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산문

장판각의 '마구리'

빛마당 2011. 7. 9. 10:01

 

 

 

265. 장판각의 ‘마구리’

 한국국학진흥원 가는 길에 내내 비가 내렸습니다. 우리 전통문화 중 유교문화의 다양한 자료와 풍부한 볼거리를 전시, 보관하는 여긴 민족문화의 산실 같은 곳입니다. 더욱 이곳 장판각은 우리나라 기록문화의 진수인 전통 목판과 현판을 기증 또는 위탁받아 보관하는 곳으로 현재 약 7만장, 앞으로 10만장이 넘게 수집하여 유네스코기록유산으로 등록 하려는 야심찬 꿈을 지닌 공간입니다.

 장판각에 들어가자 빼곡히 쌓여 있는 목판(책판冊版, 현판懸板, 도판(圖板), 서판(書板), 기판(記板), 능화판(菱華板)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향(墨香)에 취해나도 모르게 수 백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습니다.

 담당자가 열심히 설명을 하는 동안 나는 웬일인지 글자가 새겨진 판목보다는 판목의 양쪽을 막고 있는 ‘마구리’쪽에 내 관심이 쏠렸습니다.

 마구리란 ‘길쭉한 물건의 끝 쪽 머리에 대는 물건’을 말하는데, 대부분 마구리는 말끔하게 마무리 되지 않고 투박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마구리의 역할은 참으로 소중했습니다. 목판을 손쉽게 들 만질 수 있는 역할, 목판과 목판이 맞부딪힐 때 판면의 손상 방지, 목판과 목판 사이의 원할 한 통풍, 이로 인한 변질, 뒤틀림, 트임 방지, 그리고 목판을 진열 보관했을 때 책의 제목, 권차(卷次-책의 해당 권수), 장차(張次-책의 쪽수)등을 마구리에 표시합니다. 마치 도서관의 분류기호처럼 판각의 내용을 찾기 쉽게 말입니다.

 판목은 주로 단풍나무, 가래나무, 산벚나무, 박달나무, 감나무, 고로쇠나무와 같은 중경질의 재료를 활용했지만 마구리는 흔한 소나무입니다. 하지만 쓰임에는 어느 것 하나 귀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목판에서도 판면에 새겨진 각자(刻字)가 주인공이라면 이 외에 미비(眉批-별도의 주석부분), 광곽(匡郭-판면을 구성하는 외곽 테두리부분), 묵계자(墨罊子-인용되는 책이나 주석가의 이름처럼 특별히 표기할 사항의 음각처리부분), 계선(界線-본문의 각 줄 사이의 경계선), 판심(版心-목판의 중심부), 권차, 장차, 와 같은 것은 조연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가장 안전하게 보호, 보존, 관리하는 일은 바로 하찮은 이름을 가진 마구리의 몫이었습니다.

 장판각을 나오면서 생각이 깊어 졌습니다. 내 삶의 부분 부분에 마구리의 역할을 과소평가 하지 않았는지, 그래서 체면이나 위신 때문에 정말 해야 할 일에 머뭇거리거나 소홀하지나 않았는지....

 물끄러미 바라보는 산 아래, 저만치 내려앉은 안동호에서 한 무리의 물안개가 국학진흥원 솔숲을 지나 내 가슴 속으로 환상처럼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2011.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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