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상주지방의 농민항쟁
김 종 환
목 차 | ||||
Ⅰ. 머리말394 Ⅱ. 19세기 전반 상주지방의 향촌 사정395 Ⅲ. 상주의 임술 농민항쟁(1862)402 Ⅳ. 함창의 신묘 농민항쟁(1891)407 Ⅴ. 상주의 동학농민혁명(1894)412 Ⅵ. 맺는말423 |
Ⅰ. 머리말
우리 역사에서 19세기는 근대사회로의 전환기였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조선사회는 중세 봉건적인 사회 모순을 극복하는 가운데 근대 자주 국가를 수립하려는 실천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당시의 왕조 정부나 보수지배층들은 그러한 역사적인 과제를 수행하기는커녕 봉건적인 억압과 수탈을 여전히 일삼으면서, 때마침 밀려드는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적인 접근에도 주체적인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에 위로부터의 개혁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던 당시의 농민들은 스스로 변혁주체가 되어 사회개혁과 자주독립을 요구하는 반봉건․반외세 항쟁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게 되었다. 홍경래 난(1811)과 임술농민항쟁(1862), 동학농민혁명(1894)으로 이어지는 19세기의 농민항쟁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기 상주의 농민들도 세 차례의 대규모 농민항쟁을 벌였다. 1862년의 5월과 1891년 8월, 1894년의 9월에 상주와 함창 농민들은 향회를 열고, 항쟁에 나서 읍성을 점거하고 양반 토호(土豪)층과 이서배(吏胥輩)들을 징치(懲治)하는 등 반봉건(反封建), 반외세(反外勢) 항쟁을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그 무렵 상주는 17,877호에 65,035명(남자 30,624, 여자 34,411), 밭 8,847결, 논 6,641결의 군세를 지녀 경상도에서 경주 다음가는 큰 군현이자 삼남지방의 대표적인 농업지대였다. 함창은 원호(元戶) 2,383호, 실호(實戶) 1,937호의 소읍(小邑)이나 상업적 농업이 성행하였다. 따라서 상주와 함창에서 일어났던 세 차례의 농민항쟁은 다른 고을에서 일어난 어떤 항쟁보다도 그 파장이 매우 컸기 때문에 역사적 의미를 소홀히 취급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상주에서 일어났던 1862년의 임술농민항쟁과 1891년의 함창농민항쟁,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 및 역사적 성격을 이 글에서 살펴보려는 것이다. 19세기의 향촌 사정을 먼저 살핀 후에 임술농민항쟁과 함창농민항쟁,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양상 및 항쟁 이후의 향촌 변화에 대하여 간략하게 규명하고자 한다.
Ⅱ. 19세기 전반 상주지방의 향촌 사정
1. 향촌 지배 구조의 변동
(1) 상업적 농업의 확대와 계층 분화
19세기 조선사회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힘입어 농촌에서도 상업적 농업이 확대되고 있었다. 수운(水運)과 육운(陸運)이 편리했던 상주와 함창의 경우에는 이미 10여 개의 장시(場市)가 5일마다 곳곳에서 성황을 이루었으며, 도가(都家)라고 불리는 읍내의 객주집은 많은 물산을 집적하여 외지에 내다팔아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당시 상주의 상업적 작물로 손꼽히는 것은 미곡 외에도 명주와 면화, 곶감, 대추, 돗자리 등이었다. 일부 부지런한 농민들은 그와 같은 작물들을 재배하여 부농(富農)이 되어 때마침 관아에서 판매하던 공명첩(空名帖)을 사는 등의 방법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나갔다. 1720년의 상주 단동면과 중동면의 량안(量案)과 호적(戶籍)을 분석한 것에 따르면 당시 약 10% 정도의 부농층이 40% 이상의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중 부농층의 약 60%는 서민지주이고, 양반들 중 50-60%가 소․빈농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상주에서도 상업적 농업의 확대로 인하여 계층 분화가 진전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19세기에 이르면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1880년의 상주지방 양반호(兩班戶)는 4,000여호, 상민호(常民戶)는 8,700여호였으나, 불과 8년 후인 1888년에는 양반호(兩班戶)가 6,800여호, 상민호(常民戶)가 6,000여호로 변동했다는 자료가 그것이다. 이것은 8년 사이에 양반호가 31.5%에서 53.1%로 증가한 반면, 상민호는 68.5%에서 46.9%로 감소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이 시기 향촌의 계층 분화는 향촌 내부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부농이 되어 양반층으로 신분 상승한 신향(新鄕)들은 수령(守令)과 결탁하여 향임직(鄕任職)을 매득하였다. 그러나 구래의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은 신향들을 여전히 무시하였고, 이에 따라 신․구향(新․舊鄕) 간에 상호 대립이 빚어져 ‘향전(鄕戰)’을 야기하게 된다. 이것은 이제 향촌 내부에서 서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세 개의 세력 집단(舊鄕, 新鄕(饒豪富民層), 小貧農層)이 뚜렷하게 형성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2) 재지사족의 향촌 지배력 약화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지배구조는 수령을 정점으로 하여 사족과 향리(鄕吏)의 3자가 각기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 신분제의 동요와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신향층의 등장과 守令권의 강화로 인하여 사족층의 향촌 지배권은 크게 위축된다. 반면 향내 요호부민층으로 성장한 신향들은 守令과 결탁하여 면․리임과 같은 향임직을 도맡으면서 향촌 지배권을 확대시켜 나가고 있었다. 1746년 상주의 유력한 재지사족이었던 조학경(趙學經)과 김수행(金守行)은 수령의 별감(別監) 차출을 거부하다가 토호(土豪)로 지목되어 처벌받기까지 했던 사실은 이를 잘 입증하는 것이다.
19세기에 접어들어 재지사족들의 향촌 지배권은 더욱 약화된다. 그것은 이 지방의 사족들이 대부분 남인(南人) 계열에 속해 있었던 까닭에 노론(老論) 가문의 세도가로부터 오랫동안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기에도 상주의 일부 문중은 중앙 관인(官人)을 꾸준히 배출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색(黨色)을 바꾸거나 세도가(勢道家)와 통혼(通婚)한 경우에만 해당한다. 이 때 당색을 바꾼 문중과의 갈등은 향교 운영권 등을 놓고 번번이 마찰하는 등 향촌 문제를 빚기까지 하였다. 더불어 관인으로의 성장을 봉쇄당한 사족층(士族層)의 일부는 경제적 빈곤으로 말미암아 잔반(殘班)으로 몰락하였다. 결국 19세기의 상주는 재지사족의 영향력이 감소된 상황에서 수령(守令)-이․향임(吏․鄕任)-토호(土豪) 중심의 수탈 체제가 노골화될 수밖에 없었다.
2. 부세제도의 수탈적 운영
(1) 수탈 체계의 중층화
19세기의 조선사회는 재지사족의 위축으로 수령-이․향임-토호층에 의한 가혹한 수탈이 중층적으로 자행되던 시기였다. 당시 상주의 농민들도 간악한 향임이나 교활한 아전 및 토호들의 탐학과 수탈에 시달렸다. 다음 표는 19세기 전반기의 상주목사의 재임 상황을 분석한 것이다.
<표 1> 시대별 상주목사 재임 기간 (순조 1~철종 13)
구분 | 1년 미만 | 1년-2년 미만 | 2년-5년 미만 | 5년 이상 | 계 |
순조 헌종 철종 | 4 (25%) 2 (29%) 1 (14%) | 6 (38%) 2 (29%) 3 (43%) | 5 (31%) 3 (42%) 3 (43%) | 1 (6%) . . | 16 (100%) 7 (100%) 7 (100%) |
계 | 7 (23%) | 11 (37%) | 11 (37%) | 1 (3%) | 30 (100%) |
<표 2> 시대별 상주목사 교체 사유
구분 | 미부임 | 身死 | 사임 | 이임 | 만기이임 | 좌천 | 罷黜 | 계 |
순조 헌종 철종 | 2(13%) . . | 1(6%) . . | 1(6%) 1(14%) 1(14%) | 4(24%) 3(43%) 6(86%) | 2(13%) . . | 3(19%) 2(29%) . | 3(19%) 1(14%) . | 16(100%) 7(100%) 7(100%) |
계 | 2(7%) | 1(3%) | 3(10%) | 13(43%) | 2(7%) | 5(16%) | 4(14%) | 30(100%) |
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세기 전반기의 상주목사는 약 60% 이상이 2년의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교체되었다. 더불어 약 30%의 목사가 좌천․파출되고, 그 중 2년 미만의 재임자가 대부분이라는 점은 守令의 수탈적 향촌 지배가 그만큼 가혹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守令의 탐학은 이서층의 수탈을 허용하는 것인 만큼 상주에서의 수취체제 문란은 명약관화한 사실로 굳어졌다.
한편 수령과 이서층의 결탁은 新鄕(요호부민)층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임기를 보장받지 못했던 수령들은 짧은 기간에 더 많은 재물을 모아야 했기 때문에 신향들에게 향임직을 팔았고, 신향들은 비싼 댓가를 지불하더라도 향임직을 다투어 매득하였다. 그것은 19세기에 이르러 도결화된 부세가 총액제로 실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향임직을 맡기만 하면 얼마든지 대민수탈로 원액을 보충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농민을 사적으로 지배, 수탈하던 또 다른 하나는 토호(土豪)층이었다. 그들은 조관(朝官)이나 중앙 권력과 선이 닿는 사족들인 까닭에 수령(守令)들도 징치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토호(土豪)들의 무단 작폐는 이, 향층(吏, 鄕層)의 수탈보다 그 폐단이 심각했다. 상주의 경우 토호들의 작폐가 어떠했는지는 1867년의 암행어사 토호별단(土豪別單)에 기록된 성숙원(成肅源), 강복(姜福), 정상경(鄭象庚) 등의 사례를 통해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2) 부세제도의 수탈적 운영
19세기 수령과 이,향층, 그리고 토호층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무단양태는 대상이 따로 없었다. 사족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이익은 제도적으로 보장받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과중한 부세 수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수령과의 결탁 여부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당시 수령과의 결탁은 그리 쉽지 않았다. 향임직을 매득하려 해도 많은 재화를 주어야 했던 까닭에 토호(土豪)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향민들은 몰락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 부세(賦稅)에 의한 수탈은 삼정문란(三政紊亂)으로 귀결되었다. 삼정(三政)은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을 일컫는 것으로 그 중에서 환곡의 문란이 가장 심각하였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파탄 상태로 내몰렸던 바, 왕조 정부는 다시 환곡과 군포를 토지에다 부과하는 도결제(都結制)를 실시하여 결가(結價)를 놓고 지주와 농민들의 갈등을 더욱 노골화 시켰다. 1862년의 임술항쟁 당시 농민들이 결가 문제를 놓고 항쟁에 나섰던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자연재해와 변혁 세력의 대두
(1) 자연재해와 농민층의 불만 고조
19세기에 들어와 상주 농민들을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수령-이․향층의 가렴주구만은 아니었다. 당시 빈번했던 자연재해나 돌림병은 어느 계층을 막론하고 상주민 모두에게 혹심한 시련을 주고 있었다.
상주 인근의 김산 지방 화순(和順) 최씨가(崔氏家)에서 기록했던『세장년록(歲藏年錄)』에 따르면
<표3> 19세기 김산 지방의 흉년과 풍년
구분 | 해당 년도 (굵은 글씨는 대흉과 대풍으로 기록된 해를 가리킴) |
흉년 | 1814, 1815, 1816, 1828, 1829, 1830, 1831, 1832, 1833, 1836, 1838, 1840, 1853, 1856, 1862, 1864, 1865, 1866, 1869, 1870, 1873, 1874, 1875, 1876, 1881, 1883, 1884, 1887, 1888, 1892, 1893, 1894, 1898, 1899 |
풍년 | 1817, 1860, 1861, 1863, 1867, 1877, 1880 |
위의 표에서 보는 것처럼 19세기의 김산(김천) 지방은 적어도 3년에 한번 씩은 흉년이 든 셈이다. 물론 이 시기 흉작의 원인은 가뭄과 홍수가 대부분이지만 서리나 태풍의 피해로 흉년을 겪기도 했다. 흉년이 든 해는 물가 폭등으로 대부분의 농민들은 몰락한다. 그렇지만 일부 지주들은 고리대를 이용하여 더 큰 지주로 성장하여 전답이 늘고 노비가 불어나게 된다. 상주도 당시 김산 지방과 비슷했을 것이다.
(2) 변혁 세력의 대두
앞에서 살펴본 바처럼 19세기 상주의 향촌 내부에서는 봉건적 지배 질서가 와해되는 현상이 날로 극심해지고 있었다. 상업적 농업으로 부를 축적한 요호부농층이 신향으로 성장해 가면서 관권과 결탁하고, 수령-이․향-토호층들은 수탈 구조의 중층화를 이루면서 부세제도의 파행적 운영을 획책하고 있어 농민들의 생활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에 향촌 내부에서는 점차 변혁을 지향하는 새로운 저항 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상주지방의 경우 변혁세력은 누구였을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당시 평등을 지향하는 새로운 원리로 받아들여졌던 천주교나 동학이 봉건정부의 박해 위협에도 불구하고 쉽게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분명 변혁 세력의 등장이라는 관점에서 고찰될 수 있을 것이다.
상주지방에서 천주교가 교세를 확장하던 시기는 19세기 초였다. 이때는 신유박해(1801)를 피해 서울이나 충청도의 신도들이 이 지방의 산골마을로 숨어들던 때였다. 함창 잣골이나 화남면 평온리의 가항 부락, 갑장산 아래의 구두실 부락, 문경의 한실 부락 등은 이 시기에 벌써 신자촌을 이룰 정도로 천주교인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면 당시 천주교를 믿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상주에서는 1866년에 33명의 신자들이 순교를 당하였다. 그리고 상주 출신이지만 다른 지방에서 잡혀 순교당한 사람도 20여명이 된다. 그들 중에는 양반도 있지만 대부분은 가난한 농민들이며, 일가족이 한꺼번에 순교당한 경우도 있었다.
상주에 동학이 전해진 것은 1862년 경이었다. 이 시기는 임술항쟁의 실패로 농민들이 관의 박해를 받고 있었으므로 동학은 이 지방에 빠르게 번져갈 수 있었다. 그러면 이 시기 동학에 귀의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이와 관련하여 동학농민혁명시 접사나 접주의 신분으로 농민군에 참가했던 사람들을 분석해보면 농민 외에도 양반의 후예나 요호부민층이 다수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천주교의 경우처럼 동학에서도 새로운 변혁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인 지위에 연연하지 않았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어쨋던 19세기 중엽의 상주에서는 천주교나 동학의 신도가 늘어나는 것만큼 변혁 세력도 대규모의 저항을 예비하면서 점차 성장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Ⅲ. 상주의 임술 농민항쟁(1862)
1. 항쟁의 원인
철종 13년(1862)에 일어났던 임술 농민항쟁은 경상도의 단성, 진주를 시발로 하여 전국의 70여개 읍에서 잇달아 발생하였다. 항쟁이 일어난 시기는 대체로 3-10월 사이였다. 경북의 경우는 3-5월 사이에 성주, 인동, 상주에서 집중 발생했으며, 항쟁의 동기는 주로 수령-이서-토호층의 탐학(貪虐)과 이로 인한 삼정문란(三政紊亂)이 대부분이었다. 농민이 항쟁으로 뛰쳐나가는 과정은 대개 향회와 등소(等訴)를 통해서 우선 농민들을 결집한 뒤 요구 조건을 내세우고, 그것이 수령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봉기하는 것이 통상이었다.
상주의 임술년(1862) 농민항쟁의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는 결가(結價)의 과다한 징수 문제였다. 항쟁 당시 결가가 얼마로 책정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항쟁에 나선 농민들이 호수(戶首)를 지낸 양반집을 집중 공격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둘째는 관에서 포탈한 환곡 4만여 섬과 그 이자를 누가 납부하느냐의 문제였다. 대민들은 집을 기준으로 분배하자고 했고, 소민들은 토지를 기준으로 분담하자는 것이 당시의 주장이었다.
셋째는 군포 납부의 문제였다. 1862년 봄에 관에서는 군포를 매호당 6냥 8전씩 메기려 했으나 농민들은 과중하다고 반발하였다. 그 후, 상주에 내려온 선무사 이삼현(李參鉉)은 문제가 된 군포를 동포(洞布)로 바꿀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넷째는 삼랑미(三浪米) 수납에 따른 문제였다. 삼랑미는 통영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것으로, 상주는 1,560여석을 부담하고 있었다. 나누어줄 때는 썩었거나, 모래가 섞여도 개의치 않다가 받아들일 때는 세밀히 검사하고, 돈으로 납입할 때는 일반 가격이 3냥 여인데도 8-9냥 되는 높은 시가로 받아들임으로써 농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었던 것이다.
다섯째로는 권세가의 사사로운 수탈이었다. 노론 집권 이후 상주의 재지사족 중 일부는 당색을 바꾸거나 중앙 관인층과의 통혼을 통해 관인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환로가 막힌 채 향촌 내에서 지주나 세력가로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향교나 서원 등을 기반으로 향음례를 열거나 향약의 시행 등을 통해 향권을 유지하려 힘썼다. 그 과정에서 농민에 대한 수탈을 자행하는 토호로 변질되는 사람도 많았던 것이다.
2. 항쟁의 전개 과정
상주의 농민들이 항쟁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1862년 5월이었다. 두 차례의 봉기에서 농민들은 양반집 13호를 포함하여 이서배 등의 수탈자 집 100여 호를 때려 부수고 불을 질렀다. 수탈기관인 관아와 속오청(束伍廳), 세초청(歲抄廳)도 불태우고 군안, 환곡대장 등의 문서 및 살문안(殺文案) 등의 죄인 명부를 불살랐다.
상주의 농민들이 술렁이기 시작한 것은 1862년 3월부터였다. 지난 겨울 결가 문제로 향회가 열렸지만 기대할 것이 없었던 농민들은 2월 4일과 6일에 일어난 단성과 진주의 농민 봉기 소식과 함께 상주 관아에서 군포가를 6냥 8전씩으로 책정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3월 초의 장날, 장터에 모인 농민들은 관가로 몰려가 시위를 벌렸었다.
4월에 들어서서 선산, 개령, 인동의 농민들이 한바탕 들고 일어났을 때, 때마침 선무사 이참현이 4월 27일 상주에 도착했다. 그는 효유문을 발표하고 동대청에서 상주의 폐막인 삼정 문제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를 논의하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대민들은 마루에 올라앉고, 소민들은 마당에 늘어선 채 환곡 등의 삼정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이 날 회의에서는 대민과 소민에 따라 해결책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이참현은 결가는 10냥으로 정하고 군포는 동포로 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때 뒷켠에서 돌맹이가 날아들고 시끌시끌해지자 이참현은 급히 자리를 피했다.
다시 상주 농민들이 읍회를 연 것은 선무사 이참현의 행적에 기인한다. 이참현은 선산과 거창, 성주 농민과 담판하면서 결가를 상주보다 2냥이 적은 8냥으로 내도록 조치하였기 때문이다. 장날을 기해 읍회를 연 농민들은 결가를 8냥씩으로 하고, 환곡은 본곡은 문제삼지 않고 이자만 물고, 군포는 2냥씩만 내자고 합의하였다. 요구 조건을 관철하는 방안으로 향내의 유력한 인사 즉 조관(朝官) 양반을 장두로 내세워 관아와 협상한다는 것과 5월 14일 대규모 읍회를 열자는 것도 추가 결정하였다.
이 날 읍회를 주도한 인물은 풍헌(風憲)인 김일복(金日福)이었다. 그는 이청(吏廳)에 들어가 공형(公兄)과 협상을 벌이기도 했고, 조관(朝官) 양반을 장두에 세우자는 제안을 했으며, 운집한 농민들을 설득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요호부민층이라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기에는 불충분한 탓에 항쟁 과정에서는 농민들로부터 외면 받는 한계를 노정하였다.
5월 14일 읍내로 모여든 농민은 공동면과 내북면을 비롯한 6개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두 사람이 잡혀 갔다’는 소문을 접하자 관아로 몰려가는 한편, 조관(朝官) 양반인 김승지(金拓) 집으로 향했다. 그들은 김승지가 집에 없고, 장두가 되는 것을 거절했다는 말에 격분하여 집을 불태운 후 조승지(趙悳) 집으로 향하였고, 급히 가산을 옮기던 조승지의 짐에서 도장이 쏟아지자 “사가에서 인신을 만들어 평민에게 억지를 부리는 양반가를 모조리 불태워 버리자.”는 정나구의 선동에 이끌려 집을 불태우고, 연이어 김참판(金永基), 성참봉(成在平), 이선전(李宣傳), 김봉사(金奉事), 김정언(金正言, 金錫模) 등의 양반가 13여 호를 차례대로 찾아가 불태웠다. 평소 농민들에게 원한이 깊던 자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 것이다. 농민들은 수탈의 하부 집행인인 이서배의 집도 한집 한집 불을 질렀다. 다음 날인 15일에는 패악을 저지른 일부 민가와 관아인 속오청과 세초청 및 수탈 장부인 군안과 환곡대장, 살옥문안도 불태웠다. 그 후 5월 26일, 상주 농민들은 다시 봉기하여 이서배들 집과 불만의 대상인 양반가와 일부 민가를 불태웠다.
이 기간 상주목사 한규석(韓圭錫)은 서울로 올라가 5월 24일까지 부모의 병을 핑계로 상주로 내려가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5월 24일 조영화를 상주목사로 임명하였고, 그는 6월 17일에 부임하였다. 항쟁이 시작된 5월 14일부터 상주목사가 부임한 6월 17일까지 상주읍성은 농민이 주도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3. 항쟁의 결과 및 의의
6월 17일 부임한 상주목사 조영화(趙永和)는 항쟁을 주도했던 농민들을 체포, 구금, 치죄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벽록(金碧錄)과 이문보(李文甫), 이흥손(李興孫)은 곤장에 맞아 죽었고, 김일복, 장수학(張守鶴), 정나구, 김득이(金得伊), 손문덕(孫文德)은 대구 진영으로 옮겨져 문초를 받다가 김일복과 장수학은 맞아 죽고, 정나구는 효수, 김득이와 손문덕은 정배(定配)당했다.
그 후 상주목사는 향내 사족들을 불러모아 향음례(鄕飮禮)를 개최하면서 농민들에게 향약의 덕목을 준수할 것과 오가작통제를 강력한 시행을 요구하였다. 결국 상주의 임술항쟁은 농민들의 피어린 항쟁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폐단(弊端)을 바로잡지 못했다. 항쟁의 선봉에 섰던 농민 지도자들이 대부분 처형당하거나 숨어버렸으므로 이서배들이나 토호들의 탐학은 계속되고 있었다. 1866년 암행어사로 상주에 왔던 박선주(朴宣籌)가 지목한 성숙원(成肅原), 정상경(鄭象庚), 강복(姜福) 등의 토색질은 “회초리 하나로 잔치도 열고, 집도 짓는다.”는 말처럼 항쟁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이는 당시의 지배층들이 지니고 있는 한계에 해당한다.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와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했던 양반 지배층들의 한계는 결국 또 다른 농민항쟁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임술항쟁을 이끈 상주의 중심 인물은 어떻게 되었을까? 항쟁 초기에 관아와 협상을 끌어갔던 사람은 김일복이었지만 항쟁 과정을 끝까지 이끈 사람은 정나구, 조두꺼비, 김말대 등의 빈농층이다. 정나구는 잡혀가서도 비굴하게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주장을 펴다가 죄괴 수범(罪魁 首犯)으로 몰려 유일하게 효수(梟首) 당한 인물이다. 김말대 조두꺼비는 정나구와 함께 조반가를 불지르는데 앞장섰던 인물이지만 도망쳐 잡히지 않았다. 가진 땅도 없고 붙여먹을 땅도 없는 빈농이거나 품팔이였던 그들은 급격하게 변화해가는 당시의 변혁 주체로서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장수학은 내북면 낙원역에 사는 역속(驛屬)으로 평소 의협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공동면 영수에 사는 손문덕은 ‘겉으로는 어리석고 민첩하지 못한 듯하나 속으로는 실제 욕심이 많고 세금을 내야 할 때 웃으면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오래 끌곤 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평소 묵묵하나 일상적인 항세(抗稅)에도 앞장섰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벌을 받고 석방된 백취광과 김숙심 등이 있다.
1862년의 임술농민항쟁은 지역적인 한계와 고립성을 탈피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임술항쟁은 농민들의 투쟁 역량에 비해 그 성과는 너무나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임술 항쟁은 우리 역사에서 봉건사회의 해체와 더불어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앞당겼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임술농민항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의의는 민중의 결집된 힘을 농민들이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아래로부터의 변혁 운동’을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을 확인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봉건지배층과의 타협적인 방법으로는 사회적 변혁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교훈과 함께 이후의 농민항쟁이 보다 발전된 형태로 전개되는 밑거름으로 작용한다.
Ⅳ. 함창의 신묘 농민항쟁(1891)
1. 항쟁의 원인
수전농업이 성행한 함창은 개항 이후 상품화폐경제의 확대에 따른 모순이 어느 곳에 못지않게 심각한 지역이었다. 1891년의 함창 농민항쟁이 개항기 농민항쟁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원인이나 전개과정, 주도층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당시 항쟁의 일반적인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1891년 함창 항쟁의 원인은 수령-이향층의 부민 늑탈(富民 勒奪)과 공전 건몰(公錢 乾沒), 이포(吏逋)의 가결(加結), 호포 가배(戶布 加排), 반호(班戶)에 대한 부역 강요(賦役 强要) 등이었다. 특히 이방(吏房) 김규목(金圭穆)은 자신이 탕진한 각종 공전(公錢) 4,000-5,000금의 상납 기일이 닥치자 향반(鄕班) 5-6인과 짜고 매결당 1냥씩 첨보(添補)하도록 하는 한편, 호포(戶布)도 반호(班戶)는 8전, 민호(民戶)는 1냥 6전을 가징토록 하여 민란 발생의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물론 김규목은 가배(加排)와 징염(徵斂)에 대하여 자신이 포흠한 것이 아니라 곡가(穀價)의 상승 때문이라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민란 발생의 직접 발단은 관아 근처에 있는 관남지(官南池)의 준설에서 비롯되었다. 8월 2일에 시작된 준설일에는 반상(班常)을 막론하고 각 면의 민정(民丁)을 모두 징발하여, 동원된 민정이 수천 명이었다. 항쟁의 주모자들은 역(役)에 동원된 농민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항쟁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그동안의 읍폐민박(邑弊民瘼)을 바로잡자는 여론을 일으키고 실천에 옮기었다.
2. 항쟁의 전개 과정
1891년 8월 2일 저녁 양범리에 있는 이장운(李章雲)의 유정점막(柳停店幕)에 관남지 준설역을 마치고 돌아가던 농민들이 모여 들었다. 이들 중 문창리에 살고 있던 남노선(南魯善)과 이장운의 형인 이장화(李章華) 등이 주동이 되어 읍에 등소(等訴)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 때 남노선이 “원래 지역(池役)은 속오군(束伍軍)의 역(役)인데 대민(大民)까지 부담시키니 실로 분하다. 또 수미가(需米價)는 구예(舊例)가 있는데 지금 다시 가결(加結)한다고 하니 당신과 내가 읍내에 발통하여 함께 폐단의 혁파를 도모하자”하여 이장화가 통문을 써서 밤새 각 면, 동에 전달하였다. 통문을 본 각 면의 면임(面任)들은 8월 3일 아침 사람들을 동원하였다. 이에 유정점 앞의 냇가에서 민회(民會)를 개최하였다.
민회에 모인 사람들은 “지역과 수미가는 모두 향인 김홍묵(金弘默), 유광수(柳光秀), 권홍익(權弘鎰), 이만기(李萬基)와 이방 김규목 등이 관의 총명을 가리고 민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 이를 징계하지 않으면 장차 함창이 다 빌 것이다”라 하여 “등소(等訴)는 등소이고 향중에 일을 보는 자의 집을 우선 훼파(毁破)하자”고 결정하였다. 농민들은 직접 수탈을 자행한 이-향(吏-鄕)을 징치하여 분을 푼 다음에 등소를 통하여 읍폐를 교정하고자 했다.
다음날 아침 이에 놀란 수령은 좌수 안세로(安世潞)를 보내어 관수미(官需米)의 첨가(添加)를 중지하고 관남지 준설도 중지할 것을 통보하고, 이 밖에도 원하는 바가 있으면 대표를 보내 호소하고 나머지는 해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남노선, 이장화 등은 좌수에게 “4-5인의 향인과 2-3인의 이서배가 관의 총명을 막고 민에게 폐를 끼쳐 이들을 징치하고자 거사를 한 것이지 관을 위해하려는 것은 아니다”고 답하고 그대로 회의를 계속하였다. 이는 민회에 참가한 소민들의 주장이 관철된 것이다.
이장화가 종이로 영기(令旗)를 만들어 농민을 지휘하자 농민들은 몽둥이로 무장한 다음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곧장 교촌(校村)에 있는 김홍묵의 집으로 달려가 불태웠다. 돌아오는 길에 수령이 새로 만든 비각(碑閣)을 파괴한 다음 함창읍으로 직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봉기에 참가한 농민들은 “불참자는 하루 2냥씩 징수한다”고 위협하는 방법으로 많은 농민들을 동참케 하였다. 봉기군은 읍으로 가는 도중에 이방 김규목의 집을 불태우고 관아 앞에 있던 관남지로 모여들었다. 남노선과 이장화는 여기서 관에 등소할 소장(訴狀)을 마련하기 위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흥분한 농민들은 관아를 포위하고 함성을 지르며 이장화로부터 영기(令旗)를 넘겨받은 남일원(南一元)의 지휘에 따라 관아로 돌입하였다. 남일원은 사족 출신이지만 ‘부랑실업(浮浪失業)’한 빈민(貧民)에 속하여 항상 원망을 품고 있는 불만 양반이었다. 농민들은 수령을 호위하던 관속(官屬)들을 몽둥이로 난타하여 쫒아버리고 수령을 구타하고 옷을 찢는 등 위해를 가하고 인부(印符)를 탈취하였다. 그리고는 수령을 떠메다 경외(境外)로 축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남노선이나 이장화의 지휘를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말리는 사람들을 구타하기까지 하였다.
수령을 밖으로 축출한 농민들은 다시 읍정(邑庭)에 모여 4일에도 계속 현내의 이-향가(吏-鄕家)와 지주가를 습격하여 불태우거나 타파하였다. 수교(首校) 김정수(金正洙)의 첩 용궁댁과 류광수, 이만기, 권홍일의 집이 불태워졌다. 읍저의 장터에 둔취한 농민군은 각 동임(洞任)으로 하여금 참석자를 점고하며 이탈을 방지하였고, 식주인(食主人)을 지정하여 이동할 곳에 미리 음식을 준비하는 등 조직적이고 치밀한 행동을 취하였다.
5일 농민들의 활동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겸관(兼管)인 문경현감이 도착하자 봉기 주도자들은 이방 김규목과 기타 간향배(奸鄕輩)들의 죄상을 호소하여 사건의 전말을 증소(呈訴)하였다. 이에 겸관은 농민들을 회유하면서 교졸(校卒)을 보내 주모자들을 잡으려 하였으나 농민들은 각각 자신이 주모자라 칭하며 저항하였으므로 교졸들이 감히 잡아들이지 못하였다. 겸관은 가결(加結)과 가포(加布)를 시행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여 겨우 농민들을 해산시킬 수 있었다. 농민들이 흩어진 이후에도 항쟁의 주모자들은 향청에 머무르면서 향임을 다시 선발하고, 각 동마다 1인을 정하여 연락을 계속 하였다. 또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각 호당 1전씩 납입할 것을 결정하기도 하였다.
9일에 이르러 상주진영에서 온 교졸들이 당도하여 향청에서 모임 중이던 남노선, 이장화, 금영규(琴永圭), 박대상(朴大相), 박형식(朴亨植), 김의석(金義錫), 남일원 등 항쟁의 주모자들을 체포하였다. 이에 농민들의 반응도 심상치 않았다. 16일에는 유학(幼學) 김종한(金縱恒)이 단신으로 관청에 나아가 부당함을 역설하다가 체포되기도 하였다. 당시 함창 봉기의 조사관으로 임명된 선산부사 조준구(趙駿九)는 함창에 도착하였으나 농민들의 서슬에 놀라 구금해 놓은 7명을 조사도 하지 못하였다. 이에 감영(監營)에서는 조준구 대신 자인현감 이정재(李鼎宰)를 차임하여 조사를 독촉하였다. 18일에는 남노선의 부친인 남호정(南鎬貞)이 주동이 되어 재차 모임을 갖고 통문을 발하려고 모의하다가 관에 체포되었다. 19일 함창에 도착한 조사관 이정재는 관련자들을 색출하여 잡아들여 총 22명을 수감함으로써 함창의 농민항쟁은 막을 내렸다.
3. 항쟁의 성격과 의의
1891년 함창 농민항쟁의 주도층은 누구일까? 주도층은 분명 반민(班民)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지만, 이장화, 남일원에서 보듯 그들의 경제적 처지는 대체로 요호(饒戶) 이하의 소․빈농에 속하여 소민(小民)과 이해관계가 일치하였다. 주도층은 향권에서 소외된 이서층을 통해 정확한 읍폐의 내막을 폭로하여 향촌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좌수, 도유사(都有司) 등을 선출하여 읍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실제 항쟁 과정에서 민회를 통하여 결집된 소민들의 의사를 존중하여 항쟁의 방식을 결정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항쟁은 “마치 적병을 향해 나아가는 병사와 같다”고 표현할 정도로 농민들의 조직적 뒷받침을 받고 격렬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
1891년 함창 항쟁의 특징은 무엇일까? 함창 항쟁의 주체들도 군현 단위의 고립 분산성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지만, 이전에 비해 정치의식이 크게 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민회를 열어 향임(鄕任)을 스스로 임명하고, 절목(節目)을 만들어 읍폐를 직접 개혁하려는 점과 동참하지 않는 농민에게 벌금을 부과하고, 필요한 경비를 각 호당 1전씩 분담토록 했던 점이 그것이다. 분명 읍폐를 스스로 개혁하려고 했던 1891년의 함창 농민항쟁은 보다 진전된 농민항쟁의 모형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Ⅴ. 상주의 동학농민혁명(1894)
1. 상주 동학의 포덕 과정
1860년 4월 5일 수운 최제우(1824-1864)의 득도(得道)를 계기로 창도된 동학이 상주에 전해진 것은 1862년 가을 경이었다. 당시 교조 최제우는 그 해 12월에 접제 조직을 마련하여 15개 고을에 16명의 접주를 일차 임명하는 가운데 별도로 황문규(黃文圭)를 상주의 동학 접주로 임명했었다. 접주는 대개 40-50명의 교도들을 관리하는 지도자를 뜻한다.
그러나 상주의 동학은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이 이 지방에 와서 직접 포덕 활동을 하는 1863년 6월에 이르러서야 교세가 급신장된다. 이 때 최시형은 ‘포덕명교(布德命敎)’를 위해 주로 상주의 산골마을을 돌면서 포교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은척, 화북, 화동, 모서, 모동, 공성 등의 산골마을에서는 동학의 13자 주문을 외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렇지만 상주의 동학은 관의 기찰과 향반들의 탄압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상주의 양반들은 신분의 귀천이나 남녀유별을 지키지 않는 동학이 널리 유포되는 것을 매우 불안하게 생각했다.
상주에서 가장 먼저 동학 배척에 앞장섰던 양반들은 우산서원 유사들이었다. 그들은 1863년 9월에 향내 양반들과 각 서원에 통문을 돌렸다. 이어 12월에는 도남서원 유사들이 통문을 돌려 동학은 이단사교(異端邪敎)로써 마땅히 배척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때마침 교조 최제우의 체포와 처형에 따른 정부의 동학 탄압책과 맞물려 이후 상주의 동학교도들이 수난을 겪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상주의 동학은 양반의 배척 결의와는 상관없이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1865년 4월, 교조의 유가족은 화북의 동관암에 있는 육씨 집에 은신하였다. 1880년대 중반부터 최시형은 화령 봉촌리의 앞재 마을과 공성면 효곡리의 왕실 마을에서 은거하였다. 바로 그런 이유로 상주의 동학은 중화 지역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1890년대에 상주의 동학이 가장 왕성했던 곳은 팔음산 아래의 화동면 덕곡이었다. 덕곡의 접주는 신광서(辛光瑞), 정기복(鄭奇福) 등으로, 이들은 1894년 여름이 되면 화동 각 마을의 실제 지배자로 대두된다. 화동의 동학교도 중에는 사족(士族)에 해당하는 신(辛), 서(徐), 배씨(裵氏)들이 많았다. 화남면 임곡리의 강선보(姜善甫, 본명 姜善熙)는 스스로 포도대장(布道大將)을 칭하고 동학교인들을 불러모아 농민군을 편성하였다. 모동면 용호리는 접주 남진갑(南進甲)과 이화춘(李化春)이 활동하던 지역이다. 모서면 사제부락은 김현영(金顯榮, 字 君五), 김현동(金顯東, 字 君仲), 김현양(金顯楊, 字 君日)의 3형제가 입도하여 동학의 접주 또는 접사의 직임을 수행하였다. 이들 3형제는 호성공신 화천군(扈聖功臣 華川君)의 후예로서 임진란 때 피란와서 정착한 뒤 갑오년에 이르기까지 13대에 걸쳐 세거하던 모서의 대성(大姓)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권세가에게 눌려 지내는 처지였다. 공성면은 거배미와 신곡리(남실)가 중심이었다. 동학 교단에서는 이관영(李觀永)을 상공대접주(尙公大接主)로 임명할 정도로 교세가 강하였다. 이 곳의 동학 농민군들은 1894년 9월에 소리 마을을 습격하여 진주 강씨 동족 마을 전체를 불태워 없애버리기도 했다.
2.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
갑오년(1894)의 동학농민혁명은 전라도 고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이어 전라도 각지의 농민들이 항쟁에 나서, 4월 27일에는 마침내 전주성을 점령했다. 이제 전라도 전역에서는 농민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5월 5일에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들어오고, 뒤따라 일본군이 9일 인천항에 상륙함으로써 사태는 복잡해지고 말았다. 이에 남접농민군들은 외국 군대의 출병 구실을 없애고자 스스로 해산하였다. 따라서 청, 일 양국 군대는 마땅히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6월 21일 경복궁을 포위하여 친일 개화정권을 수립, 강제로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23일 청국 군함을 무차별 공격함으로써 청․일 전쟁을 발발시켰다. 이 전쟁으로 우리 농민들은 엄청난 희생을 겪는다. 이 때 일본군은 전쟁 물자를 조달하고자 서울과 부산을 잇는 주요 통로 80리마다 병참부를 설치했다. 그 결과 선산의 해평과 상주의 낙동, 함창의 태봉에는 약 40명 규모의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군의 만행은 우리 민족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드디어 전봉준은 정부를 대신하여 일본군을 내어쫒고자 9월 12일에 농민군들을 전라도 삼례로 재집결토록 했다. 북접 교단의 최시형도 1차 봉기 때와는 달리 9월 18일 기포(起包)를 결정하고 동학농민군의 결집을 촉구하였다.
한편 상주의 동학 농민군들은 낙동과 태봉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참부를 먼저 공격하기 위해 9월 22일(양력 10월 20일) 드디어 봉기했다. 그들은 이렇다할 격전없이 쉽게 읍성을 장악할 수 있었다.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들은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배를 채우고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 주었다. 양식이 없는 사람들은 곡식을 가져가게 했고, 병든 사람들은 치료를 받게 했다. 더불어 횡포를 부리던 토호(土豪)나 향리들을 혼내주고 그 재물을 빼앗기도 했다. 그 중 공성면의 소리 마을은 아예 불태워 없애 버렸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농민군들은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는 않았다. 그것은 상주의 농민군들이 동학 교단에서 규정한 4대 강령을 충실히 준수했기 때문이다.
상주의 농민군들은 장차 낙동의 일본군 병참부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농민군의 사기는 매우 충천했고, 각오 또한 비장했다. 그러나 농민군이 결전 태세를 갖추기 전에 일본군이 먼저 읍성을 기습해 왔다. 9월 28일 낮, 농민군은 결사 항전했지만 신식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이렇다 할 무기도 없이 온몸으로 싸우던 농민군은 백여 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퇴각하고 말았다. 관고(官庫)에서 탈취한 농민군의 무기는 대부분 일본군이 낙동 병참부로 가져갔다.
일본군에 의해 수복된 읍성은 향리들이 먼저 장악했다. 읍성 점거를 막지 못한 목사(牧使) 윤태원(尹泰元)은 가평의 집으로 도망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관례상 진장(鎭將) 유인형(柳寅衡)이 성주(城主)를 겸했지만 관아의 실질적인 행정을 장악한 향리들은 농민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민보군(民堡軍) 결성을 서둘렀다. 집강소(執綱所)란 이름의 상주 민보군은 박명현(朴明顯), 강진규(姜進圭), 차재혁(車載爀)을 중심으로 한 민정(民丁) 500여명 정도였다. 그들은 읍성의 4대문을 지키면서 농민군 지도자를 기찰하여 체포했던 바, 화남면 임곡리의 강선보, 외남면 하병리의 강홍이(姜弘伊), 공성면 소리의 김경준(金京俊)은 이 때 잡혀서 수감된다.
한편, 읍성에서 퇴각한 동학농민군의 주력은 북접 교단의 지시에 따라 남접 농민군과 합류하고자 논산 방면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상주에 남아 있던 대접주 김현영(金顯榮)은 구팔선(具八善) 등과 함께 11월의 재기포(再起包)를 위해 통문을 돌렸지만 이전과 같은 호응은 없었다. 그만큼 농민군의 기세가 급격히 저하된 것이다. 그렇지만 보은, 황간, 영동 방면에 둔취한 북접 산하의 농민군들이 여전히 관아를 습격하고 병기를 탈취하여 반가를 침탈하고 있다는 소문이 계속 들리는 상황이라 상주의 보수 지배층은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3. 보수 지배층의 대응 과정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에 놀란 조선 정부는 9월 22일, 도순무영(都巡撫營)을 설치하고 경군(京軍)과 함께 일본군을 남하시키고, 이어 각지에 토포사, 소모사, 소모관, 조방장, 별군관 등을 임명하여 농민군 진압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9월 29일 영남소모사로 차하 받은 정의묵(鄭宜默)이 의정부의 관문(關文)을 받은 것은 10월 17일이었다. 정의묵은 다음날 우산리의 종가를 떠나 읍성에 들어와 먼저 소모영(召募營)의 직제(職制)를 만들고 그 운영 원칙을 공포한 뒤 향리들이 주도하고 있던 민보군의 군권을 접수하였다.
상주 소모영은 양반과 향리층이 연합하는 형태로 지도부를 구성하였다. 소모영의 종사관이나 찬획, 유격장, 전병도감, 장재도감, 서기유사 등의 핵심 직임은 모두 양반들이 독점하였으나 병사들을 실제 지휘하는 1, 2, 3영관이나 전․후․좌․우 초장의 직임은 모두 향리층들이 전담하였다. 이것은 당시 읍권을 장악하고 있던 향리층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소모영 설치를 완료한 정의묵은 민보군 정비를 서둘렀다. 향리들이 지휘하던 별포군(別砲軍) 200명은 소모영 직할 부대로 편성하여 읍성 수비를 전담케 한 후, 농민군에 가담하지 않은 양민들을 ‘의여(義旅)’로 규합하고, 동시에 마을마다 방수군(防守軍)을 편성하였다. 아울러 농민군의 귀화를 권장하고, 접주의 소재를 밀고하거나 잡아오는 자는 상을 줄 것이며, 망실된 무기를 가져오는 자도 이전의 죄과를 묻지 않고 포상하겠다는 방침을 널리 공고하였다. 또한 향회를 열어 향임들의 협조를 당부하고, 북장대에서 700여명의 관포군(官砲軍) 700여명을 점검하였다.
11월에 접어들면서 보은, 황간, 영동 일대에 집결하고 있던 북접 농민군의 주력은 남접 농민군과 합류하기 위해 논산 방면으로 이동하고, 청주 공략에 나섰던 농민군이 경군(京軍)과 일본군에 의해 10월 26일 초토화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11월 3일 일본군이 상주에 들어와 소모영과의 협력을 약속하자 소모사 정의묵은 이에 힘입어 농민군에 대한 선무 공작과 토벌 작전을 본격화하였다. 이 때 상주 소모영의 선무 공작으로 귀화한 농민의 수는 1,630명이나 된다.
한편 상주 소모영은 김석중(金奭中)이 지휘하는 유격병대를 중화지역에 파견한다. 유격병대는 11월 13일부터 12월 6일까지 모동, 모서, 공성, 화동, 화서, 화북 및 보은, 청산, 영동의 농민군 거점 마을을 돌면서 숨어있던 농민군 지도자들을 체포, 처형하기 시작했다. 유격병대의 활동 과정은 다음과 같다.
11월 14일 | 모동 용호리에서 접주 남진갑, 이화춘을 체포, 모서 사제에서 구팔선, 김현동, 유학언을 체포한 뒤 중모 장터에서 포살함(남진갑은 도망) |
15일 | 공성면 왕곡에서 충청도 편의장 조왈경 체포 |
16일 | 모동 반계점에서 조왈경 포살, 별포 30명의 증원으로 유격병대는 총 50명 |
17일 | 화동 덕곡에서 안치서를 체포했으나 야간 도주함 |
18일 | 화령 터골에서 청주 대접주 김자선, 접사 서치대, 접주 정항여를 체포, 다음 날 화령장터에서 포살함 |
19일 | 야간에 보은 장내 뒷마을에서 김민이, 원성팔 체포 |
20일 | 화령 평원에서 김철명, 강만철, 김달문을 생포, 광주원에서 원성팔, 김달문, 김철명을 포살함, 봉암에서 김민이를 포살함 |
24일 | 가항에서 김항우, 박시창, 정한을 체포 |
25일 | 정한을 석방함 |
26일 | 별포 80명의 합류로 유격병대는 130명으로 늘어남 |
27일 | 와지에서 접사 여성도를 체포, 4대로 나뉘어 청산, 보은 4마을을 수색함, 남진갑을 다시 체포함 |
28일 | 월남점에서 남진갑을 포살함 |
29일 | 청산읍에서 배학수, 김경연의 체포를 독려함 |
30일 | 청산은 동쪽 장터에서 강경중, 허용을 포살함 |
12월 1일 | 김경연 체포 |
2일 | 거남리에서 서오덕을 체포, 소사동에서 김경연, 서오덕을 포살함 |
4일 | 영동 고관리에서 정윤서를 체포함 |
5일 | 정윤서를 포살함, 북접농민군 7,000여명이 무주읍을 함락시키고 영주, 상주로 향한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회군함 |
6일 | 수석리에서 장여진을 포살함 |
8일 | 유격병대는 상주읍내로 복귀함 |
소모영 유격병대의 전과(戰果)는 관치질서(官治秩序)를 회복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전공(戰功)은 정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 충청도 청산에서 읍리(邑吏)를 포박하고 현감 조만희를 문책한 사건이나 너무 많은 인명(人命)을 자의적으로 포살했다는 것 외에도 소모사가 정부의 허락없이 유격장, 종사관 등의 명칭을 함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유격장, 종사관 등은 조정에서 임명하는 직함이다. 소모사 정의묵은 이를 해명하는 서찰을 승정원으로 급히 보냈지만 월경(越境)과 월권(越權) 문제는 뒤에까지 소모영의 전공 평가에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4. 북접 농민군의 궤멸 과정
남․북접 연합 농민군과 관군, 일본군의 연합 세력 간 벌인 공주 공방전은 6-7일 동안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나 마침내 무기의 현격한 차이로 말미암아 농민군은 패퇴하였다. 그리하여 북접농민군은 손병희의 지휘 아래 순창에서 다시 결집하여 임실을 거쳐 장수현에 이르러 읍내를 점거하였다. 장수에서 재결집하여 북접의 근거지인 충청도 보은으로 북상하려 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인접한 영남의 안의현과 경상감영에 즉각 알려졌다. 이에, 경상감사 조병호는 11월 15일 병정 30명을 안의현에 급파하고, 18일에는 남영병 100명을 합천, 거창으로 보내 방어선을 구축토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북접농민군 4-5천명은 장수를 출발하여 설천면에서 민보군을 격파한 후 무주읍을 점거하였다. 이에 놀란 김산 소모사 조시영(曺始永)은 경상감영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상주소모영에도 정포(精砲) 200명을 보내달라는 이문(移文)을 통해 추풍령에서 상주병과 김산병이 공동방어선을 구축하자고 제안하였으나 소모사 정의묵은 이를 묵살하였다.
북접농민군이 충청도 지역으로 넘어와 청산, 황간, 영동 3읍에 둔취(屯聚)하자 상주소모영은 다급하게 되었다. 12월 10일 북접농민군 수천 명이 청산읍을 점거했다는 첩보를 접한 상주소모영은 예천에 포군(砲軍) 600명을 보내라는 감결(甘結)을 급히 띄우는 한편 안동, 의성, 문경, 함창, 용궁에도 관문(關文)을 급히 발송했다. 그리하여 상주에는 경상감사가 보낸 남영병 50명과 용궁병 20명, 함창병 19명, 안동병 300명, 예천병 500명이 상주 읍성으로 속속 도착하였다.
한편, 경상도 남영병 150명과 선산포군 150명, 개령포군 95명, 인동포군 100명, 성주포군 10명, 함창병 19명, 용궁병 20명, 상주유격병 150명 등은 12월 11일부터 사흘 동안 영동군 용산면 장터에서 둔취하고 있던 농민군들을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관군의 공격을 번번히 물리쳤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행군과 추위, 폭설, 굶주림으로 지쳐있던 농민군은 상주 유격병대와 일본군의 연이은 협공에 지쳐 보은 방면으로 패산(敗散)하기 시작했다. 그 때 최시형과 손병희 등의 지도부는 포위망을 뚫고 충주 방면으로 도피하였다.
북접농민군 잔여부대는 대접주 임국호, 이원팔, 김군오(본명 김현영), 정대춘 등의 지휘 아래 보은군 내북면 북실 마을로 몰려서 최후의 항전을 시도하였다. 12월 17일과 18일 양일 간 벌어진 북실 전투의 주역은 일본군 47명과 상주 유격병대 150명이었다. 그들은 공격군을 3대로 나누어 17일 밤 종곡의 농민군을 야습해 들어갔다. 날이 밝자 공격군의 수가 적은 것을 알게 된 농민군은 반격했고, 이에 놀란 일본군이 후퇴하려 하자 유격대장 김석중이 후퇴하는 자는 누구든지 참수하겠다고 극력 말려서 한동안 대치 상태에 있었으나, 농민군으로 변장한 유격병대의 기습으로 오전 10시경을 고비로 농민군은 궤멸되고 말았다. 이틀간의 북실 전투에서 전사한 농민군의 수는 2,600여명이나 되었고, 노획한 우마의 수도 60여두가 훨씬 넘었다고 한다.
이에 비하면 공격군의 피해는 경미해서 상주유격병대의 경우 부상자도 나오지 않았다. 함창병 1명이 오른손을 다쳤고, 용궁병 1명이 왼팔을 상했을 따름이며, 일본군 소위 1명만 복부에 가벼운 부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명실공히 북실 전투는 상주 유격병대와 일본군이 무기력한 상태에 처해 있던 농민군을 일방적으로 학살한 것이다. 이로써 10만을 칭했던 북접농민군은 그 마지막 명맥이 끊어지게 된 것이다.
소모사 정의묵은 유격장으로부터 이 같은 보고를 받자 곧 외지의 구원병을 돌려보내고 민보군도 해산하였다. 개선한 유격병대는 읍성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유격장 김석중의 전공은 상주목사에 의해 감영과 의정부에 보고되었다. 그러나 의정부에서는 김석중의 전공 인정에 냉담하였고, ≪갑오군공록(甲午軍功錄)≫에도 이름이 누락된다. 청산에서의 작폐와 일본군과 협력하여 벌인 북실 전투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때문이었다.
이듬해 1월 18일 왕조 정부는 소모영 해체를 지시한다. 그래서 상주 소모영은 그 달 24일에 마지막 연회를 베푼 뒤 해산했다. 소모사 정의묵도 27일에 우산 본가로 귀환한 후『소모일기(召募日記)』와『소모사실(召募事實)』을 간행하게 된다.
5. 항쟁의 성격과 의의
상주의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은 무엇일까? 물론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창한 반봉건(反封建), 반외세(反外勢) 항쟁(抗爭)임은 틀림없다. 그렇지만 상주의 동학농민혁명은 낙동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참부를 공격하기 위해 9월 22일 봉기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반봉건(反封建)보다는 반외세(反外勢)적 성격이 강한 민족 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상주의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어간 주체는 ‘접주(接主)’, ‘접사(接司)’로 불린 동학의 지도자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들불처럼 타올랐던 갑오년(1894)의 농민항쟁을 ‘동학 운동’이나 ‘동학 혁명’으로 지칭하는 것은 옳을까? 그것은 당시의 항쟁을 단순한 종교 운동으로 왜곡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타당하지 않다. 항쟁에 참가한 농민군의 다수는 동학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이 항쟁을 ‘갑오농민혁명’ 또는 ‘갑오농민전쟁’으로 지칭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것은 ‘동학’보다는 농민의 역할을 강조한 관점이다. 동학농민혁명, 또는 동학농민운동으로 평가하는 것은 동학과 농민의 추동력을 함께 고려한 지칭이다.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동학농민운동’으로 표현하고 있다.
상주의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어떠할까? 접주, 접사의 신분으로 9월 항쟁을 주도했던 남진갑, 이화춘, 김현영, 구팔선, 서치대, 정항여 등은 신분적으로 양반이나 향리층이며, 경제적으로는 중소지주 또는 부농층이라는 점을 주목하자. 포도대장(布道大將) 강선보, 진사접주(進士接主) 조재하(趙在廈) 등은 당당한 양반가의 후예였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동학을 믿고 항쟁에 나섰을까? 잔반(殘班)의 신분도 아닌 당당한 명문거족의 후손이면서도 농민과 함께 행동할 수 있었던 사상적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동학의 후천개벽사상에 영향 받은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1894년의 동학농민항쟁은 1862년의 임술항쟁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한층 성숙된 투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 농민들의 정치의식이 그만큼 성장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1894년의 동학농민항쟁은 외세와 결탁한 봉건왕조 및 일본군에 의해 좌절당한다. 이것은 근대사회로의 이행 과정에 있던 이 나라의 운명을 외세에 의해 주체성을 상실당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Ⅵ. 맺는 말
지금까지 필자는 19세기 후반에 전개된 상주와 함창지방의 농민항쟁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1862년의 농민항쟁과 1891년의 함창항쟁,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지는 상주의 농민항쟁은 당시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반봉건 성격의 농민운동으로 시작하여 반외세 성격의 민족운동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상주의 농민항쟁이 19세기 후반에 줄기차게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은 수령-이․향-토호로 연결되는 지배층의 탐학과 수탈이 극심했을 뿐만 아니라 반봉건을 지향하는 변혁세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1862년의 상주항쟁은 이웃 군현과 연대하거나 왕의 대행자인 수령을 직접 혼내주는 행위는 하지 못했다. 이는 항쟁 주체들의 한계이자 당시 농민들의 정치의식이 미성숙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1891년의 함창항쟁은 스스로 동임(洞任) 등을 임명하고, 자금을 직접 마련하고, 수령을 경외(境外)로 구타하여 쫒아낸 것으로 미루어볼 때 항쟁 주체들의 정치의식과 농민들의 주체적인 지향이 비교적 성숙했음을 알 수 있다.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은 이전의 농민항쟁에서 나타난 한계를 모두 극복한 민중운동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전국 조직망을 갖춘 동학의 교단 조직이 농민군을 이끌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농민들의 정치의식도 크게 신장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낙동의 일본군 병참부를 직접 공략하기 위해 항쟁에 나섰던 1894년 상주의 동학농민군들은 외세의 침략 행위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상주의 동학농민혁명은 반봉건 성격보다는 반외세 성격이 더 강한 농민혁명이자 농민전쟁이었다고 평가할만 하다.
이제 우리는 1862년의 상주 농민과 1891년의 함창 농민, 그리고 1894년의 동학농민군들을 특별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들 모두는 반봉건 항쟁을 통해 사회개혁을 실천하고, 반외세 항쟁을 통해 민족의 자주권을 온몸으로 수호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피어린 항쟁은 이 땅에 근대 자주 독립국가 수립을 가능케 한 것이다. 이에, 우리는 19세기 후반에 전개된 상주와 함창 농민들의 반봉건, 반외세 운동을 새롭게 조명하여 그들의 구국 정신을 올곧게 이어갈 수 있도록 보듬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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