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4권

선비정신과 상산 선비

빛마당 2014. 4. 11. 22:24

선비정신과 상산선비

聞慶大學校 招聘敎授 權世煥

Ⅰ. 선비정신

1. 선비란?

士子 明心如鑑 律身如繩 鑑不磨 則塵易汚 繩不直 則木易曲 心不明 則慾自蔽

身不律 則惰自生 治心身 亦當磨之直之

선비는 마음을 거울처럼 맑게 해야 하고 몸단속을 먹줄처럼 곧게 해야 한다.

거울은 닦지 아니하면 먼지가 끼어 쉬이 더러워지고 먹줄은 곧지 아니하면 나무를 곧게 할 수 없다.

마음은 맑지 아니하면 욕망에 가리워지고 몸은 단속되지 아니하면 게으름이 생겨난다.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일도 마땅히 닦아야 하고 곧게 해야 하는 것이다.

李德懋의 '靑莊館全書'에서

선비란 이덕무의 '靑莊館全書'에서 말한 것처럼 행동이 바르고 학식이 높으며 의리와 원칙을 중시하며 고결한 인품을 지닌, 끝없이 자신을 도야하는 사람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접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며, 단지 교육적인 상황에서 옛 사람들을 들추고자 하는 실정이다. 또한 옛 선비들의 정신 사상이나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삶과 생활을 이해하여야 선비문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선비들의 삶과 그들의 사상, 정신, 문화 등을 간접적으로나 체험할 수 있는 선비의 고장 상주에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옛 선비들을 만나보고자 하였다.

2. 선비문화

지금의 시대를 문화실조, 또는 문화 지체의 시대라고들 한다. 문화실조란 인간이 정신적으로 발달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문화적인 영양이 어떤 이유 때문에 결핍되는 경우, 심리적인 발달이 지연되거나 정체되는 현상을 말하며, 문화지체란 물질문화는 급속히 발전하는데 이에 대한 비물질문화, 이른바 예의나 질서의식 또는 그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가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현상을 미국의 사회학자 W. F. 오그번은 문화지체(cultural lag)라고 했다. 따라서 문화지체는 우리만이 아닌 세계적 현상이고 어느 선까지는 불가피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 도가 지나치다 할 수 있다.

특히 우리는 예로부터 예의 문화를 숭상하였으며, 예의 문화의 전승과 보전, 발전에 힘을 기울였고, 그 문화가 우리의 생활과 삶의 기본이었다. 그로 인하여 우리사회의 질서와 바른 생활문화가 정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급격한 물질문화의 발전과 자유분방한 서구의 정신문화가 도입되면서 우리의 정신적인 사상에 공황이 발생하게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의 유교 문화가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도덕적 인간을 양성하는 일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인 우리의 도덕 문화가 급격하게 무너지게 된 것이다.

유교문화가 중시하는 것은 올바른 인간관계이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 부부관계, 친구관계, 상하관계를 올바르게 하는 방법을 五倫을 통하여 가르쳤으며, 그 다음으로 중시한 것이 ‘自己修養’이었다. 자기수양은 물욕을 억제하고 올바른 마음을 갖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자기가 밑지면서 남을 돕는 일, 득이냐 실이냐를 따지기 전에 옳으냐 그러냐를 먼저 생각하는 일, 몸을 낮춰 남을 섬기는 일, 감정을 누르고 올바른 판단을 하는 일 들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四端 즉, 仁義禮智의 덕목이다.

물질적 유혹을 스스로 이겨서 이러한 덕목을 굳건히 지켜가기 위해서 부단히 마음의 중심을 잡고 흔들림 없이 지켜나가는 일에 마음이 자연스럽게 머물도록 부단한 수양을 쌓았었다. 이것이 퇴계선생이 주장한 경에 대한 공부이다. 대학에서 보면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이 ‘治國平天下’에 두기도 하였지만 그것보다는 어디까지나 마음을 바로잡고 몸을 닦는 과정에서 순리적으로 도달하는 목표로 삼았을 뿐 . 벼슬하는 기술을 연마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세를 잡으라고 권하지는 않았다. 유교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올바른 삶을 가장 중히 여기고, 힘이 남으면 학문하고, 도가 차서 길이 열리면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공헌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 格物而后 知至

知至而后 意誠 意誠而后 心正 心正而后 身修 身修而后 家齊 家齊而后

國治 國治而后 平天下

- 大學-

현재의 교육의 사상도 인간교육, 즉 도덕교육에 치중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은 개인주의와 물질 만능주의의 팽배로 인하여 이러한 교육은 도덕 교과서 속에나 존재하는 고 시대의 유물이 되고 있다. 이는 앞서도 말한 것과 같이 서양의 물질문명이 급속히 밀려와 우리의 전통적인 아름다운 풍속이 자꾸 사라져가고 있다. 정신보다 물질이 숭상되는 사회가 되어가면서 옛날부터 삶의 규범이 되었던 바른 전통이 무너지고 서양문화도 취사선택 없이 받아들여져(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문화의 혼란시대가 초래되었다고 본다. 특히 이에 편승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더욱 팽배해져 자라나는 학생들의 가치관까지 흔들리는 혼란의 시대를 맞고 있어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는 학교교육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인 것이다.

이에 새로운 문화에 따른 바른 가치관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바른 정체성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즉, 학교현장에서 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우리의 조상들이 바르게 살아 온 모습을 살펴 오늘의 시대에서 인간이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어떤 모습인가를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바른 삶을 끝없이 추구해 온 선비들의 문화가 무엇인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이들의 도덕적 삶의 철학인 四端을 오늘날에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우리 모두가 탐색해야 할 것이다.

四端 (仁義禮智) / 孟子 公孫丑 上篇

1. 惻隱之心 : 仁을 꽃피우는 실마리는 남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는 착한 마음

2. 辭讓之心 : 를 꽃피우는 실마리는 자기의 이익을 버리고 남을 밀어주는 마음

3. 羞惡之心 : 義를 꽃피우는 실마리는 자기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거짓 미 워하는 의로운 마음

4. 是非之心 : 를 꽃피우는 실마리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

3. 선비사상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선비’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막연히 조선시대의 상부계층 정도로 인식하고 이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을 해 본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한국사에 있어 왕과 ‘선비’로 불리는 이들 집단이 그간 주도적으로 역사를 이끌어 온 계층임을 짚어본다면 선비들이 지닌 사상, 즉 ‘선비사상’에 대해 진지하게 탐색해 보고 이에 관해 현 사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선비사상’의 진정한 의미와 그것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알아보고 우리가 본받을 만한 사항을 찾아보도록 하겠다.

먼저 ‘선비’의 사전적 의미를 알아보면 선비란

첫째, 신분적 호칭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는 사람

둘째, 능력적 특성표시로서 학문과 덕망을 아울러 지닌 學德兼備人

셋째, 완전인 또는 이상적 인간상의 표시로서 어질고 순한 사람을 선비라고 한다. 이 이 중에서 셋째 풀이인 ‘어질고 순한 사람’이 ‘선비像’이라고 말하는 것은 ‘선비像’이 지니는 인간적 특성에 주목해서이다.

다음으로 조선시대의 선비의 의미를 살펴보면 선비는 재야에 있으면서 도를 배우고 도를 실천하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벼슬에 나아가 도를 실천하고 은택을 베풀어 공업을 크게 일으키는 사람 일체를 말한다. 또한 이러한 선비들의 선비정신은 학문과 덕성을 갖춘 하나의 인격체라고 할 수 있다. 고결한 인격을 바탕으로 행동과 예절을 올바르게 실천하며, 강인한 의지를 갖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사회에 정도를 구현하는 것이 선비정신이라고 하겠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의 선비를 ‘선비의 여섯 가지 특성’으로 나누어 보면

첫째는 愛國孝行性이다. 麗末鮮初의 야은 길재의 경우는 노모 봉양을 이유로 끝끝내 불사이군의 지조를 지킴으로써 고려군에 대한 애국심을 보였고, 또한 효도하는 마음을 몸소 실천하였다. 또한 이순신에 있어 몸바쳐 나라 사랑한 충성심에 이르러서는 더 설명할 나위도 없으리라고 본다. 따라서 이들은 선비의 인간적 특성의 하나인 ‘愛國孝行性’이라는 모범을 보인 사람의 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社會義理性이다. 春秋大義의 이상을 내걸었던 정암 조광조, 또는 향약의 실시 등 민본 사회정의의 이상 실현에 힘쓴 율곡 이이 등을 들 수 있겠는데, 이들의 공통된 것은 의리사상이요 사회참여의 정신인 것이다.

셋째는 先公崇文性이다. 거듭된 거란의 침공으로 인해서 관학이 떨치지 못하는 교육적 공백기가 생기자 9제를 마련하여 젊은이들의 교학에 힘쓴 12도의 선구자인 최충의 경우라든지, 지성인답게 처신한 성삼문, 또는 문필을 통하여 공정성을 밝히려고 한 허균, 류성원, 박지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공을 사보다 앞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선공후사의 윤리인 것이다. 나 개인보다도 나라나 민족이 더 소중했었다.

넷째는 居敬崇禮性이다. 유독 ‘의 사상’으로써 대표되는 퇴계 이황의 경우가 그것이다.

다섯째는 淸廉勤儉性이다. 실학파를 대표하는 성호 이익이나 다산 정약용 등의 경우는 그 생활 또한 청렴하였고 근검에 힘썼다.

여섯째는 志操信義性이다. 고려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와 같이 끝끝내 고려조를 위하여 지조와 신의를 굽히지 않은 史實을 가리켜하는 말인 것이다.

이상으로 ‘선비사상’을 선비의 인간적 특성과의 관계에서 모두 여섯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4. 선비사상의 교육적인 가르침

선비에 대해 부연을 조금 더 해보자면, 선비란 조선조시대에 형성된 지식인 집단으로서, 단순한 지식인이 아닌 학문적으로 지성을 갖추고 도덕적으로 인격을 갖춘 지식인들로서 조선조라는 정치공동체를 이끌어간 역사의 주역들이었다. 그들은 조선조의 정치체계를 운영해 온 엘리트집단이었다. 즉 백성을 다스리는 치자였으며 백성을 교화하는 교사였다.

또한 선비는 유교적 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로 사회적으로는 독서를 기본 임무로 삼고 관직을 담당하는 신분-계급을 가리킨다. 선비는 조선시대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을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

원래 조선조에 있어서 선비들이란 과거제를 중심으로 형성된 유자의 집단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그 의미가 확대되어, 학문이 깊고 언행이 신중하면 선비로 인정하였다. 그래서 양인은 물론이고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던 서출에게서도 선비가 나왔다. 그런가하면 제아무리 권문세가의 자제일지라도 학문과 덕행을 쌓지 않으면 선비로 인정되지 않았다. 조선조사회에서 선비가 되는 것은 개인의 귀족적 지위나 신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학문과 도덕성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선비가 되기 위해서는 선비가 되는 길을 걸어야 했으며, 이 길이 결국 선비의 구체적인 일생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문화적 전통이 곧 ‘선비문화’이며, 선비문화를 이룩한 동력이 ‘선비정신’이다. 넓게 배우고 깊이 물으며, 신중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판단하라. 그리고 배워 익힌 바를 성실히 실천하는 것이 선비의 길이다. 그러므로 中庸에 나오는 ‘博學審問愼思明辨篤行五者 廢其一이면 非學也니라’ 는 글은 ‘선비의 길’은 곧 ‘교육자의 길’인 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서의 선비의 상은 곧 교사의 상인 것이다.

즉 학문을 얻는 방법은 4가지이지만 얻은 학문을 실천에 옮기는 것인 진정한 학문을 얻는 것이다.

이로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선비사상’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가 물려받고 있는 직접적인 문화유산으로서 선비문화와 선비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며, 우리들에게 명시적․묵시적으로 미치는 영향력도 매우 크다는 점이다. 우리 민족의 생활에 있어서 그 중요한 뿌리가 선비문화에 있고, 또 우리의 의식의 뿌리가 선비정신에 있다하겠다. 19세기 후반부터 우리 민족은 개화 또는 근대화의 과정을 통해서 많은 갈등과 충돌을 경험하였다. 문화의 변용을 원하는 편에서는 그 변화를 저지하는 편을 부정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생활이며, 의식인 선비정신의 전통은 그 많은 부분이 부정되거나 약화되었다.

그러나 ‘선비정신’은 문화사적으로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역사의 지식인이자 사회주도계층의 사상으로서 오늘날에도 뜻하는 것이 많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근검정신, 투철한 교육정신, 전통문화수호정신 등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매우 배울 점이 많다고 하겠다.

5. 선비사상과 오늘 날의 교육

현대의 지식기반사회에서 정보와 첨단과학을 바탕으로 한 물질문명이 정신세계를 압도하고 있다. 정보와 과학의 발달은 인간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있지만 또한 인간성과 도덕은 상실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풍조는 개인을 이기주의와 물질 만능주의로 몰아가 더욱 정신적 황폐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선비 문화는 인간은 물질과 정신의 조화를 이루고 그 가운데서 참된 인간다움의 삶을 향유할 수 있도록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러한 시사점을 살펴보면 첫째, 순수 처사형의 선비정신에는 풍성한 인격성과 도덕성이 담겨있다. 따라서 현대의 물질중심의 사회에서 점차 상실되어 가고 있는 정신적 가치를 이러한 선비정신에서 보충할 수 있다. 둘째, 권력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정의를 구현하려는 선비정신은 집권층에 자극을 주고 견제를 하며 반성을 줄 수도 있다. 셋째, 학문과 실천도덕으로 지역사회의 문화를 진흥시켰던 선비들의 역할이 지방의 자치제도가 더욱 확대되어 가는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새롭게 요청되고 있다고 하겠다.

Ⅱ. 상산 선비

1. 金得培

1312년(충선왕 4)∼1362년(공민왕 11) 본관은 尙州. 고려 후기의 문신(정당문학). 호 蘭溪, 시호 文忠. 관직은 우부대언, 서북면도병마사, 수충보절정원공신을 거침

아버지는 判典醫 祿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에 보직되었으며, 그 뒤 전객부령(典客副令)으로서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에 제수되었으며, 1357년(공민왕 6)에 서북면홍두왜적방어도지휘사(西北面紅頭倭賊防禦都指揮使)가 되었다가, 이어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에 오르고, 서북면도순문사겸서경윤상만호(西北面都巡問使兼西京尹上萬戶)가 되었다.

1359년 정월에 첨서추밀원사(詹書樞密院事)가 되었으며, 그 해 6월에 기철(奇轍)을 숙청한 공으로 2등 공신에 올랐다. 같은 해 10월에 동지추밀원사가 되었다. 이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홍건적의 괴수 위평장(僞平章)·모거경(毛居敬)이 4만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함락하였으며, 副使 朱永世 및 주민 1,000여 명을 살해하였다.

이어 靜州에서는 도지휘사 김원봉(金元鳳)을 죽이고 麟州까지 함락시켰다. 이 때 그는 도지휘사가 되어 서북면도원수 이암(李嵒), 부원수 경복흥(慶復興)과 더불어 적에 대비하고,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분전하여 서경을 탈환하고 압록강 밖으로 적을 격퇴시켰다.

1360년 3월에 그 공으로 수충보절정원공신(輸忠保節定遠功臣)에 책봉되고, 정당문학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지공거가 되어 진사를 뽑고, 정몽주(鄭夢周) 등 33인을 급제시켰다.

1361년 다시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삭주 이성(泥城)으로 침입하자 서북면도병마사가 되어 상원수 안우, 도지휘사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방어했으나, 안주에서 대패, 개경까지 함락 당하였다.

다음해에 안우·이방실·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2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의 지휘로 적의 괴수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을 베고, 적 10여만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고 이들을 격퇴시켰다.

이 때, 정세운과 권력을 다투던 평장사 김용(金鏞)이 거짓으로 조서를 꾸며 안우·이방실·김득배에게 정세운을 살해할 것을 명하자, 이들은 그것을 믿고 정세운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죄를 입어 안우·이방실이 살해되었으며, 그도 처벌을 면할 수 없게 되어 도망하여 산양현(山陽縣)에 숨었으나 체포되어 상주에서 효수되었다.

그의 문생인 직한림(直翰林) 정몽주는 왕에게 청하여 그의 시신을 거두고 제문을 지어 그의 억울한 죽음을 개탄하였다. 1392년(공양왕 4)에 그의 누명이 벗겨지고, 그 자손도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2. 洪貴達

1438(세종 20)∼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함허정(涵虛亭). 사재감정 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득우(得禹)이고, 아버지는 증 판서 孝孫이며, 어머니는 노집(盧緝)의 딸이다.

1460년(세조 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464년 겸예문에 등용, 예문관봉교로 승직하였다. 1466년 설서가 되고 선전관을 겸하였다.

이듬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조정랑에 승직하면서 예문관응교를 겸하였다.

1469년(예종 1) 교리가 되었다가 장령이 되니 조정의 글이 모두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사예가 되었을 때 외직인 영천군수로 전출하게 되자, 그의 글재주를 아낀 대제학 徐居正의 반대로 홍문관전한과 예문관전한이 되었다. 이어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직제학·동부승지를 거쳐 충청감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도승지로 복직했으나, 연산군의 생모 尹妃를 왕비에서 일반인으로 폐하고 쫓아내는 모의에 반대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1481년(성종 12)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리고 1483년 국조오례의주(國朝五禮儀註)를 개정하고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그 뒤 형조와 이조의 참판을 거쳐, 경주부윤·대사성·지중추부사·대제학·대사헌·우참찬·이조판서·호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등을 역임한 뒤 좌참찬이 되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직전에 열 가지 폐단을 지적한 글을 올려 왕에게 간하다가 사화가 일어나자 좌천되었다. 1500년 왕명에 따라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역대명감(歷代名鑑)을 편찬하고,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504년 손녀를 궁중에 들이라는 왕명을 거역해 장형(杖刑)을 받고 경원으로 유배 도중 교살(絞殺)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에도 능했으며, 성격이 강직해 부정한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 모두들 몸을 조심하라 했으나, 태연히 말하기를 “내가 국은을 두터이 입고 이제 늙었으니 죽어도 원통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중종반정 후 신원(伸寃 : 원통함을 풀어버림)되었다. 함창의 임호서원(臨湖書院)과 의흥의 양산서원(陽山書院)에 제향되고, 저서로는 허백정문집(虛白亭文集)이 있다.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3. 權達手

1469년(예종1)∼1504년(연산군10) 본관 安東. 자 通之. 호 桐溪.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1495년(연산군 1) 賜暇讀書하였으며, 정언(正言), 이조좌랑을 역임한 뒤 冬至使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98년 수찬(修撰)에 이어 부교리를 역임하였다. 1504년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를 종묘에 추숭(追崇)하려고 할 때, 그 부당함을 들어 반대하다가 장() 60에 용궁(龍宮)에 유배되었으며, 그 해 11월의 甲子士禍 때 다시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다가 옥사했다.

교동주(喬桐主) 燕山君이 왕위에 오른 지 10년 되던 갑자년(1504년) 연산군 10년에 폐비 윤씨를 추존(追尊)하고자 그 일을 백관에게 의논하라고 하였다. 그때 흉악한 노기가 한창 등등하여 비위를 거슬렸다 하면 피살되어 시체가 거리에 가득 찼으므로 온 조정이 벌벌 떨어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그때 교리(校理, 權達手)군이 분개하며 말하기를, “어찌 나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임금을 나쁜 곳으로 빠지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그 의논은 옳지 않다고 하자, 동료의 인사와 御史, 諫官 등이 교리군의 말을 의롭게 여겨 모두 그의 의논에 따르자 교동주가 모두 쫓아내버렸다. 그 뒤 반년이 되어 전에 반대했던 사람들을 체포하여 처벌하려고 하자, 교리군이 말하기를, “반대 의논을 제기한 사람은 나이지, 다른 사람은 간여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교리군만 저자에서 사형당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무사하였다. 교리군이 체포되었을 때 咸昌에 있던 그의 부인 鄭氏가 밥알 하나도 입에 넣지 않고 속이 답답하면 물만 마시고 있다가 교리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말하기를, “나도 그와 같이 한 구덩이에 묻히면 만족하다.” 하고, 오랫동안 통곡하다가 죽고 말았다. 아! 교리군 같은 사람은 어찌 옛날의 열사가 아니겠는가마는 부인까지 곁들었으니, 정말 節義로 쌍벽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공은 기개와 절조 있는 인물로 평을 받았다. 중종 때 도승지가 추증되고, 1693년(숙종 19) 함창의 臨湖書院에 배향되었다

4. 申潛

1491(성종 22)∼1554(명종 9). 본관은 高靈. 자는 元亮, 호는 靈川子

조선 전기의 화가로 1519년(중종 14) 賢良科에 급제하였으나, 같은 해에 己卯士禍로 인하여 파방되었다. 1521년 신사무옥 때 안처겸(安處謙) 사건에 연루되어 長興으로 귀양갔다가 楊州로 이배되었으며, 뒤에 풀려났다.

그 뒤 20여년간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며 서화에만 몰두하였다.

1543년(중종 38) 재등용되어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태인현감(泰仁縣監)·간성군수(杆城郡守) 등을 역임하고 1553년(명종 8) 상주목사(尙州牧使)에 임명되었으며, 상주 목사로 있을 때 18개의 서당을 건립하여 교육에 힘썼다. 그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부모처럼 받들었다 한다.

『병진정사록』에 의하면 시 ·서 ·화에 모두 능하여 三絶로 일컬어졌다고 하였으며,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특히 墨竹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연려실기술』에는 묵죽과 더불어 포도그림도 잘 그렸다고 하였다.

현재 그의 眞作으로 단정 지을 수 있는 작품은 남아 있지 않으나, 심매도(尋梅圖), 화조도, 설중기려도(雪中騎驢圖)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5. 周世鵬

1495(연산군 1)∼1554(명종 9). 본관 尙州. 자 경유(景遊). 호 愼齋, 시호 文敏

조선 전기 때의 학자·문신이며 아버지는 문보(文俌)이며, 어머니는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선대에는 모두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주세붕의 현달로 증직되었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그 뒤 승문원정자로 사가독서에 뽑히고, 홍문관의 정자 · 수찬을 역임하였으며, 공조좌랑 · 병조좌랑 · 강원도도사를 거쳐 사간원헌납을 지냈다. 1537년 김안로(金安老)의 전권을 피하고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곤양군수(昆陽郡守)로 나갔고, 이듬해 검시관(檢屍官)으로 남형을 한 상관을 비호하였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어머니는 사망으로 여묘 3년, 喪祭의 예는 모두 家禮에 따랐다.

승문원교리·예빈시정(禮賓寺正)을 거쳐 1541년 풍기군수가 되었다. 풍기지방과 교화를 위하여 향교를 이전하고,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1543년 白雲洞書院, 紹修書院을 건립하여 중국의 서원과 갈이 사묘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지닌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사성에 임명되고, 홍문관의 응교·전한·직제학·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1548년 호조참판이 되었다. 154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운동서원의 예와 같이 해주에 首陽書院을 건립하였다. 이후 대사성·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 병으로 사직을 요청하여 동지성균관사에 체임되었다. 죽은 뒤 소원에 따라 고향인 칠원 선영에 안장되었다. 후사가 없어 형의 아들인 박()을 사자(嗣子)로 삼았다.

관력에서 보듯이 내직은 대체로 홍문관 · 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교학진흥을 통한 교화에 힘썼다.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 대간에서 학문이 높고 성균관의 사표로 삼을 만한 인물이라 하여 내직을 요청할 정도로 그의 학문은 당시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도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고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였으며, 기묘사화 이후 폐지되었던 呂氏鄕約을 다시 시행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풍기에서 유교윤리에 입각한 교화에 힘쓰고 다시 피폐되어 향촌민의 교육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향교를 관아 근처로 이건, 복구하였다. 그리고 양반들에게 교육기관으로서는 외면당하던 향교 대신 풍기의 사림 및 그들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중국의 주자가 세운 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고려말 성리학을 도입하였던 순흥 출신의 安珦을 배향한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서원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서적을 구입하고 서원전(書院田)을 마련하였다.

서원을 통하여 사림을 교육하고, 또한 사림의 중심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일부 사림과 안향의 후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풍기 사람의 호응을 받지 못하다가 1546년 경상도관찰사로 도임한 안향의 11대손인 안현(安玹)의 노력으로 백운동서원은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고, 1550년에 풍기군수였던 이황(李滉)의 청원으로 소수(紹修)라는 사액을 받아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에 따라 백운동서원은 점차 풍기 사림의 중심기구로 변모해 나갔다. 이후 이를 모방한 서원들이 각지에서 건립되었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고,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칠원의 덕연서원(德淵書院)에 주향되었고, 백운동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죽계지(竹溪志)·해동명신언행록(海東名臣言行錄)·진헌심도(進獻心圖)가 있고, 문집으로 아들 박이 편집하였다가 전란으로 없어져 1859년(철종 10) 후손들이 다시 편집한 무릉잡고(武陵雜考)가 있다.

6. 盧守愼

1515(중종 10)∼1590(선조 23) 본관 光州. 자 寡悔, 호 蘇齋, 시호 文懿, 文簡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우의정 숭()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홍()이다.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이연경(李延慶)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1541년 27세 때 이언적(李彦迪)과 최초의 학문적 토론을 벌였다.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한 뒤로 1544년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인종 즉위초에 정언이 되어 大尹의 편에 서서 이기를 탄핵하여 파직시켰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小尹 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 1547년 순천으로 유배되고, 이어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에 이배되어 19년간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동안에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하였고,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주해하였다. 이 주해는 뜻이 정명(精明)하여 사림 사이에 전송(傳誦)됨으로써 명성이 전파되었다. 大學章句와 동몽수지(童蒙須知) 등을 주석하였다. 1565년 다시 괴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567년에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즉시 校理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 · 부제학 · 대사헌 · 이조판서 · 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1573년에는 우의정, 1578년에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 뒤 1588년에 영의정을 사임하고 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이듬해 10월에 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던 관계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시·문·서예에 능했으며 경일(敬一) 공부에 주력할 것을 강조하고 도심미발(道心未發)·인심이발설(人心已發設)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양명학(陽明學)도 깊이 연구하였으므로 주자학파의 공격을 받았다. 한편 승려인 휴정(休靜)·선수(善修) 등과도 교분이 있었으므로 그 학문이 불교의 영향을 입기도 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그가 일찍이 옥당(玉堂)에 있을 때 경연에서 서경을 강함에 인심도심(人心道心)의 설명이 주자설과 일치하였으나 진도로 유배되어 그 당시 들어온 나흠순(羅欽順)의 곤지기(困知記)를 보고 난 후는 전설(前說)을 변경하여 도심은 미발, 인심은 이발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한편 그의 덕행과 업적의 성과는 매우 다양하여 인군과 백성들, 그리고 많은 동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가 진도에 귀양 갔을 때 그 섬 풍속이 본시 혼례라는 것이 없고 남의 집에 처녀가 있으면 중매를 통하지 않고 칼을 빼들고 서로 쟁탈하였다. 이에 예법으로써 섬 백성들을 교화하여 드디어 야만의 풍속이 없어졌다. 또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대상 후에 바로 흑색의 갓을 쓰는 것이 미안하다고 생각하여 백포립(白布笠)을 쓰고 다니기를 國喪 때와 같이 하였는데, 그 뒤 직제학 정철(鄭澈)이 이를 본받아 실행했고, 뒤에 교리 신점(申點)이 주청하여 담제(禫祭) 전에는 백포립을 쓰도록 제도화시켰다. 그는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을 가진 문신이자 학자로서 사림의 중망을 지녔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받았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저서로는 시강록(侍講錄)·소재집 13권 8책이 있다. 만년에는 뜰에 상록수 10종을 심어 두고 십청(十靑)이라 불렀다. 그의 시조 한 수가 화원악보(花源樂譜)》에 전해 오고 있다.

7. 金覺

1536(중종 31)∼1610(광해군 2). 본관은 永同. 자는 景惺, 호는 石川

상주 출신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할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자()이고, 아버지는 진사 언건(彦健)이며, 어머니는 참봉 조이(趙恞)의 딸이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의 상을 당한 뒤로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낙동강변에서 낚시로 소일하였다. 1592년(선조 25)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그해 여름 상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다수 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감사 김수(金睟)가 그의 전공을 행재(行在)에 보고하여 사온서주부(司醞署主簿)를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였고, 그해 가을에는 함창현사(咸昌縣事)를 제수하였으나 또 다시 나아가지 않았다.

1596년 왜적이 용궁현(龍宮縣)을 유린하자 조정에서는 그에게 용궁현감을 제수하여 적에 맞서게 하였다. 그 뒤 1604년 온성판관(穩城判官)을 역임하였다. 뒤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8. 成覽

1556(명종 11)∼1620(광해군 12). 본관 昌寧. 초명은 , 자는 士悅, 호는 聽竹.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서 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주(希周)이고, 아버지는 감사 세평(世平)이며, 어머니는 노공좌(盧公佐)의 딸이다.

일찍부터 성리학에 뜻을 두어 형 호()와 함께 남언경(南彦經)에게 수업하여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이(李珥)·성혼(成渾)을 사사하였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연구에 몰두하였고 의학에도 밝아 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였다.

언령(求言令)이 있을 때마다 수천언으로 진소(陳疏)하였으며, 임진왜란 후에는 처가인 상주에 거처하면서 조익(趙翊)·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과 교유하였다. 벼슬은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된 이래 장원·별좌·공조좌랑·무주현감을 역임한 바 있다.

9. 鄭起龍

1562∼1622. 본관 昆陽(鄭氏의 시조). 자 景雲. 梅軒. 시호 忠毅. 초명 茂壽

1580년(선조 13) 향시에 합격하고, 1586년 무과에 급제한 뒤 왕명으로 개명하였다. 1590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신립(申砬)의 휘하에 들어가 훈련원 봉사(奉事)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別將으로 승진하여 우방어사 조경(趙儆)을 따라 종군, 居昌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錦山싸움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구출한 뒤 곤양의 수성장(守城將)이 되었다.

遊兵별장을 거쳐 尙州判官으로 왜군과 대치·격전 끝에 상주성을 탈환하였으며, 1593년 전공으로 회령부사(會寧府使)에 승진하고 이듬해 상주목사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597년 丁酉再亂이 일어나자 토왜대장(討倭大將)이 되어 高靈에서 적장을 생포하는 한편 星州 ·陜川·草溪·宜寧 등을 탈환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승진, 이어 慶州·蔚山을 수복하였다. 1598년 명나라 군대의 총병직(摠兵職)을 대행하여 영남 방면의 왜군 패잔병을 소탕하고 용양위(龍讓衛)부호군이 되고 이듬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재임되었다.

1601년 경상도방어사 ·김해부사 ·밀양부사를 거쳐 중도(中道)방어사에 오르고, 뒤에 용양위부호군 겸 오위도총부총관·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겸 울산부사가 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상호군(上護軍)에 승진, 1617년 3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올라 統營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죽은 후 상주는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가 현재는 충의사(忠毅祠)로 이전하여 배향하고 있다

정기룡 장군은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전개된 7년간의 전란에서 무려 60여회의 전투를 치르며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불패전승의 신화를 이룩하였다.

10. 鄭經世

1563년∼1633년. 본관은 晉州. 자는 景任. 호는 愚伏.

아버지는 좌찬성 汝寬이며, 어머니는 陜川李氏의 딸이다. 유성룡의 문인

1578년(선조 11) 경상도 향시에 응시하여 생원과 진사의 초시에 합격했다. 1582년회시에서 진사에 뽑히고, 1586년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1588년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가 곧 통사랑대교로 승진되었다.

1596년 이조좌랑에 시강원문학을 겸했으며, 잠시 영남어사의 특명을 받아 어왜진영의 각처를 순시하고 돌아와 홍문관교리에 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을 겸하였고, 이어서 이조정랑·시강원문학을 겸하였다. 이조정랑에 있을 때에는 인사 행정이 공정하여 賢邪를 엄선해서 임용·퇴출했으며, 특정인에게 경중을 둔 일이 없었다.

1598년 2월 승정원우승지, 3월에 승정원좌승지로 승진되었고, 4월에는 경상감사로 나갔다. 이때 영남 일대가 임진왜란의 여독으로 민력이 고갈되고 인심이 각박해진 것을 잘 다스려, 도민을 너그럽게 무마하면서 양곡을 적기에 잘 공급해 주고, 백성들의 풍습 교화에 힘써 도내가 점차로 안정을 찾게 되었다.

1600년 영해부사가 되어 싸움을 잘하고 남을 모략하는 투서가 심한 풍습을 교화하였다. 그 해 겨울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이후 몇 번의 소명을 받았으나 당시 당쟁의 풍랑으로 정계가 시끄러웠기에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또한 마을에 存愛院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병을 무료로 진료하였다.

그는 도학이 정몽주에서 시작되어 이황에게서 집성되었으며, 김굉필·정여창·이언적 같은 여러 현인들이 나와 正學으로 더욱 깊이 연구하여 왕성한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영남의 상부에 위치하고 있는 상주에 서원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유생을 설득하여 도남서원을 창건하였으며, 이곳에 五賢從祀하였다.

1607년 대구부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고, 이듬해 광해군이 즉위하여 교서를 내려 구언하자, 만언소를 올려 사치의 풍습을 경계하고 인물의 전형을 공정히 하며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1609년(광해군 1) 봄 동지사로 명나라에 갔으며, 이듬해 돌아와서는 화약의 매입을 예년의 갑절로 하도록 병부에 글을 올렸다. 이후 명나라와 교섭하여 그 수입에 힘썼기에 특지로 가선대부의 칭호를 받았다.

1610년 4월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10월에는 외직을 원해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며, 12월에는 다시 전라감사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8월 정인홍 일당의 사간원 탄핵으로 해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변화하자 3월 홍문관부제학이 제수되었다. 이후 대사헌·승정원도승지·의정부참찬·형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대제학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공정한 도리를 확장하고 요행을 억제하며, 인재를 널리 취하고 사론을 조정하여 국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학문은 주자학에 본원을 두고,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그는 주자를 흠모하고 존경하였으며, 주서를 편람하고 정독하여 후진 교육이나 조의·경연에서 진강할 때 항상 주서에 근거를 두었다. 그의 저서 養正篇은 주자가 편찬한 小學과 표리가 되고, 朱文酌海는 이황이 편찬한 朱書節要와 표리가 되는 것으로 주자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그는 경전에 밝았으며,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제자로는 전명룡·신석번·강진룡·황뉴·홍호 등이 있다. 저서로는 愚伏集, 喪禮參考가 있다.

11. 蔡壽

1449(세종 31)∼1515(중종10). 본관은 仁川.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난재(懶齋). 시호양정(襄靖).

조선 중기의 문신·중종반정공신으로 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필선 윤()이고, 아버지는 남양부사 신보(申保)이다. 어머니는 유승순(柳承順)의 딸이다.

1468년(세조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69년(예종 1) 식년문과에 장원하여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예문관수찬이 된 뒤, 홍문관교리·지평·이조정랑 등을 역임하면서 世祖實錄·睿宗實錄의 편찬에 관계하였다.

1477년 응교가 되어 임사홍(任士洪)의 비행을 탄핵했으며, 승지를 거쳐 대사헌으로 있을 때 廢妃尹氏(연산군 생모)를 받들어 휼양할 것을 청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벼슬에서 물러났다.

1485년 서용되어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하정사(賀正使)·성절사(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대사성 등을 거쳐 호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이후 줄곧 외직을 구하여 무오사화를 피하였다. 1499년(연산군 5) 이후 예조참판·형조참판·평안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갑자사화 때는 앞서 정희대비(貞熹大妃)가 언서(諺書)로 적은 폐비 윤씨의 죄상을 사관(史官)에게 넘겨준 것이 죄가 되어 경상도 단성으로 장배(杖配)되었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여기에 가담,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군되었다.

그 뒤 후배들과 함께 조정에 벼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 咸昌(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에 쾌재정(快哉亭)을 짓고 은거하며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박람강기하여 천하의 서적과 산경(山經)·지지(地誌)·패관소설(稗官小說)에까지 해박하였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시문에는 특히 뛰어나 어려서부터 문예로 이름을 얻을 정도로 당대의 재사였다. 그러나 성격이 경망되고 행동이 거칠고 경솔하여 독실한 유학자는 못 된 데다가, 1511년(중종 6) 설공찬전(薛公贊傳)이라는 패관소설을 지어 윤회화복을 말하다가 사림의 비난을 받아 불태워지기까지 하였다.

김종직(金宗直)에게 종유(從遊)하고, 특히 성현(成俔)과 교제가 깊었다. 사신으로 북경을 내왕하는 길에 요동명사(遼東名士)이던 소규(邵圭)와도 친교를 맺었으나, 당시 새로이 등장하던 사류(士類)와는 잘 화합하지 못하였다.

1703년(숙종 29) 함창의 사림에 의하여 그의 고장에 임호서원(臨湖書院)이 건립되고 표연말(表沿沫)·홍귀달(洪貴達) 등과 함께 제향되었다. 저서로 나재집 2권이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12. 張志淵

1864(고종 1)∼1921. 본관은 仁同, 초명은 志尹. 자는 和明. 호는 韋庵

조선 말기의 언론인·애국계몽운동가로 경상북도 상주 출신. 아버지는 장용상(張龍相)이며, 장석봉(張錫鳳)의 문인이다.

1894년(고종 31) 진사가 되었다. 1895년 8월 일제의 민비시해 만행이 자행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처에 발송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자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萬人疏)를 기초하였다.

한편, 사례소(史禮所) 직원으로 大韓禮典 편찬에 참여하고, 이듬 해 내부주사(內部主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같은 해 7월 독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898년 9월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창간되자 기자로 활약하였다. 같은 해 11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맹활약하다가 그 해 말 독립협회·만민공동회가 해산당할 때 체포, 투옥되었다.

1899년 시사총보(時事叢報)의 주필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출판사인 광문사를 설립해 정약용(丁若鏞)의 牧民心書와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을 간행하였다. 1901년 황성신문사의 사장에 취임해 민중 계몽과 자립정신 고취에 진력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자에 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제목으로 국권침탈의 조약을 폭로하고, 일제의 침략과 을사 5적을 규탄하면서, 국민의 총궐기를 호소하는 논설을 써서 일제 헌병대의 사전검열을 거치지 않고 전국에 배포하였다. 이 일로 체포, 투옥되어 65일 후 석방되었으며, 황성신문도 압수 및 정간 처분되었다.

이 후 1906년 윤효정·심의성·임진수·김상범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 국권 회복을 위한 본격적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대한자강회월보·조양보(朝陽報) 등에 전 국민이 각성해서 실력을 배양해 구국운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논설을 다수 발표하였다.

1907년 1월 대구의 김광제·서상돈 등이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전개하였다. 이에 이 운동을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시키고자 신문과 잡지 등에 다수의 논설을 게재해 전국민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같은 해 7월 일제가 헤이그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탄압법들을 잇달아 제정하자, 대한자강회 회원들과 함께 격렬한 반대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인해 8월 19일 대한자강회는 강제 해산되었다. 그 후 11월에 권동진·남궁억·여병현·유근·오세창 등과 함께 대한협회(大韓協會)를 발기해 조직하였다.

1908년 2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정순만 등이 간행하고 있던 해조신문(海潮新聞)의 주필에 취임하였다. 재정난으로 해조신문이 폐간되자, 상해(上海)와 난징(南京) 등 중국 각지를 유랑하다가 양쯔강의 배 안에서 일제의 첩자로 보이는 괴한의 습격을 받고 부상당해 8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즉시 해조신문에서의 격렬한 일제침략 규탄이 문제되어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얼마 뒤 석방되었다. 1909년 1월 영남지방의 교육구국운동 단체인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의 취지문을 지어 지원했으며, 학회의 편집원으로 활약하였다.

같은 해 2월 대한협회의 정정부문(呈政府文)을 지었으며, 신민회(新民會)에도 가입, 활약하였다. 1909년 10월진주에서 발행되는 경남일보의 주필로 초빙되어 언론구국운동을 다시 계속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나라를 병탄함에 따라 항의하는 선비들이 잇달아 자결하자, 황현(黃玹)의 절명시(絶命詩)를 경남일보에 게재해 일제를 규탄하였다. 이로 인해 경남일보가 폐간되어 활동 무대를 잃었다.

1911년 이후 향리에 칩거하면서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통탄하다가 1921년 마산에서 죽었다.

장지연의 是日也放聲大哭(오늘 목 놓아 통곡한다)은 일본 침략의 만행을 폭로하고 규탄한 글로 널리 알려졌으며, 때문에 그는 언론인으로서 일본 침략에 저항한 공적을 인정받아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2004년 11월에는 국가보훈처가 선정하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Ⅲ. 현대교육과 선비사상의

선비사상과 현대 교육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첫째, 덕을 중시하는 ‘선비사상’을 배워야 한다. 작금의 시대를 가치관의 부재의 시기라고들 한다. 덕을 중시하고 인성교육을 강화해나가 학교폭력, 왕따현상, 불법매춘행태, 각종 부정부패의 사례 등 많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하루 속히 해결해 나가는데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고 현재에 걸맞은 패러다임을 이루어 나가야겠다.

둘째, 호학정신이다. 예로부터 선비들은 예를 첫째요, 학을 둘째로 여겨오면서 학문을 중시하였다. 즉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바로 선비들의 또 하나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선비들이 학문을 좋아하고 이를 자기네들이 덕으로 삼은 이유는 공맹지도를 위시해서 여러 고전 속에서 인간의 도리를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덕을 숭상하자면 덕의 본질에 관한 고전을 많이 공부했어야 했었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평생을 두고 항상 학문을 열심히 닦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학문을 좋아하고 덕을 숭상했던 ‘선비정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는 첫째로는 이를 탐내지 말고 의를 존중하라는 것이며, 둘째로는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라는 것, 셋째 예절 바르고 품위 있는 몸가짐을 하라는 것, 넷째로는 열심히 공부해서 실력을 양성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미루어 보아 ‘선비사상’은 과거에만 유효하지 않은 현재와 미래에도 우리 사회에 유효한 사회적 가치체계이자 패러다임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선비사상’을 볼 때 고리타분한 근시대적인 사상으로 여기는 자세에서 탈피해 현대 사회의 제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해 나갈 수 있는 필요성이 충분한 현대 문제 해결에 합당하며 미래사회 건설에도 이바지 할 수 있는 가치사상으로서 여길 수 있어야겠다.

참고 자료

1. 금장태, 한국의 선비와 선비정신, 서울 :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2. 상주문화원, 금요사랑방, 상주 : 도서출판 한솔, 2013.

3. 상주문화원, 상주의 인물Ⅰ, 상주 : 한일사, 2011.

4. 상주문화원, 상주의 인물Ⅱ, 상주 : 한일사, 2013.

5. 상주문화원, 상주유학사상 존재의식, 상주 : 도서출판 한솔, 2012.

6. 상주문화원, 상주학강의 금요사랑방(Ⅰ,Ⅱ,Ⅲ), 상주 : 도서출판 한솔, 2013.

7. 상주문화원, 의병대장 금포 노병대, 상주 : 도서출판 한솔, 2013.

8. 안동문화원, 안동의 문화 유산, 안동 : 도서출판 한빛, 2001.

9.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제사, 안동 : 도서출판 영남사, 2001

10. 오석원, 「安東의 선비문화에 대한 고찰」

11. 李龍兌, 敎育과 선비문화, 김주현,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선비문화 체험」 연수교재 2003-1, 2003.

12. 이장희, 조선시대의 선비연구, 서울 : 박영사, 1989.

13. 존애원, 존애원, 존애원기념사업회, 2011.

14. 韓國의 선비문화, 鼎談-한국의 선비文化, 時事英語社, 1982.

[사전]

1. 두산백과, 서울: 두산동아출판사, 2010.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울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3. 국역국조인물고, 서울 : 신흥인쇄주식회사, 2007.

[인터넷]

NAVER(네이버 통합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