託

·이번에 가는 친구 김익흠은 바로 광록공의 사손[奉祀孫]이며 감천 사계에 살고 있습니다. 산송(山訟)으로 지금 감리(勘理: 적발하여 죄를 다스림)의 지경에 있으나 그 근본적인 사건은 지극히 원통합니다. 이 벗이 반드시 자세히 말씀드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경조부에 원통함을 호소하러 가는 일 때문에 이번에 상경하는데 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此去金友翊欽卽廣麓公之祀孫 而寓居甘泉泗溪 以山訟方在勘理之境 其本事至寃矣 伏想此友必詳達 而以鳴寃於京兆府事 爲此上去 下諒伏望. 柳疇睦)

·그런데 고령에 사는 벗 김익성은 저에게는 이전에 서로 친하던 사람입니다. 그의 친산(親山)이 치하(治下) 명덕동 뒤 산기슭에 있는데 그가 사는 곳과 거리가 매우 멀어서 수호하기에는 실로 걱정이 많은 곳입니다. 이번 달 초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수 십 보 매우 가까운 곳에 몰래 장사(葬事)를 하여 실로 마음이 편치를 않아 즉시 소지(訴紙)를 올려 파가게 하고 싶어 합니다. 숙부님과는 본래 일면식의 교분이 없기에 저에게 간절히 청원하기를 요구하였사오니 다행히 한번 만나주시어 일에 따라 곡진히 보살피시고 풍약(風約)과 이임(里任) 등에게 엄하게 분부하여 반드시 범인을 찾은 뒤 즉시 파가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第高靈居金友益誠 則侄之前日相親之人也 其親山入于治下明德洞後麓 而相去甚遠 其於守護之節 實多深慮處矣 今月初間 不知何人 潛葬於數十步逼迫之地 其在事勢 實所難安 而卽欲呈訴窟去矣 叔主本無一面之分 玆以要我請懇 幸望一賜面許 隨事曲護 嚴分付於風約里任等處 期於覓得後 卽爲窟去 如何如何. 柳孝睦)

 

. 屛虎論爭

병산서원(屛山書院) 유생과 호계서원(虎溪書院) 유생 간의 논쟁. 병산서원(1613-광해군 5- 경북 안동에 건립됨)은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을 향사(享祀)하였고 호계서원은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을 향사했는데, 두 분의 도덕과 학문에 대하여 우열을 다투는 논쟁. 대원군이 이 시비를 중재하려고 특단의 노력을 했으나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다만 1868년에 병산서원은 사액이 되었고 호계서원은 훼철이 되었다.

·西人武邊虎論尤甚中 所謂同室同鄕 不但小無異焉 抑又甚焉奈何. (柳疇睦)

 

. 기타

·吾今五十五歲人 前頭若得十五年 則爲七十上壽人 此其可易得耶 設使得之十五年能幾何哉 旣爲五十五歲 生員書房之人 以此過 前頭何難之有哉 吾則以此自處而已 吾心誠浩然無戚戚之意耳. (柳疇睦)

·居然之境 窆禮隔日 天水之端 快至消釋耶. (柳進璜 外)

·第小成非不幸矣 而餘債尙未了勘 這間自有難安折迫之端 非止一再 如此而有何悰況於其間耶. (柳宇睦)

·且兄嫂氏 大添泄痢 七十老人 屢月委頓 眞元奄奄無餘 而所謂救護之節粥飮難繼 其爲罔措 當復如何 百爾之餘 不憚煩瀆 仰首鳴號 伏乞特垂矜念 優數下惠 千萬千萬 脯肉爲痢症良劑 而無可得之路 亦爲下念伏望. (族從侄 柳衡祚)

·愚鄭酉李 或無可合耶 遠則妙朴良李 惟在量宜之如何耳.

[愚山 鄭, 달래(酉川) . 妙洞 朴, 良洞 李]

·慈仁縣監 柳道奭 物膳 謝狀: 趙寧夏, 閔升鎬 .

 

3. 맺는말

 

공문서와는 달리 개인 사이에 오고 가는 간찰에는 거르고 꾸미는 것이 없어 당사자의 생각이나 형편이 거의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그리하여 사대부의 가찰을 통해서 우리는 당대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천의 풍산유씨 간찰에는 당사자들의 생각이나 형편이 잘 드러나 있을 뿐 아니라 당대의 현실도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명문가의 후예로 청빈(淸貧)을 실천하며 가문을 유지해 나가는 고초가 드러나 있고 과거를 통해 가문의 명망을 유지해 나가려는 부단한 노력도 행간을 통해 알 수가 있다.

그밖에 친족과의 관계며 질병, 벼슬살이의 어려움 등도 간찰에 나타나 있는바 아직도 읽지 못한 많은 자료가 모두 읽혀져서 연구가 진행된다면 이를 통하여 조선 후기의 반촌사회의 사회 경제적 여러 관계망을 확인할 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