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4호

상주학. 상주문화 제24호. 임진왜란시(壬辰倭亂時) 상주 함창당교전투(尙州咸昌唐橋戰鬪)

빛마당 2015. 3. 28. 21:49

임진왜란시(壬辰倭亂時) 상주 함창당교전투(尙州咸昌唐橋戰鬪)


안동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동국문화재연구원장

문학 박사

김 호 종

목 차

Ⅰ. 머리말 78

Ⅱ. 임진왜란과 상주 79

Ⅲ. 당교의 중요성 85

Ⅳ. 당교 전투 양성 90

Ⅴ. 맺음말 98

임진왜란시(壬辰倭亂時)

상주 함창당교전투(尙州咸昌唐橋戰鬪)


안동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동국문화재연구원장

문학 박사

김 호 종

Ⅰ. 머리말

임진왜란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16세기 말에 발생한, 우리나라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참혹한 전란이었다. 이 전란(戰亂)은 물론 일본이 일으켰으나 전투는 당시 조선(朝鮮) 영토에서 진행되었으므로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본고는 임진왜란 때 상주지방 당교에서 치루어진 전투 양상을 고찰함으로써, 임란(壬亂) 시기 지역 전투사의 한 단면을, 보다 자세히 구명(究明)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도되었다. 이러한 사례(事例)들이 많이 축적되어진다면 임진왜란의 역사를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일정하게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 내용 전개는 당시 전투에 직접 참여했거나, 그에 관한 사실을 전해들은 사람들의 일기류(日記類)를 위주로 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이들 자료에는 대체로 체험담이 많기 때문에, 1차 사료로서의 생동감을 줄 수 있는 장점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

조선왕조(朝鮮王朝)에 있어서 상주(尙州)가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은, 전대(前代)에 비하여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러한 상주에서 당교는 전략적인 측면에서나 기타 여러 부면(部面)에 걸쳐, 중요한 구실을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본고를 시도하여 본 것이다.


Ⅱ. 임진왜란과 상주

1592년 4월에 발생하여 7년 여에 걸쳐 진행된 임진왜란은, 주지하다시피 일본(日本)의 당시 집권자인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야욕에서 촉발(促發)되었다. 이렇게 일어난 전쟁은 동북아시아의 중심국가인 조선(朝鮮)과 중국의 명(明)나라, 그리고 침략국인 일본 등 3나라에 걸쳐 심각한 영향(影響)을 끼쳤던 것이다. 그러나 직접 전쟁터가 된 조선왕조의 피해가 가장 클 수 밖에 없어서 이 전란이후 조선사회는 여러 부면에 걸쳐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임진년 4월 14일 부산 동래(東萊)를 함락(陷落)한 왜적들은 동로․중로․서로 등 3갈래로 나뉘어 북상(北上)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제1군은 중로를 맡았는데, 지휘 사령관은 강력한 소서행장(小西行長) 즉 고니시 유키나가이었다. 상주(尙州)는 이러한 중로(中路) 가운데 당시 수도 한양(漢陽)까지 가는 길목에서 매우 중요한 거읍(巨邑) 중의 하나로서 군사․경제․행정․교통상의 요충(要衝)이었다. 따라서 피아간(彼我間)에 이것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노력이 치열하게 전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중로를 담당한 소서행장이 이끄는 왜적들은, 동래를 장악한 다음 양산을 거쳐 밀양으로 들어섰다. 밀양을 점령한 왜군들은 대구를 지나 성주와 선산을 거쳐 오면서 별다른 저항을 받지않고 거의 무인지경을 달리는 기세로 상주에 이르렀다. 여기에 대한 당시 상주지역 방어대책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왜적의 대부대(大部隊)가 선산으로부터 들어와 상주로 진격하였다…이 날 새벽 안개가 자욱한데 포성이 들려오자, 왜적의 선봉이 이미 죽현(竹峴)에 이르렀음을 알아 차렸다. 그리하여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상주 북천(北川)에 진을 쳤다.

는 것이다. 왜군이 부산 동래를 함락시킨 것이 임진년 4월 14일인데, 그로부터 불과 열흘 정도 지나서 상주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함축(含蓄)하고 있는 의미가 상당히 크다고 볼 수 있다. 16세기 말엽 당시의 전투양상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보병(步兵) 위주로 투쟁하였으므로, 기동력(機動力)은 약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수많은 군대가 부산에서 상주까지 오는데, 십일 정도 걸렸다는 것은, 중간에 거의 항거(抗擧)를 받지 않고, 그냥 밀고 올라왔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임란 초기 관군(官軍)의 대응력(對應力)의 부족과 무력(無力)함 그리고 기강의 문란함이 여실히 들어난다고 할 수 있겠다. 이같은 현상은 다음 기록에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이각(李珏)은 왜적에 대비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수석진무를 독촉하여, 사람과 마필(馬匹)을 징발해서 자기 첩(妾)과 면포(綿布) 1천 여 필을 먼저 운반하도록 지시하였다.

는 내용인데, 이것은 하나의 도 단위 육군 사령관이 해당 도의 관군(官軍)을 이끌어 적군에 대응(對應)하려는 계책(計策) 수립 보다는, 자신의 안락과 사리사욕에 치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군의 기강해이가 이러고서야 어떻게 제대로 침략군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 이외에도 유사(類似)한 사례(事例)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주 4)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한 도의 수군 수령관도 주 3)의 육군 사령관과 비슷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대응방식과는 판이하였다.

16세기 후반 조선왕조의 국방체계는 외적의 침입이 대규모로 진행될 경우는, 제승방략(制勝方略)이란 제도에 의하여 각 도(各道) 단위로, 그 산하(傘下)에 소속된 각 고을의 군사들은 수령(守令)의 지휘로 지정된 장소에 집결하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군병들의 일부는 해당 도의 방백(方伯)과 병마사(兵馬使)의 지휘를 받고, 그 나머지 병사(兵士)들은 중앙에서 내려오는 장수(將帥)들의 지휘를 받도록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판국에 해당 도의 병마사나 수군절도사들의 대부분이, 위에서 보아 온 바와 같이 자기 직분을 망각하고 대응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집결된 각 지방 수령들도 방어하려는 자세는 취하지 않고 도망치기에 바빴으니, 임란 초기 관군(官軍)의 왜적에 대한 응전력(應戰力)은 약할 수 밖에 없었다. 상주 지방의 수령들인 상주목사 김해(金澥)와 함창현감 이국필(李國弼) 등이, 성주와 대구 지방에 군사를 이끌고 갔다가 도망쳐온 경우도 그러한 영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상주 고을 사족(士族) 중의 한 사람인 조정(趙靖)의, 이에 관한 일기의 한 구절을 예시하여 보기로 하자.

조령(鳥嶺) 아래 각 지방 수령들은 왜적(倭賊)의 소문만 듣고 읍성(邑城)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이 지방마다 그러하여, 거읍(巨邑) 대진(大陣)도 성을 지키며 피나는 전투를 전개한 곳이 거의 없었다.

는 것이다. 여기서 조령 즉 새재 아래의 각 지방이란 주로 경상도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 왜적이 처음 침략한 곳은 경상도 부산 동래 지방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경상도를 휩쓸면서 위로 올라갔으므로, 전란의 피해도 경상도 지방이 더욱 클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상주(尙州) 지방은 경상도 뿐 만 아니라 당시 전국에서도 여러 가지 측면에 걸쳐 큰 고을이었으므로, 이를 장악(掌握)하기 위한 피아(彼我)간의 대결(對決)이 치열했다고 짐작된다. 조선왕조 시대 상주 지방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位相)과 구실을 파악할 수 있는 다음의 사료(史料)를 음미(吟味)하여 보고자 한다.

좌의정(左議政) 조현명이 왕에게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기를… 광주(光州)․나주(羅州)․충주(忠州)․상주(尙州) 등과 같은 큰 고을은 반드시 여러 군읍(郡邑)의 수령을 거쳐 커다란 공적을 쌓은 다음에야 비로소 제수(除授)하는 고을입니다.

이것은 조선 영조 24년(1748) 좌의정(左議政)인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한 내용의 한 부분인데, 시기가 비록 18세기 중엽이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도 이와 같은 사례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상주가 갖고 있는 이러한 비중과 역할 탓인지, 임진왜란 때 중앙에서 파견된 순변사(巡邊使)가 영남지방의 여러 고을 가운데 최초로 왜적에 대한 전투를 지휘한 곳도 상주였다. 그리고 왜군들 중에서도 강하기로 이름난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영도하는 제1군이 상주를 공격한 뒤 곧 바로 주력부대는 수도를 향하여 북상했던 것이다. 여하튼 간에 부산 동래를 함락한 뒤 수많은 고을을 거쳐 왜적들은 위로 올라왔는데, 그 사이 제대로 저항한 고을은 상주가 유일했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렇게 저항한 싸움이 이른바 상주북천전투(尙州北川戰鬪)였다. 이에 관한 관변측(官邊側)의 자료를 보면 우리측 저항군의 수가 수백 명 또는 수천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같이 전개된 북천전투는 상주 지방의 관민군(官民軍)들의 공동저항에도 불구하고, 병력의 열세(劣勢)와 무기의 부족으로 왜군들에게 처절하게 패배하였다. 그러나 다른 지방과 달리 왜적에게 분연히 항거하여 투쟁해 보았다는 사실 자체는, 인식과 평가를 달리하여야 할 것이다. 패배의 또 다른 배경은 당시 중앙에서 내려온 순변사 이일(李鎰)이 지역 인사들의 읍성(邑城) 전투주장을 무시하고, 노출(露出)된 북천 냇가 전투를 고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명색이 중앙에서 파견된 군사 지휘관이라는 사람이 당시의 전투조건과 병력 상황을 그렇게 파악하지 못했는지 능력과 자질에 의심이 들 정도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다른 속셈이 숨어 있었다고 보여진다.

임진왜란 초기 우리 측은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제반 여건마져 불리하여 조선의 군사들은, 공격(攻擊)보다는 방어(防禦) 위주의 전술을 구사해야 유리하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방어 즉 수세(守勢)를 하는 입장에서는 평지(平地)보다는 성곽(城郭)을 중심으로 하는, 청야전법(淸野戰法)이 적합하다는 것은 그 당시에도 이미 일반화된 사실이었다. 성곽 전투의 유리함을 주장하는 다음 기록은 음미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여겨진다.

성(城)을 지키는 일에 대하여…항상 여장(女墻)을 한 두발쯤 높게 쌓아서 적군이 넘어오지 못하게 하여야 하고, 또 성벽에 구멍을 많이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이는 적들의 동태파악과 그들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데 유리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큰 성곽이라도 수십 명의 군대로써 방어가 될 수 있다고 보아집니다.

이 자료의 핵심적인 의미는 성곽을 제대로 활용한다면, 병사(兵士)들의 숫자가 적더라도 충분히 적군을 막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를 갖고 당시 중앙에서 파견된 군사 지휘관과 지방 수령 등이 합심해서, 상주 읍성을 근거로 하여 왜군과 싸웠다면 그렇게 지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여하튼 당시 전국에서도 중요한 상주의 함락은, 상주에 거주하던 주민들의 피해와 고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임진왜란 기간 동안 군량을 비롯한 군수품 조달과 병력자원 충원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우리 측의 손실이 컸던 것이다. 상주를 함락시킨 왜군들은 병력 일부만 이곳에 잔류시키고, 나머지 주력군들은 중간에 그들의 군병들을 합류하면서 북상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불과 일주일 정도 뒤에는 수도 한양(漢陽)을 점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당시 상주 읍성 못지않게, 전략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함창의 당교와, 당교전투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기로 하겠다.


Ⅲ. 당교(唐橋)의 중요성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당교는 현재 상주시 함창읍 윤직리 근처에 있던 다리일대를 지칭한다. 여기에 관한 비교적 이른 시기의 자료인 조선 전기 중종(中宗) 때 이행(李荇) 등이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당교(唐橋)는 이 고을 북쪽 6리에 있다.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의하면 당(唐)나라 소정방(蘇定方) 장군이, 이미 백제와 고구려를 토벌(討伐)한 다음 또 다시 신라를 정벌(征伐)하고자, 이 다리 근처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자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그 음모를 알아차리고, 당군(唐軍)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술에 취하게 한 뒤, 그들을 모두 이 다리 부근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버렸다. 그리하여 후인(後人)들이 이로 인하여 당교라고 불렀다고 한다.

위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어느 정도로 부합되는지 현재로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른 시기부터 군사적인 요새지(要塞地)로서 중요한 구실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곳 당교가 군사적인 측면에서 일찍부터 주목되었는지 그 배경을 해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당교가 처한 지리적 조건이다. 여기는 전통사회에 있어서 중요한 육로인, 영남대로(嶺南大路)가 지날 뿐만 아니라, 경상좌도(慶尙左道)로 갈 수 있는 분기점(分岐點)이다. 따라서 북으로는 문경․충주를 거쳐 수도권(首都圈)으로 갈 수 있으며, 남쪽으로는 상주․선산․대구․부산 등으로 가기에 좋은 곳이다. 여기에 더하여 동북방향으로는 예천․영주․안동 방면의 경상좌도로 가는데 편리한 육상 교통상(交通上)의 요지이기도 하다.

금상첨화 격으로 낙동강(洛東江) 본류와 지류 등이 가까이 흐르고 있어 수운(水運)에도 편리할 뿐만 아니라, 인근에는 넓은 함창평야가 있어서 군량(軍糧) 조달에도 용이한 편이다. 이러한 조건에 더하여 이곳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지점에, 전근대사회(前近代社會)에서 매우 중요시 되던, 천혜(天惠)의 요새지(要塞地)인 문경 조령(鳥嶺)이 자리 잡고 있다. 임진왜란 시기 조령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알아볼 수 있는 다음 사료를 음미하여 보기로 하자.

○ 조령은 지난 날 영남(嶺南)에서 도성(都城)으로 갈 때 주요한 교통로(交通路)였을 뿐만 아니라, 동서 양편이 바위 절벽으로 되어 있어서 천연적인 요새지였다.

○ 우리 군사(軍士)들이 조령을 반드시 지킨 다음에야 충주(忠州)를 보존할 수 있다.…조령을 방어하지 못하면 도성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위의 주 12)는 문경 조령이 당시 영남에서 도읍지인 한양(漢陽)으로 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교통로 구실을 하는 한편, 이 고갯길 양편으로는 높은 암석 절벽으로 형성되어 있으므로, 천혜의 요새지 역할을 한다는 주장이다. 주 13)은 주 12)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지만, 여기서는 교통로의 구실보다는 군사적인 요새지와 요충지로서의 조령 역할(役割)을 강조하고 있다. 즉 남쪽에서 공격하는 왜적을 조령에서 방어하지 못한다면, 충청도의 큰 고을인 충주는 말할 것도 없고, 경기도에 있는 수도 한양도 지켜낼 수 없을 정도로, 조령의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것이다.

당교는 이와 같이 군사적 및 교통상의 비중이 큰 조령과 비교적 가까운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 존재가치를 더욱 높일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사실 이외에도 당교의 군사적 측면에서, 중요성을 파악할 수 있는 다음 기록을 검토하여 보기로 하자.

경상도 좌 순찰사 한효순(韓孝純)이 다음과 같이 장계(狀啓)하였다. ‘도내에 유둔(留屯)한 왜적은 인동․대구․청도․밀양․기장․동래 및 함창으로부터 당교(唐橋) 등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계속 머물고 있습니다. 특히 당교의 왜적은 (경상) 좌우도(左右道)의 인후(咽喉)가 되는 곳에 머물고 있어서 그 세력이 매우 성하니, 비록 일도(一道)의 힘을 다 해서라도 반드시 이곳의 왜적을 먼저 치기로 목표를 삼겠습니다.’

라고, 장계(狀啓)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 3) 조경남(趙慶男, 1570~1641) 의병장의《난중잡록(亂中雜錄)》가운데 한 부분이다. 여기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임란 당시 경상도내 왜적이 머물고 있는 여러 고을들을 거론하면서, 고을이 아닌 당교가 지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여기에 더하여 당교가 위치하는 지점이 경상좌도와 우도의 인후, 즉 목구멍과 같은 중요한 지점이란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렇게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당교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의 세력은, 매우 강성하기 때문에, 경상도 전체의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이곳의 적군을, 먼저 소탕하기로 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당교는 임진왜란 기간 동안 우리 측과 왜군 측, 나아가서는 우리를 구원하러온 명나라 군사들조차도 이곳을 서로 장악(掌握)하기 위하여 혈안(血眼)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에 관한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보기로 한다.

○ 왜적들이 다인(多仁)에서 하풍진(河豊津)을 건너와서 함령땅으로 진격하여 당교(唐橋)에 진(陣)을 쳤다.

○ 천병(天兵)들이 당교에 들어와 있다가 상주(尙州)에 있던 왜적들을 쫓아내고 또 다시 당교로 돌아와 주둔하였다.

○ 왜적들이 무수(無數)하게 당교에 도착한 다음, 진(陣)을 친 후 목책(木柵)을 쌓았다고 한다.

○ 함창(咸昌)에는 지금 왜적의 기세가 극성하여 새로 부임한 방백(方伯) 한효순(韓孝純)은 지금 안동(安東)에 머물면서, 영해․진보․청하․영덕․장기․영일․청송 등 여러고을의 병사들을 뽑아 용궁현(龍宮縣) 경계에 나아가 수비중(守備中)이라고 한다.

위의 주 15)는 의성군 다인쪽에서 올라오는 왜적들이, 낙동강변에 있는 하풍진을 건너 함룡(咸龍) 땅, 즉 함창과 용궁 지역으로 진출하여, 함창 당교에 군진을 쳤다는 내용이다. 날짜로 계산하여 본다면 왜적이 상주 북천에서 전투를 벌린지 3일 뒤쯤 됨으로, 이들 왜적은 아마도 양산에서 울산을 경유하여 경주와 영천 그리고 의성쪽으로 올라온 왜적들로 생각된다. 주 16)은 천병 즉 중국의 명(明) 나라 병사들이 당교에 들어와서 주둔하고 있으면서, 상주 읍내에 머물던 왜적들을 공격한 다음 다시 당교 주둔지로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당시 함창 당교는 피아간(彼我間)에 기회만 되면 서로 차지하려고 혈안(血眼)이 되는 전략적 요충지(要衝地)란 사실을 입증(立證)하고 있다.

주 17)은 왜군들이 수없이 당교에 도착하여 진을 친 다음, 목책을 쌓았다는 내용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당교 일대는 높은 산이 거의 없는 평평한 구릉지가 대부분이므로, 석성(石城)이나 산성(山城)을 쌓기에는 별로 적당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주둔군들은 방어를 위하여 목책을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목책(木柵)은 당시 왜적들이 잘 쌓는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측에서도 이를 개량하여 활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목책을 만드는 주된 이유는 소요 시간은 많이 들지 않고, 효과는 비교적 큰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석성(石城)이나 토성(土城)을 쌓을 때와 같이 많은 노동력과 고통이, 보다 적게 수반되는 것으로 알려졌던 것이다. 이를테면 주변에 적당히 나무와 흙만 존재한다면 작업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데, 당교 부근에는 이러한 조건은 대체로 구비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이와같은 요소도 당교의 중요성을 높이는데 일정하게 기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주 18)은 함창(咸昌)이라고 지칭하고 있지만, 이것은 당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당시 함창의 왜적이란 대부분 당교 왜적을 일컫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 도(道)의 방백 즉 관찰사가, 산하 인근 여러 고을의 병력을 동원하여, 당교에 가까운 용궁현 경계에 나아가 수비 중이라고 한다면, 그 가능성은 더욱 높다고 보아야 하겠다.

Ⅳ. 당교 전투 양상(樣相)

위에서 고찰하였듯이 임진왜란 때 함창에 소재한 당교는, 전략적으로나 교통과 경제적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따라서 왜적과 우리 측 군사들 사이에 이것을 장악하기 위하여, 매우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그러므로 이번 항목에서는 당시 전개된 전투 양상에 대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임진왜란때 당교에 오랫동안 주둔하면서, 주변지역과 인근 여러 고을에 행패를 부린 주된 군병(軍兵)들은 말할 것도없이 왜적(倭賊)이었다. 따라서 이 장에서의 전투양상은 당교 주둔 왜적에 대한 우리 조선측 군병들의 공격(攻擊)을 중심으로 전개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공격 가운데 주요한 사례(事例)를 중심으로 전투양상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 경상도 함창(咸昌) 당교(唐橋)의 왜적들이 모여서 큰 군진(軍陣)을 이루어 용궁(龍宮) 등지를 횡행하면서, 앞으로 두 번째 내지(內地)를 범하고자 하였다. 이에 경상도 좌방백(左方伯) 한효순(韓孝純)이 안동(安東)에 머물면서, 장기(長鬐)현감 이수일(李守一)을 대장(大將)으로 삼아서, 각 고을 군사들을 거느리고 용궁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안동부사(安東府使) 우복룡(禹伏龍)을 도지휘대장(都指揮大將)으로 임명하여 예천(醴泉) 땅에 설진(設陣)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영천(榮川)지방과 춘양(春陽)지방 의병(義兵)들도 합세하여 공격하게 했으나, 결국 크게 패하고 돌아왔다.

○ 대장(大將)이 설복처(設伏處)에서 다시 복병장(伏兵將)인 이선충(李選忠) 등으로 하여금 정예병(精銳兵)들을 인솔하여, 당교에 설치한 왜적들의 목책(木柵)을 파괴하도록 하였다. 이 당시 사살된 왜적은 15명이고, 그들의 장창(長槍)도 빼앗았다. 이 때에 또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발사했는데, 밤이 어두워 사상자수를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우뢰같은 소리가 진동하면서, 왜적들의 소굴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만 들렸을 뿐이었다. 이런 전과(戰果)를 관찰사와 병마사에게 보고하면서, 비격진천뢰를 더 보내주기를 요청하였다.

○ 대장을 모시고 황령사(黃嶺寺)에 도착하였다....들리는 소문에 남하(南下)하는 왜적이 당교의 길가에 진을 치고 있다고 한다. 대장이 야간에 공격하고자 하여 군사들을 인솔하고 갔으나, 밤이 너무 깊어 작전상 불리하여 되돌아 왔다.

는 것이다. 위의 주 20)은 함창 당교에 왜적들이 많이 모여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들은 가까이 있는 용궁 등지를 횡행하면서 악행을 자행하고 있으며, 앞으로 다른 지역을 침범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당교 왜적의 침탈에 대응(對應)하여 경상좌도(慶尙左道) 관찰사인 한효순은 안동에 머물면서 작전을 지시하였는데, 우선 장기현감 이수일을 대장(大將)으로 삼아서 산하 각 고을 군사들을 이끌고, 인근에 있는 용궁현을 지키도록 조치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안동부사 우복룡을 도지휘대장으로 임명하여 예천고을에 군진을 치고 대비하게 했던 것이다. 위의 두가지 경우를 살펴본다면, 지휘하는 대장들의 신분이 당시 고을 수령(守令)들이었으므로, 우선 병사들은 관군(官軍) 중심으로 편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관군을 위주로 한 병사들의 전투력이 허약했던지, 거기에 다시 영천(榮川) 즉 지금의 영주와, 인근 춘양 고을 출신 의병(義兵)들도 합세해서 공격하도록 조치했으나, 왜적들에게 크게 패배하고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만 미루어 보더라도 당교가 전략상으로나 교통상 그리고 경제적 입장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여, 상당한 왜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던 사실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겠다. 주 21)은 임진왜란 당시 안동(安東)지방의 사족(士族) 출신 의병장(義兵將)으로, 뒤에는 영남좌도 열읍의병대장(列邑義兵大將)에 추대(推戴)된 김해(金垓)의 ≪향병일기≫ 가운데 한 부분이다. 즉 의병대장 김해가 왜적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설치한 매복처(埋伏處)에서, 복병장인 이선충 등에게 당교 왜적들이 설치한 목책(木柵)을 파괴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이 전투과정에서 사살(射殺)된 왜적수는 15명이며 그들이 갖고 있던 긴 창도 빼앗았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비격진천뢰라는 화포(火砲)를 발사했으나, 야간이라 사상자가 얼마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왜군의 진지가 무너지는 듯한 큰 울림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의병대장 김해는 이와 같은 전과를 경상좌도관찰사와 병마사에게 보고하는 한편, 화포의 효과가 크다고 판단했던지 비격진천뢰를 더 보내 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주 22)는 상주 함창(咸昌) 의병대장인 이봉(李逢)을 모시고 검간 조정이 은척 황령사에 도착했는데, 임진년 다음 해인 계사년 즉 1593년 1월부터 조명(朝明)연합군의 반격으로, 왜군들의 남하(南下)가 본격화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들렸다는 것이다. 그러한 남하과정에서 왜군들이 다시 당교에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대장이 야습(夜襲)하고자 당교에 의병들을 이끌고 갔었다. 그러나 밤이 너무 깊어 공격이 불리하다고 판단했던지, 병사들을 데리고 철수(撤收)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당교 주둔 왜적들에게 보다 큰 타격(打擊)을 가한 것은, 어느 다른 지방 병사들 보다는, 본 고장인 상주 함창출신 병사들이었다는 사실을, 다음 기록에서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달 27일 대장이, 이축(李軸) 선봉장(先鋒將)에게 명령하여 정병(精兵) 50명을 이끌고 가서, 당교 왜적을 야습(夜襲) 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왜적 15명을 사살(射殺)하고, 우마(牛馬) 17태(駄)를 빼앗아 돌아왔다고 한다.

라고 서술하였다. 이 내용은 몇 가지 측면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갖도록 한다. 우선 주 21)은 영남좌도 여러 고을에서 선발된 의병들 가운데서, 뽑혀진 정병들이 얻은 전과를 보여주고 있다. 정병들이 몇 명 갔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연합의병이란 사실을 고려할 때, 위의 상주 함창 창의군 정병보다는 많았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고 합리적일 것이다. 더욱이 연합의병 진영에서는 당시 조선군에서 평판 좋은 무기로 인정되던, 비격진천뢰라는 화포까지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과는 창의군이 훨씬 우수하다고 보아야 하겠다. 사살된 왜적 숫자는 15명으로 같으나, 노획한 군수품은 연합의병측이 장창 정도에 불과하였으나, 창의군쪽에서는 우마 17바리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1바리란 소나 말 1마리에 잔뜩 실을 수 있는 짐을 말하는데, 17바리는 상당한 분량이었기 때문이다.

위의 전투에서 창의군이 좋은 성과를 얻는데, 크게 기여한 선봉장(先鋒將)이었던 이축(李軸)에 대하여 간단히 훑어보는 것도 전과(戰果)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함창(咸昌) 출신으로 유학(儒學)공부를 하기는 했으나, 평소 책읽기 보다는 활을 쏘고 진을 치는 등 무술 단련을 좋아하였다. 이러한 기질은 어릴 때부터 발휘되어, 동네 아이들을 이끌어 가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그는 평민측(平民側)에 가까운 의병지도자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의병들의, 하부구조 토대를 이루는 병졸(兵卒)들에 있어서는, 대부분 평민 이하였기 때문에 장병(將兵)간의 유대와 친밀감은 더욱 높았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장졸(將卒)간의 동질성(同質性)은 생사(生死)를 같이하려는 의식(意識)을 고조(高潮)시켜 용맹을 보다 발휘함으로서, 훌륭한 전과(戰果)를 올리는데 기여(寄與)했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주 21)과 주 23)의 전투 시기상의 차이점이다. 주 23)은 왜군의 기세가 등등한 임진왜란이 발생했던 선조 25년 10월 27일이요, 주 21은 그 이듬 해인 계사년 1월 2일이다. 이때는 명나라 구원병이 참전하고, 우리 조선군 측에서도 어느 정도 전열(戰列)을 정비하여, 왜적에 대한 대응력(對應力)을 높여가던 시기였다. 그리고 주 23)의 뛰어난 전과의 배경을 보다 합리적으로 설명하자면, 우선 창의군이 함창지역 출신 의병들을 주로하였으므로 당교 일대의 지형지물을, 어느 지역 출신 의병들 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야 하겠다. 여기에 더하여 의병지휘자와 병졸들 사이에 동질성(同質性)이 매우 높았다는 사실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당교지역에서의 전투양상은 위의 몇 가지 사례에서도 파악할 수 있겠지만, 대체로 피아간(彼我間)에 야간(夜間) 기습작전(奇襲作戰) 등 게릴라전을 주로 구사하였다. 이에 관한 몇 가지 사례를 더 들어 보기로 하겠다.

○ 당교 주둔 왜적들이 밤의 어두움을 틈타 예천의 유천과 용궁의 천덕원(天德院)을 포위하고, 40여 리를 오가면서 분탕질을 하였다. 그들의 기세는 더욱 깊숙하게 쳐들어 올 것이며, 경상좌도 일대는 지탱하기 어려울 듯 하니 참으로 민망스럽다. 이날 피살된 자는 승병(僧兵)들이 대부분이고, 나머지는 피란 나온 사람들로서 이들도 일백 여 명이 넘는다고 한다.

○ 당교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들이 오래되지 않아 바로 영순(永順) 지방을 공격할 것 같다. 그런 까닭에 이들을 먼저 습격하여 영강(潁江)의 상류지역에서 크게 격파한 뒤, 그들로부터 환도(還刀)와 철환(鐵丸) 그리고 기계(機械) 등을 빼앗아 돌아왔다. 이런 전과를 주쉬(主倅)에게 보고하는 한편 관아(官衙)로부터 군량미 50석을 받았다.

○ 당교 왜적 진영에 붙잡혔다가 돌아온 어떤 여인(女人)이, 문서를 가지고 방면(放免)되어서 왔다. 그 글에 ‘모든 백성들로서 군량미를 운반하여 바치는 자들은 더욱 보호할 것이고, 우리들 명령에 따르지 않는 이들은 모두 체포하여 죽일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위의 사례 가운데 주 25)는 당교에 진을 치고 머무르는 왜적들이, 야간(夜間)을 틈타서 가까이 위치하고 있는 용궁의 천덕원과 유천을 포위한 다음, 주변지역 40여리를 분탕(焚蕩)질 한다는 것이다. 이런 추세로 미루어 보아 경상좌도 각 고을을, 제대로 지탱하여 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매우 걱정스럽다는 것이다. 이러한 왜군들의 야간 공격으로 다수의 승병들과 피란민 1백여명도 함께 죽었다는 내용이다. 주 26)은 산양(山陽) 지방 사족(士族)출신 의병장인 고상증(高尙曾)의 용사실기(龍蛇實記) 가운데 한 부분이다. 이 구절 내용의 요지는 당교 주둔 왜적들이, 바로 동북쪽 가까이 위치한 영순 지방을 공격할 것 같아서, 산양지방 의병등이 먼저 공격하여 왜적들을 영강 상류에서 격파하고, 그들로부터 환도를 비롯한 무기류를 빼앗아 귀환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승전사실을 주쉬(主倅) 즉 고을 수령에게 보고한 뒤 관청으로부터 군량미 오십 석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주 27)은 당교 주둔 왜군들이 우리나라 백성들을 붙잡아 가서, 그들의 전략과 전술에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도 군량미 조달에 어려움이 있었는지, 우리의 선량한 백성들을 상대로 유인책(誘引策)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울러 그들에게 저항하면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잔인함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본 몇가지 사례에서도 당교에서의 전투양상은, 피아간에 대규모적인 정규전 보다는 비정규전인 게릴라전을 위주로 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당교일대가 전략상 등으로 중요하긴 하지만, 피아간에 대규모 병력을 장기간 주둔하기엔 여러 가지 조건이 부적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이 함창 당교를 중심으로 살인, 방화, 약탈 등 악행(惡行)을 자행(恣行)하던 왜적들이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 있었지만, 임란 이듬 해인 계사년에 이르러서는 종전보다 기세가 완화(緩和)되고 있음을 다음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겠다.

대장이 말하기를 ‘당교 왜적들의 분탕(焚蕩)질 하는 참화가 작년 보다는 심하지 않은 것 같다. 이러한 이유는 정병을 뽑아서 우리들이 공격하는 것과, 천병(天兵)들이 수도 경성(京城)을 지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라고 경상좌도 열읍(列邑) 연합 의병대장인 김해는 판단하고 있는 듯 하다. 즉 당교 왜적들이 전년도 보다 횡포가 감소한 배경은, 조선측 군병들이 정예병 중심으로 그들에게 대응하는 한편, 여기에 더하여 원군(援軍)으로 들어온 명나라 군사들이 도성(都城)을 방어하고 있기 때문으로 이해한 것 같다.

그러나 그 뒤에도 당교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들의 횡포는 계속 되었던 것이다. 다만 종전보다 분탕질과 살육의 횟수나 규모가 줄어들었던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하여 당교왜적을 물리치기 위한 노력은 그 뒤에도 계속 되었음을 다음 자료는 밝혀주고 있다.

(3월) 9일 당교에 복병(伏兵)을 설치하는 문제는 궂은 비가 계속 내리고 있으므로, 19일까지 정지하겠다는 사실을 열읍(列邑)에 통보하라고 조치했다.

는 것이다. 이러는 사이에도 당교에 진을 치고 있는 왜적들의 분탕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같은 달인 3월 16일에는 좀 더 멀리 떨어진, 예천땅 유천(柳川)지역에서 분탕질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고찰한 바와 같이 함창 당교는 그것이 위치한 곳의 자연적․인문적 조건의 중요성 때문에, 상주 함창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경상좌도의 열읍과, 우도 지방까지도 참전하여 이를 장악하기 위한 전투를 전개한 것 같은데, 이에 관한 다음의《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검토하여 보기로 하자.

경산(慶山)의 전사한 참의(參議) 장몽기(張夢紀)는 왜변(倭變)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당교(唐橋)의 전투에서 순절(殉節)한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19세기 초인 조선후기 순조(純祖) 때 당시 교육․의례․외교 등의 업무를 관장(管掌)하던 중앙행정 관서인 예조(禮曹)에서, 의정부(議政府) 정승(政丞)들에게 장보(狀報)한 충신증직질(忠臣贈職秩) 중 한 부분이다. 이 내용을 검토하여 본다면, 장몽기에 대한 참의란 관직은 그가 왜적들이 일으킨 변란 때, 의병을 일으켜 당교 전투에서 전사(戰死)한 충의(忠義)와, 기타 의병활동 때문에 증직(贈職)된 것으로 여겨진다. 자세한 내용 설명이 보이지 않아 정확한 사실 판단은 곤란하지만, 어쨌든 그는 왜변 때 경산과 연고가 있던 분으로 의병에 가담했다가, 끝내는 당교 전투에서 전사한 사실은 확실하여 보인다. 당교와 그 인근 지역은 19세기 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왕조를 침탈하기 시작할 무렵에도, 당교와 가까운 함창 태봉 일대는 일본군이 중요시하여 주둔했던 곳이다. 이렇게 본다면 당교와 그 부근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도, 전략상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각광(脚光)받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임진왜란 때 상주 함창 당교전투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았다. 그러나 관찬사료(官撰史料)를 비롯한 관계 자료(資料)가 그렇게 많지 않아서, 당시 의병에 참여한 지휘자들이 남긴 일기를 중심으로 살펴본 셈이다. 그때가 전란시기라 교통과 통신의 불편 때문인지, 현재의 처지에서 볼 때 일기 내용상에 간혹 오류(誤謬)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직접 경험한 체험을 위주로 서술하였기 때문에, 1차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는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고찰된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 정리함으로써 끝을 맺고자 한다.

첫째, 임진왜란과 상주란 항목에서는 상주 고을이, 당시 전국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큰 지방행정구역인 동시에 군사․교통․경제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러므로 왜군들도 부산 동래 지방을 석권한 다음, 북상하는 루트로 동․서․중로를 갈라서 진격했는데, 상주를 경유하는 중로에는 그들의 강력한 제1군인 소서행장이 영도하는 부대가 이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소서행장 즉 고니시유키나가군은 동래를 함락한 다음 상주까지 북상하는데, 여러 고을을 경유했지만 제대로 저항을 받지 않고, 거의 물밀 듯이 올라왔던 것이다. 이는 당시 우리 관군측의 허약함을 그대로 드러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상주 고을에서는 이와는 달리 북천 냇가에서 관군과 백성들이 힘을 합해 저항하였다. 중앙에서 파견된 순변사 이일(李鎰)의 작전 실패와, 중과부적(衆寡不敵) 등으로 비록 참패하긴 했지만, 수많은 왜군과 당시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왜적들과 맞서 싸웠다는 사실 자체는, 다른 고을과 현저히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당교의 중요성이란 항목에서 주장한 내용의 요지는, 함창 당교가 자리한 지역이, 일찍부터 군사․교통〮〮‧ 경제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특성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란이나 기타 국가적으로 큰 분쟁이 영남지방에서 발생할 경우는, 대체로 피아간에 이곳을 선점(先占)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특히 여기는 전략적으로 천혜의 요새지인 문경 조령과 가깝고, 경상좌도로 들어가는 분기점이었다. 그리고 육상과 수로 교통에 유리하며, 인근에 비옥한 평야가 있어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그 가치를 더해 주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상주 읍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당교에서도 부분적인 군대이긴 했지만, 장기간 주둔하면서 인근 지역을 침탈하였다. 침탈 지역과 회수(回数)는 당교쪽이 더욱 많아, 경상도 연합의병진에서도 자주 출동했던 곳이다.

마지막으로, 당교 전투양상을 개관하는 순서이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당교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으므로, 서로 대항 세력간에 이를 장악하려는 의도가 매우 강했다. 따라서 피차간에 충돌은 격화될 수 밖에 없어 대소의 공방전(攻防戰)이 계속되었다. 당교를 장악하고 있는 동안 왜적들은, 주변 여러 지역에 출몰하면서 분탕질을 했으나, 경상좌도 지역에 보다 자주 침탈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당교 왜적들의 분탕을 막기 위해 상주지방 의병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김해(金垓)를 대장으로 하는 경상좌도 각 고을 연합의병들도 몇 차례 출전했던 것이다. 이러한 당교 대왜(對倭) 전투에 있어서, 함창을 중심으로 하는 창의군 의 선봉장이었던, 이축(李軸)의 활약은 보다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사실은 경산과 대구 지방에서 활동한 의병 가담자가, 당교전투에 참전하여 전사한 사실을, 19세기 초인 순조 임금 때 와서, 다시 기리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 시기까지도 당교전투는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당교 전투양상은 정규전 보다는 야간 기습이나 매복 작전 등, 게릴라전과 같은 비정규전을 위주로하여 전개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측은 대체로 무기나 병력수에 있어서 열세였고, 왜군쪽에서도 주력병 보다는 잔류병 위주로 주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피아간에 비정규적인 유격전을 위주로 전투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여하튼 임진왜란시 상주 당교전투는,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전투였지만, 정사(正史)쪽의 자료가 많지 않아 해명(解明)에 한계(限界)를 느낀다.