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산문

자활센터 문학 제3강

빛마당 2010. 9. 18. 12:56

 

문학 제3강


좋은 시를 쓰려면


1.문학체험을 많이 해라

 

 좋은 글을 쓰기 위하여 구양수가 말한 삼다(三多)가 필요하다.

독서체험은 실제의 체험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글을 읽는 행위가 아니라 글쓴이의 체험, 사고, 감정, 인격, 사상 등의 총체적인 것과의 만남 이 되며 새로운 세계를 접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러므로 독서는 우리의 정신세계를 살찌우고 삶을 풍요롭게 한다. 또는 사물을 보는 방법이나 시각을 다양하게 만들고 사고를 깊게 한다. 동시에 자기의 직접적인 체험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흔히 독서를 마음의 양식이라고 하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특히 문학경험은 시 창작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다.


2. 상상을 많이 하라


19세기 영국의 비평가 헤즐리트는 "시는 오직 상상의 언어"라고 했다.

이 말은 상상력 없이는 쓸 수 없는 것이 시라는 의미이며 실제적으로도 시는 어떠한 글보다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문학이다. 따라서 시를 쓰는 지망생들은 상상력을 풍부하게 키워야 하는데, 문학체험이야말로 이것을 위한 좋은 방법이다. 수많은 상상들이 집약되어 나타난 것들이 문학작품이기 때문에 무수히 문학작품을 접해 봄으로써 자신의 상상력을 키울 수가 있다. 특히 시야말로 상상의 산물이므로 부지런히 시를 읽어야한다. 나무를 다루는 목수는 그 나무의 재질을 알아야 하고, 돌을 다루는 석공은 그 돌의 성질을 잘 파악해야 하는 것처럼 시를 쓰려는 사람은 우리말에 능통해야 한다. 시는 극도의 예술이며, 언어의 정수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어떠한 문학보다도 언어에 대한 감각과 언어를 다루는 솜씨를 필요로 한다.


3. 우리말의 어휘도 많이 알아야 한다.

  문학체험은 이 언어에 대한 감각을 키우고 언어의 대한 속성이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수많은 작품을 읽는 과정 속에서 우리말이 지닌 섬세하고 미묘한 부분까지 몸으로 느껴봐야 한다. 그리고 숱한 어휘까지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그것들이 어느 자리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일 수 있는가를 스스로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4. 쓰고 또 써라


 쓰는 일은 시 창작의 처음이자 끝이다. 시 창작의 실제는 쓰는 일에서 시작되고 쓰는 일로 끝이 나기 때문이다.  시 창작은 철저한 연습을 필요로 하고 문장과의 싸움을 원한다. 워즈워드의 말대로 "최상의 언어를 최상의 순서로 늘어놓은 것이 시"이기에 어떠한 문학보다도 준엄하고 치열한 언어의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고난도의 기술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피겨스케이딩, 리듬체조, 기계체조 혹은 서커스의 묘기는 묘기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피나는 수련이다.

 중국에서 동진 때 서예가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 왕희지(王羲之)다. 그의 필체는 신기에 가까울 만큼 힘차고 살아있는 듯 생동했다고 한다. 이런 왕희지에게 서예의 비결은 큰 물독이 18개였다.

 프랑스의 사실주의 작가로 유명한 에밀 졸라도 그의 습작시절 파지가 자기의 키를 훨씬 넘었다고 한다.

 그래서 위대한 예술가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진다"고

 수영선수가 최고의 수영 실력을 쌓기 위해서는 물속에 뛰어 들어 온 몸을 놀려야 하고 소리꾼이 득음을 하기 위해서는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하는 것처럼 좋은 시를 창작하는 것도 다른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쓰고 또 쓰는 수련만이 있을 뿐이다.


5.따뜻한 가슴으로 사물을 보라


"시인은 꾀꼬리처럼 어둠 속에서 그 고독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를 부르며 사람들을 위로 해준다."라고 영국의 시인 셸리는 말했다.

나는 시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사랑을 모성적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모성적 사랑은 모든 사랑의 근원이다. 아무런 조건과 이해타산 없이 순수하게 자신이 지닌 것들을 내어 주며 한없이 베풀어 주는 사랑이다.

 그래서 모성적 사랑은 우리 인류에게 영원한 지표요. 신앙이요. 구원이다. 결코 어떤 무엇으로도 훼손될 수 없는 사랑의 원형이다.

 또한 모성이 모든 생명을 탄생시키는 생명의 원천이며, 그것들을 품고 기르는 위대한 창조성의 본(本)인 것처럼 시 역시 온갖 사물들을 품으면서 그것들이 지닌 의미와 아름다움을 새롭게 창조해 내는 것이므로 모성과 시는 그 본질에서 서로 통한다.

 이것은 동시에 모든 생명을 향해 열려있는 뜨겁고 깊은 사랑이다.

우리로 하여금 한 인간에게 가장 깊이 가 닿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사랑인 것처럼 사물 역시 사랑만이 그들의 가장 내밀한 세계까지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시인을 통하여 시를 쓴다는 말까지 나오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서로 사랑의 교환을 원한다. 비록 영성이 깃들이지 않은 무생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시의 궁극적인 모습은 이러한 생명들에게 주는 사랑의 노래다. 시인은 이것들을 가슴에 품고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 뭇 생명 속에 내재한 슬픔과 사랑을 느끼지도 못한다면 그건 시인이라고 할 수가 없다. 따뜻한 가슴으로 모든 사물을 바라보라. 그리고 안아 보라. 시는 영원한 모성인 것이다.


6. 고치고 또 고쳐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작을 남긴 위대한 작가들에게는 퇴고에 의한 이야기가 무수하게 많다. 이러한 사실은 훌륭한 작품을 창작하는 비법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퇴고에 열정을 쏟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답게 문장을 썼다는 투르게네프도 어떤 문장이든지 쓴 뒤에 바로 발표하는 일 없이 원고를 책상 서랍 속에 넣어 두고 석 달에 한 번씩 꺼내보면 다시 고쳤다고 하고, 글자 한 자마다 완벽함을 기했던 구양수도 초고를 벽에 붙여 놓고 방을 드나들 때마다 그것을 고쳤다고 한다.

 소설 <부활>의 제1차 미정고()에서부터 제10차 미정고 까지 <전쟁과 평화>의 90여종이나 되는 미정고들이었다.

  헤밍웨이도<노인과 바다>를 쓸 때에 400번 이상을 고쳐 썼다고 한다.

  더구나 시는 어떠한 문학보다도 엄격한 창작태도를 요구한다. 언어 하나의 정확함에서부터 문장부호 하나까지도 시의 전체적으로 흐르는 분위기, 호흡, 리듬, 질서에 관여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서로 유기적인 조직들을 이루어야 하는데, 퇴고를 하지 않고서는 이런 극도의 치밀함이 생겨날 수 있는 없다.

  붓놀림이 신선 같다던 두보조차도 "시언(詩言)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시 다듬는 일을 쉬지 않는다."고 하며 자신의 시를 퇴고하는데 참담할 정도의 노력을 쏟았던 것이다.

 이규보가 '시에 적합하지 못한 9가지 체'를 이야기하면서 "글을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 은 잡초가 가득 찬 밭"이라고 말할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므로 시를 고치고 다듬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며, 가벼이 여기지 말라. 죽어서도 시 다듬는 일을 쉬지 않겠다던 두보의 각오로써 자신의 시를 끊임없이 다듬는 노력과 정성이 좋은 시를 창작케 하는 지름길이며 비법인 것이다.



7.자연에게 배우라


 자연은 뭇 생명들의 근원지이며 원형이며 모태이다. 뭇 생명들의 총체이자 본질인 것이다. 인간 역시 이러한 큰 생명체[자연]에서 뻗어 나온 한 부분인 까닭에 자연과는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오래 전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은 문학이 모방 대상이었으며, 재현해야할 '진실'의 척도가 되었다.

 알렉스 프레밍거도 그의<시학사전>에서 언급하길 "자연이야말로 문학의 진실성을 가늠하는 기준이며 시학의 개념"이 된다고 하였다. 이는 자연이 우주적인 질서와 법칙, 순리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본질과 진실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시는 생명의 노래이다. 생명의 발현이고 소망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는 생명의 총체이며, 생명의 원형이 자연에 맞닿아 있다.

 인간이 자연과 한 몸인 것처럼 시 역시 자연과 하나가 될 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래서 조지훈 시인은 시를 가리켜 "시인이 창조한 제2의 자연"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자연은 장황스런 설명 없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보여준다. 우리가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묻고 수많은 언어를 통해 그것을 이해했다고 하자. 그러나 저 물가에 혹은 저 산 속에 피어 있는 한 송이 꽃을 보는 순간 아름다움의 실체를 느끼게 된다. 머리로써의 이해가 아니라 자신 전체의 체험으로써 아름다움의 본모습을 깨닫도록 해주는 스승이 바로 자연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아무런 꾸밈이나 기교 없이 명징하게 생명의 참모습들과 현상들, 더 나아가서는 그 생명의 아름다움 본질을 알려준다. 우리들이 얼크러진 삶의 실타래마저 정연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또한 때묻고 탁해진 우리들의 마음과 눈을 순수한 빛으로 다시 채워준다. 그리고 더욱더 중요한 것은 언제나 새롭게 생성하고 변화하면서 운행하는 그들의 모습이다. 나는 지금껏 '자연이 낡았다, 자연이 진부하다, 자연이 질린다, 자연이 틀에 박혔다'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시 창작은 자연의 한 부분인 우리들에게서 점점 소멸해 가는 이러한 생명들의 참모습을 되살려 놓는 작업이다. 즉, 잃어버리거나 망각해 가는 우리의 참 본질을 되찾는 일인 것이다.




 시를 쓰는 세 단계


 영국의 시인이자 시론가인 루이스가 쓴 <젊은이를 위한 시>라는 책을 참고하여 이 형기님은 시를 쓰는 단계를 다음과 같이 3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1. 첫 번째는 '시의 종자'를 얻는 단계


 '아, 이거 시가 되겠다' 싶은 인상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 있으면 시의 종자가 될 수 있다. 이 종자는 반드시 노트에 적어야 한다.

 그리고 당장 한 편의 시로 만들려고 서두를 것은 없다. 시를 쓰려고 서두르면 상상력이 종자 자체에만 얽매어 표현이 단조롭고 내용이 빈약한 시가 되기 때문이다.

 또 시의 종자를 노트에 적는 것이 중요한데 시의 종자를 노트에 적지 않으면 완전 히 까먹어 종자가 싹터서 자랄 수 없는 멸실(滅失)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노트에 꼭 적어 두어야 한다. 노트가 곧 시의 종자의 생명력을 보증하는 비망록이라고 볼 수 있다.


2. 두 번째는 종자의 성장과 시적 사고를 하는 단계


 다음에는 그 종자가 시인의 정신 내부에서 성장하는 단 계에 접어들게 된다. 종자의 성장은 며칠 동안 속성(速成)으로 자랄 수도 있고, 몇 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성장이 느리다면 수 년 동안 시를 몇 편 쓰지 못 할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갖지만 우리 속에 자라는 시의 종자가 하나일 수 없다.

 여러 개의 종자가 동시에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의 종자가 혼자 힘으로 소망스럽게 쑥쑥 자란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제대로 싹틔우고 자라게 하려면 정성어린 노력이 필요하다. 전 날 쓴 노트를 펼쳐 그 종자를 보며 거기에 자신의 상상력을 가미하게 되면 성장과 발전의 단계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서정주 님은 <국화 옆에서>라는 시를 쓰고 나서 이런 말씀을 그의 자서전에 남겼다.

"내가 어느 해 새로 이해한 이 정밀한 40대 여인의 미의 영상은 꽤 오랫동안 -아마 2-3년 동안 그 표현을 찾지 못한 채 내 속에 잠재해 있었다가 1947년 가을 어느 해 어스름 때 문득 내 눈이 내 정원의 한 그루의 국화꽃에 머물게 되자 그 형 상화 공작이 내 속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서정주, <시작 과정>에서



3. 세 번째는 구체적인 언어 표현 찾기 단계


 이 단계에 이르면 시를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 시를 쓰려고 할 때는 가장 적합한 표현의 언어를 찾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신을 집중해도 척척 풀리지 않을 때, 시인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이를테면 뜰을 거닐거나, 목욕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아니면 침대에 누워 명상에 잠긴다.

 <국화 옆에서>를 쓴 서정주 님의 말을 빌리자면 몇 시간 누었다, 앉았다 하며 비교적 쉽게 1-2연을 썼고, 마지막 연은 좀처럼 생각이 안 나서 잠 자버리고 며칠 동안 그대로 묵혀두었다가 완성했다고 한다. 서정주 님도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국화 옆에서>를 완성했는데 하물며 시의 초심자의 경우는 어떤 자세로 시를 써야겠는가? 그러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해도 작업의 결과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되면 그로써 고통은 절로 보상된다.

 마지막 단계에 하나 더 붙인다면 퇴고(推敲)이다. 초고를 1주일 정도 설합에 넣어 두었다 꺼내면 자신의 시라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 때 초고(草稿)를 다시 검토하면 완성된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감상용 시 두 편과 수필 두 편


                개망초 그 편한 꽃길


 달빛이 유난히 밝은 날입니다.

길게 강을 따라 이어진 둑길은 두고 온 고향처럼 가깝고도 멀어 보였습니다.

그 길을 따라 개망초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마치 하늘에 흐르는 은하수가 이 길로 내려 흐르는 것 같습니다.

보름달의 부드러움도 있지만 그 달빛을 받아 부드러워진 강물과 그 강물을 따라 하얗게 이어진 꽃들과의 동행, 그리고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이루는 자연의 합창이 어우러져 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이런 길을 걷노라면 나도 자연의 하나가 되어 마음이 편해집니다.

세상의 온갖 걱정과 근심들 훌훌 흐르는 강물에 던져버리고 물 따라 꽃길 따라 흐르고 싶습니다.

 강변의 키 큰 미루나무 잎사귀들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웃음을  나게 웃고 있습니다.



              그리움이란 보석상자


어릴 때 딱지치기를 해 본 사람은 딱지에 대한 애착을 기억합니다. 하루종일 동네 어귀에 모여 오른 팔이 욱신대도록 딱지치기를 하다보면 겨울 골목은 후끈후끈 열기로 달아오르고 어느새 하루해가 저물어 갑니다. 지금 생각하면 하잘 것 없는 딱지 한 장에 목숨 걸 듯 애쓴 걸 생각하면 우습기도 합니다. 딱지 몇 장 잃은 날의 기분과 손아귀가 비좁도록 딱지를 많이 딴 날의 기분은 아무도 모릅니다. 저녁이 되어 아무도 몰래 감추어 둔 나만의 상자에 잔뜩 쌓인 딱지를 바라보는 즐거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딱지란 따는 즐거움도 있지만 몰래 보는 즐거움도 쏠쏠합니다. 마찬가지로 보석도 치렁치렁 몸에 치장을 할 때 보다 상자 속에 넣어 두고 가끔씩 들여다보는 재미가 더 괜찮습니다.

누구나 가슴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을 그리움하나는 있겠지요? 그 대상은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전 이 그리움도 보석과 같다고 믿습니다. 어떻습니까?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나만의 그리움은 마음의 보석이 아닐까요.

 이것이 넉넉한 사람은 부자입니다.

 그리움이란 보석 상자를 몰래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어떤 보석의 치장으로 얻을 수 없는 아름답고 진솔한 향기가 내 안에 소록소록 넘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행복해집니다. 오늘도 막연한 외로움이나 기다림이 내 마음을 노크하면 몰래 그 상자를 꺼내봅니다. 어쩌면 그 상자 안에서 당신의 환한 미소가 또 다른 향기로 폴폴 날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초라해 보여도 너무나 뜨거운

 

 추석을 하루 앞둔 날. 문화회관 쪽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우연히 한 행사장을 만났습니다. 무대를 가로질러 커다랗게 ‘거리 예술제’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곳에 거리예술 한마당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오후 4시쯤이어서 햇볕은 매우 따가웠지만 출연진들이 열심히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문화회관 옆 마당엔 관객이라고 해야 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만큼이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관객 중에는 공연을 준비하는 낯익은 스텝과 공연을 준비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내일이 추석. 그래서 모두들 들뜬 명절 분위기와 또한 자기 일에 바쁜 시간임에도 이들은 주민들을 위해 ‘거리 예술제’를 기획하고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사회자의 멘트로는 본 공연은 저녁 7시인데 그래도 이런 공연을 찾아 주는 관객들이 있어 리허설 겸 공연을 하고 있노라 했습니다.

 맑은 가을 하늘로 금방 흩어 질 것만 같은 공연을 보면서 ‘예술은 참으로 외로운 작업이지만 예술은 예술을 공유하는 이들로 인해 아름답게 꽃피우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땀을 흘리며 진지하게 공연하는 그들에겐 한 사람의 관객이라도 자신들의 의도에 동참하는 이가 있다면 만족하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그 표정은 그 어떤 보람된 일을 할 때 보다 진지하고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대낮이라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조명도 그렇고 공연의 규모가 자칫 초라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TV에 자주 등장하는 어느 화려한 무대보다 더 뜨겁고 감동적인 공연이었음을 온 몸으로 느끼며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기분 좋은 추석 하루 전이었습니다.


            


           가로수


        어깨를 건드린다 아는 체하며

        돌아보니 살며시 등을 기대는 가로수

        ‘쉬었다 가렴’

        푸른 물소리로 말을 건넨다.

        그렇구나

        숱하게 이 길을 오갈 때 마다

        나무는 나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구나

        등으로 전해지는 물소리

        하늘엔 땡볕이 타고 있는데

        기다리고 있었구나 나무는

        푸르게 그늘을 만들며.


                 8. 후포(2)

         후포에는 늘 비린내가 납니다.

         등줄기 거친 곰솔의 이파리에도

         해풍에 춤추는 봄보리 푸른 물결에도

         바다가 하늘 끝에서 붉은 해를 밀어 올릴 때나

         서산이 깊은 가슴에 다시 품어 안을 때도

         파도는 비린내를 몰고 이곳으로 달려옵니다.

         후포 사람들은 비린내를 좋아합니다.

         번뜩이는 생선의 비늘이나

         자판에 앉아 횟감을 치는 아주머니 치마폭

         푸른 물에 손 잠그는 아이들의 손바닥에도

         늘 살아 있는 비린내

         비린내가 넘칠수록 후포 사람들은 신이 납니다.

         그래서 후포에 다녀 온 날은

         내 몸에도 오래도록 비린내가 납니다.


            달을 향하여

        

         지천명의 나이에도

         눈감으면 꽃이 핀다

         낡은 육신 저 편에서

         타오르는 아지랑이

         마음은 세월의 강을

         매일 매일 건너고

         덮어도 눌러도

         솟구치는 건 상사이어라

         가슴 속 깊이 파고

         묻어 보고 또 묻어도

         어쩔거나 청명한 날이면

         절로 우는 에밀레종을

         흘러간 스무 여섯 해

         강물을 거슬러 보니

         주름진 작은 산 위에

         뜨고 지는 달 하나 있어

         밤마다 벙그는 꽃

         달맞이로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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