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상주)지역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의 현황과 과제 |
문병학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Ⅰ. 들어가는 말
19세기 중엽 제1, 2차 아편전쟁으로 서구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청나라가 무너지자 동아시아 국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속에서 1853년 미국의 군함에 의해 개항한 일본은 안으로 척양(斥洋)의 움직임이 강력하게 부상했으나 이를 적절히 제어하면서 지배층은 메이지유신(1868)을 단행, 서양에 대규모 사절단 파견 등으로 발빠르게 대처했다. 이 무렵 조선은 1860년 경북 경주에서 수운 최제우에 의해 평등사상이 골자인 동학이 창도되어 기층 민중들의 호응을 얻었고, 1863년 고종을 왕좌에 올린 대원군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을 거치면서 비등해진 척왜양의 여론을 등에 업고 강력한 쇄국정책을 폈다. 그러다가 1870년대 초 대원군이 권력에서 밀려나면서 새롭게 등장한 집권층을 중심으로 개화파가 급격하게 부상하였다.
이처럼 조선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 침략과 조선왕조체제가 안고 있던 구조적 모순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대책마련이 절실했던 때 동학사상, 위정척사사상, 개화사상 등으로 대응하였으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서로 연대하지 못하고 도리어 적대적인 관계로 치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1876년 일본에 의해 강제된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제의 경제적 침탈 강화로 반일정서가 비등해졌고, 1892년 임진왜란 300주기를 맞았다. 그 연장선상에서 임진년(1892) 8월 전라도 무장에서 ‘미륵석불비기 탈취사건’이 일어났고, 그해 10월과 11월 충청도 공주와 전라도 삼례에서 각각 동학교단의 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났다. 나아가 1893년 2월 광화문 복합상소에 이어 충청도 보은과 전라도 금구·원평에서 군중집회가 이어지면서 대규모 농민혁명 발발을 예고했고, 마침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였다.
Ⅱ. 동학농민혁명 역사인식의 변화
중세문명과 근대문명, 서양문명과 동양문명이 충돌하던 때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마감된 후 20세기 내내 그 역사적 의미가 반추되면서 끊임없이 기념사업이 추진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의 정치적인 입장이나 견해에 따라 <반란>과 <혁명>이라는 극단적인 역사인식이 공존하였다. 이런 현상은 조선의 내재적 발전을 부인한 일본인 사학자들이 낡은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외세(일제)의 침략에 맞선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의도적으로 거세(去勢)한 채 청나라의 사주(使嗾) 또는 왕권을 둘러싼 권력투쟁으로 폄하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로써 동학농민혁명은 반란사건으로, 전라도사건으로 극심하게 왜곡·축소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굴절된 역사인식은 해방 후 세계사적 차원에서 전개된 동서냉전체제 구축시기에 빚어진 민족내부의 극심한 좌우대립, 민족분단,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바로잡히지 못하고 도리어 고착화되었다.
그 결과 이 사건에 대한 기념사업도 시대에 따라 극심한 부침(浮沈)을 겪었다. 이 사건이 끝난 직후에는 유림(儒林)과 지방유지(地方有志) 등에 의해 반농민군 측의 기념사업이 추진되었고, 해방 이후 정치적 혼란기에는 기념사업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민주의식이 고양되면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196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역사학계에서도 식민사학 극복의 필요성에 따라 이 사건을 재조명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루어진 기념사업은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고착화된 반란사건, 전라도사건이라는 역사인식과 동학(천도교)이라는 종교적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전라도와 천도교 관련 기념사업에 머무르는 한계를 갖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전국 각 지역에서 기념사업단체 창립(별첨 : 전국 기념사업 단체현황)이 이루어지면서 역사인식의 전환을 기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경남 진주, 충북 보은, 충남 공주·태안·예산, 전북 전주·정읍, 전남 광주·장흥 등지에서 기념사업단체가 창립되어 1993년 12월 13일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를 결성하였다. 단체협의회는 1994년 고부봉기 역사맞이굿(2월),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대회(4월),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5월), 동학농민군 영령 추모제(10월) 등을 개최하여 왜곡·축소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대중적으로 복권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2004년 3월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에서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되었다.
Ⅲ. 경북(상주)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양상
1. 상주지역 동학농민혁명의 흐름
경북지역에서 동학농민군 세력이 크게 확장된 것은 1894년 봄부터였다. 이런 현상은 전라도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여 승리를 거듭한 것에 영향을 받았다. 전라도, 충청도와 인접한 경상도 서북부지역은 인근 지역의 동학농민군 활동소식을 수시로 접할 수 있어서 농민들의 변혁을 향한 열망이 높았다. 그래서 이곳 경상도 북서지역은 1894년 6~7월경에는 매일 1,000여 명이 동학에 입도할 정도였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렇게 성장한 동학의 조직은 새로 편제된 접 단위로 자체적인 무장력을 갖추고 봉기에 나섰으나 경북지역에는 유림세력 등이 상대적으로 강력하여 전라도 지역에서처럼 관아를 직접 점령하는 방식보다는 읍에서 떨어진 외곽지역에 근거지를 두고서 반봉건 활동을 전개하거나 수취제도 모순과 지방관․이서배의 부당한 수탈에 저항하는 활동을 전개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읍을 장악하지 못한 채 전개된 경북지역 동학농민군의 위와 같은 활동은 보수집강소 출현으로 한계에 직면하였다. 이로써 경북지역에서는 동학농민군과 보수집강소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빈번하였다. 실제로 예천에서는 8월 초순 동학농민군 11명이 보수집강소 구성원들에게 체포되어 생매장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성주(星州)에서는 동학농민군 18명이 수성군 공격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경상도 북서부지역 동학농민군은 연합부대를 형성하여 9월 4일경 성주읍을 공격하였으며, 9월 18일 동학교단의 총동원령이 내려진 후 이 지역에서 동학농민군과 관군·민보군 사이 전투가 격렬하게 벌어져 많은 희생자를 냈다. 보수적 향촌질서가 강했던 경상도 북서부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주체는 경상감영에서 파견된 관군보다는 양반지주층과 이서배(吏胥輩) 중심의 민보군과 정부에서 임명한 소모사(召募使)가 모집한 소모영군이었다.
한편, 경상북부지역 동학농민군 활동 중 특기할 사항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일본군과의 직접적인 충돌이 잦았다는 점이다. 1894년 초여름 전라도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성을 함락하자 조선정부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고, 일본도 조선에 파병(派兵)하였다. 일본군은 1890년 봄 대규모 전쟁연습까지 마친 상태로 대륙침략을 위해 조선을 침략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정부가 청나라에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한 파병을 요청하자 일본도 곧바로 파병하였다.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은 청일전쟁 도발을 위해 부산에 본진을 두고 낙동강병참부를 설치하여 상주, 구미, 문경, 충주 등을 거쳐 서울에 이르는 구간에 병참시설을 구축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북(상주)지역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의 충돌은 불가피하였다. 이런 사정으로 경북(상주)지역 동학농민군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일찍부터 일본군과 직접적인 충돌이 빚어졌고, 일본 병참수비대와 관군이 연합한 부대의 공격으로 다른 지역의 동학농민군보다 먼저 진압되었다.
2. 상주지역 동학농민혁명 주요 사건
ㅇ 1994년 9월 24일(음 8.25.) 일본군이 상주 인근에 설치한 태봉병참부 부관 대위 다케우치(竹內) 외 병정 2명이 동학농민군의 동향을 정탐하다가 용궁(혹은 산양) 부근에서 동학농민군에게 발각되어 대위 다케우치가 살해되고, 병사 한 명은 손가락이 잘리고 총을 빼앗기고 도주하였다.
ㅇ 1994년 9월 28일(음 8.29.) 일본군 대위가 살해되는 등의 상황전개에 따라 부산의 일본 중로병참감 대좌 요시가와(吉川)가 부산수비대 2개 소대를 증파하고, 충주병참부, 문경병참부, 태봉병참부 등에 지원을 명하여 일본군 25명과 일본인부 12명이 상주를 거쳐 문경으로 이동 중 문경 석문(石門)에서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이 전투가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의 첫 전투이다.
ㅇ 1994년 10월 20일(음 9.22.) 상주지역 동학농민군이 상주관아를 점령하였다. 당시 상주성에는 100여명의 관포군이 있었으나 1만여 명에 이르는 동학농민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한편, 성주관아를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선산·김천의 동학농민군과 연대하여 예천을 거쳐 안동을 공격하려 하였다.
ㅇ 1994년 10월 26일(음 9.28.) 오전 후지타가 이끄는 일본군과 정의묵(상주 소모영 종사관), 김석중(유격장) 연합부대에 의해 상주성전투에서 패배하여 퇴각하였다. 이때 붙잡힌 많은 동학농민군이 태평루에서 처형되었다.
3. 상주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 현황
<표1-1> 전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및 기념시설 현황표
합계 | 서울·경기 | 강원 | 울산·경남 | 대구·경북 | 광주·전남 | 전북 | 충남 | 충북 |
354 | 4 | 13 | 4 | 30 | 83 | 156 | 40 | 23 |
백분율 | 1.1% | 3.7% | 1.1% | 8.8% | 23.4% | 44% | 11.3% | 6.5% |
<표1-2> 전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 현황
서울·경기 | 강원 | 울산·경남 | 대구·경북 | 광주·전남 | 전북 | 충남 | 충북 | ||||||||
시군 | 개소 | 시군 | 개소 | 시군 | 개소 | 시군 | 개소 | 시군 | 개소 | 시군 | 개소 | 시군 | 개소 | 시군 | 개소 |
서울 | 1 | 강릉 | 3 | 고성 | 1 | 대구 | 3 | 광주 | 3 | 고창 | 21 | 공주 | 11 | 괴산 | 1 |
안성 | 2 | 고성 | 1 | 울산 | 1 | 경주 | 2 | 강진 | 4 | 김제 | 18 | 금산 | 2 | 단양 | 1 |
용인 | 1 | 영월 | 1 | 진주 | 1 | 구미 | 3 | 고흥 | 2 | 남원 | 11 | 논산 | 2 | 보은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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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 | 1 | 하동 | 1 | 김천 | 1 | 곡성 | 2 | 무주 | 2 | 당진 | 1 | 영동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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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제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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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 | 2 | 광양 | 3 | 부안 | 6 | 부여 | 1 | 옥천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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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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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 | 10 | 구례 | 2 | 순창 | 3 | 서산 | 3 | 음성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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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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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 | 1 | 나주 | 7 | 완주 | 7 | 서천 | 3 | 진천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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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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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 | 1 | 담양 | 4 | 익산 | 2 | 아산 | 1 | 청원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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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덕 | 1 | 목포 | 1 | 임실 | 5 | 예산 | 7 | 청주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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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 | 6 | 무안 | 8 | 장수 | 2 | 천안 | 1 | 충주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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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성 | 2 | 전주 | 16 | 태안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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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 | 3 | 정읍 | 61 | 홍성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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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 7 | 진안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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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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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암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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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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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흥 |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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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도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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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평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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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남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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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순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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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 4 |
| 13 |
| 4 |
| 30 |
| 83 |
| 156 |
| 40 |
| 23 |
<표1-3> 상주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 현황
순번 | 유적 및 기념시설물명 | 역사적 의의 | 소 재 지 | 비 고 | |||
1 | 상주 관아(尙山館, 太平樓) 터 | 동학농민군 점령지 | 상주시 남성동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7호(상산관) | |||
2 | 상주 화남 광주원 터 | 동학농민군 처형지 | 상주시 화남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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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상주 낙동 일본군 병참소 터 | 일본군 병참소(兵站所) | 상주시 낙동면 | 낙동파출소 | |||
4 | 상주 남사정 터 | 동학농민군 처형지 | 상주지 남성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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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상주 동학농민혁명기념비 | 기념시설물 | 상주시 무양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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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상주 모동 중모장터 | 동학농민군 처형지 | 상주시 모동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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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상주 모서 김현영 집 터 | 농민군 근거지 | 상주시 모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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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상주 화남 임곡리 | 동학농민군 근거지 | 상주시 화남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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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상주 화서 화령장터 | 동학농민군 처형지 | 상주시 화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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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상주 동학교당 | 1920년대 종교단체 | 상주시 은척면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1호 |
Ⅳ. 경북(상주)지역 기념사업 추진 현황과 과제
1. 기념사업 추진 현황
경북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을 처음 시작한 단체는 상주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이다. 1993년 12월 18일 준비모임을 시작으로 발기인대회를 거쳐 1994년 4월 2일 창립되었다. 이 단체는 1994년 6월 13일 상주문화회관 대공연장에서 동학농민혁명 주제 연극을 제작하여 공연하였고, 7월 7일 상주문화회관 전시실에서 그림 전시회를 열었다. 또한, 10월 22~23일 양일간 ‘가자! 장주읍성으로, 자주 평화의 세상을 향하여’라는 주제 아래 상주지역 동학농민군 합동위령제 및 유적지 답사를 펼쳤고, 상주 천변에 <상주 동학농민군 기념상>을 제작·설치하기도 했다. 한편, 2010년도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문화체육관광부 특수법인) 주최로 상주시에서 제116주년 동학농민혁명기념대회(10. 29.)가 펼쳐지기도 했다.
인근 지역인 예천군에서는 1996년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창립되어 ‘동학농민군지도자전기항의사기념비’를 건립하였고, 1999년에는 보수집강소에 의해 생매장당한 동학농민군 위령비를 건립하였다.
2. 기념사업 추진방향과 과제
1) 경북지역 특수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기념사업이 모색되어야 한다.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전후하여 전국 각지에서 기념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될 때 경북지역에서도 상주기념사업회가 중심이 되어 백주년 기념사업이 추진하였다. 그러나 경북지역에서 추진된 기념사업은 같은 시기에 서울, 경기 그리고 충청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펼쳐진 기념사업에 비해 다소 미약했다. 타 지역에 비해 경북지역의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이 다소 미약할 수밖에 없었던 주된 요인은 한국근현대사의 극심한 굴절과 부침으로 이 사건이 전봉준 중심의 전라도 사건 혹은 불온한 반란사건으로 왜곡·축소되어온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동학(東學)이 창도된 지역은 경북지역이지만 동학농민혁명이 이곳에서 분출되지 않고 전라도에서 분출되어 전국으로 번져나갔던 1894년 무렵의 상황과 흡사하게 다른 지역에 비해 경북지역에서 펼쳐진 100주년 기념사업이 다소 미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는 일정한 사회적·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 사회역사적 배경으로 19세기 당시 경북지역은 조선왕조체제의 핵심이었던 본향으로 두터운 보수양반층과 유림세력이 강력하여 보수적 향토지배질서가 강력하게 구축되어 있었다는 점과 20세기 한국현대사에서 권력의 핵심부를 차지한 이른바 TK지역(대구·경북)으로 굳건한 정치적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경북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을 성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적으로 형성된 경북지역의 정치·사회적 특수성을 잘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앞서 살펴본 경북지역의 특수성을 섬세하게 파악하고 이를 면밀하게 분석한 것을 바탕으로 지역주민의 거부감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기념사업 내용과 형식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따라 전라도의 역사, 전봉준 중심의 역사로 잘못 인식되어온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인식 전환을 기할 수 있는 시민강좌 및 유적지 답사 등 대중적인 프로그램 개발 및 운영을 선행할 필요성이 있다. 이런 필요성은 2004년 제정된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 “제1조(목적) 이 법은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國權)을 수호하기 위하여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계승·발전시켜 민족정기를 북돋우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그 유족의 명예를 회복함을 목적으로 한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동학농민혁명사에 대한 역사인식 전환을 바탕으로 경북(상주)지역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기치인 반봉건, 반침략 중 반외세(반일)에 방점을 둔, 일제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일어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역사적 의미와 위상에 부합한 기념사업을 개발하여 추진할 필요성이 있다. 지난 시기 전라도 중심으로 이루어진 기념사업은 낡은 봉건제도를 개혁하여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근대 평등세상을 추구한 반봉건항쟁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반외세(반일) 민족항쟁에 대한 기념사업은 미흡하였다.
따라서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최초로 충돌한 곳이자 일본군 대위가 살해되었던 경북 상주지역에서는 반일민족항쟁의 의미를 살려 [동학농민혁명 반일민족항쟁기념관] 혹은 [동학농민혁명 반일민족항쟁 역사공원] 등을 조성할 필요성이 있다. 나아가 일본군 병참소 등 상주지역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지를 정비하여 연계시킴으로써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애국애족정신을 선양하는 교육의 장으로, 문화관광산업과의 연계하여 상지주역 역사문화관광 자원으로 활용방안을 적극 모색할 필요성이 있다.
2) 경북지역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 건립·설치에 적극 나서야 한다.
앞의 살펴본 것처럼 현재까지 파악·확인된 상주지역 유적지는 모두 10개소이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지를 정비하는 사업은 매우 중요하다. 역사현장 보존 및 정비를 통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애국애족정신을 선양하는 기틀로 활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외연을 확장하여 상주시 역사문화 자산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경북(상주)지역의 중요한 역사 문화적 자산의 핵심은 ‘양반문화’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에 더하여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지 정비를 통해 만민평등을 지향한 동학농민군의 근대적인 지향을 역사 문화적 자산으로 부가시키는 것도 긍정적이라고 본다. 경북지역이 지닌 양반문화라는 위상을 한쪽 날개라고 하고, 근대민주주의 지향을 다른 한쪽의 날개로 한다면 경북(상주)지역의 역사적 전통과 문화적 전통은 더욱 풍부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Ⅴ. 맺음말
앞서 살펴본 것처럼 동학농민혁명 전국적인 반봉건 농민항쟁이자 일제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일어선 전 민족적인 반일항쟁이다. 이는 곧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근대민주주의 뿌리이자 반일민족항쟁으로서 애국애족정신의 표상”으로서의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그 역사적 의미가 거세된 채 반란사건으로, 전라도사건으로 왜곡·축소된 채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져왔다. 다행스럽게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점으로 전국 각 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이 대중적으로 전개되었고, 그 결실로 1894년으로부터 110년만인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되어 ‘반란사건’의 멍에를 벗고 명실상부하게 그 명예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특별법 제정으로부터 15년만인 지난 2월 26일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군을 맞아 최초로 대승을 거둔 황토현전승일 5월 11일이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어 올해부터 정부 주관 기념식이 개최될 예정이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을 기점으로 하여 일제강점기 때 전라도사건으로 축소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위상을 복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국 각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관련 유적지 정비 등을 통해 갑오선열들의 애국애족정신을 범국민적으로 선양하는 사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
별첨 / 전국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단체현황 |
연번 | 단 체 명 | 대 표 | 주 소 | 비 고 |
1 | (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 | 이기곤 | 서울시 종로구 삼일대로 457 수운회관 | 전국 |
2 | (사)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 이이화 | 서울시 서초구 전원말 안길 7 | 서울 |
3 |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 이종민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팔달로 163 | 전북 (8) |
4 | (사)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 김영진 | 전북 정읍시 벚꽃로 171 | |
5 | (사)갑오농민동학혁명유적보존회 | 박종신 | 전북 정읍시 이평면 황토현로 298 | |
6 | (사)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 진윤식 | 전북 고창군 고창읍 중앙로 245 | |
7 | (사)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 최규섭 |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로 84 | |
8 |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 정수영 | 전북 남원시 용성로 232 중우빌딩 1층 | |
9 | 완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 김정호 | 전북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1가 1407-3 | |
10 | 동학농민혁명백산봉기기념사업회 | 김원철 | 전북 부안군 부안읍 매창로 89 | |
11 | (사)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 위의환 | 전남 장흥군 장평면 봉림1길 18 | 광주 전남 (5) |
12 | 광주전남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 이상식 | 광주시 서구 금화로 485, 309호 | |
13 | 함평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 김광철 | 전남 함평군 함평읍 광남길 25 | |
14 | 장성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 조복래 | 전남 장성군 장성읍 단풍로 220 | |
15 |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 박석면 | 전남 무안군 현경면 운해로 1570 | |
16 | (사)동학농민전쟁우금티기념사업회 | 박남식 | 충남 공주시 대추골1길 41-12 | 충남 (7) |
17 | (사)전봉준장군기념사업회 | 전해철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대흥로 110 2층 | |
18 | (사)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 이동복 | 충남 금산군 금산읍 비호산로 5 | |
19 | (사)아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 정해곤 | 충남 아산시 번영로 115번길 21-8 | |
20 |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 박성묵 | 충남 예산군 예산읍 산성길23번길 5 | |
21 |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 최기중 | 충남 태안군 태안읍 남문리 318-2 | |
22 | (사)당진동학농민혁명승전목기념사업회 | 김시봉 | 충남 당진시 송산로 96 | |
23 | 충북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 김양식 | 충북 청주시 상당구 대성로 102-1 | 충북 (3) |
24 | 보은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 박윤수 | 충북 보은군 보은읍 장신제방길 18 | |
25 | 보은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 구왕회 | 충북 보은군 보은읍 뱃들로 54 | |
26 |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 김봉기 | 경북 상주시 구두실길 16-1 | 경북(2) |
27 |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 한해수 | 경북 예천군 예천읍 시장로 76 | |
28 | 산청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 하재호 |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삼신봉로 506번길 | 경남(2) |
29 | 고성산동학혁명군기념사업회 | 강호경 | 경남 진주시 일반성면 남산길 121-6 | |
30 | 동학농민혁명서석면추모사업회 | 심형기 | 강원 홍천군 서석면 구룡령로 2527-7 | 강원(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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