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동시

내가 쓴 동시 2005년 분

빛마당 2007. 10. 15. 11:08
 

안개

아침도 가끔은 늦잠을 자고 싶어

우리가 이불 속에서 괜히 뒤척이는 것처럼

잠은 깨어있지만 눈을 감고

엄마가 우리를 깨워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매일 우리를 깨우는 아침도

우리처럼 뒤척이며

누군가가 깨워주기를 바라는 가봐

오늘은 아마도

투정을 부리며 늦잠을

자고 싶은 가봐.

 2005. 1. 8



어쩌다 한 번 돌아보았다

지나온 시간과 발자국들이

계속 따라오고 있구나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

그 때마다 그냥 버리거나 잊어버리고

이곳까지 온 것 같았는데

훨씬 자란 내 키 속에

제법 통통하게 오른 내 살 속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그대로 남아

생각의 키를 높이고

눈높이를 키웠구나

한 발 한 발 내 딛는 발걸음이

조심스러워 지네.

     2005. 1. 8


얼음

흐르는 물도 가끔은

잠시 멈추고 싶은 가봐

쉬지 않고 흐르다보면

생각할 겨를도 없을 테지

한 번쯤 사방을 둘러볼 여유도 없을 테지

누구나 빠르게 앞서는 걸 좋아하지만

가끔 뒤 처져

스치고 지나가는 이들의 이야기들을

듣고 싶기도 할 테지

아래로만 아래로만 무작정 흐르는 일이

잘하는 일인지 생각도 해 보고

그래서 흐르는 물도

잠시 멈추고 싶은가봐

2005. 1. 8


운전

‘아 저기 저 경치들...’

‘아 저기 저 다람쥐...’

우리가 온통 호들갑을 떨어도

아빠는 말이 없다

그렇구나 우리 아빠는

앞만 보며 가시는 구나

우리가 앞과 뒤

옆과 하늘을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아빠는 지금까지 앞만 보고 계시는 구나

2005. 1. 8


겨울나무

잘자라고 있니?

바람이 가지를 흔들어 본다

너무 춥지 않니?

흰 눈이 소복이 이불을 덮어 준다


도로

아스팔트 위에

찍- 그어진 타이어 자국

그 흔적 속에서

놀란 눈길이 보인다.

하늘이 보인다.


난세의 축시

화사한 봄이 웅비의 나래를 달고

푸르른 하늘을 향해 비상을 시작하려 합니다.

말없이 흘러가고 흘러온 세월 속에

늘 함께하는  이름하나 새겼습니다.

코흘리개 개구쟁이들이

불혹 지나 이순을 앞둔 세월까지

수 많은 시련과 고뇌의 갈피마다에

떠오르는 그리운 이름하나 새겼습니다.

하늘이 주심으로 인하여

이기적일 수 없는 사랑을 실천하시는 선생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라'

겸허히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라."

내일의 희망을 주시던 선생님

오늘 그 이름이 그립습니다.

햇빛의 고마움을 지루한 장마 가운데 깨닫고

비의 소중함을 타는 가뭄에 알게 되듯이

이 시대가 그 이름을 그리워합니다.

하늘이 늘 그곳에 있듯이 항상 그 자리에서

때론 햇빛이 되시고 때론 비가 되시어

마른 땅은 적셔주시고 젖은 땅은 말려주시고

샘터를 파시던 그 처음 마음

선생님의 참사랑이 필요한 때입니다.

몸소 실천하려 애쓰시던 사랑의 본질

저희가 찾아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참사랑으로 당당히 살겠습니다.

오르신 그 자리에서 선생님의 큰 뜻

후배들 가슴에 새겨주소서.

오직 스승의 본능으로만 볼 수 있는 눈으로

가능성을 향해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며

꿈을 이루는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마음속에 새겨둘 이름하나 그리워하게 하소서

선생님의 교감 승진을 감축  드리며

강건하심도 함께 빕니다.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시다.

선생님께 경례!

축하!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터널을 지나며

우리들이 가는 길에는 가끔

터널이 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넓고 환한 세상이

갑자기 외길로 좁아지는 걸 보며

때론 가슴 움츠려 들기도 하지

하지만 생각을 바꾸어 보렴

동화 속 여행을 꿈꾸기도 하고

낯선 나라에 대한 호기심에 풍선을 달아보자

환하게 달려있는 조명등

그 화려한 불빛을 보면서

와-와-와- 환호성을 지르면

어느 새

답답한 외길과

막힌 가슴은 뚫려지고

금방 다시 다가 오는

환한 세상.

    2005. 3. 9




155마일

                                 

늘 넘나들지만

아무도 모를 꺼야

울창한 숲과 갈대밭

그리고 기름진 들판을 지날 때와

사뭇 다른 마음을

가시 돋힌 장미나 찔레꽃 사이를 지날 때

이따금 가시에 긁히기도 하지만

그런 마음은 아니었지

그러나 휴전선 155마일

촘촘히 엮어진 철망사이와

뾰족한 가시 사이를 지날 때마다

찢어지는 상처 아픈 가슴

아무리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라곤 하지만

천만 이산가족들의 아픔과

하나 됨을 바라는 모두의 열망을 보면

155마일 그 긴 가시의 장벽들을

성난 태풍이 되어 훌훌 날려 버리고 싶어

그래서 상처 없이 자유롭게 넘나드는 바람이고 싶어.

2005. 5.27


     대금

-권미정 님에게-

대숲을 지나다 만난 

바람 소리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인연이었나

댓잎처럼 흔들리는 작은 떨림

굵게

가늘게

올라가다 꺾이다가

다시 이어지고

때로는 *농현으로 출렁이며

다가오는 소리

달이 밝은 밤이면

가슴 깊은 *청공의 떨림으로

달무리 지듯 다가오는

하늘의 소리.

* 농현(弄絃) :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연주할 때 줄을 흔들어 내는 소리

* 청공(청공) : 대금의 아랫부분에 뚫린 구멍에 얇은 갈대청을 붙여서 떨리는 소리가 나도록 한 장치


양파 캐기

외줄기 파란 안테나

하늘 향해 바쳐 들고

흩어지는 빛살 한 올도 놓칠까 받아 오더니

켜켜이 쌓은 정성 몰래몰래 숨겼구나


스쳐간 비바람 그 햇살

자취 없이 사라지고

당당하던 꽃대마저 뽑혀서 버린 듯 해도

얼레에 실을 감 듯 갈무리해 두었구나


농부는 흐르는 땀을

흙 속으로 뿌려가며

비바람 그 햇살을 이랑마다 거두어 가면

한 여름 뙤약볕 아래 드러나는 빛 덩이.

     2005. 7. 6


파 모종하기

“잘 자라는 파를 왜 뽑나요?”

“뽑은 파를 이 뙤약볕에 다시 심나요?”

경운기 지난 자리

누운 긴 이랑

사람들의 빠른 손놀림에

채워지는데

옮겨 심은 파들은 지쳐 늘어지고

나도 파처럼 목이 타는데

“한 번 옮겨 심어야 제대로 자란단다.”

구슬땀 젖은 수건 아래

검게 그을린 엄마의 얼굴.

2005. 8. 23


  







터널을 지나며 김재수

우리들이 가는 길에는 가끔

터널이 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넓고 환한 세상이

갑자기 외길로 좁아지는 걸 보며

때론 가슴 움츠려 들기도 하지

하지만 생각을 바꾸어 보렴

동화 속 여행을 꿈꾸기도 하고

낯선 나라에 대한 호기심에 풍선을 달아보자

환하게 달려있는 조명등

그 화려한 불빛을 보면서

와-와-와- 환호성을 지르면

어느 새

답답한 외길과

막힌 가슴은 뚫려지고

금방 다시 다가 오는

환한 세상.

    2005. 3. 9

병원 일기

1. 응급실

안개가 잔뜩 낀 길을

정신 없이 가는데

누가 불렀어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듯한 목소리

가던 길 멈추고 고개를 돌렸지

눈에 익은 동구 밖 아름드리 팽나무 곁에서

내 이름을 급히 부르며 손짓하고 있는 엄마

엄마의 등뒤로 보이는

노을보다 더 붉어진 얼굴이

나를 흔들고 있었어

“엄마-”

열려진 내 눈 안으로

엄마 얼굴이

와락 다가오고 있었어.

2005. 8. 23


2. 링거액

쉼 없이 그치지 않고

똑 똑 똑....

내 몸 안으로 스미는

링거액 방울

내 핏줄을 타고

지금쯤 어느 곳으로 지나고 있을까

내가 잠들어 있는 시간에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두 손 모은 엄마

이따금 내 이마에 떨어지는

링거액보다 더 진한 눈물은

내 살갗을 타고 지금쯤

어디를 지나고 있을까

2005. 8. 23


3. 소나기

침대에 누워 바라보는 창문이

온통 시커먼 납덩이 더니

“후드득-”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

모두가 아픈 소리를 낸다

때를 쓰는 심술쟁이처럼

아무나 붙잡고 흔들어도

결국 무너져 내린 먹구름 위로

새롭게 드러나는 파란 하늘

내 어깨로 목으로 견디기 어렵도록

욱신대던 심술 한 자락도

씻겨 내려갔는가

가벼워지는 병실

2005. 8. 23


 파 모종하기

“잘 자라는 파를 왜 뽑나요?”

“뽑은 파를 이 뙤약볕에 다시 심나요?”

경운기 지난 자리

누운 긴 이랑

사람들의 빠른 손놀림에

채워지는데

옮겨 심은 파들은 지쳐 늘어지고

나도 파처럼 목이 타는데

“한 번 옮겨 심어야 제대로 자란단다.”

구슬땀 젖은 수건 아래

검게 그을린 엄마의 얼굴.

2005. 8. 23


승복이네 엄마(1)

우리 마을 승복이네 엄마는

비닐 하우스 안에 오래 일한 탓인지

온몸에 늘 햇살이 붙어있다

그을린 살갗

화장기 없는 얼굴은

잘 자란 오이순처럼 싱그럽고

입가엔

오이 꽃보다 더 잔잔한 웃음꽃이

조롱조롱 매달려

비닐 하우스를 몰래 들여다보면

온통 꽃으로 넘친다

오이들도 그 웃음을 먹고 크는지

쑥쑥 잘도 자라

신이 날만도 하겠지

길죽 길죽한 오이들을

늦둥이 승복이 키우듯

어루만지기만 해도

끊이지 않는 콧노래

하루 일을 마치면 달라붙는 피곤쯤

툴툴 땀 젖은 머리수건 털 듯

가볍게 떨어버리고 돌아가도

그 집 비닐 하우스에는

밤에도 이따금

한 무리의 별이나

동그란 달님이

몰래 숨어들어 오이 밭을 지키는 걸 볼 때가 있다.

   2005. 9. 21


승복이 네 엄마(2)

너른 들판에

항공모함과도 같은 비닐 하우스를 띄워놓고

엄마는

오늘도 항해를 합니다

아침부터 서로 키 재기를 하는 덩굴손과의 악수로부터

배꼽 떨어진 오이들과 인사하기

어쩌다 철없는 덩굴들의 옷섶을 추슬러 주는 일까지  

엄마의 손을 기다립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하면

금새 토라지는 눈빛

승복이 키울 때 보다 더 힘들지만

손길 닿는 만큼

쑥쑥 자라는 오이들이 고마워

하우스 안에 들어서면

바깥 세상 시린 걱정은 훈훈해 집니다

하루라는 시간도 파란 덩굴 속으로 숨어 버립니다

손에 낀 장갑이 새 파랗게 물이 들면

네모진 상자에 차곡차곡 쌓이는 하루의 결실

해님이 비닐 하우스를 금빛으로 물들이면

오늘 항해 끝

엄마는 기쁨으로 닻을 내립니다.

2005. 11. 25


  마산의 아이들


눈을 뜨면

가슴을 바다를 향해 열지

그래서 마음도 꿈도 푸르지

물결만큼이나 늘 움직이기에

그래서 늘 힘이 넘치지


여기에 오면

소백산 큰 힘줄도  거친 숨을 쉬다

마음을 놓고 내려앉아

바다를 안고

여항산(艅航山) 광려산(匡慮山)산자락으로

동해를 거슬어 온 파도는

여기선 숨을 고르지


마산의 아이들은

노래를 듣지

파도와 물새들이 어우러져 부르는 합창

귀에 익은 김동진의 “가고파” 한 가락만으로도

고향 사랑의 꿈을 키우고

그래서

때론 오를 수 없는 꿈의 언덕일지라도

마음을 모아 올라가지


그래서그래서

마산의 아이들은 신나지

2005. 10.11


나무와 새

여린 가지 끝에

날아 온

어린 새의 작은 속삭임이나

가녀린 새의 발이 전하는

따슨 체온 하나도

나무는 수많은 이파리들을 열어 받아들인다.

새의 소리는

안테나 같은 잎과 가지를 따라

줄기로 내리고

다시 뿌리로 내려 새로운 영양분이 되어

나무의 나이테 안으로 스며들어

눈감으면 나무는 언제나 새소리를 제 안에서 듣는다.


작은 새를 품어 안은

나무의 물오르는 소리와

나이테를 돌아 나온 든든한 노래 소리며

여린 이파리의 떨림 같은 춤사위 하나도

새는 여린 발가락을 통해 받아 드린다

말없는 나무의 언어는

새의 가슴과

새의 깃털까지 이어져

새가 부르는 노래로 다시 울린다

이윽고 새는 다시 둥지로 날아가도

나무가 전하는 노래를 가지고 간다

새가 떠난 나무도

새의 노래를 안고 잠을 잔다.

2005. 10. 11


아파트와 달

달은 연신

창문을 기웃거리는데

일일 연속극 물결 속에

모두 빠져 있는 시간

보름달 보다 더 강한 불빛이

달빛을 창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머무를 자리를 찾지 못하고

12층 아파트 시멘트벽에 기댄 달

아이들도 다 떠나간 놀이터 한 쪽

피곤한지 등 굽은 소나무가

안테나 되어

잔잔한 빛을 받고 있다

헤아릴 수 없는 잔솔 그 이파리에

달빛이 조용히 스미고 있다

나무가 힘을 얻는지

하루의 피곤을 털어 내며

허리를 다시 펴고 있다.

2005. 10. 17


달 보기

불을 꺼야지

내 안의 불마저 꺼야

볼 수 있는 빛

눈을 감아도

그 빛은 잔잔히 가슴을 적시어

굳은 밭을 다시 일구듯

무딘 삶의 보습을 다시 갈아 끼우고

모두를 바라보는 눈을 기르고

새롭게 사랑하는 법을 익히고

때를 따라 용서도 배워

파도 같은 분노도 잠재우고

응어리 진 옹이도 녹이고

불을 꺼야지

내 안의 불마저 꺼야

찾아오는 빛

2005. 10. 17



붕어빵

우린 첨부터 만날 인연은 아니었어

하지만 참 묘한 세상이더군

리치마트 한 코너에서 팔려온 밀가루와

상주 칠일 장

풍물거리에서 팔려 온 붉은 팥이

뜨거운 빵 틀 안에서 만나다니

꿈에라도 상상이나 했을까?

단 팥 한 숟가락이

생면 부지 밀가루 반죽에게

편하게 몸을 맡길 줄이야

한 톨 팥 알갱이라도 흩어질까봐

두 팔로 껴안듯 감싸주는 이 둘의 아이러니

견디기 힘든 뜨거움을

그렇게 서로가 의지하며 이기고 나면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

붕어빵 속에 붕어가 없으면 어떠랴

세상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둘이 하나된 붕어빵

2005. 10.17



샘 파기

어디 물의 근원이 있을까

끝없는 탐색은 이어지지만

오아시스는 함부로 보이지 않는 것

사랑은 태양처럼 다가와

더 목마른 갈증

모든 세포는 열리고

샘의 근원을 향한 기원

어디 단물이 단숨에 나오랴

반석을 뚫는 땀흘림과

목마름을 참는 기다림

이윽고 물은 고이지만

다시 더 깊은 곳을 향해 파 내려가고픈

또 다른 갈증

2005. 10. 20


비 오는 날

땅의 이마가 뜨거울 즈음

하늘은 비를 내립니다

높은 하늘을 향한 동경과

가진 것들이나

품은 것들에 대한 욕심으로

가슴보다 머리가 더 뜨거워질 무렵이면

하늘은 비를 내립니다

비는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법과

서둘지 않고 고요히 스미는 법을 가르칩니다

빗물이 스미면

나도 모르게 이마의 뜨거운 체온이 내리고

다시

욕심의 눈금을 내리는 연습을 합니다.

2005. 10. 24



국화 화병

한 아름 국화가

화병에 꽂혀있다

밝게 웃고 있지만

그의 향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투명한 유리병 가득

잘린 상처의 아픔을

나는 읽고 있다

내 눈길 차마

화병에 머물 수 없는 연민

오히려

국화꽃에 가리워

눈빛조차 가늠하지 못하지만

나와 시선을 맞추려는 사람

국화 화병을 치워내고

그의 눈과 마주치고 싶다

방안엔

진한 향기로 가득 할 성싶다.

2005. 10. 27




안개

좀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갈까

도로 표지판의 방향 마저

보이지 않는 길

내 안의 안개 등을

무수히 켜봐도

보이지 않는 길

내 의지와는 다른 행보로 인해

더 또렷해지는 의식

아니 보이지 않아서 인가

경계가 없어 좋다

장애물 보다

걸리지 않아 좋지만

헤쳐도 헤쳐도 헤쳐지지 않고

계속 걸리는 걸림

때로 혓바늘처럼 자국이 남지만

안개는 안개일 뿐

기다리자

빛이 환한 마당으로 내려서면

사라질 아픔

2005. 10. 27



생각의 거리

몇 만 광년 거리의 별빛이

내 눈 속에 닿는 시간은 얼마일까

손가락 하나만 가려도

보지 못하는 내 시력의 한계로

별빛을 가늠하는 오만이지만

시공을 따질 수 없는 거리

걸림 없음의 걸림

헤아림 아닌 헤아림

아무것도 막히지 않아 오히려 막힘까지

마음 하나 닿으면

오가는 시공

생각의 거리

2005. 11. 1


바라보기

화분의 국화꽃이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누군가와 나누는

쉼 없는 속삭임

새소리일까

바람소리일까

아니면 오지 못해 안타까운 꿀벌일까

돌려놓아도 어느새

돌리는 고개

샛노란 빛깔로

탐스러운 몸짓으로

진한 향기로

서로를 확인하는 공간

그리움. 기다림. com

2005. 11. 2


장미꽃 피던 날

선혈로 점점이 꽃을 피우더니

돋은 가시

그 이율배반의 늪

진한 향기만큼

단단히 내 건 접근 금지의 팻말

높은 담장일 수록

더한 호기심이

빗장을 벗기는데

꽃이 피는 날

꽃의 아름다움만큼

젊음으로 가는 기차

2005. 11. 10



하늘을 난다고

자유롭다 말할 수 있을까

아무 걸림이 없을 것 같은 하늘에도

날개를 거스르는 바람

그 거역을 극복해야 나는 새를

부럽다 하는가

지금은 날지만

안주해야 할 곳은 하늘이 아니다

비행은 잠시일 뿐

올라 갈수록

높이 오를수록 다시 내려와

언젠가 삶의 뿌리를 내려야 할 곳은

부러움의 하늘이 아닌

깃을 치고 쉬어야 할 곳

2005. 11. 14



가슴에 그대가 가득한 날

앞산의 이마도 따스해 보이고

바싹 마른 갈대 잎에서도 웃음소리가 들린다

낙엽 하나에도 귀가 열려

저절로 부는 휘파람

나를 향한 모두에게서

내 눈에 담긴 모두에게서

비누방울로 피어오르는 무지개

하늘 무심히 지나는 구름에게도

수평선 흔드는 거친 파도에게도

자꾸 손 내밀고 싶어

그대가 가슴에 가득한 날은

아무라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자갈길이라도 자꾸 걷고 싶다.

   2005. 11. 19



네가 웃어 준 날


마른 풀잎도 따스해 보이고

밉던 이웃집 강아지

흔드는 꼬리도 신나 보였다

왜 그랬을까

너를 볼 때 괜히 주눅이 들어

좀처럼 채워지지 않던 시장기

때로는

찬 물 한 바가지로도 식힐 수 없을 열병이

오소소 몸살 끼로 머물렀는데

네가 웃어 준 날

잔뜩 채워진 풍선처럼

둥둥 몸이 가볍고

불현듯 사라진

질기게 따라 다니던 어둡던 그림자

2005. 11. 17


다 보이기

망설였어

속내를 보인다는 건

나를 버리는 것 같았거든

화장을 하면서

화장의 농도만큼 두껍게 따라다녔던

불안의 그림자

밤마다 세수하면서 가졌던 갈등이

오랜 체증이 풀리듯

씻겨 나갔어

너의 웃음 속엔 어쩌면

너의 불안도 나처럼 씻겨 나갔는지 몰라

오랜 습관처럼 쓰고 다닌

얼굴인 냥  살았던 가면

너도 내 앞에서 벗었는지 몰라

그래서일까

고개 들 수 없는 부끄러움임에도

구름에 가렸다 나온 달처럼

세상은 다르게 보였어.

2005. 11. 21


술래잡기

네가 술래일 때

잡혀줄까 말까 망설였어

토담아래 숨었지만

살짝 머리를 들어 보고 싶기도 하고

장독 뒤에 숨어서도 몰래

옷자락도 보여주고 싶었거든

다른 아이들이 잡히면

너보다 내 기분이 왜 그리 좋은지

맨 나중까지 날 찾지 않아

속이 상하기도 했지만

왜 나를 나중까지 찾지 않는가를

내가 술래일 때

순이네 토담위로 언뜻 언뜻 보이던

홍초 꽃같이 붉은 네 리본이 보인 까닭도

이제야 알 것 같아 허허.

2005. 11. 21



순희 에게(1)

네가 보이지 않던 날

네 집 앞을 서성거렸다

닫힌 방문이 무거워 보이고

댓돌위로 하얀 운동화만 혼자 있더라

장독 옆 감나무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목을 길게 늘이고

포록 포록 신나게 날던 굴뚝새 한 쌍

기도하듯 처마 밑에서 조용히 머리를 조아리는데

순이야

눈치 없이 흐드러진 봉숭아 붉은 꽃이

왜 그리 밉던지

네 이름 두 서너 번 속으로만 부르다가

먼 산보며 돌아오는데

콜록콜록 따라오는 네 기침소리

내 발목을 자꾸만 잡고 있더라.

2005. 11. 22



순이 에게(2)

몰래

네가 사는 외딴집을 가 봤어

박꽃이 하얗게 반겨 주더라

어둠이 온통 네 집을 감싸는데도

그 어둠을 밀어내는

창문의 환한 불빛

동화책을 읽는지

공부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솜사탕 같은 네 웃음소리가

간간이 담을 넘고 있었어

별들도 호기심의 눈이 빛나고

달님도 포근하게 바라보고 있더라

네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노래하는 풀 벌래

너를 향해 아무 말도 못했지만

돌아오는 내 등에

따스한 불빛 한 짐 지고 왔단다.

2005. 11. 22


For Soon-hee(2)

               write by Jae Soo-Kim

              translation by  Pillip Erieat

Stealthily I visited your solitary house;

The gourd flower greeted me with its

White smile and a streak of light from

Your window pushes away

The darkness covering your house;

I could not see whether you were

Studying textbooks or reading

Children's story books; but I could hear

Your laughing sounds sweet as candy fluff

Come out over the fence

From time to time; at which the stars

Twinkled in their curiosity and the moon

Kept a long loving gaze;

And the insects of grass sang to your

Laughing sounds;

I could not say anything but left

With your warm light on my back.


순희 에게(3)

어제는 파사현정(破邪顯正)엘 갔었다

반쪽 달이 하늘에서 쪽배로 있더구나

더 없이 맑은 하늘

변함 없이 떠가는데

연못 속 쪽배는

잔잔히 부서지고 있더라

힘차던 분수의 물줄기는 쉬고 있는데

바람이 흔드는지

자꾸만 이지러지는

네가 흔들리는지

내가 흔들리는지 

하늘 한번

연못 한번

그렇게 바라보다

아무래도 흔들리지 안을

네 어진 눈빛 하나 안고 왔단다.

2005. 11. 28


겨울나무(나목(裸木)

벗었음에 대한 부끄러움과

버렸음에 대한 미안함과

떠나 보냈음에 대한 미련이

늘 그림자로 따라 다녔습니다.

애써 놓지 못한 손

잡기만 하면 모두가 내것인줄 알았는데

훌훌 손 털고 난 지금

오히려 비어 버린 충만(充滿)

텅 빈 가슴으로

다시 햇살 앞에 섰습니다.

빛은 이제 마음을 놓고

고운 빛살로 나를 다시 채우고 있습니다.

2005. 11. 23.


 

봉지 씌우기

내 모습에 때깔 낸 다며

봉지를 씌운다

누가 알기나 하랴

눈 가리고 입과 코를 막은 답답함

바람의 손길도

햇살의 눈길도 막혀버린 자리

때깔이 좋으면 무엇해

유리 상자 안의 조화처럼

조끼를 걸친 애완견처럼

포장된 아름다움

훌훌 봉지를 벗어 던지고

맑은 공기를 숨쉬고 쉽다

태양을 향해 바로 웃고 쉽다.

2005. 11. 23



처용무

나무는 

바람이 없는 날에도 춤을 추었다

땅위로 드러낸 줄기와 가지와 잎과

땅속에 숨겨둔 저 가느다란 실 뿌리까지

채워진 새의 노래로

이따금 찾아오지 않은 새를 위해서도

춤을 추었다

새를 위한 춤은

구름 낀 날에는 햇살이 되어

나무의 온몸에 은총으로 내렸다

둥지를 틀지 않은 새는 떠나겠지

언젠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새를 위해서도

춤을 추었다

자유로운 비상

땅위에 머물러 사는 모든 나무의 꿈이지만

간간이 고개 드는

발목 잡고싶거나 함께 나르고 싶은

허이 허이-

온몸 흔들어도 잠재우지 못하는

허욕을 떨치기 위해 추는

처용의 춤.

2005. 11. 24


승복이 네 엄마(2)

너른 들판에

항공모함과도 같은 비닐 하우스를 띄워놓고

엄마는

오늘도 항해를 합니다

아침부터 서로 키 재기를 하는 덩굴손과의 악수로부터

배꼽 떨어진 오이들과 인사하기

어쩌다 철없는 덩굴들의 옷섶을 추슬러 주는 일까지  

엄마의 손을 기다립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하면

금새 토라지는 눈빛

승복이 키울 때 보다 더 힘들지만

손길 닿는 만큼

쑥쑥 자라는 오이들이 고마워

하우스 안에 들어서면

바깥 세상 시린 걱정은 훈훈해 집니다

하루라는 시간도 파란 덩굴 속으로 숨어 버립니다

손에 낀 장갑이 새 파랗게 물이 들면

네모진 상자에 차곡차곡 쌓이는 하루의 결실

해님이 비닐 하우스를 금빛으로 물들이면

오늘 항해 끝

엄마는 기쁨으로 닻을 내립니다.

2005. 11. 25




순희 에게(4)

순희야

너네 비닐 하우스엘 갔었다

바깥 세상은 겨울인데

네가 사는 세상은 여름

이마랑 옷자락엔 땀이 흐르고 있겠지

비닐 한 겹 사이

네가 사는 세상과

내가 사는 세상이 이토록 다르다는 걸

환경이 다르면 때론

생각도 달라지겠지

보고싶다는 마음 하나로

네 언저리에 오래 서성여 봤지만

생명을 가꾸는 너에게

아무것도 전하지 못하고

추위에 떨고 있는 가랑잎 하나

외롭지 않으려고 품고 왔단다.

2005. 11.29


서설(瑞雪)

당신은 불현듯 그렇게 왔습니다.

무거운 하늘뿐 아니라

답답한 가슴을 녹이며 그렇게 왔습니다.


찬바람이 가득 찬 하늘과

앞산 마저 시린 이마로 움츠릴 때

당신은 포근한 입김으로 그렇게 왔습니다.


당신은 춤추듯 다가 왔습니다.

꽃잎 나르듯 분분한 몸짓

움츠린 내 어깨 위를 다정한 손길로 두드리듯

사뿐사뿐 그렇게 다가와

심연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습니다.


당신은 먼 곳에서 일부러 찾아왔습니다.

아직 마른 잎들이 구르는 길과 언덕

가을 끝을 마무리하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헤매는 낙엽의 상처를

당신은 조용히 덮어 주며 왔습니다.


당신이 찾아 온 이 계절

그림자 모두 걷어 내어 봄입니다.

2005.12.17



승복이네 엄마(3)

밤사이

어디 숨었다가 나왔니?

연두 빛 여린 덩굴손이

이곳 저곳에서 서로 손을 내미네.


반가워요.

언제 피었는지

새로 핀 오이 꽃 노란 웃음

별만큼 달렸네.


난 어때요?

조롱조롱 줄 그네를 타던 어린 오이들

서로 서로

뼘을 재며 키 재기를 하네요


많이 컸구나

승복이네 엄마

아침부터

어깨가 으쓱해지네.

2005. 12.20


그림자로 질기게 떠나지 않은 

기억의 이랑에 눈이 내린다

지워야지 하면서도 못내 지우지 못하고

암각화로 각인 된 흔적

나이테에 박힌 옹이처럼

저려 오는 가슴을 들어내놓고

눈을 맞는다

쌓인 눈으로 가려진다면

하기야 어디 한 두 번 가려 본 것도 아니지만

어쩌랴 더워진 가슴

이렇게 라도 식혀야 하는 것

밀어내도 어김없이 다가오는 시간의 바퀴아래

더 진한 그림자 묻어와도

이 밤 내려라

펄펄펄-

2005. 12. 22

순희에게(5)

“잘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돌아서서 가지만

네 발걸음이 무거운 거

난 다 알아


“안녕히”

상냥한 웃음으로 나도 작별하지만

내 마음 무거운 거

넌 다 알아.

2005. 12. 24


순희에게(6)

며칠 째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넌 다 알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며칠 째

아무 소식 없었지만

나도 다 알아

네가 무얼 하고 있는지


이상하지

지척이 천리라지만

눈감으면 천리도 지척이 된다는 거


세상에서 가장 빠른 새가

눈 깜짝 할 새라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네가 보여.

2005. 12. 24


승복이 네 엄마(4)

“징글벨 징글벨..”

모두들 신나게 성탄 트리를 만드는데

승복이 네 성탄 트리는

하우스 가득 파란 오이덩굴입니다.

반짝이는 은빛 종 금빛 별 대신

별보다 더 초롱초롱한 꽃을 답니다

산타할아버지 지팡이

선물을 담을 버선을 걸어 둘 곳엔

옹기종기 길쭉길쭉 오이들을 답니다

“기쁜 성탄과 새해를 위해”

거리에 물결처럼 흐르는 사람들

저마다 축복으로 신이 나지만

찬바람 부는 외딴 들녘 승복이네 엄마는

우리들의 싱그러운 식탁을 위해

흐르는 이마의 땀을 웃으며 닦습니다.

2005.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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