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산문

병풍산에서

빛마당 2011. 6. 3. 13:58

 

 

259. 병풍산(屛風山)에서

 2011년 5월 5월 21일 토요일. 상주시 병성동 산 20번지. 병풍산엘 올랐습니다. 『사벌국역사보존회(沙伐國歷史保存會)』회원20여명과 상주박물관 학예사도 동행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병풍산에는 낙동면 성동리 쪽을 제외해도 862기가 넘는 고분이 집중되어있다는 지표조사 결과 보고입니다.

 상산지(商山誌) 고적조에는 “병풍산에 고성이 있는데 사벌(沙伐) 왕이 쌓은 것이라 전해온다. 성 안에는 못 한 곳과 우물 세 곳이 있고 성의 동쪽 밖으로는 백 길이나 되는 낭떠러지가 있어서 성안의 물이 마르면 수차(水車)로 강물을 끌어 오렸다고 한다. 남쪽 수리 되는 곳에 염창의 터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고,  “사벌국 고성이 병풍산에 있는데 성 옆에 높다란 언덕이 있으니 예로부터 사벌 왕릉(沙伐王陵)이라 전하고 신라 말 견훤의 부 아자개가 이 성을 점거하고 있었다 한다.”도 있으며 고려사에서는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이성에 머물다가 918년 9월에 왕건에게 귀순했다”는 기록도 확인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병풍산성이 신라 말 이전에 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을 오른 지 불과 5분도 안되어 능선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고분을 볼 수 있었습니다. 큰 것은 직경이 20M 이상인 것도 여럿이었고 이 외에도 크고 작은 봉분들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분들은 도굴당한 상처들만 안고 있었습니다. 어떤 고분은 석실 모습이 보이기도 했고 학예사가 들어 가 설명을 할 수 있을 만큼 파헤쳐 진 것들도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862기의 고분이 하나같이 도굴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일제시대부터 1980년대까지 이곳이 전국 도굴꾼들의 현장 실습장소 이었다니 참으로 할 말을 잊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양의 고분이 병풍산을 중심으로 존재하고 있는 곳이 많지 않으며 비록 도굴은 되었다 해도 봉분의 상태가 온전히 유지되어 있는 곳도 드물다는 것입니다. 이 고분들을 통해 이 지역이 고대 성읍국가시대는 물론 삼국시대와 그 이후까지 대단한 세력들이 살고 있었는지를 나타내는 귀중한 증거라고 학예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을 통과한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그나마 도굴되지 않은 몇 기의 고분이 발굴되었고, 이 유물이 상주박물관에 전시되면서 삼국시대와 그 이 후의 역사를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는 것입니다.

 불과 2시간 정도의 병풍산 탐사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도대체 나와 우리 선조들은 무엇을 했는지 부끄러움이 앞섰습니다. 비록 때늦은 감은 있지만 오늘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들이 온통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내려오다 다시 되돌아 본 병풍산. ‘아직 늦지 않았어, 아직 늦지 않았는데...’라고 애타게 호소하는 862기의 고분에서 들리는 원망 섞인 애원이 뿌리박고 살아온 한심한 후손들에게 들리는 듯 했습니다.

2011.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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