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4호

상주학. 상주문화 제 24호. 개도 700주년을 맞은 경상도(慶尙道)의 상주(尙州)와 상주의 낙동강(洛東江)

빛마당 2015. 3. 28. 21:35

<기조연설>

개도 700주년을 맞은 경상도(慶尙道)의

상주(尙州)와 상주의 낙동강(洛東江)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목 차

1. 머릿말 8

2. 경상도(慶尙道) 지명(地名)의 탄생 9

3. 상주목(尙州牧)의 위상(位相) 11

4. 상주(尙州)와 낙동강(洛東江) 25

<부록 1> 임술년 낙강범월서(壬戌年洛江泛月錄序) 33

<부록 2>

경인년 낙강범월속유시서(庚寅年洛江泛月續遊詩序) 37

개도 700주년을 맞은 경상도(慶尙道)의 상주(尙州)와 상주의 낙동강(洛東江)*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1. 머릿말

 오늘의 학술대회의 목적은 ‘경상도 개도 700주년’을 맞이해서 상주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기 위함이다.

지금은 비록 쇠약한 모습이지만 상주(尙州)는 신라시대 때도 그랬지만, 고려시대에서도 큰 고을이었다. 그래서 고려 충숙왕 원년(1314)에 큰 고을이었던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머리글자를 따서 경상도(慶尙道)라 정하였고, 이 이름이 조선 500년 동안 유지되었으며, 200여 년 동안 조선의 경상감영(慶尙監營)이 이곳 상주(尙州)에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광복(光復) 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상주(尙州)는 근대화 물결을 타지 못하는 바람에 쇠락하였다. 그러나 지역의 내부에서는 옛 영화를 되찾고자 하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경상도(慶尙道) 개도(開道) 700주년을 맞아서 상주의 자랑스러웠던 옛 모습을 다시 정리하여 후세(後世)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2. 경상도(慶尙道) 지명(地名)의 탄생

경상도(慶尙道)는 삼한(三韓) 때에는 진한(辰韓) 땅이었고, 삼국(三國) 때에는 신라 땅이었는데, 고려 태조(太祖)가 신라와 백제를 병합하면서 동남도 도부서사(東南道都部署使)를 설치하고, 사(司)를 경주(慶州)에 두었다가, 성종(成宗) 14년(995)에 경내(境內)를 10도(道)로 나누어, 상주(尙州)의 관할은 영남도(嶺南道)로 하고, 경주(慶州)와 금주(金州)의 관할은 영동도(嶺東道)로, 진주(晉州)의 관할은 산남도(山南道)로 하였다.

그리고 예종(睿宗) 원년((1106)에는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라 일컬었고, 명종(明宗) 원년((1171)에는 이 경상도(慶尙道)를 둘로 나누어서 경상주도(慶尙州道)와 진합주도(晉陜州道)로 하였으며, 명종 16년(1186)에는 이계장(李桂長)을 동남해도부서사(東南海都部署使) 겸 경상주도 안찰사(慶尙州道按察使)로 삼았다.

또한 신종(神宗) 7년(1204)에 다시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로 고치고, 그 뒤에 경상진안도(慶尙晉安道)로 고쳤으며, 충숙왕(忠肅王) 원년(1314)에 ‘경상도(慶尙道)’로 하였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와서도 이 ‘경상도(慶尙道)’라는 이름을 그대로 따랐으며 도관찰사(都觀察使)를 두고 사(司)를 상주(尙州)에 두었다.

당시 경상도(慶尙道)는 그 땅이 동남쪽에는 큰 바다가 있고, 서쪽은 지리산(智異山)을 경계로 하여 감음현(減陰縣) 육십현(六十峴)에 이르고, 북쪽은 죽령(竹嶺)을 경계로 하여 문경현(聞慶縣) 초점(草岾)에 이르는데, 대구군(大丘郡)이 경상도의 중앙에 있으며, 동서(東西) 길이가 3백 76리, 남북(南北)의 길이가 4백 48리였다.

경상도의 관할[所管]은 유수부(留守府)가 1곳, 대도호부(大都護府)가 1곳, 목(牧)이 3곳, 도호부(都護府)가 6곳, 군(郡)이 15곳, 현령(縣令)이 6명, 현감(縣監)이 34명이었다.

그리고 명산(名山)이 5곳인데 그중의 하나는 상주의 사불산(四佛山)이었고, 대천(大川)은 3곳인데, 첫째가 낙동강(洛東江)이고, 둘째가 진주(晉州) 남강(南江)이며, 셋째가 초계(草溪) 황둔진(黃芚津)이다.

낙동강의 근원(根源)은 셋인데, 

 하나는 봉화현(奉化縣) 북쪽 태백산(太伯山) 황지(黃池)에서 나오고, 하나는 문경현(聞慶縣) 북쪽 초점(草岾)에서 나오며, 하나는 순흥(順興) 소백산(小白山)에서 나와서, 상주(尙州)에 이르러 비로소 낙동강(洛東江)이 되었다.

선산(善山)에서 여차니진(餘次尼津), 인동(仁同)에서 칠진(漆津), 성주(星州)에서 동안진(東安津), 가리현(加利縣)에서 무계진(茂溪津)이 되고, 초계(草溪)에 이르러 합천(陜川)의 남강(南江) 물과 합하여 감물창진(甘勿倉津)이 되고, 영산(靈山)에 이르러 또 진주(晉州) 남강(南江)의 물과 합하여 기음강(岐音江)이 되며, 칠원(漆原)에서는 우질포(亐叱浦)가, 창원(昌原)에서는 주물연진(主勿淵津)이 되어 김해(金海)에 이르고, 밀양(密陽) 응천(凝川)을 지나 뇌진(磊津)이【해양강(海陽江)이라고도 한다.】되고, 양산(梁山)에서는 가야진(伽倻津)이 되며, 황산강(黃山江)이 되어,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둘째는, 진주(晉州) 남강(南江)이다.

그 근원(根源)이 둘이니, 하나는 지리산 북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와서, 진주 서편에서 합류하여 광탄(廣灘)이 되고, 의령(宜寧)에 이르러 정암진(定巖津)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 기음강(岐音江)으로 들어간다.


 셋째는, 초계(草溪) 황둔진(黃芚津)이다.

그 근원(根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전라도 무주(茂朱) 초현(草峴)에서 나오고, 하나는 감음현(減陰縣) 황석산(黃石山)에서 나와서, 거창(居昌)에서 합류되어 합천(陜川)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감물창진(甘勿滄津)으로 들어간다.

고려 충숙왕(1314년)때 이름 지었던 ‘경상도(慶尙道)’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어도 ‘경상도(慶尙道)’라는 이름은 변함없이 쓰였으며, 1896년(고종 33)에 비록 경상북도(慶尙北道)와 경상남도(慶尙南道)로 행정구역이 나누어졌지만,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첫 글자를 딴 지명(地名)은 지금까지 쓰여 지고 있다.


3. 상주목(尙州牧)의 위상(位相)


 1) 사벌국(沙伐國)의 성립과 멸망

신라가 상주일대를 정복한 시기는 대략 3세기 중엽인데 그 당시 상주지역의 소국(小國)으로 유일하게 이름이 남아있는 것이 사벌국(沙伐國)이었다.

사벌국이 있었던 곳은, “사벌국고성(沙伐國古城)은 병풍산 아래에 있다. 성(城) 옆에 높고 둥근 구릉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사벌왕릉이라고 한다. 신라 말에 견훤의 아비 아자개(阿慈介)가 이 성에 웅거하였다”라고 기록된『신증동국여지승람』권28, 상주목 고적조에서 알 수 있으며, 병풍산성이 있는 병성동 일원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사벌국은 신라 첨해왕 때 멸망하여 신라의 주(州)로 편입되었다.

이후 신라는 법흥왕 12년(525)에 사벌주(沙伐州)를 상주(上州)로 하였고, 진흥왕 13년(552)에 상주정(上州停)을 설치하여 이를 근거로 오늘날의 충청북도 보은(報恩)․영동(永同)․황간(潢澗)․청산(靑山)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리고 선덕여왕 14년(645) 정월, 백제의 대군이 매리포성(買利浦城)을 공격하자, 선덕여왕은 김유신(金庾信)을 상주장군(上州將軍) 즉 상주정장군(上州停將軍)으로 임명하고 반격하게 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 전공(戰功)으로 김유신은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이 되었다.


 2) 삼국 통일과 상주(上州)

삼국시대 말기에 들어서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신라의 서북방에 있는 상주(尙州)는 군사적 전진기지(前進基地)였다.

선덕여왕 11년(642) 가을에 신라는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서쪽 40여 성을 상실하고 대 백제전선의 전진기지인 대야성 마저 함락되었다. 이로써 신라는 큰 타격을 받고 낙동강 동쪽으로 방어선을 후퇴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위기에 처한 신라는 이 해 겨울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로 보내어 군사동맹(軍事同盟)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이 무렵 백제는 김천, 구미지역을 침공하였고, 상주의 변경지역도 백제와 세력을 다투는 각축장이 되었다.

648년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당나라가 출병하자, 백제 정벌이 시작되었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태자 법민(法敏)과 대장군 김유신, 장군 품일(品日)과 흠춘(欽春)을 위시한 정예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황산벌로 떠나게 하고, 자신은 상주 백화산에 있는 금돌성(今突城)에 머물었다.

금돌성(今突城)은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에 있는 석성(石城)으로 당시 전세(戰勢)를 보고받고 왕명(王命)을 내리는 총사령부(總司令部) 역할을 한 곳이다.

이렇듯 삼국시대 말기에 상주는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하는 전초기지였고, 문무왕 4년(664) 7월에 품일(品日)장군 등이 일선주(一善州)와 한산주(漢山州)의 군사를 이끌고 웅진부성(熊津府城)의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돌사성을 쳐서 멸할 때도 상주는 삼국 통일전쟁(三國統一戰爭)에서 전진기지(前進基地)역할을 하였다.


 3) 상주(尙州) 지명(地名)의 탄생

삼국 통일을 이룬 후, 신라는 신문왕 5년(685)에 넓어진 국토를 9주 5소경으로 정비하였다. 9주(州)는 신라, 백제, 고구려의 옛 영토에 각각 세 개의 주를 두었으며, 신라의 영역에는 사벌주(沙伐州), 삽량주(歃良州), 청주(菁州)가 있었다.

따라서 상주(上州)지역의 대부분은 이때 사벌주(沙伐州)의 관할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경덕왕 16년(757) 12월에, 모든 제도의 명칭을 중국식으로 바꾸는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실시하여, 전국의 주(州)・군(郡)・현(縣)의 명칭을 한식(漢式)으로 개명(改名)하였다. 이때 사벌주(沙伐州)였던 이곳 지명(地名)이 상주(尙州)로 개명되었다.

상주(尙州)는 옛 상주(上州)에서 유래된 것으로 음개(音改)만 한 것이다. 따라서 정식 행정 명칭으로서 ”상주(尙州)“라는 지명은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당시 상주(尙州)는 광역주(廣域州)로서의 의미와 주치(州治)로서의 의미가 있었다.

광역주(廣域州)로서의 상주에는 주치(州治) 외에 예천군(醴泉郡 : 오늘의 예천), 고창군(古昌郡 : 오늘의 안동), 문소군(聞韶郡 : 오늘의 의성), 숭선군(崇善郡 : 오늘의 구미), 개령군(開寧郡 : 오늘의 김천), 영동군(永同郡 : 오늘의 영동), 관성군(管城郡 : 오늘의 옥천), 삼년군(三年郡 : 오늘의 보은), 고녕군(古寧郡 : 오늘의 함창), 화령군(化寧郡 : 오늘의 상주 화령)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현재의 경북 서북부지역과 이에 인접한 충청북도 일부 지역이 그 관할영역이었다. 따라서 사벌주에서 개명된 상주(尙州)는 1주(州)․10군(郡)․30현(縣)을 거느린 웅주(雄州)였다.


 4) 견훤(甄萱)의 출현

신라말기에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지방에서는 호족(豪族)이라는 새로운 세력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농민 봉기를 배경으로 각처에서 일어나서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자기들의 근거지에 성(城)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면서 그 지방에 대한 행정권, 군사권 그리고 경제적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그래서 견훤(甄萱)은 후백제를, 궁예(弓裔)는 후고구려를 건국함으로써 기존의 신라와 함께 후삼국이 정립하는 시대가 전개되었다.

견훤은 경문왕 7년(867)에 태어났으며, 상주 가은현(加恩縣) 사람이었다.

견훤은 효공왕 4년(900)에 농민을 규합해서 완산주에서 후백제왕이라 칭하였다. 특히 그는 “내 완산에 도읍하여 의자왕의 묵은 분함을 씻겠다.”고 하면서 백제의 부활과 신라 타도를 표방하였다.

그리고 경애왕 4년(927)에 견훤은 신라 왕경을 급습하여 포석정에 있던 경애왕을 시해하고 경순왕을 새 왕으로 세웠다. 이때 후백제로 돌아가던 견훤의 군대는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급파된 고려 태조 왕건의 5천 기병과 벌인 공산(公山)전투에서 대승(大勝)을 거두었으며, 왕건(王建)은 충신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을 잃고 몸만 겨우 빠져 나갔다.

그러나 견훤은 935년 3월에, 맏아들 신검(神劍)에 의하여 금산사에 유폐되고 후백제에는 신검이 왕위에 올랐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견훤은 백제를 부활시켜 찬란한 꿈을 펼치고자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부자간의 내분으로 멸망하였다.


 5) 고려의 군현제(郡縣制)와 상주목(尙州牧)

고려의 군현(郡縣)은 신라 때의 군현과는 영역 경계 및 규모가 달랐다. 즉, 태조대(918~943)의 군현개명(郡縣改名)은 나말려초(羅末麗初)에 지방사회에 일어난 호족중심의 지역편제(地域編制)가 반영되어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신라 때부터 지녀왔던 군현(郡縣)의 명의개정(名義改正)이 아니라 그것의 개편(改編)이었다.

고려는 건국한지 80여 년이 지난 성종 14년(955)에 이르러 지방제도를 실질적으로 개편하면서 전국적 규모로 외관을 파견했다. 그런데 외관 파견은 당시의 468개 군현 가운데 주명(州名)을 지닌 128개 군현에 국한되었으며, 나머지 현(縣)단위 군현(郡縣)에는 외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주(州)단위 군현(郡縣)이 현(縣)단위 군현(郡縣)을 속현(屬縣)으로 지니는 군현의 주속관계가 맺어졌다. 이러한 상태는 현종 9년(1018)의 지방제도 개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상주(尙州)는 태조 23년(940)에 상주(尙州)로 고쳤다가 그 후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로 다시 그 이름을 고쳤으며, 성종 2년(983)에 처음으로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때 상주는 그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현종 3년(1012)에 다시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部)가 되고 현종 9년(1018)에 전국 8목(牧)중의 하나로 상주목(尙州牧)이 되었다. 그리고 이때 상주는 지명별호(地名別號)를 상락(上洛)・상산(商山)이라 지정하였다.

고려의 상주목(尙州牧)은 신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광역주(廣域州)로서의 상주’와 ‘주치(州治)로서의 상주’의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즉 주목(州牧)은 주읍(主邑)으로서 그 직할 속읍(屬邑)과 향소부곡을 갖는 한편 군현제 영역과 부곡제 영역을 포괄하는 주읍 단위의 지역권을 그 영읍(領邑)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먼저 주읍(主邑)으로서 직할 속읍(屬邑과 향소 부곡(部曲)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속군(屬郡)은 문경(聞慶), 용궁(龍宮), 개령(開寧), 보령(保令), 함창(咸昌), 영동(永同), 해평(海平) 등 7개이고, 속현(屬縣)은 청산(靑山), 산양(山陽), 화령(化寧), 공성(功城), 단밀(丹密), 비옥(比屋), 안정(安定), 중모(中牟), 호계(虎溪), 어모(禦侮), 다인(多仁), 청리(靑里), 가은(加恩), 일선(一善), 군위(軍威), 효령(孝靈), 부계(缶溪) 등 17개였다.

부곡(部曲)으로는 양보(陽寶), 보양(保良), 단곡(丹谷), 주선(主善), 생물(生物), 장천(長川), 연산(連山), 무림(茂林), 하해(河海), 평안(平安), 백원(白原), 양영(壤寧), 관제(灌濟), 선은소(繕銀所), 해상이소(海上伊所) 등 17개였다.

따라서 상주목(尙州牧)의 범위는 현재의 영동, 보은, 문경, 봉화, 영주, 안동, 의성, 군위, 대구, 성주, 구미, 김천을 포함한 지역이었다.

또한 상주목은 계수관(界首官)으로서 그 관격(官格)에 맞는 수령(守令)과 속관(屬官)이 파견되었는데, 목사(牧使)는 3품 이상, 부사(副使)는 4품 이상, 통판(通判)은 6품, 사록 겸 장서기(司祿兼掌書記)는 7품, 법조(法曹)는 8품, 의사(醫師) 및 문사(文師)는 9품의 품계를 가졌다.

그리고 고려시기 상주 관아의 시설과 규모는 안축(安軸)의「객관기(客館記)」와 이색(李穡)과 권근(權近)이 쓴「풍영루기(風詠樓記)」에서 대강을 알 수 있다.

즉, 1343년에 상주목사로 온 안축(安軸)이 남긴 객관기(客館記)에 의하면, “객사는 충렬왕 33년(1307) 상주목사로 온 김영후(金永煦)가 세운 것이고 영남에서 제일 훌륭하다” 고 하였다.

다음으로, 이색(李穡)과 권근(權近)이 쓴 풍영루기(風詠樓記)에 따르면, “공민왕 19년(1370) 목사 김남득(金南得)이 관아를 중건하고 동북편에 과원(果園)을 설치하고 그 가운데 정자(亭子)를 세우니 이색(李穡)이 ‘풍영정(風詠亭)’이라 이름하였고, 이숭인(李崇仁)이 시를 지었으며, 우왕 9년(1380) 병화로 이 풍영정(風詠亭)이 소실(燒失)되자, 목사 송인(宋因)이 1390년에 정(亭)을 루(樓)로 바꾸어 구기(舊基)에 다시 세웠다”고 했다.


 6) 상주읍성(尙州邑城)의 축조(築造)

고려 공민왕 8년(1359)과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적은 두 차례나 압록강을 건너와서 노략질을 하였다. 특히 1361에는 10만 명이 넘는 홍건적이 침입하여 수도 개경이 함락되었으며, 공민왕이 상주를 거쳐 안동으로 몽진하였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상주에서 반년이나 머물었다.

이때 정세운(鄭世雲)은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 이방실(李芳實)과 함께 홍건적을 무찌르고 개경을 수복하고 잔적(殘賊)들을 몰아내어 난(亂)을 평정하였다. 그러나 김용(金鏞)이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을 속여 정세운(鄭世雲)을 죽이고 다시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를 죽임으로서 홍건적을 격퇴한 장수를 모두 잃는 비극이 있었다. 특히 김득배(金得培)는 상주 출신으로 상주에서 죽임을 당하여 애석함이 컸다.

그 후, 상주는 고려말에 있었던 왜구의 침입으로 또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 우왕 6년(1380)에 중모(中牟), 공성(功城), 청리(靑里) 등의 현(縣)에 왜구들이 처들어 와서 집을 불태우고 소란을 피웠으며, 상주읍성(尙州邑城)에 침입하여 관사(官舍)와 민가(民家)에 불을 질렀다. ‘경상도 제일’이라는 풍영루(風詠樓)도 이때 불탔다.

이때 왜구(倭寇)가 7일 동안 상주에 머물면서 온갖 행패를 자행했다. 그래서 더 이상 외적의 침입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서둘러 상주읍성(尙州邑城)이 축조되었다고 본다.

상주읍성(尙州邑城)에 대해서,

“상주읍성은 홍무(洪武) 을축년(乙丑年)에 돌로 쌓았고 주위 둘레는 3458척(尺)이고 높이는 9척(尺) 7촌(寸)이며, 성안에 군창(軍倉)이 있고 작은 지(池)가 둘이고 샘이 21개소인데 겨울과 여름에 마르지 않는다.”

라고,『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권근(權近)의 풍영루기(風詠樓記)에는,

“경오년(庚午年)에 왜구가 침범하여 관옥(官屋)과 민려(民廬)가 병화에 모두 피해를 입었다. 다음 해 신유년(辛酉年)에 반자(半刺) 전리(田理)가 비로소 주성(主城)을 쌓고 남은 백성을 초집(招輯)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상주읍성은 홍무 을축년 즉 1385년(우왕 11)에 축조 되었고, 빈번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7) 조선의 군현제(郡縣制)와 상주목(尙州牧)

조선이 건국되면서 고려왕조의 지방통치 체계인 ‘5도(道) 양계(兩界)와 군현(郡縣)제도’는 상당한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지배세력인 신흥사대부 계층은 유학(儒學)이념에 입각하여,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구현하는데는 중앙집권적인 관료체계가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여 중앙집권적인 관료체계를 강화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상위의 지방통치 구조로는 ‘8도(道)’ 조직이 갖추어지고, 그 아래 하위의 지방통치기구로는 ‘군현제(郡縣制)’가 정비되었다.

특히 고려 말기까지 전국에 걸쳐 광범위하게 존속되던 임내(任內) 즉 속현(屬縣)과 향(鄕), 소(所), 부곡(部曲) 등 중앙에서 수령(守令)이 파견되지 않고, 그 지방 토호(土豪)들에게 자치(自治)를 허용했던 고을들을 점차적으로 혁파해 나갔다.

조선시대 군현제 정비과정에서 거읍(巨邑)으로 등장한 상주목은 군사적인 기능과 더불어 산하에 여러 고을들을 영솔하고 있었음을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에서 볼 수 있다.

“고려 현종 9년에 상주목(尙州牧)으로 정하여 8목 가운데 하나가 되었는데 본조(本朝)에서 그대로 따랐다.... 속현이 청리현, 화령현, 중모현, 단밀현, 산양현, 공성현, 영순현 등 7개이다....소령(所領)은 목(牧)이 1이니 성주(星州)이고, 도호부(都護部)가 1이니 선산(善山)이며, 군(郡)이 3이니 합천(陜川), 초계(草溪), 금산(金山)이고, 현(縣)이 7이니 고녕(高靈), 개령(開寧), 함창(咸昌), 용궁(龍宮), 문경(聞慶), 군위(軍威), 지례(知禮)이다.”

따라서 상주목(尙州牧)은 이렇게 큰 군현(郡縣)이었으며, 그 위상과 비중도 막강하였다. 그것은 상주가 갖고 있는 자연적 조건과 인문적 환경이 더욱 그 중요성을 더해 갔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상주는 조령(鳥嶺) 밑에 있는 큰 도회지로 산이 높고 평야가 넓다. 북으로는 조령과 가까워 충청 경기도와 통하고, 동쪽은 낙동강과 근접하여 김해와 동래 등과 통한다....이 지방에는 부자가 많고 이름난 선비와 높은 벼슬을 지낸 분도 많다.”

고 하였다.

그리고 상주는 지리상 위치가 남쪽으로는 김해․부산과 상통하고, 북방으로는 충청(忠淸)・경기(京畿)와 서로 통하는 수륙교통(水陸交通)의 요지로서 그 역할이 컸다. 그리고 태종 때 경상도(慶尙道)가 둘로 나누어졌을 때도 상주진주도(尙州晉州道)라 하여 상주(尙州)를 도(道)의 명칭 앞에 배치하였고, 태종때에는 상주목사가 경상도관찰사 즉 감사를 겸임할 정도로 상주의 위상이 높았다.


 8) 조선시대의 상주목(尙州牧)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상주는 더욱 번성하여, 영남 행정의 중심이었고, 경제와 교통의 거점이었으며, 군사적 요충지였고, 교육과 문화가 번성했던 곳이었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은,

東南州郡 慶爲大而 尙次之 其道之號 慶尙者 以次也...

즉, “우리나라 동남쪽에 있는 고을 가운데 경주(慶州)가 제일 크고, 상주(尙州)가 그 다음으로 큰 고을이다. 그리하여 그 도(道)의 명칭을 경상도(慶尙道)라 한 것은 고을 이름 첫째 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경상도의 중심지역으로 번창한 상주목(尙州牧)은 직할지가 주변 군현(郡縣)보다 땅도 넓고 호구수(戶口數)도 많았으며, 상주진관(尙州鎭管)은 인접한 문경, 함창, 성주, 지례, 고령 등 6개 고을 관할하였다. 그래서 이 지역을 가리켜 선초(鮮初)에는 ‘영남(嶺南)’, 즉 조령(鳥嶺)의 남쪽이라 일컬었는데, 점차 이 영남(嶺南)이라는 지명(地名)이 경상도의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당시 상주는 호구수(戶口數)와 전결수(田結數)가 경상도에서 으뜸이었다. 그래서 임금의 명령을 받아 영남지방에 공무(公務)로 출장오는 관리들이나, 일본 등에서 들어오는 사신(使臣)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이는 전주객사와 함께 현존하는 객사(客舍)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상산관(商山館)이 있는 것으로도 입증(立證)이 된다.

또한 사람이나 문물(文物)은 죽령(竹嶺)보다는 조령(鳥嶺)을 통하여 상주를 경유하였고, 낙동강(洛東江)의 수로(水路)를 이용하여 하류지방의 문물(文物)과 내륙지방의 문물이 교환되고, 이 수로를 이용하여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여 당시 상주는 교통이 매우 번화한 지방이었다.

그리고 상주는 지형적으로 서북쪽을 둘러싸고 있는 소백산맥 줄기와 동남쪽에는 굽이치는 낙동강이 있기 때문에 군사적인 요충지(要衝地)이었다. 그래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대장군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5만 명 정예병을 이끌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고, 자신은 상주의 서쪽에 있는 백화산(白華山)에 머물면서 독전하였다.

또한 상주는 왜적들이 부산에 침입해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도 상주의 북천(北川)에서 17,000명 왜병(倭兵)과 조선의 정부군(政府軍)이 첫 교전(交戰)을 할 정도로 군사적인 요충지였다.

그리고 상주는 넓은 들판과 함께 수리시설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잘 정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 나라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벼농사가 잘 되었다. 이것은 삼한시대에 축조한 공검지(恭儉池)가 관개용수(灌漑用水)를 충분히 공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민들이 여유롭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교육(敎育)과 농경문화(農耕文化)가 번창하였다.

그래서 상주에는 이미 10세기 말에 관학(官學)인 향교(鄕校)가 세워졌고, 연이어 서원(書院)과 서당(書堂)이 들어섬으로 해서 많은 인재(人才)들의 교육이 가능했던 곳이다.

그리고 상주는 경상도(慶尙道) 지역을 관할하는 경상감영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 초기에는 경상감영이 경주부(慶州府)에 있었고, 경주부윤(府尹)이 경상도관찰사 즉 경상감사를 겸했다.

그러나 태종 7년(1407년)에 경상도(慶尙道)가 다른 도(道)에 비해 땅이 넓고 인구가 많다는 이유로, 낙동강(洛東江)을 경계로 해서 서쪽을 경상우도(慶尙右道), 동쪽을 경상좌도(慶尙左道)로 나누고, 경상좌도(慶尙左道)는 경주부윤(慶州府尹)이 관찰사를 맡고, 경상우도(慶尙右道)는 상주목사(尙州牧使)가 관찰사를 겸하였다. 따라서 상주에 경상감영이 세워진 시기는 태종 7년(1407년)이다.

경상감영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문제는 이후에도 논란이 많았다. 세종 30년(1448)에 다시 이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세종 30년(1448) 4월 5일에 있었던 일이다.

본래는 경주사람들이 예전 그대로 감사(監司)의 본영(本營)을 경주에 둘 것을 청하는 바람에 세종과 대신들이 회의를 했었다. 이 자리에서 영의정 황희(黃喜)․좌찬성 박종우(朴從愚)․좌참찬 정분(鄭苯)은 오히려 경주(慶州)가 아닌 상주(尙州)에 경상감영을 두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삼가 선정(先正) 익재(益齋)의《난고(亂藁)》를 상고하면 이르기를, ‘동남의 주군(州郡)으로는 경주(慶州)가 크고 상주(尙州)가 다음이 된다.’ 하였으나, 사명(使命)을 받든 자가 반드시 먼저 상주(尙州)로 길을 떠나서 뒤에 경주(慶州)에 이르기 때문에, 풍화(風化)의 유행하는 것이 상주를 경유하여 남쪽으로 내려갔고, 경주(慶州)를 거쳐서 북쪽으로 온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평안도의 평양(平壤), 전라도의 전주(全州), 강원도의 원주(原州), 황해도의 해주(海州) 등 본영(本營)이 모두 서울 가까운 곳에 있는 것도 이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경기(京畿)가 이미 수원(水原)의 수백 년 구영(舊營)을 혁파하고 광주(廣州)로 옮긴 것은 감사(監司)의 겸임을 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경상감사가 상주목(尙州牧)을 겸하면서 겸관(兼官)을 버리고 예전 영(營)에 그대로 있다면 이름과 실상이 서로 어그러질 뿐 아니라, 풍화의 행하는 것이 남쪽으로 말미암아 북으로 오는 것이니, 호령을 발하고 시행하는 것이 지체되고 눅어질 것 같고, 한 도에 두 영(營)이 있는 것도 또한 체통(體統)의 뜻이 아니옵니다.”

그러나 좌의정 하연(河演)·우의정 황보인(皇甫仁)·우참찬 정갑손(鄭甲孫)은 생각이 달랐다. 두 지역이 이 문제로 분란을 계속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경상감영을 경주와 상주에 두자는 절충안을 내었고, 임금은 좌의정 하연의 손을 들어 주었다.

“지금 경주(慶州) 인리(人吏)가 가지고 있는 문적을 상고하면 전조(前朝)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경주로 본영(本營)을 삼았으니 그 유래가 이미 오래고, 또 다른 도의 유수부(留守府), 전주(全州)·평양(平壤)·함흥(咸興) 등 관(官) 같은 것은 모두 본영(本營)이 되는데, 유독 경주(慶州)만 생민의 이해에 관계되는 것이 없이 갑자기 오래된 본영의 호(號)를 깎는다면 미편할 듯하옵니다. 요전에 경주가 본영이 되었을 때에도 상주(尙州)로 유영(留營)을 삼아 진상(進上)과 여러가지 공사(公事)를 모두 상주에서 행하였으니, 두 주(州)를 아울러 본영(本營)으로 일컬으소서.”

그러나 경상도를 분도(分道)하자 조세 체계에 혼란이 일어나자, 이듬 해에 다시 경상도(慶尙道)로 환원하고, 경주(慶州)에 있던 경상감영을 상주(尙州)로 옮겨 상주목사가 경상감사를 겸하게 하였다.

이렇게 행정체계가 우왕좌왕한 것은 당시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여파로 인해 그 동향(動向)이 심상치 않았던 영남지역 사림(士林)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지적되고 있다. 이후에도 경상도(慶尙道)는 나누어졌다가 다시 합쳐지기를 반복했다.

따라서 기록상으로 보면, 상주에 경상감영이 온 것은 태종 7년(1407)이 그 처음이었다.


4. 상주(尙州)와 낙동강(洛東江)


 1) 낙동강의 주인(主人)

낙동강(洛東江)은 영남을 통해 남해 바다로 흐르는 강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강(江)이고 한반도에서는 압록강 다음으로 긴 강(江)이다. 낙동강의 길이는 510km이고 유역면적은 23,384㎡이다.

옛날에는 낙동강이 내륙지방의 교통 동맥이었기 때문에 하안(河岸)에는 하단․구포․삼랑진․수산․남지․현풍․왜관․낙동(상주)․풍산․안동 등지에 배가 닿을 수 있는 선착장(船着場)이 들어섰으며, 가항거리(可航距離)는 343㎞나 되었다.

낙동강(洛東江)이란 이름이 처음 나온 곳은『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다.

여기에서 ‘낙동(洛東)’이라는 이름의 뜻은 낙양(洛陽)의 동쪽에 흐르는 강(江)이란 의미라고 했다. 또한『상산지(商山誌)』는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수원(水源)이 태백산 황지에서 나와 수 백 리를 흘러 우리나라의 경계에 들어오면서 부터 낙동강이라 하니, 상락(上洛)의 동(東)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주(州)의 북쪽 30리에 삼탄진(三灘津)이 있고, 10리를 지나 회동진(檜洞津)이 있으며, 5리를 가서 비란진(飛鸞津)이 있고, 이수(伊水)가 들어오는 곳에서 5리를 지나 죽암진(竹巖津)이 있고, 위수(渭水)를 받은 10리에 낙동진이 있으니 동남쪽으로 여행하는 이는 모두 이 나루를 건너게 된다. 낙동진(洛東津) 위에 관수루(觀水樓)가 있고, 바다로 들어 가는 곳까지 모두 낙동강(洛東江)이라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영남(嶺南)의 대천(大川)을 낙동강(洛東江), 남강(南江), 황강(黃江)이라 했으며, 그 중에서 낙동강을 첫째로 꼽았다. 그리고 낙동강의 근원에 대해서는,

“상주의 낙동강은 그 근원이 3개가 있는데 하나는 봉화현의 북쪽 태백산의 황지이고, 또 하나는 문경현의 북쪽 초점(草岾)이고, 또 다른 하나는 순흥의 소백산이다. 이 세 갈래의 물이 상주에 이르러 낙동강이 된다

라고 했다. 그리고 상주를 기점(起點)으로 했을 때 낙동강의 길이가 700리가 되는데, 실제로 옛 어른들도 “낙동강 700리(里)”라고 불렀다. 지금은 상주 지경(地境)의 끝인 퇴강마을 앞에 “여기서부터 낙동강이 시작되며, 그 길이는 700리(里)”라는 것을 알리는 비(碑)를 세워 두고 있다.

이중환(李重煥)의『택리지(擇里志)』에도 ‘용궁과 함창 경계에 이르러 비로소 남쪽으로 굽으면서 낙동강(洛東江)이 된다.’고 했다.

“황지는 하늘이 만든 못으로 태백산 아래에 있는데 물이 산을 뚫고 흘러 나와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예안에 와서는 서쪽으로 굽어 안동 남쪽을 감아 돌며, 용궁과 함창 경계에 이르러 비로소 남쪽으로 굽으면서 낙동강(洛東江)이 된다.

상주 동쪽을 흐르기 때문에 낙동강(洛東江)이라 하는데 김해(金海)로 들어가면서 경상도의 중앙을 지난다. 강(江)의 동쪽을 좌도(左道), 서쪽을 우도(右道)라 했다.

<이하 생략>”

또한,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모든 지명(地名)을 중국식으로 바꾸면서 사벌주(沙伐州)가 상주(尙州)가 되었다. 처음으로 상주(尙州)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고려 순화연간(淳化年間, 990~994) 성종 때 상락(上洛)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그런데 이 상락(上洛)에 낙양(洛陽)이라는 마을이 생기고, 상락의 서쪽을 낙서(洛西), 동쪽을 낙동(洛東), 북쪽을 낙상(洛上), 남쪽을 낙평(洛坪)이라 하였고, 그 동쪽을 흐르는 강(江)이라 하여 낙동강(洛東江)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낙동강의 시작이 상주’라는 사실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경상도(慶尙道)」편에도 있다.

“큰 내는 셋인데, 첫째가 낙동강이다. 그 근원이 셋으로, 하나는 봉화현 북쪽 태백산 황지(黃池)에서 나오고, 하나는 문경현 북쪽 초점(草岾)에서 나오고, 하나는 순흥의 소백산에서 나와서, 물이 합하여 상주에 이르러 낙동강이 된다. 선산에서 여차이진(餘次尼津), 인동에서 칠진(漆津), 성주에서 동안진(東安津), 가리현에서 무계진(茂溪津)이 되고, 초계에 이르러 합천의 남강(南江) 물과 합하여 감물창진(甘勿倉津)이 되고, 영산에 이르러 또 진주 남강(南江)의 물과 합하여 기음강(岐音江)이 되며, 칠원에서는 우질포(亐叱浦)가, 창원에서는 주물연진(主勿淵津)이 되어 김해에 이르고, 밀양 응천(凝川)을 지나 뇌진(磊津)이 되고, 양산에서 가야진(伽倻津)이 되고, 황산강(黃山江)이 되어,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낙동강은 상주의 동쪽 36리에 있는데 문경의 용연 및 군위의 정천(井川) 등의 여러 물이 상주의 동북에 와서 용궁의 하풍진에 합류되어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된다. 이 물은 선산으로 들어가고 여기서부터 바다로 흘러가는데 비록 지역의 이름은 다르지만 총칭 낙동강이라고 부른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택리지(擇里志)에도,

“낙동은 상주의 동쪽을 말하며, 함창의 남쪽이 상주인데 상주는 일명 낙양이라고 하며 조령 밑의 큰 도회지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위의 기록들을 종합하면, 낙동강(洛東江)이 상주에서 시작되었음을 능히 알 수 있다.

그리고 부산 앞바다에서 낙동강을 통해서 올라온 각종 물산(物産)을 실은 배와 서울로 보낼 조곡(租穀)을 실은 조곡선(租穀船)이 마지막 닿는 곳이 옛 상주지경이었던 백포나루와 하풍나루였다. 그래서 옛 상주영역 내 낙동강에는 12나루가 있었는데 근래까지 운용되었던 나루는,

“문경시 영순면 이목리의 백포나루<하풍진>․상주시 사벌면 퇴강리의 강대정나루<삼탄진>․운성진․역골나루<매협뱃가>․회상나루․비란진․강창나루․대바우나루․토진․낙동진”

등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 기록을 종합하면, 낙동강(洛東江) 이름의 주인(主人)은 상주(尙州)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낙동강에서 풍경이 가장 좋은 곳은 용궁과 함창의 경계인 하풍진을 지나 삼탄진, 퇴강진, 운성진, 회곡진, 회동진, 비란지, 강창진, 죽암진, 토진, 후포진을 거쳐 낙동진에 이르는 곳이며, 특히 경천대에서부터 관수루까지의 40리(里)가 낙동강 700리 중에서 최고의 절경(絶景)이다.

경천대에는 우암 채득기선생께서 무우정을 짓고 기거한 곳으로 경치가 빼어나며, 경천대 앞에 흐르는 물을 용연(龍淵)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물이 깊고 신성한 곳으로 옛날부터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었다.

용연에서 조금 내려오면 영남의 수학궁(首學宮)인 도남서원(道南書院)이 있다. 이곳 도남서원에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향사(享祀)하고 있으며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창석(蒼石) 이준(李埈)을 추향(追享)하고 있다.

이 도남서원(道南書院)은 영남(嶺南)의 수학궁(首學宮)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한 서원이고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산실(産室)이기도 하다. 도남서원의 건너편에는 기암절벽으로 경치가 빼어나서 옛날부터 각종 시회공간(詩會空間)이 되었다.

도남서원을 지나 죽암진(竹巖津)에 이르면 기암이 많고 절벽이 적벽(赤壁)을 이루고 있어서 이곳 또한 시회(詩會) 공간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내려오면 토진(土津)이 있는데, 이곳 또한 기암들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시회의 공간이 된 곳이다. 특히 이곳은 팔공산(八空山)에서 역류하여 온 위수(渭水)가 낙강(洛江)에 합류하는 지점으로 풍수지리적으로 명당(明堂)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서애(西厓)의 삼자(三子) 수암(修巖)이 상주로 이거(移居)할 때 이곳을 택하여 수암종택을 짓고 조선 400년 동안 끊임없이 유학자(儒學者)를 배출하여「우천학파(遇川學派)」를 이룬 곳이다.

이 토진을 벗어나서 아래로 내려가면 상주지역의 낙강 40리 길의 마지막인 관수루(觀水樓)에 이르게 된다.


2) 낙동강(洛東江)과 시회(詩會)

중국의 낙양(洛陽)은 낙수(洛水)라고 하는 강(江)을 끼고 있고 상산(商山)이라는 산이 있다. 또한 상주도 낙양(洛陽)이라고 하는 옛 명칭을 가지고 있으며 상산(商山)과 낙수(洛水)를 끼고 있는 고을이다.

그리고 상주의 낙강변(洛江邊)에는 사액서원(賜額書院)인 도남서원(道南書院)이 있어서 성리학(性理學)의 대를 이어온 성현(聖賢)들을 모시고 강학(講學)에 열중했다.

그리고 당시 상주에는 상산사호(商山四皓)라고 하는, 월간(月磵) 이전(李), 창석(蒼石) 이준(李埈),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남계(南溪) 강응철(姜應哲)이 활동하였다.

광해군 시절에는 북인(北人)계열이 집권하였기 때문에 남인(南人)계열의 상주의 인재들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온 상태였다. 그래서 이들은 1622년 임술년에 상산(商山)과 낙강(洛江)에서 연이어 시회(詩會)를 열고, 귀중한 <연악문회록(淵嶽文會錄)>과 <낙강범월록(洛江泛月錄)>을 남겼다.

낙동강은 상주의 옛 이름인 상락(上洛)의 동쪽에 와서야 강(江)다운 강이 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요, 먼 옛날부터 영남문화(嶺南文化)의 원산지였다. 그리고 이 강(江)이 낳은『낙강범월시(洛江泛月詩)』는, 낙강(洛江)에 배 띄우고 뱃놀이 겸한 시회(詩會)의 작품으로 171년 동안 같은 공간인 낙강(洛江)에서, 같은 제재인 뱃놀이 시회로 대(代)를 이으며 창작해 온 8회의 작품들이며, 이를 한 책자에 누가기록(累加記錄)하여 낙강 무임포(無任浦)에 있는 도남서원(道南書院)에 갈무리했던 것이『임술범월록(壬戌泛月錄)』이다.

당시『임술범월록(壬戌泛月錄)』의 표제(表題)는 탄생의 원동력이 된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주도한 낙강시회(洛江詩會)가 임술년(1622년) 7월 16일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임술년 시회(壬戌年 詩會)의 서문을 쓴 창석(蒼石)은「낙강범월시서(洛江泛月詩序)」라 하였고, 서문 속에서 창석(蒼石)은 자신들과 뜻을 같이하여 낙강시회(洛江詩會)를 개최할 후진들에게 “도남서원에 이를 갈무리하여 뒷날 이 놀이를 잇는 자들의 선구(先驅)가 되고자 한다”고 하였기 때문에『낙강범월시(洛江泛月詩)』로 하고 있다.

낙강범월시회(洛江泛月詩會)의 동기는 멀리 1082년(元豊 5・壬戌) 7월 16일과 10월 15일에 있었던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적벽유(赤壁遊)에서 찾을 수 있고, 그 일차적 목적은 적벽유를 낙강유(洛江遊)로 재현하려 한 데 있다.

그러나 시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낙강 명승(名勝)에서의 서경(敍景)과 서정(敍情)이 단순한 적벽유의 재현물이 아니라 낙강유의 창조물이 되게 하는 데 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낙강에서는 시회 행사가 자주 열렸으며, 특히 임술년(1622년)에 있었던 시회는 상주 낙강범월시회의 시초다. 그래서 이날의 행사를 주선한 창석 이준은 명첨(名帖)을 만들고 이 첩(帖)의 서문에서 이 행사의 의의라든가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또 이런 행사를 앞으로 계속해서 그때마다 남긴 시를 누가 기록하여 도남서원에 보관할 것을 후세의 사람들에게 부탁하였기 때문에 후세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낙강범월의 행사를 유지해 나아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770년(庚寅年)에 있었던 낙강범월 행사는 참가한 인원이 엄청나게 많았고 행사도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이날 행사를 마치고 지금까지 도남서원에 보관하여 오던 낙강범월첩(洛江泛月帖)을 합치게 되었다.

그 후로 많은 세월을 두고 낙강범월(洛江泛月)은 개인적이든 조직적이든 간에 계속하여 이어져 오게 되었는데 1862년(壬戌年)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까지 이어졌다.

낙동강은 1196년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가 상주의 동쪽 낙동강에서 ‘낙동강(洛東江)’ 시를 남기며 선유(船遊)한 뒤로 낙동강은 선비들의 유상처가 되었다.

낙강시회의 공간은 낙동강의 제일경(第一景)인 자천대(自天臺, 擎天臺)로부터 동남으로 도남서원(道南書院), 죽암(竹岩), 위강(渭江)과 낙동강이 만나는 합강정(合江亭), 영남 3대루(三大樓)의 하나인 관수루(觀水樓)에 이르기 까지 30여 리의 구간이었다.

특히 상주사람들에게 이 강은, 그 이름이 상주로 하여 생겼다는 자부심과 홍범구주의 원리가 된 낙서(洛書)를 등에 새긴 신구(新龜)가 출현한 낙수(洛水)와 연상되는 도학(道學)의 연원을 상징하는 강(江)이란 자긍심을 일깨우는 현장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상주는 예로부터 상산사호(商山四皓)가 살만한 고장이라 하여 상산(商山)이라는 별호가 있었기 때문에, 상주의 낙동강은 상산낙수향(商山洛水鄕)의 강(江)으로서 전국 어느 강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자연미와 인공미(도학 사상적)의 조화를 이룬 선유시회(船遊詩會)의 공간이었다.

따라서 근 200년 동안이나 상산낙강(商山洛江)에서의 ‘촉경성취(觸景成趣)’는 역대의 시문(詩文)에 독특한 정서로 드러났던 것이다.


<부록 1>

임술년 낙강범월서(壬戌年洛江泛月錄序)

창석(蒼石) 이준(李埈)

“낙강의 물은 태백산 황지(潢池)에서 나와 급히 수백 리를 흘러 상락(上洛)의 동쪽에 이르러서야 그 물줄기가 점차 커져 물의 이름이 낙동강(洛東江)이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낙수(洛水)의 남서쪽에 있는 큰 언덕 중에서도 가장 평평하고 넓은 곳을 골라 서원을 세웠다. 서원으로부터 서쪽으로 몇 리 떨어진 곳에 용연(龍淵)이 있는데 소나무와 바위가 험준히 솟아, 실로 기이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한 번 배 띄우는 것이 소원이었다.

천계 2년(1622년, 광해군 14) 7월에 창석이 여러 친구들과 의논을 해서 말하기를 “소노(蘇老)가 적벽(赤壁)에서 논 일이 고금에 부러운 바가 되어 단청(丹靑)이 있는 곳이면 상상하는 일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 노인(蘇東坡)의 호방한 문장과 걸출한 구절은 강신(江神)이 도운 바를 입어 무지개같은 광채와 신기루 같은 색채가 사람들의 귀와 눈을 쏘기에 충분했다. 우리들이 비록 시를 짓는 뛰어난 재주는 없지만, 경치를 보고 정취가 일어나면 마땅히 옛날 사람들에게 부끄러울 것은 없다. 이제 다행이 임술년(壬戌年)이 다시 돌아오니 원컨대 동지들과 더불어 용연으로 배를 거슬러 올라가 옛 일을 이었으면 싶다.

이에 우리 고장의 젊은 이와 어른들이 기약치 아니하고도 약 30여 명이 모였다. 강가에 모이고 나서 강비(江雨)는 오다가 그쳤지만 달이 없어서 어두컴컴했다. 같이 놀러온 사람들이 모두가 시무룩하게 있으면서 즐거운 기분이 없었다. 내가 농담으로 그들을 위로하기를 “오직 이 한 골짜기의 경치는 지령(地靈)이 비밀로 한 지 오래다. 문인들이 서로 모여서 온갖 모습을 다 담아 새로운 시를 지어 장차 세상에 전하려 하니 조물주의 꺼림을 받지 않으랴. 오히려, 다행이도 비가 구름 끝자락에서 개이고 바람이 수면에 고요하니 여기에 배를 놓아 물길따라 오르 내리면, 또 잠령(蠶嶺)의 봉필(蓬蓽)에서 자거나 너른 나루터의 뗏목에 가로 막히기보다야 낫잖은가? 이미 천주(天柱)의 달을 열 재주도 없을 바에는 마땅히 노를 저어 낙강(洛江)의 안개를 헤쳐야지, 달이 없다고 하여 좋은 때를 그르쳐서는 안 되리라” 하자, 한 자리의 모든 사람이 큰 소리로 껄껄 웃었다.

도남서원에서부터 배에 올라 구암(龜巖)을 지나 풍호(楓湖)에 다다라서 배를 멈추었다가 다시 점암(簟巖)으로 돌아가 정박하였으니 이곳은 우리 고장의 어진 선비 조 송파(趙松坡)와 김 사담(金沙潭)이 일찍이 터 잡아 살던 곳이었다. 우러러 보며 서성이니 지난 일을 생각하는 감회가 일었다. 밤이 깊어지자 음산한 구름이 점차 걷히고 달빛이 희미하게 비치어, 서로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느라 바람에 날리는 이슬이 옷을 적시는 줄도 몰랐다. 기쁨이 다하지도 않은 채 다시 서원으로 돌아와서 잠을 잤다.

다음 날 또 두척의 배를 나란히 띄워 용연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산수의 경치가 노를 젓는 데 따라 모습을 바꾸어 문채 잘 내는 이가 아니면 묘사할 바이리오. 강물이 적막하고 처량하며 차가워 오래 더 머무를 수가 없었다. 배를 돌려 남쪽으로 내려와 해질녘에 반구정(伴鷗亭)에 올라 눈길 미치는 대로 바라보니, 넘실거리는 물은 연악동(淵嶽洞)의 탁영담(濯纓潭)에서 흘러오고 높고 험한 묏봉우리는 비봉산(飛鳳山)에까지 뻗쳐 있다. 상령(商嶺)을 우러르는 자지지풍(紫芝之風)을 감상하고 노음산(露陰山)을 보고 잔질하면서는 시하지취(棲霞之趣)를 거슬러 생각한다.

물에 다다라서는 거북이가 낙서(洛書)를 업고 나온 일을 궁구하고, 포구를 바라보면서는 봉황을 부르던 퉁소 소리를 생각한다.

이 땅은 참으로 책 많고 현인이 많았던 고장이요 신선이 놀던 고을이라 적벽의 거친 비탈과는 견줄 바가 못 된다. 만약, 파공(坡公)으로 하여금 이곳을 한 번 보게 하였더라면, 우렁찬 대작을 지어 응당 천하에 빛남이 또한 적벽부(赤壁賦)에만 비할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까마득히 먼 해동(海東)의 만리 밖에 있어 시를 가지고 칭술할 사람이 없으니 어찌 이 땅의 불행이 아니랴?

적벽부의 머릿글로 운(韻)을 나누어 차례로 글을 지으려 하나 감히 소동파의 작품을 본받고자 함은 아니다. 애오라지, 즐거운 유람을 기록하기 위함이요 또, 강신(江神)에게 시월의 약속을 아뢰기 위함 일 뿐이다. 시가 이루어지자 모두가 나에게 서문을 위촉하였다. 간략히 일의 전말을 써서 책머리에 놓아 이것을 도남서원에 보관하여 뒷날 이 놀이를 잇는 자의 선구로 하고자 한다. 천계 2년(1622년, 광해군 14) 임술 7월 일 창석 이준이 분촌(汾村)의 초학대(招鶴臺)에서 쓰다.

洛江泛月錄序

洛水出太白之黃池 奔流數百里 至上洛之東 而其勢點大 水之名洛東 以是也 水之南西選大臯之最夷曠處 起書院 自書院而西數里許有龍淵 松石峭立 嘗好奇者之所一願泛也 天啓二年七月 蒼石子謀于其友若干人曰 蘇老赤壁之遊 爲古今所韻羨 至有丹靑而想像者 是因此老 豪詞傑句爲江神所助 虹光蜃彩有足以照人耳目也 吾儕雖非作賦之材 然觸景成趣 則宜無媿於古人 今幸而遇壬戌之回 願與同志 泝龍淵而績古事 於是 鄕人之少長 不期而聚者 幾三十人旣會江 雨雖晴 月色猶晦 同遊者 索然無悰緖 余以戱語慰之曰 惟此一壑風烟爲地靈所秘久矣 文人相聚籠百態爲新詩 將以傳於世得非爲造物者所忌乎 尙幸雨閣於雲端 風恬於水面 於焉 放舟沿洄 亦不有愈於眠 蠶頭之蓬 阻廣津之槎乎 旣無術開天柱之月 宜擧棹劈江之炯 不可以無月而誤佳期也 一坐嚇大笑 遂自書院登舟 歷龜巖 薄楓湖而止 回泊於簟巖 此乃鄕獻趙松坡金沙潭所嘗卜居處也 瞻望徘徊 有感舊止懷 夜深雲陰漸解 圓魄微透 相與賦詩酌水 不知風露之已滿衣矣 歡意未聲 還書院而宿 翌日又方舟而泝龍淵 山水之勝 移棹換形 非工藻繪者所可摹也 江水悄愴 凜乎 不可留 回舟而南 日暮登伴鷗亭 縱目四望則 水之汪洋者 來自濯纓潭也 峰之崷崒者 接乎飛鳳山也 仰商嶺而想紫芝之風 揖露陰而泝棲霞之趣 臨水則究龜書之出 望浦則思鳳簫之吹 此嘗文獻之邦 神仙之府 非赤壁荒陬所可擬 若使坡公一寓目於此 其舂容大作 當震耀於天下 又非但赤壁之比 而邈在海東萬里外 無大雅稱述者 豈非玆土之不幸也 聊以識勝遊 且以申十月之約 於江神耳 詩旣成 威屬余序之 略書其事之顚末 弁於篇首 欲藏之書院 以爲異日續此遊者之先驅也 天啓二年壬戌七月 日 蒼石 李埈 書于汾村 招鶴臺

<부록 2>

경인년 낙강범월속유시서(庚寅年洛江泛月續遊詩序)

1622년 낙강범월은 우리 지역의 최고의 성대한 시회이다. 나의 외선조인 창석 선생이 그때의 서문에서 “그 일을 적어서 서원에 보관하고자 한다”라고 하셨는데 지금 거의 100여 년이 되어 가는구나. 금년 여름에 많은 사람들이 장천재사에 모여서 임술년의 범월행사를 이어가려고 했는데 모여든 사람이 오육십명이나 되었다. 합강정 주인인 김광철이 기존에 있던 범월록의 수정하는 일을 나에게 부탁을 하니 능력이 없음도 잊고 사양하지 않고 당시 여러 번의 행사를 기록하고 여러 선생의 이름도 적었는데 우리 선조인 검간 선생의 문집에 실린 것을 살펴서 기록했다. 운을 나누어 시를 적은 것은 선조인 입재공이 기록한 것을 따른 것이니 이것은 선현들의 유지를 따른 것이니 어찌 후인들의 완상꺼리가 아니리오. 이번 가을에 김광철이 가지고 온 시축은 각각으로 되어 있는데 훗날에 이런 놀이를 이어가려는 사람들이 창석선생의 유지를 이어 간 것이리라. 아! 소동파는 비록 백세에 뛰어난 선비이나 도학은 문장만 같지 못하고, 소동파가 노닐었던 황강은 비록 신선의 구릉이라고 할 만하지만 강남의 한 모퉁이 강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상주는 문헌의 고장이요 신선의 고을에서 선정(先正)들이 낙수와 위수의 진원을 거슬러 가고, 나이가 많은 선현들은 상산사호인 기리계(綺里季)와 하황공(夏黃公)의 고풍을 따라가서 도남서원을 돌아보고 상산의 자연을 소요하는 것과 같겠는가? 이에 ‘전적벽부’를 따라서 화운한 김상사(김광철)의 시권 끝에 써서 도남서원에 보관하도록 할 뿐이다. 경인년 가을 조천경 근서.

洛江泛月續遊詩序

天啓年中 洛江泛月 實吾鄕古今之盛會也 惟我外先祖蒼石先生序文曰 書其事 欲藏之書院 至今百年猶未遑也 今夏鄕中少長 會于長川齋舍 欲追壬戌泛月之事 約以七月旣望 及期而至者 五六十人 合江亭主人 金上舍景涵 以新舊錄修正事 屬之於余 義有所不敢辭 忘其痼陋 乃敢編次前後勝蹟 諸先生姓諱表德 謹稽我先祖黔澗先生文集中所載 而書之 分韻詩卷 敬遵從先祖立齋公所錄而書之 是乃先賢之遺意也 豈非後學者之寶玩乎 至於今秋 名帖則取來於金上舍所記詩軸 則各人所作隨得隨書 異日之續此遊者 持作先唱如蒼石先生之訓可也 噫 東坡雖云百世士而道學不如其文章 黃岡雖云眞蓬丘而不過江南之一隅山水也 豈若吾文獻之邦 神仙之府 先正泝伊洛之眞源 耆老軼綺黃之高風 周旋乎俎頭之地 逍遙乎風月之區哉 於是乎 步前赤壁賦 和金上舍詩書諸卷末 以藏本院云爾 庚寅蘭秋 趙天經 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