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3호

가규 진사일기 해제(可畦 辰巳日記 解題)

빛마당 2014. 3. 5. 15:49

가규 진사일기 해제(可畦 辰巳日記 解題)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金 子 相

목 차

계사년480

병진년491

갑오년513

을미년517

병신년518

정유년520


가규(可畦) 진사일기(辰巳日記) 중 계사(癸巳)년 시작

계사(癸巳)년 1월1일 지방(紙牓)을 설치하고 간략히 조선(祖先) 여러 위(位)에게 전의(奠儀)를 행하였다.

2일 여러 유사(有司)와 더불어 예절(禮節)을 갖추어 소장(疏章)을 모시고 다리, 문까지 나가 보내고 돌아왔다. 대게 군병을 소모(召募)한 뒤로 왜적을 참획(斬獲)한 것이 많았으나 행조(行朝;行在所)가 멀리 막혀 한번도 직접 진달(進達)하지 못했다가 이제야 비로소 소문(疏文)을 갖추어 사인(士人) 황적(黃廸)과 서리(書吏) 정언(鄭鶠)으로 하여금 모시고 진달(進達)하니 고충(孤忠)으로 나라를 짊어지고 한번 죽음을 본받지 못하다가 그대들을 천리 먼 곳으로 보내니 괴로운 뜻을 상상(想像)할 만 하도다.

4일 대장과 더불어 모여 원소(元疏)중 생략하거나 더하거나 삭제할 것이나 고칠 것을 의논하였으니 대게 동궁(東宮;往世子)에게 아울러 진달하고저 하기 위함이다. 청주의 관리 주서남(周瑞男)으로 하여금 소장(疏章)을 정서(精書)하였다.

6일 대장께서 여러 막료(幕僚) 및 부장(部將) 등을 좌우에 열립(列立)토록 하고 상소문에 절한 다음 파회하였다(右部將 閔天吉과 後部將 朴匡國이 상소문을 가지고 黃廸의 집으로 돌아 갔다.)

7일 대장께서 호우(湖右)로 향하여 출발하는데 건의(建義)대장 및 여러 도주(道主)를 찾아보기 위함이고, 동행(同行)은 이욱(李勗), 이민갑(李民甲), 김덕민(金德民) 및 나(吾)이다. 산북(山北)에 윤담(尹潭)의 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눈(雪)을 맞으며 청천진(靑川陣)에 도착하였다.

8일 대장께서는 출발하고 나는 뒤에 떨어져 공림사(空林寺)로 달려가서 들으니 의장(義將) 박춘무(朴春務)가 죽산진(竹山陣)에서 와서 주성암(酒城菴) 근처에 있음으로, 두루 보았을 것이므로 세전에 죽산진에서 교전(交戰)한 연유를 물으니, 의장이 군병을 거느리고 먼저 다달으니 두어 고을의 수령들이 동시에 군병을 내어 진격(進擊)하고, 왜적도 역시 기세가 다하여 도망가는 정상이 현저히 나타났다. 그럼에도 병사(兵使)가 바라보기만 하고 왜적의 이웃 진(陣)에 달려와서 후원하지 않고 있다가 우리 군대가 장차 물러날 때에야 오니 왜적에게 입은 우리의 상해(傷害)가 매우 많았다 하였다. 아! 병사가 한갓 군병으로 겹겹이 에워싸기만 하고 군기(軍機)를 그르쳤으니 만약 그 죄(罪)를 논한다면 만 번 죽어도 무엇이 아까우리오!

9일 진소(陣所)로 돌아오니 상의장(尙義將) 및 선산부사가 밀관(蜜關;비밀통지문)안에 두 왕자께서 오는 초이튿날 서울에서 출발할 계획이라 하였으니 그 날을 기약하여 관군과 의병이 합세하여 죽현(竹峴)에 왜적이 다니는 길을 엄격(掩擊)하자는 것이라 하였다. 노통진(盧通津)이 우리 진(陣)에 하첩(下帖)하여 함창에 있는 군병을 대현(大峴)으로 진(陣)을 옮겨 여러 장수가 의논하는 곳에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安三龍을 보내어 본진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12일 진(陣)에 군량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쌀 50여 두(斗)를 보냈다.

대장께서 전의(全義)로부터 일행이 무사함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와서 다행하나 죽산의 전투가 또 불리하다고 들려와 마음아프다.

13일 다섯 부장(部將)들이 상주에서 들어와서 10일 외남(外南)에 도착하여 밤에 청리(靑里)로 나와 상주판관(判官)과 상의군,영의군이 모두 모여 장차 죽현에 설복(設伏)할 계획이다. 공성을 불태워버린 왜적 200여명이 청리를 지나 곧 회군(回軍)하여 반포(半浦)에 이르러 큰 싸움을 벌린 결과 살상(殺傷)이 수 없이 많았고, 추격(追擊)하여 오갈지(烏渴池) 앞에 이르렀으나 성안에 왜적과 합세할 것이 두렵고 또 군량이 떨어져 선산으로 환군(還軍)하여 아무런 형영(形影)도 없으니 군부(君父)를 위하여 왜적을 토벌하는 뜻이 과연 이같은 것인가! 통탄(痛歎)이 깊었다.

14일 본도(本道)에 시험(試)보는 기일(期日)이 24일이지만 동사인(同事人), 무부(武夫) 들이 모두 이미 흩어져 돌아갔고 군병을 모을 기일도 알리지 못했으니 한(恨)이 된다.

15일 조보(朝報;官報)를 얻어보니 당장(唐將) 설번(薛藩)이 황제(皇帝;唐의 황제)에게 올린 소문(疏文)에 말하기를 천병(天兵;唐軍)이 구(救)하지 아니하면 본국이 급한 일을 당하게 된다는 등 말 뜻이 매우 격렬하고 간절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을 일으키게 하니 중국에는 사람이 있다고 할만하다.

17일 대장이 중로(中路)에서 관문(關文)을 옮겨왔으니 이내 건의(建義)가 급급(急急)하다는 전통(傳通)이었다. 천병(天兵)이 이미 숙천(肅川)에 도착하여 왜장(倭將) 하나를 유인(誘引)하여 산채로 사로잡고, 9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초6일에 평양을 포위하고, 8일 사(巳)시에 평양성을 함락하고, 왜군은 모두 천병에게 죽음을 당했으니 19위(衛) 18위는 모두 죽고, 1위만 도망쳐 봉산(鳳山)으로 달아났으며, 황주(黃州)에서부터 사살(射殺)된 왜적이 그 수를 알지 못하며, 참수(斬首)만도 100여급(級)이었다. 9일 미(未)시에 선봉(先鋒)이 황주에 이르고 대군(大軍)이 10일에 황주에 도착했다 한다. 천병에 대장은 둘이고 유격장(遊擊將)은 40명이며 위부장(衛部將)은 2千여명이라 한다.(두 대장은 侍郞 宋應昌과 摠兵 李如松 成樑之이며 遊擊將은 錢世禎, 吳惟忠, 沈惟敬, 祖承訓이고 都司는 張三長, 摠兵에는 王必廸이며 其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황제의 위엄(威嚴)이 미치는 곳에 빠르기가 바람에 쓰러지는 풀 같고 죽은 무리들은 산에 눌린 달걀(卵) 같았으니 천은(天恩)이 이에 이르러 사례(謝禮)할 바를 알지 못하겠도다. 백씨께서 하도(下道)의 행차로부터 평안히 돌아오셔서 다행하다.

22일 대장께서 어제 청천(靑川)에 도착하여 오늘 호군(犒軍;음식으로 군사를 위로함)하고 내일 주안(周岸)으로 향하신다 한다. 들리는 소문에 천병(天兵)이 서울에 이미 들어왔다하니 실로 우리나라를 다시 창조하는 기회이다. 모든 혈기(血氣)있는 사람은 기뻐 들뛰니 당연한 것이다. 사절(四絶) 시(詩)로써 기쁜 뜻을 장천뢰(張天賚)에게 보냈다.(詩는 元集에 있다)

24일 노(奴) 대산(大山)이 전염병으로 화(化)해 갔다. 슬프고 가련한 것을 무엇이라 말하랴!(심부름 하러 들어온 지 10년이 되었으며 항상 눈 앞에 있었고, 또 난리 중에는 괴로움에도 복종하고, 순하고, 부지런하더니, 갑자기 이에 이르러 슬픔과 탄식이 그지 없다.)

25일 대장이 주안(州內)에 계시면서 군병을 모으는 일로 사람을 보내어 관문(關文)을 옮겼다. 들으니 수삼일 안에 내려오는 왜적이 길에 이어져 끊이지 않을 것이라 한다. 이는 반드시 천병의 압박(壓迫)이 이르므로 각자 도망쳐 돌아가는 것이니 마치 파죽(破竹)의 세(勢)와 요분(妖氛;간사하고 더러움)을 맑게하는 것과 같고, 다가오는 봄 안으로는 나오지 못하니 나라에 경사를 무엇에 비유하리오!

27일 대장께서 이평(梨坪)으로부터 해 저물때 들어오셨다.

29일 군병을 모으는 일로 큰 절에 모이기로 하니 삼부군(三部軍)이 먼저 법당 앞에 와서 활쏘기를 익히고, 민천길과 박광주가 각기 자기 부(部)의 군대를 거느리고 들어온 다음 남감찰(南監察)이 청주에서 오고 노통진이 장암(壯巖)에서 왔다.<노 노청경(奴盧靑卿)이 영변(寧邊)에서 왔는데 눈으로 본 바에 의하면 기도(箕都)에서 접전(接戰)할 때 천병(天兵)의 포위에 기치(旗旆)가 많은 것과 복색(服色)이 성(盛)한 것이 족히 왜적들로 하여금 놀라 흩어질만하고 왜적들의 목단봉(牧丹峯) 거점(據點)에 포성(炮聲)이 진천)(震天)하고 그들의 소혈(巢穴)이 파괴(破壞)되어 왜적의 과반(過半)이 자살(自殺)하고 나머지는 아울러 참살(斬殺)하였다 한다>

30일 아침에 양향청(糧餉廳)에 앉아 군량을 분급(分給)하였으며 5부(部)가 곧 행군(行軍)하니 아울러 370여인이었다.<신 선전관(申宣傳官)이 우별장(右別將)이 되어 3부(部)를 영솔(領率)하고 보은현감(報恩縣監)이 좌별장(左別將)이 되어 2부를 영솔하고 상주와 함창으로 나갔다> 김인백(金仁伯)이 한산(韓山) 등에 군량을 관령(管領)하고 박계홍(朴繼洪)이 홍주(洪州) 등에 군령을 관령하여 저녁에 진소(陣所)로 들어왔다.(아울러 50석이다)


2월 1일 건의장(建義將)의 관자(關子;官牒)가 연이어 세차례 이르렀으니 모두 천병의 소식이다. 왜적들이 천병이 많이 온 것을 듣고 세력이 능히 적과 저항하지 못할 것을 알고 모두 도망쳐 가나 다만 강장(强壯)한 것만 남아서 뒤를 막을 계획을 하고 있으니, 이 때에 차례로 나와 토벌하는 것이 급하지 아니하지 못하다. 본국에 서울에 있는 여러 장수 및 한강 이남에 있는 여러 장수들은 먼저 달려나오고 초유사(招諭使)가 달려 나오도록 알리라.(이는 天將의 關辭)이다.

2일 좌병사 박진(朴晋)과 비장(裨將)이 장계(狀啓;報告書)를 가지고 행재소(行在所)에 갔다가 내려가는 길에서 잠시 들어가 자세히 물어보니, 천병의 신기(神奇)한 것은 지난 달 8일 기도(箕都;平壤)를 함락하였고, 송경(松京)은 접전(接戰)도 안하고 이겼으며, 27일에 한성(漢城;서울)에 이른다 한다. 아! 천병이 이르러 접촉하는 곳에는 갈리고 부서져서 히복할 기약이 있으니 어육(魚肉)같은 여생(餘生)이 이 말을 듣고 놀랍고 기뻐서 미칠것 같아 계속 목이 메었다.

3일 대장을 모시고 고봉(孤峯)으로 출진(出陣)하니 조전장(助戰將) 선의문(宣義問)이 역시 오고, 연산(連山) 현삼 이기수(李淇壽)와 모여 은의군(恩義軍)의 의병이 적암(赤巖)에 와서 진(陣)을 쳤음으로 가서 보고 일을 의논하였다. 진중(陣中)에 과거(科擧)에 응시(應試)할 사람이 있고 과거기일이 되었음으로 물러나 돌아갔다.(조정에서 精兵을 얻기위해 특별히 널리 取할 길을 열거 湖南에서 五千, 湖西에서 二千, 嶺南에서 四千인데 左右 兩道에서 각 二千을 取하며 良民, 賤民, 妾子를 아울러 赴試를 허가하고 右道 三處는 開場하였으며 吾州는 첫 번째로 月初에 두 곳에 設場하기로 하였으나 天兵이 가까이 와서 討賊하는 일이 급함으로 멈추고 물러났다.)

4일 보은 현감, 신 선전 및 오부장(五部將)에 각기 군인을 거느리고 비를 맞으며 돌아와서 말하기를 비와 눈에 연이어 내려 군병을 갈무릴 수 없어 백갈촌(白葛村)에 이르러 적세(賊勢)를 바라보니 감히 교전(交戰)하지 못하겠고 또 군량이 떨어져 돌아왔다 하였다.(또 말하기를 근래에 왜적들이 연속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요 몇일은 행열이 60여리에 이어지고 밤에 내려오는 자도 역시 많아 왜적들이 도망가는 것이 확실하다 하였다.

6일 체찰사가 아래 관리들에게 전하는 통문을 얻어보니 상사(上使) 사은사(謝恩使)는 통문을 받는 즉시 급히 올라오고, 부사(副使)는 도(道)에 있으면서 천병을 접대하고 군량을 조치하는 등의 일을 옳게 관장(管掌)하고 검찰(檢察)하는 일을 하며, 교지(敎旨;傳敎)가 있을 때에만 오라 하였으므로 상사는 근래 출발하여 강화(江華)로 향하여 올라가고 부사도 당일 출발하여 남양(南陽), 수원(水原), 평산(平山), 온양(溫陽)으로 길을 잡아 간다 하였으며 본도(本道)의 순찰사는 군병을 거느리고 역시 이곳(陽川)에 도착하여 지금 변하는 일을 기다린다 하였다.(天兵은 이미 벽제(碧蹄)에 도착하였고 대군(大軍)은 혹 임진(臨津)에 도착하고 혹은 도착하지 않고 있다 하였다.

8일 천병을 지공(支供)하는 일로 본주의 주령이 차장(差將)을 받들고 연기(燕岐)로 갔으며 많은 잡물(雜物)을 결정하고 군대가 머무를 곳은 역시 가옥(假屋)을 시설(施設)하여 보은과 중주의 용안(用安)으로 출참(出站;驛)한다 하였다. 건의소(建義所)에서 통문(通文)에 <(略曰 천병(天兵)이 싹쓸고 권석(捲席)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니 음식으로 맞이하는 것은 의리상 폐할 수 없다. 각 읍(邑)에 유사(有司)들은 그 있는 것에 따라 혹은 주효(酒肴)로 경계에 나와 환영하고 상사(上使)는 전고(前古)에 미래(未來)를 오늘에 다시보게 하면 다행하겠다 하였다>

9일 구상사(具上舍;進士) 위통(委通)이 말하기를 유주부(兪主簿) 대건(大建;相國泓의 子고 具上舍의 女婿다)의 노자(奴子)가 즉각 와서 말하기를 서울의 왜적이 수없이 피해 나와 오산(烏山) 및 청회(淸淮) 등지에 진(陣)을 치고 천병은 모화관(募華館)에 진을 쳤으며 유우상(兪右相) 홍(泓)이 삼도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로 서울에 들어와 있다 하니 이 말이 과연 속이지 않는 것이라면 수복(收復)하는 날이 생각컨데 조석(朝夕)에 있을 것이니 기쁨과 다행을 무엇이라 말하리오! 들으니 왕세자께서 순하게 천연두(天然痘)를 겪었다 하니 신민(臣民)의 경사가 평안하고 일 없을 때보다 갑절 더욱 좋도다!

11일 주장께서 속리산에서 나오니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서로 이어져 와서 뵈옵고 고향의 벗 정발(鄭發)이 창의진에서 와서 합진(合陣)할 일을 의논하였으며 나는 저녁에 복천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살폈다.

12일 내일은 설복(設伏)하는 날이다. 다만 한 군병만 모여 시냇가에서 습사(習射)하였고 진사 강주(姜霔)와 진사 구빈(具斌)과 의장(義將) 이인수(李麟壽)가 모두 와서 모여 병사(兵事)를 의논하였다.

14일 들으니 천병의 선봉(先鋒)이 벽제(碧蹄)에 도착하여 설복(設伏)한 왜적에게 포위되었으나 천병이 대포(大砲)에 능하여 하나가 백을 당하여 사방에서 급습하니 왜적이 성안으로 도로 들어가자 서울의 백성들이 모두 나와 다 죽여 버렸다. 대개 천병이 혁림(赫臨;柱臨)하면 스스로 적수가 아님을 알고, 성중에서 내응(內應)하여 도륙(屠戮)을 낼까 염려하여 왔다. 아! 도성(都城)안에 사람들이 여러 해를 지내면서 왜적에게 붙어 구차하게 조석의 명(命)을 도적해 오다가 끝에 가서는 왜적의 손에 죽었으니 또 무엇을 아끼리오.

15일 거처하는 곳에 전령병의 기운이 있음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동관음암(東觀音菴)으로 아우 준(竣)과 더불어 거처를 옮겼고, 오후에 고봉(孤峯)의 진소(陣所)로 갔다.

16일 천병을 지공(支供)하는 일로 온 길이 시끄러웠다. 좌도(左道)의 역자(驛子)로부터 행재소의 소식을 들으니 대가(大駕)가 지난 18일에 용만(龍灣)으로부터 정주(定州)로 옮겨 머문다 한다. 들으니 당장(唐將)의 대군이 동파(東坡)에 있는 동안 3일을 비를 만나 병마(兵馬)가 많이 죽어 부득이 송경(松京;開城)으로 진(陣)이 돌아왔다가 11일 12일 사이에 서울에 도착하니 이는 평의지(平義智)가 패전한 뒤에 곧바로 도망쳐서 서울로 온다하기 때문이다.

18일 노판관(盧判官;通津의 兄)이 의주(義州)로부터 중조(中朝;唐軍)의 말먹이와 군량 등 물건을 가지고 뒤따라 왔다.(粟 8万석과 조 40萬束이라 한다) 대장과 함께 군공(軍功)을 수정(修正)하였고, 상사(上使)가 초(草)한 건의진(建義陣)의 관문(關文)이 왔으니 이는 이내 각 의진(義陣)이 시초(柴草)를 준비하여 천병을 기다리는 일이다. 풍원 류상국(豊原 柳相國;西厓, 成龍)의 관사(關辭)를 얻어 보니 관군(官軍)과 의병이 서로 힘을 합하지 못하는 것이 슬프다는 것이고, 이 때에 풍원은 천장(天將;唐將)의 접대사(接待使)가 되어 있었다. 관사에 略曰 왜적이 하늘을 거역하고 깊이 조선의 內地까지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屠殺하고 물건을 약탈하여 재산을 모두 빼앗고 심지어는 임금까지 義州로 播越(避亂)하게 하였으니 이는 이내 하늘을 같이 받들고 살지 못할 원수이다. 당초에 守令들의 거개가 모두 숨어버려서 왜적을 토벌할 생각이 없었으나 이제는 충의 慷慨의 선비들이 각기 스스로 일어나 그 몸을 잊고 나라에 몸을 바칠 충성이 지극할 뿐이라 할만하다. 지금 7, 8월이 지나갔는데도 아직 이렇다 할 성효(成効)가 없고, 다만 관군과 의병이 각기 스스로 마음대로 할 뿐이니 관군은 의병보기를 사사로이 피란민이 모인 류(類)로 알고, 의병은 관군과 서로 관섭(管攝)하지 못할 사람으로 여겨 각기 자기들 대로 행동한다. 이 때문에 양군의 세(勢)가 날로 더욱 외롭고 약(弱)해 지니 이 어찌 당초에 거의(擧義)하던 마음이며, 역시 어찌 조정(朝廷)의 사체(事體)가 이 같았으리오! 하물며 지금 천병(天兵;明軍)이 전장에 와 있으니 이는 이내 잃은 땅을 회복할 때이다. 행(幸)여 관군과 의병이 같이 약속하여 서로 돌아가며 형세를 맞추어 넘거나 어긋나는 일이 없이 이로써 군기(軍機)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관군이고 의병임을 물론하고 공(功)을 세운 사람은 충분히 위무(慰撫)할 것이니, 한 몸이 되어 시행하라… 라고 하였다」또 평안도 관찰사(觀察使)의 관사(關辭)를 보니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감탄과 슬픔을 더하였다. 그 관사에 말하기를「각 처에 여러 장수들의 거개가 힘써 싸울 마음이 없이 한적(閑寂)한 곳으로 피(避)해 앉아 있고, 다만 천병으로 하여금 혼자 시석(矢石)의 전장에서 감당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장사들은 하나도 교봉(交鋒)하지 아니하니 그 분통이 이보다 더 심하지 못하다. 만약 천병이 오지 아니하였다면 이 산천과 묘사(廟社)가 왜적을 만나 어떻게 안심할 수 있을 것이랴!」하였다.

19일 부장(部將) 이제경(李悌慶)이 장계(狀啓)를 보고하고 돌아와 말하기를「어제 상주의 백갈(白葛)과 이천(伊川) 등지에 매복(埋伏)하고 왜적을 기다렸더니, 마침 적병 30여인이 반이 넘께는 말을 타고 상주에서 함창으로 감으로 곧 군대를 내어 쫓아서 공갈못 아래에 이르러 교전한 지 한참되어 왜적의 세력이 다해가자 지름길로 도망치니 역시 죽은 적이 많았다. 다만 우리 군은 곽수담(郭壽聃)과 병사 보흡(寶洽)이 총알에 맞고 말 두필도 함께 총알에 맞았다 하니 분통하기 그지없다.」주장(主將)이 저녁에 속리산으로 돌아왔다.

20일 조방장(助防將)이 진(陣)을 합하는 일 때문에 옥천(沃川)으로 갔다.

21일 주장께서 진중으로 돌아오고 따라서 건의진(建義陣)에서 돌리는 관문(關文)을 얻어 보니 천병이 지금 송도(松都)에 있으며 비록 도로가 흙탕길로 험한 때문이라 하나 또한 깊은 계산이 있으니 지난 날 평양에서 왜적을 쳐서 죽일 때 중간에 길을 막지 아니하여 많은 왜적이 도망쳐서 지금까지 한(恨)이 되고 있음으로 이번에는 반드시 앞길을 막은 연후에 대군이 뒤를 따라 천천히 진격한다 하였다.

22일 본진(本陣)의 군공(軍功)에 대한 포상(褒賞)이 행재소로부터 오늘 내려왔다.(李悌慶 및 군인 崔順福, 申義福에게 모두 司僕이 겸해졌다)

앞서 들으니 청천진이 김대윤(金大允)의 군공(軍功)을 가지고 사자(使者)가 올릴 때 이를 빼어 내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거짓 기록하여 그 이름을 믿지 못하겠으나 지금 군자참봉(軍資參奉)의 교서(敎書)가 내려왔다 하더니 과연 이 지난 날의 말이 상쾌하지 못하고 인심을 헤아리기 어렵더니 이내 이에 이르렀던가? 일 이 나라의 법에 관계되어 용납하는 것이 불가하더니 본주(本州)로 이관(移關)하여 하여금 잡아 가두었다.

24일 신경증(申景澄)이 선전관(宣傳官)으로 복직되어 장차 행조(行朝;行在所)로 부임(赴任)하게 되었으므로 천병을 대접하는 일을 다시 의논하여 소문(疏文)을 봉(封)해 가는 편에 부쳐 보내는 데 산을 넘고 골을 건너며 밤길을 걷고 풀에 잠자며 가니 거의 혹 경필(警蹕;王의 行次)의 아래에 가까이 이르러 미신(微臣)의 작은 정성이 끝까지 상달(上達) 될런지는 아직 반드시 기필하기가 불가하여 서쪽 끝을 멀리 쳐다보는 마음이 불타는 듯하다(疏文은 可畦 自身이 지었다)

26일 백씨께서 조차(姪)가 전염병을 앓고 있다는 기별을 받고 임하(臨河)로 가시는 데 아직 길이 막힌 곳이 많으니 어떻게 가실런지 민망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겠다.

호서(湖西) 방백(方伯;監司)의 편지를 얻어보니 천장(天將)의 뜻이 무엇 때문인지 알지 못하겠고 회복되는 시기가 점점 멀어져 가니 민망하다.

27일 옥천(沃川)의 현감(縣監) 권자원(權子元)이 군병을 점검하는 일로 와서 같이 잠자며 일을 의논하였다.

홍인백(洪仁伯)이 자신이 준비한 군량을 주안(周岸)에서 가져와 바쳤다.

28일 군량을 거두어 오는 일로 호서를 향해 출발하였다.(일찍이 호서의 군현(君縣)과 사민(士民)들에게 청하여 얻은 군량을 운반해 오지 못했는데 지금 들으니 천병의 군량이 부족하여 여러 읍(邑)이 의병소(義兵所)에 모곡(募穀) 받아 가는 것을 허가하지 아니한다하니 그렇다면 진중(陣中)의 일이 지극히 민망해 지므로 지금 또 재차 가는 것이다.)

29일 어머니를 살피고 토정(土井) 김사강(金士剛)의 집에서 묵었다. 전해 들으니 송시랑(宋侍郞)이 이끄는 원병(援兵)이 이미 송경을 출발하였다 한다. 비록 적실한 정보(情報)인지는 알지 못하나 조금은 다행하다.

30일 송촌(宋村)에 도착하여 보니 천병을 영접할 때 쓰는 잡다한 물건들을 열읍(列邑)에서 지금 막 징발(徵發)을 독려하느라 지나는 길이 매우 시끄럽다. 슬프다! 우리 백성들이 이미 왜적들의 창칼에 죽어 갔고, 또 굶어서 죽으며, 살아남은 사람은 또 이 독려를 만나 울부짖고 하소연하는 사람이 길에 가득하니, 이것이 비록 부득이 한데서 나온 일이라고는 하나 백성의 힘이 이미 다했으니 역시 지극히 불쌍하다.


丙辰年 3월 1일 비가 와서 길이 막혔다. 정천로(鄭天老:乾壽), 이여헌(李汝獻:之瑛), 채선여(蔡善餘:宗吉), 김사강(金士剛), 홍우안(洪友顔), 황진(黃進), 조서남(趙瑞男) 등 여러 사람이 모두 모여 군대의 일을 함께 의논하였다.

2일 출발하여 유성창(儒城倉)에 도착하여 들으니 천병이 아직 멀리 있음으로 열읍에서 지원하고 접대하는 일을 아직 천천히 준비하라 한단다.

3일 회덕(懷德)의 수령이 스스로 의병소에 와서 돌아가지 못하였다.

4일 수령(守令)을 기다려 군량을 운반하는 절차를 부탁하였다.

5일 공주(公州)에 도착하여 목사(牧使)에게서 들으니 선전관(宣傳官)은 행조(行朝)로부터 나와서 오고 있고 천병의 포수(포炮手)들은 지금 송도에 있으며 이제독(李提督:如松)은 아직 평양에 머물고 있으니 이는 대개 북쪽의 왜적이 아직 성함으로 맹산(孟山) 등지에서 막고 있다 하였다. 정경임(鄭景任:經世)을 임시 거처하는 곳으로 방문하였다.(이 벗이 군량을 구하는 일로 正月에 이 고을에 와서 두진(痘疹)을 앓다가 이제야 비로소 조금 차도가 있다 한다. 처음 듣고 매우 놀라 염려하였으나 지금 위태한 지경에서 벗어났으니 다행하다.

6일 선여(善餘:蔡宗吉)를 시켜 효가리(孝家里) 오대붕(吳大鵬)의 집에 있는 군량 10석을 가져오게 하였다.

7일 신의복(申義福) 등을 시켜 말모리 문을 이끌고 부전(浮石)에 김득형(金得亨)의 집에 가니, 다만 군량 두 섬만 주어 가통스러웠다.(당초에 원수(元數) 18석을 허락받았는데 스스로 사용하고 부탁한 것은 저축하지 못했다 하니 이같이 매몰(埋沒)한 사람의 믿음이 어찌 이 같이 없으리오)

8일 한질(韓晊)이 유성(儒城)에서 와서 말하기를 왜적의 무리가 화령(化寧)과 중모(中牟) 등지로 몰려 들어와 김주부(金主簿)가 모아 놓은 의곡(義穀)을 모두 털어 갔고 유시백(柳時伯), 정필화(鄭必和), 김유명(金有鳴) 등이 모두 해(害)를 입었다 하니 왜적의 세력이 충만하여 벗들에게까지 화가 미치게 되었으니 비참하고 원통함이 어찌 이리 지극한가!

9일 이정랑(李正郞) 구호(久濠)가 효가리(孝家里)에 있음으로 찾아가서 군량미 10석을 가져왔다.

본진(本陣)에 대장께서 고봉(孤峯)에 계시면서 관문(關文)을 행한 것을 얻어보니「왜적의 무리 만여기(萬餘騎)가 사곡(沙谷) 보미(甫未) 등지에 들어와 상주목사 김해(金澥)가 간 곳을 끝까지 따라가 보은의 눌암(訥巖)에 이르러 목사 및 그의 아들 경원(慶遠)을 동시에 화(禍)를 입히자, 여러 의장(義將)들이 일시에 계속 후원하여 왜적의 세력이 이내 물러가니 관인(官印)은 조방장(助防將)이 가져 오고, 병부(兵符)는 왜적에게 빼앗겼다」하였다. 이는 근래에 있지 아니하였던 변(變)으로 놀라움을 말로 할 수 없다. 이 목사는 난리가 난 처음부터 왜적을 잘 피하다가 끝내 왜적의 손에 죽었으니 이 어찌 명(命)이 아니랴!

10일 아우 준(竣)으로 하여금 소여(蘇汝)의 집으로 가서 주는 군량을 가져오게 하였다.

소전적(蘇典籍) 경열(景悅)이 대조(大朝)로부터 나오고, 천병 수만 명이 이 때에 송도(松都)와 동파(東坡) 등지에 있으며, 이제독(李提督)이 평양에 머물면서 송시랑(宋侍郞)의 군사를 기다리는 터에 선봉(先烽)은 이미 압록강을 건넜고, 대가(大駕)가 이미 영유(永柔)에 이르렀다 하여 서쪽의 소식을 들어 위로가 되고 다행함이 매우 깊다.

11일 군량을 운반하는 일이 매우 어려워 포(布)와 바꾸기 위해 한질(韓晊)과 신의복(申義福)으로 하여금 무역(貿易;곡식과 벼를 바꾸는 일)을 감독하게 하니 모두 40여필이었다.

12일 포(布)와 바꾸고 남은 곡식 10여석을 본창(本倉)에 바치니 이로써 유성(儒城)의 벼(租)와 교환하였다.

들으니 천병이 임진(臨陣)에 있는 사람이 3,4천 명이고 개성에 머무는 사람이 2,3만이라 한다.

13일 고을 사람 박상빈(朴尙賓)이 군량미 10석을 받치고저 하여 부사(副使)에게 아뢰어 이로써 제급(題給)의 길을 도모(圖謀)하였다.(군량을 받친 사람은 상란으로 하여금 알게하여 많고 적은 데 따라 임금에게 들리게 하기 때문이다)

들으니 당병(唐兵) 두 사람이 통사(通史;通譯)한 사람과 더불어 가까운 성(城)에 이르러 왜장(倭將)과 현소(玄蘇) 등을 부르니 백여기(百餘騎)를 거느리고 나왔으며 우리나라 장수 세 사람도 역시 청해와서 같이 모여 약속했다 하니 그 뜻은 반드시 강화(講和)를 말하기 위함일 것이다. 두 왕자가 아직 왜적의 진중(陣中)에 머물고 있으면서 전에 하루는 사람을 시켜 세 봉서(封書)를 내어 행조(行朝)로 보냈고, 다음 날 또 황정욱(黃廷彧)을 시켜 다섯 봉서를 내어 보냈다 하나 그 자세한 것을 알지 못하여 답답하다.

14일 유성(儒城)에 도착하였다.

15일 기성(杞城)에 도착하였다.

16일 고을 수령이 늙은이를 받을 물자를 보내주어 감사하였고 유성으로 다시 돌아왔다.

17일 선여(善汝;蔡宗吉)의 편지로 상주의 왜적이 적암(赤巖)으로 처들어 와서 넘어 들어올 걱정이 조석으로 박두(迫頭)하였음을 알고나니 공사(公私)간의 정종(情悰)이 더욱 괴롭고 염려가 더욱 간절하다.

18일 오대린(吳大麟)의 집에서 얻은 벼섬(租石)을 회덕(懷德)의 박경임(朴景任) 집으로 운반하여 받은 곡물을 신의복(申義福)으로 하여금 말에 실어 운반하였다.

19일 충의진(忠義陣)의 군관(軍官)이 와서 말하기를 이제독(李提督)의 패문(牌文)에 왕총병(王摠兵)이 수군(水軍) 육만으로 섬라(暹羅) 등 나라의 군병과 더불어 30만 대군이 대마도(對馬島)를 습격하였고, 본부(本府)에서 계속 병마(兵馬)를 조달(調達)하여 가까운 날에 왕경(王京)으로 진격한다 하니 비록 적실할 정보인지는 알지 못하나 놀랍고 괴이한 일이다.

20일 송촌(宋村)에 도착하였다.

21일 말을 손보느라고 부득이 출발하지 못하고 본현(本縣)에 머물렀다.

22일 겨우 4,5마리의 말을 얻어 해저물때 고봉진소(孤峯陣所)에 도착하니, 다만 신경증(申景澄), 김득려(金得礪) 등 두어 사람이 있을 뿐이고, 대장께서는 큰 절에 계시며, 진(陣) 중에 남아있는 군량 전부를 모두 빼앗겼으니 통탄스럽다.

23일 큰 절에 가서 대장을 뵈옵고 군량을 운반할 절차를 아뢴다음, 복천암(福泉菴)으로 올라가 어머니를 살폈다.(요사이 왜적의 선봉이 가까이에서 핍박함으로 동암(東菴)에서 이리로 옮겨 오셨다.) 임하(臨河)의 소식을 들으니 백씨께서 무거운 전염병을 겪었다 하여 그 날짜를 헤아려 보니 출입을 하실 것 같으나 염려를 무엇에 비유하리까! 이미 몸으로 달려가서 문병하지 못하였고, 또 능히 구환(救患)도 못했으며, 세상이 때를 만나지 못하여 골육(骨肉)이 서로 의지하지도 못했으니 이 어떤 사람이던가! 다만 스스로 몸달 뿐이다.

건의진(建義陣)에서 보내 온 군공(軍功)과 상격(賞格)에 선전관은 훈련주부(訓練主簿)로 올랐고, 김봉사(金奉事)는 수문장(守門將) 겸 사복(司僕)이 되었으며, 부역(夫役)과 천민(賤民)을 면하는 등의 첩문(帖文)이 30여통이 내려왔다. 왜적을 토벌하는 데는 그렇게 느렸는데도 상(賞)은 마음에 지나쳤으니 편안한 신민(臣民)이 된 사람은 더욱 마땅히 힘을 다하여 보답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24일 적세(賊勢)는 점점 핍박(逼迫)하여 오고, 양도(糧道)는 더욱 군색하여 형세가 어려우므로 편안한 곳으로 옮기고져 회덕(懷德)으로 가려하니, 대장의 뜻도 역시 그러하므로 대장께서 먼저 가서 거처할 만한 곳을 구해 보기로 하였다.

서쪽에 정보를 얻어 들으니, 천병이 송도(松都)로부터 전봉(前鋒)이 먼저 한양(漢陽)에 이르니 왜적이 폐백(幣帛)을 보내어 강화(講和)를 청하며 그 뜻이 호령(湖嶺)을 나누어 가지자는 데 있으니 도체찰사(都體察使) 서애(西厓) 류상국(柳相國)께서 굳게 불가함을 고집한다하고, 또 들으니 천조(天朝;中國朝廷)에 두 장수의 사이가 서로 화협(和協)하지 못하여 어정거리며 진격(進擊)하지 아니하는 폐단이 있으니 이는 실로 우리나라에 불행이나 알지못하는 말초(末稍)가 과연 어떻게 할 것이랴!

25일 적세(賊勢)가 이미 관음사(觀音寺)와 가을왕(加乙往) 등지에 까지 미치니 자기의 집과 우리집의 여러 가족을 데리고 밤에 출발하였다.

26일 관평(官坪), 보은(報恩), 회인(懷仁)의 경계에 이르러 어머니께서 편안하지 못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이 들끓어 어쩌지 못하였다.

민봉사(閔奉事)가 진(陣)중에서 뒤따라 와서 말하기를 장사(將士)들이 보은의 수령 및 상주 판관(判官;鄭起龍)과 더불어 율원(栗院)의 잔도(棧道) 험한 곳에 매복(埋伏)하고 왜적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수없이 활을 쏘아 살상(殺傷)이 많았고, 또 조방(助防)과 조전(助戰) 두 진(陣)이 뒤따라 추격(追擊)하여 왜적들로 하여금 낭패(狼狽)하고 돌아가게 하였으니, 근래의 전투에서 시원하게 이겼다 하였다.

27일 어머니의 병환이 어제보다 더 위극(危劇)하신 것 같아 애타는 심정 말로 형용하지 못하였다.

28일 어머니의 환후(患候)가 점점 침중(沈重)에 이르러 전염병 같다 하나 울며 하늘에 기도할 뿐이다.(난리 중에 각기 살아나는 데 구애되어 백씨께서는 멀리 한 구석에 계시니, 누구와 더불어 시질(侍疾)하리오. 이로써 정서(情緖)가 더욱 나빠진다.)

29일 어머니의 환후가 한결같이 덜하지 아니하시어 백씨께서 복천암(福泉菴)으로부터 이곳으로 찾아오시니 한편 기쁘고 한편 슬퍼 손을 마주잡고 말이 없었다. 왜적의 기세가 아직 치솟아 어머니의 환보(患報)를 즉시 통지하지 못한 것이 죄(罪)스러웠는데 갑자기 이렇게 오셨으니 마음이 움직여 그런 것이던가? 나라에 흉봉(凶鋒)이 가득한 데 중병을 겪고 난 나머지에 어떻게 피해오셨더이까? 또 당연히 어머니의 병환에 약을 다려 시탕(侍湯)해야 하나 다시 병환이 나실까 두려워 고민이다.


4월(乙酉) 1일 어머니의 환후가 점점 더 위독하여 어찌해야 할지 알지 못하였다. 김순근(金純謹)이 식량을 가져왔고, 그 밖에 친지들이 계속 문병하러 왔으나 다 기록하지 못하였다.

2일 끝내 망극(罔極;母親喪)의 변(變)을 당하여 10일에 삼산(三山) 궁평(宮坪)에 권조(權厝;葬禮)하고 이어 묘소 곁에서 지키고 있었다(이로부터 19일까지 일기가 없다).

제매(弟妹)와 아래 가속(家屬)들이 차례로 병이 전염되어 부득이 궤연(几筵;빈소)을 받들고 회덕현(懷德縣) 탑산촌(塔山村)으로 거처를 나누었다.

23일 정경세(鄭經世) 좌랑(佐郞)이 조문(弔問)하러 왔다

25일 대장 및 이찰방(李察訪) 빈(賓)이 조문하러 왔다.

28일 백씨와 함께 궁평에 성묘(省墓)하러 갔다.


5월(甲寅) 1일 간략히 예찬(禮饌)을 갖추어 삭전(削奠)을 행하였다.

2일 궁평에 머물렀다.

3일 탑산 거처로 돌아왔다.

7일 들으니 천병이 당교(唐橋)에 이르고 당교에 있던 왜적이 다 상주로 내려와 주성(州城)의 안과 밖 및 거리와 들 사이에 왜적의 진루(陣壘)가 널려 있으며 사방으로 흩어져 나와 불 태우는 것이 날마다 그치지 아니하고 혹 아래로 내려가는 왜적이 길에 있으면 느릿 느릿 가고 싶으면 가고 머물고 싶으면 머물러 마음대로 하는데도 끝까지 추격(追擊)한다는 정보(情報)는 들지 못했으니 진실로 통분하다.

8일 흘러오는 소문에 조정에서 왜적이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소문을 듣고 임금께서 여러 장수들에게 추격을 독려하는 명령을 내리니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과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賓)이 오늘 보은의 구암진(灸巖陣)에 도착하였다 한다.

10일 들으니 당교에 진(陣)을 치고 머물러 있는 당장(唐將)은 대장이 아니고, 이내 발아(撥兒) 천총(千摠)과 송호한(宋好漢) 및 전창(田倉) 등 이니 곧 왜적을 호송하는 사람들이었다. 천병은 아직 조령(鳥嶺)을 넘어오지 아니하고 호송사(護送使) 겨우 수십명이 먼저 왔다하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천장(天將)과 왜적은 더불어 강화(講和)하여 이내 전투는 하지 아니하여 아래로 보내고 있으니 참으로 괴이하다.

11일 들으니 우도(右道)의 방백(方伯) 학봉(鶴峯) 영공께서 전염병으로 연관(捐館;殉職)하였다 하니(지난 달 29일 장례를 행했다) 놀랍고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이곳 우진(右鎭)이 이제까지 보전한 것은 모두 이 분의 힘이었는데 지금 갑자기 이에 이르렀으니 장차 누구에게 힘입으리오(우병사 김지해(金志海) 영공의 순직이 이미 뜻밖에 나와서 사람들이 애석해 하는 데 또 이공의 상고(喪故)를 만났으니 우로(右路) 일대가 이제부터 걱정이라 하였다).

14일 들으니 천병이 이제 막 조령을 넘어 성봉이 이미 상주에 도착하여 고을의 성안에 머물던 왜적이 모두 아래로 내려갔으므로 고향땅에는 이제 왜적의 기운이 없다하여 기쁨을 말로 다 하지 못하나 다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하늘에 닿은 원수와 살아 돌아온 해도(海道) 사람들의 마음에 쌓인 원망과 분통이 그 어떠하리오!

15일 망전(望奠)을 올렸다. 들으니 북쪽에 오랑캐가 빈 틈을 타고 점점 나라 안으로 들어 온다하여 남쪽에 난리가 아직 평정되지 못하였는데 또 이 같은 기이한 일이 있으니 나라의 일이 몹시 민망하고 한탄스럽다.

16일 들으니 천조(天朝)가 왜적이 바다를 건너 돌아가려고 하지 않은데 분노(憤怒)하여 사천(泗川)에 있는 유정(劉綎)에게 명령하여 남만(南蠻)과 서촉(西蜀) 및 복건성(福建省)에서 온 당(唐)나라 5천의 병마(兵馬)를 계속 성주(星州)에 주둔(駐屯)하게 하고, 팔거현(八莒縣)에 있는 왕필적(王必迪) 낙상지(駱尙志)등을 경주(慶州)에 주둔하게 하며, 이녕(李寧) 갈봉하(葛逢夏) 조승훈(祖承訓) 등을 거창(居昌)에, 오유충(吳惟忠)을 선산(善山) 봉계(鳳溪)에 주둔하게 하여, 사방을 서로 이각(離角)이 되도록 둘러 쌌으니, 황은(皇恩;明皇帝의 恩)의 망극함이 어찌 이에 이르렀으며, 또 들으니 제독(提督;李如松)이 심유경(沈惟敬)을 시켜 왜적을 달래어 바다를 건너가게 하도록 했다 한다.

17일 궁평에 가서 어머니의 묘소를 살피고 돌아왔다.

지구(知舊;親友)들이 날마다 조문(弔問)하러 오므로 별도, 애감록(哀感錄)에 기록하여 두었다.

들으니 왜적에게 사로잡혀 갔던 세 사람이 척후군(斥候軍)에게 잡혀(그 첫째는 송도사람이고, 둘째는 백천사람이며, 셋째는 금천사람이니 사로(私奴) 성손이라 부르더라)했다. 정월에 왜적에게 사로잡혀 서울로 들어가서 부역을 하면서 도망갈 생각만 하던 중에 성 안에 왜적들이 모두 아래로 내려올 때 함께 따라 당교에 도착하여 밤에 어두운 틈을 타 도망쳐 나왔다하며 두 분 왕자(王子)께서도 역시 왜적이 오는 속에 따라 왔다 한다. 아! 만약 우리 조정에 한 사람이라도 좋은 장수가 있었다면 차마 왕자를 왜적에게 붙여보내며 그들을 모시고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아니하였으랴!(왕자를 모시는 여러 재상들이 아직 수령(首領)으로 보존되고 있으면서 어떻게 울분을 참을 수 있었으랴! 김귀영(金貴榮)은 일찍이 도망하여 행재소로 돌아왔고, 간관(諫官)은 왕자들을 버리고 자기만 도망쳐 화(禍)를 면한 죄(罪)를 물어 유배(流配)되었다 한다)

18일 사담(沙潭;金弘敏)께서 주안(周岸)에 있다가 역시 내간(內艱;母親喪)을 만났다하니 놀람을 이길 수 없다! 해를 지내며 같이 거쳐하다가 이미 환난(患難)을 같이하고 또 망극(罔極)의 통한(痛恨)을 같이하니, 정사(情事)는 일반이나 슬픔이 더욱 간절하였다.

19일 이면부(李勉夫) 구충원(具忠源)이 의진(義陣)에 일을 의논하러 왔다가 즉시 돌아갔다.

20일 사담(沙潭)어른에게 조문(弔問)하러 갔다.

21일 들으니 왜적들이 겉으로는 강화(講和)한다. 칭탁(稱託)하고, 안으로는 포장(包藏)을 성실히 하여 곧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아니하고 바닷가에 진(陣)을 치고 서로 바꾸어 왕래하여 굳게 지킬 계획을 하고 있음으로, 천병도 역시 부득이 돌아가지 아니하고, 팔거현(八莒縣) 및 대구(大邱) 등지에 진루(陣壘)를 쌓고, 진영(鎭營)과 연락하여 한거(捍拒)하고 방어(防禦)할 계획을 하였다 한다.

23일 고봉진(孤峯陣)에 가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참살(斬殺)한 왜적의 많고 적음과 군공(軍功)을 책(冊)으로 만들어 차례대로 행궁(行宮)에 올려 보냈다. 전후로 왜적을 참살한 머리가 거의 백(百)여급에 이르고 사살(射殺)도 역시 수없이 많아 나리의 승패(勝敗)에는 관계되지 못하나 역시 족히 이로써 충분(忠憤)의 정성은 조금 폈다 하겠다. 김덕민(金德民)으로 하여금 진달(進達)하게 하였다.

26일 들으니 고양(高陽)에 사는 이상사(李上舍;進士) 로(櫓)가 두 사람과 짝지어 창경릉(昌敬陵)에 들어가자 왜적이 갑자기 몰려와 빠져나올 수가 없어 무성하고 빽빽한 풀숲 속에 숨었으며 활과 화살은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몸은 들어내지 아니하고 수풀속에서 화살을 쏘아 이것 저것을 쏘아 죽이니 왜적들이 나무 숲이 빽빽한 것을 보고 두려워 멀리 피해갔음으로 두 릉(陵)이 모두 완전하였다 한다. 이를 보면 비록 병졸(兵卒)이 많지 않더라도 그 매복(埋伏)할 지형을 얻어 사수(射手)가 땅에 엎드려 남몰래 발사(發射)하면 싸움을 이기지 못할 이치가 없으니 지형의 득실(得失)에 따라 성패(成敗)가 따르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신총병(申摠兵)이 조잔(鳥棧)을 버리고 평지로 나아간 것이 어찌 이 상사의 죄인이 아니랴!

28일 들으니 황회원(黃會元)이 황장(黃腸)의 경차관(敬差官)으로 어저께 삼척(三陟)에 부임(赴任)하였다 하니 대개 산릉(山陵)이 변(變)을 만난 곳이 많이 있어 지금 장치 개장(改葬)하려고 판재(板材)를 구하기 때문이라 하니 신자(臣子)된 사람으로 더욱 마음이 아픔을 깨달았겠고 뼈(骨)를 깎는 것 같다.

들으니 광주(光州)의 이모(姨母)가 예안(禮安)에서 청송(靑松)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병환이 달을 넘겼다 하니 놀라는 생각을 금하지 못하겠다. 반년이나 같이 거처하면서 어머니 같이 모시다가 강을 건넌 뒤부터 소식이 오래 끊겨 있었고 또 어머니를 잃고 의지할 곳은 다만 이모 한 분이 있을 뿐이므로 곧 달려가서 문안을 드리고저 하나 왜적에게 아직 길이 막혀 조리하는 병환의 차도는 상상(想像)하고 음식이 궁핍(窮乏)할 줄 알면서도 길가는 사람을 보는 것 같이 하니 난리에 인정마저 막힌 것이 과연 이 같은 것이던가! 다만 상심하고 탄식할 뿐이다.

29일 들으니 몇일 전에 왜적이 노동(蘆洞)에 들어와 불태우고 털러갔다 하니 지극히 참혹하다. 전정원(全淨遠;沙西 全湜)의 가족이 겨우 화(禍)를 면했다 하고 지난 날 백씨께서 거처하시던 집에 주인 두 여자가 왜적에게 해(害)를 당했다 하니 비참함을 어찌하지 못하겠다. 예부터 외국의 오랑캐들이 우리 백성을 도륙(屠戮)하고 거리와 마을을 불태운 것이 어찌 오늘과 같이 참혹하였으리오!

30일 들으니 천장(天將)의 접대를 잘하지 못했다 하여 함창현감을 잡아 갔다 한다.


6월(甲辰) 1일 삭전(朔奠)을 행하였다. 들으니 요사이에 천병(天兵)이 혹 올라간다하니 왜적들이 다 바다를 건너 간 것인가? 자세히 알지 못하여 답답하다.

사담(沙潭)이 와서 각 진소(陣所)를 돌아보며 생각한 바를 말씀하였으니 임금의 행차가 파천(播遷;피란)하여 나라에 욕(辱)됨이 더없이 심하니 이를 사사(私事)로 말하면 도망가서 다른 도(道)에 숨은 것이다. 가화(家禍)가 혹심(酷甚)하였으니 이 원수를 곧 엄벌로 처단하고 싶으나 그러하지 못하였다 하고 서로 근심만 하다가 헤어졌다.

2일 도로에 굶어 죽은 송장이 간데마다 있어 서로 바라보아 구렁에 비참한 광경이 도륙(屠戮)과 다름이 없다. 천장(天將)이 그 죄없이 굶어 죽은 것을 슬퍼하여 군량(軍糧)을 나누어 구휼미(救恤米)로 주었으니 어진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 할 만하다.

4일 임하(臨河)의 소식을 들으니 모두 무사하다하여 다행하다.

5일 정경임(鄭景任;愚伏)이 와서 전하는 말이 이제독(李提督;如松)이 문경(聞慶)에서 돌아간지 이미 오래이고 천병도 역시 반이 넘게 위로 올라갔다가 요사이에 또 뜸뜸이 돌아 내려오고 있다 하여 왜적이 역시 바다를 건너지 아니하고 변방(邊方)의 고을에서 어정거리며 있다하니 그 뜻을 모두 헤아리지 못하겠다.

12일 서울에 벗 신경술(申景述)이 식량을 찾아 호서(湖西)에 갔다가 내가 이곳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묻고 이어 중간의 길에서 서로 만나보자 하였다. 난리를 만난 이래 사생(死生)을 알지 못하고 서로 막혀 있다가 갑자기 이 편지를 받으니 기쁨을 말로 다하지 못하겠으며 그도 역시 어버이를 여의고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 객지를 떠돌아 나와 더불어 다름이 없었다. 편지를 잡고 두세 번 읽을수록 슬픔이 더욱 깊어 마치 얼굴을 대한 것 같으나 다시 회포를 어떻게 지으리오!

13일 들으니 일본의 평수길(平秀吉)이 조선과의 전쟁에서 크게 이겼다 하여 이름을 높혀 대합(大閤)이라 하고 관백(關伯)의 자리를 그 아들에게 전했다 한다.

14일 양맥(兩麥;年麥)이 아직 익지 아니하고 왜적이 아직 지경안에 있어 인심이 정하지 못하여 하늘의 뜻이 어떻게 전장으로 나올지를 알지 못하며, 백서의 근심과 나라의 계책에 좋은 대책이 없어 다만 스스로 강개(慷慨)할 뿐이다. 이 때 들으니 임정자(林正字) 직경(直卿)이 말하기를 요사이 토적(土賊)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열읍(列邑)의 추포(推捕)가 옥사(獄事)로 이어져 나리와 다름이 없다 하였다. 아! 세상에는 난리가 나고 해(年)는 흉년이 들어 백성은 굶주리며 백성은 모두 도적이 되어 병사(兵士)로 죽고 병에 죽으며 굶어죽고, 또 옥(獄)에서 죽으니 사람의 류(類)가 죽어간다. 이백년 동안 휴양(休養)하던 적자(赤子)가 하루 아침에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통탄하지 아니하랴!

15일 망전(望奠)을 행하였다.

16일 여기에 와서 이미 달을 넘겨서 더 오래 머무르기 어려워 오늘 궤연(几筵;靈位)을 받들고 보은(報恩)으로 옮겨 가려니 가까운 곳에 친구들이 모두 와서 본다.

17일 이날은 곧 외왕고(外王考)의 첫째 기일(朞日)이다. 백씨께서 거처하는 것에 간략한 전의(奠儀)를 차리고 부득이 외가에 가서 참례하지 못하니 슬피 사모하는 회포가 갑절 간절하다.

하도(下道)에 적세(賊勢)가 다시 성(盛)하여 도원수 권율(權慄)과 순발사 김명원(金命元) 및 순변사 이빈(李薲)이 모두 의녕(宜寧)에 모였으나 아직은 선략(宣略)이나 경리(經理) 등의 일은 없다 한다.

19일 임하(臨河)에 안부를 얻어 들었고, 아우 심중(審仲)이 은진(恩津)에서 왔으며, 아우 지중(止仲)도 종곡(鍾谷)에서 와서 저간(這間) 답답하던 회포가 조금은 위안이 되었으나 각기 간고(艱苦)를 말하며 주린 빛을 면하지 못하여 마음이 아팠다.(이 때에 각지 생계를 위하여 두 아우에 하나는 은진에 있고 하나는 종곡에 있었다)

이옥산(李玉山) 어른께서 와서 안부를 묻고 난리 후에 처음 대면하여 각기 지나온 이력을 말하였으나 남은 두려움은 다하지 못하였다.

20일 들으니 서울에서 온 장사(將士) 및 관군과 의병이 모두 의녕(宜寧)에 모여 갈길을 나눌 의논을 하였으나 용기를 내어 진격하는 것을 즐겨하지 아니하니 과연 들은 바와 같이 당초에 조정에서 명령을 내릴 때에 여러 장수들이 가졌던 추격(追擊)의 뜻은 어디에 있는지 진실로 슬프다.

23일 종곡에 가서 여러 벗과 사담(沙潭) 어른 형제와 이숙평(李叔平;蒼石), 전정원(全淨遠;沙西)이 모두 모여 다시 거의(擧義)하기로 도모하였으나 식량과 군자(軍資)를 마련하기 어려워 한(恨)이 되었다.

24일 종곡에서 궁평으로 가서 성묘하고 돌아왔다. 가까운 곳에 친지들이 내가 어려워 괴로운 것을 알고 각자 식량과 물건을 가져다 주니 이런 때에 쉽지 않을 일이다. 무척 감사하였다.

25일 서쪽에 정보(情報)를 들었다.

27일 장천(長川)에 노속(奴屬)들이 떠돌다 갈곳을 잃고 있다가 나를 보고 살려주기를 청하는 데 보리는 이미 흉년이 들었고, 가을은 아직 멀어 백방으로 생각하여도 구원하여 살려 줄 대책이 없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나라안에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이 가을이 되기 전에 굶어죽는 사람이 지난 봄보다 갑절 늘어날 것이니 아픈 마음을 깨닫지 못하겠다.

28일 들으니 곽(郭)장군이 영솔하는 군대가 학산(鶴山)에서 빛났으니 왜적들로 하여금 바라보며 따라오게 하고, 또 사람들로 하여금 밤에 비슬산(琵瑟山)에 올라 사람마다 각기 세 개의 횟불을 가지게 하여 일시에 불을 들고 북과 피리를 일제히 두드리고 불어서 장차 왜적에게 향하는 것 같이 하다가 갑자기 불을 꺼서 고요하기가 사람이 없는 것같이 하고, 또 다시 이같이 하니 왜적들이 놀라 도망쳐 갔다하니 이는 역시 귀신의 계략이다.


7월(癸酉) 1일 삭전(朔奠)을 행하였다.

4일 들으니 진양(晋陽)이 포위(包圍)된 지 8일 만에 성(城)이 함락되어 해(害)를 입은 사람이 병사(兵使) 및 달관(達官) 20여원, 군졸(軍卒) 5,6천명이다. 모두 이 도내(道內)의 사람과 호남(湖南)에 정예(精銳)의 군사라 한다. 이 진양은 삼면(三面)이 막힌 곳이어서 끝내 함락에 이르렀으니 다른 고을은 장차 공격하지 아니하여도 스스로 함락될 것이다. 우도(右道) 일대가 장차 왜적의 소굴이 되면 그 기세(氣勢)로 당연히 호남(湖南)에 깊이 들어가고 만약 호남을 또 잃으면 다시는 국가에 근본이 될 땅이 없으리니 이를 어찌하리오!

6일 홍우안(洪友顔)이 와서 말하기를 왜적이 이미 진양성을 격파하고 돌아가 부산(釜山)을 점거(占據)하고는 큰 소리리치며 말하기를, 황조(皇朝;中國)가 강화(講和)를 허락하기를 기다려 이내 바다를 건너갈 것이라 하고, 지금은 바야흐로 양산(梁山)이하의 여러 군(郡)에 퍼져서 만단(萬端)을 들추어 내니 누구도 어찌하지 못한다. 천병(天兵)이 우리 군사로 하여금 왜적을 잡는 것을 일체 금(禁)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취를 정탐하여 자못 의심나는 단서를 찾아내고 있다. 아! 저 왜적은 나라의 원수(讎)고 백세(百世)에 원통하리니, 모든 혈기(血氣)있는 사람들은 누군들 왜적을 토벌하는 것이 의(義)가 되는 줄 알지 못할 것이며, 통화(通和)를 하지 못할 것이랴! 그러나 이미 천조(天朝)에 아뢰었은 즉, 천조가 만약 강화를 허가하면 우리가 감히 어찌 강화를 하지 아니할 것이며, 천조가 만약 허가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어찌 감히 강화를 하랴! 안으로는 강화하지 아니 할 뜻을 굳게 하여, 이로써 싸워 지킬 계획을 갖추고, 밖으로는 강화를 하고져 한다는 말을 퍼트려 날뛰는 예봉(銳鋒)을 늦추면 유혼(遊魂)이 쉬기를 빌리는 왜적이 큰 북(皼) 소리 아래에서 도망할 것이다.(대개 지금의 왜적은 곧 송(宋)나라의 요금(遼金)이다. 송나라가 잘못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깨닫지 못하다가 끝내 요금에게 망(亡)했으니, 그것이 강화의 결정이 불가한 것이니, 오늘날에 통화(通和)를 말하는 것은 고식적(姑息的)으로 화(禍)를 늦추려는 뜻이다.

11일 김덕휘(金德輝)가 안동에서 와서 임하에 소식을 전하기를, 백씨께서 아직 편안하시다 하여 위안이 되고 기쁘다 할만하다(임하에서 천전(川前)으로 옮겼다 한다).

12일 정경임이 이숙평과 더불어 와서 말하기를, 진양성의 함락은 굳게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왜적이 사람을 보내어 남몰래 성 밑을 파내어서 우리 군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오래된 성이 자연히 무너지고, 왜적이 개미같이 달라 붙어 들어오자 많은 방면에서 항거하여 왜적은 거의 물러났으나, 김천일(金千鎰)의 군병이 앞서 스스로 무너지더니 마침내 함몰(陷沒)되었다. 김천일과 최경회(崔慶會)는 이 때 촉석루(矗石樓) 위에 있으면서 일이 건저지지 못할 것을 알고 손을 맞잡고서 통곡하다가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으며, 복수의장(復讎義將) 고종후(高從厚)도 역시 성중에 있다가 해(害)를 입었다하니, 원수는 값지도 못하고 몸이 먼저 죽어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통분하게 하였다.

15일 망전(望奠)을 행하였다.

16일 창의장(昌義將;李逢)이 주부(主簿)로 임명(任命)되었고, 송언명(宋彦明)이 장계(狀啓;報告書)를 가지고 행조(行朝;行在所)에 가서 역시 참봉(參奉)이 제수(除授)되었으며, 그 나머지 군졸(軍卒)도 임금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역시 많았다 한다.

18일 들으니 진양성이 함몰된 뒤에 왜적이 끝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갔음으로, 장차 다시 쳐들어 올 뜻이 있어 보임에도 천병(天兵)은 언제나 강화(講和)만을 말하고, 싸워서 물리칠 계획은 생각하지도 않고 한갓 군량만 허비하고 마음대로 나쁜 짓만 하고 있으나, 조령밖의 여러 고을이 나라를 지탱할 세력이 아무데도 없었다.

20일 식량이 지극히 군색하고 달리 빌릴 길도 얻지 못하여 새벽에 출발, 저녁에 상주읍의 고향에 가니 거친 풀만이 무성하고 오직 노복(奴僕) 두어 사람이 동문 밖에 움막을 치고 있어 간신히 찾아서 잠자고, 한중형(韓仲瑩) 숙형(叔瑩)과 신문숙(申文叔)이 살고 있는 곳에 가까이 가니, 모두 와서 만나주어 마치 저 세상 사람이 다시 살아온 듯이 반가워 하여 기쁨을 말로 형용하지 못하였다.

21일 목사(牧使) 박종남(朴宗男)이 진주(晋州)에 있을 때 미처 부임하지 못하여 반자(半刺;判官)를 찾아가 급한 사정을 말하였더니 태모(太牟;보리)를 조금 나누어 주었고, 가(假) 목사 오운(吳澐)이 역시 보리를 나누어 주었다.

22일 신문숙과 더불어 여러 사람이 같이 성(城)안으로 들어가서 왜적의 진루(陣壘)를 두루 돌아보니, 왕산(王山) 위에는 흙집을 지었고 또 이층 높은 각(閣)을 세웠는데, 혹은 기와를 이고 혹은 판자(板)로 덮었으며, 혹은 흙으로 바르기도 하고, 풀을 덮기도 하여, 그 수가 얼마인지 알지 못할 만치 많았으며, 또 북문 밖에서 남문 밖에 이르는 곳에 기와를 쌓아 터(址)를 만들고, 흙으로 성(城)을 만들었으며, 성 위에다 기둥을 세우고 나무로 얽어매어 흙을 발라 벽을 만들었으며, 벽에는 구멍을 내어 포(炮)를 쏘도록 하였는데, 그 솜씨가 지극히 견고(堅固)하고 교묘(巧妙)하여 밖에서 들어오려는 사람이 발을 붙일 길이 없었다.

23일 장천(長川) 옛 집이 한 참이면 가는 가까운 거리여서 선조의 묘소를 살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얻은 식량을 부처 보낼 사람이 없던 차에 마침 삼산(三山)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만나 서로 의지하며 함께 출발하고저 함으로 형편이 따로 떨어지기가 어려우며 성묘(省墓)하러 가는 정사(情事)는 더욱 어려워 스스로 못가는 것으로 정(定)하고 나니 슬픔으로 사모(思慕)할 따름이다!

24일 들으니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유격장(遊擊將) 오유충(吳惟忠)의 호령(號令)이 엄하고 밝으며, 뜻과 행실이 청렴결백하여 만명이 넘는 군졸들이 털끝만치도 감히 죄(罪)를 범(犯)하지 못하였다. 천병(天兵)의 침탈(侵奪)과 작폐(作弊)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거늘 오직 두 장수가 이끄는 군대만은 홀로 그 해(害)가 없었으며, 중국에서도 역시 어진 장수라고 칭찬한다 하였다.(유장군은 사람됨이 용모가 단중(端重)하고 풍신(風神)이 상쾌하며 준수(俊秀)하여 얼른 보기에도 그가 범상(凡常)하지 아니함을 알겠고, 오장군은 간결(簡潔)하기가 유장군보다 나으며 한마디의 말과 한 번의 웃음도 가벼이 하지 않고, 사람을 보는 데에 그 도(道)가 아니면 털끝만치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다. 또 유장군은 칼을 잘 썼으니 그의 칼은 무게가 70여근(斤)이나 되는 데도 운전하기를 손바닥 위에 작은 탄알같이 하였다. 대개 칼은 곧 관장(關將;關雲長)이 쓰는 것이고, 관장 이후에는 유장군이 비로소 썼다 한다. 그들의 군졸은 일찍이 모자를 썼으며 이로써 남북병을 구별하였으니, 남병은 척강(滌江)인 이고, 북병은 요동(遼東)인이다.

26일 두 왕자(王子)가 왜적에게서 풀려나 위로 올라갔다하니 마음 아프던 나머지 그나마 다행하다.

이숙재(李叔載) 형제가 찾아 왔다. 이날 또 속리(俗離)로 거처를 옮겼다.

27일 들으니 서애(西厓;柳成龍 領相)께서 체찰사로 합천(陜川)에 내려와 있다가 오늘 왕명을 받들고 행재소로 갔다 한다. 찰방(察訪) 권경호(權景虎)가 군량을 구하는 일로 좌도(左道)로 감에 따라 백씨에게 편지를 보냈다.


8월(壬寅) 1일 삭전(朔奠)을 행하였다.

2일 경주진(慶州陣)에 머물고 있던 천병(天兵)이 복병(伏兵)하는 일로 나왔다가 갑자기 분탕(焚蕩)질 하는 왜적을 만나 서로 더불어 접전(接戰)하는 데, 천병은 손에 병기(兵器)가 없어 여섯사람이 왜적에게 해(害)를 당했으나, 천병이 용맹하여 한 사람이 긴 창(槍)으로 왜적 속으로 들어가 그 중 하나를 찔러 죽이고 마구 휘두르니 다른 뭇 왜적들이 모두 물러가서 두 왜적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하니 듣기에 매우 상쾌하고 장(壯)하다.

4일 들으니 천조(天朝;中國朝廷)에 강화(講和)를 주청(奏請;아뢰어 청함)한 회보가 왔는데 황제(皇帝)께서 크게 진노(震怒)하여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로써 왜적의 섬멸(殲滅)을 기필(期必)함으로써 우리나라를 편안하게 하라는 명령이 내렸으니 크도다. 황은(皇恩)이여! 이는 실로 우리나라를 재조(再造)하는 것이다. 진실로 우리 임금의 공경하고 삼가며 큰 나라를 섬기는 정성이 천조(天朝)를 감동하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능히 이에 이르렀으리오!

들으니 고을의 목사(牧使)가 조적미(糶糴米;어려울 때 長利로 빌려 주고 가을에 받는 官穀)를 준다 하기에 아무 지중(止仲)과 함께 읍(邑)에 갔더니 한 식구에게 주는 쌀이 모래와 흙이 썪인 것으로 삼승(三升)이니, 이로써 어떻게 구생(救生)하랴 참으로 한심하다!

5일 비가 와서 읍(邑)에 머물렀다.

6일 낮에부터 몸에 한기(寒氣)가 나더니, 또 열(熱)이 나며, 마치 점질(痁疾;학질)같아 몹시 걱정이 된다.

7일 목사(牧使)를 찾아뵈옵고, 풍속상 명절이 가까워 거처로 돌아갈 뜻을 말하였으며, 간략한 물건을 드렸다.

8일 오전부터 통증(痛症)이 심하여 인사를 살피지 못하겠으니 이같이 하여 그치지 아니하면 죽으러 가는 곳이 멀지 않을 것 같아 고민이다.

9일 아우 지중과 더불어 행장을 챙겨 출발하여 율원(栗院)에 와서 숙박하였다.

10일 원암(元菴)에 도착하였고 여기에 온 후에는 통증이 덜하여 다행하다.

11일 제사 지낼 고기를 구해 가지고 처소로 돌아왔다.

14일 주찬(酒饌)을 갖추어 아우 준(竣)으로 하여금 궁평에 가서 치전(致奠)하였고, 나는 병으로 가서 참례하지 못하였다.

15일 간략히 시수(時需)로 망전(望奠)을 행하고, 조선(祖先) 여러 위(位)에서 천신(薦新;새 곡식과 과일로 제사 지내는 것)하였다.

26일 아우 심중(審仲)이 화산(花山)으로 가는 데 도로의 통색(通塞)을 확실히 알지 못하여 고민이다.

29일 큰 절에 도착하여 김창원(金昌遠)의 편지를 보니 바다위에 왜적은 끝내 돌아가지 아니하고, 아직 수례를 구하는 것은 알지 못하고 있다 하였다.

9월(壬申) 1일 삭전(朔奠)을 행하였다.

9일 간략히 시수(時羞)를 마련항 절사(節祀)를 지냈다.

11일 종곡(鍾谷)으로 거처를 옮겼다.

13일 호우(湖右)로 출발하여 가는데 검찰사(檢察使) 이산보(李山甫) 공이 사람을 보내어 나를 맞음으로, 가서 비오니 처음 만나는 데도 친구 같았다.

15일 두루 거처 궁평에 가서 성묘하고 즉시 출발하여 갔다.

28일 완산부(完山府)에 도착하니 부윤(府尹) 홍영숙(洪令叔)의 접대가 매우 관후(款厚)하였다. 당(唐)나라 장수 송유격(宋遊擊)이 이곳 진(陣)에 머물고 있으며, 상강(霜降)날에 산천(山川)에다 제사를 지낸다 한다.


10월(壬寅) 2일 아헌(衙軒;府의 청사)에 들어갔더니 부윤(府尹)이 군색을 구제하는 물자(物資)들을 나누어 주었다. 들으니 임금의 행차가 해주(海州)에서 지난 달 19일 날을 받아 장차 출발하려는 데 번개와 우레의 변(變)이 있어 다시 날 잡아 염(念;20일) 후에 행차한다고 한다. 들으니 당(唐)나라 배(船)가 군량을 싣고 부안(扶安) 경계에 도착하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혹은 겁살(劫殺)하고 혹은 쫓아내고는, 한 배에 가득한 쌀을 모두 도둑질 해 가니, 당나라 사람 10여명이 도망쳐서 작은 섬에 들어와 바다에 고기잡는 배를 만나 애걸하여 빠져나와서 곧 관(官)에 고(告)하니, 관에서 도적들이 잡으려 하고, 방백(方伯;觀察使)이 다음 날 완산(完山)으로 들어와 추문(推問)한다고 하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 행위는 지극히 분통하고 천장(天將)이 성내는 것은 마땅하다 하겠다.

5일 노현(蘆峴)을 넘어가는데 고개의 남북에 모두 군보(軍堡;陣址)가 있었으며, 저녁에 장성(長城)에 도착하니, 수령(守令)이 나와서 접대하였다. 이 수령은 지난 여름 군병을 모집하러 중국에 들어가 험간(險艱)을 피하지 아니하고, 마음을 다해 일을 이루었다. 이 벗의 심사(心事)는 평소에도 이러하였고, 예부터 익히 아는 사이이니 이번 일에 사랑가 사모를 더하였다.

6일 오늘 수령이 군병을 모아 연습을 한다함으로 나가 보았더니 대개 척강(滌江)인을 모방한 것으로 칼 쓰고 창을 휘두르는 법이며 한 달에 여섯 차례 연습한다고 하였다.

9일 이날은 어머니의 초도(初度;回甲日)이다. 몸이 객지에 있으면서 이 날을 당하나 구로(劬勞)의 은혜와 통한이 더욱 망극(罔極)하도다.

10일 여행중에 연일 큰 비가 내려 시내 물이 많이 불어나 여름에 장마와 다름이 없다. 비 개이는 사이에 건너서 30리를 가니 입암산(笠巖山)이 있고 동구에 여산암(廬山菴)이 있다. 마을을 지나 산길로 들어가니 지극히 험하고 높으며 시내물이 크게 쏟아져서 부득이 길을 돌아 푸른 등나무와 칡을 잡고 들어가서 또 성(城)을 넘어 들어가니 둘레가 20리쯤 되고, 사면이 모두 높은 절벽이며, 산은 그리 높지 아니하나 발을 붙이기는 어려우니, 이내 하늘이 만든 땅이고 옛적 성(城)이다.(고려 현종 때 계단(契丹)의 난을 피하려고 쌓은 것이다) 자못 좋은 성이나 무너져 폐성이 되었고, 반이 넘게 넷 고을의 사람들이 점령하고 있었다.(泰仁과 井邑, 珍原과 本邑 넷이다) 지금 다시 성을 쌓고 있으니(玉汝가 守察將이 되고 尹奉事 軫이 監察官이다) 만약 다 쌓고 나면 형세가 갑절 좋을 것이고 다른 날 혹 불행한 걱정이 있으면 백성이 들어와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玉汝가 내일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므로 집사(執事) 유생(儒生) 두어 사람과 세 고을에 감독관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옥여가 나에게 제문을 지어 달라고 청함으로 졸열(拙劣)을 잊고 밤에 초(草)를 하는데 새로 지은 풀집이 성글어 밤기운이 숨어 들어 뼈가 시렸다)

11일 북쪽 성에 올라가니 여러 고을에 군병들이 이미 역사(役事)를 하고 있고, 서북(西北)을 굽어보니 보이는 곳이 쾌활(快闊)하였으며, 정서(正西)는 흥덕(興德)이고, 조금 북쪽은 고부(古阜)와 부안(扶安)이며, 정남(正南)은 바다 입구의 변산에 하늘과 구름의 밖에 태인의 여러 곳이 가르킬만치 분명하다. 곧 성에서 내려와 여산암에 이르렀다.(泉石과 楓林 등 볼만한 곳이 많았으나 이것이 유상(遊賞)하는 때가 아님으로 즉시 돌아왔다)

21일 전해 들으니 임금의 행차가 이달 초하루에 서울로 돌아왔다 하나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했더니, 방백(方伯)이 보여주는 교서(敎書;임금의 지령서)를 보니 비로서 전하는 소문이 거짓이 아님을 알겠도다. 한 해가 지나도록 피란가서 가진 괴로움을 다 맛보고 다행히 당나라 황제의 은혜를 입어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이제부터 인심이 바로 정(定)해지고 힘입을 곳이 있게 되었으니 나라의 경사이고 백성의 다행이라! 무엇이라 다 말하리오!

11월(辛未) 2일 고산(高山)에 도착하여 완산(完山)에서 전해온 통문(通文)을 보니 경상 우병사(右兵使)와 전라 병사(兵使)가 고성(固城)과 당포(唐浦)에서 왜적을 만났고, 전라병사는 탄환에 맞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도 적세(賊勢)는 조금도 물러가거나 꺾일 뜻이 없다하니 이 때의 일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백성과 나라를 구제하리오!

16일 종곡(鍾谷)에서 거처로 돌아와 사담(沙潭) 어른을 가서 뵈옵고 얻어 들으니, 경주(慶州)에 진(陣)을 치고 머물던 당병(唐兵)이 왜적에게 2백명이나 피살(被殺)되었다 하니 비록 적실한 정보는 아니나 슬픔을 무엇이라 말하리오!

※ 12월에 일기를 잃어서 전하지 못하여 甲, 乙, 丙, 丁 四년의 일기 가운데 볼만한 말을 뽑아 아울러 아래에 부친다.

갑오(甲午;선조27 1594) 6월 16일 들으니 중조(中朝;중국조정)에 어사(御史) 등 고관들이 속국(屬國)에 임금을 왕(王)으로 봉(封;임명)하여 속국에서 조공(朝貢;土産物을 上國에 바침)을 받는 것 등이 옳지 않다고 직접 배척(排斥;講和를 拒絶)하니 변신(邊臣;屬國의 신하)들이 이를 옹호(擁護)하고 은폐(隱蔽)하자 이를 보고 규탄(糾彈)하는 글이 지극히 준엄(峻嚴)하고 장수와 대신들의 상소(上疏)가 역시 밝아 당(黨)으로 나누어져 서로 공박(攻駁)하니 고관 두 사람이 이를 그치게 하고저 나와서 오므로 원접사(遠接使;尹先覺과 柳永吉)를 이미 뽑아 내었다 한다. 대개 변장(邊將;出征나온 장수)은 한 뜻으로 강화를 주장하고 중조(中朝)에 간관(誎官)들은 직설(直說)로 논(論)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사람이 있다고 할만하다)

7월 3일 들으니 왜적의 세력이 장차 독(毒)한 성미를 마구 비릴 계획이라 하니 유총병(劉綎摠兵)도 역시 철수(撤收)하여 돌아갈 뜻을 가지고 있다 한다.(대개 沈惟敬과 小西行長은 中國에 가서 講和하자하고 조정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12일 장성(長城)에 머물면서 영남에서 전해온 소식을 들으니 많은 수의 왜적들이 나와서, 한 패는 서울로 향하고 한 패는 물길로 장차 호남(湖南)을 침범한다. 또 들으니 영남의 여러 진(陳)에 왜적들이 연이어 항복해 오고, 장차 전체 진(陳)을 들어 항복해 올 것이라 하나, 왜적의 사정은 헤아리지 못하며 하물며 그들의 성질이 간사하고 포악하기 짝이 없는 것들임에랴!

26일 현(懸)에 인편으로 두 아우의 편지를 얻어보니 사담(沙潭;金弘敏)께서 연관(捐館;殉職)하였다하여 놀라고 슬퍼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였다. 나와 이 분은 다만 동향일 뿐 아니라, 의리(義)로 3년 동안 싸움터에서 사생(死生)을 의탁하였고, 서로 돈독한 사랑이 골육(骨肉)과 다름이 없다가 하루 아침에 별세하시니 하늘이 또한 무슨 마음이던가! 들으니 윤좌태(尹左台;尹斗壽 左相)가 남원(南原)으로 내려와 유총병(劉摠兵)이 철수하지 말고 머물도록 권하려고 한다하며, 만약 이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학금(鶴禁;世子)이 내려온다 한다.(沈惟敬과 小西飛가 중국에서 나와 王으로 봉하고 朝貢을 받치는 등의 일을 매듭지으려 하였으나 이 때 허락을 얻지 못하고 왜적이 바다를 건너간 뒤를 기다리자고 하였다 한다.

8월 3일 고양(高陽) 수령 강수곤(姜秀崐)이 담양(潭陽)에서 관아(官衙)로 돌아오다가 우암(牛巖) 땅에서 갑자기 왜적 30여인을 만나 숲풀속에서 떼지어 나오면서 어지러이 활을 쏘아 대는 데 강수령은 간신히 피해 나왔으나 병졸 두 사람이 화살에 맞아 죽을 지경에 이르고 치중(輜重;軍需品) 6,7바리를 모두 빼앗겼으며 관인(官印)마저 잃었다 한다. 들으니 유총병이 철수하여 올라갔다하니 호남(湖南)의 관새(關塞;陣地)가 이제부터 굳게 지키는 울타리가 없어졌으니 더욱 염려가 된다.

9월 13일 독운어사(督運御使) 윤존중(尹存中)이 하도(下道)에서 올라와 하는 말이 천병이 철수해 간 것은 조정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고 또 말하기를 경보(京報)를 보니 조정에서 천조(天朝)에 원병(援兵)을 청하고저 해평(海平)에 윤근수(尹根壽)를 상사(上使)로 가고, 동지(同知) 최립(崔岦)이 스스로 청하여 갔으며, 내한(內翰) 김상준(金尙雋)이 역시 임금에게 가기를 청했으나 한 길에 폐단이 많다 하여 조정에서 막았다 한다.

15일 정이경(鄭以敬)과 함께 모암(慕巖)에 가서 보니 시냇물이 영롱(玲瓏)하고 단풍(楓)이 무르익었으며, 국화가 아름다워 구경할 물건들은 사랑할 만하나 사우(祠宇)와 강실(講室)이 반 넘게 무너지고 없어져, 장차 위판(位板)을 편안히 모실 곳도 없어지고 있으니, 이로써 국운(國運)이 성쇄(盛쇄)를 점(占)쳐 보니 거듭 절효공(節孝公)을 위해 슬퍼지도다!

30일 저보(邸報;東官에 官報)를 얻어보니, 정인성(鄭寅城)이 일을 마치고 거두어갔으나 진정(鎭定)되지 못하고, 신경진(辛慶晋), 이경함(李慶涵), 조수익(趙守翼), 박동선(朴東善)이 각기 다르게 서고 구(具)와 더불어 박(朴)이 언사(言辭)의 잘못으로써 옥당(玉堂;弘文館)에 논거(論據)가 되었고, 김우옹(金宇顒), 유영순(柳永詢), 박승종(朴承宗), 정경세(鄭經世) 등이 출사(出仕)하였으며, 그 후 헌부(憲府)에서 또 윤두수(尹斗壽) 좌상(左議政)이 음흉(陰凶)하고 간활(奸猾)하여 착한 선비를 무함(誣陷)하고 재물을 탐내어 뇌물을 받아들였으며, 또 바다와 섬에 일을 가벼이 처리하여 위엄을 손상케 했다는 등의 말들이 지극히 번거롭게 많이 이르고, 여러 백 가지의 탄핵(彈劾)이 준엄(峻嚴)하여 더 할 수 없었으며, 편안하지 못한 단서가 이토록 지극하게 이르렀으니 어이하리오!

유총병(劉摠兵)이 13일에 갔다가 압록강을 건너 돌아온 군졸(軍卒)이 혹은 2만이라 하고, 혹은 1만5천이라 하는데, 마련해 내놓을 군량에 아무런 대책이 없어 조정에서 이로써 당황하고 있다한다.


11월 3일 새벽에 출발하여 가라령(加羅嶺)과 금강령(金剛嶺)을 넘어 저녁에 해남(海南)에 이르렀다.

11일 꿈에 선군(先君;作故한 父親)을 뵈왔으니 이 때에 이르러 갑절 슬픈 사모(思慕)가 더하였다. 진사(進士) 백선명(白善鳴)이 진남(振南)에서 왔다. 작고한 시(詩)인 백참봉(白參奉) 광훈(光勳)의 아들이다. 이 사람도 역시 시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써서 밤이 깊도록 시를 말하다가 헤어졌다. 정자(正字) 윤경열(尹景悅;光啓)은 다만 훌륭한 재주가 있을 뿐아니라, 서사(書史)를 종일 담론(談論)하여도 싫지 아니하니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다. 도사(都事) 황화(黃和)가 이연조(李延祚)를 데리고 왔는데 역시 문묵(文墨)을 잘 이해하여 더불어 시(詩)를 말하였으며 또 각자 난리가 시작할 때부터 겪어 왔음으로 오늘의 모임은 역시 슬프기도 하고 도 다행스럽기도 하다.

12월 1일 장성(長城)에서 완산(完山)에 이르러 경상 병사(兵使) 김응서(金應瑞)가 왜적의 장수(平行長, 玄蘇, 平義智, 平調信)와 더불어 문답(問答)한 말을 얻어 보니 겉으로는 좋은 것 같으나, 안의 뜻은 헤아리기 어려우며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의 사절(死節)과 곡절(曲折)이 그 속에 상세히 들어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간담(肝膽)이 자연히 격동되었다.(바야흐로 성(城)이 함몰(陷沒)될 때에 스스로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갑옷과 투구를 갖춘 다음 붉은 옷을 입고 촉석루 위의 의자에 앉아 왜적이 끌어 내릴 때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의 말이 없이 조용히 죽음에 이르니 적들도 역시 의롭게 여겨 관복을 갖추어서 성 밖에 장사 지냈으니, 만약 봉분을 만들었다면 지금도 그 곳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그의 첩(妾)과 비(婢)도 역시 적에게 사로 잡혔으나 일본사람이 몸을 더럽히지 안했으니 이는 공의 절의(節義)에 감복(感服)한 때문이라 한다. 난리가 난지 3년이 지나 온 나라가 쓸려갔는 데도 홀로 이 사람만이 우뚝 의열(義烈)을 심었으니, 어이 그리 기특(奇特)한가!

16일 영남의 술인(戌人;수자리사는 군인) 이사민(李士敏)에게서 들으니 거제(巨濟)에서 거사(擧事)할 때 홍량선(虹梁船) 한 척과 사후선(伺候船) 두 척이 함께 왜적 속에서 잃었으나 의심하는 사람이 없고 변신(邊臣)도 덮어 두어 사실을 듣지 못했다가, 대론(臺論;司謙院의 발론)이 일어나기에 이르렀으며, 시사(時事)의 기율(紀律)이 하나 같이 이에 이르렀으니 통탄(痛嘆)할 일이다. 들으니 당나라 사람이 낙타를 끌고 내려간다 하기에 자운루(紫雲樓) 앞에 보러 갔더니 이내 심상한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을 듣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25일 유격장 진운홍(陳雲鴻)이 고을에 들어왔는데 대개 천조(天朝)가 장차 왜적에게 조공을 허락하고 왕(王)으로 봉(封) 할 것임으로 저들의 군사(軍師)를 가서 달래어 바다를 건너가게 하려 하면서 그 처치(處置)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조사(詔使)가 나와 본다 하였다.(雲鴻은 사람됨이 豊厚하고 보낸 禮物을 하나도 받지 않았다)

27일 거처로 돌아와서 다음날 사담(沙潭) 어른의 연궤(筵几)에 가서 조곡(吊哭)하였다.(객지에서 訃告를 받고 이제야 비로소 와서 조곡(吊哭)하니 정사(情事)가 더욱 슬프고 한(恨)이 되었다.

을미(乙未;선조28 1595) 정월 1일 삭전(朔奠)을 행하고 다음 고조(高祖)이하 여러 위(位)에 간략한 제수(祭需)를 갖추어 천헌(薦獻)하였으며, 외조(外祖) 고비(考妣)의 위(位)에 뒤따라 설헌(設獻)하였다.


5월 14일 조지(朝紙;조정의 관보)를 얻어보니 지난 해에 강화를 의론하여 계문(啓聞;報告)하였던 일을 사간원(司諫院)에서 일제히 규탄(糾彈)하며 일어나고, 그 때 방백(方伯)이 함께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신원(伸寃)과 구원을 논척(論斥)하니 성상(聖上;임금)께서 비답(批答)하기를 사설(師說)이 큰 소리로 움직이고 있다하여 변방(邊方)의 근심이 개이지 아니하더니, 조정의 기상(氣象)이 또 이같이 불안한가! 고민이 된다!

진(陳) 유격장이 적의 속에서 나와 중로(中路)에 막혀 머물고있으니 왜장(倭將) 소서행장(小西行長)과 모두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오래지 않아 바다를 건너가 무장(武裝)을 풀고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 갈 것이니 어찌 일본의 다행이 아니고 역시 조선의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지금 만약 거두어 돌아간다면 조금이라도 어깨를 쉴 희망을 바랄 수 있으리니 다행하지 않는가! 하였다.

병신(丙申;宣祖 29 1596) 정월 16일 들으니 조정에서 괴산(槐山)에 이봉(李逢)과 옥천(沃川)의 박춘무(朴春茂)를 차출(差出)하고, 아울러 조방장(助防將)을 겸하게 하여 여러 곳의 요충지(要衝地)를 맡겨 왜적을 막는 일을 시키려고 하니, 이봉은 당연히 조령(鳥嶺)과 적암(赤巖)이고, 박춘무는 추풍령(秋風嶺)과 괘방(掛防) 등지 일 것이다. 이는 대개 특명(特別)에서 나온 것이다. 박(朴)의 사람됨이 다 알지 못하나 이(李)는 나이 이미 늙어 쇄해 있으나 경계하고 다급한 곳을 벗어나는데는 능히 책임을 다할 사람이다.

23일 들으니 왜적의 괴수 청정(淸正)이 돌아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통신(通信)으로 새 땅을 분할(分割)하고 군량을 빌리는 등의 일을 조정에 대고 공갈(恐喝)하니, 조정에서는 비록 통신으로는 불가한 일이나 상국(上國;中國)에 아뢰고 물어야 하고, 끝내는 맡지도 못하는 일이니 이를 어찌하리오! 또 하도(下道)에서 전해온 통문을 보니 왜적의 배가 서로 이어 나와 오고 요사이에는 불태우고 노략질 하니 비록 얼마 안되는 적이라 하나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려워 하여금 미리 병기(兵機)등 일을 조치하여야 할 것이라 한다.

2월 11일 우리 고을에서 석전제(釋奠祭;鄕校儀式)를 지내고 오늘 아침에 번육(膰肉;음복 제수)을 보내왔으니 난리를 겪은 나머지 이같은 예를 올리니 위안이 될만하였다.

28일 대지(大旨)에 가서 김선부(金善夫)의 빈소에 문상(問喪)하였다. (난리 난 처음에 속리산에서 만나 의진(義陣)에 일을 같이 하며 사생(死生)의 뜻이 깊어 수년을 지내고, 이제 여기와서 조곡(吊哭)하노라니 두터운 정의를 등진 것 같아 부끄럽도다.)

3월 7일 물건을 사러 장에 갔으니 내일이 숙일(熟日)인 지라 선영(先塋)을 쓸고 제수를 갖추기 위함이다.

8일 아우 심중(審仲) 및 두 조카 기원(基遠) 영원(榮遠)과 함께 흑석(黑石)의 묘소(墓所)에 가니 황폐하여 쉽게 수보(修補) 할 형편이 못되어 지극한 슬픔으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다. 요포(繞浦)의 옛 집터에 가니 마을 사람의 두 움막 뿐이고 무너진 담장과 무성한 풀등 경색(景色)이 말이 아니어서 오래 두루 돌아다니니 슬픔만 더욱 더하더라.

9일 심중과 두 조카를 시켜 사벌(沙伐)에 가서 두 묘소를 전소(奠掃)하게 하였다. 어서(御使) 정경임(鄭景任;愚伏)이 상주에 들러 왔음으로 맞아서 주사(州司)에가 가 이야기 하였다.(경임이 온 것은 본래 여러 곳을 살피는 관방(關防)의 일이였음을 오늘 토잔(兎棧)과 고모성(姑母城) 수축(修築)을 위해 유곡(幽谷)등지로 갔다.)

11일 우도사(右都事) 이여실(李如實)이 우리 고을에 들어왔다. 미리 산성에서 피난하는 백성들을 깨우치고 달랬음으로 갑자기 모아 놓고 성에 들어갔어도 사방으로 흩어지는 폐단은 없었다 한다. 바다에 왜적들의 소식은 아직 다른 것이 없고 들으니 혹자가 말하기를 심유경(沈惟敬)이 돌아가고 천사(天使;中國使臣)가 들어왔다 갔는지의 여부(與否)는 알만하다하였다.

28일 보은(報恩)에 거처하는 곳으로 돌아갔다.


4월 2일 이날은 작고하신 어머니의 상례를 마치고 난 후 처음 맞는 기일(忌日)이다. 새벽에 일어나 제사를 지내니 유모(孺慕)의 아픔이 새로워지는 것 같으나 망극(罔極)을 어이하랴!

3일 궁평(宮坪)에 가서 어머니 묘소를 살피고 돌아왔다.

9일 하도(下道)에서 전해 온 통문을 보니 또 초사흘에 이르러 왜적이 진영(陣營)속에 잔치를 베풀고 두 천사(天使) 및 여러 종사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다가 전체 군병이 나와 성을 포위하고 장관(將官)들을 일으켜 세우므로 송호(宋好) 등 두어 사람이 간신히 어렵게 도망쳐 나와서 밀양(密陽)에 이르러 묶어 놓은 복물(卜物)을 가지고 급급히 올라갔다 한다.

10일 숙평(叔平;蒼石)의 편지를 얻어 보니 복건(福建)에서 사로 잡혀간 사람이 일본에서 유승종(兪承宗)에게 보고한 것을 보면 왜적의 괴수 수길(秀吉)이 병사(病死)했다 한다. 유승종이 이를 김 접반사(金 接伴使)에게 알려 주었다. 대개 수길이 만약 죽으면 청정(淸正)이 이미 생각할 겨를이 있을 것임으로 혹 화(禍)가 행장(行長) 의지(義智)에게 옮겨져 왜적의 진중(陣中)이 시끄러운 때에 천장(天將)이 반드시 도망쳐 나올 생각을 할 것이나 곡절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11월에 들으니 강화를 거부한 일로 국서(國書)가 이루어지지 못하자 임금께서는 다시 피난 할 뜻이 있고, 대신(大臣)들을 만나고 맞이할 계획을 하며, 서울의 백성들은 군수(軍需)를 갖추어 성(城)을 지킬 뜻이 있어 국시(國是;나라의 方針)를 정하지 못한다 하였다.

정유(丁酉;선조30 1597) 1월 14일 왜적 청정(淸正)이 이미 부산에 도착하였다 한다. 백씨께서 창의(倡義)한 동지들과 의논하여 친정(親征)을 청하는 상소(上疏)를 하였으며, 그 소문의 말이 엄정(嚴正)하고 간절하여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킬만 하였으나 첫 번과 두 번 모두 임금께서 받아 들으시고 이 대계(大計)를 찬동하는 회답을 얻지 못했으니 진실로 슬픈 일이다.(처음 상소 때는 권진사 욱(旭)이 소수(疏首)였고, 두 번째 상소에는 백씨가 소수이고 소문을 지었다.)

25일 조정에서 신립(申砬)이 조령(鳥嶺)을 지키지 아니한 것이 한(恨)이 되어 지금 고개 위에 성(城)을 쌓아 몰려 들어오는 걱정을 막으려고 하였으며, 이의 찬획사(贊畫使)인 이양구(李養久;時發)가 경리(經理)한다 하였다. (조령은 하늘이 만들어준 험난한 요새로 막는 시설을 하지 않더라도 지키기만 잘하면 적이 못 들어오거늘 그저 부당하게 재력(財力)만 허비하고 있으니 조정이 어찌 좋은 계책을 얻었다 하리오! 헛되이 노력만 하였음을 면치 못할까 두렵다.)

3월 10일 들으니 고급사(告急使) 정기원(鄭期遠)공이 중도(中朝)로 들어가 구원(救援)해 주기를 바라는 뜻을 개진(開陣)하니, 천조(天朝)에서 말하기를, 강화(講和)하기로 이미 정했다 하며 들어주지 아니하자, 정공(鄭公)이 죽음으로써 맹세하며 그 뜻을 밝히니, 명(明)나라 황제가 이내 깨닫고 요동(療東)과 석강(淅江)의 정병(精兵) 7천명을 먼저 보냈다 한다. 무술(戊戌;선조31(1598)) 3월 좌도(左道)로 향해 떠났다. 눈을 들어 산천을 바라보니 풍경(風景)은 다르지 아니하나 슬픔이 없지 못하니, 오늘 옛을 생각하는 회포 어느 날에나 요사스러운 기운을 씻어내고, 태평 세월에 기업(基業)을 다시 볼런지 알지 못하겠도다. 천전(川前)에 도착해 보니, 아직은 모두 편안하나 슬픔과 기쁨이 서로 지극하여 정(情)을 가누지 못하였다.

10일 돌아오는 길에 왜적의 진터(陣地)를 두루 돌아보니, 혹은 10리에 혹은 20리에 서로 바라보며 끊이지 않고, 무두 높은 산봉우리가 우뚝 우뚝 튀어 나온 듯하여 막힌 곳이 없으니, 이를 종배진(鍾杯陣)이라 한단다.


7월 10일 들으니 천병(天兵)이 괴산(槐山) 충주(忠州) 전주(全州) 세 고을에 머물면서 둔전(屯田;軍人이 농사짓는 밭)을 계획하여 가을이 되기를 기다리니 백성들의 힘을 조금은 쉬게 할 때이고, 영남과 호남이 합세하면 이로써 만분의 일의 효과라도 얻어 군량이 있고 없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외롭게 끼쳐진 백성들이 힘을 다하는 것을 돌아보지 않으며, 발걸음 가벼이 남쪽으로 내려 올 것이니, 이같이 하고도 능히 큰 일을 건져내지 못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8월 2일 들으니 유제독(柳提督)이 만명이 넘는 군병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 갔으니 장차 이로써 후형(候邢)을 군문(軍門)에서 맞으려는 것이다. 내가 천장(天將)의 접반관(接伴官)으로 성주(星州)에 가서 살아 남는 걱정은 면했고 또 다행히 들으니 중조(中朝)에 상서(尙書) 석성(石星)이 강화(講和)를 주장하면서 다시 사려(師旅)를 움직이는 것이 불가하다하니, 과관(科官) 서성초(徐成楚)가 황제에게 아뢴 석성의 말을 규탄(糾彈)하기를 이는 중조(中朝)가 조선을 버리는 것으로 스스로 변방(邊方)에 원병(援兵)을 철수(撤收)하는 것은 옳지 못하니 허락하지 말것이며, 석성의 죄(罪)는 벌(罰)하지 아니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하니, 이는 진실로 중조(中朝)에 곧은 말 하는 직신(直臣)이고 우리나라에 은인(恩人)이다.


10월 15일 제독(提督) 마귀(麻貴)가 경주에서 나아가 서쪽에서 생겨난 왜적을 포위하고 제독 동일원(董一元)이 성주에서 나와 사천(泗川)에 왜적을 포위하며 제독 유정(柳綎)이 순천에서 나와 예교(曳橋)의 왜적을 포위하려고 세 장수가 일시(一時)에 거사(擧事)하여 9월20일부터 성(城)을 포위하였으나 동(董)제독이 먼저 군병을 물려 걸어가는 병졸이 거의 다 죽고 군기(軍器)와 군량(軍糧)을 모두 왜적에게 빼앗겼으며 유(劉)제독 역시 그러하였다. 하고마(麻)제독 만이 물러가는 왜적을 참살(斬殺)한 급수(級數)가 가장 많고 군졸도 죽은 사람이 없었다 하였다.

11월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사천(泗川) 예교(曳橋)의 왜적과 더불어 크게 싸우다가 탄환에 맞아 누었다 하고 이로써 사천의 왜적은 많이 죽었고, 예교의 왜적은 무사히 도망쳐 갔다하니 아! 슬프도다! 하늘이 순리(順理)를 도우지 아니하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이제 막 싸우려는 때에 순국(殉國)하게 하였는가! 심안(沈安;頓吾)도 역시 죽었다 하나 어떻게 믿으랴!

12일 왜적이 겨우 물러갔으나 조정의 싸움은 이제 막 무르익어 배척(排斥) 축출(逐出)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니 옛 말에 하북(河北)의 적(賊)은 쉽게 간다하였으나 우리 조정의 붕당(朋黨)은 불행히 가까워지기 어렵지 않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