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성지순례

성지순례기

빛마당 2011. 12. 20. 23:38

성지 순례기. 1

 

때 : 2011년 12월 6일-12월 15일(9박 10일)

곳 : 이집트-이스라엘

 

이집트를 향해서

 

 

2011년 11월 6일 화요일

아침에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오늘 성지순례 첫 출발 날인데 이곳의 날씨가 어수선하다.

“삐릭-”

휴대폰으로 문자가 파란 빛을 내며 들어온다.

“현지 날씨 쾌청. 순례에 아무 문제없음.”

인터넷 전문가 구의숙 권사의 안심 문자다.

오후 3시 20분. 모두 짐을 꾸리고 상주시외버스 터미널에 모였다. 이미 강남고속터미널 표를 김현숙 권사가 미리 예약을 해 두었다.

3시 30분 좌석번호 1번-11번까지 우등버스에 올랐다. 오후 하늘은 맑고 우리들의 마음도 모두 맑았다. 정도철 집사님과 김선식 집사님이 우리 여정을 위해 찬조를 해 주셨다. 감사한 일이다.

차안에서 떠들 수는 없지만 모두들 저마다 다가올 순례의 길에 대한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버스는 6시에 강남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 내의 한식당에서 청국장 한식으로 든든히 채웠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공항리무진을 타기위해 11명의 순례자들이 가방을 끌고 나섰다.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 앞마당에 11대의 가방의 소리가 요란하다. 모두들 시끄러웠는지 신기했는지 바라보고 있다. 몇 번을 물어 인천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정류장을 찾아 버스에 올랐다. 친절한 기사 아저씨. 우리 모두 전세를 낸 차와 같다. 버스엔 우리 11명밖에 없으니...

7시 40분이 되어서야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남은 시간에 모두 아시아나 항공사에 들려 마일리지 확인과 카드 재발급을 받았다.

<공항에 앉아서 모두들 즐거웠다.>

10시에 이랜드 여행사와 동행하는 분들과 미팅이 있는 시간이다. 만남의 장소는 G 21 창구.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지만 여행에 들뜬 마음들에겐 지겨움이 없었다. 미지에 대한 기대감이라고 할까? 모두 바지를 걷어 올리고 ‘캐토톱’을 붙이기에 여염이 없다. 장거리 비행기 여행에는 ‘캐토톱’을 붙이면 무릎이 훨씬 아프지 않단다. ㅎㅎㅎ

 

이랜드 이규래 주임이 일찍 나왔음에도 아무 표시가 없어 우린 모르고 사람들을 기다렸다. 시간이 가까워 오면서 사람들이 모인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징이 서로 인사하기를 쉽게 하지 않는다. 혹여 동행이 아닐까 해서 확인하면 그제야 우리 일행임을 알고 반가워했다.

10시가 훨씬 넘어서야 서로를 확인하고 이름표와 짐들에 태그를 붙였다. 수속을 하고 우리는 마침내 아랍에미레이트의 아부다비 공항을 향해 EY 873 비행기에 올랐다. EY 873편은 Etihat 항공사 소속이다. 내 자리는 35H. 인천국제공항에서 아부다비까지는 약 10시간 40분이 소요된단다. 한국시간으로 00:45분. 어둠속을 이륙한 비행기는 하늘을 난다.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지 무두들 뒤척이고 있다. 기내식을 받고서야 한밤중임을 안다. 첫 기내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모두 잘 드신다. 우리가 기내식에 즐거워하고 있는 그 시간에 새날은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가 타고 온 비행기 모습>

 

 

2011년 12월 7일 수요일

한국시간으로 11시 30분. 아부다비 현지시간으로 06:50분 아부다비공항에 도착을 했다.

아부다비 공항과 우리 인천공항과는 5시간의 시차를 가진다. 그러니 우리나라는 오후 11시 50분경이 되는 셈이다. 아부다비공항은 이집트로 가기위한 경유지이다. 다시 연결편인 EY 653으로 갈아타고 이집트를 향해 출발했다. 내 좌석 번호는 36K. 비행기 뒷부분이다. 가는 시간 약 4시간 이 소요된다. 9시 45분에 탑승을 마치고 10시 20분에 비행기가 이륙을 했다.

11시 40분쯤 아침을 겸한 기내식을 먹었다. 아부다비에서 카이로까지 가는 비행기 여정은 참으로 신기했다. 아라비아 반도를 가로지르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그대로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사막의 연속일 뿐이다. 눈이 부실 정도의 분홍빛 사막은 아부다비를 출발하여 카이로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사막 한가운데 수없이 많은 동심원들이 펼쳐져 있었다. 나중에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사막 한 가운데 석유를 저장하기 위해 만든 시설이란다.

 

                     <하늘에서 본 사막에 그려진 동그라미들>

2시 15분 카이로에 도착을 했다. 카이로와 아부다비는 또 시차가 2시간이 더 난다. 현지 시간으로 12시 35분 카이로에 도착을 했다.

카이로에 오는 도중 유일한 파란색은 홍해 바다였다. 홍해는 시나이반도를 사이에 두고 마치 양의 뿔처럼 생겼다. 우리가 첨 본 바다는 시내 반도 동쪽 홍해인 셈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홍해 바다>

 

동쪽 홍해를 지나자 시내 반도가 보인다. 시내 반도 아래쪽에 거대한 산맥이 보인다. 여기가 아마도 시내산 일 꺼라고 생각했다.

 

<카이로 국제공항을 나와서>

 

 

공항에는 현지 이집트 가이드인 강은영 집사님이 마중을 나오셨다. 버스에 오른 후 신성우 목사님이 도착 기도를 해 주셨다. 우리를 위해 수고해 주실 기사는 아부라임이다.

여기는 모두 돈이 해결해 준다. 생수 두병에 1달러, 화장실도 유료가 대부분이다. 여기에 통용되는 것은 US 달러이다. 화장실은 두 명이 1달러 일 경우도 있고 5명이 1달러일 경우도 있다. 이집트는 파운드라는 돈을 사용하는데 1달러는 약 6파운드에 해당된다.

 

참고

위치 : 아프리카대륙 북동부. 수도 : 카이로. 환율 1이집트. = 192.31원. 언어 : 아랍어. 인구 : 78,866,635명 (2010). 면적 : 1,001,450㎢, 기후 : 건조성기후. 종교 : 이슬람교 90%, 콥트교회 9%. 종족 : 이집트인 98%, 베르베르인, 누비아인. 정치체제 : 공화제. 의회형태 : 단원제. 국가원수 : 대통령. 정부수반 : 총리. 나라꽃 : 수련

 

카이로 국제공항을 나온 우리는 올드 카이로 향했다. 카이로에서 약 35km의 거리이다.

여기에 아기예수 피난교회(성 시지우스콥틱교회)와 모세기념회당(벤 엔즈라 회당)이 있는 곳이다.

이집트의 건물은 대부분 벽돌 그대로이다. 그 이유는 비가 오지 않는 기후와 황사로 인해 외부를 칠해야 할 이유가 없단다.

이집트는 교육제도가 우리와 같단다. 카이로에는 13개의 국립대학이 있는데 이 가운데 알 아자르 대학은 10C(978년)경에 설립된 아주 오래된 대학이다. 아이샴스 대학에는 한국어과가 설치되어 있는데 100명 정도가 수학을 하고 있고 이 중에 10명 정도는 한국어에 능통하단다.

현지시간 2시에 점심 식사를 위해 식당에 들렸다. 한국식당이다. 가야식당(GAYA). 이집트에 와서 처음으로 먹는 한식이다. 이곳 마하디에는 한국식당이 6개가 있단다. 그리고 이곳에 기독교인이 많은데 대부분 콥틱교회(이집트 정교회) 출신이란다.

 

콥틱교회 (Coptic Church)

콥트(Copt)란 말은 나일 계곡의 이집트 원주민을 지칭하는 [콥트인(Qubt)] 또는 [애굽토스]에서 유래되었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AD 260 ~ AD 340)에 의하면 마가가 말년에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복음을 전하면서 콥틱 교회가 시작 되였다는 것이다.

마가는 마가복음의 저자이며 바나바의 조카이며 사도 바울과 함께 전도 여행을 떠났던 전도자이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신 분이다.

AD 311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하기 전까지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콥틱 교회는 콥틱어로 번역한 신약성경을 사용하였다. 콥틱 교회는 성 마가를 그들의 초대 교황으로 부른다.

그러나 이 콥틱교회는 세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교회가 AD 451년 칼케톤(현재 터키지역) 종교회의에서 파문을 당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갈라져 나갔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수님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를 인정하나 콥틱 교회는 신성만을 인정하는 단성론(單性論)을 고집한 결과다.

오늘날 이집트에는 약 750만명의 기독교인들이 있다.

이중 90%가 콥틱교회 교인이며 이는 이집트 인구의 약 12%에 해당한다.

약 1.5%가 개신교도들이며 나머지는 카톨릭 교인이다.

 

우리는 먼저 모세기념교회를 들렸다.

모세 기념교회 (벤 에즈라 유대회당)

이 교회의 역사도 이러한 종교적 변화를 잘 나타내는 교회이다.

이 자리에 최초로 교회가 세워진 것은 BC 350년경 이었으며 이름은 예레미아 시나고그 였다. 그 후 로마제국에 의해 파괴되었고 AD 4세기경 미카엘 교회로 출발 한 이 교회는 이슬람 왕조 때는 회교당으로 사용 되다가 AD 1,115년 유대인 랍비 벤 이즈라가 구입하여 유대 회당으로 활용하였고 이슬람교와의 갈등의 지난 1,000년 동안 유대인 공동체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다.

이곳은 모세가 살았던 곳이며 출애굽 때 나일 델타 동남부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출발 장소이고 예레미아는(렘43장~47장) 느부갓네살 왕(BC 606~538)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이곳에서 설교를 하였으며 그의 무덤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 회당 대리석 기둥은 모세가 기도하던 장소이고 건물 뒤뜰에는 에크바 라고 불리는 샘이 있는데 모세가 사용 하던 것으로 추정한다,

카이로 콥틱 교회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보존도 잘되 있는 교회이다.

 

다음으로 들린 곳은 아기 예수 피난 교회(성 시지우스 콥틱교회)였다. 모세기념교회와 아기예수 피난 교회는 내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바깥에서만 찍을 수밖에 없었다.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간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5살 될 때까지(마2:13~14)이집트 여러 곳을 떠돌며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수님 일가가 최초로 거처하였고 이스라엘로 돌아갈 때에도 그곳에 살았다고 전하는 동굴위에 4세기경에 교회를 세웠다라고 한다.

아브 사르가(Abu Sarga)교회 라고도 불리는 이 곱틱 교회는 본당 옆으로 2개의 복도와 중앙에 지성소가 있고 12개의 기둥이 있는데 유다를 상징하는 기둥은 붉은 대리석 기둥으로 되어 있다. 이 교회 건물은 노아방주의 모형을 본 따 지어진 교회이다.

그 옛날 아기 예수가 어머니 마리아의 품에 안겨 이곳저곳 숨어 다니면서 고대 이집트 신들과 낯선 이국의 독경소리를 들으며 지내던 모습을 그리며 남다른 감회를 가졌다.

이곳 교회를 돌아보며 아기 예수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가 있었다.

 

<모세기념교회 옆에서>

 

<아기예수 피난교회 지하로 내려가는 길에서>

 

카이로에는 한인교회가 3개가 있단다. 충현교회, 소망교회가 세운 교회이며 감리교회에서 세운 교회가 있는데 감리교회가 세운 교회는 금요일에 예배를 드려 많은 교인들이 모인단다. 이런 한인교회가 여기에 존속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콥틱 교회의 영향이 미쳤기 때문이란다.

 

오후 6시 20분에 이집트 카이로에서의 하루 일정이 끝이 났다. 모두들 피곤한 육신을 끌고 하루의 안식처로 향했다. 우리가 묶을 첫 안식처는 그랜드 피라미드 호텔(Grand Pryamid Hotel)이다. 6시 50분에 호텔에서 현지식 뷔페로 저녁을 먹었다. 물 두병을 1불에 모두 구입을 했다. 그리고 1317호 차순희, 김신향, 구의숙. 1312호 최금자, 김명자. 1318호 박경숙, 김영래, 1322호 김현숙, 김일순. 1323호 김재수, 김성자. 이규래 가이드 1315호. 이규래 가이드가 방마다 다니면서 꼼꼼하게 시설을 안내하고 점검을 해 주었다. 9시 30분경, 모두 피곤했는지 서로 만나 이야기 할 시간도 없이 내일을 위해 취침했다. 이집트에서 하루 밤이 지났다.

 

<그랜드 피라미드 호텔을 배경으로>

 

<그랜드 피라미드 호텔을 배경으로>

 

 

2012년 11월 8일 목요일 날씨 맑음

이집트에서 둘째 날이다. 06시에 기상 6시 30분에 아침식사, 7시 20분에 출발 예정이란 가이드의 광고다. 06시에 기상하라고 했지만 모두 4시가 조금 넘어서 다 일어났나 보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걸 보면. 아침 식사를 마치고 키 반환하는 걸 잊었다. 차에 오른 후에 다시 기별이 와서 22호, 23호 키를 반납했다. 출발기도를 신성우 목사님이 해 주셨다.

“살람 알리꿈”이라는 이집트 말은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란다. 모두 현지어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본 후 이집트 박물관에 갈 예정이다.

7시 30분 기자의 피라미드를 향해 출발했다. 얼마 가지 않아 안개 속에 마치 전설처럼 나타나는 피라미드가 우리를 마지해 주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다가오는 피라밋>

 

우리 일행이 탄 버스 전면에 녹색 불이 들어온 곳에 화장실 표식이 그려져 있었다. 궁금해서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이 버스에는 화장실이 있단다. 그러나 극히 절박한 상황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누군가 화장실을 사용하게 되면 종일 모두에게 피해가 되기 때문이다. 화장실이 있는 버스. 신기했다.

 

김명자 권사가 화장실 변기에 한번 앉아 보았다.

 

 

* 나일 강 [Nile River]

세계에서 가장 긴 강으로 적도 남쪽의 고원지대에서 발원하여 아프리카 북동부를 지나 계속 북향하다가 지중해로 흘러들어가는 강이다.

이집트에서 나일 강의 강물을 관개용수로 처음 이용한 것은 강물의 주기적인 범람이 가라앉은 후, 거기에 남겨진 진흙에 씨앗을 심었을 때부터였다. 19세기가 끝나기 전 많은 댐과 급수시설이 완공되어 영구적인 관개농업이 가능해졌으며, 20세기 초엽에는 운하가 개축되었고 최초의 아스완 댐이 완공되었다(1902). 1959년에 착공, 1970년에 완공된 아스완 하이 댐(사드알알리)은 강폭이 550m이고 강의 양 옆에 험준한 화강암 둔덕이 있는 지점에 건설되었다. 이 댐을 통해 사람들은 나일 강의 연례적인 범람을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인공호수인 나세르 호가 생겨났다. 이 저수지는 댐의 상류 쪽으로 500km 이상 뻗어 있으며, 멀리 북부 수단까지 이어져 있다. 아스완 하이 댐은 연례적인 대홍수로부터 주민과 작물을 보호할 뿐 아니라 엄청난 전력을 생산한다. 한편 나일 강은 인력과 재화의 수송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수로이다. 총길이 6,650km, 유역면적 3,349,900㎢, 배수량 3,100㎥/sec.

 

 

버스가 서자 거대한 피라미드가 우리를 향해 막아서고 있었다. 오늘은 다행히 관광객들이 거리 많지 않은 편이란다. 여기가 바로 기자지역의 피라미드이다. 피라미드는 바로의 무덤을 말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육체가 죽은 뒤에도 영혼은 영원히 산다는 사후 세계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사후 세계를 위해 완벽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기자의 피라미드 [Pyramids of Giza]

나일 강 서안(西岸)의 바위고원에 세워진 제4왕조(BC 2575~2565경) 3개의 피라미드로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이다.

이중 가장 북쪽에 있는 가장 오래되고 큰 피라미드는 제4왕조 2번째 왕 쿠푸(그리스어로는 케오프스)가 세웠다. 대(大)피라미드라고도 하며, 밑변 평균길이 230.4m, 원래 높이 147m이다. 가운데 피라미드는 제4왕조의 8명의 왕 중 4번째 왕 카프레(그리스어로 케프렌)가 세웠고 각 밑변길이 216m, 원래 높이 143m이다. 남쪽 끝에 있는 마지막으로 세워진 피라미드는 제4왕조의 6번째 왕 멘카우레(그리스어로 미케리노스)의 피라미드로 밑변길이 109m, 완공 때 높이 66m였다. 3개의 피라미드는 내부·외부가 모두 고대에 이미 도굴당해 시체안치실에 있던 부장품들의 대부분이 사라졌다. 무른 흰색 석회석의 외벽도 거의 모두 벗겨져버렸기 때문에 피라미드들의 높이가 원래보다 낮아져 대 피라미드도 지금은 138m 높이에 불과하다. 가운데 있는 카프레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삽도(揷圖)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직도 석회석 외벽이 남아 있다.

쿠푸는 지금까지 인류가 만든 단일 건축물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옆면 경사가 51°52'이며 밑변은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향해 있다. 대 피라미드의 중심부는 황색 석회암 벽돌로 만들어졌고 지금은 거의 없어진 바깥벽과 내부통로는 그보다 고운 입자의 옅은 색조의 석회암으로 되어 있으며, 내부의 시체안치실은 커다란 화강암 덩어리로 만들었다. 이 거대한 건축물에는 1개당 평균 2.5t 무게의 돌 230만 개가 사용되었다.

쿠푸는 다른 두 피라미드와 마찬가지로, 기술적 정교함이나 공법에서 탁월한 걸작이다. 특히 그 어마어마한 규모와 사용된 돌덩어리들의 크기와 무게를 고려할 때 설계의 기하학적 정밀성이나 돌을 깎은 정확도는 감탄할 만하다. 아직 제자리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외벽 돌들은 무게가 16t까지 나가는 것도 있지만 이 외벽 돌은 물론 내벽까지도 고대 이집트를 비롯한 세계 어느 곳의 석조건축보다도 더 정교하게 연접되어 있다. 대 피라미드의 입구는 북쪽 측면, 지상 약 18m 위에 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대 피라미드를 짓는 데 20년이 걸렸으며 성인 남자 10만 명의 노동력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나일의 홍수로 들에서 할 일이 없을 때 피라미드 공사를 진행한 듯하다. 각 건조물은 원래 죽은 왕의 시신을 모신 피라미드와 이에 딸린 장제전(葬祭殿)과 장제전에서 나일 강 가까운 계곡에 있는 사원으로 통하는 경사진 둑길로 구성되어 있다. 각 피라미드 옆에는 다른 왕족의 무덤으로 쓴 보조 피라미드가 1~2개 있다.

대 피라미드의 남쪽 카프레 계곡 사원 부근에는 대(大)스핑크스가 있다. 바위산을 깎아 만든 이 스핑크스는 얼굴은 카프레 왕이고 몸은 누워 있는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길이는 약 73m, 높이는 20m에 달한다. 1925년 쿠푸의 둑길 상단 가까이에서 쿠푸의 어머니 헤테페레스 여왕의 장비(葬備)를 담고 있는 구덩무덤이 발견되었다. 돌이 들어찬 깊은 구덩의 밑바닥에는 여왕의 빈 돌널[石棺]이 제4왕조 장인(匠人)들의 탁월한 예술성과 완벽한 기술을 보여주는 가구와 보석들에 둘러싸여 있다. 3개의 피라미드 둘레에는 왕들의 친척이나 대신(大臣)들의 장지(葬地)로 사용된 '마스타바'로 불리는, 꼭대기가 평평한 장례용 구조물의 큰 분포지가 있다.

 

<피라밋과 스핑크스 앞에서>

 

스핑크스 [sphinx]는 이집트와 그리스의 미술 및 전설에 나오는 중요한 이미지로, 사자의 몸과 인간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신화적인 동물을 말한다.

전설상 가장 유명한 스핑크스는 보이오티아 테베의 날개달린 스핑크스로, 그것은 뮤즈가 가르쳐준 수수께끼(목소리는 같지만 발이 4개가 되기도 하고 2개가 되기도 하고 3개가 되기도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사람들에게 묻고 그 답을 요구하여 틀린 답을 말하는 사람을 잡아먹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고 한다. 마침내 오이디푸스가 정답(유아기에는 4발로 기고 자라서는 2발로 걷고 노년기에는 지팡이에 의지하는 사람)을 맞추자 스핑크스는 그 자리에서 자결했다. 이 이야기에서 스핑크스가 전지(全知)하다는 전설이 나왔음이 분명한데, 오늘날에도 스핑크스의 지혜는 속담이 될 만큼 유명하다.

미술품으로서 최초이자 가장 유명한 스핑크스는 이집트 기자에 있는 거대한 와상(臥像) 스핑크스로, 카프레 왕(제4왕조의 제4대 왕, BC 2575경~2465경)의 재위기간에 만들어진 것이다. 사자의 몸과 인간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스핑크스는 피라미드처럼 돌을 쌓아 만든 것이 아니라 석회암을 통째로 깎아 만든 것으로 길이 약 73m, 머리 폭은 4m에 이른다. 카프레 왕의 얼굴이라는 설도 있다.

스핑크스 앞에는 꿈의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출애굽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있다. 아멘호탭 2세의 둘째 왕자가 사막을 지나던 중 모래언덕 그늘에서 쉬다가 잠이 들었는데 ‘나를 덮고 있는 모래를 제거해 주면 이집트의 왕위를 주겠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왕자는 잠에서 깨어 모래를 제거했더니 1,000년 동안 모래아래 잠자고 있던 스핑크스가 나왔고 이어 그는 왕위에 올랐다. 투투모스 4세는 이 사건을 기록한 비석을 만들어 스핑크스 다리 사이에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꿈의 비석이다. 투투모스 4세는 본래 웨벤세누라는 형이 있었으나 갑자기 죽음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웨벤세누의 죽음이 출애굽의 10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장자의 죽음으로 인한 죽음으로 알려 저 주전 15세기 출애굽 설을 뒷밭침하는 자료가 된다.

 

<스핑크스 앞의 꿈의 비석>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둘러보고 9시 40분경에 버스에 올랐다. 어제 계획엔 이집트 박물관에 가기로 했지만 카이로 시내 대모로 인해 가지 못해서 박물관으로 향했다.

 

10시 30분에 박물관에 입장을 했다. 이집트 박물관은 1958년 프랑스 고고학자 A.마리에트가 카이로 교외의 부라크라는 곳에 설립된 후 1902년 카이로 중심부인 현지로 옮겨 개관한 곳이다. 이 박물관은 고대 이집트의 왕과 왕비의 무덤유뮬, 신전유물, 건축물의 일부, 장신구 등 약 12만점을 소장하고 있다. 1층에는 고왕국- 신왕국-후왕국-그리스 로마시대별로 전시되어있고 2층에는 가장 유명한 13개 전시실에 걸쳐 신왕국 18왕조의 11대 왕(주전 1334-1325) 투탕카멘의 무덤으로 유명하다. 이곳 내부는 사진 촬영이 할 수 없어 바깥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박물관 앞에서 기념촬영>

 

11시 40분까지 가이드의 이런 저런 설명을 들은 후 박물관을 나왔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가 경제적으로 잘 살지 못하는 이유를 가이드는 종교적인 이유라고 들었다. 다시 말하면 종교적인 신념이 경제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경로를 따라 본격적인 광야의 순례길에 접어 들었다. 카이로를 출발하여 시내 산에 도착하기까지 수르광야와 신 광야 그리고 시내 광야를 지나게 된다. 출애굽 40년의 광야생활을 묵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이제 우리는 스웨즈 운하를 향해 가고 있었다. 스웨즈 운하 가는 길 역시 끝없는 사막의 연속일 뿐이다. 이집트의 대부분은 사막이고 다만 나이강을 중심으로 한 주변에 농경을 할 수 있으며 꿈의 삼각주 지역에서 나는 대부분의 식량으로 전 국민을 먹이고 남는 다는 것이다. 사막에는 마치 말라 죽어있는 풀포기들이 오히려 사막 황량하게 만들었다.

박물관을 나와 사막 길을 달리다가 1시 40분쯤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이곳의 도시락은 한식으로 우리나라 도시락보다 크고 양도 많았고 반찬도 다양했다. 점심을 먹고 다시 달렸는데 갑자기 차들이 멈춰 서기 시작했다. 터럭화물자동차 기사들이 사막 한가운데 길에서 데모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약 50km를 돌아서 가는 수 밖에 없었다. 스웨즈 운하 주변 가까이 가자 농장들이 보이고 작물을 재배하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 인공관수를 하고 있었다. 2시 50분쯤 스에즈 운하 입구 휴게소에 들려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곳에서 우리 팀은 망고 쥬스와 비스켓을 사서 함께 나누었다. 망고 쥬스가 1.5달러, 비스켓 한 봉지에 2달러였다.

3시 15분에 휴게소를 출발하여 10분 후에 스에즈 운하를 지하도로로 통과 했다. 아쉬운 것은 이곳에 차를 세우고 실제 스에즈 운하의 풍경을 보지 못한 것이다.

 

수에즈 운하(아랍어: قناة السويس)는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이다. 1869년 11월 17일에 개통되었다. 지중해와 홍해 사이를 지날 때 육로로 혹은 아프리카로 우회해서 갈 필요 없이 유럽과 아시아를 해상로로 바로 연결해준다. 운하의 북쪽 종착지는 시나이 반도 서쪽인 포트 사이드이며, 남쪽 끝은 수에즈 인근이다. 이스마일리아가 두 곳 가운데 지점에 있다. 수에즈 운하의 길이는 192km이다. 가운데에 그레이트 비터 호를 통과하여 수에즈 만과 지중해를 잇는다. 수에즈 운하에는 갑문이 없으며, 바닷물이 양쪽 바다에서 그레이트 비터 호수로 자유로이 흘러들어온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린 광야길로 접어 들었다. 우리가 접어 든 시내 반도는 64,000평방킬로미터란다. 그리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략 50만. 지금 가고 있는 광야가 수르 광야로 제일 광야인 셈이다. 3시 35분이 지나서야 우리는 마라지역을 통과할 수 있었다.

 

마라의 샘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지나 첨으로 진을 친곳으로 스에즈 운하 해저 터널에서 15km 정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종려나무들이무성한 오아시스인 이곳의 현지 지명은 오윤 무사로 이는 ‘모세의 샘’이란 뜻이다. 마라는 본래 히브리 말로 ‘쓰다’라는 뜻으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수르광야로 들어가 3일을 물 없이 헤매다가 마라에 이르렀는데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에 한 나뭇가지를 우물에 던졌더니 물맛이 달게 변했다는 곳이다.(출 15:22-27)

이곳은 해수면과 땅의 높이가 비슷하여 바닷물이 지표면에 스며들어 다른 곳보다 마치 비온 뒤의 땅 처럼 낮은 쪽엔 물이 조금씩 고여 다른 사막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런 까닭에 이 곳의 물의 맛이 떫은 맛이 난다고 한다.

 

<마라의 쓴물 우물 앞에서>

 

<마라 지역의 무성한 종려나무 숲의 오아시스 앞에서>

 

<마라의 우물. 아직 물이 고여 있음을 보고 있다.>

 

4시 20분이 되면서 아직 광야 길은 멀었다. 가이드는 여기에 함께 한 모두가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자는 말을 했다. 따지고 보면 인천공항에서 만나 여기까지 오면서 아직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지 못하였다. 이규래 가이드부터 소개를 했다.

* 이규래 : 이랜드 여행사 소속 주임이며 우리를 무사히 여행을 마칠 때까지 안내할 가이드이다.(사진 한가운데)

 

   

차순이, 김신향 권사

최금자 권사

김재수 장로 김성자 권사

구의숙 ,김영래 권사

김현숙, 박경숙 권사

가운데 좌부터 김일순, 김명자 권사

여명교회 도영숙 목사

상해 선교사 장원봉 목사 윤현숙 사모

무안제일교회 김성욱 장로 노춘옥 권사

인천명성교회 김영수 목사와 조금자 사모

신성우 목사님과 신영란 사모

김포영암교회 박연옥 권사와 이배영 장로

오른쪽이 한준희 집사(사랑의 교회)

서연희 집사

경남통영 조인석 장로 최다연 집사

광영교회 황양숙 집사와 언니 황인숙전도사

 

강인경 자매와 이선옥 청년

심재숙 목사

광주서림교회 김양옥 집사

사랑의교회 김옥희 집사

박현옥 자매

요르단 가이드 이수진 집사

가운데 이규래 이랜드 주임

그리고 마포교회 이정혜 집사님이다. 이정혜 집사님은 사진 찍기를 싫어 하셔서 함께 싣지 못했다.

 

6시가 지나서야 휴게소에 들렸다가 다시 어두운 밤길 광야를 달렸다. 모두들 르비딤을 보고 싶어 했지만 날이 어두워 르비딤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7시에야 르비딤 골짜기에 차를 세우고 보름달빛에 실루엣으로 보이는 형체만 볼 수밖에 없었다.

르비딤은 신광야와 시내광야 사이에 있는 골짜기 지역으로 시내 반도 최대의 오아시스(종려나무가 무려 3,000그루)가 있는 지대이며 마라 샘을 지나 시내산을 54km 남겨 진 지점에 있다. 성경에서 르비딤은 백성이 모세를 원망하여 물을 갈급하였을 때 반석을 치니 물이 나왔던 곳이기도 하며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모세의 두 손을 아론과 훌이 함께 들어 올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곳이기도 하였다.(출애굽기 17: 1-7, 8-16)

보름달 속에 르비딤을 지나 8시에 몰간그랜드 산장에 도착하였다. 여정을 푸니 511호가 배정되었다. 오늘은 김성자, 김명자, 김재수 셋이서 함께 했다. 이 산장은 시내산 등정을 위해 마련된 아름다운 풀이 있는 산장이었다. 내일은 새벽 1시 30분에 기상하여 시내산 등정을 하는 날이다.

 

2011년 11월 9일 금요일

새벽 1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산행준비를 단단히 했다. 새벽 시내산 날씨는 매우 춥기 때문이다. 1시 40분에 모두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로 한 15분 거리를 지나 주차장에 내리자 보름달이 하늘에서 우리를 반겨주고 있다. 주차장에서 내려 다시 10분 거리를 걸어 올랐다. 어둠속에서 낙타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여기저기서 낙타 몰이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 11명은 모두 낙타를 탔다. 낙타를 탈 때 1불을 지불하고 정상에 가서 다시 21불을 지불해야 한다. 험한 돌길을 향해 낙타 등에 올랐다. 첨 타본 낙타이지만 그리 어렵진 않다.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이곳저곳 깎아지른 절벽들이 보름달에 어스름 빛으로 보인다. 1시간 30분 이상 낙타를 타고 산을 올랐다. 낙타몰이들의 낙타를 모는 소리가 밤공기를 가른다. 내 낙타를 모는 청년은 연신 괜찮으냐고 물으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시내산

2,285m 높이의 산 카이로에서 415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다.

'호렙산'이라고도 불리는 시내산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서명을 받은 곳도 시내산이며(출3:1),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받고 언약 관계를 시작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출19:20). 후에 엘리야 시대에는 이곳에서 하나님의 현현이 있었으며(왕상19:8), 때문에 이스라엘 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삿5:5; 느9:13; 시68:8,17).

일반적으로 시내산의 위치를 시내 반도의 남부, 아카바만 동쪽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기 힘들다.

구약에 등장하는 시내산 주변의 명칭들도 고대에는 잘 알려진 지역이었으나 현재는 역시 그 정확한 위치는 파악하기 힘들다(민33:14-17). 일부 어떤 학자들은 출19:16-19을 화산 폭발로 해석하여 시내산의 위치를 아라비아 북서쪽 내에서 발견된 화산들 가운데서 찾으려고 시도하였으나 이것은 정확한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19장의 묘사는 하나님의 현현에 대한 위엄을 나타내기 위하여 구약의 다른 곳에서도 표현되는 자연적인 상과 종종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편 A. D. 4세기 이래 일어났던 전통에 따르면 시내산은 시내 반도 남부에 위치한 것으로 묘사된다. 때문에 비잔틴 시대에는 이곳에 많은 사원들이 건축되었고, 이곳에 있는 '예벨무사' (Jebel Musa, 모세의 산)가 시내산과 동일시되기도 하였다. A. D. 527년 '유스티니안' (Justinian)은 이곳에 성캐더린(St. Catherine) 수도원을 세웠으며, 엄청난 규모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낙타를 타고 오른 후 낙타 종착지에서 다시 수 백개의 계단을 올랐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보름달은 더 밝아 보였고 수없이 많은 별들은 곧장 내 손으로 쏟아질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 좋았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힘들어 했다. 그러나 서로서로 위로하고 도우며 마침내 정상 바로 아래있는 작은 카페트리아에서 우리는 산상예배를 드렸다. 5시가 막 지나가고 있다. 김영수 목사의 인도로 찬송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을 부른 후 내가 기도를 했다. 그리고 출애굽기 19장 20절의 말씀을 봉독한 후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해 주셨다. 모세는 어떤 마음으로 이 산에 올라 왔을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믿음을 따라 이곳에 올랐고 그리고 전적 순종의 모습으로 올라 왔으며 이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백성답게, 거룩하고 능력 있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하게 하기 위해 이곳에 올랐을 것임을 믿고 우리도 그렇게 살자는 요지의 말씀이었다. 말씀에 이어 ‘찬양하라 내영혼아’를 부른 후 모세의 심정으로 통성기도를 함께 드린 후 김영수 목사의 축도로 산상예배를 마쳤다.

그리고 함께 준비해 온 컵라면을 먹었다. 컵라면을 위해 끓인 물이 2불씩이다.

 

제1카페트리아에서 드리는 예배 김영수 목사님이 인도하셨고 내가 기도를 했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붇고 잠시 기다리고

 

예배를 마치고 다시 모두 정상을 향해 약 70여개의 계단을 따라 정상에 올랐다. 김명자 권사, 구의숙 권사가 많이 힘이 드나보다. 다섯 계단을 오르고 또 쉬고 다섯 계단을 오르고 또 쉬고 그렇게 정상을 올랐다.

정상에 오르자 지금까지의 모든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진다. 상쾌한 기운이 온 몸을 휘감고 있었다.

 6시 15분 시내산 동쪽 저 편으로부터 서서히 아침 해가 새로운 하루를 열며 올라오고 있었다.

 

 

 

시내산의 일출

 

 

<시내산 정상에서 아래 시내산을 배경으로>

모두들 정상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올라갈 때는 낙타를 탔지만 내려올 때는 모두 걸어 내려왔다. 주차장 앞에 도착하니 8시 35분이다. 6시 30분에 정상에서 출발하여 내려 왔으니 거의 두 시간을 걸어 내려온 셈이다. 내려오는 길에 1,450년 전에 세워진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성 캐더린(St. Catherine) 수도원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다. 이 수도원은 시내사본이 발견된 곳으로 유명하다. 43장의 양피지에 기록된 신구약 대부분의 사본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이 수도원은 마치 거대한 성채처럼 견고하게 지어졌는데 옛 이름은 '구세주 예수 변화 교회‘라고 부른다고 했다.

 

<성캐더린(St. Catherine) 수도원>

 

8시 50분에 몰란 그랜드 산장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10시 30분에 모든 짐을 꾸려 이스라엘 국경을 통과하기 위한 여정을 준비했다.

몰란 그랜드 산장이 해발 1,500m 지점에 있다고 하니 우리가 시내산을 오른 것은 거의 800m를 올라간 셈이 된다.

함께 동행 한 신재숙 목사님이 금식기념으로 모든 순례자들에게 물 두병씩을 선물해 주셨다.

끝없는 광야를 달렸다. 11시 20분쯤에 바란 광야를 지났다. 이곳을 모세 당시 사람들이 ‘크고 두려운 광야’라는 이름을 붙였단다. 이 광야를 지나면서 우리는 싯딤나무와 로뎀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었다. 싯딤나무는 흔히 조각목이라고도 불리는 나무이고 로뎀나무는 엘리야가 그늘에서 쉬었다는 나무다. 그러나 로뎀나무는 나무라기보다는 하나의 잡초와 같았다. 우리나라 제방이나 절개지에 흔히 많이 자생하는 야관문, 또는 빗자루를 매는 풀과도 같았다.

 

<싯딤나무 아래서>

 

 <그리고 로뎀나무를 배경으로>

 

12시가 다 되어 갈 때 오른 쪽 홍해가 보이는 지점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삭막한 광야만 바라보던 우리 눈에 보이는 홍해바다는 참으로 시원하고 맑게 보였다. 이곳에서 바라본 홍해 건너편이 미디안이란다. 12시 5분에 우리는 ‘한강식당’이란 한식 식당엘 들렸다.

이곳에서 오랜만에 상추와 배추를 된장에 찍어서 먹을수도 있었고 김치와 고추, 들깨잎 장아찌까지 먹을 수 있는 즐거움을 가졌다. 소고기, 고등어, 시금치, 오이무침도 나왔다.

이곳 아카바 만의 바다는 군청색이라기 보다 더 진한 검은 빛이 감돌정도로 짙었다. 바다가 깊어서란다.

 

한강식당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한강식당에서 타바 국경까지는 다시 60km가 넘는 거리이다. 타바는 이집트의 국경지대로 이곳에서 이스라엘로 입국하게 된단다.

2시 20분에 이집트 타바 국경을 출국한 후 다시 2시 40분에 이스라엘 입국을 마쳤다. 이집트보다 이스라엘이 입국 절차가 더 까다로웠다. 이는 이스라엘이 아랍연맹에 둘러싸여 여러 가지 보안상의 어려움이 더 강한 것처럼 느꼈다.

이스라엘 국경에 들어서자 이스라엘 가이드인 이철규 집사님이 마중을 나오셨다.

'해외여행 > 성지순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지순례 3 요르단 편  (0) 2011.12.21
성지순례.3  (0) 2011.12.21
성지순례기. 2  (0) 2011.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