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4권

최초의 서원을 세운 신재 주세붕 선생

빛마당 2014. 12. 30. 14:40

조선 최초로 서원을 세운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선생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1. 머리말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다. 1541년에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교육의 진흥에 힘을 쏟는 한편, 이듬해에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인 안향(安珦)의 사당을 백운동(白雲洞)에 세웠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이곳으로 학사(學舍)를 옮겨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뒤에 紹修書院)을 건립하였다.

이것이 교육(敎育)과 제례기능(祭禮機能)을 겸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書院)이다. 선생은 이 서원을 사림(士林)의 중심기구로 삼아서 향촌(鄕村)의 풍속(風俗)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세웠고, 서원 운영을 위한 재정을 확보하고, 서원에서 직접 유생들에게 강론을 하였다.

그리고 몇 해 후에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해주(海州)에 가자, 그곳에서 수양서원(首陽書院)을 세움으로써 우리나라에서 사학기관인 서원의 창시자(創始者)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이렇듯 선생은 뛰어난 유학자(儒學者)로써 서원을 통해서 학문을 널리 알리려고 노력한 문신(文臣)이었고, 관직에 있을 때는 청렴한 청백리(淸白吏)였고, 가정에서는 이름난 효자(孝子)였다. 특히 선생은 그 당시 극심했던 당쟁(黨爭)과 사화(史禍)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분이다.

따라서 우리는 안동의 퇴계(退溪) 선생을 기억한다. 조선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분이고, 많은 제자들을 교육하여 영남에 우뚝 선 「퇴계학맥(退溪學脈)」을 세운 대학자(大學者)이다.

그러나 성리학(性理學)을 유생(儒生)들에게 교육하는 서원(書院)을 최초로 설립하여 수많은 영남 선비를 길러내고, 조선 천지에 성리학을 파급시키는데 있어서의 제일가는 공로(功勞)는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선생이라고 본다.


2. 선생의 생애

선생의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자는 경유(景遊)이며, 호는 신재(愼齋)·손옹(巽翁)·남고(南皐)이고.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선생의 선대(先代)는 상주(尙州)에서 살았으나, 고조(高祖)와 증조(曾祖) 때에 합천(陜川)으로 이거하였다가, 선생의 선친이 다시 칠원(漆原)으로 이거하는 바람에 칠원(漆原)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고조(高祖) 주숙유(周叔瑜)는 고려 때에 진사(進士)를 지냈고, 증조(曾祖) 주상빈(周尙彬)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의 벼슬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조부(祖父) 주장손(周長孫)은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주문보(周文俌)는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창원 황씨(昌原黃氏)는 부호군(副護軍) 황근중(黃謹中)의 딸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선생의 아버지 주문보(周文俌)는 돈후(敦厚)하여 향당(鄕黨)의 존경을 받았으며, 어머니 황부인(黃夫人)역시 성품이 뛰어나셨다.

그리하여 선생은 1495년 10월 25일에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漆原)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효자(孝子)로 유명하였다.

선생의 나이 7세에 어머니가 오래도록 병석에 누워있게 되는 바람에 빗질을 못해서 이가 끓었다. 이를 본 선생은 자신의 머리에 기름을 바른 후에 같은 베개를 베어서 어머니의 이가 모두 선생에게 옮기도록 하였는데, 이 소문을 들은 주변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고 효아(孝兒)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또한 선생은 친구들과 놀 때에도 성인(成人)처럼 말을 구차스럽게 하거나 망령되게 하지 않았고, 스스로 자신을 가다듬을 줄 알았다.

선생은 1522년(중종 17)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을과에 급제한 후, 1526년(중종 21)에 홍문관(弘文館)의 정자(正字)가 되었고, 이듬해인 정해년(丁亥年)에 박사(博士)에 이어 검열(檢閱)·부수찬(副修撰)에 보임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수찬(修撰)에서 군직(軍職)으로 전직되었다가 1년이 지난 후에 공조 좌랑(工曹佐郞)이 되었다.

1529년(중종 24)에는 관동 도사(關東都事)로 나갔다가 이듬해에 내직으로 들어와 헌납(獻納)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잘못을 임금이 덮어두려 하자, 간쟁(諫爭)이 그치지 않았다. 이때 대사간(大司諫) 심언광(沈彦光)이 간쟁을 중지시켜 김안로에게 아첨하려고 하였으나 이를 선생이 따르지 않았다.

그 후 김안로의 권력이 더욱더 커지자, 선생은 이 일 때문에 조정에서 밀려나 2년 동안 복직되지 않았는데, 이때 대사간(大司諫) 심언광(沈彦光)이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었는데, “벼슬에서 세 번 쫓겨나도 안색에 노기를 띠지 않으니, 어찌 고인(古人)보다 크게 손색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는 편지였다. 그러나 선생은, “30년간 글을 읽고도 출세하기 위해 입으로 상관의 종기를 빨아주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 있으니, 이 점이 화가 난다.” 고 일괄할 정도로 성격이 대범하였다.

1540년(중종 35)에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로 전직되었는데, 선생은 늘 거처하는 객관(客館)에 신위(神位)를 설치해 놓고 사당(祠堂)의 예처럼 새 음식물을 보면 반드시 올리었으며, 조석으로 살피고 출입할 때 참배하였다.

이듬해에 예빈시 첨정(禮賓寺僉正)으로 있다가 권신 김안로 때문에 다시 좌천되었는데, 당시 직제학이었던 김안로가 중종에게 그릇된 말을 하자, 선생은 “공(公)은 직제학(直提學)이 아니고 곡제학(曲提學)이구료”라고 꾸짖은 일화가 있다.

1541년(중종 36)에는 풍기군수(豐基郡守)로 나갔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백운동(白雲洞 : 順興)에 안향(安珦)의 사당인 회헌사(晦軒祠)를 세우고, 1543년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본받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었다.

선생은 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백가(百家)의 서적을 비치해 놓았으며, 학전(學田)을 마련하고, 직접 유생(儒生)들을 교육하여 문학과 기예를 배우도록 하였다.

이 백운동서원은 뒷날 이황이 키워서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되고, 많은 영남의 선비들을 길러냈다.

1546년(명종 1)여름에 응교(應敎)에서 전한(典翰)으로 전직되었고 그 뒤 얼마 안 되어 직제학(直提學)으로 옮겼다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547년(명종 2)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전직되었다가 이듬해에 우승지(右承旨)가 되고 이어서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그리고 1549년(명종 4)에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었다가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아갔으며, 이듬해인 1550년(명종 5)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불교 배척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서반(西班)으로 전직되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가 되었고, 1552년에는 겸 동지성균관사(兼同知成均館事)가 되었다.

1553년(명종 8)에 들어서, 다시 경연(經筵)의 직책을 겸임시키자, 선생은 병든 몸을 이끌고 나와 임금의 뜻을 깨우치려고 하였으나 이미 병환이 극도에 이르렀다.

선생은 평소에 늘 병을 달고 사셨는데, 1554년(명종 9)에 이르러서는 병이 더욱 깊어져서 벼슬을 극력 사양하여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와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그만두었으며, 그해 7월 2일에 향년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졸기(卒記)는 다음과 같다.

“동지중추부사 주세붕(周世鵬)이 졸(卒)하였다.

세붕은 영남 사람이다. 마음가짐이 너그럽고 온화하며 학문과 덕업(德業)을 닦고 어진 이와 선한 일을 좋아하며 늘 자기 자신을 부족하게 여겼고, 선현(先賢)들의 격언이나 좋은 글을 보게 되면 반드시 창이나 벽에 붙여놓고 끊임없이 외었다.

장사와 제사에 있어서도 한결같이《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로 법칙을 삼았고, 선영(先塋)이 나지막한 산의 기슭에 있으므로 후세에 논밭으로 변할까 염려되어 묘역(墓域) 둘레에 기와와 돌을 모아 묻어 놓느라 갖은 고생을 다하였으니, 그 효성이 순실하고 지극했다.

여러 고을의 원이 되었고 한 도의 관찰사가 되었었는데, 교화를 존숭했고 상례의 격식에 매달리지 않았다. 백성들을 권면할 적에는 효제(孝悌)와 농상(農桑)으로 깨우치고 환과 고독(鰥寡孤獨)들까지도 살아갈 수 있게 해주고자 했다. 인륜을 노래로 부르게 하고 학교를 세우기도 했는데, 일찍이 풍기군(豊基郡)에서 안유(安裕)의 옛터를 발견하여 서원(書院)을 세워 제사지내고, 안보(安輔)와 안축(安軸)을 배향(配享)하고 가사(歌辭)를 지어 바쳤으며 선비들을 맞아들여 그 안에서 글을 읽게 하였는데, 그들을 봉양하는 경비를 모두 규모있게 하였다.

또 해주(海州)에다 서원을 세워 최충(崔沖)을 제사지냈는데, 제도는 풍기의 서원과 다름이 없었다.【해주는 곧 최충의 고향이다.】 벼슬은 아경(亞卿)에 이르렀는데 마음가짐을 가난한 선비처럼 하여 맑은 기상과 굳은 절개가 변한 적이 없었다.

을사년의 화가 일어나고는 세붕이 사람들을 대해서는 번번이 세상에 대해 분개하는 말을 하고 권간들을 대해서는 굽신굽신하면서 두려워하였으며, 이기(李芑)와 윤원형(尹元衡)의 집을 드나들며 여러 벼슬을 역임하여 부제학이 되었다.

인종(仁宗)의 담제(禫祭) 뒤에 자전(慈殿)이 따로 연은전(延恩殿)에 부제(祔祭)하도록 명하자 옥당이 글을 올려 논했었는데, 이때 진복창(陳復昌)이 응교로 있으면서 그 차자(箚子)를 지었다. 세붕이 그것을 두세 차례 숙독(熟讀)하고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말하기를 ‘이 글이 만세에 전해지더라도 어찌 가볍게 여길 사람이 있겠는가.’ 하였고, 일찍이 이행(李荇)의 행장(行狀)을 지으면서는 극도로 칭찬하여 충성은 유향(劉向)에게 비하고 지조는 공융(孔融)에게 비하고 용맹은 제갈량(諸葛亮)에게 비하기까지 했으므로 식견있는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겼었다.

이때에 졸했는데 상이 듣고서 매우 애도하며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하고, 또한 일로(一路)에서 널을 호송(護送)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조정의 대신들은 하나같이 애도 하였으며, 워낙 청렴하셨기 때문에 사강관 어계선(魚季瑄)은 장례치를 걱정을 하였다.

“동지중추부사 주세붕(周世鵬)은 영남 사람인데, 조정에서 벼슬하다 이번에 죽었습니다. 호상(護喪)할 만한 자식도 없고 가세도 미약한데, 고향이 멀어 시신이 내려 가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지금 연도의 고을들이 피폐하여 민간의 힘을 빌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만일 하유하여 일로에서 호상하여 돌아가 장사하게 해준다면 군신 사이에 시종(始終)의 의리가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전경(典經) 이귀수(李龜壽)도,

“주세붕은 평생에 이익을 도모하는 일이 없이 옛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옛사람의 도(道)대로 행동하여, 오직 어버이와 임금 섬기는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자신의 직분을 삼았으며 서울에서 벼슬하고 지낼 적에도 셋집에서 살았으니, 이처럼 그는 청렴하고 곤궁했습니다.

지금 가난한 상가(喪家)가 길이 멀어서 장사지내러 가지 못하니 만일 하유하여 일로가 호상하게 하신다면 또한 시종의 후의(厚義)가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에 박수량(朴守良)이 죽었을 적에도 상께서 그가 청근(淸謹)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호송해주도록 했었습니다. 비록 이번에 모두 박수량의 초상 때처럼 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만일 호송할 것을 명하신다면 진실로 은혜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라고 아뢰자, 명종 임금은,

“아뢴 뜻이 지당하다. 주세붕의 상사(喪事)는 위에서도 듣고 몹시 슬펐다. 그 사람은 평생에 청렴한 덕이 있었고 또한 문장의 재주도 있었으니, 호송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런 모습을 목격한 당시 사신(史臣)

“살았을 적에 선행이 있었기 때문에 죽은 후 은명(恩命)이 있게 된 것이다. 영광스럽게 간책(簡冊)에 실리게 되었으니 선인(善人)을 권장하는 것이 지극하다 하겠다.”

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돌아가신 뒤에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칠원의 덕연서원(德淵書院)과 백운동서원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불행하게도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형의 아들인 박(博)을 양자로 삼았다.

선생은 1522년(중종 17) 생원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을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로 임명된 후부터 1554년(명종 9)에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그만두기 까지 32년 동안 환로(宦路)에 있으면서 조정의 내직(內職)을 두루 거쳤는데, 선생은 높은 학문으로 대신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단 한번 탄핵을 받은 일이 있었으나 임금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노인을 보면 반드시 말에서 내리고 상복(喪服)을 입은 사람을 보면 반드시 경의를 표하였다. 그리고 배우는 사람을 대하면 자세히 잘 이끌어서 기질(氣質)을 변화하는 것을 요점으로 삼았으며, 임금을 섬길 적에는 반드시 그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성군(聖君)이 되도록 마땅한 길로 이끄는 일에 지극 정성이었던 이름난 충신(忠臣)이었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조정의 대신들은 하나같이 “한분의 현인을 잃었다.”고 하였으며, 제자들이 선생의 고향땅 남고(南皐)에다 사당을 세웠다.,

선생은《무릉잡고(武陵雜稿)》,《죽계지(竹溪誌)》,《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심도이훈(心圖彛訓)》 등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1581년에 간행된 무릉잡고(武陵雜稿)에는〈도동곡(道東曲)〉・〈육현가(六賢歌)〉・〈엄연곡(儼然曲)〉・〈태평곡(太平曲)〉등 장가(長歌)와 〈군자가(君子歌)〉등 단가 8수가 있는데, 주목을 끄는 일은 이들이 한글가사라는 점이고, 모두 경기체가 형식으로 쓰여 졌기 때문에 당시의 가곡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1677년(숙종 3) 3월 13일에 좌의정 권대운(權大運)이,

“고 유신(儒臣) 주세붕(周世鵬)은 곧 중종(中宗)·인종(仁宗)·명종(明宗) 3대 조정의 명신(名臣)이고 경술(經術)과 효행(孝行)을 유림들이 추앙하는 바인데, 벼슬이 종2품에 그쳤기 때문에 시호를 내리는 전례(典禮)가 없었습니다. 명신에 있어서는 상례에 구애할 것 없이 특별히 시호를 내리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고, 병조 판서인 김석주(金錫冑), 승지 목창명(睦昌明), 교리 권환(權瑍)도,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하여 우리 나라에 서원이 있게 된 것이 이에서 비롯되었고, 그의 학문과 행동도 사람들이 추앙하는 바입니다.”

라고 하였으며, 정지화(鄭知和)와 허목(許穆)도 시호를 내려 숭장(崇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아뢰니, 숙종은 선생에게 시호를 내리고 정경(正卿)으로 증직하도록 하였다.


3. 선생의 치적(治積)


1) 조선 최초로 서원을 세웠다.

선생은 성품이 본래 학문을 좋아하여 읽지 아니한 글이 없었으며 늙을 때까지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그가 외직(外職)을 맡았을 때는 반드시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힘을 기울였었다.

당시 우리 나라의 교육은 중국의 제도를 따라서 서울에는 성균(成均)과 사학(四學)을 두었고 외방에는 향교를 두었으나 정작 서원의 설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풍기군수로 부임한 선생은 여기에 뜻을 두어 사람들의 조소와 비방을 무릅쓰고 선현이 은거하던 옛 땅에 처음으로 서원을 세웠으니, 옛날 학문을 일으킨 일은 옛 군자(君子)에 조금도 뒤질 일이 아니다.

그리고 선생의 뒤를 이어 풍기군수가 된 이황(李滉)이 더욱 심력을 다하면서 방백(方伯)에게 알리고 조정에 상문(上聞)함으로써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더욱 빛나게 하고 규모를 더욱 원대하게 하였다.

이렇듯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로 백운동서원을 세우고 선비들의 강학에 열중하였으며, 당시 사신(史臣)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풍기는 안향(安珦)의 고향인데, 주세붕이 안향의 옛집 터에 사우(祠宇)를 세워 봄·가을에 제사하고 이름을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이라 하였다.

좌우에 학교를 세워 유생이 거처하는 곳으로 하고, 약간의 곡식을 저축하여 밑천은 간직하고 이식을 받아서, 고을 안의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 준수한 자가 모여 먹고 배우게 하였다.

당초 터를 닦을 때에 땅을 파다가 구리 그릇 3백여 근을 얻어 경사(京師)에서 책을 사다 두었는데, 경서(經書)뿐만 아니라 무릇 정·주(程朱)의 서적도 없는 것이 없었으며, 권과(勸課)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백운동서원을 열어서 유학을 크게 진흥한다는 선생의 치적이 조정에 알려지자, 중종 임금은 삼공(三公)에게 선생의 가자문제를 의논하도록 했는데 이때 사신은, “주세붕은 학문이 해박하고 후덕하고 인자한 사람으로 향교(鄕校)를 크게 수리하여 사람들을 열심히 훈도하였는데 명유(名儒)들이 많이 모였으며 다스림에 성실과 신의를 힘써 고인(古人)의 풍도가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마음을 다해 구황했는데 심지어 그의 고향집 곡식까지 운반해다가 백성을 진휼하니, 백성들 모두가 사랑하였다.

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1546년(명종 1)3월 12일에 주강이 열렸는데, 이때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신광한(申光漢)이 느닷없이,

“나라의 치란(治亂)은 학교의 흥폐(興廢)와 관계되므로 반드시 어진 스승을 택하여 그 직책에 오래 있게 한 뒤에야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세붕(周世鵬)이 수령(守令)으로서 지금 사성(司成)이 되었으니 인재를 얻었다고 할 만합니다. 지금 학교의 임무를 괴로운 일로 여겨서 사람들이 다 기피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만약 부지런히 가르쳐서 현저한 성효(成效)가 있는 사람을 사성에서 대사성(大司成)으로 승진시킨다면 아마 인재를 양성하는 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라면서 사성(司成)으로 있는 선생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천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554년(명종 9)10월 10일에도 사신(史臣)은,

“우리 동방에 처음에는 서원이란 명칭이 없었다. 주세붕(周世鵬)이 개연(槪然)히 유학(儒學)을 흥기시키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겨 선유(先儒)들이 도를 강론하던 곳에 집을 짓고서 많은 선비들이 독서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곧 주문공(朱文公)이 백록동에 서원을 세웠던 뜻이다.

이후부터 호응하여 주창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우리 나라에도 서원이 무릇 두서너 군데가 되었는데 영천의 서원은 그 중 하나이다. 우리 동방에 문학(文學)이 융성해질 것이 반드시 이로부터 비롯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주세붕의 유학에 대한 공로가 어찌 적다 하겠는가.”

라며 유학(儒學)의 진흥(振興)에 끼친 선생의 공로를 높이 천양하였다.

그리고 경상도 함양에 사는 진사(進士) 강익(姜翼) 등 30여 인이 정여창(鄭汝昌)의 서원에 사액(賜額)을 청하는 장고(狀告)한 내용 중에도,

“우리 나라에 옛날에는 서원이 없었는데 주세붕(周世鵬)이 풍기 군수(豊基郡守)로 있으면서 비로소 이 서원을 건립하였다. 사당을 세워 문성공을 제사지내고 재실을 두어 학자들을 거처시켰으며 서적(書籍)과 전민(田民)을 모두 갖추었다.

그는 또 황해도 감사로 있을 때 최 문헌공(崔文憲公)충(沖)을 위하여 해주(海州)에 서원을 세우고 이름을 문헌당(文獻堂)이라 하였는데, 규모가 한결같이 백운동 서원과 같았으므로 원근의 학자들이 많이 취학하였으니 혜택을 준 공로가 여간 많지 않다.

이후로 성주(星州)와 강릉(江陵) 같은 고을에서 이를 본받아 서원을 세운 곳이 퍽 많았다고 한다.】

라는 내용이 올라 있다.

그리고 백운동서원이 세워진지 9년이 지난 1555년(명종 5)에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기(李芑) 등이 백운동 서원에 편액과 책을 내려 보낼 것을 건의하였다.

“풍기(豊基)의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은 황해도 관찰사 주세붕(周世鵬)이 창립한 것인데, 【주세붕이 풍기 군수(豊基郡守)로 있을 때 이 서원을 창립하였다.】 그 터는 바로 문성공(文成公)안유(安裕)가【본래 이름은 향(珦)이었는데, 어휘(御諱)를 피하여 유라 하였다.】 살던 곳이고, 그 제도와 규모는 대개 주 문공(朱文公)이 세운 백록동(白鹿洞)을 모방한 것입니다.

무릇 학령(學令)을 세우고 서적(書籍)을 비치하며, 전량(田糧)과 공급의 도구를 다 갖추어서 인재를 성취시킬 만합니다. 이황(李滉)이【이황이 풍기 군수로 있을 때 주세붕의 뜻을 훌륭히 여기고, 오래 전승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가려고 할 때에 사연을 갖추어 계문하였기 때문에 삼공과 해조에게 명하여 의논하도록 한 것이다.】 편액(扁額)과 서적·토지·노비를 하사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다 따라줄 수는 없으나 편액과 서적 등 2∼3건만이라도 특명으로 내려 보낸다면, 먼 곳의 유생들이 반드시 고무 감격하여 흥기할 것입니다.

토지의 경우는 주세붕이 마련해준 것이 부족하지 않으니, 그대로 놓아두고 고치지 않는다면 비록 장획(臧獲)을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환(使喚)할 사람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유생이 글읽기로는 고요한 곳이 가장 좋습니다. 만일 감사와 수령이 학업을 권장하려고 교령(敎令)을 번거롭게 내려 단속한다면 오히려 사람들이 자유스럽지 못하여 장수유식(藏修遊息)의 도(道)에 어긋날까 염려되니, 동요시키지 않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조선의 동방 땅에서 서원(書院)을 창건되고 문풍(文風)이 크게 일자, 명종 임금은 동지성균관사였던 선생에게, “경은 학문에 근면하여 물의(物議)가 이미 흡족해 하니, 습속에 구애되지 말고 자주 사진(仕進)하여 유생들을 권면하라.”는 격려의 말씀을 전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설경(說經) 안수(安璲)가 소수 서원에 서책을 하사하도록 청하였다.

“경상도 풍기군(豊基郡)에 소수 서원(紹修書院)이 있는데, 이는 고려 사람 안유(安裕)가【안유(安裕)의 초명은 향(珦)이며 죽계인(竹溪人)으로 학행(學行)이 있었다. 죽계는 지금 풍기군에 속해 있다. 동지사(同知事) 주세붕(周世鵬)이 그 고을 군수로 있을 때 그곳에 사당을 세우고 또 그 곁에 서원을 지어 유생들로 하여금 모여서 학문을 닦게 하였다.】 살던 고장입니다. 도내의 유생들이 모두 모여들어 마치 주문공(朱文公)의 백록동(白鹿洞)과 같습니다. 그런데 뜻 있는 선비들이 제반 서책을 박람하고자 하나 궁벽한 시골이라 서책이 귀하여 선비들에게 아쉬움을 주고 있습니다. 서책을 간행할 때 한 질씩 반사(頒賜)하소서.”

선생이 설립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대해서 조정(朝廷)의 관심이 집중되자, 백운동서원은 날로 번창하여 후에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고, 이름도 소수서원(紹修書院)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선생은 황해도 해주 땅에 두 번째 서원으로 수양서원(首陽書院)을 세웠다.이때가 선생의 두 번째 외직(外職)인 황해도 관찰사로 나아갔을 때였다.

선생은 황해도 해주 땅에 해동공자(海東孔子) 최충(崔沖)의 사당을 바로 세우고 이어서 <수양서원(首陽書院)>을 세웠다. 이에 대해서는 생원(生員) 김택(金澤)의 상소문 속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최충(崔沖)은 서쪽 지방에서 분발하여 일어나 개연히 후진들을 지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습니다. 《고려사》에도 ‘해동 공자(海東孔子)’라고 했는데, 우리 동방(東方)에 학교를 세움이 최충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시호를 문헌(文憲)이라고 하였고 보면 후학들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사람인데, 수양산(首陽山) 등성이에 있는 황량한 사당이 잡초에 덮혀 있어 아직까지 후진들이 귀의하여 앙모할 곳이 없으니, 우리 동방 사람이 옛것을 좋아하지 않음이 심합니다.

1549년()명종 4) 가을에 감사 주세붕(周世鵬)이 명을 받고 와서 다스릴 적에, 문서(文書)를 처리하는 여가에 고적(古蹟)을 탐방하다가 덤불 속에서 사당을 발견하자 잡초를 헤치고 참배하고 나서 좁고 누추함을 한탄했었습니다.

이듬해인 경술년에 향교 서쪽에 터를 닦고 사당을 옮기어 혼령(魂靈)을 안치(安置)하고 그 아래에 서원(書院)을 세워 제생(諸生)이 학업을 익히는 곳으로 하고 자기 집에 소장하였던 서책을 내어 채우고, 전민(田民)도 마련하고 주방과 창고도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그 고을에서 근신(謹愼)한 사람 2명을 가리어 서원을 맡아 보며 와서 글 배우는 사람들을 도와주게 한 다음 이름을 ‘수양서원(首陽書院)’이라 하고 ‘서책은 가지고 나가지 못하고 여자는 들어오지 못한다.(書不得出色不得入)’는 여덟 글자를 문미(門楣)에 게시(揭示)하였으니 그 조치하는 방도가 세밀하게 갖추어졌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학생들이 여기에서 육예(六藝)를 배우게 되었으니, 이는 반드시 하늘이 그 사람을 명하여 우리 성명(聖明)의 시대에 문운(文運)이 일어날 길을 열어 놓게 한 것입니다.

다만 한탄스러운 점은, 왕명을 받아 한 일이 아니므로 이름이 국사(國史)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어서 무너진 데를 복구하고 헤어진 데를 보수(補修)하는 자는 몇이 되지 않고 기와를 부수고 벽을 그어버리는 자들은 곳곳에 있어서 한다는 소리가 ‘이는 조정에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니 폐치해버린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서원의 장서도 사사로이 두고 보는 것으로 만들려고 노리고, 더러는 관가(官家)의 위세로 위협하여 출납의 계기를 열어 놓아 서원의 규칙을 떨어뜨리려고 하는 자가 있기도 합니다.

선비들의 아름답지 못한 풍습이 한결같이 이에 이르렀으니, 신들은 분하고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성상께서 송(宋)나라의 고사(故事)대로 편액과 서책을 내리어 권장하신다면, 이는 사문(斯文)이 흥성할 시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이 돌아가시자, 조선왕조실록의「주세붕 졸기(卒記)」에는,

“해주(海州)는 최충(崔沖)의 고향인데 또 해주에다 서원을 세워 최충을 제사지냈다. 제도는 풍기의 서원과 다름이 없었다. 벼슬은 아경(亞卿)에 이르렀는데 마음가짐을 가난한 선비처럼 하여 맑은 기상과 굳은 절개가 변한 적이 없었다.”

라 하였다.

이처럼 선생은 풍기 땅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세워 조선 유학(儒學)의 배움터를 만들었고, 두 번째는 황해도 해주(海州)땅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여 문풍(文風)을 크게 진작시켰으니, 조선(朝鮮)의 자랑일 뿐 아니라 선생의 고향인 상주(尙州)의 자랑이기도 하다.


2) 바른 정사(政事)를 펼쳤다.

선생은 환로(宦路)의 대부분을 내직(內職)에서 보냈고, 외직(外職)으로는 풍기군수와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541년(중종 36)에 옛 순흥부(順輿府) 땅이었던 풍기군수로 나아갔다. 그 해 5월 22일에 ‘형이 아우의 재물을 빼앗으려는 송사(訟事)’가 있었다.

선생은 먼저 형에게 아우를 업고 종일 뜰을 돌게 하였다. 게을러지면 독촉하고, 주저앉으면 꾸짖었다. 몹시 지치게 되었을 때에 그 형되는 사람에게 묻기를

‘너는 이 아우가 어려서 업어 기를 때에도 다투어 빼앗을 생각을 가졌었느냐?’

하니, 그 형이란 사람이 크게 깨달아 부끄럽게 여기고 물러갔다는 일화가 있다.

또 한번은 생원(生員) 이극온(李克溫)이 제 아우와 다툰 송사가 있었는데, 선생이 흰 종이 한 폭에 왼쪽에는 이(理)자를 쓰고 오른쪽에는 욕(欲)자를 써서 형 이극온에게 주고 찬찬히 타이르기를,

‘네가 곧거든 ’이(理)‘자 아래에 이름을 적고 너에게 욕심이 있었거든 ’욕(欲)‘자 아래에 적으라.’

하니, 이극온이 붓을 잡고 낯을 붉히며 머뭇거리고 결단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너는 생원인데 어찌 이(理)와 욕(欲)을 분별할 줄 모르겠느냐, 빨리 적으라,’

하니, 형 이극온이 ‘욕(欲)’자 아래에 적고서 간다는 말도 없이 달아난 일화도 있다.

이처럼 선생이 선정(善政)을 베풀자, 조정에서는 선생의 가자 문제를 의논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이해(李瀣)가 이르기를,

“풍기 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은 평소 관직에 있으면서 근신 청검(謹愼淸儉)하고 구황하는 계책이 주밀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경내의 백성들이 힘입어 모두 살아날 수 있었으며, 진제장(賑濟場)에서 밥을 얻어먹고 살아난 자가 거의 1백 명이나 되어 황정(荒政)이 도내에서 제일입니다.”

라고 하였고, 영의정 윤은보(尹殷輔)도 “주세붕의 황정(荒政)은 도내에서 제일이기 때문에 어영진과 김광철과는 다르게 포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또한 백성들이 흉년에 먹을 것이 없자, 인삼재배를 권하여 오늘의 풍기인삼의 터전을 잡아준 것도 유명한 일이다.

그리고 1544년(중종 39)에 풍기에 살던 백성을 북쪽의 변방으로 이주시킬 때, 선생은 그들에게 술과 풍악으로 접대하고 보내면서 말하기를, “임금의 은혜를 베푼 것이다.” 하였다.

이러한 선정 때문에 고을의 부로(父老)들은 선생의 선정(善政)을 칭송하는 비석을 세워 그 고마움을 기리였다.

선생의 두 번째 외직은 황해도 관찰사였다.

1549년(명종 4)가을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서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아갔다. 이때에도 사간원(司諫院)에서는 선생을 외직으로 외직에 나가지 못하도록 권유하였으나, 임금이 “서쪽의 백성들이 곤궁하니,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바람에 더 이상 말리지 못했다.

당시 황해도는 바다와 접해 있어서 무술(武術)만 숭상한 바람에 풍속이 미개하였으므로 여러 군현(郡縣)에다 영을 내려서, 형벌을 줄이고, 세금을 적게 내고, 농업에 힘쓰도록 하고, 효제(孝悌)의 의리를 거듭 강조하여 풍속과 교화를 독실히 하였다.

그리고 해주(海州)에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의 사당을 세워 학문의 제도를 한결같이 백운동(白雲洞)처럼 제정해 놓는 바람에, 먼 곳에서 유학하러 온 선비들이 날로 불어났다.

이처럼 선생은 교화(敎化)를 존숭하는 한편 상례의 격식에 매달리지 않았다. 백성들을 권면할 적에는 효제(孝悌)와 농상(農桑)으로 깨우치고 환과 고독(鰥寡孤獨)들까지도 살아갈 수 있게 해주고자 했다.

또한 인륜을 노래로 부르게 하고 학교를 세우기도 했는데, 일찍이 풍기군(豊基郡)에서 안유(安裕)의 옛터를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고, 안보(安輔)와 안축(安軸)을 배향(配享)하고 가사(歌辭)를 지어 바쳤으며 선비들을 맞아들여 그 안에서 글을 읽게 하였는데, 그들을 봉양하는 경비를 모두 규모있게 하였다.

또 해주(海州)에다 서원을 세워 최충(崔沖)을 제사지냈는데, 제도는 풍기의 서원과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벼슬은 아경(亞卿)에 이르렀는데 마음가짐을 가난한 선비처럼 하여 맑은 기상과 굳은 절개가 변한 적이 없었다.


3)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다.

선생은 평소에 근신 청검(謹愼淸儉)하여 조선에 빛나는 청백리가 되신 분이다.

먼저 1551년(명종 12)에 조정에서는 청간(淸簡)한 사람 33인을 초계(抄啓)하였는데, 이 때 선생이 청간한 사람으로 뽑혔다. 그러나 선생은 거짓으로 꾸며 명예를 구하는 무리가 포함되었다고 하여 상을 내리는 어전에는 나가지 않았다.

또한 선생은 성품이 담박하여, 30년간 조정에 나와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이르렀으나 의복이 빈한(貧寒)한 선비와 같았고, 밥상에 고기 반찬을 한 가지 이상 놓지 않았으며, 좌석에는 털방석이 없었고, 마구간에는 좋은 말이 없었으며, 사는 집도 임대하여 살았다.

봉록(俸祿)이 다소 넉넉하였으나 의식에 쓰고 남은 것은 모두 종족을 도와주고 손님을 접대하는데 썼다. 그래서 선생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선생은 “나의 분수에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하였다. 실제로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집안에 남은 곡식이 한 가마도 없었다.

그래서 선생이 돌아가시자 장례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조정의 신하들이 건의하고, 임금이 부조를 후하게 하사 하였으며, 상여가 고향으로 운구될 때 각 고을에서 경비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의 유해는 돌아가신지 4개월이 지난 11월 19일에야 고향인 칠원(漆原)의 선영 아래에 자리 잡아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이처럼 선생은 청렴하게 평생을 살았지만 이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4) 선생은 큰 학자(學者)였다.

선생은 성품이 본래 학문을 좋아하여 읽지 아니한 글이 없었으며 늙을 때까지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선생이 외직(外職)을 맡았을 때는 반드시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선생은 도덕이 깊고 두터워서 상하를 감동하고 효제(孝悌)가 신명(神明)에게 통하였다. 사람을 가르칠 적에는 인륜의 법칙을 강조하였고, 학문을 일으키고 문학을 숭상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매양 닭이 울면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다음에 단정히 앉아 종일토록 책을 대하였다. 또한 평생 동안 옛것을 좋아하였고 실천에는 과감하여 기명(器皿)에도 명(銘)을 새기고 장옥(牆屋)에도 경계를 써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옛 성현의 가르침으로 가사를 지어 날마다 외우게 하는 등 늙도록 배움에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선친께서 ‘입을 조심하고 몸을 조심하고 마음을 조심하라’는 세 가지 훈계를 하였기 때문에 서실(書室)에다 ‘신재(愼齋)’라고 이름을 붙여놓고 스스로 경계하였다.

1546년(명종 1)에는 군자감 정(軍資監正) 겸 편수관(編修官)에 임명되어 중종(中宗)과 인종(仁宗) 두 조정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3월 12일에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선생은 당마매입을 반대하면서 올린 진계편(進戒篇)의 총론(總論)을 작성하였는데, 해박한 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들은 모두 보잘것없는 몸으로 경악(經幄)의 직임(職任)을 더럽히고 있으면서 은혜와 영광이 그지없는데도 보태어 보답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매양 직분(職分)을 생각할 때마다 다만 두렵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사복시 정(司僕寺正) 김천우(金天宇)의 당마매입설(唐馬買入說)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은 안으로 신정(新政)에 사치를 도입(導入)하고 밖으로 상국(上國)에 불화의 단서(端緖)를 여는 것으로, 말하려니 한심합니다.

옛날 무왕(武王)은 대성인(大聖人)이었건만 소공(召公)은 헌납(獻納)한 개 한 마리 받는 것을 미리 경계하여 여오(旅獒) 일편(一篇)을 지었으며, 백경(伯冏)은 태복 정(太僕正)이었는데, 목왕(穆王)은 사치스러워질 것을 미리 경계하여 ‘경명편(冏命篇)’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무왕은 간(諫)하는 말을 듣고 즉시 깨달아 한 마리의 개를 물리쳐서 8백년의 대통(大統)을 드리웠으며, 목왕(穆王)은 경계함이 있었으나 자신이 그 속에 빠져, 팔준마(八駿馬)를 얻고는 사해(四海)의 영토를 거의 잃어버릴뻔 하였습니다. 두 편이 모두 밝은 거울처럼 분명하니, 그 득실(得失)은 진실로 터럭 만큼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이 두 편을 써서 올리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취택(取擇)하소서.

더구나 서려(西旅)가 개를 진공(進貢)할 때에는 무왕은 이미 천자가 되어서 사방의 오랑캐들이 다 이미 길을 통하였으니, 이것은 넓은 하늘의 아래 왕(王)의 소유 아닌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왕의 소유(所有)를 가지고 와서 바치었건만 소공(召公)은 오히려 글을 지어 진계(陳戒)하면서, 처음에도 ‘오호(嗚呼)’로 시작하고, 마칠 때에도 ‘오호’로 끝내었으니 피어린 정성이 간절합니다. 그 글은 1백 93자에 지나지 않으나 그 충군 애국(忠君愛國)의 마음은 만고(萬古)에 밝아서 밝은 해와 더불어 빛을 다툽니다. 만약 무왕이 제후(諸侯)가 되어서 천자의 금령(禁令)을 어기고 오직 양마(良馬)만을 급히 여겨 훔친 물건이라도 가리지 않았다면 소공(召公)의 훈계는 마땅히 다시 어찌하였겠습니까.

성묘 조(成廟朝)에 호마(胡馬)를 사들이자는 논의를 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때의 시종 유호인이 아뢰기를 ‘토산(土産)이 아니면 사들이지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 문제(漢 文帝)는 천리마(千里馬)를 물리쳤다. 가져와 바치는 것도 오히려 물리쳤는데 하물며 사들이는 일이겠는가.’라고 하였다는 것이 《국조보감》에 실려 있습니다. 중종 조(中宗朝)에 윤은보가 당마(唐馬) 사들일 것을 건의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성의 무역을 금지하면서 위로부터 사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종 26년과 중종 40년 동안에 일찍이 당마(唐馬)를 사들인 일이 없었으니, 그 후세를 염려함이 지극합니다. 제왕(帝王)의 힘써 실천함이 이와 같았고, 선민(先民)의 진계(進戒)가 이와 같았으며, 조종의 남기신 훈계가 이와 같았습니다. 이것이 비록 윤허를 받았으나 끝내 어리석은 설을 올리는 까닭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그리고 선생은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과 같은 시기에 문명(文名)떨쳤다. 그리고 당대 재경소(在京所)에서 상주를 위한 일을 많이 하였으며, <상주향사당제명서(尙州鄕射堂題名序)>를 썼다. 그리고 선생은 고향 상주에 대한 시(詩)를 여러 수(首) 남겼는데,《무릉잡고 별집》권4에 있는 <상주(尙州)>라는 시를 보면,

沙伐吾宗國 사벌은 우리 일가의 나라

山河壇上流 산하는 상류의 으뜸일세.

行吟白頭日 나그네 백두음(白頭吟)을 읊은 날

滿目大平秋 천지는 태평한 가을일세

野熟黃雲遍 벌판엔 곡식익어 황운(黃雲)은 널리 퍼졌는데

城雄古木稠 성은 운대하여 고목이 빽빽하네.

誰家弄長笛 뉘가 긴 젓대를 부는가

一拍起離愁 한 가락에 별리의 수심 일으키네.

하여 고향 상주에 대한 애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상주출신의 관리로서 재경소(在京所)에 참석했던 분들이 정사룡(鄭士龍)・황이(黃怡)・강사안(姜士安)・김귀영(金貴榮)・정응두(丁應斗)・정유길(鄭惟吉)・주세붕(周世鵬)・우상(禹鏛)・김홍(金弘)・박유경(朴裕慶) 이라는 것도 선생이 쓴 <상주향사당제명서(尙州鄕射堂題名序)>에 나타나 있다.


5) 선생은 큰 효자(孝子)였다.

선생은 성품이 본래 효성스러워서 자식의 직분에 힘을 다하였기 때문에 향당에서 모두 공경하고 칭찬하였으며, 나약한 사람을 진작시키고 경박한 사람을 돈독하게 만들 수 있어 사람들의 표본이 될 만했다.

1532년(중종 27)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을 때에 3년간 묘소를 지키는 바람에 수염과 두발이 모두 희어졌으며, 이때에도 3일에 한번은 집에 내려와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부인의 방에는 들르지 않았다고 한다.

3년상(三年喪)을 끝마치고 다시 전적이 되었이 되었을 때도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스스로 외직을 요청하여 곤양 군수(昆陽郡守)가 되었다.

그러자 그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선생이 장례를 치를 때까지 거친 밥에 물을 마시고 3년간 상막(喪幕)의 짚자리에서 거처하였다. 그리고 부모님 묘 앞에

수무부모(誰無父母) 부모없는 이가 어디 있으며

숙비인자(熟非人子) 자식이 아닌 이가 없다.

라는 비(碑)를 세웠다.


6) 임금의 교육에 전념했던 충성스러운 신하였다.

명종(明宗)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래서 스스로 권력을 움직일 수 없는 나이였기 때문에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섭정(攝政)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외척(外戚)의 전횡(專橫)이 국정을 혼란하게 하였다.

명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선생은 49세로 부제학 벼슬에 있었다. 비록 군신(君臣)의 관계이지만 아버지와 자식같은 나이였다. 그래서 선생은 당쟁(黨爭)과 사화(史禍)의 혼란 속에서도 철없는 어린 임금이 학문에 열중해서 장차 성군(聖君)이 되기를 염원하면서 늘 명종에게 면학(勉學)을 권했다.

그 몇 가지 예(例)가 선조실록(宣祖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명종이 즉위한 1546년 8월 3일에 조강이 열렸는데 선생은 ‘항상 허물이 없는가를 살필 것’을 주문하였다.

“옛날에 소열제(昭烈帝)가 붕어할 때 후주(後主)에게 경계하기를 ‘악(惡)은 작다 해도 행하지 말고, 선(善)은 작다 해도 그만두지 말라.’ 하였습니다. 대저 한가지 일을 처리하는 사이에도 털끝만큼이라도 천리에 다하지 못함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항상 살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루에는 하루의 일을, 한 달에는 한 달 동안의 일을, 1년에는 1년 동안의 일을, 10년에는 10년 동안의 일을 돌아보고 그 허물의 유무를 살펴서, 허물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써서 마침내 허물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천리가 밝아지고 성현에도 이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8월 10일에 열렸던 석강에서는 시골 백성에게 여씨 향약을 베풀 것을 아뢰었다.

“선왕조(先王朝)에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궁벽한 시골에 시행하자, 백성들은 거기에 감화되어 악을 버리고 선으로 향하는 예가 있었으므로 조정에서도 이를 시행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이 거의 《소학(小學)》의 실행을 힘쓰지 아니하고 도리어 혹은 괴상한 의복을 착용하거나, 혹은 공명(功名)에 편승하여 그 본(本)을 놓고 말(末)을 힘쓰는 경향이 점차 폐습(弊習)으로 형성된 때문에 선왕께서 이를 폐지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여씨향약》이 시골에는 시행될 수 있으나, 조정에서는 조정대로의 예법(禮法)이 있으니 꼭 시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골 백성들은 똑같이 천리(天理)를 부여받았으나 왕화(王化)가 직접 미치지 못하는 때문에 향약을 시행한다면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11월 23일에 있었던 주강에서는 명종에게 ‘선한 것을 좋아해야 한다’는 강론을 했다.

“공자께서 시서(詩書)를 산정(刪定)하실 때에 진서(秦誓)를 《서경(書經)》에 넣은 것은 그 서언(誓言)을 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대저 사람이 선을 좋아한다는 것은 쉬운 듯하나 실상 어려운 것입니다. 맹자는 ‘선을 좋아하면 천하를 다스려도 여유가 있다.’ 하였습니다. 중인(中人) 이하는 남의 재능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가 많습니다. 이 서언을 보면 앞의 한 사람은 방현령(房玄齡)같고 뒤의 한 사람은 이임보(李林甫)같습니다. 방현령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취할 때에 단지 선인(善人)만을 취하였고, 남에게 좋은 점이 있으면 마치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이임보는 선인을 시기하고 해쳐서 당나라가 마침내 망하였으니, 제왕(帝王)들이 항상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듬해 정초인 1월 25일에는 다시 명종 임금에게 학문을 권하는 상소를 올렸다.

“신들은 삼가 아룁니다. 하늘이 큰 재앙을 내려 두 성왕(聖王)께서 잇달아 승하하시어 나라가 경황이 없어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다가, 전하께서 등극하신 이래로 영명하고 의젓하신 모습을 보여 날로 존경의 대상이 되며 학문을 부지런히 하심이 강론(講論)할 때에 나타나자 모두가 기뻐 뛰면서 조금이라도 더 살아 태평한 세월을 다시 보기를 바라고 있는데, 전하께서는 무엇으로써 이러한 인심의 기대에 부응하시겠습니까?

옛적에 은 나라 왕 태갑(太甲)이 새로 즉위했을 때에 그의 신하 이윤(伊尹)이 고하기를 ‘왕께서는 그 덕(厥德)을 이으셨는데 모든 것이 처음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임금이 다스림의 기반을 세우려고 한다면 즉위한 초기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초기에 기반을 만들지 않는다면 아무리 지혜가 있는 이라도 그 후반에 잘할 수가 없습니다. 일찍이 천하의 일을 보건대 처음은 있고 끝이 없는 예는 많은데 처음이 없이 끝이 있는 것은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다스림의 도에만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학문의 근본 역시 처음에 달려 있기 때문에 옛적에는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반드시 어린 나이, 곧 생각이 아직 흐트러지지 않고 욕심이 싹트지 않은 때에 했습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가르치면 버릇과 지혜가 자라나면서 마음과 더불어 변화하는 까닭에 자신도 모르게 성현의 영역에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만약 미리 가르치지 않고 사려(思慮)와 호오(好惡)가 안에서 생기고 뭇 사람들의 변언(辯言)이 밖에서 녹인 뒤에 비로소 배우게 한다면,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여 날아가는 기러기를 쏘아 잡을 생각이 마음속에 없지 않아서 끝내 발명(發明)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중간 생략>

전하께서는 새로 보위에 오르셨고 나이 아직 어리시니 다스림의 처음과 배움의 시초가 다 지금에 있습니다. 전하께서 이때를 놓치지 않고 힘을 쓰신다면 요순(堯舜)의 학문과 당우(唐虞)의 다스림을 오늘날에 재현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시면서 이때를 놓치고 힘쓰지 않는다면 뒷날의 치란(治亂)의 기미가 여기서 결정될 것이니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요순의 학문이 있은 뒤라야 당우의 다스림이 있게 마련이므로 그 다스림의 근본을 구하는 것은 올바른 배움의 길을 얻는 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중간 생략>

전하께선 이미 차례를 따라 글을 읽고 강구(講究)하여 그 뜻을 통하셨으므로 학문이 높은 스승이나 선비라 하여도 거기에 더 더할 것이 없으니, 지금은 마땅히 마음에 본받고 몸으로 실천하여 그 효과를 거둘뿐이요, 분분한 강설(講說)에 다시 마음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학문이 이미 성숙하였지만 만에 하나라도 혹 미진한 데가 있을까 염려하는 것은 신의 지극한 정(情)이며, 나의 학문이 이미 이룩되었지만 만에 하나라도 미진한 곳이 있지나 않을까 하고 우려하는 것은 성인(聖人)의 지극한 덕(德)입니다.

<중간 생략>

‘명덕(明德)’이란 신민(新民)의 첫 일이요, 신민은 명덕의 마지막 일이니, 명덕이 아니면 신민의 기본이 될 것이 없으며 신민이 아니면 명덕의 공을 거둘 수 없습니다. 세상의 임금들이 신민을 일삼지 않는 사람은 없으면서도 신민하는 도(道)가 명덕에 근본됨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신민할 즈음에 다만 법률과 형상(刑賞)만으로도 충분히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 어찌 신민하는 도를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신민하는 위치에 계시니 신민하는 일을 행하시되 법률이나 상벌 따위의 말단적인 것에 구애되지 않고 명덕으로써 근본을 삼으신다면 아마도 배운 것을 저버리는 일이 없게 될 뿐만 아니라 억만년토록 끝이 없을 조선의 터전이 이로 인하여 더욱 공고해질 것입니다.

<중간 생략>

대개 사람이 배운다는 것은 마음[心]과 이치[理]일 뿐입니다. 마음이 비록 한 몸을 주장하지만 그 체(體)의 허영(虛靈)함은 족히 천하의 이치를 주관하며, 이치가 비록 만물에 산재하여 있지만 그 쓰임의 미묘함은 실로 사람의 마음을 벗어나지 아니합니다.

<중간 생략>

전하께서는 천자(天姿)가 수미(粹美)하시고 총명한 덕이 이미 도(道)에 가까우시며 복잡한 정사(政事)는 모두 자전(慈殿)께서 총괄하고 계시니, 이런 때 전하께서 오로지 학문에 온 마음을 쏟으신다면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의 효과를 볼 날을 확실히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들이 경연(經筵)에서 상을 모시면서 전하의 학문을 보건대 날마다 고명(高明)해지고 끊임없이 도(道)에 가까와 짐을 보고 전하의 학문에 만의 하나라도 보탬이 될 만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기에 《대학》의 강(講)을 마친 이 때 격치(格致)의 설에 대하여 이미 아뢰고 남은 말을 주워모아 살피기를 좋아하시는 전하의 정성에 대비하오니 바라건대 전하께서 유념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제 소(疏)의 뜻을 보니 학문을 권면하는 방법이 지극히 간절하다. 내 비록 불민하나 항상 유념하겠다.”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2월 7일에는,《대학》을 설명하는 상소를 올렸다.

“신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유충(幼沖)하신 때 보위에 오르셨지만 언행이 법도에 맞고 총명하고 슬기가 있어 어느 왕보다 뛰어나신데다가 학문이 날로 성취되어 일찍부터 사물(四勿) 을 일삼았고 일관(一貫)을 궁구하셨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박문약례(博文約禮)한 선비를 가려 뽑아 경연(經筵)에서 모시도록 해야 마땅합니다.

신은 초야의 한미한 신분에다 둔한 자질과 거친 학문으로 경연(經筵)에 참여하여 장관(長官)의 지위까지 이르렀으나 전하의 마음을 넓은 데로 인도하지도 못하고 글뜻을 분명하게 알지도 못하며 걸음걸이는 단정치 못하고 말은 더듬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니 분수에 넘쳐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극도로 교차됩니다.

신이 선왕조를 섬길 적에 경악(經幄)에서 모셨지만 외람되게 헤아릴 수 없을 막대한 은혜만 받았을 뿐 성상의 잘못을 깨우쳐 드리는 하찮은 보답도 못하였습니다. 부묘(祔廟)를 하고 나니 덧없는 세월의 아픔이 더욱 새로와져 진실로 선왕께 갚지 못한 은혜를 전하께 갚고 싶습니다.

창안백발(蒼顔白髮)에 이제 황혼이 임박했으니 신의 가슴에 품은 생각을 어찌 감히 숨기겠습니까. 전에 진강(進講)을 마친 《대학》 일부 가운데서 요긴한 것만 모아서 전하를 위해 아뢰겠습니다. 조그마한 천한 정성을 천지(天地)와 조종조(祖宗朝)는 실로 아실 터이니,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살펴주소서.

《대학》이란 제왕(帝王)이 세세토록 입교(立敎)하는 큰 법입니다. 글자 수는 겨우 1천 7백 51자이지만 밖으로는 규모가 크고 안으로는 절목(節目)이 세밀하며 본말(本末)의 차례가 지극히 간절하고도 자세하여 조금도 소홀한 데가 없습니다. 이를 배우는 요령은 가슴에 새겨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임금된 자면 그 누가 자신이 이제 삼왕(二帝三王)이 되고 싶지 않았겠으며, 신하된 자면 그 누가 고요(皐陶)・기(夔)・이윤(伊尹)・주공(周公)이 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후세의 임금과 신하들이 우(虞)·하(夏)·주(周)에 조금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대학》의 가르침이 전해지지 않고 《대학》의 도가 행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적에 우(禹)가 순(舜)을 경계하기를 ‘단주(丹朱)처럼 오만하지 말라.’고 하였고, 주공(周公)은 성왕(成王)을 경계하기를 ‘은왕 수(殷王受)처럼 술에 빠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신하된 자들은 그들의 임금을 성인으로 여기지 않고 충성을 다하지 않았으며, 임금된 자 또한 자신을 성인으로 생각한 적이 없어 경계 받기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거리에 있는 어린아이들도 다 《대학》을 읽을 줄 알며, 밝은 덕[明德]을 어떻게 밝히느냐고 물으면 틀림없이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이라고 답하며, 신민(新民)을 물으면 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라고 말하여 그 대답이 마치 메아리나 그림자와 같이 상응(相應)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행하는 방법을 물으면 멍하여 그 향배조차 알지 못합니다.

<중간 생략>

신이《대학》경일장(經一章)을 읽어 보니 ‘그칠 데를 안 뒤에야 정함이 있다.[知止而後有定]’고 하였는데, 주자가 해석하기를 ‘정(定)이란 뜻에 정해진 방향이 있음[志有定向]을 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학문은 그칠 데를 알아서 방향을 정하는 것을 반드시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정해진 방향을 모른다면 이는 마치 장님이 지팡이로 땅을 더듬는 것과 같아서 장안(長安)은 서쪽에 있는데 동쪽을 향해서 웃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설령 하루에 천리를 간다고 하더라도 수고롭기만 하고 이익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군자는 반드시 격물(格物)하여 치지(致知)한 뒤에야 그칠 데를 알아서 방향을 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처음 배우려는 자가 입덕(入德)하는 문이 됩니다.

<중간 생략>

신이 《대학》을 읽어 보니, 그 글이 지극히 요약되어 있어 네 번 강고(康誥)를 인용하였는데 겨우 15자입니다. 그 ‘능히 덕을 밝힌다.[克明德]’는 것은 몸을 수양함을 말하고, ‘새로운 백성을 진작한다.[作新民]’는 것은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말하며, ‘갓난아이처럼 보호한다.[如保赤子]’는 것은 백성을 인애(仁愛)함을 말하고, ‘명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惟命不于常]’는 것은 하늘의 명은 믿기 어려우니 마땅히 사람이 할 일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아, 진실로 임금이 날마다 이 15자를 외워 순간순간 마음에 새기기를 ‘나의 학문은 과연 내가 타고날 때 받은 밝은 덕[明德]을 능히 밝혀서 조금도 가리움[累]이 없는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있는가? 나의 도가 과연 우리 하늘과 우리 조종(祖宗)이 나에게 맡긴 억조 창생들을 새롭게 하여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낡은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한 자가 없는가, 아니면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옛 버릇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하고, 또 ‘내가 내 나라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과연 어린아이의 부모가 아이를 보호하는 마음과 같은가, 아니면 미진한 점이 있는가?’라고 하며, 늘 천명의 믿기 어려움을 근심하고 인사(人事)의 미진(未盡)함을 경계하여,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어느 때든 안일하거나 나태하지 않으며 처음과 끝이 오직 한결같다면, 이 15자(字)는 순(舜)의 16자(字)와 함께 제왕(帝王)의 밝은 스승이 되어 밝은 덕은 저절로 위에서 밝아지고 억조 창생은 저절로 아래에서 새롭게 될 것이며, 백성을 마치 다친 사람 보듯이 불쌍히 여기는 은택이 저절로 천하에 흡족하여 반드시 하늘에 기도하지 않더라도 하늘의 명[天命] 또한 그를 위하여 유신(維新)해 줄 터이니 자연 억만년토록 무궁하고 영원할 것입니다.

<중간 생략>

신이 《대학》을 읽어 보니 ‘재물을 생산하는 데는 큰 방법이 있는데, 생산하는 자가 많고 먹는 자가 적으며 만드는 자가 빠르고 쓰는 자가 느리면 재물은 항상 풍족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들으니 나라가 의지할 것은 백성이요, 백성이 의지할 것은 농사입니다.

그러므로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보필할 적에 먼저 농사짓기의 어려움부터 진언(陳言)했던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남쪽 들에 점심을 내가니 권농관이 기뻐하네.[饐彼南畝 田畯至喜]’라고 하였고, 맹자(孟子)가 왕도(王道)를 설명할 때는 반드시 ‘농사철을 어기지 않으면 곡식이 넉넉하여 남아돈다.[不違農時 穀不可勝食]’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농사일은 늦출 수 없다.[民事不可緩也]’고 하였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낮엔 이엉을 엮고 밤엔 새끼를 꼬아서 서둘러 지붕을 인 뒤에야 비로소 백곡을 파종한다.[晝爾于茅 宵爾索綯 亟其乘屋 其始播百穀]’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민간 습속을 보면 근본(本)을 힘쓰는 자는 적고 말업(末)에 종사하는 자는 많습니다. 말업이 많으면 많을수록 먹을 것이 더욱 적어지고 먹을 것이 적을수록 말업이 더욱 많은 법인데, 날마다 굶주리는 길을 쫓아가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간 생략>

지금 어리석은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시장의 이익을 차지하기를 희망하고 밭에 나가 땀흘려 농사짓기를 싫어하여 논밭이 차츰 비게 되니 가을에 거두기를 어찌 바라겠습니까. 빈궁한 탓으로 좀도둑이 생기어 대낮에 죽이고 강탈하지만 이들도 모두 전하의 백성이니 어찌 애달프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인재(人災)만 없다면 9년 농사에 3년 먹을 것이 저축되어 공사(公私)간에 곡식이 넘치어 밖에까지 쌓이게 되며, 곡식이 물이나 불처럼 풍족하게 되어 곡식을 요구할 적마다 줄 수 있어 행인은 먹을 것을 싸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며, 민속(民俗)은 절로 후해지게 됩니다. 이렇게 된다면 설령 간혹 천재(天災)가 있다 해도 문제될 것이 없을텐데 하물며 도적의 염려가 있겠습니까. 우리 조종조 때는 각도의 감사가 모두 권농(勸農)의 직무를 겸하게 되어 있었으니, 조종조에서 근본에 힘썼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정사(政事)를 다스림에 있어 반드시 민산(民産)을 우선으로 하시어 궁중(宮中)에선 무일(無逸)을 도모하고 빈시(豳詩)를 외우소서. 또 팔도에 돈유(敦諭)하여 백성들을 농사에 종사케 하고 소민(小民)으로 하여금 본업(本業)인 농사에 힘쓰고 말리(末利)를 수치로 여기게 하며, 교묘한 속임수[巧詐]를 고치어 질박[朴實]하게 만드소서. 그런 뒤에 효제(孝悌)의 뜻을 널리 펴고 염치와 겸양의 기풍을 권장함으로써 즉위한 처음의 대화의 다스림[大化之治]을 높이신다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중간 생략>

하니, 명종 임금은 “이제 소의 내용을 보니 성의가 간절하다. 내가 비록 어리고 어리석어 능히 실행은 못하지만 어찌 유념하지 않겠는가.”라고 고마워했다.

그해 3월 28일에는 ‘간관(諫官)들의 간언(諫言)을 받아드리라’는 차자를 올렸다.

“삼가 생각하건대 임금은 반드시 마음을 비워서 간언(諫言)을 받아들이고 대간은 반드시 충성을 다해 할 말을 다하여서, 상하가 각각 그 책임을 다한 뒤라야 나라일이 거의 잘못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경은 다만 사칭 내지(詐稱內旨)하였을 뿐만 아니라 추산(推算)·원대(怨懟) 등의 일에 이르러, 정상이 부도(不道)에 미쳤으니 죄가 용서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간언을 잘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이 없고 진언(進言)할 때 머리를 깨뜨리면서 하는 충성이 없어서, 다만 근도 부처(近道付處)할 것을 명령하시니 과연 율에 의하여 죄를 정한 것입니까. 다만 전지에 자세히 기록할 것을 청하였으니 과연 사홍(士洪)과 안로(安老)의 수족(手足)을 잡아매었다고 하겠습니까. 쾌히 따르심을 얻지 못한 채 갑자기 합계(合啓)를 정지하니 이목지관(耳目之官)이 과연 이러한 것이겠습니까. 신들이 논사(論思)의 직임에 있어서 침묵만 지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5월 4일에는 다시《중용》을 공부하는 방법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총명은 타고나셨고 문리(文理)는 남보다 뛰어나십니다. 일심(一心)을 끊임없이 밝혀서 끝까지 학문에 힘기울이시어, 《소학》을 읽으시면서 함양하는 방법을 이미 터득하셨고 《대학》을 배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남을 계도(啓導)하려는 마음을 두셨습니다. 순서대로 차츰 나아가심에 침착하여 여유가 있었고 날이 갈수록 성취, 진보하셨습니다. 《중용》을 읽으시면서 옛사람의 묘(妙)를 구하시기에 이르셨으니, 지금 성학(聖學)의 조예는 이미 노사 숙유(老師宿儒)가 따라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뒷날 성취하실 큰 공부가 어찌 보통 사람으로서 헤아릴 바이겠습니까. 정일 집중(精一執中)의 전통이 장차 돌아갈 바가 있을 것이며 당우(唐虞)·삼대(三代)의 다스림을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비록 그렇더라도 책에 실려 있는 도(道)는 숨겨지거나 드러남이 없지만 그 책을 읽는 사람의 학문에는 깊고 얕음이 있습니다. 구두(句讀)만을 바르게 떼는 데서 그친다거나 문리(文理)만을 분명하게 밝히는 데에서 그친다면, 그것은 글은 글대로이고 나는 나대로여서 한갓 종이에 쓰인 빈말이 된 채 구이(口耳)의 지엽적인 공부가 됨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반드시 그 이치를 파고들어 얻는 바가 있고 마음에 체득하여 실천하는 바가 있어야만, 배운 바가 자신의 것이 되어 종신토록 쓰더라도 다쓰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중용》의 한 책을 살펴보건대, 논한 것이 깊고 은밀하여 초학자는 쉽게 알지 못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큰 요체는 첫째 장(章) 속에 들어있으니 존성(存省)하는 방법이 모두 논의되어 있고 공화(功化)의 큼을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성인의 도란 것도 여기서 더할 것이 없습니다. 천명(天命)이 사람마다 부여되어 있어 뭇 이치가 모두 갖추여져 있으나 희·노·애·락(喜怒哀樂)은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발(發)하기 전에는 성(性)이요, 이미 발하여서는 정(情)이며, 치우침이 없음은 중(中)의 체(體)가 확립된 것이요, 어그러짐이 없음은 화(和)의 용(用)이 행해진 것입니다. 그것을 미루어 극도에 이르도록 함에 미쳐서는 내 마음의 바름과 내 기질의 순함이 바로 천지 만물과 서로 유통되어 간격이 없게 되는 것이니, 위육(位育)의 공효가 어찌 나의 생각 밖에 있다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부지런히 경연(經筵)에 나아가시어 하루에 세 번씩 접견하시므로 구두나 글 뜻에 정확하다는 것은 신들이 모두 들어온 바입니다. 그러나 이치를 파고들고 마음에 체득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전하만이 혼자 아시는 일이요, 신들의 어리석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속의 미세한 생각이 과연 일호의 편의(偏倚)도 없이 그 중(中)에 꼭 이르며, 일호의 어그러짐도 없이 그 화(和)에 꼭 이르십니까?

한유(漢儒)가 말하기를 ‘모습이 보이지 않거든 그림자를 보라.’ 하였습니다.

몇 해 전부터 가뭄이 잇달고 서리와 번개가 때 없이 있으며 시내와 못은 메말랐습니다. 반드시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고서야 천지가 제자리[立]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근으로 백성들이 유리하고 전염병이 치성하여 사람들이 모두 죽어 집은 비고 시체는 들을 덮었습니다. 반드시 사람들이 모두 죽고 만물이 다 없어진 뒤에야 기르지[育] 못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중화(中和)에 대한 학문이 아래에서 미진한 까닭에 위육의 공효가 위에서 나타나지 않는 듯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중용》의 한 책에 온 마음을 쏟으시고 첫째 장의 요체를 궁구하시어 발하기 전에 공구하여 존양(存養)의 공부를 도탑게 하고, 발하는 처음부터 삼가 하여 성찰(省察)의 공부를 물샐틈 없게 하소서. 희·노·애·락의 근본을 잠시라도 지극히 고요한 속에서 중(中)치 않음이 없도록 하시고, 희·노·애·락의 발함을 한 가지라도 사물과 응대할 때에 화(和)치 않음이 없도록 하시면 천지가 제자리 잡고 만물이 잘 자라게 되어 재앙이 상서로 바뀜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신다면 《중용》을 잘 읽고 배운 것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갓 말단의 일에만 분분하게 얽매인다면, 신들은 그것이 옳은 줄 모르겠습니다.

배우기 시작한 처음부터 갑자기 위육의 공효를 책임지우는 것은 등급을 뛰어넘어 차례가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활을 쏘는 자에게는 과녁이 있고, 길을 떠나는 자에게는 도착지가 있는 것과 같이 학문에서도 기약하는 바를 다른 곳에서 구하여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유충(幼沖)하신 나이에는 잡스런 생각이 많지 않아 희·노·애·락의 발함이 타고난 성(性)의 본체에 거의 어긋나지 않을 때입니다. 이 시기에 힘을 기울인다면 어찌 도의 경지에 쉽게 이르지 않겠습니까.

신들은 직책이 논사(論思)이니만큼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야 합니다. 어찌 구언(求言)을 기다려 아뢰겠습니까. 《중용》의 강독이 끝나면 한 마디 말을 올려 성학(聖學)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게 하고자 한 것은 진정으로 북받쳐 오르는 하정(下情)이 있어서입니다.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요즈음 흉년이 잇달고 뭇 재앙이 거듭 나타났는데, 지금처럼 심힌 때가 없었다. 이는 반드시 내가 어리고 불민한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두려운 생각이 마음에 절박하나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으므로 한갓 걱정만 하고 있을 뿐이다. 소(疏)에서 논의한 것들을 보니 그 의논이 매우 마땅하다. 내 비록 명철하지는 못하나 어찌 마음에 두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5월 21일에 열렸던 석강(夕講)에서는 ‘추수 후부터 중들의 도성 출입을 금하라’고 건의하였다.

이는 내당(內堂)에서 ‘부처를 숭상한다’는 말이 안팎으로 퍼지면서 중들이 도성을 출입하는 일이 불어났기 때문에 아뢴 것이다.

“불씨(佛氏)의 가르침은 비록 5척 동자라도 모두 그 그릇됨을 압니다. 근년에 중들 중에 서울을 출입하는 자가 많습니다. 선왕조(先王朝)에서는 낮에 서울이나 도회에 나다니지 못하게 한 지가 오래였습니다. 이제 성중을 이같이 휘젓고 다니는데, 아직도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상께서 불교에 절대로 뜻이 없으시다면 중들이 서울에 들어오더라도 어찌 용납되겠습니까. 지금 만약 일체 금지시킨다면 반드시 구렁텅이에서 죽을 것이니, 가을 새 곡식이 나기를 기다렸다가 출입을 금하여 그 수가 불어나지 않도록 하소서.”

그리고 1547년(명종 2) 7월 25일에는 ‘대간을 중히 여기라’는 말씀을 아뢰었다.

“윤춘년이 아뢴바, 대간을 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은 옳습니다. 옛날에 임금에게 전언(進言)하는 자가 탕(湯)에게는 ‘간언을 따르고 거역하지 마소서.’ 하였고, 고종(高宗)에게는 ‘나무가 먹줄을 따르면 곧아지고 임금이 간언을 따르면 성군(聖君)이 됩니다.’ 하였으니, 대간의 임무가 이와 같이 중한 것입니다.”

선생은 명종이 즉위하자마자 여러 차례 학문을 권하고 공부하는 방법을 상소하였으며, 임금이 처신해야 할 일도 줄기차게 건의하였다.

이런 일들은 모두가 자신의 영달이 아니고, 오로지 명종이 하루 빨리 학문을 익혀서 성군(聖君)이 되기를 바라는 간곡한 충정 때문이었다.


4. 맺는 말

선생은 비록 칠원에서 태어났지만 늘 선대(先代)가 살았던 상주(尙州)를 고향으로 생각한 조선 중기의 대학자요, 큰 교육자였다.

선생은 조선 최초의 서원(書院)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우고 유학(儒學)을 널리 장려하셨다. 선생이 그 당시 서원을 세우지 않았더라면 조선의 유학이 그렇게 번창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선생은 성품이 본래 학문을 좋아하여 읽지 아니한 글이 없었으며 늙을 때까지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그가 외직(外職)을 맡았을 때는 반드시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선생은 도덕이 깊고 두터워서 상하를 감동하고 효제(孝悌)가 신명(神明)에게 통하였다. 사람을 가르칠 적에는 인륜의 법칙을 강조하였고, 학문을 일으키고 문학을 숭상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던 대학자였다.

그리고 12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명종(明宗)이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섭정(攝政)으로 외척(外戚)의 전횡(專橫)이 국정을 혼란하게 할 때도 학문에 열중해서 장차 성군(聖君)이 되기를 염원하면서 늘 명종에게 면학(勉學)을 권했다. 이는 어린 명종 임금이 성군(聖君)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충신의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을 때에는 3년간 묘소를 지키는 바람에 수염과 두발이 모두 희어졌다. 이때에도 사흘에 한번은 집에 내려와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부인의 방에는 들르지 않았다. 삼년상(三年喪)을 끝마치고 복직할 때는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스스로 외직을 요청하여 곤양 군수(昆陽郡守)가 되었으며, 그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선생이 장례를 치를 때까지 거친 밥에 물을 마시고 3년간 상막(喪幕)의 짚자리에서 거처한 효자(孝子)였다.

그리고 선생은 성품이 담박하여, 30년간 조정에 나와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이르렀으나 의복이 빈한(貧寒)한 선비와 같았고, 밥상에 고기 반찬을 한 가지 이상 놓지 않았으며, 좌석에는 털방석이 없었고, 마구간에는 좋은 말이 없었으며, 사는 집도 임대하여 살았다.

봉록(俸祿)이 다소 넉넉하였으나 의식에 쓰고 남은 것은 모두 종족을 도와주고 손님을 접대하는데 썼다. 그래서 선생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선생은 “나의 분수에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하였다. 실제로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집안에 남은 곡식이 한 가마도 없었다.

그래서 선생이 돌아가시자 장례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조정의 신하들이 건의하고 임금이 특별히 부조를 후하게 하사하고 상여가 돌아갈 때 각 고을에서 경비를 지급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돌아가신지 4개월이 넘은 11월 19일에야 고향인 칠원(漆原)의 선영 아래에 자리 잡아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이처럼 훌륭하신 선생이 상주 출신이라는 것은 우리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부록> ‘의아기(義鵝記)

주세붕(周世鵬, 1495~1554)

이 의아기(義鵝記)는 ‘의리 있는 거위 이야기’로 우리나라에서는 명문장으로 손꼽히는 글이다.

경인년 2월에 큰 누님께서 가락리의 집에서 돌아가셨다.(上章攝提格歲單 閼之月 大姊卒于駕洛里第)

누님댁에는 한쌍의 흰 거위를 기르고 있었는데, 누님이 돌아가시자 그 거위들이 안마당으로 들어와서는 안방을 바라보고 슬피 울었다.(姊家有 一雙白鵝 及姊卒 入內庭 望堂戶 哀鳴)

이처럼 애처롭게 울기를 몇 달을 계속하니 온 집안 식구들이 그 때문에 더욱 가슴 아파하였다.(如是者累月 一家益爲之悲慟)

나는 그때 감사의 부관이 되어 멀리 관 밖에 나가 있었으므로 그런 소 문만 들었을 뿐 직접 보지는 못했다.(如時以幕客 在關外 聞之而已)

이듬해 봄에 무릉촌 집이 완성되었기에 그 한쌍의 거위를 데려다 놓았 다. 그런데 두 마리가 다 숫컷이었다.(明年春 武陵村舍成 移置兩鵝 皆雄 也)

나는 그 당시 쓸쓸하고 심심하게 지내고 있던 참이라 그놈들을 데려오 게 한 것이다.(余方索居無聊)

눈처럼 깨끗한 깃털은 티끌 하나 묻지 않았고, 이놈이 울면 저놈이 따라 우는 것이 마치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고, 물을 마셔도 함께 마시고 모이를 쪼아 먹어도 함께 먹었다. 또 그놈들이 마당을 빙빙 돌며 춤추듯 뛰어다니는 모양이 마치 서로를 위로해 주는 듯했다.(觀其雪衣皎潔 一塵 不染 和鳴得得 飮啄必共 繞除翩躚 若相慰焉)

나는 정성으로 모이도 주고 물도 떨어지지 않도록 마음을 썼다.(添其料. 救其渴)

날마다 그놈들과 노는 것이 하나의 재미가 되었는데, 뜻밖에도 그 해 시 월 열나흗날 밤에 그 중 한 마리가 죽어 버렸다.(曰與之相對 十月十四 日夜 其一死)

아침에 일어나서 거위 우리를 살펴보니 살아있는 놈이 죽은 놈을 품고 서 날개를 치며 슬피 울어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朝起而視之 則其一抱 其死鵝 叩翼哀叫)

그 울음소리가 하늘까지 사무치니 보는 사람마다 불쌍하고 안타까워 한숨을 지었다.(聲徹교廓 見者嗟悼)

동네 아이들이 와서 죽은 놈을 가져가자, 산 놈은 바로 일어나 이리저리 배회하기 시작했고 사방을 위아래로 살펴보곤 했다.(有村童取而去之 乃 復徘徊 四顧上下)

원망어린 소리로 울어대며 지난날 저희들이 놀고 모이를 쪼아먹던 곳을 따라 사방으로 왔다갔다하는 것이 미치 죽은 놈을 찾는 것 같았다.(號怨 遍走. 其所曾遊啄之地. 望望然若有求)

울음소리는 더욱 간절해지고 고통스러워 지더니 열흘쯤 지나자 목이 쉬 어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게 되었다.(聲益懇苦 旬日來 至不得出音)

무릇 거위는 하찮은 미물인데도 그 주인을 사모하는 정이 그처럼 충성 스럽고, 그 친구를 불쌍히 여기는 모습이 이처럼 의로우니 그 얼마나 아 름다운가.(夫鵝 微物也 其戀主似忠 其憫友似義 何其異耶)

내가 보기에 세상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친구를 팔기도 하고 자신까 지도 팔아넘기는 사람들이 열에 다섯도 더 되는데, 하물며 나라에 충성 하는 이는 대체 몇 사람이나 될 것인가?(吾觀世之賣友而自售者太半 其忠 於國者 能幾人哉)

아! 천지사이의 많은 무리 가운데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한 존재이다.(噫 萬類天地中 唯人最貴)

그런데 저 꽉 막힌 미물인 거위는 군자의 지조를 지녔고, 신령스럽다는 사람은 도리어 미물만도 못하니, 그렇다면 사람의 옷을 입고도 말이나 소처럼 행동하는 그런 인간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孰謂物之塞者有君子之操 而人之靈者反不如物耶 然 則彼襟裾而馬牛行者 謂之人 可乎 不可也)

반대로 깃털로 몸을 감쌌지만 어질고 의로운 마음을 가진 짐승을 그냥 미물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羽毛而 仁義心者 謂之物 可乎 不可也)

거위야 거위야 나는 너를 사랑한다.(鵝乎鵝乎 吾甚敬汝)

내가 사람들의 나쁜 마음을 돌려서 너와 같은 성실한 마음을 지니도록 하고자 하나, 그렇게 되지를 않는 구나.(雖欲回是人之腹 以爲汝篤不可 得矣)

그러니 앞으로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느냐? 답답한 노릇이구나. 이런 까닭으로 의로운 거위의 이야기를 적어서 오래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 다.(將奈何 因作義鵝記)

충성스럽고 의로운 거위를 본 주세붕 선생은 그 의리를 가상히 여기고 상찬하신다. 동시에 의롭지 못한, 거위만도 못한 인간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하고 있다.

의리란 간단하다. 한마디로 ‘관계지속’이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하는 이것이 곧 의리인 것이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는 것은 의리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