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3호

상주지역(尙州地域) 한국전쟁(韓國戰爭)의 고찰(考察)

빛마당 2014. 3. 5. 15:09

상주지역(尙州地域) 한국전쟁(韓國戰爭)의 고찰(考察)

尙州鄕土文化硏究所 硏究委員

尙 州 市 廳

金 相 鎬

목 차

Ⅰ. 머리말322

Ⅱ. 한국전쟁의 전개와 연표323

Ⅲ. 통계로 본 한국전쟁의 인명피해325

Ⅳ. 전쟁 당시의 지도와 갈령 도로327

Ⅴ. 고대 교통로와 갈령 도로331

Ⅵ. 화령장 전투(戰鬪)의 전개(展開)와 영향(影響)338

Ⅶ. 반격전(反擊戰)351

Ⅷ. 상주지역(尙州地域)의 한국전쟁(韓國戰爭)

유적(遺蹟)354

Ⅸ. 맺음말360

상주지역(尙州地域) 한국전쟁(韓國戰爭)의

고찰(考察)

尙州鄕土文化硏究所 硏究委員

尙 州 市 廳

金 相 鎬

Ⅰ. 머리말

1945년 8월 15일 세계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카이로 회담에서 북위 38˚를 기준으로 북에는 소련이, 남에는 미국이 분할 진주함으로서 국토의 분단은 예견되어 있었다. 통일된 한국의 문제를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를 만들어 문제해결을 하려 하였으나 그 당시의 냉전체제에서 미소의 입장은 서로 달랐고, 1947년 중반에 이르러서는 단일정부수립과 신탁통치의 정책을 포기하고 1948년 5월 10일 북위 38˚선 이남지역에만 총선거를 실시하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하였다. 반면 북한에서는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 이후 남북한에서는 토지 개혁 등 국가 기반 확립을 위한 정책을 진행하면서 북한에서는 소련의 무기와 군사전문가 지원하에 적화통일을 위한 국사 훈련과 군비 확충해 집중해 왔다. 마침내 북한군은 7개 보병사단, 1개 기갑사단, 수개의 특수 독립연대로 구성된 총병력 11만 1천명과 1,610문의 각종 포, 그리고 280여 대의 전차 및 자주포 등으로 무장하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서해안의 옹진반도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남진을 개시하면서 한국전쟁을 일으켰다.

상주지역에 북한군이 들어 온 것은 1950년 7월 15일 오전 경 화북면에 진입하면서 상주에서 한국전쟁은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부터 계속하여 밀리던 전쟁의 전열을 가다듬고 공격으로 전환하는 낙동강 전선의 전열을 가다듬는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하는 상주 화령장 전투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한국전쟁(韓國戰爭)의 전개(展開)와 연표(年表)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북위 38°선 남쪽으로 전면 남침한 이후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고, 20일 만에 상주에 도달하여 1953년 7월 7일 휴전된 3년간의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으로서 연표는 다음 표와 같다.

년도

월일

주 요 내 용

1948

8.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8.16

국방경비대를 국군으로 명명

9. 9

북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1949

3. 5

제1차 김일성-스탈린 회담, 제2차 1950. 4. 5

1950

4.28

제1차 김일성-모택동 회담, 제2차 1950. 5.13

5.29

북한 남침 선제타격계획 완성

년도

월일

주 요 내 용

1950

6. 8

북한 위장 평화공세 전개

6.12

북한군 전투부대 38선 부근으로 이동

6.22

북한군 남침 정찰 명령 하달

6.23

국군 비상경계 해제

6.25

북한군 전면 남침

6.26

유엔안전보장이사회, 북한군 공격중지와 철수권고 결의

6.27

정부, 대전으로 이동

6.28

유엔안전보장이사회, 한국 군사지원 결의안 채택, 북한군 서울점령

6.30

미 지상군 투입결정, 육해공군총사령관 겸 육군총참모장 임명(정일권 소장)

7. 1

미 지상군 선발대, 부산 도착

7.14

국군 작전지휘권 유엔군총사령관에게 이양

7.16

정부, 대전에서 대구로 이동

7.17

화령장 전투

8. 1

낙동강 방어선 형성

8.18

정부,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동

9.15

인천상륙작전

9.23

김일성, 북한군 총 후퇴 명령 하달

10.19

평양탈환

10.25

중공군 참전

1951

1. 4

유엔군 서울 철수(1․4후퇴)

3.15

서울 재탈환

6. 1

유엔 사무총장, 38도선에서 휴전성명 발표

1952

8. 5

정부통령 선거(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함태영 당선)

1953

7. 7

휴전협정 조인(클라크 문산에서, 김일성 평양에서 각각 서명)

출처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상)>, 1995, pp.598~605.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중)>, 1996, pp.657~664.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하)>, 1997, pp.665~672.

Ⅲ. 통계(統計)로 본 한국전쟁(韓國戰爭)의 인명피해(人命被害)

전쟁의 통계는 사회의 혼란과 정부기능의 상실로 정확한 통계 수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발생된 인명 피해의 통계도 조사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고 현재와 같이 정확한 통계치의 기대는 어려우나 한국의 전체 사상자는 1955년 내무부 통계국의 자료에서 보면 990,968명이나 된다. 이러한 피해는 1955년 한국인구 21,526,374명의 인구로 추정해 보면 약 한국인구의 5%가 전사 등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총계

사망

학살

부상

납치

행불

990,968

244,663

128,936

229,625

84,532

303,212

출처 : 내무부 통계국, <대한민국 통계연감>, 1955, pp.212~213.

내무부 통계국 자료와 국방군사연구소의 자료는 부상자의 차이로 인해 인명피해에 대한 분석은 어려우나 사망자를 기준해 볼 때 전체 사망자 244,663명중 군인이 137,899명으로서 56%가 군인이고 44%가 민간인 사망자이다. 그러나 군인의 피해는 한국인과 유엔군, 중공군을 합친다면 한국전쟁의 사상자는 2,591,715명에 이른다.

구 분

한국군

북한군

유엔군

중공군

2,189,388

588,641

508,797

144,950

947,000

사 망

835,966

137,899

508,797

40,670

148,600

부 상

1,353,422

450,742

 -

104,280

798,400

출처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 피해 통계집>

이와 관련하여 상주의 한국전쟁 전후의 인구 현황을 살펴보면 1950년에는 220,970명, 1951년에는 213,818명으로서 7,172명이 줄어들었다. 1592년에는 1,237명, 1953년에는 1,211명이 늘어났고, 1954년에는 211,661명으로서 1952년보다 7,225명이 줄어든 현황이다. 그 이후에는 매년 서서히 늘어나서 1965년에는 265,670명까지 늘어나며, 그 이후부터는 서서히 줄어든다. 이러한 현상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전쟁 중의 통계는 정부와 행정기능의 부재로 정확한 통계치를 조사할 수 없다는 결과 수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통계 수치에서 상주에서 전사한 전체 인구수의 파악은 불가하나 인구 증감의 패턴으로 볼 때 전쟁 중인 1952년과 1953년에 늘어난 인구는 정확한 통계 수치로 보기 어렵고 전쟁이 수습되고 있던 1954년 인구조사 결과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전쟁 중에도 인구가 늘어 날 수는 있지만 1954년 인구가 정확한 인구라고 보면 1950년 대비 1954년 인구는 9,309명이 줄어든 수치가 되는데 이 수치가 한국전쟁에서 상주인이 피해를 입은 인구 수가 아닌가 한다.

년도별

호수

인구수(명)

증 감

합계

전년대비

1950

-

220,970

111,694

109,276

-

-

-

1951

26,982

213,828

107,085

106,743

△7,172

△4,609

△2,533

1952

39,150

217,675

108,322

109,353

3,847

1,237

2,610

1953

36,785

218,886

107,171

111,715

1,211

1,151

2,362

1954

35,850

211,661

102,990

108,671

△7,225

△4,181

△3,044

출처 : 출처 : 통계연보(상주군)

한편 상주대관의 자료에 의하면 상주군 내 주택의 피해는 상주군 내의 일반주택이 2,546동(40,852평), 읍내 일반 주택이 1,036동(15,123평)이며, 인명 피해를 보면 아래 표와 같이 상주인의 피해는 부상과 귀환자 353명을 제외하면 1,305명이 피해자가 된다.

구분

사망

학살

부상

납치

행방불명

귀환자

1,658

848

73

336

32

351

17

1,435

675

71

303

31

338

17

223

173

2

33

1

13

1

그러나 이러한 통계수치는 전란 후 비교적 사회적 안정이 이루어진 1957년의 자료로서 전쟁 직후의 자료보다는 신뢰성이 있는 자료이다. 즉 전쟁 후의 인구 증감 대비해 보면 1956년부터 상주의 인구가 늘어나는 것으로 보아 행방불명자 또는 타지 임시 정착자 등의 피난민이 전쟁 후 안정을 되찾으면서 고향으로 돌아와 인구의 증가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따라서 통계 수치적으로 직접적인 인명피해는 1,300여명이라고 하겠으나 전쟁으로 인해 상주를 떠나 유리걸식(流離乞食) 하는 등 실제 상주를 떠난 피해자를 합하면 9,000여명 이상이 된다고 할 것이다.

Ⅳ. 전쟁(戰爭) 당시(當時)의 위치(地圖)와 갈령 도로(道路)

1950년 7월 북한군은 남하를 하던 중 소백산맥에서 남하가 지연되었는데 북부인 단양에서는 국군 제8사단이 패하여 죽령을 점령하여 넘었으나 중부인 이화령과 조령에서는 국군 제6사단이 있어 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괴산 이화령의 제6사단과 남쪽 제1사단 사이 약 30㎞의 구간은 험준한 산악지대로서 국군 병력이 배치되지 않았다. 따라서 977번 지방도는 개방 상태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 때 병력이 배치되지 않은 이유는 제1군단장 김홍일 소장이 “당시에는 초등학교에서 쓰던 괘도(대한민국 지도)로 작전을 지휘하고 있어 그 도로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라고 증언하였다.(한국전비사 하권 169쪽) 이 977번 지방도(갈령고개)의 개방상태에 따라 북한군은 이 공백지대를 이용하여 국군 제1군단과 제2군단을 분리하는 동시에 상주를 점령하여 김천과 대구방향으로 진출할 계획을 세우고 남하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도로가 예부터 역사적으로 주요로 교통로 이용되어 왔고, 크고 작은 전쟁에서 자주 사용되어 전투가 있었던 도로이었으며, 한국군의 군단을 총괄 지휘하면서 군사 작전지도 없이 학생 교육용 지도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상식 밖의 상황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당시 작전 지휘에 사용하였다는 교육용 괘도 자료는 찾아보았으나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다만, 한국전쟁 이전에 제작된 지도를 살펴보면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조선신지도(1911년, 1:1,500,000)와 조선전도(1:2,400,000)에는 갈령도로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1950~1953년 미군이 사용한 군사지도에는 977번 지방도(갈령고개)가 분명하게 표기되어 있고 영문과 한글로 병기되어 있다. 한국전 전군을 지휘하고 미군의 신탁통치를 지지하던 상황에서 미국에서 제작된 지도이고, 이 미군 지도의 기초가 된 것은 한국지도인데 이 때 이미 한국에서 제작된 지도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으며, 군사 작전 지휘를 군사지도 없이 초등학교 괘도를 이용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다만 추정이 가능한 것은 그 당시 군 작전부의 작전 지휘의 실수를 작전 지도에 전가한 사례가 아닌가 한다. 그 당시에는 “전쟁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가 되더라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 받지 못한다’라는 맥아더 장군의 말이 유행하던 시대성으로 보아 군사작전의 실수를 합리화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한다.


그림 1. 조선신지도(1911년, 1/1,500,000)

그림 2. 미군사작전지도(1950년)


그림 3. 일제강점기 조선전도(1/2,400,000)


                                        그림 4. 독립기념대한국전도(1946.5.20 발행),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정보시스템 자료


독립기념대한국전도에는 상주~보은의 도로는 자동차 운전도로로 표기되어 있고, 화령장~장암리의 갈령고개 도로는 주요도로로 표기되어 있다.


                                                                             그림 5. 조선지도(1925.1.10)

조선지도에는 화령장(화서 신봉)~삼가(화서 삼거리)~고교(화북 상오)로 연결되는 소로가 표기되어 있으며, 낙동에서 함창까지는 대로가 표기되어 있고, 철도 표기는 없다. 이 지도에서도 화서와 화북이 연결되는 도로는 지도에 표기되어 있다.

위의 지도를 살펴본바와 같이 조선지도(1912)와 독립기념대한민국전도(1946), 미군사작전지도(1950~1953)에 977번지방도(갈령도로)가 표기되어 있는 상황인 것을 보면 당시 작전 지휘를 하면서 갈령 도로가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결과론적 볼 때 이 도로가 작전에서 누락되어 개방상태가 됨으로 인해 화령장 전투의 승리와 한국전쟁 반격 전환의 기회를 가져왔다.

Ⅴ. 고대(古代) 교통로(交通路)와 갈령 도로(道路)

갈령 도로는 고려시대부터 몽고군의 침입과 신라의 삼국통일, 조선시대 왜적의 이용, 한국전쟁의 북한군 상주 방향 진격로 등 상주역사에서는 빠질 수 없는 주요한 많은 역할을 해온 도로이다.

옛날에도 주요 이동로인 교통로는 군사 활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한 부분으로 인식되어 항상 군사작전에는 도상 작전계획을 세워 실제 군사를 배치하고, 전투의 승패가 판가름되기 때문이었다. 육군의 병력과 군수품의 이동은 한국전쟁 때 까지도 오직 도로를 이용하여 모든 물자의 이동이 가능하였다. 따라서 화령장 전투의 원인이 된 것이 소백산맥 중에서 갈령 도로 부분에 군사배치를 하지 않아 일어난 전투이기 때문에 상주지역에 사용되었던 고대 교통로를 살펴보고자한다.

상주지역의 고대 교통로는 조선시대 말까지 이용되었던 영남대로와 삼국통일 시기의 주 통로인 추풍령 방향의 교통로, 영남대로와 추풍령 방향의 교통로 사이의 화남면 입석과 괴산군 송면 방향의 교통로로 대분할 수 있겠다.

영남대로는 상주시 낙동면 낙동리와 성동리, 낙상동, 사벌면 목가리(함창읍 금곡리)를 거쳐 함창읍의 당교, 문경시 유곡동, 마성면 고모성, 문경읍 조령관문을 통해 충주시 상모면으로 들어가는 통행로이다.

추풍령방향의 신라 삼국통일 시기의 교통로를 살펴보면 상주에서 내서면(갈방), 모서면 대포리와 소정리를 거쳐 모동면 이동리(배골)과 신천을 거쳐 수봉리를 지나면서 언덕길을 올라 문바우 고개(석문재)를 넘게 된다.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인 석문재를 지나면 영동군 황간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황간에서는 영동과 보은. 옥천으로 통행로가 갈라지고 있다. 보은. 옥천행로는 영동의 장군재를 넘어 옥천 산두리 토성이 나오고 이곳에서 북쪽으로 호군재를 넘어 보은의 삼년산성으로 가는 교통로가 형성된다. 보은에서 충주로 통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삼년산성 전략적 위치도

 

 보은 방향의 교통로는 화서에서 화남 평온을 지나게 되고 평온을 지나면 적암이 나온다. 이 적암이 성산산성 수곡문에 나타나는 적암대로라고 할 수 있겠으며, 이 도로가 보은으로 연결되고 보은에서 충주로 연결될 수 있다.

또 하나는 송면 방향의 교통로라고 할 수 있겠는데 성산산성 서북쪽을 돌아 갈령재를 넘고 화북면 용유리를 통해 눌재를 통과한다. 눌재를 통과하면 충청북도 괴산군 송면이고 충주로 연결된다.

보은군 삼년산성 주변에서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의 진격로를 살펴보면 상주에서 화령(화서면)으로 화령에서 삼년산성 충주로 이어 졌음을 알 수 있겠다.

한국전쟁 때에 사용된 교통로를 살펴보면 성산산성 부근인 화남면 동관리, 화서면 상곡리 주변에서 한국전쟁 때인 1950년 7월 17일부터 1950년 7월 24일까지 화령장 전투가 있었다. 화령장 전투는 한국군 육군 독립부대인 제17연대와 1군단 예하의 제1사단이 각각 화령장에서 북한 제15사단과 격돌하게 된 전투이다. 북한군 제15사단은 미원지구의 한국군 제1사단과 정면에서 공격하는 척 양동을 꾀하면서 주력을 15일부터 부흥리에서 화령장으로 통하는 통로를 따라 상주방면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의 이동 경로는 충북 미원군에서 전투 중 충북 괴산군 부흥리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화북면 운흥리, 중벌리, 장암리, 용유리, 상오리, 화남면 동관리, 화서면 하송리, 상곡리에 도착하여 상곡리 주변의 우산천변에서 전투를 하게 된다. 북한군이 이 지역에 투입된 그들의 병력은 9,200여명, 주요 장비는 122㎜ 곡사포 12문, 76㎜ 곡사포 8문, 120㎜ 박격포 12문, 82㎜ 및 61㎜ 박격포 59문, 76㎜ 직사포 4문, 45㎜ 대전차포 24문외 자동차 15대와 마필 60여두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군 병력과 장비를 볼 때 산악의 이동을 불가능하고 우마차가 통행할 수 있는 도로가 확보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동경로가 현재는 49번 지방도로 이용되고 있고, 동관리의 갈령 도로가 1940년 8월(소화 15년 8월)도로를 개통한 것으로 볼 때 그 당시에는 우마차가 충분히 이동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한국전쟁의 이동경로를 볼 때 갈령 도로는 충청북도와 경상북도를 연결하는 주요 노선이라고 볼 수 있겠고, 근대의 전쟁에 이용된 도로라면 고대에도 이 도로를 이용하여 이동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도로는 상주와 괴산 사이에 있는 길이 서울에 이르는 노정이 조령보다 하루정도 빠르고 길이 평탄하며, 외적이 침입할 우려도 없기 때문에 영남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이 길을 경유하고 있고 이 길이 열리면 조령은 쓸데없는 관방이 되기 때문에 1776년 12월 20일 통행할 수 없도록 고의적으로 막도록 한 기록이 있다.

『정조 즉위년 병신(1776, 건륭 41) 6월 22일 (신유)에 훈련대장 장지항(張志恒)이 아뢰기를, “상주와 괴산 사이에 있는 길에 관한 문제를 차대할 때 품처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신이 듣기로 이 길은 옛날부터 있어 왔고, 그곳에 사는 백성들이 서로 왕래할 뿐이지 서울에 이르는 첩경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조령(鳥嶺)과 비교할 때 길이 평탄하고 또 하루 노정이 더 가까우며 또한 외적이 침입할 우려도 없기 때문에 영남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 길을 경유하므로 본도에서 신칙하여 막았으나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형편상 영구히 막을 수 없고, 송면(松面) 땅은 네 읍(邑)의 요충이 되는 길이므로 방수(防守)를 설치할 만한 곳이기는 하나 진수(鎭守)를 창설하면 폐단이 많을 듯합니다. 만약 위급한 일을 당하면 본군(本郡)의 군수가 어떤 군대를 거느리고 나아가 긴요한 곳을 지킬 것인지 절목을 만들어 두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이 일은 양도의 도신과 수신으로 하여금 형편을 살펴서 품처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청컨대 대신(大臣)에게 하문하소서.” 하여, 내가 대신에게 물으니, 우의정 정존겸이 아뢰기를,

“만약 이 길을 열게 되면 조령은 곧바로 쓸모없는 관방(關防)이 될 것이기 때문에 막자는 의론이 있기까지 한 것입니다. 이 일은 가볍게 의논할 수 없으니 이번 가을에 순력(巡歷)할 때 먼저 양도의 도신과 수신으로 하여금 그 지형을 살펴서 장문하게 하여 품처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하여, 그대로 따랐다.

정조 즉위년 병신(1776, 건륭 41) 12월 20일 (정사)에 좌의정 김상철이 아뢰기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조규진(趙圭鎭)과 충청 병마절도사 남익상(南益祥) 등의 장계에, ‘상주와 솔면이[松面] 사이의 도로 형편을 일일이 돌며 살펴보니, 상주의 경계에 있는 갈가리고개 40리의 긴 계곡에 이제 막 한 갈래 새로운 길이 열렸는데, 지금 만약 그곳을 견고하게 막는다면 청주(淸州)의 경계에 있는 소솔치(所率峙) 사이의 길은 끊으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끊어질 것인바, 남북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자연 새재[鳥嶺]로 몰려들게 될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처리하도록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두 수신(帥臣)이 논한 내용은 모두 갈가리 고개의 새 길을 막자는 뜻의 요청이니, 장계에서 청한 대로 전처럼 길을 통행하지 못하게 하도록 양도의 도신과 수신들에게 엄히 신칙하소서.”하여, 그대로 따랐다.』

위 내용에서 청주 방향으로 상주경계에 있는 갈가리 고개 40리 계곡에 한 갈래의 새 길이 열렸고, 새 길을 막도록 하였다. 여기서 갈가리 고개는 어느 고개이며, 새 길은 어디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갈가리 고개(葛加峙)로 불려지고 있는 곳을 살펴보면 경북 울진군 북면 나곡리의 갈령재는 지금도 가을현(加乙峴)이라 불리고 있고 가을현은 갈령재로 불러지고 있다.

충청북도 단양군 매포면 우덕리의 갈고개는 가루고개, 갈령으로 불러지고 있으며, 갈(葛)치(峙)는 칡고개라는 이칭으로 불러지고 있으나 물줄기가 “갈라지다”라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화남면 동관리와 화북면 상오리 경계에 있는 갈령(葛岺)이 갈가리 고개(葛加峙)라고 할 수 있겠다. 「갈가리 고개에서 괴산군 송면의 상주경계까지 40리의 계곡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갈령에서 상주시와 괴산군의 경계까지의 거리를 측정해 보면 약 16㎞로서 40리의 거리에 해당한다. 따라서 1776년 조정에서 도로의 폐쇄가 논의된 도로는 현재의 갈령에서 화북면 입석리까지의 계곡 40리라고 할 수 있겠다. 갈가리 고개는 현재의 갈령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갈령도로인 49번 지방도인 상주와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와 연결되는 도로는 현재 997번 지방도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지방도에서 청주방향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화북면 중벌리, 용화리를 거쳐 국도 37호선으로 연결된다.



갈령도로 개통 기념비



 1776년 조정에서 폐쇄한 도로는 997번 지방도의 일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길을 막는 목적이 조령의 관방을 이용하여 주민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적의 침입을 막자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갈령 도로는 일제강점기인 1940년(소화 15)년 8월 김규년 군수 재임 때 도로 개설을 완료하고「갈령도로 개통 기념비」를 세워 지금도 갈령재에 남아 있다.

이와 같이 상주 갈령 도로는 고대부터 소백산맥을 넘는 주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어 왔고 현재까지 많은 이용되고 있으며, 지금은 갈령재 아래에 터널을 뚫어 통행하고 있다. 한국전쟁당시 이 도로가 주목되지 않았던 것은 긴급한 후퇴에 의한 방어선 구축에 허점을 보였고, 북한군은 이 허점을 이용하여 남하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Ⅵ. 화령장 전투(戰鬪)의 전개(展開)와 영향(影響)

한국전쟁은 8.15 해방을 맞은 지 5년 후인 1950년 6월 25일 발발하여 3년 1개월간의 전쟁을 치른 후 1953년 7월 27일 휴전을 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전쟁은 세계대전 후 미국과 소련을 정점으로 한 동서 양대 진영의 갈등구조였던 냉전(冷戰: Cold War) 체제하에 북한의 침략에 의한 민족전쟁으로 시작되었다. 이념을 달리하는 양대 세력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한반도내에 20개국의 전투부대가 참전하여 국제적 성격의 전쟁으로 발전하고 역사상 유례없는 참혹한 참화를 입었고 종국에는 38도선이 휴전선으로 바뀌는 결과 이외에는 전쟁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 한국전쟁에서 화령장 전투는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서울을 피탈당하고 한강 방어선마저 지키지 못하여 수원을 경유하여 평택으로 철수한 1950년 7월초에 평택일원의 국군 주력을 수도사단, 제1사단, 제2사단 등 3개 사단으로 통폐합하고 제1군단을 창설하여 7월 하순까지 중서부지역인 진천, 음성, 청주, 괴산, 미원, 화령장 일대에서 북한군 제2사단 및 제15사단과 20여일 실시한 지연전이다. 이 지연전은 낙동강 방어 전선을 형성하는 귀중한 시간을 얻어 전투력을 재정비하는데 성공하였으며, 낙동강 전선에서의 방어성공에 크게 기여하였다.

화령장 전투는 1950년 7월 17일부터 25일까지 9일간에 걸쳐 한국군 제17연대(중령 김희준)와 제1군단예하의 제1사단(대령 백선엽)과 북한군 제15사단(소장 박성철)과 화서면 상곡리와 화남면 동관리 일대에서 격돌한 전투로서 주요 전투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한국군>

구분

군단

사단

연대

대대

전투

부대

제1군 단장

소장 김홍일

제17연대장

중령 김희준

제1대대장 소령 이관수

제2대대장 소령 송호림

제3대대장 소령 오익경

제1사단장

대령 백선엽

제11연대장

중령 권동찬

제1대대장 대위 장근술

제2대대장 소령 정영홍

제3대대장 대위 김 소

제12연대장

중령 김점곤

제1대대장 소령 신현홍

제2대대장 소령 이무중

제13연대장

대령 최영희

제1대대장 소령 김진위

제2대대장 소령 안광영

제3대대장 소령 최병순

인접

부대

제6사단장

대령 김종오

지원

부대

미 제25사단 소장

William B. Kean

제24연대장 대령

Horton V.White

<북한군>

구분

군단

사단

연대

대대

전투

부대

제2군단장

중장 김무형

제15사단장

소장 박성철

제48연대장 중좌 김치구

제49연대장 중좌 이철영

제50연대장 총좌 이을선

포병연대장 대좌 이연섭

Ⅴ-Ⅰ 전 황

화령장은 화서면 상곡리로서 주변에는 속리산, 구병산, 봉황산, 형제봉, 천택산 등 500↔1000m 안팎의 험준한 산들이 산재해 있고 보은↔화령장↔상주를 잇는 25호 국도와 괴산↔송면리↔화령장↔황간을 잇는 977번 지방도 등 2개의 도로가 있는데 이 2개의 도로는 화령장 동쪽 4㎞에서 교차한다.


상곡리 전투지 전경


 7월 중순 남진하고 있던 북한군은 소백산맥을 넘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는데 7월 12일에는 중동부에서는 단양에서 국군 제8사단을 공격하여 죽령을 점령하여 소백산맥을 넘었고, 중부에서는 이화령과 조령을 지키던 제6사단을 격퇴시키지 못하여 소백산맥을 넘지 못하고 있었으며, 서부인 금강선에서는 국군 제1사단과, 수도사단 및 미 제24사단이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괴산의 제1사단과 이화령의 제6사단 간의 약 30㎞는 소백산맥의 험준한 산악지대로서 국군이 병력을 배치하지 않아 이곳을 관통하는 977번 지방도로가 개방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 도로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은 이유는 제1군단장 김홍일 소장이 977번 지방도로의 존재를 알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공백지대를 파악한 북한군은 제15사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7월 13일에 괴산을 점령한 북괴군 제15사단은 1개 연대를 괴산↔송면리↔화령장으로 은밀히 투입하고 사단주력으로 괴산 남쪽 거리고개의 국군 제1사단을 공격하여 이를 미원 쪽으로 밀어붙인 다음 북한군 제15사단 제48연대는 7월 15일 갈령 부근까지 진출하였고, 16일 밤에는 선두인 1개 대대가 977번 도로를 따라 화령장 동쪽 4㎞지점의 상곡리를 통과하여 상주로 진출하였다.

Ⅴ-Ⅱ 북한군의 남하


화령장 부근 지형도



 7월 15일 오전 적이 화북면 일대에 나타났다는 첩보에 따라 제1군단 정보참모 보좌관 겸 정보대장 방원철 소령(“이하 당시 직책”)은 정보대원 60명과 경찰병력 100여명을 차량화하여 적정 수집 중 적군이 갈령에서 내려와 동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발견하여 경찰병력은 엄호부대로 배치하고, 정보대원은 1개조 7명씩 8개조로 편성 마을에 침투시켜 12명의 포로를 획득하였으나 대원 1명의 총격으로 작전이 폭로되어 교전중 정보대원 2명의 손실을 입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제2군단 정보대의 1개조도 화령장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배상록 대위조였다. 또 다른 1개조는 김정수 대위조인데 상주에서 활동하였다.

배상록 대위조는 화서지서장 윤씨와 합의하여 정보대원 18명, 경찰 8명, 청년단원 20여명으로 2개조를 혼합 편성하여 적이 통과 예상이 되는 곳에 잠복근무를 하던 중 이재선씨로 부터 화북면 일대에 북한군이 침입하였다는 제보를 받고 적이 갈령을 넘어오는 것을 확인한 후 함창으로 달려가 군단에 보고하였다. 육군본부에서는 「제17연대가 제2군단에 배속되어 명일 아침에 함창으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알고 7월 17일 아침 “빨리 돌아가서 제17연대가 기습당하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아 화령장으로 복귀하였는데 화령국민학교에 제17연대 1대대 병력이 도착하여 식사준비 중에 있었다.


한국전쟁 사진



 이 당시 제2군단 제6사단은 15일 이화령과 북한군 제1사단과 격전을 벌여 조령을 빼앗기고 16일에는 북한군 제13사단까지 공격에 가담하여 문경마저 빼앗기고 이날 밤에 소백산맥에서 물러나 문경↔점촌 간의 영강선으로 철수하였다. 이렇게 전선이 불리하게 되자 육군본부의 예비로서 1군단에 배속되어 청주전투에 투입된 제17연대를 7월 16일 24;00부로 제1군단에서 제2군단으로 배속 전환하였다. 배속 전환 명령을 받은 제17연대는 진천 전투 후 보은에서 정비 중이던 제1대대를 먼저 출발시키고, 제2대대와 제3대대는 집결 되는대로 후속하도록 조치하였다. 연대 선두부대로 17일 04:00경 제 2군단에서 동원한 차량으로 보은을 출발하여 이동 중 관기리에서 1군단 작전참모 김종갑 대령으로부터「적이 괴산에서 갈령으로 진출했다」는 주의를 받았고, 07:00경 화령장을 지날 때 엄봉림으로 부터 북한군이 밤새도록 상주 쪽으로 내려갔다는 제보를 받았다. 이에 대대장 이관수 소령은 북한군 중간에 끼여 포위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적정을 확인한 후 이동하여야 한다는 결정을 하고, 화령국민학교에 집결한 후 청년단장 김기영의 안내를 받아 정찰을 하던 중이었다.

적이 통과하였다는 중달리↔상곡교 일대를 정찰하고 있던 중 북한군 전령 1명을 붙잡았는데「17일 08:00에 상주를 바라볼 수 있는 고지를 점령하였다. 소속은 제15사단 제48연대이며 임무는 상주를 점령하는 것이며, 연대의 주력부대가 상주로 진출하며 금곡리 일대에서 휴식할 예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대장 이관수 소령은 휴식 예정지에 매복하여 제48연대의 주력부대를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제1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화령장에 대기하고 있던 각 중대는 전투배치를 시작하여 15:00경에는 진지 구축을 완료 하였다. 977번 지방도와 병력 배치 선까지는 100~200m 정도로서 기습하기에는 알 맞는 장소였다. 병력 배치 중 연대고문관 스카레키 소령은 기습계획을 연대장에게 보고하러 보은으로 되돌아갔다.

Ⅴ-Ⅲ 상곡리 기습전

16:00가 조금 지나자 갈령에서 남하하는 북한군 행군대열이 도보부대와 각종 포탄을 실은 우마차 40여대를 끌고 왔으며, 예측대로 매복지역 정면인 송계초등학교와 상곡리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상곡리 기습 전



 대대장 이관수 소령은 390고지에서 북한군의 행동을 예의주시하면서 좋은 여건을 기다렸다. 해질 무렵인 19:30경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집결을 시작하였고 일부병사는 식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사격 명령을 하달하여 400여정의 총구에서 1시간 가까이 일제 사격이 실시되었다. 이때 연락을 받은 연대장 김희준 중령이 도착하여 소탕작전은 명일 아침 본대가 도착한 후에 하고, 우선 적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예비인 제2중대를 3중대 북쪽으로 우회시켜 977번 도로를 차단하고 적의 증원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제2대대와 제3대대를 긴급히 화령장으로 이동하도록 조치하여 제3대대는 18일 05:00, 제2대대는 03:00에 화령장에 도착하였다.

7월 18일 아침 연대장 김희준 중령은 제1대대는 상곡리 일대의 잔적을 소탕하고, 제3대대는 상주방면으로 진출한 1개 대대의 적을 포착 격멸하며, 제2대대는 연대예비로서 화령장에 집결 대기하도록 하였다.

이 전투에서 제1대대는 포로 30명, 사살 250명, 박격포 20문, 45㎜대전차포 7문, 소총 1,200여정 그리고 수점의 통신장비와 많은 군수품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Ⅴ-Ⅳ 동관리 전투


동관리 기습전


 북한군 제15사단 제49연대와 제50연대는 17일 저녁때까지 가리고개에서 국군 제1사단 제13연대와 격전을 벌이고, 이날 밤 제13연대가 미원으로 철수함으로써 18일에는 소강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7월 18일 10:00경 연대정보주임 유창훈 대위가 갈령을 수색하던 중 12:30경 자전거를 타고 갈령을 넘어서는 적병 2명을 생포하였다. 이 병사는 북한군 제15사단장 박정길 소장이 제48연대장 김치구 중좌에게 보내는 전령으로서 문서에 「제49연대가 제48연대를 후속할 예정이고, 제48연대는 제49연대와 합세하여 국군 제6사단을 공격하고, 김천․대구방면으로 진출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노획 문서에 따라 북한군 제49연대가 곧 이곳을 통과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포착 섬멸하기로 하고, 제2대대를 봉황산 북사면으로 진출시켜 후속하는 적을 매복 공격하도록 하고, 제1대대는 상곡리 원위치를 확보하여 잔적 준동에 대비하였으며, 제3대대를 연대예비로서 화령장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제2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동관리에서 하송리의 3㎞ 사이에 진지를 선정하였다. 진지는 977번 지방도까지 보통 20~50m, 먼 곳은 100m 정도여서 기습 사격으로 알맞은 거리였다. 제2대대의 병력은 화령장에서 봉황산 동측 능선을 넘어 동관리로 진출하여 20:00경부터 제7중대를 좌, 제5중대를 중앙, 제6중대를 우로하여 3개 중대를 와지선을 따라 배치하고, 제7중대의 1개 소대를 746고지 와지선에 배치하여 도주하는 적을 섬멸하도록 하였다. 기관총소대는 중대 간 간격을 메우도록 하였고, 81㎜ 박격포는 갈령 쪽에 사격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대대관측소는 봉황산 5부 능선에 설치하였다.

다음날 7월 19일 14:00경 제7중대 정면으로 접어들어 교전을 하였는데 적병 19명, 소 2마리, 말 3마리를 사살하고, 소 2마리와 말 9마리를 생포하였으며 우마차에 실려 있는 보급품과 죽은 소를 우마차에 실어 연대로 후송하고 적 시체와 죽은 말은 도로에서 떨어진 곳에 옮겨 위장하였다.

7월 20일 06:30경 피아 식별을 할 수 없는 부대가 제7중대 진전을 지나 진두가 제6중대 정면을 지나갈 때 대대장의 사격개시 명령이 하달되었다. 기습사격을 받은 부대는 대부분 쓰러졌고, 08:00경 안개가 걷힌 후 977번 지방도 위와 논바닥에는 시체와 장비가 즐비하였고, 이들이 북한군임이 확인되었다. 09:00경 제2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제6중대로 하여금 잔적 소탕을 하도록 하여 대부분 소탕되었고, 산으로 도주한 자들은 746고지 와지선에 배치된 1개 소대에 의하여 쓰러져 갔다. 제2대대는 14:00경에 소탕 작전을 끝냈는데 이 전투에서 사살 356명, 포로 26명, 박격포16문, 반전차포 2문, 기관총 53정, 소총 186정, 무전기 1대, 전화기 1대 등의 전과를 올렸고, 아군은 전사 4명, 부상 30명의 피해를 입었다.

Ⅴ-Ⅴ 포격전

북한군 제15사단 제49연대가 7월 20일 미명에 동관리 일대에서 기습 공격을 받아 괴멸적인 타격을 받게 되자 이날 14:00경부터 동관리 제2대대 지역에 포격을 가하더니 21일 아침에는 봉황산 일대에 포격을 계속하면서 977번 지방도로 좌우측인 장자동↔청계 선에 병력을 전개하였다. 이에 제17연대장은 예비인 제3대대를 장자동↔평온리 축선에 투입하고, 제1대대를 상곡리에서 화령장으로 철수시켜 연대예비로 전환하였다.

제3대대가 진지에 투입되자 적의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진지 후사면으로 대피하여 피해를 줄이려고 하였다. 이날 저녁 때 상주 방어 임무를 받은 미 제25사단 제24연대 제2대대가 상주에서 화령장으로 북상하고 있었으므로 제1군단은 미군부대와 제17연대와 합동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7월 22일 아침, 적이 제17연대 지역에 포격하고 있을 때 미 제24연대 제2대대는 평온리에서 582고지 방향으로 전진하면서 155㎜ 곡사포로 적진지를 포격하였다. 평온리에서 582고지로 전진하고 있던 미 제24연대 제2대대 병사들은 포격을 받아 피해가 속출하자 평온리로 분산 철수하였다.

미 제24연대 제2대대가 포격전으로 고전하고 있을 때 제1사단이 화령장에 집결하고 있었다.


제1사단 공격 계획



 Ⅴ-Ⅵ 제1사단의 화령장 전개

육군본부에서는 화령장에서 발생한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보은에서 춘양으로 이동준비하고 있는 제1사단을 화령장에 투입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제1사단은 화령장으로 이동하였는데 제11연대는 22일 07:00 화령장에 도착하였고, 제12연대는 동일 17:00 평온리에 집결했으며, 제13연대는 23일 08:00 화령장 남쪽 2㎞의 봉촌리에 집결하였다. 이 당시 1사단은 4,300여명(장교 276, 사병 4,112)으로서 비무장 병력이 상당히 많아 전투력이 매우 낮은 편이었다.

7월 22일 화령장으로 이동한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미 제24연대장 허튼 화이트(Horton V. White) 대령으로부터 엄호 요청을 받아 상곡리에 집결한 제11연대를 상곡리로 이동시키되 1개 대대를 송계국민학교 부근에 배치하여 미 포병대를 보호하고, 이동 중인 제12연대의 선두부대를 도착과 동시 장자동 계곡에 투입하였다.

Ⅴ-Ⅶ 하송리 전투


제11년대 공격계획



 23일 08:00경 제11연대 제1대대 1중대는 1개 소대 규모의 북한군이 북동 1㎞의 585고지에 나타난 것을 발견하고 이를 공격하였으나 적으로부터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이에 공격 준비 중에 있던 연대장은 제3대대를 585고지 남동쪽을, 제1대대는 남서쪽에서 공격하도록 하는 한편 사단에 야포 지원을 요청하였다. 585고지의 적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510고지 방향으로 적이 철수하자 지원포병이 이들에게 포격을 계속하면서 제3대대가 추격하였다. 제3대대는 하송리 650고지에서부터 완강한 적의 저항을 받았으나 미 포병대의 지원으로 이날 오후 이 고지를 점령하였다. 제2대대는 746고지에서 적의 저항으로 돈좌(頓挫)되어 있는 한편 제13연대 제3대대는 530고지를 점령하였다.

7월 24일 04:00 3개 대대는 일제히 공격을 재개하여 제2대대는 746고지를 점령하였고, 23:00경에는 871고지를 점령하였다. 제3대대도 04:00 공격을 재개 23:00 경 최종목표인 791고지를 점령하였다. 제3대대도 04:00 530고지에서 공격을 재개하여 673고지로 향해 전진하던 중 05:20경 잠자고 있던 북한군 2개 분대 18명 전원을 사살하고, 기관총 1정을 노획하였으나 적의 공격으로 점차 포위되어 가자 부대를 철수시켜 24일 22:00경 야간철수를 단행하여 금곡리에 집결하였다.

Ⅴ-Ⅷ 장자동 전투


제12연대 공격 계획



 포병으로 증강된 북한군 약 1개 대대는 510고지 선에 배치하고 일부병력은 아군의 기도를 탐지하기 위해 정찰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었다. 22일 16:00경 제12연대 및 제1대대 정보과 요원이 적정 수집 차 평온리에서 장자동을 도로를 따라 진출하다가 582고지에서 적의 포격을 받아 약 30분간 포격전이 전개되었으나 17:00경 장자동 뒷산에서 사격하고 있던 직사포 3문을 발견하고, 이를 무력화시켰다. 제17연대 3대대는 미군의 야포 지원 하에 512고지를 공격하여 점령을 하였는데 전사 16명, 부상 20명의 피해를 입었다. 제3대대의 피해에 따라 제1대대와 교대한 후 화령장으로 철수하자 512고지는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연대의 공격이 지지부진해 지자 제12연대장은 제1대대장에게 22:30에 야간공격을 감행하도록 하였으나 적의 저항이 심하여 다음날인 24일 05:00까지도 점령하지 못하고 있었다.

초조해진 연대장은 동관음으로 우회하여 685고지와 510고지를 공격하자 510고지의 적이 685고지 방향으로 퇴각하여 16:00경 고지를 점령하였다.

Ⅴ-Ⅸ 제1사단 철수

미 제25사단 제24연대의 선발대로 왔던 2개 대대는 7월 22일 이침 적의 포격으로 피해를 입어 재편성하고 있었고, 국군 제6사단을 지원하던 잔여 2개 대대는 24일 석양 무렵 화령장에 진입하였다. 제1사단은 이날 밤 제1군단장 김홍일 소장으로부터「화령장 진지를 미 제25사단에 인계하고 함창으로 이동하라」는 부대이동 명령을 받아 미 제24연대와 26일 05:00 양 부대 교대를 하였다.

Ⅴ-Ⅹ 제17연대 철수

봉황산에 포진하여 제1사단의 공격을 엄호했던 제17연대는 1군단으로부터「7월 25일에 미군과 진지 교대 후 함창 경유, 예천에 도착하여 제3사단의 지시를 받으라」는 명령에 따라 25일 아침 대대관측소까지 올라온 미군에게 진지를 인계한 후 화령장에 집결한 후 상주로 이동했다가 안동지역으로 출발하였다.

Ⅴ- 화령장 전투 결과

화령장 전투결과 기습전을 펼친 7월 17일~19일 3일간은 아군의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동관리 전투가 시작되는 20일부터는 국군의 피해가 속출해 전사 20명, 부상 50명의 피해를 입었다. 이에 반해 북한군은 643명이 사살되고 69명의 포로와 함께 박격포 36문, 기관총 53정, 소총 1,300여정 등을 노획하였다.

구분

한국군

북한군

노획물

전사

부상

사살

포로

70

20

50

712

643

69

7.17

291

250

41

박격포 20문, 45㎜대전차포 7문, 소총 1,200여정

7.18

2

2

7.19

19

19

소 2두, 말 3두 사살,

소 2, 말 9두 생포

7.20

34

4

30

382

356

26

박격포 16문, 반전차포 2문,

기관총 53정, 소총 186정,

무전기 1대, 전화기 1대

7.23

36

16

20

7.24

18

18

기관총 1정

이와 같이 7월 17일~24일까지 8일 동안 화령장 전투에서 북한군 제15사단 2개 연대가 괴멸되는 참패를 당하여 병력과 장비의 태반을 상실하였고, 소백산맥을 뚫고 상주를 점령한 후 대구로 진출하려는 북한군전선사령부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이 영향으로 북한 제15사단장 박성철은 면직되었으며, 약화된 전투력을 만회 할 수 없어 낙동강 전선에서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다. 반면 이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제17연대 연대장 김희준 중령 이하 전 장병이 1계급씩 특진하는 영예를 안았다.

1950년 7월 5일 창설된 제1군단은 예하부대인 수도사단, 제1사단, 제2사단을 주축으로 하고 기갑연대, 제7연대, 제17연대 등의 배속을 받아 진천~청주 음성~화령장 전투를 전개하였다. 미 제8군의 전선 조정계획에 의해 7월 20일 수도사단이 안동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제1사단이 7월 25일 작전지역을 미 제25사단 제24연대에 인계하고, 상주로 이동하자 군단사령부도 7월 25일 15:00 상주에서 안동으로 이동하였다.

1950년 7월 말로 시간과 공간과의 싸움인 지역작전을 마감하고, 워커장군은 7월 26일 전군에 낙동강선으로 철수준비 명령을 하달하고, 8월 1일 전군에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으로 도하철수명령이 하달되었다. 따라서 8월 1일부터 4일까지 낙동강방어 작전으로 전환함으로써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Ⅶ. 반격전(反擊戰)

상주지역에서의 반격전은 제11사단 제9연대로부터 1950년 10월 7일부터 10월 23일까지 상주 시내를 비롯한 김천, 문경, 모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950년 10월 4일 제11사단 제9연대 작명 제1호에 의해 전 병력은 제9연대장 지휘 하에 있게 되고 10월 6일 연대는 제11사단 작명 제2호와 미 제25사단 작명에 의해 중포중대를 제외한 연대 직할대 1, 2대대는 21시에 대구를 출발하여 상주를 향하였다. 10월 7일 9시 30분에 도착하여 상주농림중학교에 주둔하였다. 제5중대장 이하 157명은 21시에 서쪽, 소대장 이하 24명은 19시경 신기동 일대, 대포중대장 이하 124명은 우산으로 출동하여 사살 1명, 포로 11명, 소련식 장총 1정을 노획하였다.

10월 8일 제6중대장 이하 62명은 서문방향, 제1대대장 이하 410명은 소곡리로 출동하여 포로 126명, 경기관총 1정을 노획하였다.

10월 9일 대구 잔류하고 있던 제3대대는 김천, 중포중대는 상주 연대본부로 이동하였다. 제5, 6중대가 연대 복귀와 동시 제3대대는 호남으로부터 북쪽으로 이동하는 적을 격멸하기 위하여 문경을 출동하여 사살 127명, 포로 56명, 다발총 5정, 소련식 장총 18정, M1 1정을 노획하였다.

10월 11일에는 제2대대 본부 및 8중대는 문경, 제6중대는 웅산, 제5중대는 백화산, 제7중대는 기산에 배치되었다. 10월 12일에는 제3대대가 김천으로부터 상주 연대본부로 이동하였다. 10월 15일에는 전 병력을 화령장으로 집결 중인 북한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연대작전을 실시한 결과 사살 57, 포로 183, 소련식 장총 53, 경기관총 1, 구구식 7, M1 5정을 노획하였다.

제1대대는 1950년 10월 22일 06:00~23일 15:00까지의 전투 상황을 보면 10월 22일 05:00에 봉황산을 포위 공격하여 도주하는 적을 추격 08:00에 갈동, 서령리에 연하는 선에서 공격하고 1개 중대를 내서면 일대에 배치하여 퇴로를 차단하였다. 전투 결과 사살 455, 포로 343, RR140, SMG(기관단총)42, LMG(경기관총)1, HMG4(중기관총), 기관단총 2, 수류탄 85, 박격포 2, 반전차포1, 실탄 5,300개를 노획하였으며, 아군은 3명이 전사하였다.

구분

한국군

북한군

노 획 물

전사

부상

사살

포로

3

3

0

1,247

639

708

10. 8

126

126

경기관총 1정

10. 9

183

127

56

다발총 5정, 소련식장총 18정,

M1 1정

10.15

140

57

183

소련식 장총 53, 경기관총 1,

구구식 7, M1 5정

10.22

3

3

798

455

343

RR140, SMG42, LMG1,

HMG4, 기관단총 2, 수류탄 85,

박격포 2, 반전차포1, 실탄 5,300개

상주 반격전에서는 아군이 3명 전사하였고, 적군은 사살 639명, 포로 708명, 경기관총 등 많은 노획물의 전투성과가 있었다. 이 반격전에서 10월 15일과 10월 22일 화서 봉황산과 화령장에서 전투가 있었는데 이때 사살 512명, 포로 526명의 성과가 있는 반면 아군 3명의 전사가 있어 반격전에서도 화령장에서 큰 전투성과가 있었다.

Ⅷ. 상주지역(尙州地域)의 한국전쟁(韓國戰爭) 유적(遺蹟)

상주에서 한국전쟁과 관련된 유적은 화령장지구 전적비와 전쟁에서 순직한 군경과 관련된 유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화령장 지구는 공원화되어 국방유적으로 조성하였고, 군경과 관련된 유적은 개인이 비를 세워 공적을 기리고 있다.

Ⅵ-Ⅰ 화령장지구 전적비




 화령장지구 전적비는 북한군 제15사단이 화령장을 통하여 대구를 점령하려는 적의 기도를 좌절시키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상주시 화서면 신봉리 산1-3, 산 2-8번지 일대 약 11,800㎡를 도시공원으로 결정하고, 경역면적 약 7,196㎡, 비 높이 8m로 1980년 11월 8일 조성하였다. 비신에는 군관민 합동으로 북한군을 섬멸시킨 내용을 상기하는 동상 조각이 새겨져 당시의 전투 상황을 상기시켜 주고 있고, 비의 전면 좌측에는 백전불굴(百戰不屈)의 전투상인 높이 4m의 칼과 국민총화단결상(國民總和團結象)인 높이 2.4m의 방패를 조각하여 세워두고 있다. 이 전승 기념비는 국방부의 협조를 얻어 교통부와 국제관광공사가 주차장, 휴게소, 전기조명시설 등을 설치하였다. 이 비에는 다음과 같이 비의 설치 연혁이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소백산맥을 가로 지르는 삼국시대의 고전장, 이곳 화령장 요새지에서 붉은 침략의 무리를 쳐부수고자 봉황산 언저리의 동관리와 상달리를 지켰던 국군 제1사단과 제17연대 그리고 제1군단 정찰대의 장병들은 벽력같은 기습공격으로 북과 15사단의 주력을 여지없이 섬멸하였으니 그 눈부신 전공을 청사에 길이 남겨 자손만대에 전하고자 이 전적비를 세운다.

전사약사문

전쟁이 발발한지 2주째로 접어드는 1950년 7월 중순에 북괴 제2군단은 조기에 소백산맥을 넘어 아직도 대전과 청주지방에 분전중인 국군 및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일대 섬멸전을 전개할 기도 하에 그들의 선봉인 제15사단을 속리산 동쪽의 깊은 계곡으로 투입하여 상주~김천 축선으로 돌파구를 확대코자 중앙돌파를 획책하였다. 이때에 제1군단에서는 이 지역의 적정이 불명하여 군단 정찰대로 하여금 화북~화서면 간의 공백지대를 탐색케 하였던 바, 14일 12시에 동비령에 다다른 동 정찰대가 북괴의 첨병소대를 발견하자 이를 기습하여 12명의 포로를 사로잡은 끝에 이 같은 적정을 확인하여 곧 군단에 보고하였다.




 이에 육군본부에서는 보은에서 함창으로 이동 중인 제17연대를 이곳 화령장에서 정지시켜 동 정찰대와 함께 이 적을 현지에서 저지 격멸토록 명령하니 이로부터 매복 작전을 전개한 연대는 6일 동안에 걸쳐서 상곡리와 중달리 그리고 동관리 등을 오르내리며 유리한 지세를 이용한 기습공격으로 그들 제48연대의 주력을 격멸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25일에 현지에 도착한 제1사단이 그 임무를 인수하여 25일까지 지연전을 핌으로서 군은 다시 전선전마다 시간 여유를 얻어 제1군단은 안동지구로 이동하고 제2군단은 함창-상주 전선을 막았으며, 또한 미 제24사단을 비롯한 미 제25사단과 미 제1기갑사단도 상주-김천 정면에 병력을 전진하는 등 낙동강 방어선의 형성에 크게 기여 하였던 것이다’

라고 동판으로 한글과 영문으로 병서 조각하였다.

Ⅵ-Ⅱ 무공수훈자 공적비



 무공수훈자 공적비는 화서면 신봉리 산2-8번지에 위치한다. 상주 출신 무공보훈 훈장 수여자 174명의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2001년 10월 30일 설립하였다. 무공 및 보국수훈자를 추가 명각하여 2008년 현재는 243명이다. 부지면적 52.8㎡ 탑 높이는 6m이다. 매년 10월 30일 100여명이 기념식 행사를 한다.

Ⅵ-Ⅲ 충혼탑



 충혼탑은 신봉동 201-3번지 남산 향교 동쪽에 한국전쟁 때 전몰한 상주지역 군경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63년 4월 25일 재향군인회장 김기원씨 발기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회원과 기관장의 찬조금 27만원으로 탑만 조성하였고, 1977년 4월 5일부터 5월 30일까지 상주군에서 1,240여만원으로 제단 보수. 담장설치. 경내 조경과 주변 환경을 정비하였다. 봉안된 분은 1,423위이다. 기단높이는 1.75m, 탑신 높이는 12m이다. 매년 6월 6일 500여명이 현충일 추념행사를 한다.


 Ⅵ-Ⅳ 조승각 송덕비



함창읍 증촌리 비석군에는「步兵第八師團民事處長陸軍少領趙承珏頌德碑」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조승각 소령의 송덕비로서 조승각은 평남 용강에서 1916년 7월 13일 출생하여 만주에서 학교청년 총 단장으로 청년운동을 했고, 한국전쟁 이후 3개월 동안 함창 주둔 당시 강원, 충청, 경인지구에서 온 피난민 3만여 명의 구호활동을 함으로서 소령의 송덕을 기리고자 함창거류 피난민 일동이 세웠다. 비의 높이는 1.6m, 비신은 1.14m이다.

Ⅵ-Ⅴ 쌍용군단 창설 표지석



 쌍용군단은 1950년 7월 15일 함창중학교에서 창설되었으며, 함창읍 구향리에 소재한 함창중고등학교에 쌍용군단 창설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창설된 후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어 다부동과 영천지역 전투 그리고 북진작전에서 평양 탈환전투, 초산 전투 등 36회의 주요 전투에 공을 세워 3회의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다. 휴전 이후에는 중동부전선의 요충지를 담당하면서 쌍용군단으로 발전해 왔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2002년 7월 15일 창설 기념 표지석을 설치하였다.

Ⅵ-Ⅵ 한국전쟁 순직비

화서면 신봉리에 소재한 비석군에는「黃乙欽總警殉職碑 (1950.10.12. 上谷里에서 戰死)」,「金容煥警衛殉職碑(1950.10.3. 錦山里에서 戰死)」,「陸軍大尉金三萬殉國碑(1950.7.20. 戰死)」의 3기가 문화재자료 제126호인 신봉리 석조보살입상 좌측에 세워져 있다.


                             황을흠 총경 순직비.          김용환 경위 순직비 .            김삼만 순국비

 

한국전쟁 상주 화령장 전투의 전승 기념비는 1980년 11월 8일 국방부 주관으로 상주시 화서면 신봉리 산 1-3번지 일대에 조성하였으나 조성 이후 뚜렷한 기념행사 없이 전적지로서만 관리되어 왔으며, 군사 기념시설로서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한국전쟁 전승 시설로 부각 된 것은 28년이 지난 후 2008년 상주시혁신협의회 주관으로 율곡 안보 교육이 진행되면서 필자는 “상주 전투사”고찰에서 화령장 전투를 소개한바가 있었다. 그 이후 화령장 전투의 기념행사의 당위성의 단초가 되어 2010년에는 전군이 참여하여 화령장 전투를 재현하는 국방부 주관 행사를 시작으로 매년 전승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지금은 전투 전승행사와 더불어 기념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어 상주 화령장 전투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고 있다.

년도별

기간

내용

주최

사업비

1980

11.8

전적비 조성

국방부

2008

육곡 안보교육

혁신협의회

2010

10.8~10

전투 전승행사(제1회)

기념관 기본설계

국방부

상주시

286

50

2011

9.6

전투 전승행사(제2회)

상주시

50

2012

9.4

전투 전승행사(제3회)

기념관부지매입 및 설계용역

상주시

상주시

105

1,630

2013

전투 전승행사(제5회)

기념관 건립

상주시

상주시

100

1,620

한편 상주시에서는 화서면 하송리 58번지인 송계초등학교 일대 32,000㎡에 총사업비 110억원을 투입하여 2014년까지 기념관, 상징탑, 공원, 체험시설 등을 조성하는「상주 화령장 전투전승기념관 조성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이 사업은 국가보훈처의 현충시설 건립과 경상북도의「낙동강 호국 평화 벨트 조성 사업」으로 추진되며, 새로운 국가 안보 테마와 차세대 호국 체험장으로 활용될 계획이다.

Ⅸ. 맺음말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의 개략과 한국전쟁 중 상주에 관련된 전쟁을 살펴보았다. 상주는 남북으로 뻗은 소백산맥으로 동서가 갈라진 길목에 위치하여 어떠한 전쟁이든지 피 할 수 없었고 전쟁으로 인하여 백성은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상주 백성이 상주를 버리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지 않은 것은 온화한 기후와 충적 평야로 형성된 농경 사회에서 문전옥답(門前沃畓)을 버리고 타지로 유리걸식(遊離乞食)하는 피난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떠나기는


사업계획 조감도


 힘이 들었을 것이다. 1960년대 까지는 인구가 계속 늘어 상주의 인구가 27만에 육박할 정도로 늘어난 것을 보면 이를 반증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길목에 위치하여 모든 전화로부터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 그 당시의 문화유적은 소실됨으로서 문화유적을 중시되는 현세에 그 당시 조상의 유적이 전해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라고 하겠다.

현세는 역사적으로 뚜렷하게 꼭지 점이 되는 사료는 어떠한 사료든지 그 자체가 관광 자원이 된다. 상주의 화령장 전투도 한국전쟁의 전쟁사에 빠질 수 없는 전투이다. 비록 1950년 7월 17일에서 7월 25일까지 9일간의 짧은 기간이지만 군사작전에서는 더 없이 유효한 기간이다. 이 화령장의 전투에 의해 북한군의 남하가 9일간 지연됨으로 인해 낙동강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고, 결국은 인천상륙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전쟁사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1980년 11월 8일 화령장전적지를 조성하여 화령장지구 전적기념비를 세웠다. 그러나 화령장 전적지를 조성한 지 30여 년이 되나 처음 조성된 전적지에서 화령장 전투를 가시화 시킬 변화가 없었고, 지금은 전적비 마저 수목에 가려져 보이지 않아 발길마저 끊긴 상태였었다. 이러한 전쟁 기념물의 사장을 해소하고자 필자는 2008년 상주지역 전투사를 정리하여 화령장 전투를 육군안보교육 교재로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 다행스럽게 국방부의 6.25 제60주년 기념행사 계획을 하면서 필자의 상주지역 전투사의 화령장 전투 성과가 주 테마가 되어 기념행사는 화령장 전투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어서 매년 화령장 전투 전승행사를 이어가면서 110억원 규모의 전승 기념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어 늦게나마 화령장 전투에서 희생된 순국자의 넋을 기리는 곳이 마련됨은 누구보다도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상주는 전쟁 관련 기념지가 다른 곳보다는 많은 곳이다. 1592년 임진왜란당시 조선 최초 민관군 연합 항전한 임란북천전적지와 1254년 몽고군 침입 때 적군의 과반을 물리치고 승전한 항몽대첩지, 그리고 이번에 한국전쟁의 승첩지가 또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호국성지가 만들어진다고 하여도 그 전쟁관련 기념지를 어떻게 관리하고 발전시키며, 관람객을 유치할 것인지의 사후관리와 보완 발전 방안도 함께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좋은 역사적 사실과 시설을 갖추고 있으나 관람객이 찾지 않는 기념지는 무용지물(無用之物)로 전락할 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