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산문

문패

빛마당 2011. 6. 3. 14:05

 

261. 문패(門牌)

 부동산 경기가 바닥을 치고 미분양 아파트로 인해 골치가 아프다고 하지만 서민들의 내 집 마련은 참 힘들다고들 합니다.

경쟁 하듯 높이 솟아오르는 오피스텔과 아파트의 숲에서도 집 없는 사람들의 서러움은 건물의 높이와 반비례해서 시름은 더 깊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결혼 전 할아버지를 모시고 조그마한 초가집으로 분가를 했지만 딱히 내 집이라 할 수는 없었는데 1973년에 결혼을 하고 1985년에 지금의 집을 지었으니 내 집다운 집을 마련하기까지는 12년이 훌쩍 지난 후였습니다.

그 때 내 손으로 달았던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문패에 대한 감격을 잊지 못합니다.

 그러나 요즘 그 숱한 아파트를 둘러봐도 문패가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이 집은 내 집이요’라고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문패일진데 아라비아 숫자가 문패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 또한 자신의 이름 석 자가 타인에게 드러나는 것이 사생활 침해라는 개인주의 산물이 아닌 가해서 아파트를 방문할 때마다 씁쓸한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사를 간지 15년이 지났지만 지난 해 5월, 옛 처가를 방문했습니다.

처외삼촌이 살던 좁디좁은 골목을 지나 숨 가쁘게 올라간 그곳엔 고즈넉이 엎드려 있는 와가 두 채에 아카시아 꽃향기가 가득했습니다.

군데군데 기와가 떨어져 내렸고, 뽀얗던 회벽은 거미줄이 꽁꽁 매고 있었지만 녹슬어 기울어진 파란 대문 문설주에 여태까지 달렸던 문패 하나. 뽀얗게 먼지를 쓰고 우릴 마지해 주고 있었지만 가슴 설레는 반가움은 더했습니다.

얼룩진 먼지를 닦아내는 아내의 손이 한참이나 파르르 떨렸습니다.


 신사 터 오르내리던/ 아흔 아홉 계단이/ 노곤한 허리를 길게 누이고 /그 아래/자리 잡고 앉은/산 밑 작은 집//5월이면 지천으로 피던 아카시아가/온통 집을 향해 향기로 채우는데//어쩌다 둘러 본/안동시 옥정동 99번지 옛집//팔남매 키우느라 오죽했을까/기왓장 군데군데 떨어져 내리고/분칠한 회벽은 빛이 다 바래/우렁이 껍질처럼 비어 있는 집//쓰러질 듯 기운 대문 문설주에/아직도 단단히 매달린 문패 하나/오늘도 옛 집을 지키고 있다//귀 기울이면/ 발 하나 디딜만한 좁디좁은 마당에서/콩나물처럼 가슴 맞대며 자란 팔남매/요란한 발자국 소리//가슴에만 꽁꽁 묻어 두었는지/문패 속에서 쏟아져 내린다.

                                                                         졸시 『문패』중에서

돌아오는 길, 우리 내외는 한 참이나 말이 없었지만, 빛바랜 채 집을 지키고 있는 그 문패로 인해 참으로 많은 것을 가슴에 담아 올 수 있었습니다.

2011.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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