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산문

257. 봄날, 잠에서 깨어난 상주읍성

빛마당 2011. 4. 2. 16:26

257. 봄날, 잠에서 깨어난 상주읍성

 꽃샘추위가 옷자락 사이로 머뭇거리더니 오늘은 화창했습니다. 왕산(王山)으로 가는 길에 아지랑이가 고물고물 차창으로 매달립니다.

 오늘은 왕산 주변의 『상주읍성 관아지 발굴조사(尙州邑城官衙址發掘調査)보고』가 있는 날입니다. 읍성의 일부분이긴 하지만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중요한 현장이기에 마음은 이미 풍선을 달았습니다.

 1912년에 성첩(城堞)과 문루(門樓)를 모두 헐어 시가지와 도로를 만들고 1924년 남문인 홍치구루(弘治舊樓)마저 훼철 된지 99년의 세월. 근 10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지만 흔적조차 사라진 상주읍성. 그 긴 세월을 원형 잃은 왕산(王山)만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사라진 역사의 아픈 기억을 추억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영상을 통해 설명을 듣고 현장을 둘러보면서 설명을 들었습니다. 왕산 북쪽의 도로 자리와 문헌상에 나타난 공방(공고) 터, 두 개의 연못자리를 확인하면서 100년 동안 땅 속에서 잠을 자고 있던 역사의 실체들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는 소리를 듣는 듯 했고, 아울러 돌 하나 깨어진 그릇 하나에도 역사의 자취와 숨결은 물론 새로운 생명이 살아나는 듯 했습니다.

 역사에 기록된 상주읍성(尙州邑城)은 왕산(王山)을 중심으로 평지 석성(石城)입니다. “신라 31대 신문왕 7년(687) 다시 사벌주(沙伐州)를 설치하고 성을 쌓으니 주위가 1,109보(삼국사기 권 34 지 제3, 지리1)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때 처음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상산지(商山誌)는 “둘레가 1,549척이고 높이 9척이며, 성 안에는 샘이 21개와 못이 2곳 있고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이 성을 14개월이나 점거하면서 성 둘레에 10척이 넘는 호를 파고 성 밖 서남쪽에 토성을 쌓았으니 그 터가 남아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상주읍성이 1592년(선조 25)임란 이후 황폐하여 성 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1869년(고종 6)10월 22일 도임한 목사 남정학(南廷鶴)이 수축하다가 1870년 후임 목사 민치서(閔致序)가 홍치구루(弘治舊樓)를 비롯한 4면의 성을 고쳐 쌓았고, 다시 1871년 9월 18일 목사 조병로(趙秉老)가 계속 수축하였다고 하는데 성안에는 내아 관청을 비롯한 태평루, 군재청, 사령청과 같은 건물들이 즐비하게 있었다고 했습니다.

 고지도(古地圖)상에도 분명히 나타난 이러한 읍성의 자취들이 불과 100년 안에 흔적이 없도록 만든 것은 누군가의 고의적인 만행(蠻行) 아니었을까 하는 억척도 해 봅니다.

 지난 3월 26일 토요일에는『沙伐國歷史保存會』창립총회가 열렸습니다. 이는 천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고장 상주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역사인식으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오늘 기지개를 켜며 다시 살아 온 상주읍성의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상주의 꿈을 상상하면서 바라기는 읍성의 일부가 아닌 더 중요한 부분까지 실체를 파악하는 작업이 계속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2011.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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