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산문

춘정일기(春情日記)

빛마당 2011. 4. 8. 12:18

 

 

258. 춘정일기(春情日記)

2월 5일

고드름 달렸던 처마 끝에 바람이 시립니다. 바람이 하는 말들이 아직은 칼칼합니다. 입춘(立春)이라고 말 하지만 앞산의 이마는 하얗고 골목길 담 아래도 잔설이 응달에 갇혀 달아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문풍지를 떼 내고 창문을 열기엔 용기가 필요하네요. 산수유 가지에 걸린 하늘은 멀리 있습니다.


3월 20일

 입춘첩(立春帖)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더니 이내 떨어진 창호지 한 쪽이 떨리며 종이 피리를 붑니다. 봄이 가까이 왔다는 바람의 전갈입니다. 산수유 가지에 이름 모를 텃새 한 마리 꽁지 깝싹 대며 앉았습니다. ‘빗-, 비비빗-’ 새소리 떨어지는 곳에 밤잠을 설친 나뭇가지들의 눈이 통통 붓고 있습니다.


3월 28일 월요일

 산수유 꽃망울이 노랗게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하나 둘씩 터뜨리기 시작합니다. 바싹 마른 가지에 20-30송이씩 무리지어 핍니다. 우산을 펼친 듯 낙하산을 매 단 듯합니다. 한나절 만에 나무 전체가 노란 빛으로 출렁입니다. 우리 집 마당에서는 가장 먼저 핀 꽃입니다. 비로소 봄이 마당을 밟고 선 것 같습니다.


3월 30일 수요일

 현관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서자 아침 해가 환하게 맞아 줍니다. 어디선가 윙윙대는 벌들의 날개 짓이 요란합니다. 석류나무 주변에서 겨우내 추위를 이긴 회양목들이 내는 소리입니다. 긴 겨울 추위에 파란 콧등이 빨개지도록 참고 앉았던 놈들입니다. 낯빛이 언제 풀어졌는지 청정하면서도 윤기가 돌더니 하늘 오르려는 듯 저리 윙윙대는 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꽃들은 벌써 피었는데 이파리와 꽃 색이 너무 닮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내가 미안합니다. 산수유에 이어 도착한 봄소식인 것을..


4월 2일 토요일

 마당의 잔디는 아직 긴 잠에서 깨지 못하는데 성급한 잡초들이 고개를 내밉니다. 잡초를 뽑는 일은 이때가 알맞지요. 호미를 들고 앉았습니다. 언제 숨어있었는지 이름도 모를 풀들이 먼저 일어나 앉았습니다. 쌀알 같은 꽃들이 앙증맞게 나를 보며 웃고 있습니다. 호미질을 하려다가 그만 둡니다. 큰 돌 주변에 앵초가 막 고개를 들추고 나왔는지 연두 빛 이마에 땀이 맺혔습니다. 한결 느슨해진  바람이 솔솔 부채질을 해댑니다. 앵초는 나오자마자 이마 끝에 보랏빛 윙크를 합니다. 눈길 주지 않은 곳에 매발톱, 꿩의 다리들이 기지개 켜는 소리가 들립니다. 담장 너머로 기웃대던 진달래 가지에 분홍 웃음을 머금기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심은 매화나무 연한 가지에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 하얀 꽃이 이슬처럼 달렸습니다. 가까이 다가앉으니 내 온 몸을 가득 채울 만한 향기로 취하게 합니다.


4월 6일 수요일

 창문이 환했습니다. 진달래가 분홍빛 노크를 하고 있습니다. 30년 전 뒷산에서 두 그루 옮겨 심은 겁니다. 산이 그리운지 좀처럼 나와 눈 맞춤 하기를 싫어하던 녀석입니다. 철쭉 네 그루, 화살나무 두 그루와 함께 새집을 지으면서 옮겨 심었는데 가장 낯 가리를 하는 놈은 진달래였습니다. 적응을 하지 못하고 끙끙대기를 두 해 정도 하더니 포기를 했는지 꽃을 피우더군요. 그런데 꽃 색이 너무 창백해 보기에도 안쓰러워 봄 내내 나도 미열이 있는 몸살을 했습니다.

 이젠 밑둥치가 실하게 자라 남쪽 담장을 훨씬 넘기고 섰습니다. 진달래가 가득하니 봄도 가득합니다. 햇살을 쪼아대는 새소리도 분홍빛입니다.


4월 8일 금요일

 간밤에 봄비 내리더니 아침이 해맑은 얼굴로 다가왔습니다. 만개한 진달래 그 아래 우우 소리를 내며 잎을 말아 쥐고 솟는 둥글래 새싹들이 싱그럽습니다. 제 철인 양 화살나무 연한 잎은 푸석한 가지를 덮어가고 진달래 꽃 지기를 기다리는 듯 철쭉도 꽃봉오리를 부풀리고 있습니다. 명자화 파란 이파리 사이사이로 웃음을 꼭꼭 참는 빨간 입술들이 하르르 웃을 채비를 합니다. 감나무 사이 백목련 한 그루, 아주 느긋한 몸짓으로 하늘 향해 걸어둘 꽃등을 만지작거리는데 봄비 내렸으니 잘 자라 넉넉한 꽃 사과까지 꽃을 피우면 우리 집은 그대로 꽃 대궐이 되겠지요.

 내 몸에도 계속 물이 오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자판을 두드리는 손길도 빨라  졌습니다. 생각의 새싹들이 돋아나나 봅니다. 나는 지금 봄의 한 가운데 서 있으니까요.

2011.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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