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기. 2
이스라엘 제1편
이스라엘
이스라엘국(State of Israel). 인구 : 6,562,000. 면적 : 21,671. 수도 : 예루살렘
정체·의회형태 : 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총리
공식 언어 : 히브리어·아랍어. 독립년월일 : 1948. 5. 14.
이스라엘은 남북길이가 약 400km, 동서길이가 가장 넓은 곳이 121km에 이른다. 북쪽은 레바논, 북동쪽은 시리아, 동쪽과 남동쪽은 요르단, 남서쪽은 이집트, 서쪽은 지중해와 이웃한다.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골란 고원(북동쪽), 웨스트뱅크와 동예루살렘(동쪽), 가자 지구(남서쪽) 등 7,477㎢의 점령지(반자치주)를 제외한 면적이 2만 700㎢이다. 1967년 전쟁으로 빼앗은 여러 점령지에서는 지금도 분쟁이 계속되고 있고, 수도인 예루살렘도 한때 요르단 지역과 이스라엘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인구 6,473,000(2003 추계).
1948년에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가 끝나면서 유대 인이 세운 국가로,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주위 아랍 민족과 갈등이 그치지 않고 있다. 감귤, 곡물 따위의 농업과 섬유 공업이 발달하였다. 주민은 대부분이 유대 인이고 주요 언어는 히브리 어이다. 수도는 예루살렘, 면적은 2만 325㎢.
구약성서에 나오는 2개의 정치 공동체 이스라엘
하나는 사울·다윗·솔로몬 왕의 통치기간(BC 1020~922)중의 이스라엘 통일왕국이고, 다른 하나는 북쪽에 살던 10지파(〈구약성서〉의 12지파 가운데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시킴)의 영토를 포함한 북이스라엘 왕국으로서 BC 922년 여로보암 1세가 주도한 반란에 의해 수립되었다. 다윗 왕조가 지배한 남왕국은 이후 유다 왕국으로 지칭되었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는 오므리 왕(BC 876~869 또는 BC 884경~872경 재위)과 아합 왕(BC 876경~853경 재위), 예후 왕조(BC 842경~746) 시기에만 평화로웠을 뿐 전체적으로 불안정했다. BC 8세기에 북 왕국은 사마리아와 함께 신(新)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수도를 함락 당했고, BC 722(또는 721)년에 멸망했다.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서자 분위기는 이집트와 달랐다. 먼저 깨끗한 거리와 도로에 차선 표시가 선명하였고 이집트 보다 사람들이 붐비지 않았다. 자연환경은 이집트와 별 다르지 않게 사막지대였지만 훨씬 정돈되어 보였다. 흔히 이스라엘을 ‘작아도 다 있는 나라’, ‘다양한 나라’로 불린다고 가이드는 설명을 한다. 3시 30분에 휴게소에 들렸다. 역시 휴게소도 깨끗하였다. 우리를 태우고 가는 운전기사는 휴게소에 도착하자마자 시동을 끈다. 그리고 우리가 승차하자 다시 시동을 거는 경제적인 운전을 하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는 끊임없이 설명을 하신다. 이곳 광야의 한낮 평균 온도는 45도- 47도까지 올라가지만 해만 지면 8도 정도로 내려가고 체감온도는 거의 0도에 가깝도록 내려간단다. 그래서 광야에는 이리, 늑대, 하이에나와 같은 야생동물이 살고 있어 낮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광야라고 설명을 한다.
이스라엘 초대 수상인 ‘뱅고리안’은 ‘광야를 지배하지 못하면 광야에게 먹히고 만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면서 광야를 개척하기 시작한 이스라엘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치인이란다. 가는 길에 사막에 물을 끓여 들여 야자나무 농장을 만들고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작물을 재배하고 있었다. 이들이 이 광야를 개척하는 것은 해외 동포들을 이땅에 돌아오게 하는 밑거름으로 하기 위함이란다.
6시 어두워 질 즈음에 다윗이 사울을 피해 숨어있었다는 엔게디를 지나고 있었다. 이곳은 황량한 사막이라기보다는 같은 사막이어도 산지로 구성된 사막이었다.
7시에야 우리는 이스라엘 첫 숙박지인 여리고(Jericho Resort Villiege)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강후구 선교사와 반가운 해후를 했다. 강후구 선교사가 미리 와서 우리를 반겨 주었다. 7시 10분부터 이곳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내 숙소인 219호에 모여 환담을 나누었다. 우리 일행은 기도 하면서 적지만 선교비를 전달했다. 강후구 선교사가 전체 순례팀을 위해 과일을 사 오셨다. 8시경에 우린 헤어졌다. 12월 9일의 일정이 광야를 지나오면서 이렇게 저물었다.
2011년 12월 10일 토요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났다. 가방을 챙기고 오늘은 쿰란 성지와 사해 체험이 있는 날이다. 6시 30분에 아침 식사를 마치고 7시 35분 신재숙 목사님의 출발 기도로 하루의 순례가 시작되었다.
<여리고 리죠트 빌리지앞에서 아침에 기념촬영을 했다 호텔 앞 꽃밭에서도 한 장 찍고>
오늘의 여정 첫 코스인 여리고 성을 방문했다.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이 길갈에서 진을 치고 가나안을 정복한 첫 성이다. 7시 45분이 되면서 텔 여리고에 도착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36km 떨어진 거리, 요단강과 사해가 만나는 곳에서 북서쪽으로 15km지점에 위치해 있다. 원래 요르단의 영토였는데 6일 전쟁때 이스라엘이 점령한 후 지금까지 이스라엘 영토가 되었다. 여리고는 세계에서 오래 된 도시로 종려나무를 비롯한 각종 과실수가 우거진 사막의 오아시스로 성경에는 ‘종려의 성읍’(신 34:3,사사기 13:3)로 불렸고 지금도 이곳에 성 둘레가 0.6km, 넓이가 2만 평방킬로에 이른다. 신약시대 여리고는 구약의 여리고보다 남쪽으로 6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이곳에 헤롯의 겨울 별장이 있다. 참고 성경: 여호수아 6장과 눅 19:1-10의 삭개오 구원, 막10:46-52에 소경 바디메오의 고침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엘리사의 샘은 엘리사가 이곳에서 물을 고쳤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고대 여리고 지방의 물이 좋지 않아 토산이 익지 못하고 결실이 잘 되지 못하자 엘리사가 물의 근원에 소금을 던져 물을 고쳤던(왕하 2:19-22)곳이다.
<뒤에 고대 여리고 성의 잔해가 보이고 지금도 물이 흐르는 엘리사의 샘이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은 후 8시 20분에 다시 삭개오의 뽕나무를 보러 갔다. 성경에는 뽕나무라고 번역되었지만 실제로는 ‘돌무화과 나무’라고 한다.
지나가는 길 가에 돌무화가 나무가 있었다. 크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뽕나무 보다는 훨씬 크고 높았다. 길에 선 돌무화가를 본 후 그냥 쿰란고원 으로 향했다.
<돌무화가 앞에서 한 장>
쿰란 고원은 사해 북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1947년 베두인 소년에 의해 구약사본들이 발견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흔히 사해 사본이라 불리는 이 사본들은 주전 2세기에서 1세기 사이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며, 9세기경 히브리어 구약 사본과도 거의 일치하여 그 전까지의 문제로 제기 된 날조설을 일축시켰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구약성경의 진실성을 뒷받침해주는 동시 예수님에 관한 구약예언서들이 신약시대에 조작된 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얻게 되었다. 쿰란에서는 주전 150년 전부터 주후 68년 사이의 삶의 터전도 발견되었는데 에세나파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공동생활을 했던 곳으로 성경필사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쿰란 사해사본 발견 전시관 앞에서 이철규 가이드>
<발견 당시 사본을 담았던 항아리와 항아리에서 나온 필사본 성경>
<주거지 유적>
<쿰란 사본이 발견된 동굴 멀리 동굴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
10시 35분에 쿰란을 출발하여 사해 바다로 향했다.
사해는 동서 길이가 15km, 남북이 약 80km, 면적이 1,020평방킬로미터의 바다이다. 그리고 해발 -400m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갈릴리 호수와 요단강에서 유입되는 물은 줄어드는데 증발은 심해 년 1m 씩 크기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일반 바다 염도보다 무려 5배가 더한 곳이다. 이곳은 소돔과 고모라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민수기 34장에 가나안의 경계를 말씀하신 구절에 언급되기도 한다. 미네랄이 풍부한 사해의 물은 피부건강에도 좋고 사해 진흙은 머드팩 체험으로도 인기가 있어 우리 일행 대부분 신나게 머드팩도 하고 사해에 들어가 신나는 체험을 하였다. 정말 뒤로 누우니 절로 몸이 뜨고 일어 나려고 해도 일어 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창세기 13:10-13 14장 19장의 소돔과 고모라 신명기 3장 바산왕 옥의 정벌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다.
<사해바다에서의 체험 사해 바다 오른쪽이 모압 평지라고 한다.>
<사해바다에서 즐기는 사람들>
11시 50분에 사해를 나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에 들어섰다. 예루살렘이 해발 400m 고지에 있다면 사해로부터는 800m의 높이에 해당되는 곳이다.
12시 10분쯤 우리는 유대 광야를 지나고 있었다.
유대광야는 예수님께서 40일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시고 시험을 받은 곳이며(마 4:1-11, 눅 4:1-13) 세례요한 이곳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부르짖던 곳(마 3:1-12, 막 1:1-8, 눅 3:1-18, 요1:19-28)이기도 하다. 또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눅 10:25-37)가 있던 곳이다. 그리고 다윗의 시편 23편이 태어난 지역이기도 하다. 여기에 여리고와 시험산이 다 들어 있다. 이곳이 해발 제로(0)지점이란다.
12시 35분 우리는 식사를 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있는 작은 공원에 들렸다. 이곳에서 한식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공원에 무성하게 자란 올리브(감람나무)가 있었다.
예루살렘 [Jerusalem]
예루살렘은 사해에서 서쪽으로 약 24㎞, 지중해안에서 동쪽으로 약 56㎞ 떨어진 이스라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1967년 이스라엘이 자국의 수도라고 주장한 중동의 고도(古都).
BC 1800년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3대 일신교인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의 주요성지 가운데 하나이다. 국제연합(UN)이 팔레스타인을 분할했을 때 국제도시로의 성장을 기대했으나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구시가지와 동예루살렘 나머지 지역을 합병한 트란스요르단(지금의 요르단)과 서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스라엘 사이에 분할되었다. 동예루살렘은 1967년의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점령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분할할 수 없는 영구적인 수도라고 주장해왔으며, 예루살렘 시의 지위는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 국가들 사이에 쟁점이 되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예루살렘은 가장 거룩한 기억의 보고(寶庫)이자 종교적인 경외심과 민족의식의 원천이며, 그리스도교도들에게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승리의 현장이다. 또한 이슬람교도들에게는 마호메트의 신비한 야간 여행의 목적지이자 이슬람교 제3의 성지이다. 아직까지 고대의 거대한 도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구시가지는 이슬람교도·유대교도·그리스도교도·아르메니아인 구역들을 포함한다. 이 구시가지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는 것은 제1·2성전 자리에 높이 쌓아올린 헤로데 성전 구역이며, 이 구역 안에는 이슬람교의 성소들인 바위의 돔과 알아크사 모스크가 있다. 서쪽 성벽(통곡의 벽 )은 가장 성스러운 유대교 성지이다. 성벽 안의 나머지 지역은 전통적인 동방의 도시로 이슬람교 사원들과 미로처럼 복잡한 상점가가 있다. 수많은 교회와 유대인 구역의 고대 유대교 회당·학습당들도 이곳의 특징을 이룬다. 구시가지에서 바깥쪽으로 형성되어 있는 예루살렘의 신시가지에는 주택지구, 상가와 관청, 여러 교육기관이 있다.
면적 109㎢, 인구 693,200(2004 추계).
이곳의 건축물은 모두가 돌로 이루어 졌다. 심지어 담장까지도 돌이며 길의 바닥 경계석 모두 분홍색 돌이다. 이는 돌이 나무보다 더 많은 까닭이기도 하다.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해질 때부터 토요일 오후 해질 때까지인데 안식일에는 전철, 은행 등도 모두 쉬며 택시와 버스는 운행을 한다고 한다.
점심 식사를 끝내고 1시 20분에 공원을 출발 했다.
공원에서 바라본 예루살렘과 돌로 지어진 건축물들
1시 35분에 시온산을 향했다. 예루살렘성의 시온문과 바로 연결되는 시온산은 예루살렘 성 남쪽에 위치한 언덕이다. 성경에서 시온산을 거룩한 산(시 24:3) 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불러 모았던 시오니즘 운동도 이 산의 이름에서 유래된 곳이다. 이곳에 마가요한의 다락방이 있었고 베드로 통곡교회, 가야바의 지하감옥이 있다.
마가요한의 다락방 교회로 향했다. 이곳은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막 14: 12-25)을 하신 곳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장소(행 2:1-13)이기도 하고 초대교회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예루살렘 사도 회의(행 15:1-29)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모여 내가 대표 기도를 했다.
이어 우리는 베드로의 통곡교회를 들렀다. 이곳에는 교회 꼭대기에 닭을 조각하여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라고 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통곡한 베드로의 심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었다.
<베드로의 통곡교회에서>
이어 우리는 다시 2시 15분에 가야바의 지하 감옥을 구경하였다. 이곳이 예수께서 심문을 받으시고 희롱당한 곳이란다. 지하 감옥 천정에는 당시에 예수님을 쇠사슬로 묶었을 바위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바위 구멍을 보면서 이곳에서 고난 당하신 주님을 묵상하며 가슴을 저몄다.
<천정 기둥에 구멍이 바위에 뚫려 있다.>
2시 25분 우리는 다시 감람산으로 출발을 했다. 감람산 가는 길에 흰놈의 골짜기가 아래쪽에 보이고 여긴 가롯유다가 자결한 피밭(아겔다마)이 있는 곳이란다. 이스라엘에서는 저주의 골짜기로 불린다고 한다. 2시 50분에 우리는 감람산에 도착을 했다.
감람산에는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승천기념교회가 있다. 기념교회 안에는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딛었던 발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는 바위도 있었다. 우리는 모두 이 교회 안에서 ‘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승천 하셨네’ 찬양을 불렀다. 찬양을 하면서 승리하신 주님의 모습과 사도행전 1장 9절의 말씀이 눈에 그림처럼 다가 왔다. AD392년에 예수님의 승천을 상징하여 지붕이 없는 교회가 세워졌으나 1198년 이슬람교도들이 모스크 형태의 돔을 씌어 현재 모양이 되었다.(눅 24:50-53, 행 1:9-11)의 말씀이 이루어 진 교회이다.
<승천교회와 예수님의 발자취가 남은 바위>
이곳에서 나와 다시 도착한 곳은 주기도문 교회이다. 3시 7분경이었다. 이곳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 기도’(눅 11:1-13 기도에 대한 가르침)를 가르치신 곳이기도 하고, 기도에 힘쓰신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상해 장원봉 목사님이 대표 기도를 하시고 우리 모두 주기도를 드렸다. 이곳 교회 벽엔 세계 각 국에서 보내온 다양한 언어의 주기도문이 장식을 하고 있었다.
<주기도문 교회의 우리나라 말 주기도문과 교회 전경>
이어 3시 20분에 눈물교회로 향했다. 눈물교회는 ‘예수께서 우셨다’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온 말이다. 이곳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앞두고 탄식하고 우신 것(눅 19: 41-44)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교회이다. 이 교회는 예루살렘성이 바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세워져 있어 더욱 우리 마음을 간절하게 했다.
<눈물교회 전경과 감람산을 내려가는 길 저 아래 예루살렘 성이 보인다.>
감람산을 내려오면서 들린 곳이 겟세마네 기념교회이다. 이곳에서 주님은 땀이 핏방울처럼 변하기까지 기도 하신 곳(막 14:32-42, 눅 22:39-46)이다. 이곳에 아주 오래 된 올리브 나무가 있었다. 겟세마네라는 말은 ‘기름을 짜는 틀’이라는 의미란다.
우리 일행은 이곳 교회에서 5분간 주님의 고난의 기도를 묵상하며 기도를 드렸다.
<겟세마네 동산의 늙은 올리브 나무와 기념 교회 안에 조각된 기도하는 예수님 모습>
우리는 4시가 되어서야 예루살렘 성문이 있는 곳을 통과하여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다. 이곳에 오는 길에 길옆에 세워진 스데반 기념교회와 골짜기 건너 ‘압살롬의 무덤’을 먼 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었다.
예루살렘 성에서 가장 먼저 간 곳이 베데스다 연못(요5:1-9)과 안나기념교회였다. 베데스다 연못은 안나기념교회 옆에 있었는데 지금은 성안에 있지만 예수님 당시는 성 양문 바깥쪽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1988년 발굴되었다. 안나 기념교회는 1140년 마리아가 태어난 집터 위에 교회를 세우고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의 이름을 따서 지은 기념교회이다. 이 교회는 특유의 내부 구조로 인해 공명이 아름다운것으로도 유명한데 마침 이곳에 도착하자
미국 죠지아주에서 온 남성합창단 순례단이 이곳에서 ‘거룩한 성, ‘영광 영광’의 찬양을 합창하고 있었다. 우리도 함께 함창을 했다. 이들이 합창을 마치고 우리 일행도 같이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찬양을 그들과 함께 불렀다. 찬양은 비록 언어는 달라도 서로의 마음을 여는 하나의 공통 감동이 될 수 있었다. 찬양을 하는 이나 듣는이나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성안나 교회와 베데스다 연못 유적지 그리고 성안나 교회에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찬양>
이곳에서 나와오면 주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이다. 골고다의 길을 걷기 시작한 셈이다. 라틴말로 ‘비아돌로로사’는 ‘고난의 길’이라는 의미이다.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서 시작하여 골고다 언덕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까지 이어져 있는 14가지 사건을 기념하는 처소들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곳은 아랍 상점들이 즐비한 골목으로 그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우린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예수 나를 위하여’ 찬양을 부르며 이 14곳을 순례하기 시작했다. 지금 골고다 언덕엔 이를 기념하기 위한 교회가 세워져 있다.
제1처소 : 빌라도의 법정 제2처소 :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히신 후 십자가를 지심
제3처소 : 첫 번째 쓰러지신 곳 제4처소 : 어머니 마리아를 만나 위로하신 곳
제5처소 :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진 곳 제6처소 : 베로니카가 수건으로 예수의 얼굴을 닦아 드린 곳 제7처소 : 두 번 째 쓰러지신 곳 제 8처소 : 여인들을 향해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손을 위해 울라”고 말씀하신 곳
제9처소 : 세 번째 쓰러지신 곳 제 10처소 : 예수님께서 옷을 벗기신 곳
제11처소 : 십자가에 못을 박힌 곳 제12처소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곳
제13처소 : 십자가에서 내리신 곳 제14처소 : 돌무덤에 묻힌 곳이다.
<고난을 당하시며 가신 길 과 빌라도 법정에 세워진 교회>
이 14곳의 순례를 마치고 당도한 곳이 통곡의 벽이다. 통곡의 벽은 솔로몬 왕이 세운 성전이 파괴된 후 헤롯 대왕이 다시 세운 성전의 서쪽 벽 일부만 남아있는 것으로 성전 서쪽의 벽 일부였기에 서쪽 벽이라고도 한다. 예수님의 예언처럼 주후 70년 성전을 모두 파괴한 로마는 유대인의 성전 출입을 금했고 그러나 단 하루 ‘성전파괴일’날만 출입을 허가하여 유대인들이 이 날만 되면 성전파괴를 슬퍼하며 통곡을 하였다. 지금도 이곳은 많은 유대인들이 이 벽 앞에서 통곡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통곡의 벽에서>
통곡의 벽을 다녀와서 6시 10분에야 호텔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우리들이 묵을 호텔은 ‘리모닝 샬롬 호텔이다. 방 배정을 받으니 1103 김명자 김현숙 김일순, 1104 김신향 차순이, 1105 박경숙 김영래, 1106 구의숙 최금자, 1107 김재수 김성자, 이규래 가이드는 1102 였다.
7시 45분에 강후구 선교사가 다시 가족들과 함께 방문했다. 환담을 나눈 후 가족들을 위해 내가 기도 하고 기념 촬영을 한 다음 헤어졌다. 우리를 위해 대추야자와 무화가 말린 것을 사오셨다. 감사했다.
<강후구 선교사와 환담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12월 11일 주일
오늘은 주일날이다. 아침 경건회를 호텔에서 가지기로 했다. 5시 45분에 2층 회의실에서 경건회를 가졌다. 신성우 목사의 예배 인도로 다같이 묵상기도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한 다음 찬양 ‘고요한 밤’을 불렀다. 이어 서울 영암교회 이배영 장로의 기도, 신성우 목사의 눅 2:1-4절을 봉독한 후 말씀을 전했다. 이어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을 찬양한 후 주기도문에 이어 축도로 아침 경건회를 마치니 6시 30분이었다.
이국땅 호텔에서 각기 다른 이들과 함께 드린 예배는 더욱 뜻 깊었다. 두고 온 교회와 가정과 우리나라를 위해 함께 뜨겁게 기도했다.
<아침 경건회>
6시 40분부터 아침 식사를 하면서 상해 장원봉 목사님께서 목회자를 둔 가족들에게 충고의 말씀을 해 주셨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일꾼이요 교회의 일꾼이므로 가족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모의 생신보다는 교우의 심방이 우선된다며 이 점을 꼭 명심하라고 한다. 맏사위가 목회하는 내 경우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7시 30분 여명교회 도영숙(여)목사님의 기도로 오늘의 여정의 길을 열었다.
예루살렘에서 약 10km 떨어진 거리에 베들레헴이 있고 이곳에 예수님 탄생교회(마 1:18-25,눅 2:1-7, 마2:1-12)와 목자들의 기념교회가 있다. 예수님 탄생교회는 32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처음 세웠으나 333년 완성 후 화재로 손실되었던 것을 531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재건한 것이다. 베들레헴은 다윗 왕이 태어 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양을 치고 왕으로 기름을 부음(삼상 16장) 받았다. 목자들의 기념 교회역시 천사가 목자들에게 아기 탄생의 소식을 들은 곳(눅 2:8-21)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아곳은 보아스와 룻이 만난 곳이기도 하다(룻기 2-4장) 이 들판에서 보아스는 룻이 이삭을 줍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예수님 탄생 기념교회는 1600년 전의 건물로 11개의 기둥으로 이루어 졌는데 가롯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제자를 상징한다고 하며 이곳에 그 당시 모자이크화가 아직도 전해져 오고 있다.
<예수탄생교회의 모자이크화,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곳 동굴이다. 예수탄생기념교회 앞에서>
우리는 이곳에서 2분간 묵상기도를 드린 후 ‘저 들 밖에 한 밤중에’ 찬양을 불렀다. 한 편 이곳에서 제롬 성인이 두 모녀의 도움으로 수도생활을 하면서 헬라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단다. 이 성경을 불가타 역본이라고 부른다.
<예수탄생교회와 제롬 성인의 동상>
예수 탄생기념교회 맞은편으로 이스람 사원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는데 매년 12월 25일 성탄절 예배를 이곳에서 드리고 전 세계에 방영한다고 한다.
8시 45분 예수탄생기념교회를 출발하여 9시에 목자들의 들판 기념교회에 도착하였다.
<목자들의 기념교회 내부와 겉모습>
목자들의 기념교회 곁에는 동굴로 된 기념물들이 있었다.
이곳에서 다시 출발하여 9시 50분쯤 우리는 보아스의 타작마당이라는 곳을 버스를 타면서 지났다.
땅들이 척박하였고 밭 하나의 면적이 우리나라 300평 정도밖에 보이지 않아서 질문을 했더니 이곳 말고도 보아스는 여러 곳에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고 가이드는 말했다.
우리는 차츰 북쪽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가는 길에 가이드는 우리에게 이스라엘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안녕 친구여’라는 노래다
샬롬 하베림 샬롬 하베림 샬롬 샬롬
레이트라웃 레이트라웃 샬롬 샬롬
안녕 친구여 안녕 친구여 샬롬 샬롬
다시 만나요 다시 만나요 샬롬 샬롬
10시 50분에 우리는 텔아비브에 들어섰다 이곳은 이스라엘의 제2의 수도로 현대적 도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곳의 주요 교통수단은 자동차이고 기차의 이용은 20% 정도.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부터 가이샤랴 지방에 가기까지 찬양을 불렀다. 맨 첨엔 뒤에 앉아 있던 한준희 집사 일행이 시작하던 것을 그 다음은 신봉 팀이 이어 받아 내가 마이크를 잡고 찬양인도를 했다. 참으로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다음 이야기는 성지 순례 3으로 이스라엘 편을 나누어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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