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지역 출토 도활자 소개
상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김 진 형
목 차 | ||||
Ⅰ. 머리말364 Ⅱ. 기존에 연구된 도활자의 역사365 Ⅲ. 상주지역 출토 도활자의 발견 경위367 Ⅳ. 맺음말372 |
상주지역 출토 도활자 소개
상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김 진 형
Ⅰ. 머리말
도활자(陶活字)란 질그릇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차진 흙에 물을 섞어 잘 찧어 네모꼴로 만들고, 그 위에 글자를 새겨 두껍게 백랍(白蠟)을 칠한 다음 구워서 만든 활자를 말한다.
이러한 도활자는 지금까지의 연구로 성과로 볼 때, 우리나라에서는 대략 17세기 경에 제작되고 18세기에 인쇄로 실용화되었다고 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도활자 실물은 국립중앙박물관, 성암고서박물관 그리고 상주지역을 포함한 몇몇 개인들이 소장한 정도이며, 금속활자나 목활자의 실물에 비해 그 수는 아주 적다. 상주지역에 소장된 도활자의 실물은 상주교육청 소장(현 상주박물관 기탁)으로 되어 있는 2점이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이번 필자의 조사과정에 추가로 17점이 더 확인되었다.
이 글에서는 먼저 그간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도활자의 역사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살펴보고 이미 알려져 있던 상주교육청 소장의 도활자를 소개하면서 이번에 추가로 확인된 17점의 실물의 출토경위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 소개로 우리나라 고인쇄문화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수 있길 바란다.
Ⅱ. 기존에 연구된 도활자의 역사
도활자에 대한 연구는 故 손보기, 천혜봉, 그리고 이기성 교수에 의해 이루어진바 있다. 손보기와 천혜봉 교수는 고고학적과 서지학적 견지에서 다루어졌는데 도활자를 비롯한 금속활자, 목활자 등 우리나라 인쇄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역사와 가치에 대해 많은 성과를 내었다. 그리고 이기성 교수는 도활자의 제작기법과 사용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현대 한글 글꼴을 개발하는 등 실용적인 측면에서 많은 연구를 한 바 있다.
이러한 연구성과에는 도활자의 역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활자의 재료인 흙으로 활자를 처음 만든 사람은 1041~1048년에 북송(北宋)의 필승(畢昇)이 처음 만들어 냈다고 전해진다. 이것이 도활자 또는 교니활자(膠泥活字)라고 불리는 활판의 최초 형태이다. 도활자는 활판(活版)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데, 흙으로 활자를 만드는 방법이나 이를 활용해서 인쇄하는 방법은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에 잘 나타나 있다. 책을 판각본(板刻本)으로 인쇄한 것은 당나라 때도 그리 성행하지 않았다. 풍영왕(馮瀛王)이 오경(五經)을 목판본으로 처음 인쇄한 이후 서적은 모두 판각본으로 이루어졌다. 경력(慶曆 : 송나라의 인종, 1041~48 재위) 연간에 벼슬이 없는 평민 필승이 활자판으로 인쇄하는 방법을 창안해냈다. 그 방법은 동전만큼 얇은 두께의 흙(粘土)에 글자를 새겨 글자마다 따로 떨어진 활자를 만들어서 이것을 불에 구워 단단하게 만든다. 그리고 철판(鐵板)을 만들어서 그 위에 송진과 납(蠟)과 종이를 태운 재(紙灰)를 발라서 활자판을 짤 판을 만든다. 다음에는 인쇄하기 위해 네모진 쇠로 만든 틀을 철판 위에 올려놓고 필요한 활자를 골라서 그안에 채워나간다. 그리고 그 철판을 불에 올려놓으면 먼저 발라놓았던 약(接着劑)이 녹아 굳은 판이 되는데, 그 위를 다른 판으로 문지르면 고르게 균형이 잡힌다. 이와 같이 하면 2, 3장 정도 찍을 때는 그리 간편한 것을 모르지만 수십·수백·수천 장을 찍을 때는 매우 신속하다. 항상 2개의 철판을 준비했다가 한 철판으로 인쇄할 때는 다른 하나의 철판에 활자를 꽂아놓고, 앞서 조판한 판의 인쇄가 끝나면 다음 판을 인쇄에 이용한다. 이렇게 번갈아가면서 찍어내면 순식간에 인쇄를 끝낼 수가 있다. 글자마다 모두 몇 자씩 활자가 있는데, 지(之)·야(也)자 등은 20자 이상 만들어두었다가 거듭나올 때 활용한다고 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도활자에 대한 기록으로는 일본인 학자 아유가이[鮎貝房之進]가 1722년 함남 북청에서 인쇄한 <삼략직해(三略直解)>에 '도자계'(陶字契)라는 기록을 들어서 도(흙)활자를 만들어 책을 출판하는 계모임으로 해석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여기에 보이는 도자계는 반드시 흙활자를 만드는 계라기보다 '도'(陶)자가 교육 또는 수양으로 풀이될 수 있어 활자와 결부시키는 해석이 올바르지 않다는 학설도 있다. 최근에 발견된 필사본 <동국후생록(東國厚生錄)>에 흙으로 활자를 만드는 방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우리나라에서도 흙으로 활자를 만들어 인쇄했다는 증거를 찾게 되었다.
동국후생록(東國厚生錄)에서 토주자(土鑄字)의 항목을 보면 통제사 이재항(李載恒)이 황해도 해주병영에 있었을 때 손수 체험한 도활자 만드는 법이 소개되고 있다. 오지 만드는 찰흙을 아주 고운 분말로 만들어 유자나무의 기름과 같은 수액을 섞어 고루 잘 빚어질 수 있도록 충분히 찧되, 그것이 다 이루어지면 쇠구슬의 주판과 같은 구멍을 줄줄이 뚫고 그 등의 흙이 떨어져 나오는 곳은 쌍육의 주사위와 같이 만든 나무판을 사용하여 네모꼴의 활자모양을 만들어 냈다. 이것을 햇볕에 벌여 놓아 말린 다음 홍무정운의 글자체로 중국 종이에 써서 그 위에 엎어 붙이고 새겨 두텁게 흰 밀랍을 칠한 뒤 불에 구어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이 도활자를 만들어낸 이재항은 1723년에 경상 좌수사 그리고 1725년애 경상우병사를 거쳐 통제사가 되고, 1729년 6월에 황해 병사로 부임하여 1730년 9월에 평안감사로 갈려가지까지 1년 3개월간 봉직한 바 있었으므로 바로 그 무렵에 만들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도활자의 실물은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성암고서박물관과 상주지역을 포함한 개인들이 몇 종 소장하고 있다.
Ⅲ. 상주지역 출토 도활자의 발견 경위
1. 도활자 발견 경위
상주지역의 도활자 실물은 필자의 이번 조사 전까지 2점이 알려져 있었다. 상주교육청이 소장자로 되어 있는 이 2점은 당초 상주시 남성동의 상주교육청 교육관에 소장되어 전시되고 있었다. 하지만 교육관의 사용시설 변경과 상주박물관 건립 공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인 2007년 8월에 상주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이 2점의 도활자가 어떻게 상주교육청 소장이 되었는지 누가 기증 또는 구입을 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필자가 상주의 도활자에 대해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17점의 새로운 도활자가 확인되었다. 도활자에 대해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이 상주시 외서면 봉강리에 있다고 해서 2013년 9월 그 동네를 찾아갔다. 하지만 정확한 집 주소를 몰라 헤매던 중 어느 한 집의 마당에서 나물을 다듬는 한 사람을 만났다. 그 분께“도활자에 대해 궁금한게 있어서 찾아왔는데, 이 동네에 내용을 잘 아시는 분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니 그는“도활자는 이 동네에서 내가 제일 잘 안다”고 하였다. 잘 됐다 싶어 양해를 구하고 도활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필 자 : 도활자에 대해 어떻게 아십니까?
제보자 : 그거야 내 밭에서 나왔으니까 잘 알지.
필 자 : 아, 그렇습니까?
제보자 : 내 나이가 올해 87인데, 어렸을 적에는 그거 가지고 공기 놀이도 하고 뒤집기 놀이도 하고 그랬지. 그때는 뭔지도 모르고 놀았는데 어느날 내 아버지가 보시고는 그거 가지고 놀면 안된다고 혼난 기억이 있지.
필 자 : 그럼 그걸 어르신 부친께서 찾으신 겁니까?
제보자 : 그렇지. 내가 가지고 있는게 17개인데 15개 정도는 우리 아버지가 우리 밭에서 찾아서 주신 거고, 나머지는 내가 농사지을 때 찾은거지.
필 자 : 그럼 그걸 아직 가지고 계십니까?
제보자 : 가지고 있지. 한번 볼라요?
필 자 : 네. 보여주십시오.
몇 분뒤 제보자는 작은 명함상자에서 도활자 실물 17점을 꺼내 놓았다. 우리 박물관에 소장된 2점의 도활자와 형태며 크기며 똑같아 보였다.
필 자 : 이거와 똑같은 게 우리 박물관에도 2점 있습니다.
제보자 : 그래? 난 나만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건 어디서 났어요?
필 자 : 상주교육청 교육관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우리박물관으로 이관했습니다.
제보자 : 아! 기억난다. 아마 그거 우리 아부지가 우리 친척 조카에게 2개 줬는데, 그 조카가 상주교육청에 줬다는 얘길 들었어.
따라서 상주박물관에 소장된 2점의 도활자 실물도 이 제보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곳 외서면 봉강리에서 출토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필 자 : 아 그렇습니까? 그럼 그 밭에는 아직도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제보자 : 글쎄, 내가 아무리 더 찾아볼래도 이젠 안 보이더라구. 그리고 한 3-40년 쯤 됐으려나? 손보기 박사라고 학생들하고 여길 왔더라고, 어디서 얘길 듣고 왔는지 내 밭에서 한참을 찾고 갔어. 그때도 한 개도 못 찾았지.
필 자 : 네. 그럼 어르신말고도 다른 분도 이곳을 알고 있겠네요?
제보자 : 이 동네 우리 친척들은 일부 알고 있지.
필 자 : 네. 그럼 그 밭을 저한테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보자 : 그러지. 가보세.
제보자가 안내하신 밭은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3필지였다. 밭의 서쪽 부분에는 얕은 야산이 있는데 야산과 밭이 걸쳐있는 부근에서 많이 찾았다고 했다.(사진 4)
그래서 필자는 많이 발견되었다는 부근에 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워낙 오래동안 경작이 이루어졌고 성토가 많이 이루어진 탓에 인쇄와 관련된 다른 시설은 육안으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추후 이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 등을 기대할 수 밖에는 없을 것 같다.
2. 도활자 실물 현황
ⅰ) 상주박물관 보관 도활자(사진 1)
상주교육청이 소장자로 되어있고 현재 상주박물관에 보관 중인 도활자는 2점이다. 네모꼴의 몸통 중앙에 세로로 구멍이 뚫려 있다. 판을 짤 때 끈으로 꿰어 배자(글씨를 벌여 놓음)할 수 있도록 고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 크기 : 좌(가로 왈) : 가로 1.5cm, 세로 1.1cm, 높이 0.8cm
우(으르렁거릴 은) : 가로 1.6cm, 세로 1.1cm, 높이 0.9cm
ⅱ) 오병만씨 소장 도활자(사진 2) 오병만씨가 소장 중인 도활자는 총 17점이다. 상주박물관 보관 도활자와 마찬가지로 네모꼴의 몸통 중앙에 세로로 구멍이 뚫려 있다. 판을 짤 때 끈으로 꿰어 배자할 수 있도록 고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 크기 : 현장에서 정확한 실측은 못했지만 상주박물관 소장 도활자와 유사 - 출토지 현황(사진 3) : 오병만씨의 진술에 의한 도활자 실물 출토지는 행정구역 상 상주시 외서면 봉강리 991번지에 해당되며 현재 가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사진 4의 둥근 사선과 같이 2필지에 연접해서 북쪽 부분에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고 하며 특히 밭 둑에서 많이 나왔다고 한다. 오병만씨 소유 밭에서 북동쪽으로 연접해서 작은 야산이 위치하고 있다. 주변 유적으로는 남동쪽으로 봉강리 고분군이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으로 750m 부근에 봉강리 사지가 위치한다.
사진 3. 오병만씨 소장 도활자 출토지 위성사진 Ⅳ. 맺음말 현재 필자가 근무하는 상주박물관에 소장된 유물 가운데에는 출처가 밝혀지지 않은 유물이 꽤 많다. 이로 인해 이러한 유물들에 감춰진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기가 상당히 힘이 든다. 아마도 이러한 사실은 다른 지역의 어느 박물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도굴이나 불법 유통의 과정으로 인해 생긴 유물의 경우는 어쩔 수 없겠지만 이번에 필자가 조사한 외서면 봉강리 출토 도활자의 경우에도 소장자의 나이(87세)를 감안했을 때, 그 분이 돌아가신다면 도활자의 출토지나 여러 상황에 대해서 알 길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 조사로 인해 그간 알려지지 않은 17점의 도활자 실물이 확인된 것은 좋은 성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새로이 발견된 17점의 도활자와 함께 상주박물관에 보관된 2점의 도활자를 토대로 이들 활자가 어디서 제작이 되었고, 이들 활자로 찍은 인쇄본까지 함께 이글에서 소개했다면 좋겠지만 이는 추후 과제로 남긴다. 또한 다른 지역의 도활자와의 비교 분석을 통해 이들 도활자의 제작시기 등을 더욱 명확하게 밝힌다면 좋겠지만 이러한 과제는 본 자료를 토대로 고인쇄 전공자들이 좋은 성과를 내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끝으로 도활자 실물은 국내에 알려진 것이 몇 점 되지 않은 만큼 희소가치가 아주 높다. 따라서 유물의 안전한 보관과 우리 후손들에게 널리 보존될 수 있는 방법으로 박물관에 기증 또는 기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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