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봉산 아래에 꽃핀 상주의 민속문화 읽기
상주박물관
조 연 남
차례
1. 민속문화의 보고(寶庫) 상주
2. 마을신앙의 일반적인 전승 양상
3. 고을 신앙의 산실 성황사와 영암각
4. ‘안너추리’의 삶과 문화 간략히 엿보기
5. ‘안너추리’의 지킴이 당산(堂山)과 당산제
6. 남근석을 둘러싼 풍수 인식
7. 상주의 민속문화 알고 찾고 지키기
1. 민속문화의 보고(寶庫) 상주
경상북도의 경(慶)은 경주(慶州)를 뜻하며, 상(尙)은 상주(尙州)를 일컫는다. 상주에서 문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여기에 다른 수식어는 붙지 않는다. 경주에 버금갈 정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 바로 상주이기 때문이다. 2014년은 ‘경상도’라는 명칭이 생긴지 700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상주에는 일찍이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어, 상주 신상리 구석기 유적에서부터 선사유적 53곳, 고고유적 145곳 등 최근에 사적으로 지정된 ‘상주복룡동유적(사적 제477호)’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다양한 유․무형의 유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또한 오랫동안 사람들이 터 잡고 살아온 지역인 까닭에 다양한 민속문화가 지금껏 생생히 전승되고 있다. 차를 타고 시골 길을 가다보면 마을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동신목과 돌탑을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민속문화의 다양한 갈래 가운데 상주 천봉산 성황사와 영암각 신앙을 비롯한 사벌 원흥리 민속신앙, 견훤과 견훤의 부인을 모시고 있는 견훤사당, 고속도로 공사 과정에서 없어진 낙상동 마당제는 물론 아직까지 조사 연구되지 않은 많은 민속신앙들이 우리의 삶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여기에서는 상주 삼악 가운데 하나인 천봉산에서 꽃핀 상주의 민속문화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상주 목사가 주재(主宰)해 왔던 상주 고을 신앙의 산실인 성황사와 바위를 섬기는 영암각 신앙, 아울러 천봉산 성황사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안너추리 마을의 민속신앙에 주목하기로 한다.
2. 마을신앙의 일반적인 전승 양상
마을신앙은 지역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전승된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지 마을의 주산인 산에는 산신을, 눈에 보이지 않은 잡귀잡신들이 오가는 마을의 입구에는 거리신을 위하기 마련이다. 민속신앙은 크게 국가나 고을, 마을과 같이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제의와 가족들의 건강과 바람을 담은 가족단위의 가신신앙과 같은 개인적인 제의로 나누어진다. 천봉산 성황제는 고을신앙이며, 만산동 동신제는 안너추리의 공동체제의인 것이다.
전국의 어딜 가나 시골 마을 입구에서는 흔히 입구의 커다란 나무나 돌무더기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이것이 지금 남아 있는 마을신앙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대부분의 마을은 기본적으로 여러 신령들을 좌정(坐定) 시킴으로써, 마을을 안정되게 하려고 애쓴다. 마을의 주산(主山)에 마을 최고신인 산신을 모시고, 마을 입구에 여러 거리신들을 위함으로써, 마을은 사람만이 아니라 신령들도 함께 사는 공간이 된다. 이렇듯 마을 신앙은 상․하당신을 기본으로 각 마을의 자연․역사․문화 환경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지금은 마을 신앙의 쇠퇴로 하당 신앙과 제의만 남아 있는 마을이 많으나, 예전에는 거의 모든 마을에서 상․하당신을 위했던 것이다.
산신은 단순한 자연신이나 마을에 처음 들어온 조상신으로, 또는 그 지역의 역사와 관련된 구체적인 인물신 등으로 인식된다. 주산을 상정하기 어려운 평야 지대나 바닷가의 마을 또는 진산(鎭山)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은 산신을 모실 적당한 산이 없기 때문에 산신당이 아예 마을 입구나 한 복판에 나와 있기도 하고, 아니면 마을 입구를 포함하여 마을 둘레에 적당한 노거수를 여러 그루 심거나 선택하여 당산(堂山)으로 모신다. 또한 탑을 마을 둘레에 조성하여 당산으로 위한다.
마을을 개척한 첫 시조는 영남 해안지방에서 흔히 ‘골맥이’라 일컫는다. 골맥이는 ‘고을+막이’의 복합명사로 보이는데, 이른바 입향시조신(入鄕始祖神)인 것이다. 골맥이에 특정 성씨(姓氏)를 붙여 ‘골맥이 김씨 할배’, ‘골맥이 이씨 할매’ 등으로 부르는 것은 그 성씨를 마을에 처음 정착한 ‘마을창건신’, ‘시조신’, ‘수호신’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 밖에 영동과 영남 지방의 경순왕, 공민왕, 김유신 등과 해안이나 섬 지방의 해촌에서는 임경업, 최영, 남이 장군 등의 역사 인물 등을 모신다. 상주의 견훤을 모시는 견훤사당이 이에 해당한다.
마을의 입구에는 탑, 장승, 솟대(짐대), 수구맥이, 선돌 등 여러 종류의 하당신을 모신다. 하나의 마을에서 이들 하당신을 빠짐없이 모두 위하는 것은 아니다. 마을에 따라서 이들 하당신 중 한 개 또는 두 세 개씩 선정하여 다양하게 조합하여 모신다. 보통 마을 입구는 서너 그루의 나무 또는 조그만 숲을 이루고 있어 대부분의 거리신들은 이들 나무나 숲 속에 모셔진다. 물론 마을 입구에 세워진 신앙대상물에 따라 ‘장승거리’, ‘짐대(솟대)거리’, ‘탑거리’ 등으로 일컫는 마을도 있다.
사벌 원흥리 민속신앙, 화동 신촌 1리에서는 장승을, 다른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돌무더기와 나무를 함께 위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예전에는 장승이나 솟대와 같은 신상(神像)들이 더러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진 곳이 많아 장승백이‘나 ’장승거리‘라는 땅이름을 통해 유추할 수 있을 정도이다. 화동 신촌 1리 입구에는 한 쌍의 장승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그곳은 흔히 장승백이라 일컬어지는데, ‘장승백이’라는 땅이름이 남아 있었던 덕분에 20여 년 전 지금의 장승을 세우고 동제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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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벌 원흥리 당신 | 견훤 사당 | 대현리 장승 |
3. 고을 신앙의 산실 ‘성황사’와 ‘영암각’
천봉산은 상주시에서 1.5km 떨어진 북쪽 만산동 뒷산으로 상주의 ‘삼악산(三嶽山)’이라고도 일컬어진다.『新增東國輿地勝覽』산천조(山川條)에는 천봉산과 함께 석악산이 나오는데, “州 북쪽 6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악(石嶽)은 천봉산 북쪽의 한 줄기로서 남쪽의 연악산[갑장산], 서쪽의 노악산[노음산]과 더불어 상주의 삼악으로 일컬어져 왔으나, 상주의 진산(鎭山)인 천봉산으로만 알고 있을 뿐 석악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석악산은 이름 그대로 석벽과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천봉산은 석악의 한 가운데 있는 산이다.
아래 고지도는 18 ~ 19세기에 제작된 상주목 관련 지도이다. 여러 형태의 회화식 군현지도에서 상주 읍치를 둘러싼 주변 지역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첫 번째 영남지도는 상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18세기 지도이다.
<18 ~ 19세기 상주목 고지도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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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지도(嶺南地圖) 18C 중반 | 해동지도(海東地圖) 18C 중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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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輿地圖) 18C말 | 지승(地乘) 18C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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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여도(廣與圖) 19C |
예나 지금이나 천봉산은 상주의 진산이자 상주 민속문화의 메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여전히 해마다 음력 4월 8일 초파일이 되면 산신제단, 성황사, 영암각에서 만산 2리 즉 안너추리 노인회에서 준비하는 성황제가 치러지기 때문이다. 상주 성황제는 4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역사의 변천 속에서 지속과 변화의 과정을 겪어 그때그때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며, 지금의 모습으로 재창조된 것이다. 처음부터 고을 신앙과 민간신앙의 면모를 고루 갖추고 있었던 천봉산 성황제의 지속과 변화 과정을 통해 상주 민속문화의 단면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천봉산 성황사의 역사와 신앙형태
조선의 신흥사대부들은 고려 사전(祀典)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와 함께 성황에도 본격적으로 유교예제의 적용을 시도하게 된다. 왕실에서는 군현제의 정비에 따라 조선중기 이후 각 州․府․郡․縣마다 사직단(社稷壇) 및 여단(厲團)과 함께 성황사를 일률적으로 두게 하여 국가에서 임명한 관리나 지방의 수령이 매년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읍치의 성황사는 대부분 읍치와 인접한 주산에 위치한다. 천봉산은 천년에 한 번 봉황이 나타난다 하여 천봉산(天鳳山) 또는 정상에 서면 주변의 천 개의 산봉우리를 볼 수 있다 하여 천봉산(千峰山)이라는 두 가지 지명 유래가 전해질 정도의 큰 산이다.『新增東國輿地勝覽』산천조(山川條)에 천봉산은 “州천 북쪽 7리에 있는데 鎭山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묘조(祠廟條)에는 “성황사(城隍祠) 천봉산(天峯山)에 있다”라는 내용을 통해 천봉산에 이미 성황사가 있었음을 알리고 있다. 이미 조선 중기 이전부터 성황사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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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사 현편 1 | 성황사 현판 2 |
성황사는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우물마루를 깐 민도리 팔작집으로 서향을 하고 있다. 성황사 신위로는 목각된 부부신상 또는 남매신으로 일컬어지는 한 쌍의 목각신이 모셔져 있으며, 건물 전면이 성황사 편액에는 성황사 무신년 오월(1788. 5.)이라 적혀 있다. 성황사의 역사는 1617년(광해군 9년) 창석 이준에 의해 편찬된『商山誌』질사조(秩祀條)에 바위 위의 단으로 소개되어 있어 지금의 당집 형태와 다르다.
“성황사는 천봉산에 있는데 단(壇)은 있지만 사당[廟]은 없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건데 성황신은 한 지역의 온갖 신의 주재자가 되고, 태수는 한 고을 백성들의 주재자가 되니 그 힘이 서로 비슷하다. 지금 사당은 없지만 그 신(성황신)을 안치하는 것을 그 최선으로 여긴다. 결손된 법전에 보니 중국 사람이 지은 시가 성황사당에 걸려 있었으나 지금은 밑에 부쳤다고 하니 무릇 우리나라 사람들이 공경할 곳을 안 것이다. …생략…”
백곡(柏谷) 정곤수(鄭昆壽, 1538~1602)가 상주목사(1577~1578)로 부임하여 사직단을 비롯한 사우를 정비하면서, 매년 춘추의 정일(丁日)을 택하여 문묘(文廟)에 제사를 지냈다. 이때 천봉산에 있던 성황사를 상주 북쪽 계산리(예전의 신계리)에 세웠으나 여러 번의 중수 끝에 지금의 천봉산으로 다시 옮겨오게 되었다.
성황사 안에 모셔진 성황은 부부와 남매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중수기문에 의하면 부부신상이나 마을 사람들은 남매라고 본다. 중수기문에는 성황님으로 모셔진 부부신상(夫婦神像)은 “宋朝 康濟之名”을 모방하고, 성황의 제사내용이 송나라 때부터 있어 온 것을 모방하였다는 간략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남매신의 좌정유래에 관한 두 편의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야기 하나, 천봉산 남매당(男妹堂)
남매당은 천봉산 성황당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옛날에 부모와 아들․딸 네식구를 둔 가정이 화목하게 살고 있었다. 부모는 농사를 업으로 하였지만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효자․효녀로 이름이 났다.
단란했던 가정에 병마가 엄습하여 어머니가 앓아눕게 되었다. 병명도 모르는 병이라 약도 제대로 못쓰고 때가 마침 농번기라 아버지는 일을 나가고 없었던 어느 날이었다. 어린 아이들만 남아 어머니 곁에서 걱정만 하고 있었다. 이런 생활이 거듭되었고, 어머니는 드디어 운명 직전의 고비에 이르게 되었다. 어머니는 숨이 지는 순간까지도 남편과 자식들을 염려하다 운명하고 말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몇 년이 되어 아버지는 새 어머니를 맞았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새 엄마가 달갑진 않았지만 아버지를 생각하여 남매는 아무런 내색없이 새 어머니께도 효성을 다했다. 그런데 이 계모는 콩쥐팥쥐에 나오는 인물형이었으며, 아들도 하나 있었다. 자기 소생과 전처소생에 대한 차별대우는 극심하였지만 남매는 아버지를 생각하여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구박과 모함 등에 시달리다 못해 이들은 또 이대로 가다가는 아버지에게 누가 미칠 것이라 생각하고 집을 나서기로 하였다.
남매는 천봉산에 숨어 살며 칡이며 산나물을 먹고 지냈다. 이런 생활이 몇 해 계속되었으나 어느 혹독히 추운 겨울이었다. 입었던 옷도 헐대로 헐고 영양실조도 극심하여 끝내 얼어 죽고 말았다.(지금의 산신당 자리에서) 나무꾼이 이들 남매를 발견하고 고이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런데 그날 밤 나무꾼의 꿈에 남매가 나타나 쉴 자리를 마련해 주어 고맙다고 사례를 하며,
“저희 소원을 하나만 더 들어 주십시오. 저희는 원통하게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제발 저희 남매의 동상을 만들어 후세의 계모에게 깨우침을 주도록 해 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나무꾼은 남매의 애절한 한을 동리 어른들께 일일이 고하였다. 이에 동민들이 나서서 집을 짓고 남매의 주상을 만들었는데, 재력이 부족해 동상(銅像) 대신 목상(木像)이었고, 이 집은 오늘도 모정을 그리다 죽은 남매(男妹)의 묘(廟)로 남아 있다.(南洑春秋 3호)
이야기 둘
이기 남매상인데 이것이 우예 됐나하만, 이것이 예전에 300년 전에 이걸 해놓은 긴데, 저 두 남매가 여 와서 뭘 하다 이 집이 없을 때, (무엇을) 하다가 자기 오빠가 요요 돌 요래 쌓아놓은데, 저기 가서 오빠가 얼어죽었부랬어, (오빠가) 얼어죽었부래니까 여동생이 가서 자기 체온을 뜨신 걸 뜨뜻하게 해가주고 살릴라고 껴안고 있다가 여동생도 같이 죽어부랬어. 그래니까 남매상을 어디다 했었나 하만 여기다 고마 갖다 모싰는 기라.
남매상을 모신 연유에 대한 두 가지의 좌정담을 통해 신의 내력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예전에는 남매신상 외에 호랑이가 그려진 그림도 성황사 안에 함께 있었다고 이길원 어른은 이야기한다. 또한 내부에는 20년 전까지만 해도 남매신상과 함께 말이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관에서 주재한 성황제와는 달리 민간에서는 남매신으로 표방되는 서낭님을 서낭신앙으로 섬겼을 가능성도 짐작해 볼 수 있다.
2) 읍치 성황제의 지속과 변화
상주 목사가 주관이 되어 행해지던 고을 규모의 성황제는 1908년 7월 23일 칙령 제 50호에 의해 국가 제사로서 명맥이 끊어지고, 향리(鄕吏) 주도로 제사가 이어지게 된다. 상주지역에서 읍치(邑治)를 중심으로 장기간 세거 해 온 향리가문은 상산박씨(商山朴氏), 상주김씨(尙州金氏) 두 가문이다. 상산 박씨는 호장을, 상주 김씨는 이방을 세습해 오면서 향촌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상산 박씨는 약 230여 년에 걸쳐 호장을 세습해 온 까닭에 다른 향리에 비해 비교적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1855년 홍원섭 목사에 의해 성황사가 개축된 이외에는 호장을 중심으로 향리들이 주도적으로 성황사 중수를 이끌게 된다. 1990년 상주시에 의해서 이루어진 중수를 제외하면 모두 다섯 차례의 중수가 있었는데, 이때마다 호장을 계속하던 상산 박씨가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한말 읍치 성황제가 해체되면서 이들의 지위는 물론 성황제도 단절의 위기를 맞는다. 이에 상산 박씨를 중심으로 성황신당을 중수하고 남은 돈으로 등촉계(燈燭契)를 조직하여 매년 음력 4월 초파일 성황제를 지내게 된다.
이는 당시 상주지역 향리들의 영향력을 드러내는 중추적인 조직이었던 안일방과 안일방 구성원들의 집결지였던 무학당의 기능이 일제강점기 초에 중단되면서, 상주목 제도가 없어지는 등 일제에 의한 여러 가지 변화 과정 속에서 성황사 주재 집단이었던 향리들의 지위가 더욱 약화된 상태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등촉계를 결성하게 된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계의 구성과 상관없이 향리들의 주재하에 성황제는 지속되었다.
상산 박씨를 중심으로 한 안일방의 계승으로써 계의 결성은 성황제를 지속할 수 있는 일차적인 발판이 되었다. 다시 그들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양로당을 조직하여 변화된 사회적 환경 속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모색한다. 성황제 제사권이 양로당 조직으로 이양되고, 성황사 관련 위토 또한 이전되면서 성황제가 지속되기에 이른다. 양로당은 그야말로 과거 안일방의 계승이었다. 양로당의 설립을 통해 과거 향촌 사회의 실추된 권위를 되살리고자 했으나, 점차 초기 회원들이 사망하고 양로당의 성격이 변질되면서, 성황제는 지속과 단절을 거듭하게 된다.
1980년대 국가정책으로 다시 성황제를 지내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상산박씨를 중심으로 양로당에서 제사는 맡아 왔으나 성황사 관리는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앞서 몇 차례의 중수를 했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오래된 기와가 내려 앉아 안너추리 노인회장인 김기석 어른이 주도하여, 시의 지원을 받아 1990년 다시 중수했다. 중수를 하고 난 뒤 노인회장의 적극적인 노력과 마을 사람들의 서낭신앙에 대한 믿음이 합쳐진 결과로 1991년 10월 3일 성황사 관리권이 마을노인회로 이양된다. 시내 양로당의 제사를 만산 2리 노인회에서 받아 제사를 지내는 것은 물론 영암각도 함께 관리하고 있다.
안너추리 노인회가 주관이 되어 행해지는 성황제사를 간략히 살펴보면 우선 예전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 음력 4월 초파일 오전 10시쯤이 되면 제사를 지낸다. 성황사 바로 옆의 두 개의 돌탑으로 이뤄진 산신당에 먼저 고한 다음, 성황사, 영암각 순으로 제사는 진행된다. 상주시의 고을제사인 만큼 시의회 관계자들, 시내 양로당 어른들, 북문동사무소 직원들이 함께 참석한다.
세 명의 헌관이 잔을 올리고, 유교식 독축고사 형식으로 진행된다. 초헌관은 시장이나 시장을 대표할 만한 사람이, 아헌관은 상산 박씨 어른이, 종헌관은 안너추리 노인회에서 맡으며, 축관은 따로 정한다. 축문은 “현의 성황님을 모셔 제를 올리니, 풍년이 들게 하고 지역의 안녕과 수호를 담당하는 성황님에게 감사의 예를 갖춘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어, 예나 지금이나 향리들이 성황제를 지내던 당시 이념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 잘 드러난다.
1970년대 이후 안너추리 마을 ‘당산제’가 중단되고, 노인회에서 ‘성황사’ 제사를 맡았던 까닭에 마을의 돌탑은 복원했지만 ‘당산제’는 지내지 않는다. 성황사 축문에는 상주시 전체의 평안을 비는 내용은 물론 만산 2리 마을을 위한 의미도 담겨져 있다. 제사가 끝이 나면 만산 2리 노인회에서 참석한 사람들에게 점심을 대접한다.
2) 성황제의에 포함된 영암각 신앙
영암각 원경 영암각 현판
영암각은 흔히 소원성취를 위해 개인이 치성을 드리는 뜻에서 ‘미륵당’이라고 일컬어진다. 영암각 안의 바위 앞에는 무당들이 치성을 위해 켜 놓은 촛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영암각은 거대한 바위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정면 3칸․측면 2칸의 이익공 팔각집으로 성황사 바로 아래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바위의 동쪽 면에는 ‘목사홍후원섭영세불망비(牧使洪候元燮永世不忘碑)’와 ‘수서기박공만식영세불망비 중수성황(首書記朴公晩植永世不忘碑 重修城隍)’이라는 2개의 불망비문이 새겨져 있다. 영암각에 대한 역사는 알 수 없으나, 1788년 상주 목사 홍원섭의 성황사 중창 불망비가 바위에 새겨져 있어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1990년 10월 성황사를 보수할 때 나온 1935년 송암(松庵) 박만식(朴晩植)이 쓴 중수기문이 영암각에 대한 첫 기록이 나온다.
성황사의 좌측에 큰바위가 있는데, 바위가 엄숙하게 서 있는 것이 마치 신령이 내려오는 듯한데 언제 누각을 세워서 그 바위를 가렸는지 모르겠으나 단지 누각만 있고 현판이 없기 때문에 박송암(만식) 공이 새로 현판(영암각)을 서서 달았다. 영암각의 집과 집터, 그리고 전답 800평은 양로당에 위촉해서 매년 4월 8일에는 등을 밝히고 신에게 기도하니 이것은 큰 행사로 여겼다. (성황사 중수기문(3))
언제 누가 누각을 세워 바위를 가렸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으며 자신이 처음 현판을 달았다는 것만 나와 있다. 영암각을 지은 연유에 관한 이야기에도 상주 목사란 말만 나올 뿐 정확한 이름이 적혀 있지 않다.
또한 중수기문에는 성황사와 영암각을 중심으로 집터와 논밭이 880평으로 이를 양로당에서 위촉하여 4월 초파일에 등을 달고 기도했으며, 이때 행사가 성황을 이루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자료를 통해 4월 초파일에 제를 지낸 전통이 오래 전부터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영암각과 관련하여 천봉산 미륵당이란 제목의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어 주목된다.
천봉산 미륵당
천봉산의 산신당(山神堂) 옆에 미륵당이 있다. 옛날 어떤 목사가 상주에 와서 지방 순시를 나갈 때 북쪽 길(점촌에서 상주읍 쪽)로 가면 귀신의 해를 입어 죽게 되고 남쪽 길(내서면에서 상주읍쪽)로 가면 아무런 해도 없었다. 어느 목사도 상주에 부임하여 북쪽 순시를 계획하고 있던 밤(초저녁)이었다. 꿈속에 큰 바위 한 채가 흔들거리며 나타나 애원을 하는 것이었다.
“원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비록 하찮은 돌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제 소원을 들어주시면 북쪽의 악귀(惡鬼)도 제거하고 이 고을이 평화롭게 살도록 도와 드리겠습니다.”
몹시 애절하게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바위는 뒤뚱거리며 사라졌다. 목사는 기이하게 생각하고 잠을 청했는데, 밤중에 아까의 바위가 나타나서 아까처럼 애소하며,
“제발 비바람이라도 피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목사의 눈에는 바위의 형상이 완연히 남아 있었다.
날이 밝자 목사는 사람을 놓아 꿈에 본 형상의 바위를 찾았는데, 천봉산에서 발견하였다. 목사는 기이한 일이라 생각하고 꿈꾼 사실을 마을의 유지들에게 이야기하였다. 마을 사람들도 기이한 일이라고 여기어 바위를 감쌀 집을 짓자는 의논은 쉽게 성사되었다. 그날 밤에 또 바위가 나타나 고맙다고 인사했다.
바위의 비바람을 막을 집을 짓기 시작한지 2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그날 밤에도 바위가 나타나서,
“목사님,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이 고을은 악귀가 없는 평화로운 고을이 될 것입니다.”
고 하며 백배사례하고 사라졌다. 과연 이후로 상주는 나쁜 변괴가 나지 않았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사람들도 다 미륵의 음덕이라 믿게 되었고, 그 후로는 이 바위 있는 곳을 미륵당이라 숭배하게 되었다.(南洑春秋 3호)
마을에서 성황사의 제사를 맡으면서 지금도 4월 초파일날 영암각 제사를 함께 지내고 있다. 성황사 제사를 지낸 다음 영암각 앞에 상을 차려 놓고, 별도로 준비한 제물로 제사를 지낸다. 바위가 있는 곳을 ‘미륵당’으로 부르는 것이나 4월 초파일 제사 지내는 전통은 관련이 있는 듯하다.
현재 영암각 내부에는 무당들이 가져다 놓은 불상들이 있다. 물론 성황사와 영암각 주위의 바위 곳곳에 무당들이 다녀간 흔적이 있다. 다른 곳에서 신이 잘 내리지 않는 무당들도 이곳에 오면 바로 신이 내린다는 말이 전하고 있어 무당들의 발걸음이 유난히 많은 곳이다. 마을에서는 관리사무소를 마련해 놓고 성황사와 영암각은 물론 주위 시설을 이용하는 일정한 금액을 받아 관리비로 충당하고 있다.
3) 성황사와 영암각 관련 이야기
다음 소개될 몇 편의 이야기는『尙州地名由來總攬』에 기록된 것과 2005년 지표조사 당시 안너추리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수집한 것들이다. 성황사와 영암각이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몇 해 전부터 관련 제사를 맡아 오고 있는 마을인 만큼 이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1) 신(神)이 잘 내리는 영험한 천봉산
근데 여기 천봉산 여기 오는 무속인들은 딴 데 가서 신을 못 받으면 여 오면 대번 받아 가여, 그러니까 전국에서 전체가 다 여기 와여. 그러이. 오늘도 점촌서 왔다가고 울산서도 왔다가고, 아침에 오전에 일찍 왔다 갔어요.
-조사일: 2005년 4월 1일, 제보자: 이길원(남, 67세)
(2) 잃어버린 성황사의 탱화와 목침
그래가지고 이래 여 남매상을 했었는데, 그때는 탱화를, 저거는 300년 전부터 있었었고, (탱화는) 저 붙이 놨었는데 그걸 누가 훔쳐 가이(가져) 갔고, 여기 나무로 해가지고 목침 긑이(같이) 해서 호랑이를, 속을 파내고 호랑이를 만들어 놨는데 그때 우리 어릴 때 여와서 그걸 비고 놀기도 하고 이랬었는데 그거를 누가 골동품으로 갖다 가지 갔는데, 그걸 누가, 누가 갖다 팔아 먹었는 거 알긴 아는데 확실히 못 잡았어.
-조사일: 2005년 4월 1일, 제보자: 이길원(남, 67세)
(3) 매년 남매상의 옷을 갈아입히는 무속인들
그거는 무속인들만 갈아입히지 우리들은 아무래도 손을 못 데여. [조: 옷도 갈아 입혀요?] 갈아입히지. [조: 얼마나 자주 갈아입히나요?] 일 년에 한 번씩 입히지. 제 지낼 때가 아니고, 금년 봄에는 제주도 있는 선님이 와서 갈아 입혔어. [조: 옷은 똑같은 걸로 매번 갈아입히는 거예요?] (자기들이) 다시 (옷을) 뜯어와여.
[조: 옷이 옛날 그대로예요?] 그렇지. 똑같은 것에 색깔로 해가지고, 그래 놓으이. 지금 저 안에, 앞에 가슴이 이래 티 나왔잖아. 이래 저기 옷을 그 위에다 겹쳐 자꾸 입히니까 그러이 이렇게 겹쳐서 입히지, 앞에 자꾸 이래이래 놓으니까 앞이 나오잖아. 겹쳐서 입히지. [조: 옆에도 옷이 있는데요?] 옆에 꺼는 입힐라 카는 거 못 입히그러 했어, 올해 갈아 입힜다고, 저저 저건 무속인들 저거는 옳은 사람들도 아니고, 이래가지고 못 하그르 했어.
-조사일: 2005년 4월 1일, 제보자: 이길원(남, 67세)
(4) 눈 감고도 서낭님 옷을 입혔던 장님
(장샘을 찾아 가던 길에 있는 묘를 가리키며) (성황사를) 젤 처음 관리하던 분이 이 분이라. 그분이 장님인데, 장님인데. [조: 언제 돌아가셨어요?] 벌써 돌아가셨지 하매, 장님인데 이 분은 눈을 감아도 서낭님 옷 갈아입히는 거는 아주 잘 갈아 입히여 고마, 젤 첨에 관리하던 분인데.
-조사일: 2005년 4월 1일, 제보자: 이길원(남, 67세)
(5) 성황사에서 백일기도 끝에 얻은 아들
여 문경, 그분이 한 십년 넘었을끼라, 아들을 못 낳아가지고 문경 탄광하는 분인데, 아들을 못 낳아가지고 무속인을 데리고 여 와가이고 석달 열흘 백일동안 기도를 드리는데, 성황사 와가지고 석달 열흘 동안 기도를 드맀는데 고 기도 끝나고 나서 인제 임신이 되가지고 놓으니까 아들이라.
-조사일: 2005년 4월 1일, 제보자: 이길원(남, 67세)
(6) 아들 낳은 공으로 매년 갖다 주는 돼지
그 아들이 지금 대학 다니는 데 그분이 일년에 한 번씩 여와서 돼지 한 150근짜리 하나 고맙다고 기증하고 가고 이래. 매년 그래가지고 고맙다고 자기 손을 잇아줬다고 이래민성, 이래 여 찾아오고 이래지. 여 참 마을은 이래 촌이고 거슥하지만, 쫌 이래 저쪽 마을은 안 되고, 이쪽 마을은 남산 3구도 안 되고 요 만산 2구 요것만 거슥해가지고 (잘 돼.)
-조사일: 2005년 4월 1일, 제보자: 이길원(남, 67세)
(7) 바위 집을 지어준 덕에 평안해진 상주
상주에 부임하는 목사가 북행을 하면 자주 해를 입었고, 불상사도 잦았다. 어느 날 상주로 부임한 목사가 북쪽 순시계획을 하고 있던 초저녁 깜짝 잠든 사이에 꿈 소에 큰 바위 한 채가 흔들거리며 나타나 애원을 하는 것이었다.
“원님! 저를 도와주시시오. 비록 하찮은 돌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제 소원을 들어 주시면 북쪽의 악령도 제거하고 이 고을이 평화롭게 살도록 도와 드리겠습니다.”
몹시도 애절하였다. 그러더니 바위가 뒤뚱거리며 살아졌다. 목사는 기이하게 생각하고 잠을 청했는데 밤중에 아까 바위가 또 다시 나타나서 전처럼 애원하며,
“제발 비바람이라도 피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목사의 눈에는 바위의 형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날이 밝자, 목사는 사람을 시켜 꿈에 본 형상의 바위를 찾았는데 천봉산에서 발견하였다. 목사는 기이한 일이라 생각하고 꿈을 꾼 사실을 상주의 유지들에게 이야기하였다. 상주의 유지들도 기이한 일이라고 여기어 바위를 감쌀 집을 짓자는 의논이 쉽게 성사되었다. 그 날 밤에 또 바위가 나타나더니 고맙다고 인사했다. 바위의 비바람을 막을 집을 짓기 시작한지 2개월 만에 건물이 완성되었다. 그 날 밤에도 바위가 나타나서,
“목사님!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이 고을은 악귀가 없는 평화로운 고을이 될 것입니다.”
고 하며, 백배사례하고 사라졌다. 과연 이후로 상주는 나쁜 변괴가 나지 않았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사람들도 모두 미륵의 음덕이라 믿게 되었다. 그 후로 이 바위가 있는 곳을 ‘미륵당’이라고 일컫게 되었고, 건물을 영암각이라 한다.
-尙州文化院,『尙州地名總攬』, 2002, 185쪽.
(8) 원님의 꿈에 바위가 나타나 만든 영암각
그게 정식으로 어떻게 돼서 했냐하면 옛날 원님, 원님한테 선몽을 하기를, 이래 바위 영암각 카는 걸 건축을 지서 입힐 때는,
“그냥 노축에 방치해 굴리면 이 바위가 굴러서 상주 거 일원을 모두 덮치겠다.” 이런 (내용으로) 원님한테다가 선몽을 했어요. [조: 아, 성황님이 꿈에 현몽을 했구나!] (현몽을) 하니께, (원님이) 육방관속을 모시고 와서 꿈 꿘 데로 (여기에) 와보이께 사실로 큰 바위가 있고, 위에 성황사가 있고 이랬거든. 그리 집을 짓지, 집을 짓다 이래 보이께네.
옛날에 원님들이 부했다가 갈 적에는 반드시 (바위에다) 인사하고 가고, 이렇게 또 섬기고 해왔어요. 근데 저것이 그 후에 오면서 방치해가주 참 여 오래 됐어. 이런 게 자료를 보면 알지만, 그래서 인제 육방관속을 데리고 와서 선몽을 한데로 보니께 과연 참말로 큰 바위가 있거든.
그래서 인제 그 기와집을 짓고 해서 ‘영암각’이라고 해놓고 있고, (성황사) 아래에, 웃체에 안 가봤제? [조: 예, 안 가봤어요.] 가만(가면) 서낭님을 모싰어, 서낭님을 모시고 있어, 그 밑에 큰 바위를 해서 인제 집을 지 놓고 있어.
-조사일: 2005년 4월 1일, 제보자: 김기석(남, 90세)
(9) 바위에 옷을 입혀 준 상주 고을 원님
이것이 예전 상주 고을 원님이 여 딱 처음 부임해가지고 여 오시가지고 자기 집에서 탁 잠을 자는데 바위가 꿈에서 선몽을 뵈드래여,
“내가 이 저 겨울에 떨고 있으니까 내 옷을 입히다오.”
그르이 그 이튿날 원님이 (여기에) 올러오시보니까 바위만 거뜰히 있더래여. 그거를, 이 나무는 어디 있었노? 하만, 계산 아리랑고개 계산 있는 거 집이 있었는데 거서 뜯어가주고 여와서 다시 이걸 조립해가이고 지어 놓은 거래.
이 돌은 원래 여 있었고, [조: 그럼 이거는 계산에서 무엇으로 쓰이던 건가요?] 그냥 집을 지어놨던 긴데, 그래가이고 여기서 지금보만, 이런데 다 미었잖아, 뜯어가이와가지고, 다 미었잖아 이런데, 그래가지고 여와가 다시 짓고 맞춰가 놓고, 그러니까 이기 여기서 했는 것이야.
-조사일: 2005년 4월 1일, 제보자: 이길원(남, 67세)
(10) 계산에서 집을 뜯어와 조립한 영암각
계산? 거 있는 집을 이걸 뜯어가이(뜯어서) 왔다니까. 요 집을 뜯어오고 요거는 원래 시웠고(세웠고), 계산 있는 걸 이걸 뜯어왔고, 집만, 요걸 뜯어오고, 요건 원래 시왔고, [조: 바위에 씌울려고 집을 뜯어왔습니까?] 그렇지.
고을 원님이 상주에 고을원님이 부임해가와가 그날 저녁에 꿈에 선몽을 뵈가지고 와보니까 바위만 오똘하게 있으니까 그이 계산 가서 이 집을 뜯어가이고 와서 다시조립을 씨긴 거지. 그래가 요고하고 같이 저걸하고, 그리고 요집은 쇠곳 하나 안 들어가고 전체 나무못이라, 요거는. 쇠곳 하나 안 드갔어.
-조사일: 2005년 4월 1일, 제보자: 이길원(남, 67세)
(11) 칡넝쿨이 들어간 영암각 충량
옆에 저 해놓은 양쪽에 있는 것이 뒷산에 ‘칡넝쿨’이래여. 칡넝쿨인데, 왜 여 상주에 만산 2동을 넌출 ‘만(蔓)’자를 쓰나하만, 칡넝쿨이 많았다 해가지고 여 인제 넌출 ‘만(蔓)’자를 쓰는데 이기 칡넝쿨이라 카는 데, 양쪽에 댔는 이거를, 저거를 딱 붙이지를 안했기 때문에 아직도 안 붙이고 저기가 떴어. 양쪽에 떠 가있고 요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야).
-조사일: 2005년 4월 1일, 제보자: 이길원(남, 67세)
(12) 성황사보다 뒤에 지은 영암각
고을 원님이 저거 위에 성황사 저거는 첨에 지을 때 대번 집을 짓고, 이 돌은 돌 여 있는 걸, 여 고을원님이 여 부임해가 오셔가지고 자기 꿈에 선몽을 뵈니까 이거는 나중에 인제, 집을 나중에 (지었어). 저거는 이 집 보다가 먼저 들어섰는 것이지,
-조사일: 2005년 4월 1일, 제보자: 이길원(남, 67세)
4. 안너추리의 삶과 문화 간략히 엿보기
안너추리 마을 앞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으며, 뒤로는 ‘천봉산’이 자리잡고 있다. 시내와 가까운데도 ‘안너추리’에는 당산제, 성황사, 남근석, 용제 등의 다양한 민속문화가 지금도 전승되고 있거나 예전의 흔적이 생생히 남아 있어 주목된다. 안너추리 마을의 모둠살이를 비롯한 생활살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모듬살이의 이모저모
만산동은 1, 2, 3리로 나누어지며, 개무덤이, 너추리, 들마, 바깥너추리, 산태골, 안너추리, 영빈관, 자산의 7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도시개발 해당 지역은 만산 2리의 안너추리, 들마, 영빈관이며, 5개 반으로 나누어진다.
마을의 터를 잡은 입향조에 관한 이야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성황사나 영암각 관련 자료와 마을 앞 ‘당산’ 동신목의 수령을 통해서 마을의 역사가 약 300년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여러 성씨들이 함께 살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김해 김씨가 많은 편이다.
이길원(남, 67세) 어른이 이장을 맡고 있었던 당시인 1975년까지만 하더라도 118 가구에 400여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인구가 반 이상으로 줄어 70 가구에 120명 정도가 살고 있다.
마을의 이장과 반장, 새마을지도자 등이 중심이 되는 대동회를 비롯하여 노인회, 청년회, 상여계, 친목계 등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청년회는 35세 이상 60대 미만의 사람들로 구성되며, 현재 23명의 회원이 가입되어 있다. 마을에 머물면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많아 계의 운영이 잘 되는 편이다. 마을일에 매우 활발했던 부녀회는 회원들 간에 문제가 생기면서 5년 전에 없어졌다.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했던 상여계는 마을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이 외에 마을 단위의 동갑계를 비롯하여 다른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만든 여러 종류의 친목계가 있다. 이 가운데 5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상여계와, ‘성황사’를 중심으로 지금도 활발히 운영되고 있는 노인회가 특히 주목된다.
이길원 어른이 열여섯 살 때 비슷한 또래끼리 모은 상여계가 지금껏 운영되고 있다. 처음 22명의 계원으로 시작하여 고인이 되거나 다른 곳으로 간 사람들을 제외하면 지금은 13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계를 태워 주고 한 사람만 남아 있다. 매년 12월 25일 원유사의 집에서 한해를 결산하는 정기 모임을 갖고 한바탕 먹고 논다.
상여계는 원유사와 발유사, 일반 계원으로 구성된다. 초상이 나면 원유사가 제일 처음 소식을 접하여 발유사에게 알린다. 실질적인 일을 맡아서 하는 발유사가 나머지 계원들에게 알리면, 계원들은 집집마다 ‘부고’를 전달한다.
초상이 나면 계원들은 이튿날부터 2일 동안 상가에 머물면서 온갖 일을 돕는다. 집안에 아이가 태어나거나 환자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이틀 동안 참석을 못하는 사람들은 그만큼의 궐전을 낸다. 상가에 갈 때는 자신이 이틀 동안 먹을 쌀 서 되와 상가의 불을 밝힐 초롱을 준비한다. 쌀을 모으는 전통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쌀을 모아 만든 자금과 상가에서 조금씩 받은 돈이 꽤 두둑한 편이다.
계원의 부인들이나 부녀회에서 상가의 음식 장만을 거드는 일을 하고, 계원들은 상여를 메고 장지까지 운구한다. 이 밖에 출상 전날 상가를 한바탕 떠들썩하게 만드는 ‘대디듬(대돋움)’이 있어, 안너추리 마을의 민속문화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거는 낼 출상인 거 같으면 오늘 저녁에 인제 ‘대디듬’이라 해가지고, 상주들이 다 모인데서 거기서 인제 장난을 치지. [조: 장난을 어떻게 쳐요?] 인제 상여 소리를 하민성, 그래 인제 큰 아들, 둘째 아들, 셋째 아들, 전부다 절을 하라 하고. 며느리들 절하라 카고 나서, 그 문갑들은, 사위나 머 이래 되는 사람들은 자꾸 살살 빠지거든. 빠져나가니까 그 사람들 호주머니에 돈을 뺏기 위해서 막 장난치는데 디리고 온단 말이라. 그래 절하라 캐가지고 돈 내노라 이래 가이고, 인제 상제 지내는데 보테 주고. 그래고 인제 계원간이래도, 마을에서 계원간이래도 상례에 돈 걸리는 거는 계원들 고날 일하고 난 후에 목욕비, 고 인원수에 한 해가지고 목욕비만 딱 제하고 전체 상제 집으로 다 디리 넣어주고. (-2005년 4월 1일, 제보자: 이길원(남, 67세))
위의 자료는 내용이 매우 간략하여 당시의 자세한 상황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상가에서 출상 전날 하는 ‘빈상여놀이’는 전국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상주들의 주머니를 털면서 놀이를 통해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상가의 분위기를 전환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안너추리의 ‘대디듬(대돋움)’은 이미 단절된 지 오래이다.
계를 모았던 초기에는 열 두 명이 나무 상여를 메었다. 지금은 무거운 나무 상여를 쇠파이프 틀로 바꾸어 열 명이 멘다. 예전부터 마을에 곳집이 없었던 탓에 이웃 마을의 ‘아리랑고개’에서 빌려왔는데, 한 번 쓸 때마다 2, 3만원의 값을 치른다.
지금은 대부분 병원에서 장례를 치르고, 장의사에게 모두 맡기거나 화장하는 경우가 많아 상여를 멜 일도 잘 없다. 상여틀이 없는 마을이 점점 많아짐에 따라 장의사들도 장사를 위해 으레 상여틀을 갖추어 놓기 일쑤이다.
노령화가 진행되면서 노인들의 인구가 늘어난 반면 역할이나 지위는 상대적으로 미약해진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안너추리 노인회’는 다른 마을과 사뭇 다르다. 65세 이상의 어른들로 구성되며, 53명의 회원이 가입되어 있다.
노인회관 앞에는 ‘성황사 관리사무소’라는 현판이 붙어져 있다. 20년 전부터 성황사와 영암각을 관리하면서 노인회의 역할이 두드러진 것이다. 상주시의 고을 성황을 모신 성황사와 바위를 모신 영암각에는 전국 각지의 무당들이 하루를 멀다하고 찾아온다. 그곳을 찾는 무당들이 청소비 명목으로 내 놓는 돈을 꼬박꼬박 저축하여 노인회의 자금이 아주 많다.
노인회의 자금으로 성황사 제사를 지내는 것은 물론 계원들끼리 봄, 가을로 일년에 두 번씩 관광을 간다. 노인회의 역할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장학사업이다. 1991년부터 지금까지 4년제 대학에 다니는 마을 출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왔다. 장학금은 한 사람 당 10만원씩 주며, 2004년 한해에 받은 학생만 하더라도 22명이 된다.
2) 안너추리 사람들의 한해살이
마을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을 앞으로 펼쳐진 들과 성황사 아래 골짜기의 논밭을 일구며 살고 있다. 마을 안의 성황사로 올라가는 천봉산 아래에 밭이 있으며, 나머지는 대부분 논이다. 1960~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산을 밭으로 일구어 뽕나무를 심어 누에농사를 짓거나 과수원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과수원으로 이용하던 밭을 1970년대 후반 다시 논으로 바꾼 곳이 많다.
도시개발 예정지 역시 넓은 논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논을 이용한 벼농사가 주를 이루고, 밭농사는 집에서 먹을 만큼만 짓는다. 다른 지역에서는 대표적인 밭농사로 고추농사를 손꼽는데 비해 여기서는 주로 메주를 만드는 ‘대두’를 재배한다. 마을 안의 계단식 밭을 이용하여 감나무와 청도복숭아 묘목을 심어 과수 농사를 시작하는 모습이 곳곳에 보인다.
농업 관련 세시 의례로 보편적이고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용제’와 ‘풋구’이다. 모심기가 끝나고 벼가 자랄 무렵인 음력 6월 유두날 밤이 되면 참외, 수박 등의 과일과 국수를 장만하여 ‘용제’를 지낸다. 다른 논과 달리 항상 물이 마르지 않는 ‘양반구렁들’의 ‘용지뱀이’에는 용제를 지낸 바위가 지금도 남아 있다. 김기석 어른은 “용제를 지내면 좋다고”하여
오랫동안 지내왔다고 이야기한다.
제물로는 꼭 국수를 쓰는데 길이가 긴 국수처럼 곡식이 잘 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용지뱀이’의 주인인 김기석 어른이 손수 농사를 짓던 1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바위 위에 제물을 올려놓고, 혼자 또는 아들과 함께 제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은 묵은 논에 작은 바위 하나만 남아 있지만 예전에는 바위의 크기가 컸을 뿐만 아니라 찔레나무 등 몇 그루의 나무도 있었다고 한다.
옛날 농사를 짓는다는 집에서는 으레 한 두 명의 일꾼을 두기 마련이었다. 일꾼들은 1년을 단위로 주인집과 계약을 맺는다. 보통 농사가 없는 음력 정월 보름까지 한가하게 지내다가 2월이 되면 농사일을 조금씩 시작한다. 모심기를 하고, 모가 점점 자라 두벌 논매기가 끝날 쯤인 음력 7월 15일이 되면 ‘머슴 놀리는 날’을 한다.
주인집에서는 일꾼에게 돈을 주고,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소나무가 우거진 그늘에서 잔치를 벌려 하루 동안 놀린다. ‘머슴 놀리는 날’은 머슴을 위한 날인 동시에 고된 농사일에 지친 마을 사람들이 목을 축이는 잔치날이기도 하다. 그날만큼은 온갖 음식을 장만하여 한바탕 먹고 논다.
농사일이 어느 정도 끝난 음력 10월 15일쯤 초가집 지붕의 이엉을 다 엮고 나면 주인집과 일년 계약이 끝난다. 다시 계약을 할 수도 있지만 일단 세경을 받아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며칠 동안 쉬었다가 겨울이 오기 전에 다시 계약을 맺어 겨우내 땔감 준비 등 농사 준비를 조금씩 한다. 일꾼이 없어지면서 ‘머슴 놀리는 날’ 역시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5. 안너추리 지킴이 당산(堂山)과 당산제
1) 당산제의 지속과 단절
‘안너추리’ 마을을 들어서면 돌탑과 동신목이 서 있는 당산과 만난다. 이곳은 마을 제사를 지내는 곳인 동시에 마을의 허함을 막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에 불이 잘 났던 까닭에 돌탑 주변으로 두 개의 바위에 불 ‘화(火)’자를 새겨 넣고, 다시 두 개의 물 ‘수(水)’ 자를 새겨 이를 막았던 조상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지금은 불 ‘화(火)’자 하나만 남아 있다.
마을의 제당은 모두 세 곳이다. 성황사 천봉산 중턱에 위치한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천지당’, 마을 입구의 ‘돌탑’과 ‘동신목’, 당산 위의 마을길 가운데에 있는 ‘느티나무’가 그것이다. 27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두 느티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시멘트로 마을길을 포장하면서 두 번째 동신목은 새카맣게 죽어가고 있다.
음력 정월 초가 되면 마을 사람들은 ‘당산제’ 또는 ‘동고사’ 준비에 들어간다. 매년 섣달그믐 즈음에 임시 대동회를 열어 깨끗한 사람을 제주로 선정하고, 정월 초사흗날 마을 입구를 비롯한 돌탑과 동신목 앞에 금줄을 친다. ‘제주’는 선정되고부터 제사를 지내기 전까지 매일 목욕재계를 하고, 15일간 바깥출입을 자제함은 물론 다른 사람과 되도록이면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다음 마을의 샘을 깨끗이 쳐, 정화된 물을 떠다 제물을 장만한다.
마을에서 샘은 으레 ‘장샘’을 일컫는다. 물론 영암각 아래에도 샘은 있다. 장샘은 영암각 바로 아래에 있는 샘으로 사시사철 물이 끊이질 않고 나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정월 열 나흗날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 동제를 지냈던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그곳의 물을 받아 제물을 장만하고 목욕재계를 했다. 이후 샘 안의 물은 식수로, 밖으로 흐르는 물은 빨래를 하는 데 사용하였으나, 마을에 수도관이 들어오면서 그곳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예전에는 네 마지기의 동답에서 나오는 돈으로 당산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제물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마을의 동답을 팔아 장만한 기금으로 전기를 넣고부터는 다른 지역에 나가 있던 자식들이 고향을 찾아 올 때 마다 조금씩 찬조하는 돈을 모아놨다가 제물비용으로 사용하였다. 정월 열 나흗날 자시(子時)가 되면 천지당 → 당산 → 당신목 순으로 당산제를 지낸다.
먼저 제물을 지고 ‘천지당’에 올라가 불을 피우고, 넓은 돌에 받침돌을 얹어 놓은 고인돌 형태의 제단에 메, 탕, 포, 술, 밤, 대추, 곶감, 콩고물을 얹은 시루떡 등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낸다. 마을 동신에게 제를 지내기 전에 ‘천봉산’ 산신에게 먼저 ‘안너추리’의 한 해 농사의 풍흉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고하는 것이다.
천지당의 제사가 끝이 나면 마을로 내려와 돌탑 앞의 제단 위에 제물을 차려 놓고 ‘당산제’를 지낸다. 당산제의 제물 역시 산신에게 올렸던 제물과 같이 특별한 것은 없다. 그런 다음 두 번째 ‘당신목’인 ‘느티나무’에 술을 한 잔 붓는다. 제주가 대표로 마을 사람들의 한 해 평안을 비는 소지를 올리는 것으로 제사는 끝이 난다.
새마을사업이 한창 벌어지던 1970년대 초반, 시청에서 그 자리에 놀이터를 만든다고 하였다. 마을 가운데에 놀이터가 생기면 좋을 듯싶어 선뜻 시청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나쁜 일이 생길 것을 염려하여 돌탑을 전혀 건들지 않았다. 시청에서 돌탑을 없애고 난 다음 아니나 다를까 아무런 이유 없이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많이 죽는 등 나쁜 일이 생겼다.
결국 마을 사람들이 의견을 모아 1997년 돌탑을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대부분 원래의 모습을 찾았지만 물 ‘수(水)’자가 새겨진 바위는 잃어버렸다. 돌탑을 없애버린 1970년 초부터 마을 당산제는 없어졌다. 느티나무가 만들어내는 그늘은 농사일에 지친 사람들의 쉼터와 아이들의 놀이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마을의 공동체 제의는 이미 오래전에 단절되었지만 돌탑을 섬기는 신앙을 둘러싼 다양한 영험담들이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2) 당산제와 영험담 관련 이야기
(1) 돌탑을 옮기고 생긴 부정한 일
돌탑 그건 옛날부터 돌탑 (제사를) 했고, 저 보름날 정월 보름날 제를 지내거든. 제를 지내왔는데, 그 뒤에 상주 시청에서 와가지고,
“없애자.”
이기라, 하이께, 우리는 거 손을 전혀 못 데거든, 나무 하나라도 때지도 않고 부정탄다고 해왔는데, (상주시에서),
“이것만 치워주면 석축 다 쌓아주고 놀이터 한 데 다가 석축 쌓아주고 한다.”
고 해 여. 마을에 회의에다 부쳤지, 그래가 (돌탑을) 하는데 우리는 손 하나도 못 데고 시청에서 해서 완전하게 옮깄다 말이라.
그러고 난 다음에 뭔가 부정한 일이 생겨, 그래서 새로 갖다가 복원했잖아. [조: 원래 그 자리로 옮겼어요?] 응. [조: 원래 어디 있었습니까?] (지금) 고 고대로 꼭 고 모습으로 해서 (있었어.)
[조: 그 자리에 있던 것을 시청에서 마을 어디로 옮긴 거예요?] 아이지(아니지). 거 가주 갔지. (완전히) 없앴지, 근데 그 후에 (다시) 갖다 (놨어.) 여기 돌이 많거든. 고대로 새로 했어. [조: 없앤 기간이 얼마정도 됐어요?] 없애준 기 그기 기억이 잘 안나지만 1971년도 일께라 그때 한창 새마을 사업한다고 벅석거릴 때 (그때야.)
-조사일: 2005년 4월 1일, 제보자: 김기석(남, 90세)
(2) 돌탑을 없앤 후에 죽어나간 젊은 사람들
그래, 돌탑을 가져갔지. 새마을 사업할 때. [조: 새마을 사업할 때 이제 하지 마라 그래가지고.] 아니, 하지마라고 했는 게 아니고, 여 돌이. 돌을 쓸데가 있으니까 돌을 가져갔는데, 다시 우리가 이거를 없애고 나니까,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40대만 넘으면 다 죽었어, 그때. 많이 죽었지, 다 죽었지.
내 친구가 마을에 12명이 있었는데, 다 죽고 지금 내 혼자밖에 안 살았어. 지금. 싹다 죽었어. 내 67인데, 그 내 친구들이 12명 있었는데, 싹 다 죽었어. 지금 내 혼자밖에 안 남았거든. 그러고 작년 시월 이일날 (친구) 한 사람 있든 기, 그거는 돈은 있어도 돈 쓸 줄 몰라가지고 결혼도 안 했었거든.
작년도에 고마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고, 기냥 고마 거 (내가) 돼지 실으러 간다고 (우사에) 들어가니까 죽어가 있어가지고, 형사들 부르고, 검증 해가지고 병원에 안치시키고 화장했다. 그래가지고 내 혼자 남았다. 그래 나도 언제 갈 줄 모른다. 허허허.
-조사일: 2005년 4월 1일, 제보자: 이길원(남, 67세)
(3) ‘당산’ 뒤로 절대 못 지나가는 상여
그래가지고 마을 뒤로는 암만 우(위)에 (묘가) 있는 분이라도 고 뒤로는 상여가 못 나가지. 마을 뒤로는 못 나 가고. 암만 위에 있어도 여 와야 되는데, 여 동수나무 이짝 밑으로 상여가 못 와여. 이짝으로는 못 오고 이 짝 갓길로 요래 해 가주 와서 여서 노제 지내고. 이짜로 오면 안 돼요.
[조: 왜 안 돼요?] 이 짜로 오면 또 사람이 하나 죽어요. 글쎄. 그래가지고 이 갓길을 하나 만들어 놨잖아. 저 우에서, 저 죽은 나무 있는데서 요짝 길로, 좌측으로 이래 나오거든. 요 동수나무 이짝은 안 되잖아. [조: 일로 오면 안 되고.] 안 되지. 이리 나와가 여 나와가지고 저 뒤에 산소를, 우리가 저 성황사 있을 때 거서 묫자리를 거 있드라도 이리 나와가지고 여서 돌아가지고, 못둑으로 돌아가지고 저 산 중허리로 돌아가지고 올라가야 되여. 바로 뒤로, 거 가깝다고 해도 바로 뒤로는 못 가여. 안 되여.
-조사일: 2005년 4월 1일, 제보자: 이길원(남, 67세)
(4) 상여를 메고 당산 앞으로는 절대 못가는 타지 사람
그러고 딴 데서 (묘를 쓰러) 오는 분들은 이 마을로 못 들어오고, 타지에서 자기들 땅 여 있어가지고 묘를 여 쓴다 그러면은 본동 동민이 아닌 분은 여서 우회도로를 해가지고 저 산을 비켜 가야 되요. 양쪽으로. 여 절대 못 올라가지. 마을에 있는 분들도 뒤로 못 올라가기 때문에.
그래가지고 여 저 포항 있는 분이 자기 모친이 돌아가셔가지고 성황사 뒤에 거 산소를 썼는데, 글 때 영구차로 해가지고 저쪽에, 우회도로 저쪽에서 내려가지고 상여를 들고 올라갔는데, 그러면 하여튼 빙빙 돌아야 되지 뭐. 빙빙 돌아야 되요. 산으로 돌아야 되요.
-조사일: 2005년 4월 1일, 제보자: 이길원(남, 67세)
(5) 목욕재계를 안 하고 ‘장샘’을 쳐 바로 죽은 어른
그러니 우리가 그르이 이거를 무시하면 안 되여, 그래 요 밑에 가만 ‘장샘’이라 카는 샘이 있는데 그때 저저 아주 겨울에 가만 김이 나면서 물이 뜨시여, 그리 동민들이 수도가 안 들어 왔을 때는 여와서 빨래를 하고, 여름에 가만 한 바가지 목욕을 할 때 덮어쓰지를 못했어, 차와가. 사시사철 나오고 물이, 그래 나오는데.
그때는 우리 여 무당들이 그케 안 왔을 때는 동네서 여기 저저 ‘동고사’ 정월 초사흗날부터 열 나흗날까지 ‘동고사’를 자시는데 깨끗한 분들 상재 아닌 분들 이런 분들이 여와서 청소를 하고, 샘을 청소를 하고 하는데, 마을 노인 한 분을 청소를 씨깄는데, 이 분은 목욕재개를 안하고 그냥 청소를 해가지고 집에 가자마자 돌아가셨어, 막바로. 고거를 인제 당산제 지낼 때는 여 물로 해가 밥을 지내고 이래거든.
-조사일: 2005년 4월 1일, 제보자: 이길원(남, 67세)
(6) ‘장샘’을 막고 갑자기 아팠던 아들
그런데 그거를 내가 1975년도에 이장 보면서 간이 상수도를 그때 여 읍사무소로 있을 때, 내가 이장 보면서 있을 때 읍장님한테 이야기를 해가지고 간이 상수도를 만들랬는데, 그거를(장샘) 공구리를 해가지고 폭 덮었단 말이래, 그르이 우리 아들이 숨을 못 쉬, 둘째 아들이 밤 12시만 되만 숨을 못 쉬고, 그래만 병원 데꼬 가서 주사 맞히고, 그래가이고 초등학교 댕길 때 휴학계를 내고, 일년 휴학계를 내고, 금시(금방) 죽는 긑애요.
막, 그래가이고 온데 다 돌아댕기도 안되는데 선산 가지고 ‘귀신점쟁이’라 하는데 가서 우리 집에 할마이가 딱 거 대문에 들어서니까,
“하이고! 아는 죽을라 카는 데 인제 찾아온다.”
카민서 이러드래여. 이얘기도 안했는데 대문에 딱 들어서니까 그러더래여, 그래 카미 여 와서 우째우째하고, 우리 부엌 뒤에 흄 요런 걸 박아가이(박아서) 물 내가, 바가지로 푸는 옹달샘을 하나 했었는데 그것도 미아부랬거든 그것도 나오드래요.
선산에 있는 분이 우예 우리 집에 샘 있는지 뭐 있는지 알아여, 그래가 그것도 파내라 그래가이고 파내 숨구멍 뚫어내고 여 공구리 했는 거 정으로 띠낼라고 삼일간 뚫어가지고 내가, 그래가지고 요걸 해놨는데, (아들을 데리고) 대전 가서 뜸질도 하고 병원에도 다니고 그래가 어떡해서 병이 낳았는지 몰라여, 한 4년간 애를 먹었어. 4년간.
-조사일: 2005년 4월 1일, 제보자: 이길원(남, 67세)
(7) 무당들이 용왕으로 모시는 장샘
무속인들은 이거를 용왕님! 용왕님! 이래면서 여 와서 인제 자기들이 빌고 그래가고, 아주 여 마을에 지금 인정하고, 나오고 그렇게 해서 이거를 다시 빨래터를, (지금) 마을 노인들 빨래터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내 죽고 나만 그만인 걸.
-조사일: 2005년 4월 1일, 제보자: 이길원(남, 67세)
(8) 철조망을 쳐서 관리했던 장샘
(장샘) 이 속에서 계속 나와 물이, 철조망을 쳤었거든, 간이 상수도 해가지고 여 철조망을 쳐놨거든. 딴 사람들 들어오만 안된다고, 그르이 이 샘을 아무나 그래 (함부로) 쳤부리만 안 되는 거야.
이기 첨에 이걸 간이상수도 안 했을 때는 여 돌로, 돌로 쭉 해가지고 상탕, 여기는 하탕 해가지고 (아래는) 빨래터하고, 그래가이고 이 물로 해가 요 밑에 사람들 농사짓고, 이 물이 여름에 오만 그렇게 찹다고, 그르이 딴 사람들이 아무도 못 오게 했지.
-조사일: 2005년 4월 1일, 제보자: 이길원(남, 67세)
마을의 민속문화가 여전히 생생하게 전승되고 있듯이 관련 이야기 역시 풍부하다. 돌탑을 없애고 죽어나간 마을 사람들과 다시 복원한 돌탑 관련 이야기를 비롯하여 성황사와 영암각, 짧지만 흥미로운 남근석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고, 즉석에서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구전 민속의 묘미라 할 수 있다.
6. 남근석을 둘러싼 다양한 풍수 인식
남근석은 마을 오른편의 천봉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남자의 성기(性器) 모양의 바위이다. 남자 성기가 있는 곳에 마주 보이는 ‘낙상’ 마을에 여성 성기 모양의 바위가 있어 이를 둘러싼 낙상 여자들의 바람기와 관련된 풍수적인 인식이 마을에서 구전되는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산에 올라가 보면 수풀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1) 불바위 삼제(三題)
상주시 만산리에 천봉산(天峰山)이 있는데, 이 산에 예부터 음경(陰莖)바위가 있었다. 또한 낙상리(洛上里)이 도양산(道陽山 - 일명 石門山)에는 공알바위가 있어 천봉산의 음경바위를 도양산 쪽으로 돌리면 그곳의 처녀들이 마음이 들떠 소동이 이는 괴이한 일이 허다하였다. 피해를 늘 받는 낙상리 주민들은 이 바위를 불(火)바위라 불러왔으나 지금은 누가 깨뜨려 버렸는지 바위의 밑둥만 남아 있다. 동리 노인(62세․안노인)에게 왜 깨뜨렸냐고 물으니,
“저 바위가 간혹 불을 잘 내서요.”
라고만 대꾸했다.
- 尙州市․郡, 『尙州誌』, 邱一出版社, 1989, 1172~1173쪽.
2) 낙상 처녀들이 보기만 해도 바람나는 바위
지금 이 바위하고 여 있는 바위하고, 저 짝에 산에 가만 바위가 있는데 거 있는 바위하고 저쪽 낙상 있는 바위하고, 이기 남매상 그 속으로 바위가 되가 있는 게 있어여. 고래 있는데 저 쪽에 있는데, 그르이 낙상 있는 처녀들이 여만 쳐다 보만 바람이 나서 딴 데로 간다 해요.
-조사일: 2005년 4월 1일, 제보자: 이길원(남, 67세)
3) 남자바위 앞에 돌을 막아 잠재운 바람기
[조: 낙상은 다른 마을이죠?] 딴 동네지 저 짜, 여 있는 돌은 남자상이고, 낙상 있는 거는 여자고 그래가지고 요 앞에 돌에 가보면 넙덕한 바위로 갖다 막아 놔부랬어. 그걸 막아놓고 나니까 낙상에 있는 아가씨들이 바람이 안 난다.
저 산꼭대기 전주 하나 있는 거거 나무 사이로 거게 거 가만 편편한 논이였었는데 이기 산꼭대기라 산꼭대긴데 어디로 가야하냐면 요 밑에서 올라갈라 하만 한참 올라가야되요. 올라가야 되는데 거 앞에 가만 요래 딱 막아놔가지고 해논 게 있고,
-조사일: 2005년 4월 1일, 제보자: 이길원(남, 67세)
4) 낙상까지 가서 보고 온 여자바위
우리가 일부러 또 낙상까지도 그때 우리가 중학교 졸업하고 나서 일부러 어른들이 그리 이야기하기 때문에 일부러 가봤거든. 일부러 가보니까 여전히 참 그렇더라고. [조: 남자 바위 부르는 명칭이 따로 없나요?) 딴 이름은 없어. [조: 남근이라든지?] 그런 거는 없어.
-조사일: 2005년 4월 1일, 제보자: 이길원(남, 67세)
7. 상주의 민속문화 알고 찾고 지키기
앞에서 천봉산 성황제의 지속과 변화를 비롯한 천봉산 아래 터 잡은 안너추리 마을의 다양한 민속문화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상주에는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낙동강을 낀 넓은 평야를 바탕으로 예부터 사람들이 터를 일구어 온 고을답게 성황사를 비롯한 산신제, 돌탑, 동신목, 장승 등을 비롯한 다양한 민속신앙이 지금껏 마을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지 않아 귀중한 문화유산이 하나 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까지 잘 알려진 상주의 대표적인 민속신앙 이외에도 최근 현지 조사를 통해 알게 된 화동 신촌리 장승제를 비롯한 동제 전날 밤까지 풍물패들이 쇳소리를 내며 마을을 한 바퀴 돌며 수레에 제물을 지고 가서 제사를 지내는 남장동 동제, 학교 안에 있던 나무를 다른 어린 나무로 옮겨 지금껏 지속되고 있는 냉림동 동제 등은 사회․문화적 변화 속에서도 그때그때 생명력을 읽지 않고 재창조되고 있어 더욱 주목된다.
현재 전국에는 강원도 평창군의 대관령 성황사 및 산신각을 비롯해 다섯 개의 성황 관련 문화재가 지정되어 있다. 성황사 및 영암각 신앙은 특히 문화재로 지정될만한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원형이 훼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매당의 남매신이 도난을 당한 안타까운 상황이다. 현재, 새로 만든 남매상이 성황사에 보관되어 있다. 특히 동제를 맡고 있는 주체들에 의해 원래의 원형을 잃어가고 있어 문제가 심각한 편이다. 아울러, 상주 지역 곳곳에 산재해 있는 민속신앙을 조사하고 연구하여 제의가 지속적으로 전승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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