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치기
아버지가 전지가위로
과일나무 가지를 자르고 있다
겨우내 함께 견뎌온 가지
쭉쭉 벋어 올라 꽃이 많으면
주렁주렁 열매도 많이 달릴 터인데
나무는 속절없이
그렇게 서 있고
땅에 떨어져 내린 가지는
햇살아래 어지럽게 누워 있다
땀을 흘리며
부지런한 손놀림
아버지는 하나도 아깝지 않은가 보다
흘낏
나를 돌아보시며 웃는 아버지
2009. 3. 24
손톱을 깎으며
손톱을 깎는다
톡 톡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가는 손톱
이상하다
손에 가시래기* 만 일어도 몹시 아픈데
내 몸의 일부를 잘라내도
아프지 않다니
떨어져 나가려면 차라리 아프기라도 하지
그렇지 않으려면 자라지나 말지
잊을 만하면
알 듯 모르는 듯 그렇게 다가와
두 눈 바짝 뜨고 깎아야 하는,
손톱은 깎아도 깎아도 남는다
뿌리 안에 도사리고 앉은
낮달 같은 미소
떨어져 나가는 기억들을 일일이 주워 모으며
손톱을 깎는다.
2009. 3.25
꽃밭에서
풀을 뽑다가
손을 멈추었다
씨앗을 뿌리지도 않았는데
어디로부터 왔을까
이름 모를 저 풀들은
햇살도 골고루
바람도 골고루 어루만져
꼭 제 모습처럼 제 빛깔로
앙증맞게 피워 낸
꽃, 꽃, 꽃
잡초라고해서 뽑으려 했다가
손을 거둔다
웬 일일까
내 손이 미안하고 부끄러운 것은
2009. 4.30
오이 고르기
한 울타리에서
어떤 것은 한 줄기에서 자랐는데
긴 것 짧은 것
가는 것 굵은 것 서로 다르다
너무 커도 안 되고
너무 작아도 안 되고
너무 굵어도 안 되고
너무 가늘어도 안 된다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저놈의 오이 상자
어떤 것은 특등
어떤 것은 등외
누가 만든 기준일까
오이를 고르다 문득
내 가 저 오이 상자에 들어가 본다
허허허
2009. 4. 30
아카시아
어머나!
향기를 찾아 왔더니
가시를 지녔군요
그래요
가시를 지녔답니다
아주 크고 날카로운
그래도 벌 나비는
기꺼이 오더군요
숨기고 싶지 않았어요
가시는 그냥 가시일 뿐
일부러 다른 이를
찔러 본 일이 없거던요
솔직히 있는 내 모습 그대로가
더 편해요
감추어 둔 가시가
더 무섭다는 걸
찔려 본 후에야 알거던요
2009. 5. 9
아카시아
어디 숨겼다가 터트렸을까
비탈진 산 어귀
띠를 두르듯
주저리 잘랑잘랑
꽃 주머니다
벌 나비 신나는
꿀주머니다
산과 하늘 채우는
향주머니다.
2009. 5. 9
단풍나무
꿈꾸는 단풍나무들을 보았니?
땅에 뿌리내려 붙박이로 살아도
하늘을 향한 꿈
별이 그리워
별을 닮은 이파리 다섯 손가락
푸르다 못해 온통 빨개진 모습
바람을 타면 하늘 오를 수 있을까
조롱조롱 매달아 놓은
수많은 프로펠라 프로펠라
어느 오월 바람 좋은 날
윙 윙-
프로펠라를 돌리며
온몸을 던져 날아오를
꿈꾸는 단풍나무들을 보았니?
2009. 5. 19
딱따구리
따따따따따딱딱딱...
따따따따따딱딱딱...
어디에 또 구멍을 뚫나 보다
산이 엎드린 채 잔뜩 신경을 쓰고 있다
산 속의 식구도 숨을 죽인다.
바위를 뚫는 착암기라면 몰라
아스팔트를 부수는 포크래인이라면 몰라
저 연한 부리 하나로
딱딱한 나무둥치를
쩌렁쩌렁 산이 울리도록 쪼아 대는
딱다구리야
숨 돌릴 여유도 없이 온 종일
잊을 만하면 또 들리는
소리, 소리, 소리....
작은 일 하나 끝까지 해내지 못하고
천방지축 덤벙대는 내 가슴에도
따따따따따딱딱딱...
따따따따따딱딱딱...
연신 구멍을 뚫고 있다.
2009. 5. 23
꿩
꿔-ㄱ
꿔-ㄱ
가시 걸린 녀석들이 많구나
아카시아 꽃 꿀주머니는 아닐 테고
상큼한 찔레 순도 아닐 테지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고
그렇게 일렀는데
그럴 듯하면서도
독이 되는 게 많다고
맛있어 보인다고 다 좋은 건 아니라고
조심했어야지
목이 아프겠다
하긴
잘 못 먹고 능청만 떨다가
죽는 녀석보단 낳지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꿔-ㄱ
꿔-ㄱ
이산 저산 다 들리도록
가시 걸린 모가지 도리질하는
안됐구나.
오뉴월 장끼들
2009.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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